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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5. 중각보왕삼매염불직지

❸ 제삼(第三) 가류해 (呵謬解)

❸ 제삼(第三) 가류해 (呵謬解)

잘못 이해(理解)한 것을 질책(叱責)하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삼매왕(三昧王)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境界)가 매우 심오(深奧)하여 창졸(倉卒)간에<갑자기> 끝까지 궁구(窮究)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금(古今)의 스님들이 전수(傳受)해 온 것이 서로가 동일(同一)하지 않았는데 천태(天台)지자대사(智者大師)에 이르러 그 학설(學說)을 크게 구비(具備)하였다

자은대사(慈恩大師) 현수대사(賢首大師)께서는 각각(各各) 이에 그 장점(長點)을 인용(引用)하였고 기앙(企仰)의 선종(禪宗)에서도 또한 지극(至極)히 분명(分明)하게 나타냈으나 다만 후학(後學)이 천박(淺薄)하고  고루(固陋)하여 이에 그 지귀(旨歸)를 얻지 못하였을 뿐이다

오히려 마루<당(堂)>에도 오르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입실(入室)을 하겠는가

문(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견해(見解)가 분분(紛紛)하게 되었는데 마침네 선종(禪宗)의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말한 정토처(淨土處)를 가지고 어두운 위치(位置)에서 더듬고 헤아리며 말을 따라 이해(理解)를 내게 되었다


문득 이르되 본래(本來)로 정토(淨土)는 없음이라 반듯이 왕생(往生)을 구(求)할 것은 아니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대사(大師)육조(六祖)께서 다만 설(說)한바가 근기(根機)를 따랐을 뿐 아니라 실(實)로 이에 뜻이 경(經)의 근본지취(根本旨趣)와 부합(符合)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이에 다만 정토(淨土)에 반듯이 왕생(往生)함을 필요(必要)로 하지 않는다한 그 말을 따른다 해도 또한 정토(淨土)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정토(淨土)가 이미 있음에 왕생(往生)하는 이치(理致)는 소연(昭然)한 것이니

무엇 때문에  초기(初機)에는 손가락을 집착(執着)하여 달이라 하는가

이에 대사(大師)의 말씀하신 바에 의지(依支)하여 미혹(迷惑)한 사람은 염불(念佛)하여 이에 저곳에 왕생(往生)하기를 구(求)함이나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이에 그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함이라


또 말하되 동방(東方)<남섬부주(南贍部洲)사바세계(裟婆世界)>의 사람이라도

다만 마음이 청정(淸淨)함에 곧 죄(罪)가 없음이나 비록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의 사람이라도 마음이 부정(不淨)함에 또한 허물과 과실(過失)이 있게 된다 동방(東方)의 사람이 죄(罪)를 지음에 염불(念佛)로써 서방(西方)에 왕생(往生)함을 구(求)함이나 서방(西方)의 사람이 죄(罪)를 지음에 염불(念佛)하여 어느 국토(國土)에 왕생(往生)함을 구(求)하겠는가


범부(凡夫)는 우둔(愚鈍)하여 깨닫지 못함에 몸 가운데 정토(淨土)를 알지 못함이라 동(東)쪽을 원(願)하고 서(西)쪽을 원(願)하나 깨달은 사람은 있는 처소(處所)마다 매한가지라고 한 것과 또한 정토(淨土)의 멀고 가까운 것은 다만 중생(衆生)의 선근(善根)이 같지 않음을 따름이니 부처님의 국토(國土)에 어찌하여 원근(遠近)의 상이(相異)함이 있음을 말함이겠는가

라고 하신 것을 의지(依支)한다면 이를 일러 이는 반듯이 왕생(往生)을 구(求)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

 

그리하여 중생(衆生)은 영원(永遠)히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단제(斷除)하고 갖추어 십선(十善)과 팔정도(八正道)를 수행(修行) 하길 요(要)함이라

또 하여금 오묘(奧妙)한 심지(心地)인 성품(性品)의 왕(王)이 이에 이 몸을 여이지 않았음을 알게 함이라

다만 미혹(迷惑)과 깨달음의 상이(相異)함이 있을 뿐이라 이에 개오(開悟)한즉 능(能)이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행(行)함이니 평직(平直)등(等)의 착함으로 능(能)이 청정(淸淨)함이라 곧 이것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이라 이에 미혹(迷惑)한즉 곧 인(人)과 아(我)를<타인(他人)남과 나 자신(自身)>분별(分別)함이라


사심(邪心)의 허망(虛妄)함으로 진로(塵勞)가 상이(相異)함이니 곧이는 수미산(須彌山)과 대해수(大海水)의 현격(懸隔)한 경계(境界)이며 용(龍)귀(鬼) 지옥(地獄)의 당(黨)이라 이제 대사(大師)의 지의(旨意)를 자세(仔細)히 함이라 

다만 능(能)이 마음을 청정(淸淨)히 함에 곧 장소(場所)를 따라 모두 깨끗함이라 실(實)로 더불어 유마회상(維摩會上)에서 부처님이 발로 땅을 밟자 예토(穢土)가 변(變)하여 정토(淨土)가 됨이라 이에 그 모든 대중(大衆)각각(各各)이 스스로 보배 연화(蓮華)에 앉자있음을 봄이라


뜻에 실(實)로 둘이 없음이라 곧 경(經)에서 말하는바 이에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 곧 부처님의 국토(國土)가 깨끗함이라 이에 그 말씀이 분명(分明)함이라 대사(大師)의 변론(辯論)이 어찌 가(可)이 불심(佛心)에 칭합(稱合)하고 깊이 경(經)의 지취(旨趣)에 부합(符合)함이 아니겠는가

다만 성인(聖人)의 설법(說法)은 차전(遮詮)과 표전(表詮)으로 동일(同一)하지 않음이라 그 지위(地位)에 있어 아직 저 이것에 도달(到達)하지 못한 사람은

가(可)이 저 차전(遮詮)을 인용(引用)하여 그리하여 스스로를 기만(欺滿) 하여서는 아니됨이라

하물며 일대장교(一大藏敎)에서 혹(或) 차전(遮詮)으로 설(說)하여 일체(一切) 모두를 부정(否定)하였으니 어찌 왕생(往生)을 구(求)하는 것 뿐이겠는가


혹(或) 표전(表詮)으로 설(說)하여 일체(一切)을 모두 긍정(肯定)하였다 반듯이 응당(應當)히 왕생(往生)을 구(求)해야 한다 하기도 하였음이라

이 두 가지 법(法)을 설(說)함은 함께 한가지로 부처님의 금구(金口)에서 출(出)함이라 뜻에는 상이(相異)함이 있음이 없음이라

어찌 가(可)이 차전(遮詮)의 말씀만을 편협(偏狹)하게 고집(固執)하여 몰록 표전(表詮)에서 왕생(往生)을 구(求)하는 뜻을 버림이겠는가

이에 과연(果然) 곧바로 말하기를 저 국토(國土)에 있어서 반듯이 예토(穢土)를 버리고 정토(淨土)를 취(取)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하여 다만 이에 그 마음을 청정(淸淨)히 하라고 하는 것은 곧 대사(大師)가 또한 응당(應當)히 사람들에게 다만 마음을 깨끗이 하라 말하면 그뿐이지 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악업(惡業)을 단제(斷除)하고 그리하여 선행(善行)을 수행(修行)하게 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이제 이미 사람으로 하여금 악(惡)을 단제(斷除)하고 착함을 행(行)하게 하였다면 곧 반듯이 저 국토(國土)에 있어서 예토(穢土)를 버리고 정토(淨土)를 취(取)하게하는 그 뜻이 더욱 분명(分明)함이라


이러한 까닭으로 부처님이 차전(遮詮)으로 말씀하는 때가 바로 갖추어 저 표전(表詮)을 나타내어 하여금 왕생(往生)을 구(求)하게 하고자함이라

표전(表詮)으로 말하는 때가 바로 갖추어 이것은 저 차전(遮詮)에 의지(依支)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조계(曹溪)스님이<육조대사(六祖大師)혜능>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먼저 깨끗함을 인(因)하여 곧 과보(果報)의 경계(境界)스스로 청정(淸淨)해지도록하고 하여금 왕생(往生)을 구(求)하지 않게 하신 것은 차전(遮詮)이라

여산(廬山)의 혜원조사(慧遠祖師)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보경(寶鏡)이 청정(淸淨)함을 인(因)하여 마음이 스스로 청정(淸淨)해진다 하여 반듯이 왕생(往生)을 구(求)하도록 가르친 것은 표전(表詮)이다


그러나 부처님과 조사(祖師)의 설법(說法)은 인과(因果)가 두 가지가 아니며 전후(前後)가 아니므로 두 가지 의미(意味)가 일찍이 분리(分離)되지 않았음이라 비록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은 제각기 같지 않음이나 법체(法體)의 근본(根本)은 하나 인 것이라 그런데 어찌하여 요즈음 사람들은 차전(遮詮)을 들으면 문득 옳다고 하고 표전(表詮)의 말은 잘못이라 말하여 스스로 퇴장(退場)을 발생(發生)하는지 진실(眞實)로 민망(憫惘)하고 상심(傷心)할만한 일이라 하겠다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 차전(遮詮)을 지어 --반듯이 왕생(往生)을 구(求)할 필요(必要)가 없다고 한 것은---바로 이것이 표전(表詮)을 나타내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함을 구(求)하게 한 것임을 깨달아 알지 못한 까닭이라

또한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의 일대성교(一代聖敎)인 제부(諸部)의 역담(歷談)은 일미(一味)가 아닌 것이 없음이나 나타난 설법(說法)가운데에는 단정(斷定)코 현설(顯說)을 찬탄(讚嘆)한 것이 다분(多分)하며 또한 밀설(密說)의 뜻 속에서는 반듯이 밀설(密說)만을 특별(特別)하게 칭찬(稱讚)하여 각 종(宗)의 당부(當部)에서는 구별(區別)되는 담론(談論)을 안치(安置)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다른 담론(談論)을 무시(無視)하여 이것만을 오묘(奧妙)하다 하였겠는가


대체(大體)로 근기(根機)에 감응(感應)하여 많은 대중(大衆)의 모임이 수지(受持)하고 한결같은 뜻을 성취(成就)하여 머뭇거려서 지체(遲滯)함이 없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지금 상법(像法)과 말법(末法)가운데에 종승(宗乘)을 부지(扶持)하고 교종(敎宗)을 수립(竪立)하려면 어찌 억양(抑揚)의 시기(時期)가 없음이겠는가 육조대사(六祖大師)께서는 이미 일행(一行)삼매(三昧)를 홍통(弘通)하시고자 하심으로 이치가 모든 교승(敎乘)을 두절(杜絶)한 것이 마땅하며 여산(廬山)혜원조사(慧遠祖師)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특별(特別)하게 천양(闡揚)<열어서 띄워 드날림>하여 그들로 하여금 바로 절단(絶斷)하여 생사(生死)를 횡(橫)으로 초월(超越)하게 하고자 함으로 군기(群機)를 정당(正當)하고 원만(圓滿)하게 섭수(攝受)하게 한 것이라


후학(後學)이 어찌하여 가(可)이 망령(妄靈)되게 두 가지 견해(見解)를 생(生)하는가 마땅하게 자세(仔細)히 이를 성찰(省察)해야 함이라 또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의 사람으로 마음이 청정(淸淨)함에 죄(罪)가 없음이나 부정(不淨)함에 허물이 있음이라 말하는 것은 바로 동방(東方)의<사바세계(裟婆世界)남섬부주(南贍部洲)> 악(惡)한 경계(境界)가 거칠고 완강(頑强)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 이미 멸도(滅度)하시니 능(能)이 마음을 청정(淸淨)히 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라 세속(世俗) 가(家)<집>에 있음에 화댁(火宅)이 만(萬)가지로 찌는듯하여 비록 수행(修行)을 하나 또한 잃음과 같음이라


비유(譬喩)하건데 작은 돌이라도 물에 들어감에 곧 가라 앉음과 같음이라

이러한 까닭으로 반듯이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함을 구(求)해야 한다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성중(聖衆) 현재(現在)함이라경계(境界)과 수승(殊勝)하고 행(行)함이 심오(深奧)함이라 달아나 도망(逃亡)했던  자식(子息)이 돌아옴에 부처님이 친(親)히 손수 가르치시고 이익(利益)되게 하시는 것이 마치 출가(出家)하여 사찰(寺刹)에 있음에 선연(善緣)<좋은 반연(攀緣)이> 구족(具足)하여 결정(決定)코 불퇴전(不退轉)하는 까닭과 같음이라


저 국토(國土)에 왕생(往生)함에 마음이 청정(淸淨)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 저 큰 돌이라도 배위에 싣고 물에 들어감에 가라앉지 연고(緣故)와 같음이라

또한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이 이치(理致)의 근본(根本)은 하나의 체(體)이나 저 아미타(阿彌陀)부처님의 국토(國土)는 다만 경계(境界)가 수승(殊勝)할뿐만 아니라 그 아미타(阿彌陀)박가범(薄伽梵)부처님께서 현재(現在) 능(能)이 허물과 죄(罪)를 제거(除去)하시므로 마음이 반듯이 청정(淸淨)하게 되어

성(聖)스러운 경지(境地)에 가이 오르게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반듯이 사바세계(裟婆世界)보다 원대(遠大)하고 수승(殊勝)한 곳 안락국(安樂國)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에 왕생(往生)하기를 추구(追求)해야 한다


가령 근기(根機)의 수승(殊勝)함에 조계회중(曹溪會中)의 자(者)와 같음에는 오히려 능(能)히 생사(生死)의 괴로운 큰 바다에 들어가서 고통(苦痛)으로 괴로워하는 소리를 찾아 괴로움을 구제(救濟)하며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하여 선도(善導)하리니 무엇 때문에 반듯이 왕생(往生)하기를 구(求)하겠는가

그 혹(或)시 도력(道力)이 충분(充分)하지 못하면서 선각(先覺)의 행(行)을 허망(虛妄)하게 본받는다면 자신(自身)도 왕생(往生)을 구(求)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또한 정토(淨土)왕생(往生)을 구(求)하지 못하게 교수(敎授)하여 이끔이니 비유(譬喩)하자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救濟)하는 것과 같아서 주선(舟船)이 없으면 저와 내가 함께 익사(溺死)함이라 어찌해야 올바른 것이 되겠는가


또 우리 큰 대사(大師)게서는 선종(禪宗)을 홍통(弘通)하신 육조(六祖)이시라 말씀하신바가 어찌 소실(少室)의 참선(參禪)을 천양(闡揚)하시지 아니하겠는가마는 이에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평직(平直)하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계율(戒律)을 수지(受持)하며 행(行)함이 정직(正直)하다면 어찌하여 선정(禪定)을 수행(修行)함이겠는가 만약 이에 이 말씀을 의탁(依託)하여 의지(依支)한다면 계율(戒律)을 지니고 선정(禪定)을 수행(修行)할 필요(必要)가 없을 것이다 그러함이나 마음이 평직(平直)하여 평등(平等)하다면 내가 외물(外物)을 기다리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지 못한 것이라


바깥의 외물(外物)과 내가 이미 그러하였다면 어찌하여 다른 생명(生命)을 살해(殺害)하여 자신(自身)의 이익(利益)을 기르며 남의 물건(物件)을 절취(截取)하여 자신(自身)을 이(利)롭게하며 남녀(男女)의 모양(模樣)을 분류(分類)하여 비행(非行)을 저지르며 말은 이치(理致)에 정당(正當)하게 진실(眞實)하지 아니하게 하고 다시 음주(飮酒)함을 취(取)하여 취(醉)했을 때와 깨어 났을 때가 상이(相異)하게 함이겠는가

마음이 평직(平直)하여 이러한 계(戒)를 범(犯)하는 행위(行爲)의 모양(模樣)이 없다면 일체(一切)의 모든 계율(戒律)이 그 가운데 존재(存在)하여 있으리라 어떻게 완전한 계율(戒律)을 수지(受持)하여 지니지 아니하는 것과 겁탈(劫奪)하고 살인(殺人)하는 자(者)를 다함께 마음이 평등(平等)하다 말씀하였겠는가 이러한 연고(緣故)로 알지라 이 마음이 평직(平直)하다면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계율(戒律)을 수지(受持)하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대계(大戒)를 나타낸 것이다


선(禪)이란 글자는 범어(梵語)이다

한역(漢譯)하면 정려(靜慮) 혹은 일행삼매(一行三昧)라 변역(變易)된다 어떻게 행(行)함이 정직(正直)한 사람이 그의 심려(心慮)가 고요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정(定)에 안주(安住)함이 바르지 아니하며 그 행(行)이 한결 같이 아니하는 자(者)가 있겠는가 이로써 무엇 때문에 선정(禪定)을 수행(修行)하겠는가 하신 말씀은 바로 심오(深奧)한 선(禪)을 현현(顯現)한것 임을 깨달아 알 것이라 대사(大師)의 행(行)은 천인(天人)의 사표(師表)를 뛰어남이라 도(道)는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사이에 융성(隆盛)하시였다


다만 두려운 것은 후학(後學)이 법에 집착(執着)하고 자취(自趣)에 막혀 저 계체(戒體)가운데에서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계율(戒律)을 수지(受持)하겠는가 하는 말을 하며 저 선경(禪境)가운데에서 무엇 때문에 선정(禪定)을 수행(修行)하겠는가 하는 말을 할까 하는 것이다

또한 반듯이 정토(淨土)에 왕생(往生)을 구(求)해야 할 법(法)가운데 반듯이 왕생(往生)을 구(求)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도 여기에 비례(比例)하면 바로 깨달아 알 것이다

후학(後學)은 오히려 더욱더 자취(自趣)에 막혀서 반듯이 왕생(往生)을 구(求)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니 어리석음이 매우 심(深)하다하겠다


대체로 육조(六祖)대사(大師)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대(反對)로 권(勸)한 것이며 모든 조사(祖師)께서 담론(談論)하신 것은 순차적(順次的)으로 찬탄(讚嘆)하신 것이다 순차적(順次的)으로 하지 않는다면 진수(進修)의 길을 계시(啓示)할 수가 없고<열어서 가르쳐 보일수가 없고> 반대(反對)로 하지 않는다면 원돈(圓頓)의 수행(修行)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反對)로 권(勸)하고 순차적(順次的)으로 찬탄(讚嘆)한 것은 모두 그때 그때의 근기(根機)에 감응(感應)한 것으로 실제(實際)의 법(法)이없다


가령(假令) 부처님를 만나면 부처님을 죽인다고 말하나 어찌하여 부처님을 정말 참으로 살해(殺害)하겠는가 만일 부처님를 살해(殺害)한다는 말이 진실(眞實)이라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칼을 짚은 것도 또한 부처님를 참으로 살해(殺害)한 것이 겠는가

진실(眞實)로 고인(故人)의 말만 따르고 고인(故人)의 마음을 구(求)하지 않으면서 실(實)로 반듯이 왕생(往生)을 구(求)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른바 제호(醍醐) 의 상미(上味)는 세상(世上)에서 진기(珍奇)하게 여기는 것이다 한 것이 이러한 사람을 만나면 번디쳐 반대(反對)로 독약(毒藥)을 이루고 말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대사(大師)께서 저 삼제(三諦)의 원묘(圓妙)한 이치(理致)를 칭찬(稱讚)하시며 저 생(生)이 있는 가운데에서 무생(無生)을 말씀하셨고 증득(證得)이 없는 가운데에서 수행(修行)하여 증득(證得)함을 말씀하시였다

이변(二邊)을 얻어 성취(成就)하지 못하면 중도(中道)도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교승(敎乘)의 원돈법문(圓頓法門)을 합(合)하여 탄연(坦然)명백(明白)하기가 어두운 거리에 일월(日月)을 높이 매달아 건 것 처럼 비추어줌의 혜택(惠澤)을 입지 아니함이 없음이라 그러한데도 선종(禪宗)에서는 염불삼매(念佛三昧)와 정토(淨土)의 지취(旨趣)는 극진(極盡)한 것이 못된다고 말하는 것이 옮음이겠는가


대저 하서(河西)의 도작공(도綽公)<도작대사>장안(長安)의 선도대사(善導大師) 신원선사(信源禪師) 지각대사(智覺大師) 자각대사(慈覺大師)등(等)이 어찌 그 뒤를 계승(繼承)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모두 능(能)이 멀리서 유음(遺音)을 품(禀)받아 이 도(道)를 힘써 홍통(弘通)한 분들이라

도진대사(道珍大師) 회옥대사(懷玉大師)는 행업(行業)으로 드러났고 원조(圓照)의 제사(諸師)는 이에 그 영험(靈驗)이 더욱 선명(鮮明)하게 나타났다


하물며 요즈음 선림(禪林)에서는 병(病)이 든 스님이 염송(念誦)하며 다비(茶毗)에 이르러서는 십념(十念)으로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칭양(稱揚)하여 그가 왕생(往生)하도록 한일들이 전장(典章)에 실려 있어 그 풍습(風習)이 오히려 지금도 존재(存在)하거니 다시무엇에 현혹(眩惑)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