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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자비관(2)

5. 자비의 심리학


빠알리 주석서들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사람이 만 중생을 사랑하려면,

1) 만 중생을 억압하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억압하기를 피한다.

2) 만 중생에게 공격적이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공격적이기를 피한다.

3) 만 중생을 학대하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학대행위를 피한다.

4)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파괴적이기를 피한다.

5) 만 중생을 괴롭히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괴롭히기를 피한다.

6) "만 중생이 화목하고 서로 적대하지 않기를!" 하고 바라는 염을 투사해 보낸다.

7) "만 중생이 행복하여 불행하지 않기를!" 하고 바라는 염을 투사해 보낸다.

8) "만 중생이 평안을 누리고 번민하지 않기를!" 하고 바라는 염을 투사해 보낸다.


이처럼 여덟 가지 방식으로 만중생을 사랑한다. 따라서 보편적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성질(의 사랑)을 (속에) 품는 것이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이다. 또 이러한 마음은 모든 악의 어린 생각에서 `자유'로우므로 이들 사랑과 마음과 자유가 합친 것을 두고 `마음의 자유[心解脫]로 이끄는 보편적 사랑[慈心解脫]'이라 정의하는 것이다.



위에 든 주석서의 문장으로 미루어 자비는 여러 면으로 긍정적 덕목을 적극 실행하여 그와 대칭되는 부정적 성품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만중생에 대해 억압하지 않는 길을 적극 실천할 때에만 비로소 남을 억압하려는 성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격적이고 남을 학대하고 파괴적이고 괴롭히는 부정적 성품을 벗어나려면 그 반대되는 자질들, 즉 공격적이지 않고 학대하지 않고 파괴적이지 않고 괴롭히지 않는 자세를 행동, 말, 생각을 통해 실천하는 길뿐이다. 이와 같이 긍정적으로 행하여 삶의 방식을 반듯한 원칙 위에 고이 세운 다음, 그러한 삶을 기반으로 하여 `자비관법'이라는 특수 명상기법을 닦아 마음을 더욱 더 계발해나가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비관이 강력하게 일으켜내는 승화된 사랑의 염 또한 끝 모르게 자라나서 우리의 식(識) 그 자체를 무한하고 보편하게 만들어준다.



만중생이 화목하고 적대하지 않도록, 행복하고 불행하지 않도록, 안녕을 누리고 고난을 겪지 않기를 기원하는 그 마음가짐은 이미 숭고하고 광대무변한 경지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의 자유 또한 완벽하기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마음을 자유로 이끄는 보편적 사랑'이란 표현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비와 반대되는 다섯 가지 성향들의 의미를 밝히자면, `억압(piilana)'은 남을 압박하거나 손실을 입히려드는 욕망이며, `공격적(upaghaata)'이란 남을 다치거나 상처를 주려는 성향이고, `학대(santapa)'는 고통을 주려는 가학적 성향과 동의어로 남을 아프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괴(pariyaadaana)'는 끝장내거나 해치워버리려는 것으로 극단주의자와 성상파괴자들의 특징이고, `괴롭힘(vihesam)'은 부담을 지우거나 난처하게 만들거나 근심과 긴장을 안겨주는 짓을 말한다. 이들 성향은 모두 반감과 악의에 뿌리박고 있어서 행동양식으로서나 심리상태 혹은 정신적인 자세 모든 면에서 자비와는 대조를 이룬다.



부정적인 성향을 일일이 그와 상반되는 긍정적인 도리로 대체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삶에 접근하는 자세가 매우 발전, 성숙했음을 의미한다. 남을 억압하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파괴하지 않고, 괴롭히지 않는 채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지금처럼 인간관계가 고도의 긴장과 비참상을 빚고 있는 세상에서는 특히 우아하고 아름답고 사랑에 넘치는 행동지표가 아니 될 수 없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노여움, 원한, 공격성 같은 오염물뿐만 아니라 남의 마음속 오염물까지도 정화시키는 용해제이다. 자비는 우정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적대적이던 사람들마저 친구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논(論)은 또 자비를 논하여, 향상을 돕는 것이 그 `특징'이며, 고통보다 안녕을 안겨주는 것이 그 본래의 `작용'이며 골칫거리를 풀어내는 힘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며', 사물이나 중생들의 좋은 면만 보고 나쁜 면은 보려들지 않는 성향이 그 `근인(近因)'이며 악의를 진정시킬 때 `성공'하고, 세속적 애정으로 전락할 때 `실패'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분석해볼 때 사람들에게서 좋은 면만을 보려하고 남들이 잘되는 쪽을 더 좋아하고 따라서 비공격적이 되어 (어떤 골칫거리나 상처도 제거해주며), 또 적극적으로 복리를 증진시켜 줄 때에만 자비가 용해제 구실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자비의 최종목적은 초세간적 통찰력을 얻는 것이며 설혹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경우에도, 금생에는 내면의 평화와 건강한 마음상태를 누릴 수 있고 내생에도 최소한 저 거룩한 범천의 세계에 반드시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도 자비경에서 다음과 같이 보증하고 계신다.


그릇된 생각에 더이상 매이지 않고,

계행과 구경의 지견을 갖추었으며,

모든 감관적 욕망을 이겨냈기에

그는 다시 모태에 들지 않으리.


사랑은 감정 중에서도 가장 해로운 감정인 악의를 막아준다. 그러기에 "벗들이여, 보편적 사랑이 이룩해낸 마음의 자유[慈心解脫], 그것은 바로 악의에서의 완전한 해방인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장부(長部)> Ⅲ, 248쪽 ―


우리가 자비공부를 닦을 때 특히 경계해야 할 감정들이 있다. 자비와 유사하기 때문에 자칫 자비공부를 망치기 쉬운 감정들과 또 자비와는 전연 비슷한 점이라곤 없기 때문에 자비공부를 크게 방해하는 감정들이 그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들을 `두 적­가까운 적과 먼 적'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탐욕, 색욕, 속된 애정, 관능탐닉은 모두 가까운 적이니 그 성향이 자비심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호색하는 사람들도 상대의 좋은 면이나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에 거기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런 감정들이 자비의 탈을 쓰고 수행자를 속이지 못하도록, 진정한 자비심을 가까운 적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악의와 분노, 증오는 자비심과는 닮지 않은 감정들이므로 먼 적이 되는 셈이다. 먼 적은 쉽사리 분간할 수 있으므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한층 높은 힘인 사랑을 쏟아내어 이 적을 정복해버려야 할 것이다. 문제는 가까운 적들이다. 이들 앞에선 우리가 자칫 자기 기만을 일삼기 쉽기 때문이다. 이 자기 기만이야말로 우리가 개인으로서 범할 수 있는 가장 고약한 것으로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논(論)은 다시 논하기를, 자비는 행동으로 옮기고 싶을 정도로 열의가 왕성해야만 `시작'될 수 있고, 애써 시작됐다 하더라도 지속이 되려면, 다섯 가지 장애[五蓋] 즉, 감각적 욕망, 악의, 나태와 혼침, 들뜸과 근심, 의심을 진압해내야만 하며, 선(禪, jhaana)에 도달함으로써 `극치를 이룬다'고 한다.


6. 자 비 관


자비수행, 즉 보편적 사랑에 대한 명상을 닦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여기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세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누구든 자비수행에 착수해보려는 열의가 있는 사람이면, 공부를 지어나가는 방법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도록, 경과 주석서에 입각하여, 간단명료하게 직설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자비수행의 이론과 실천에 관해 좀더 충분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는 <청정도론> 9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자비관 수행방법(1)


선방이나 조용한 방, 공원, 기타 어디든지 혼자서 고요히 있을 수 있는 장소에서 편안한 자세로 정좌한다. 눈을 감고 `자비'를 몇 번 되풀이하여 발음하면서 마음속에 그 뜻을 떠올린다 ― 증오·원한·악감·성마름·자만·건방과 반대이며, 남들의 행복과 안녕을 증진시키는 선의, 동정, 친절 등과 같은 심원한 감정인 사랑을.



그런 다음 행복감으로 빛나는 자기 자신의 환한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라. 거울을 볼 때마다 행복한 기분을 지어보고, 명상할 동안에도 줄곧 그런 기분에 잠겨보라. 행복감에 잠긴 사람은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을 품을 수가 없다. 행복한 기분에 잠긴 자기 모습을 눈앞에 그린 다음 이제 "내가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지이다. 내가 행복하게 살아지이다." 하는 생각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라. 이처럼 긍정적인 사랑의 염력으로 스스로를 가득 채우면 그대는 마침내 물이 가득한 그릇과 같이 될 것이며 이제 그 내용물을 사방으로 넘쳐보낼 준비가 된 것이다.



이제 그대는 그대의 명상을 지도해주는 스승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린다. 살아계실 경우다. 만일 스승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생존해 계신 다른 스승이나 존경하는 어른을 떠올린다. 행복한 기분의 그 분을 그려보며 위에서와 똑같은 생각을 투사(投射)한다.

"스승께서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시기를! 그분께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그런 다음, 그 밖에 생존해 계신 분으로 존경할만한 분들, 스님들, 스승들, 부모 및 웃어른들을 떠올리고 그들 각각에게 전술했던 식으로,



"그분들이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지이다. 그분들이 행복하게 사시기를!" 하고 자비의 염을 열심히 펼쳐보낸다. 이때 눈앞에 떠올린 모습은 선명해야 하며 명의 방사(放射)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영상화(映像化)를 서두르거나 기원을 형식적 또는 기계적으로 하고 있으면 그 공부는 소득이 없을 것이다. 자비를 행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비로운 의지의 힘을 적극적으로 투사하는 것은 단순히 자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과는 전연 별개의 것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만을 영상화시키고 죽은 사람은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 이유는 죽은 사람은 이미 형태를 바꾸었기에 자비투사의 초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비관의 대상은 항상 살아있는 존재라야 하며 그 대상이 살아있지 않으면 염력은 효력을 잃고 만다. 전술한 대로 자신, 명상 스승 그리고 다른 존경하는 사람의 순서로 사랑의 염을 방사한 다음, 이제는 자신의 가족부터 시작하여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정다운 사람들을 눈앞에 그려나가면서 자비의 광선을 가득히 비추어 그들을 감싼다. 자비는 자기 집안에서부터 시작된다. 자기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가족에게 자비를 펼칠 때는 자신의 배우자와 같이 너무 정이 깊은 사람은 친한 사람들 중 제일 뒤로 돌리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그 이유는 부부간의 친밀함에는 자비를 때묻게 하는 속된 애정이란 요소를 개입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참된 정신적 사랑은 누구에 대해서나 똑같아야 한다. 또 가족이나 친척 중에 어떤 사람과 일시적인 오해나 다툼이 있었다면 그 불쾌한 사건을 회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그 사람 역시 뒤에 가서 영상화시키는 게 좋다.



다음은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무관한 사람들 차례인데, 이웃 사람들, 직장 동료들, 그저 면식이 있을 정도의 사람들 등등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능한껏 일일이 사랑의 염을 방사한 후에 비로소 자기가 싫어하거나 적대감 내지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영상화시키며, 일시적 오해가 있었던 사람들도 이때 떠올린다. 싫은 사람들을 영상화할 때에는 각 대상에 대해 "나는 그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다. 그도 나에게 적대감이 없기를, 그가 행복하기를!" 하고 마음속으로 반복해야 한다.



이처럼 여러 층의 대상들을 눈앞에 떠올려나가는 동안 그는 좋고 싫고 애착하고 증오하는 데에 기인한 장벽들을 무너뜨리게 된다. 만일 적에 대해서도 아무런 악의를 품지 않고 가장 친한 친구에 대해 느끼는 정도로 선의를 가지고 대할 수 있게 되었다면 자비는 평형의 극에 달할 것이며, 그러한 자비야말로 한없이 넓어져나가는 나선운동처럼 마음을 위로 또 밖으로 고양시켜서 일체를 포용하도록 만든다.



여기에 `영상화'라 함은 어떤 대상, 즉 어떤 사람, 어떤 특정지역 또는 방향, 어떤 범주의 중생을 `마음에 떠올리거나 그려보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사랑의 염을 투사하거나 펼쳐보내고 있는 상대 인물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대가 아버지 얼굴을 상상하는데 매우 행복하고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을 마음속에 그리고는 그 그려진 심상(心像)을 향해 `그분이 행복하시기를! 그분이 병고나 근심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건강을 누리시기를!' 하고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생각을 투사해보내는 것이다. 이때 되뇌는 내용은 그분의 안녕을 증진시키는 것이면 어떤 것이라도 무방하다.



또 `방사(放射)'라 함은 전술했듯이 어떤 사람들에게 마음을 향하고는 그들의 안녕을 조장(助長)하는 어떤 생각을 투사해보낸다는 뜻이다. 자비의 염은 강력한 염력이다. 그것은 의지(意志)한 바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 왜냐햐면 안녕을 빈다는 것은 `의지행위'이며 따라서 창조활동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분야에 걸쳐 인간이 창조한 것들은 그것이 도시건설이건, 수력발전소건, 달착륙 우주선이건, 살상용 무기이건, 아니면 예술적·문학적 걸작품이건 간에 모두 사람이 발휘한 의지의 소산인 것이다. 자비염의 방사 또한 의지한 바를 현실로 이끌어내는 바로 그 의지력의 전개현상인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비의 염력을 써서 질병을 치유하거나 불행을 방지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이 염력을 일으킬 때는 매우 특수하고 숙달된 방식으로 소정의 수순을 밟을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쓰고 있는 자비 방사의 언구는 고대의  무애해도 에서 비롯하여 전승되어 오는 것이다.



"그들이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지이다(averaa hontu, abyaapajjhaa hontu, anighaa hontu, sukkhii attaanam pariharantu)".



이 용어들에 대한 주석서의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적의에서 벗어나다, 적의로부터 자유롭다(avera)'란 말은 스스로 일으키거나 남이 도발한 적의, 스스로 일으켰지만 그 원인은 남의 탓인 적의, 남이 도발했지만 그 원인은 자기나 제삼자가 제공한 적의 등 일체의 적의가 부재한 것을 뜻한다. 자기 자신을 향해 느끼는 분노는 자기 연민이나 후회, 죄어드는 것 같은 죄책감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분노는 남들과의 상호작용이 그 전제조건일 수 있다. 분노가 증오와 결합하면 적의가 된다.



그 다음 `고통에서 벗어난다(abyaapajjhaa)'는 말은 아픔을 겪지 않는 것, 신체적 괴로움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번민에서 벗어난다(anighaa)'는 말은 적의나 신체적 고통에 흔히 따라오는 정신적 고통이나 비통 또는 근심 따위가 없음을 뜻한다. 사람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 다시 말해서 느긋함과 유쾌함을 누리며 처신한다는 것은 적의와 고통, 번민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들은 모두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순서대로'라는 말은 대상을 하나하나 떠올려감에 있어 저항이 가장 적은 쪽부터 점진적으로 범위를 넓혀나가면서 마음 그 자체로 넓혀나가는 것을 뜻한다.  청정도론 은 특히 이 순서를 강조하고 있다. 아짜리아 붓다고샤에 의하면 자비에 대한 명상은 자신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 그 다음엔 친근한 사람, 그저 그런 사람, 적대적인 사람의 순서로 자비관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순서로 자비심을 방사함에 따라 마음은 존경하는 사람, 친근한 사람, 무관한 사람, 적대적인 사람들과 자신 사이의 모든 장애를 허물게 되며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자비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청정도론 은 장애를 허무는데 대해 매우 적절한 비유를 들고 있다.


"어느 곳에 존경하는 사람, 친근한 사람, 중립적인 사람, 적대적인 혹은 사악한 사람과 함께 앉아있는 어떤 명상자에게 강도들이 와서 `친구여,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인간 제물로 꼭 필요하오.'라고 요구해왔다고 하자. 이때 명상자가 이 사람을 데려가라 할까, 저 사람을 데려가라 할까 따위로 생각한다면 그는 벽을 허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구도 데려가면 안된다. 나를 데려가라 해야지' 해도 이 또한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짓이므로 아직 장애를 허물지 못한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안녕 역시 자비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누구도 도적의 손에 넘겨줄 필요가 없다고 보고 도적을 포함한 모두에게 한결같이 사랑의 정신을 방사한다면, 그때 그는 장애를 허문 것이다."


자비관 수행법(2)


자비관 수행의 첫째 방법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점점 거리가 먼 사람들을 향해 자비심을 방사해나가는 특정 개인 상대의 방식이었다. 여기 둘째 방법은 빠알리어 `mettaa-cetovimutti(보편적 사랑을 통한 마음의 해탈)'이란 말 그대로 진실로 일체를 포용하는 마음이 되도록, 사사로운 관계를 넘어서 자비를 방사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해방되지 못한 마음은 자기중심주의와 탐욕, 증오, 미혹, 질투와 비천함의 감옥에 갇혀 있다. 사람이 이 따위의 마음을 더럽히고 옹졸하게 하는 정신적 요소들에 속박당하고 있는 한 그 마음은 내내 차꼬 채워진 채 편협함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자비는 이 멍에들을 깨뜨림으로써 마음을 해방시키며, 일단 해방되면 마음은 자연히 무한무량하게 자라난다. `대지가 다하는' 법이 없듯이 사랑도 다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수행자가 먼저 선택된 인물들을 향해 자비를 방사하기를 마치어, 존경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친구, 무관한 사람, 적대적인 사람 등 그 모든 사람들과 자기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고 나면 이제 그는 주변 인물들을 떠나 다중을 향해 자비를 방사해나가는 `일대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망망대해를 헤쳐나가는 원양선이 뱃길을 잃지 않고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가듯이 수행자도 이때 길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법에 따르는 것이 좋다.



먼저 그대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고 상상하라. 그리고는 그들 모두를 그대 마음속에 포옹하고는 다음처럼 자비심을 방사한다.



"이 집에 사는 모든 이들이 적의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지이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집을 영상화(映像化)하고 다음에는 옆집과 그 식구들을 영상화한다. 이렇게 한집 한집 대상으로 삼아 마침내 그 거리의 모든 집들이 대자비로 감싸일 때가지 계속한다. 다음에는 그 옆 거리, 그 다음 거리의 순으로 온 이웃과 동네를 덮어나간다. 그런 다음에는 방향을 따라 점점 넓혀나가면서 분명하게 영상화시키고는 자비의 광선을 풍성하게 펼친다. 이렇게 마을 전체 혹은 도시 전체를 감싼 다음에 그 지방과 주(洲) 주9 전체를 감싸면서 자비염을 방사한다.



다음으로 지기 주에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한 주씩 영상화한 다음 동서남북 방향별로 나머지 주들을 떠올린다. 이처럼 수행자는 계급이나 인종, 종파나 종교에 관계없이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지리적으로 영상화시켜야 한다.



"이 거대한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녕하기를! 전쟁도 분규도 불행도 병고도 없기를! 우애와 행복, 자비와 지혜로 빛나는 가운데 이 거대한 국토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와 풍요를 누리기를."



이제 수행자는 전 대륙을 동서남북 방향으로 한 나라씩 덮어나간다. 각 나라를 지리적으로 상상하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자비의 염을 무량하게 방사해보낸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그곳에 분쟁과 불화가 없기를! 선의와 이해심이 넘치기를!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런 다음에는 각 대륙을 떠올린다. 아프리카,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북미, 남미의 각 나라와 각 민족을 영상화시키면서 전 지구를 감싸나간다.



다시 자신이 지구의 어떤 한 지점에 위치하여 강력한 자비의 광선을 투사하고 있다고 상상하라. 지구의 한 방향을 감싸고 다음에는 다른 방향을, 그 다음엔 또 다른 방향을, 그래서 마침내 전 지구를 보편적 사랑의 타는 듯한 광휘로 넘치게 하고 완전히 감싸이게 한다고 상상하라.



이제 명상자는 강력한 자비의 빛을 광대무변한 우주로 투사하여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일체 중생들에게 보낸다. 처음엔 동서남북의 사방(四方)으로, 다음에는 동북·동남·서북·서남방의 사유(四維)로, 그 다음에는 위와 아래로, 이렇게 시방(十方)을 두루 풍성하고 무량한 보편적 사랑의 염으로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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