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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초기경전/4. 고요한소리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2)

2.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 『장부』, 제 13경 ―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사랑에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사랑에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동정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 *주11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동정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기꺼움에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기꺼움에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평온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평온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3.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3.1. 사랑(慈, mettaa)


사랑은

소유하려는 욕망이 없는 것.

궁극적으로는 소유물도 소유자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이것이 최상의 사랑.

사랑은

나[我]를 내세우지도 생각지도 않는 것.

이른바 나란 것이 한갓 착각에 불과한 것을 잘 알기에-.


사랑은

선택하지도 배제하지도 않는 것.

선택과 배제가

싫음, 혐오, 반감 등 사랑과 상반되는 것들만 낳는다는 걸 잘 알기에-.


사랑은

일체 중생을 다 감싸는 것.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땅에 살건 물에 살건 공중에 살건 간에.


사랑은

치우침없이 모든 유정물을 다 감싸는 것.

우리에게 쓸모 있고, 즐겁고, 기쁨을 주는 것만 감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일체 중생을 감싸는 것.

숭고한 마음을 가졌건 저열한 마음을 가졌건,

선하건, 악하건, 그 모두를.

숭고하고 선한 이들에겐

사랑의 마음 절로 흘러가니 자연히 감싸게 되고,

저열하고 악한 이들은

그들이야말로 사랑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기에 감싸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 숱한 이들에게서

선의 씨앗이 죽은 것은

단지 그것이 자랄 수 있는 따뜻함을 잃고

이 비정한 세상의 차가움에 얼어버렸기 때문인 것을.


사랑은

일체 모든 중생을 다 감싸는 것.

우리 모두가 윤회의 바퀴 속에서 함께 도는 동반자이며,

우리 모두 똑같은 고(苦)의 법칙에 매인 존재라는 걸 잘 알기에.


그러나 사랑은

불태우듯 괴롭히고 말려 죽이는 감각적 불꽃이 아니다.

그런 불꽃은 치유는커녕 더 큰 상처만 남기나니

금방 타오르다가 다음 순간엔 사그라져 버리면서

이전보다도 더한 차가움과 외로움만 남기기에.


오히려 사랑은

아파하는 중생을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우면서도 확고한 손길 같은 것.

돌아오는 보답에 개의치 않고

연민의 정 가득하여 언제나 흔들림이 없다.


사랑, 그것은 고뇌와 격정의 불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겐 이를 식혀주는 청량제이며,

외로움이라는 차가운 사막에 내버려진 사람들,

또 끝없이 도움을 요청하다가

끝내는 깊은 절망에 빠져 가슴이 텅비고 메말라 버린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나누는 따스함이어라.


사랑,

그것은 용기 자체이자 또 용기를 부여하는 것.

이야말로 최상의 사랑.


사랑,

그것은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듯

`마음의 해탈'이며

`가장 거룩한 아름다움'이어라.


그렇다면

사랑을 나타내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주12


즉 그분 세존 부처님께서 찾아내시고

몸소 밟으셔서 완벽하게 실현해 보여주신

그 길을 이 세상에 알려주는 것.


3.2. 동정[悲, karunaa]


세상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있다.

평생토록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개울을 보지 않고,

온 세상을 끊임없이 덮고 있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보잘것없는 기쁨과 슬픔에 기리어서 눈멀고 귀먹어 있다.

이기심에 사로잡혀 마음은 완고하고 편협해져 버렸다.


완고하고 편협해서야 어떻게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해 노력해볼 수 있겠으며,

고에서 해탈하는 길은 오직 이기적 갈애에서 해방되는 수밖에 달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무거운 빗장을 벗겨내고,

해탈의 문을 활짝 열어 편협한 마음을 온 세상만큼이나 넓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동정'이다.


`동정'은 마음을 짓눌러 마비시키는 무기력을 걷어내고,

이기심이라는 밑바닥 세계로부터

떨쳐 일어나 비상하도록 날개를 달아준다.


남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인해,

자신은 어쩌다 고(苦)에서 벗어나 있을 때라도,

고의 진상을 역력히 마음에 새겨 간직할 수 있다.


이렇듯 더불어 아파하는 마음을 통해

고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에,

언제 별안간 고통이 닥쳐와도

태연히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길러준다.


동정하다 보면

때로는 우리 자신의 처지보다 훨씬 더 고된 남들의 생활을 목격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감수할 수 있게 된다.


보라!

슬픔과 고통의 짐에 짓눌린 인간과 축생들,

저 중생들의 끝없는 유랑대열을!

저들 하나하나가 지고 있는 짐,

바로 그 짐을 우리 역시 지나간 세월, 헤아릴 수 없이 긴 윤회전생을 통해

내내 실어 날라오지 않았던가,

이 사실을 명심하라.

그리고 그대 마음을 동정을 향해 활짝 열라!


그렇다.

우리의 운명도 다시 이렇게 비참하게 될는지 모른다.

지금 남에게 동정심을 품지 않은 사람도 언젠가는 애타게 그 마음을 찾게 될 것이다.

만일 남의 고통에 대해 더불어 아파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길고도 고통스런 경험을 겪은 연후에야

비로소 그러한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생의 위대한 철칙이다.


그런 줄 알고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하라!

무지에 빠져 미망 속에 헤매고 있는 중생들은

이 고통에서 저 고통으로 분주히 싸다닐 뿐,

고통의 진정한 원인도, 고통에서 헤어날 길도 모르고 있다.

보편적 고의 진리에 대한 이와 같은 통할에서부터 동정심이 끝없이 솟아나오는 것이며,

몇 낱의 동떨어진 고의 경험이

그런 마음의 참된 원천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한때 행복할지는 몰라도

미망에 빠져 나쁜 마음으로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까지도

우리는 연민하는 마음을 가진다.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서,

비탄에 찬 그들의 미래를 내다보게 되기에

더욱 연민의 정이 솟는 것이다.


현자(賢者)는 고통받는 사람과 아픔을 같이 하나

그로 인해 자신이 고의 제물이 되지는 않는다.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연민의 마음으로 충만해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아 변함없이 평화롭고 의연하다.

그렇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동정'이 우리 마음에도 일어나기를!


동정,

그것은 거룩하고도 고귀한 마음이자

깊이 알고 이해하고 언제라도 도울 태세가 되어 있는 지성이다.


동정,

그것은 용기 자체이자 또 용기를 부여하는 것.

이야말로 최상의 동정이지.



그럼 동정을 나타내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즉

그분 세존 부처님께서 찾아내시고

몸소 밟으셔서 완벽하게 실현해 보여주신

그 길을 이 세상에 알려주는 것.


3.3. 환희[喜, muditaa]


그대 마음을 열어

더불어 아파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라.


무릇 중생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기쁨, 과연 몇 줌이나 되겠는가.

중생에게 할당된 행복과 기쁨,

그 몫은 정말

너무나 적구나.


그 조그마한 행복이 중생에 미칠 때마다

마땅히 그대

그들과 함께 행복을 같이 해야 하리라.


한 줄기의 기쁨이 어두운 삶을 뚫고 들어와

그들 마음을 싸고 있는 어둡고 음산한 안개를 조금이라도 걷어내준다면

그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남의 행복을 자기 것처럼

즐겨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대의 삶도 기쁨을 늘려갈 것이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행복의 순간에 사람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모습을.

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기쁨 때문에 사람들이 평소능력을 초월해서,

고상한 포부와 위업을 향해 분발하는 모습을.

그러한 경험을 할 때마다,

그대 가슴 즐거운 환희로 가득 차지 않던가?


이와 같이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어서,

더불어 기뻐하는 경험을 늘리는 일은

그대 자신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자!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배우지 못해 모르고 있다.

인생은 비록 서러움으로 가득 찬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기쁨의 원천이기도 하다.

대다수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따름일 뿐.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에서 참 기쁨을 찾아 누리도록 하고

또 남의 기쁨도 같이 향유하도록 가르쳐주자!

그들의 기쁨을 더욱 높은 곳으로 펼쳐나가도록 가르쳐주자!


고상하고 거룩한 기쁨은

저 크게 깨치신 분의 가르침과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울증을 퍼뜨리는 교리로 잘못 알고 잇는 경우도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은

걸음걸음마다 보다 청정하고 고결한 행복으로 다가서도록 이끌어주는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고상하고 거룩한 기쁨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聖諦]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슬픔에 짓눌린 사람이 아닌, 기쁨을 향유하는 사람만이

화창한 고요를 발견해서 결국 정관적(靜觀的) 마음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화창하고 차분한 마음만이 해탈을 가져오는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


남의 기쁨이 거룩하고 고상한 것일수록

우리의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 역시 더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들의 고상한 삶은 금생뿐만 아니라

내내생생의 행복까지 보장해주니

어찌 우리가 더불어 기뻐하지 않겠는가!


더욱이나 그들이 만약 법(Dhamma) *주13을 믿고,

법을 이해하고, 법을 따르게 된다면,

우리의 기쁨은 더욱 고귀한 근거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법의 도움을 주자!

법의 도움을 얼마든지 줄 수 있게 되도록 우리 더욱 분발하자!


더불어 기뻐함,

그것은 거룩하고도 고귀한 마음이자

깊이 알고 이해하고 언제라도 도울 태세가 되어 있는 지성이다.


더불어 기뻐함,

그것은 용기 자체이자 또 용기를 부여하는 것.

이야말로 최상의 기쁨.


그렇다면 더불어 기뻐하는 환희심을 나타내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즉

그분 세존 부처님께서 찾아내시고

몸소 밟으셔서 완벽하게 실현해 보여주신

그 길을 이 세상에 알려주는 것.


3.4. 평온[捨, upekkhaa]


관(통찰력)을 바탕으로 완전하고도 요지부동한 균형을 이룬 마음, 그것이 바로 평온함이다. 밖으로 우리 주위를 돌아보고 안으로 우리 마음을 들여다볼 때, 마음의 균형을 이루고 또 이를 유지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생이란 것이 서로 상반되는 것들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는 변화무쌍한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생기고 멸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잃고 얻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예와 오욕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그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행복과 슬픔, 환희와 절망, 실망과 만족, 희망과 공포로 반응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의 파도는 우리를 위로 높이 밀어올렸다가는, 아래로 내동댕이쳐 버린다. 어쩌다가 조금 안정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새로운 파도에 휘말려 들게 된다. 이 파도의 물마루 위에 우리는 과연 발판을 굳힐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이 건물을 저 영원히 출렁거리는 존재의 바다 한가운데 세울 수 있겠는가. `평온이란 섬' 위에 세우는 길 말고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세상이란, 중생들이 자신에게 배당된 그 조그만 행복조차도 수없는 실망과 좌절, 패배의 쓴맛 끝에 간신히 얻게 되는 그런 곳.

새로 시작하고, 또 시작하여, 거듭거듭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만이 성공을 약속해주는 곳, 이 세상.

질병, 이별, 죽음 가운데 기쁨이 어쩌다 드문드문 자라는 곳, 이 세상.

조금 전까지도 우리와 더불어 기쁨을 나누던 사람이 다음 순간엔 우리의 동정을 구하여 오게 되는 것, 이 세상.

이런 세상에서 평온함, 그것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평온은, 무관심한 둔감에 기인하는 태평이 아니라 또렷한 정신에 입각한 평온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취한 고된 훈련의 결과이어야지 결코 지나가는 기분의 우연한 산물이어서는 안 된다. 또 우리가 거듭 억지를 써가며 유지해내는 평온이라면 그것은 평온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 틀림없다. 참 평온이라면 이 모든 벅찬 시련을 감당해낼 수 있어야 하며, 소진된 힘을 스스로 내부의 원천에서 다시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저항력과 자체 갱생력을 지닌 평온이 되려면 그것은 관(위빠싸나)에 뿌리를 둔 평온이 아니고선 안될 것이다. 그럼 그 `관'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것은 삶의 우여곡절의 원인과 그러한 곡절을 겪는 소위 개체라는 것의 참된 성질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 불리는 수많은 경험들이, 금생이나 전생에 저지른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업(業)은 현재 우리들이 겪고 있는 경험이 나온 모태이다. 우리는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좋든 싫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를 행하자마자 우리는 그 행위에 대한 제어력을 대부분 상실해버리고 만다. 행위는 온 세상을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다 나중에서야,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아랑곳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되는 상속물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우리 신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결코 우리를 적대시하는 `바깥'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동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아는 지혜야말로 평온에 이르는 첫 발판이니 우리는 이 지혜로 인해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일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래도 혹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그 두려움을 가라앉혀 줄 피난처를 알고 있다. 자신의 선행(善行)이 바로 그곳이다. 여기에 피난하면 어떤 확신이 마음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과거에 지은 선업이 우리를 방어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한 확신이. 그렇게 되면 새 용기가 우러나서 우리를 좌절시키려드는 현세의 고난을 이겨내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더 많은 선행을 닦도록 우리를 격려해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운명이 주는 격심한 타격을 막아내는 최선의 방어가 바로 고상하고 욕심이 없는 행위란 걸 알고 있으며, 또한 우리는 선한 행위를 행하는 데는 매 시간이 다 최적기이며, 어느 때도 결코 너무 늦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피함으로써 그 피난처가 우리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면 어느 날인가 우리는 마침내 "과거에 연유된 악과 비참은 점점 끝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이 생활을 결함이 없고 청정한 것이 되게끔 노력하고 있다. 미래가 가져올 것이라야 선(善)의 증장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하는 확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확신감에서부터, 현실이 초래하는 모든 역경을 감내해낼 수 있는 마음의 차분함이, 그리고 인내력과 평온이 생겨날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지은 업의 결과로 인생살이에서 겪게 되는 별별 사건들도 그것이 비록 슬픔과 고뇌를 안겨주는 한이 있어도 그 모두가 역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모습이 때로는 변장을 하고 있어서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도 가끔 있다. 어떤 때는 우리가 행한 행위가 타인으로부터 예상 밖의 엉뚱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심지어는 뜻한 바와는 정반대로 발전하여 우리 생활을 밑바탕에서부터 뒤흔들어버리는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가져오는 바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결과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의외의 결과일까? 사실은 그 행위 당시에 우리가 엉뚱한 이유를 둘러대면서 자신에 대해서마저 숨기려들었던 반의식적(半意識的) 동기가 이제 더이상 감출 수 없는 결과로서 분명히 노정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각도에서 사물을 보는데 익숙해지면,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험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읽을 줄 알게 되면, 그땐 고(苦)마저도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준엄하고도 진실한, 호의적인 친구가 되어 우리를 가르쳐주고 경고해줄 것이다. 고(苦)는 우리에게 제일 어려운 과제, 즉 자기자신을 아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또 우리가 무모하게 다가가고 있는 파멸의 심연에 대해서 경고해준다. 고를 스승으로, 친구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평온하게 고를 버텨내는 일을 더 원만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업(業)에 대한 가르침(우리가 지금껏 한 얘기가 바로 업의 이론이다.) 이야말로, 업 그 자체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다시 말해 우리를 거듭거듭 재생[輪廻]의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저들 행위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강력한 추진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힘을, 우리의 저항을, 우리의 평온을 끊임없이 파괴하려드는 상황이 다름 아닌 우린 자신의 갈애와 우리 자신의 미망이 끊임없이 조성해내는 것인 줄 알았을 때, 그 갈애와 미망에 대해 어찌 넌더리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온의 기반이 되는 두 번째 통찰은 바로 부처님이 설하신 무아(無我, anattaa)의 가르침이다. 이 교의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행위는 결코 어떤 자아 또는 인격체가 행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 행위의 결과가 자아나 인격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결국 `자아'란 것이 없을진대 `나의 것'이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가르쳐준다. 고를 만들어내는 것도 또 평온을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것도 모두 '자아'라는 미망일 따름이다. 가령 우리의 이러저러한 자질이 비난을 받으면 그는 `내가 비난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온이 흔들린다. 이런저런 일이 성공을 못하면 `나의 일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온이 흔들린다. 재산을 잃으면 `내 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평온이 흔들린다.


평온을 요지부동한 마음상태로 확립하기 위해선 일체의 `내 것'이라는 소유적 관념을 점차적으로 버려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엔 용이하게 떨쳐낼 수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온 마음을 기울려 집착하고 있는 재산과 목표에 이르기까지. 그런 다음엔 우리는 점차적으로 `자기'라는 생각마저도 모두 버려야 한다. 처음엔 자기 `인격'의 작은 부분, 중요치 않은 자질, 스스로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사소한 약점 따위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자기 `자아'의 중심이라 간주되는 정동(情動) *주14과 혐오(aversion)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떨쳐내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내 것' 또는 `자기'라는 생각을 버린 그만큼 평온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그 자리를 메꾸어준다. 생각해보라. 그것이 욕망에서 나온 것이든, 증오에서 또는 비탄에서 나온 것이든 간에 이미 우리와 무관할 뿐 아니라 그 자체도 자아가 없는 공허한 것인 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우리 마음을 휘저을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무아의 가르침은 해탈로 나아가는 길, 성스러운 평온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나서는 안될 안내자이다.


평온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절정이자 그 극치이다. 그렇다고 평온을 `사랑' `동정' `환희'를 부정한다거나 그것들을 하찮은 것이라 하여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전혀 그렇지 않다. 평온은 이 세 가지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여 그것들 속에 골고루 스며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평온은 이 세 가지로 속속들이 배어있다.


그럼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은 어떻게 서로간에 스며들어 가득히 채우는가.


가없는 `사랑'은 `동정'이 편파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지켜주고, 취사선택하여 차별대우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준다. 그럼으로써 한쪽을 동정하는 데 치우친 나머지 그 반대쪽에 대해 부당하게 편파적 태도를 취하거나 혐오감을 품는 일이 없도록 돌봐준다. `사랑'은 `평온'에다 자신의 속성인 비이기성과 무제한성을, 심지어는 열렬함마저 불어넣어준다. 왜 열렬함이 필요한가하면, 제어되어 변형된 열렬함은 완전한 평온의 한 부분이 되어, 평온에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현명한 억제력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가 잠시 한정된 행복을 즐기거나 이를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에도 이 세상엔 끔찍한 고가 여전히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켜준다. `사랑'과 `환희'의 행복이 끝없는 불행과 공존한다는 사실, 어쩌면 문 밖에 나서는 순간 바로 그 불행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에 대해서 이 세상엔 그들이 어루만져주기엔 너무 벅찬 많은 고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또 어루만져줌의 효과가 사라지면 곧 슬픔과 고통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 확실하며, 이런 현상은 일체 고가 완전히 근절되는 열반의 성취까지는 내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가 이 세상의 좁은 부분에만 국집하여 더 넓은 세계를 외면하게끔 버려두지 않는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가 작고 보잘것없는 행복에 안주하여 거기에만 마음쓰면서 자기만족에 빠져드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다. `동정'은 `사랑'이 그 영역을 확대하도록 각성시키고 격려해준다. `동정'은 `환희'가 새로운 자양분을 찾도록 각성시키고 격려해준다. 그럼으로써 이 둘이 진짜 무량한 마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동정'은 `평온'이 차가운 무관심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또 나태하거나 이기적인 고립으로 변질하지 않도록 지켜준다. `평온'이 완성단계에 이를 때까지 `동정'은 `평온'이 사바세계의 싸움터를 외면하지 않고 거듭거듭 잘 살펴보도록, 그래서 더 단련되고 강화되어 그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격려한다.


`환희'는 `동정'이 이 세상에 가득 찬 고의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지 않도록, 또 거기에 휘말린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지켜준다. `환희'는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고 고통스럽게 불타는 연민심을 진정시켜준다. `환희'는 `동정'이 목적을 잃고 우울에 잠기지 않도록, 또 괜히 정진의 힘을 약화, 소모시키기만 하는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환희'는 `동정'을 능동적 공감으로 발전시켜준다. `환희'는 `평온'에게 그 엄숙한 모습을 풀도록 온화함을 준다. 그것은 부처님의 얼굴에 보이는 저 성스러운 미소이다. 이 세상 고를 속속들이 알면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그 미소, 위안과 희망과 겁없음과 확신을 주는 그 미소, 그 미소는 말해준다. "해탈에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고.


통찰에 근거한 `평온'은 다른 세 거룩한 마음가짐에게는 안내역할을 하며 자제를 돕는다. 그들이 가야할 방향을 지시해주고 또 그 방향이 꼭 지켜지도록 애써준다. `평온'은 `사랑'과 `동정'이 헛된 시도에 정력을 낭비하거나 무절제한 감정의 격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평온'은 최종목표 달성을 위한 빈틈없는 자제이다. 따라서 `환희'가 조그마한 성취에 만족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표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지켜준다. `상황에 동요되지 않는 차분한 마음(evenmindedness)'을 뜻하는 `평온'은 `사랑'에 대해 한결같은, 변함없는 확고함과 충실함을 제공한다. 사랑에게 참을성이라는 위대한 덕성을 부여한다. 또 평온은 `동정'이 한결같이 흔들림 없는 용기와 대담성을 갖도록 해주어 무량한 `동정'이 거듭거듭 당면하게 될 비참과 절망의 무서운 심연에 맞설 수 있게끔 해준다. 또 `동정'의 활동면에 대해선, `평온'은 지혜롭게 운전하는 차분하고도 확고한 손이 되어준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기술이 아니므로 지혜가 없이는 뜻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도 평온은 참을성을, 즉 `동정'하는 일에의 참을성 있는 헌신을 의미한다.



아무튼 여러모로 따져보아 `평온'은 다른 세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정점이자 극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앞의 세 마음은 `평온'과 그 평온에 내재하는 통찰력에 결부되지 못하면 안정장치의 결여로 인해 점차 감소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덕성이든 그를 확고하게 해주거나 아니면 유연하게 해주는 다른 자질에 의해서 도움받지 못하고 고립되면, 퇴색해버리거나 그 자체의 특유한 결함 속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자애는 정진력과 통찰력을 겸비하지 못할 때 한낱 나약하고 신뢰할 수 없는 감상적 착함으로 기울어져버리기 쉽다. 더욱이 이런 고립된 덕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원래 가졌던 자신의 삶의 목표와 정반대방향으로, 또 타인들의 안녕에도 배치되는 방향으로 가게끔 만드는 수가 많다. 이처럼 고립되기 쉬운 덕성을 유기적이고도 조화로운 전체성으로 굳게 결합시켜 각각의 자질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또다른 자질들의 협조를 받아 각기 특유한 약점이 만든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그 사람의 굳건하고도 균형잡힌 인격성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그래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사이에 이상적인 관계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평온'의 기능인 것이다.


`평온'은 통찰에 입각한 완전하고도 요지부동한 마음의 균형을 말한다. 그러나 이 완전하고도 요지부동한 성질은 결코 생기 잃은 경직성이 아니며, 물질의 둔중성과 같은 것도 아니다. `평온'은 둔감함도 몰인정함도 냉담함도 아니다. 이 완전성은 정서적 `공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충만'한 데에, 즉 그 자체가 본래 완전한 것인데 연유한 것이다. 그 요지부동한 성질도 차가운 돌덩이의 죽음 같은 불변성이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내적 힘의 표출인 것이다.


그럼 `평온'은 어떤 식으로 완전하고 요지부동한가?


`평온'에선, 정체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녹아 없어져 버리고 가로막는 것은 제거되며 방해하는 것은 파괴된다. 여기에선 감정의 소용돌이도 지성의 배회도 사라진다. 순수하고 광휘에 차 의식은 고요하고도 장엄하게 거침없이 흘러간다. 여기서는 빈틈없는 정념[正念, sati]이 지혜(pa~n~naa)의 꿰뚫는 날카로움과 신심(saddha)의 따뜻함을 조화시키고 있다. 정념은 또 의지력(viriya)과 마음의 고요(samaadhi)를 균형잡아 놓는다. 그리고 이 다섯 개의 내적인 기능(indriya) *주15은 내적 힘(bala) *주16으로 성장했기에 다시는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이 다섯 힘은 이젠 더이상 이 세상의 미로(윤회, samsaara) 속에서, 생명의 끝없는 확장(papa~nca) 과정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리게 될 위험이 없다. 분명히 이들 내면의 힘은 마음에서 퍼져나가 세상에 대해 작용을 가하지만, 정념에 의해 지켜지기 때문에 어디에도 붙박지 않고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다시 `사랑' `동정' 그리고 `환희'는 계속 마음에서 발산하여 세상에 작용을 가한다. 그러나 `평온'에 의해 지켜지고 있으므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조금도 약화되거나 때묻지 않은 채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래서 성자는 아무리 베풀어주어도 내면에서 무엇이 줄어드는 일이 없으며, 그의 지적(知的), 정적(情的)인 풍요를 남에게 몽땅 쏟아주어도 그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다. 마치 흠이라곤 전혀 없는 투명한 수정이 모든 광선을 완전히 흡수하여 그 집중력으로 한층 강화시켜 되돌려보내면서도 조금도 얼룩지지 않는 거소가 같다. 어떤 광선도 그 색깔로 수정을 물들일 수 없다. 광선은 수정의 견고함을 무너뜨릴 수 없고 그 조화로운 구조를 흐트러뜨릴 수도 없다. 수정은 조금도 변함없이 그 완벽한 순도와 힘을 보존하고 있다. "마치 온 세상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온 하늘의 물이 비가 되어 바다로 내려도 대양은 조금도 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는 것과 같이" - 바로 `성스러운 평온'의 성질이 그와 같다.


`성스러운 평온', 달리 서양식으로 표현하여 `성스런 평온을 부여받은 성자'는 이 세상의 내면적인 중심이다. 하지만 이 내면적 중심은, 저 수도 없이 많은 유한한 영역들이 외견상의 중심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소위 `인격'이라든가 통치법률이라든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외견상의 중심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의 영역은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언제든 그 구조의 총체적 변천을 겪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 물질적 또는 정신적 무게 중심(重心)이 이동하게 되면 더이상 중심의 구실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의 평온이라는 내면적 중심은 불변이기 때문에 요지부동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불변인 것이다.


조건지워진 것에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에는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없는 곳엔 정적(靜寂)이 있다. 정적이 있는 곳에 갈애는 없다. 갈애가 없는 곳엔 감도 옴도 없다. 감도 옴도 없는 곳엔 생김도 사라짐도 없다. 생김도 사라짐도 없는 곳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그 중간 상태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고의 끝남이다.


4.주해


1) 환희(muditaa) : 남의 발전, 행복 등을 자기 것처럼 진정으로 기뻐하는 마음. 본문에서는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라는 역어와 같이 썼음. ∥본문으로∥

2) 범천(梵天,Brahma) : 넓게는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하늘을 가리키고, 좁게는 색계의 초선 삼천(범중천, 범보천, 대범천)을, 그 중에서도 대범천을 흔히 가리킨다. 본문에선 넓은 뜻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청정한 수행력으로 욕계를 벗어난, 높은 수준의 제 천(하늘나라와 그곳에 사는 천신들)을 가리키고 있다.

3) 자애의 경 : 『소부』에 드는 『숫따니빠따』의 제1품 8장. 전문을 보려면 보리수 잎·여섯 「불교의 명상」 부록과 법륜·여덟「자비관」의 13~15쪽 참조.

4) 선(禪, jhaana) : 한문에서 定 靜慮思惟修라 번역하고 또 `선정'이란 용어로 쓰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선과 정을 같은 용도로 쓰는데, 엄밀히는 선은 팔정도의 정정(正定)을 얻었을 때 차례로 이루어지는 정신의 네 가지 고양단계를 말한다. ∥본문으로∥

5) 사선(四禪, cattaari-jhaanaani) : 팔정도의 마지막 항인 정정(正定)에 들어 본삼매를 얻으면 사선을 차례로 성취할 수 있다.

·초선: 욕망과 불건전한 마음상태를 여의는 데서 오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으로 가득 찬 경계. 아직 `생각이 가 닿음[尋]'과 계속 생각함[伺]'이 남아 있다.

·이선: `생각이 가 닿음'과 `계속 생각함'이 사라지고, 내적 고요와 하나된 마음을 이루었으며, 삼매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경계.

·삼선: 기쁨을 벗어나 평온에 머물며, 정지·정념이 있고, 즐거움을 몸으로 경험하는 경계.

·사선: 즐거움도 또 근심도 사라지고, 이미 고와 낙에서 멀리 벗어나 불고불락한, 평온과 정념에 의해 청정해진 경계. ∥본문으로∥

6) 상사영상(相似影像, pa.tibhaaga-nimitta) : 정신집중 훈련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때 마음속에 마치 눈으로 보듯 선명하게 나타나는 명상대상의 영상. 그런 영상 중에는 시초의 `예비영상'과 아직 약하고 희미한 `취득영상', 완전히 또렷하고 움직임이 없는 `상사영상'이 있다.

7) 근접삼매(upacaarasamaadhi) : 원래 정정은 사선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넓은 뜻에서는 초선에 이르지 못한, 보다 약한 삼매도 포함한다. 그런 것으로 `예비삼매'와 `근접삼매'가 있다. 근접삼매는 아직 `본삼매'에 이르지 못해 초선을 성취하지 못한 삼매로서 일부의 수련방법에선 `상사영상'의 출현으로 특정지워진다. 여기에서 명기해둘 것은, 삼매는 samaadhi의 음역이며 정(定)과 같은 뜻이다. 이 정은 사선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정과 선과 동의어로 쓰기도 하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 정 대신 삼매란 용어를 쓰기로 한다. 정의 영역은 concentration임. ∥본문으로∥

8) 무상·고·무아 : 근본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이라 할 수 있는 불교의 근본교의.

`일체 행은 무상하다, … 일체 행은 고이다, …일체 법은 무아이다.'―『법구경』

9) 관(觀, vipassanaa) : 내관(來觀), 정관(正觀), 통찰. 영어로는 insight라 번역. 존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무상·고·무아를 직각(直覺)하는 통찰력. 지(止, samatha)와 더불어 불교수행의 두 기둥임. 지에선 정(삼매)이, 관에선 혜가 이루어진다.

10) 들뜸 : 전통적으로 도거(掉擧)로 번역해왔다. 정신을 들떠 산만하게 만드는 장애를 말하며 후회개(後悔蓋, kukucca)와 결합하여 오개(五蓋)의 제4항인 도회개가 된다.

11) 동서남북 네 방위.

12) 도성제 즉 팔정도. 보리수 잎·하나 「영원한 올챙이」참조.

13) 법(Dhamma) : 불교의 진리. ∥본문으로∥

14) 정동(情動, emotion) : 동기로 작용하는 감정.

15) 오근(五根, pa~nca indriya) : 37조도품의 5근. 즉 신근·정진근·염근·정근·혜근(보리수 잎 ·하나 「영원한 올챙이」 주해의 오근과 팔정도, 삼학의 관계참조). 여기서 근은 깨침을 촉진하는 도덕적 능력을 말함.

16) 오력(pa~nca balaa) : 37조도품의 5력. 오근과 같은 종류인데 능력이 확고한 힘으로 성장된 것을 일컬음. ∥본문으로∥


고요한 소리 출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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