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신(三身)일불(一佛)
이 보리 방편문은 한 말로 말하면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마음이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말씀했다 말입니다. 이른바 불교 한문 식으로 말하면은 심즉(心卽)시불(是佛)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말입니다.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씀 하신 것이 이 보리 방편문의 줄거리 참 골격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조금 복잡하니 이래저래 이런 전개가 돼 있고 법문이 상당히 길지마는 한 말로 말하면은 결국 심즉시불이라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바로 도파(道破)했다 말입니다. 이것이 방편문의 대의입니다. 분석해 놓고 보면은 마음의 우리마음 이것은 꼭 불심이 아니어도 무방합니다. 불심과 중생심은 둘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 마음이나 좋은 사람 마음이나 겉만 다른 것이지 표면만 다른 것이지 속의 알맹이는 똑 같은 것입니다. 석가모니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강도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공자 마음이나 마음 깊이는 똑 같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얼마만치 마음깊이를 파 들어갔는가. 개발 정도에 따라서 차이만 있습니다.
따라서 만물이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니고 말입니다. 일체 중생은 나와 더불어서 오직 하나라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인 뿐만 아니라 유교나 도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물이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또는 일체 중생이 나와 더불어서 하나라 말입니다. 이걸 먼저 알아야 쓰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고 생각 할 때는 자기만 잘 되기 위해서 남을 우리가 구박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마음도 이 마음도 어느 사람 마음이나 어느 사람 마음이나 모두가 다 그때는 바로 부처라 말입니다.
한계나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또는 공부를 좀 한 사람 마음이나 누구 마음이나 모두가 다 그때는 간격도 없이 바로 바로 부처라 바로 차이가 있고 또는 갖다가 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첩니다. 이렇게 생각 할 때는 나같이 못 난 사람이 나 같은 그런 업장 많은 사람이 왜 부처일 것인가 의심을 갖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즉 무명심(無明心)이라 무명이란 말이 참 굉장히 그 소중한 표현인 것입니다. 밝지 않다 말입니다. 우리한테 있는 우리 불성 우리 부처님마음으로 훤히 밝아서 우주를 다 비추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업장이 가려서 밝지가 않다 말입니다. 밝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을 내가 다 모른다 말입니다.
무명(無明)이라 무명 때문에 몰라서 그런 것이지 잘나나 못나나 좀 좋으나 많이 좋으나 모두가 다 그 사람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심즉시불이라 마음이 부처인 것인데 보리 방편문은 이것은 내용이 그 마음자리를 그냥 바로 부처라 하면 너무 갖다 그때는 싱거웁고 또 부처님 가르침이 하도 법다우니까(?) 말이지 조금 더 부처님 경전 따라서 조금 더 해설을 좀 해야 쓰겠지요. 부처님 경전 따라서 가장 시기적으로 한 그런 체계 지혜로운 그런 해설이 즉 말하자면 보리 방편문식 해설이라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 체(體) 그때는 법신(法身) 그럽니다. 법신이라 또는 그것 보고 불교 말로 좀 어렵게 말하면은 그때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말입니다. 이 해설은 원래 불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따라서 보리 방편문은 불경에 있는 그런 표현 술어를 갖다가 거의 원용을 많이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다시 상관성이 지닐 수가 있겠지요.
우리 마음의 우리 마음의 근본 체성 본체를 법신 그러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화 시켜서 말하면 그때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말입니다. 우리말로 이것을 새기면은 그때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 대일여래라는 것은 뭣인고 하면은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는 바로 우주라는 바로 뜻입니다. 바로 우주라 그 말입니다.
대일여래라는 것은 큰 대(大)자 날 일(日)자 날 일자 이런 태양 같은 광명이 아니라 보다 더 몇 천배 몇 만 배나 더 밝은 광명 우주의 생명을 대일여래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우리말로 더 새기면 그때는 광명변조(光明邊照)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란 말은 우리말로 하면 대일여래라 태양보다도 훨썩 밝은 광대무변한 그런 광명의 부처란 뜻인 것이고 또 새기면은 광명변조라 그 광명이 우주에 꽉 차 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본 체성은 광명변조라 우주에 우리 마음 광명이 꽉 차 있습니다. 잘나나 못나나 미련한 사람이나 벙어리나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의 본래 마음자리 바닥은 모두가 다 천지우주에 꽉 차있는 광명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은 미처 못 보는 것이고 성자는 분명히 거기에 하나가 됐단 말입니다. 그런 청정법신자리 우리 마음의 본체자리에 자리에 본체에 들어 있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공덕 보고는 그때는 보신(報身) 그럽니다. 보신이라 말입니다. 우리 인간성의 본 바탕이 법신인데 이것은 인간성뿐만 아니라 일체존재를 다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조금 더 보편적으로 얘기 않고서 협소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법신 그러면 사람만 이것은 사람만의 본체다 이렇게 말 할란가 모르겠지마는 부처님 뜻은 그렇게 좁지가 않습니다. 유정 무정 또는 유상 무상 일체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또는 물질이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그런 존재들이 존재의 가장 근본 되는 본체가 그때는 법신이라 말입니다. 또는 그 법신 속에 본체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功德)이나 자비(慈悲)나 능력이나 일체 그런 가능성 이것이 보신이라 말입니다. 보신이라 이것을 좀 더 구체화시키면 그때는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 말입니다. 이것을 또 우리말로 새겨서 말하면 우리 뜻으로 지켜서 말하면 그때는 정만성해(淨滿性海) 즉 말하자면 일체공덕이 가지고 있는 그런 성질의 바다 같다 말입니다. 보리 방편문은 이것은 이렇게 굉장히 고도한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팔만 사천 법문 가운데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것이지마는 사실은 꼭 지금 우리가 알아두어야 쓰는 것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다른 종교와 비해서 불교가 어째서 위대한가 말입니다. 현대 과학보다도 불교가 어째서 앞서는 것인가 또는 같은 불교 내에도 같은 어떠한 것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골수(骨髓)인 것인가 그걸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또는 좋은 스승 되기 위해서 꼭 필요 한 것입니다. 불교 가운데서 가장 앞선 그런 정수 가르침 또는 각 종교 가운데서 타 종교 사회 가운데서 불교가 으뜸 되는 그런 의의 또는 과학보다도 앞서 있는 과학 만능시대가 과학이 도리어 기여할 수 있는 데에 있고 인간이 끌려가는 현대에 있어서 과학보다도 앞서 있다는 그런 증거 이것을 알아야 쓰기 때문에 이런 법문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 것은 이것은 법신인 것이고 또는 법신에 포함 되어있는 일체 공덕은 그때는 보신이라 말입니다. 보신인 것이고 또는 거기에서 우러나는 모든 현상적인 것은 그것은 모두가 그때는 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법신 보신 화신 이것을 잘 새겨 두십시오. 이 자꾸만 나중에 오늘 이제 방편문에 가입하시며는 천 번 만 번 보시며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금생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세생생에 큰 보배가 될 것입니다. 나중에 꼭 그렇게 알으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법신 이것은 법신 이것은 인생과 우주의 인생과 우주의 본래 자리라 말입니다. 본래자리 순수생명자리 이것이 법신인 것입니다. 순수생명자리 법신에 들어 있는 모든 공덕 지혜 능력 그야말로 참 자기 행복 일체가 다 들어있는 불교말로 하면 일만 공덕이 만 공덕이 원만구족이라 만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 있다 말입니다. 그것이 보신이라 말입니다. 또는 그 자리에서 산이요 냇이요 사람이요 또는 일체중생이 나온다 말입니다. 생활 현상적인 모두는 그때는 화신이라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 가르침은 모든 우주를 다 통틀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역시 화신 자리에서는 현상적인 우리 형상화된 자리에서는 조그마한 인간 밖에는 안 되지마는 우리 마음 깊이 에서는 결국은 보신 법신 자리는 다 똑 같아 버린다 말입니다. 이걸 알으십시오.
바다에서 무변대해에 천 파 만 파 파도가 일어납니다. 또는 천 개 만 개 또는 몇 십억의 그런 그야말로 참 거품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 거품이나 그런 파도는 높고 낮고 거품도 적고 크고 하겠지요. 그런 차이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그 진리도 역시 진리의 바다도 말입니다. 바다도 우주라는 것은 법신이다 하는 순수한 생명에 충만해 있습니다. 순수한 생명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이 아니라 일체 공덕을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다 갖추어 있는 것이 가득 차 있다 말입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천지 우주의 그런 광명의 그런 일체 진리가 다 들어있고 일체공덕이 들어있는 그런 진리의 바다 가운데서 거기에서 일어나는 결국은 일체존재가 이것이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별이요 또는 산이요 한다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고향은 결국은 내내야 법신이고 보신이다 말입니다. 법신 보신은 영원히 그때는 무슨 변동이 없습니다.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고 부증불감이라 일체 일체공덕을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다 갖추어 있는 것이 가득 차 있다 말입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또는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말입니다. 또는 더럽지 않고 청정하지 않고 항시 영원히 존재하는 에너지세계 이것이 갖다가 법신 보신이라 말입니다. 이 자리에서 갖추어 있는 그런 여러 가지 인연심으로 해서 인연력이라 부처님 법문식으로 하면 무시이래의 인연력(因緣力)이라 말입니다. 인연력이라 부처님법문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심심미묘 합니다. 우주에 갖추고 있는 인연심(因緣心)으로 해서 그때는 인연심으로 해서 그때는 그야말로 참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나온다 말입니다. 이것도 또 보다 세밀한 해석이 있습니다마는 전문적인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 이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일체우주를 다 통달해 있다 말입니다. 내 마음을 파고 들어가도 그 밑에 가서는 보신 법신인 것이고 말입니다. 하나의 원소나 또는 어떤 것이나 모두가 파 들어가면 역시 다 보신 화신인 것입니다. 다만 현상적인 차이에서만 강가 박가 또는 이가 그와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이고 두두 물물로 현상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보신 법신 차원에서는 모두 하나라 말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하나인 자리를 훤히 보이는 성자가 자기만 위하고 또는 남을 우리가 학대 하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생은 화신경계에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세계에 얽매이는 것이고 성자는 바로 부처라 말입니다. 법신만도 부처가 아닌 것이고 또는 보신만도 부처가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현상이나 실상이나 현상이나 절대나 상대나 절대나 모두 합해서 부처라 말입니다. 아, 그 부처 그럴 때는 이와 같이 우주를 우주가 바로 부처라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서 우주와 하나가 딱 된 분인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어떤 도인들이나 모두가 다 철저하고 덜 철저하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주의 진리 법신 보신을 깨달은 분이라 말입니다. 우리 중생도 금생에 못 깨닫는다 하더라도 원래 우리생명의 바닥이 바탕이 바로 법신이요 보신이기 때문에 어느 땐가는 법신 보신이 우리가 돼야 쓰는 것입니다. 못 되면 결국 항시 우리가 인제 뱅뱅 그때는 윤회 하겠지요. 사람으로 개로 소로 돼지로 우리가 갔다 왔다 한다 말입니다.
꼭 우리 인간은 반드시 법신 보신 화신이 딱 돼서 깨달아서 부처가 돼야 쓰는 것입니다. 다만 게으른 사람들은 금생에 못 되고 내생에도 못 될 것이고 말입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정말로 바른 사람들은 금생에 될 것이고 금생에 못 되면 내생에 되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 자리를 부처 자리를 중생이 잘 못 알아먹으니까 부처님께서 그때그때 정견(正見) 따라서 또는 사람 따라서 그때그때 달리 표현 했다 말입니다. 더러는 부처를 진여(眞如)라 또는 불성(佛性)이라 또는 법성(法性)이라 또는 실상(實相)이라 또는 중도(中道)라 또는 보리(菩提)라 열반(涅槃)이라 여래(如來)라 주인공(主人公)이라 말입니다. 이와 같이 표현했다 말입니다. 부처란 말이나 주인공이란 말이나 여래란 말이나 또는 열반이란 말이나 또는 보리란 말이나 또는 중도란 말이나 말입니다. 실상이나 법성이나 불성이나 또는 진여나 똑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알고서 불경을 본다고 생각 할 때에는 그때그때 어느 불경을 보든지 간에 아, 그렇구나! 이 불경은 이 불경은 과연 이것은 공(空)을 주로 말했구나. 이 불경은 유(有)를 주로 말했구나, 이 불경은 부처님의 본래면목 자리를 바로 말씀하신 거구나, 이와 같이 이와 같이 우리가 짐작 할 수 있다 말입니다. 이런 골격으로 이른 것이 이것이 보리 방편문의 진리입니다.
즉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말 한 것인데 마음자리 마음 본성이 바로 이것이 법신인 것이고 말입니다. 법신 속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 이것이 보신인 것이고 또는 법신 보신 속에서 이루어진 일체존재 사람이나 산이나 별이나 일체존재가 이것이 화신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화신 가운데 우리 즉 말하자면 우리 개별적인 하나라 말입니다. 따라서 화신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법신 보신 가면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버린다 말입니다. 또는 여기서 더 할 것은 뭣인고 하면 화신이 됐다 하더라도 지금 나와 너와 그 사이가 정말로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중생이 봐야 차이가 있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딱 뚫어지게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비록 화신이 돼 이 자리에서 김 아무개라는 사람 박 아무개라는 사람 그 사람도 역시 그 사람도 딱 분리된 절대의 존재가 아닙니다.
현대물리학을 공부한 우리 젊은 세대라든가 그런 분들은 다 아는 문제 안 되겠습니까. 비록 나와 너와 이와 같이 둘이 있다 하더라도 나와 너와 성이 다르고 남이라 하더라도 남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딱 붙어 있다 말입니다. 어째서 붙어 있는 것인가 어떤 데나 우리 중생이 사는데 공간이 없는 데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공간이 있다 말입니다. 공간 속에는 산소나 수소나 그런 각 공기가 꽉 차 있다 말입니다. 공기가 있다고 생각 할 때에 역시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도 꽉 차있습니다. 또는 그런 것은 에너지로 해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그런 소립자 같은 것은 다 에너지의 하나의 합일에 불과하다 말입니다. 에너지가 없는 공간이 있습니까. 그런 정기가 없는 공간이 없다 말입니다. 나와 남의 그런 차이가 지금 차이 있게 보이지마는 다만 우리 중생이 잘 못 봐서 그런 차이가 있어 가지고서 딱 보내는 것이지 원자의 차원 또는 에너지의 차원 그런 차원에서 본 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은 딱 붙어 있다 말입니다.
내 몸도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걸로 해서 구성되어 있고 말입니다. 또는 내 몸과 니 몸과 그 사이 공간도 역시 산소나 질소나 수소나 희박한 정도 그런 결합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이지 결국은 다 그 그걸로 해서 충만해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과 나와도 결국은 다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 다 모두가 이것이 만남이 아니라 말입니다. 다만 중생은 그런 공간적인 것은 모르는 것이니까 즉 간격을 모르는 것이니까 우리가 인제 나와 남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공간을 안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은 나와 남을 구분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이런 선행적인 지식을 좀 두시고서 보리방편문을 공부 하시도록 하십시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이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갈파 했다 말입니다. 갈파 한 것이 이것이 바로 보리방편문 이것이 하나의 법문인 골격입니다. 보리방편문이라 비록 진리가 비록 사람의 말이나 문자를 통하는 것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진리는 못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기에 방편이란 말을 썼단 말입니다. 진리에 들어가는 결국은 방법의 문이란 말입니다. 도인들은 이와 같이 같은 말도 굉장히 신중을 기합니다. 어떤 제 아무리 고도한 그런 학문이나 또는 이변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진리는 못 된다 말입니다. 진리에 들어가는 참다운 그런 보리(菩提) 참다운 보리는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도(道)나 또는 불성이나 같은 뜻입니다. 열반이나 말입니다. 도 열반 또는 불성 또는 진리 실상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러한 참다운 도에 들어가는 즉 문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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