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소참법문 1.
* 위 법문은 청화큰스님께서 2000년 동안거를 제주도 서귀포시 공천포 토굴에 머무르시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가까이 계신 분들에게 하신 『육조단경』에 대한 소참법문입니다.
장시간에 걸쳐 녹취작업을 해 주신 무상월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근본주의라는 것이 기독교나 불교나 간에 뜻이 문제가 돼 있습니다.”
1. 근본주의라는 것이 기독교나 불교나 간에 뜻이 문제가 돼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인데 육체가 부활했다는 육체부활설이 기독교 근본주의 하나가 돼 있고 한 가지는 성경 무류설(無謬說)이라 성경은 글자 한자 한자가 모두가 다 오류(誤謬)가 없다고 말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문자적 신뢰를 하는 셈이지요. 그것과 또 한 가지는 예수의 즉 말하자면 대속설(代贖說)로 예수가 인류의 원죄를 대신해 죽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말도 그네들 믿음으로 해서 그건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성적(理性的)으로 본 다고 생각 할 때는 그것이 성립 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렇게들 믿는 것과,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재림설(再臨說) 말입니다. 예수가 다시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최후의 심판을 거쳐서 재림 한다는 그런 것이 결국은 기독교의 근본주의 아닙니까?
그래서 근본주의는 근세이후에 굉장히 논쟁거리가 많이 됐습니다. 기독교가 여러 파당으로 갈리는 원인도 근본주의를 기초로 해서 근본주의를 얼마만치 믿는가, 안 믿는가 그것이 귀로가 됐단 말입니다.
한데 우리 불교도 근본주의가 있습니다.
가령 지금 법화종은 법화경(法華經) 아니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법화경 뜻이나 화엄경 뜻이나 사실은 근본적으로 부처님 뜻은 다 도출(導出)해낸 셈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들이 믿는 하나의 굴레를 만들어 가지고서 그것 아니면 안 된다는 그런 것이 이른바 불교 근본주의 형태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참선(參禪)하는 사람들은 참선만이 옳다하고 교리(敎理)는 아무것도 아니라 하고, 그래서 선교(禪敎)가 너무나 첨예하게 대립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 특히 지금 버마나 스리랑카나 태국이나 또 그런 불교나라에서는 대승(大乘)비불설(非佛說)이라, 대승은 부처님께서 직접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쑥 내려오다가 불교를 대승적으로 해석하는 그런 분들이 만들었다는 그걸로 해서 대승은 부처님께서 말씀한 설이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대승 비불설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또 대승을 믿는 중국, 한국, 일본 또 티베트 그쪽으로는 불교 대승국가 아닙니까? 대승을 믿는 사람들은 소승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소승은 대승으로 올라오는 하나의 계단인 것이지 부처님의 본뜻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피차 서로 필요 없는 그런 논쟁을 하는 셈 아닙니까마는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육조단경(六祖壇經)』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른바 고증(考證)을 주로하고 역사적인 사료(史料)를 주로해서 따지는 일부 사람들은 육조스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육조스님 제자가 적당히 만들었다고 그렇게 하거든요. 제자들이 만들었다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겠지요, 가령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두고 본다고 할 것 같으면 공자가 직접 써서 한 것이 아니라 제자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지 공자가 직접 저술하고 그랬겠습니까?
불경도 마찬가지라. 불경도 부처님께서 직접으로 말씀한 것만이 아니고 그때 그때 말씀하신 것을 제자 분들이 갖다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었고 기독교의 그 이른바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마태복음서, 누가복음서, 요한복음서등 그런 복음서도 기독교에서 그 당시는 그런 것이 없다가 그 뒤에사 제자 분들이 기억을 가지고 서로 대비(對比)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기독교의 바이블 아닙니까? 그러기에 사실은 『육조단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육조스님께서 더구나 육조스님은 또 학문적인 글공부는 안 하신 분이라고 본인도 말하셨고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 셈인데 그분이 직접으로 그것을 저술했으리라는 건 만무하고 지금으로 따지면 도지사나 되는 “ 위거(韋璩)”라는 관찰사가 육조스님을 신봉해가지고 육조스님 제자 법해스님한테 부탁해서 기록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단경』은 가장 오래된 고본(古本)이 돈황석굴(敦煌石窟)에서 발견된 이른바 돈황본이 제일 오래된 고본(古本)입니다. 가장 오래되었다 해서 사람들이 고본을 여러 가지로 존중합니다마는 그때는 다 필사본이지요, 붓으로 써 가지고 전했다 말입니다. 몇 대째까지는 그냥 필사본으로 해서 전해 오다가 나중에 가서 그것이 인쇄술의 발달로 차근차근 석판, 목판 뭐다 어쩌다 해서 나오게 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우리가 『육조단경』을 수행자가 수행(修行)본위(本位)로 생각 할 때는 굉장히 소중하다 말입니다.”
논어나 바이블이나 불경이나 간에 모두가 결국은 다 교조라든가 그런 분들 스스로 만든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마는 결국은 다 후대인들이 그 몇 백 년 통해서 깎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고 그랬다 말입니다. 무시할 라면 또 무시할 수가 있지요 고증학적(考證學的)으로 사료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그렇게 함부로 과소평가도 할 수도 있지마는 우리가 『육조단경』을 수행자가 수행(修行)본위(本位)로 생각 할 때는 굉장히 소중하다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가 진제(眞題)를 읽어 보면은 누구나가 짐작 할 수 있지마는 깨달은 그런 성자(聖者)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얼마나 절실하고 불교의 교리에 관해서 근본적인지 여러 가지 지엽(枝葉)적인 그런 구미는 다 제거하고서 그야말로 순수하게 마음 깨닫는 그 자리만 사뭇 말씀했다 말입니다. 물론 그 신수(神秀)대사하고 육조스님하고 법을 서로 받을라고 견제한 그런 대목은 유치할 수도 있지요
그런 것은 그 이른바 성자의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 대목은 서로 피차 공연히 내세우고 상대를 만들어서 보탰겠지요. 보태기도 하고 깎기도 하고 그런 작업을 많이 했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수행자의 문중에도 이렇게 유치한 사람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넘기면 됩니다. 우리가 정말로 참선 한다고 생각 할 때엔 마음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그런 점에서 보면 불교의 많은 경전 가운데서 『육조단경』같이 근본적으로 말씀한 경전(經典)은 참 드물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참 부처님 경전 아니면은 경(經)이라는 말을 못 붙이는 것인데 외형상 구성에 있어서 문제는 있지마는 『단경(檀經)』이라 경(經)자를 붙여가지고 지금까지 내려온 것은 육조스님께서 간절히 생각했던 근본정신이 살아있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서 『육조단경』을 숭상해오고 수행의 귀감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선을 말할 때는 여래선(如來禪) 그러면은 굉장히 차원이 높은 선(禪)같이 생각 되지 않습니까?
특히 달마스님이 주로 여래선을 참도(參道)를 하셨습니다. 내내야 뭐 달마스님 아니더라도 도인 같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이 여래선이니까 여래선을 말씀했겠지요. 그러나 한번 개념적으로 표현되면 내용은 같다하더라도 표현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여래선을 달마스님께서 직접 하신 고차원에 이르는 참선으로 생각하고, 염불선(念佛禪) 그러면 어쩐지 보다 차원이 낮은 거로 생각 한다 말입니다. 염불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생각 염(念)자, 부처 불(佛)자,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찾는 것이고 성불을 위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선이나 염불선이나 결국은 같은 거라 말입니다.
여래가 부처고 부처가 여래인 것이지 무슨 여래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여서 여래선 염불선이 같은 것인데 아까 말씀마따나 여래선 그러면 달마스님이 직접으로 말씀하신 차원 높은 선이고 염불선 그러면 후대의 방편적인 정도가 낮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 한다 말입니다. 그런 것도 우리가 표현의 차이 가지고서 시비(是非)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특히 불교는 어느 상(相)을 주로하고 말을 주로하고 표현을 주로 하는 데다가고 관점을 둔다고 생각 할 때는 부질없는 망상도 하고 논쟁도 하고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마땅히 우리로서는 공부 할 때에 그 본체(本體)를 안 여읜다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본체를 떠나버리면 결국은 이른바 상(相) 아닙니까? 이른바 상(相)은 현상적인 여러 가지 차별, 분별적인 그런 차원적인 것이 상(相) 인 것이고 체(體)는 인간이나 자연계나 모든 존재의 근본이 즉 말하자면 체(體) 아닙니까? 따라서 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섭상귀체(攝相歸體)라, 상을 거두어서 체(體)로 돌아간다 말입니다. 모든 공부가 다 그렇습니다. 섭상귀체라. 상을 거두어서 체로 돌아간다 말입니다. 섭상귀체가 돼야 되고 또 체(體)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한 개념을 확립해야 됩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체(體)는 이른바 자성(自性)이라 말입니다. 자성. 그러기에 자성이라 그러면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우리 개인적인 스스로 성품이 자성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보통은 범위를 좁게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자성 그럴 때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준말로 생각합니다. 겉에 부동(浮動)된 우리 인간성은 십인(十人)십색(十色)으로 될 수 있겠지마는 그 자성의, 우리마음의 본질은 뭣인가? 이걸 생각할 때는 마음이라는 것이 원래 모양이 있고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본질을 생각 할 때는 끝도 갓도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그 끝도 갓도 없는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그런 우리 인간성의 본래를 가리켜서 자성청정심 그런다 말입니다. 결국이 자성청정심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부처님 가르침인 것이고 특히 『육조단경』은 자성이란 말이 저번에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성이란 말이 백열 군데가 넘는다 말입니다. 얼마만치 자성(自性)청정심(淸淨心)이란 그 자리에서 역점을 두고 말씀했었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고 자성청정심을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그때는 바로 불성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아까 말마따나 자성 그러면은 보통은 개별적인 범위로 좁게 생각하고 불성 그러면 그때는 만유의 근본이니까 넓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결국은 자성과 불성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째서 둘이 아닌 것인가를 철학적인 사고(思考)를 우리가 이제 안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어째서 자성(自性)과 불성(佛性)이 둘이 아닌 것인가?
그것은 자성은 얼핏 생각 할 때 스스로의 성품이니까 이원적 개별적인 성품으로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그 김가나 박가나 그야말로 참 하나의 생명이니까 마땅히 자성이 다 있겠지요. 따라서 그런 김가 마음이나 박가 마음이나 우리가 겉만 생각 할 때는 당연히 차이가 있지마는 그 마음이란 것이 원래는 상이 없는 거라 말입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상이 없는 것인데 상이 없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 그때는 사방에 두루 다 통한다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심령과학이라든가 여러 가지 전생담(前生談)이라든가 그런데서도 인간성에 대해서 논의가 되지 않습니까마는 우리 인간성이라는 것이 모양이 없다고 생각 할 때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벌써 우리가 산정 할 수가 있는 문제 아닙니까? 제한이 없다고 생각 할 때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시간적으로 본다면 그때는 영원적인 것이고 공간적으로 해서는 무한(無限)한 것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그 김가 박가나 그 누구나 하여튼 자성을 궁극적으로 우리가 파고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바로 그때는 불성이라 말입니다.
부처님 불성도 역시 우리가 부처님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제한되게 생각할런가 모르지마는 내내야 석가모니부처님도 우주의 즉 말하자면 근본생명인 불성을 깨닫고서 된 분 아닙니까? 물론 불성이란 이름은 나중에 다 붙였겠지마는 하여튼 그 우주의 즉 말하자면 바로 자성인 동시에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우주생명 어떤 존재인 것인가?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무게 설명을 할 때에도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어떤 물질로 볼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가 생각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 자성이나 불성이나 우주생명은 똑 같다 말입니다. 똑 같기 때문에 이른바 하나의 생명 자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 생명 그러면 어디 있고 어디 없을 것인가 역시 또 그렇지도 않다 말입니다. 그것이 시간성 공간성이 없는 물질이 아닌 생명 자체기 때문에 그 우주의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는 것이고 물론 과거 현재 미래로 통해서도 축(縮:줄어들다) 남(濫:넘치다)이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생명 즉 불성, 자성 이것은 언제 어느 때나 어디에나 존재하는 하나의 참 에너지라고 아니 볼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느 것이나 우리 생명인 것이고 불성이고 자성이고 다 들어 있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우주라는 것은 결국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자성 아님이 없고 불성 아님이 없고 우주생명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결국 우주는 불성뿐이다 자성뿐이다 또 우주생명 뿐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맨 처음 우리가 공부 할 때에도 내가 지금 공부 하는 것이 확실한 진리를 공부 하는가 아니면 어느 부분적인 것을 가지고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게 우리가 의심을 가질 수가 또 있겠지요? 그러나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이 자성과 불성 우리생명이 본래 둘이 아니고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자리를 우리가 이해하고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 훨썩 더 우리 신념이 강해진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이해하고 하는 공부를 가리켜서 이른바 선오후수라고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고. 먼저 이치를 깨닫고서 닦아 나간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오후수가 되면 공부에 대해서 필요 없는 망상도 뗄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다 불성뿐이고 자성뿐이고 우리 생명뿐인데 다른 망상은 낼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결국은 우리 생명의 고향인 그야말로 참 불성자리 우주생명 자리로 돌아가는 거라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공부를 않고서 가만히 있으면 어쩔 것인가? 이 우주라는 것은 본래자리가 불성이기 때문에 그 개별적으로 무슨 존재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이 근본성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참 근원자리이기 때문에 그 근원에서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타고 나왔다가 시간, 공간 내에서 인연이 다하면 다시 그때는 근본으로 돌아간다 말입니다.
“오온(五蘊)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봐야 비로소 인생(人生) 고(苦)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불성에서 왔다가 다시 불성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우리가 금생에 버릇이 많이 붙어 놓으면, 현세에 자기 몸뚱이 또 물질이라든가 여러 가지에 대해서 애착을 품고 그 모양에 대한 버릇이 많이 붙어 놓으면 결국은 본래자리로 잘 안 돌아갈라 한다 말입니다. 버릇 때문에 결국은 현상적인 거기에 그냥 달라 붙어가지고 집착을 갖게 된다 말입니다. 다 그래서 마땅히 그런 그 허망 무상한 것을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은 제법(諸法)이 공(空)인 것을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런 것은 다 인연 같이 보이지만은 사실 실제는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제법공이나 또는 오온(五蘊)개공(皆空)이나 오온이라는 것은 우리 관념이라던가 물질이라던가 그런 것이 모두 오온 아닙니까? 오온개공이라, 오온이 다 비어 있다 말입니다. 오온이.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범부적인 견해에서 분명히 잘못 보니까 인연같이 보이는 것이지 우리가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오온이 다 비어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온개공이라,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봐야 비로소 인생(人生) 고(苦)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말입니다.
그렇기에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道一切苦厄)이라 그런 말씀들이 간단한 말씀이지만 진리를 그대로 도파했다 말입니다. 우리 허튼 관념이라든가 물질계라던가 이런 것들이 본래 비어 있음을 분명히 조견이라 비출 조(照)자, 볼 견(見)자, 분명히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이라 인생고를 떠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생고를 떠나지 못 하는 것은 오온이 다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내가 생각 하고 있는 관념도 있고 내 몸뚱이라던가 이 물질계가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 “제법(諸法) 망유(妄有)”라 망령된 망(妄)자, 있을 유(有)자, 망령된 게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인생고를 못 떠난다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마따나 그런 것은 다 허망한 것이고 모두가 다 이와 같이 “섭상귀체”라 얼마만치 우리가 체로 성실히 돌아 갈 것인가? 체로 돌아가는 섭상귀체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될수록 복잡한 생활은 피해야 됩니다.
가사, 감투를 쓰는 것도 감투를 쓰면 인간관계가 얼마나 복잡해집니까? 지키려고 그러고 하나 더 챙기려고 그러고, 대통령 같은 것도 상당히 좋은 자리겠지마는 그 할려고 할 때는 자기가 제일 잘나야 하고 남을 또 떨어뜨려야 되고 말입니다. 그것이 너무 지나치면 아주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전개가 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저런 상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많이 두면 둘수록 우리가 체(體)에 돌아가는 것은 더디게 되고 다 그런다 말입니다. 그래, 지금 우리가 하는 공부는 달마스님처럼 하면 결국은 여래선이라, 참선하는 경(經)으로 해서는 능가경(楞伽經)은 달마스님이 이조 혜가스님한테 거의 표신으로 해서 전수를 했다 말입니다. 그래서 능가경의 말은 여래선(如來禪)입니다. 여래라는 것은 아까도 말마따나 바로 부처기 때문에 바로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가 돼가는 선(禪)이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래선이나 염불선이나 결국은 같은 거라 말입니다. 또한 아까 말한바와 같이 자성선(自性禪)이라, 자성선도 역시 똑 같은 것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주의 본질은 바로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진여삼매라 해도 좋고 말입니다. 부처를 바로 생각하고 부처를 추구해가기 때문에 이른바 최상승선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고 해서 몸 건강하고 어떤 머리가 좋아지는 그런 세간적인 공덕을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공리적인 셈이 되기 때문에 참다운 선(禪)이 못 되지요.
참다운 선이라는 것은 본체인 자성을 안 떠나야, 불성을 안 떠나고서 오로지 불성을 추구해야 이른바 최상승선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비로소 그때야 선이란 말을 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경이나 조사어록 보면 “선시불심(禪是佛心)이오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을 말합니다. 부처의 마음이란 내내야 자성, 불성 아닙니까?
그래서 이불성, 자성은 바로 직지(直指)인심(人心)이라, 바로 그냥 그 자리를 두고서 불심이라는 그 마음을 우리가 놓치지 않고서 참구하는 그런 선이 최상승선이고 또는 진여삼매고 일행삼매고 또는 자성선이고 불성선이고 또는 여래청정선이고 염불선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불성 외에 아무 것도 다른 건 없다. 우주는 오직 불성뿐이다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나쁜 버릇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 하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은 부처 아님이 없다 불성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가 “먼저 하늘나라로부터 와서 하느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모두는 다 곁들여서 얻게 되리라.” 그런 것도 다 똑같은 뜻입니다 아까도 말씀마따나 기독교도 그 근본주의적인 그릇된 해석만 떠나 버리면 같아버린다 말입니다.
왜 그런고하면 성자인 것은 결국은 근본자리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불성이라 말하나 하느님이라 말하나 불성자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은 다 성자라 말입니다. 단지 그 표현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 생각한다 말입니다. 이른바 근본주의적인 생각 때문에 필요 없는 논쟁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것이지 우리가 성자의 본래 마음자리를 그대로 숭상하고 나간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를 위해서 통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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