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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1.보리방편문법문(5)

6. 아미타불(阿彌陀佛)

 

지금 부처님 눈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여기 계시는 여기 계시는 몇 백 명 되는 우리불자님들이 모두가 다 아미타불입니다. 다만 중생은 못 보고 성자는 본다 말입니다. 에너지가 어떻게 뭐 되든지 간에 산소가 되나 에너지가 갖다 뭣이 되나 사람 몸으로 구성돼서 사람 몸같이 보이나 에너지란 차원에서 그때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제로를 천만 번 곱한다 하더라도 제로는 제롭니다. 에너지가 어떻게 운동하나 어떻게 진동하나 빨리 진동하나 또는 느리게 진동하나 에너지는 조금도 그때는 변동이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불성(佛性)이 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성품이 말입니다. 사람 되나 개가 되나 소가 되나 독사가 되나 조금도 그때는 불성은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불성을 볼 수 있는 불성을 볼 수 있는 부처님의 청정 불안(佛眼)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라 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 눈으로 보는 부처님 눈으로 봐서 우주를 보는 그런 견해 그것이 지혜입니다. 부처님 눈으로 봐서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 눈으로 보는 우주관 인생관이 바로 여기에 있는 보리방편문 지혜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생(生)하고 또는 멸(滅)하는 죽었다 사라졌다 하고 모든 현상적인 것이 모든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모두가 다 불심 모두가 다 마음 부처라는 말이나 마음이라 하는 말이나 똑 같습니다. 우리중생은 내 마음 우리가 쓰는 마음이 남도 미워하고 좁은 것이지 이 마음의 근본마음은 부처와 더불어서 같다 말입니다 모두가 다.  또는 물질도 역시 내내야  근본은 다 마음이라 말입니다 물질이 따로 없다 말입니다. 세상의 비극은 뭣인고 하면은 물질이 따로 있다 금이 따로 있다 또는 다이아몬드가 따로 있다 또는 뭐 따로 있다 이렇게 구분을 지우는 것이니까 다이아몬드는 좋고 또는 갖다 철은 나쁘고 하겠지요. 그러나 근본은 똑같다 말입니다 근본은. 다이아몬드나 쇠나 무쇠나 근본은 다 똑 같습니다 근본은다, 다만 그것이 진동 정도 운동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근본은 못 보는 것이니까 우선 상(相)만 봐서 다이아몬드는 좋고 철은 나쁘겠지요. 근본을 보는 것이 성인이고 겉만 보는 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을 볼 수 있는 안목 부처님께서 보는 청정한 인생관 이것이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보리방편문이라 말입니다. 즉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마음의 본 바닥은 법신(法身)인 것이고 본 바닥에 들어있는 일체공덕 일체공덕은 이것은 보신(報身)인 것이고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 이것은 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인연을 본다고 생각 할 때에 인연의 밖에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아직은 이것은 인연법의 이것은 얄팍한 풀이입니다.  인연법은 모두가 다 부처님 불성가운데 있습니다. 모두가 다 어떠한 것이나 다 불성이거니 인(因)이나 연(緣)이나 모두가 다 불성입니다. 따라서 불성 가운데 있는 생명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한계가 있다 말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옆에 사람 또는 나, 나와 옆에 사람 말입니다 미운사람 고운사람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의 줄로 이어져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절대로 원수와 나와 가사 어느 누가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과 나와 사이도 역시 똑같이 연결돼있습니다. 우리중생은 못 본다 말입니다.


단순히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의 관계가 단순관계가 아니라 바로 딱 붙어 있다 말입니다. 붙어 있다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 할 때는 우주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생명이라 말입니다. 우주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서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이 이것이 부처님의 진리고 또는 그런 법문을 가장 압축된  법문으로 해서 이른바 어려운 말로하면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체성(體性) 가장 절대적인 체성 이것은 법신인 것이고 그 속에 들어있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공덕은 그때는 보신인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거기에 일어나는 일체현상은 화신이라 말입니다. 나란 것은 화신 가운데 하나 아닙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하루에 몇 번도 되뇌어서 이렇게 불교 인생관 불교 우주관을 갖다 되뇐다고 생각 할 때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느끼고 찬탄하는 이것이 내가 부처님을 느끼면서 하는 바른 염불인 것입니다. 부처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서 바로 우주의 실상 또는 나의 실상을 관찰 하면서 말입니다 음미하면서 하는 이것이 바른 염불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나의 본질 우주의 본질을 안 떠나는 공부가 참선공부인 것입니다.


참선공부와 일반 공부와 차이가 뭣인고 하면은  일반 공부는  말입니다 현상에서 그저 애써서 갖다가 올라가는 점수(漸修)로 닦아가는 것이 일반 공부인 것이고, 참선공부는 뭣인고 하면은 바닥을 딱 느끼고서 본 성품을 딱 느끼고서 본 성품 그 자리를 우리가 안 떠난다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본 체성을 딱 느끼고서 본 체성을 안 떠나려고 애쓰고 하는 공부가 이것이 참선공부라 말입니다. 이뭣고 이런 화두라든가 또는 뜰 앞에 잣나무라든가  또는 그런 화두는 모두가 다 어째서 나왔는가 하면은 근본자리를 안 떠나기 위해서 그런 자리가 나왔다 말입니다.  조주스님한테 가서 어떤 스님네가 여하시 불잇고! 부처가 뭣인가 뜰 앞에 잣나무니라.  애쓰고 부처를 찾으려고 부처가 무엇인가 물으니까 뜰 앞에 잣나무다 말입니다 조주스님한테 부처를 묻는 그 사람은 부처는 그냥 신통히 저 밖에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부처는 하느님같이 저 하늘에 있다고 생각 했겠지요, 이렇게 부처를 갖다가 밖에서 구하는 그런 마음 가지고서 물었겠지요, 그러나 깨달은 조주스님은 뜰 앞에 잣나무니라 말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뜰 앞에 잣나무나 이 컵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바로 보면 부처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하는 부처의 자리 부처의 안목으로 하는 부처의 눈을 우리 눈으로 한다고 생각 할 때는 다 부첩니다. 우리는 번뇌로 보니까 그렇게 바르게 안 보인다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다 부처로 수용하고서 부처가 보는 안목을 내 안목으로 하는 공부가 이것이 참선공부입니다. 옴마니반메흠 하든 또 우리가 갖다가 염주를 헤아리든 그런 모양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 마음이 나나 너나 천지우주가 다 본래 부처구나 천지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참선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외인다 하더라도 역시 그 지장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밖에서 구하면 저 어디 밖에가 계신다 이렇게 우리가 복 받기 위해서 구하는 부처와 나와 한계를 가려서 구하는 그것은 방편염불입니다. 이것은 참다운 염불이 못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아도 그런 복은 제한된 복밖에는 못 받습니다. 그러나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다 부처라는 것이 만 공덕을 갖춘 것인데 말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영생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것인데 영원한 생명 모든 지혜 갖추고 있는 그런 부처 그와 나와 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같이 위대한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마음 가운데 가장 좋은 마음이 뭣인고 하면은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내가 바로 부처라는 그 마음이 가장 좋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은 남과 나 남의 구분도 할 수 없다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마음을 부처한테다 머물게 하고 어느 것도 먼지 하나라도 부처가 없다. 한 먼지라도 버릴 수가 없다 말입니다. 일진(一塵)불사(不捨)라  한 먼지도 버릴 수가 없이 다 부처로구나! 이렇게 느낄 때는  우리 공부는 그때는 방편을 떠나서 진실한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이와 같이 모두를 다 불성이라 보고 마음이라 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하신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이라 말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가 다 하여튼 방편설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우리는 보통 부처님한테 애쓰고 구한다 부처님한테 가피를 우리가 인제 바란다 또는 기도를 모신다 이렇게 하면은 마음도 개운하고 우리가 인제 의지가 되는 것인데 아, 천지가 부처구나 이러면은 어쩐지 갖다 허망하구나, 이렇게 느끼는 분도 계십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계시는 그것보다도 역시 따로 계셔서 우리를 감시도 하고 우리한테 복도 주고 벌도 주는 그런 부처님 이것은 그야말로 참 이것은 하나의 미개한 종교의 대상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부처님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가 부처님인데 우주가 하나의 생명인데 말입니다. 그런 생명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상으로 무한한 부사의한 공덕이 있다 말입니다. 부처님의 자비나 지혜나 행복은 도인들이 몇 만 년을 두고도 그런 자비나 행복을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좋든지 말입니다 행복스럽고 만족스럽고 덕이 있고 복이 있는 그런 복을 부처님 복을 도인들이 무수한 도인들이 몇 만 년 몇 만 년 세어도 다 셀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런 행복이 바로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 마음 마음속에, 딴 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그런 무한히 행복이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의 별도인 부처한테 구해서 행복을 받는다 우리한테 복이 온다 우리가 좀 우리가 갖다 병을 낫는다 이정도로 이것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인 것이고 말입니다. 참다운 복은 이것은 정말로 참다운 나  참다운 부처님의 그때는 부사의한 공덕을 생각 하면서 우리가 복을 짓는다고 생각 할 때는 정말로 복도 부사의한 것입니다. 나와 부처님이 둘이 아니고 나한테 내 본심에 무한한 공덕이 갖추어있다 이렇게 믿고서 염불 할 때는 이렇게 꼭 믿고 염불 할 때는 정말로 확신 할 때는 그야말로 참 그때는 우리마음은 비약적으로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가 임종 때 가사 생전에는 그렁저렁 살았다 하더라도 염불도 하고 보시도 하고 인제 베풀기도 하고 인제 살았다하더라도 우리마음이 깨닫지 못하면은  우리 불성을 못 보겠지요, 아무리 시주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역시 그걸로 해서는 우리 불성을 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공은 되도 말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그때는 그야말로 참 우리 공(功)을 다 총 결산을 합니다. 남한테 많이 베풀고 복을 많이 지은 사람들은 그때는 죽을 때도 역시 그냥 그때는 죽는 그런 과보가 훨썩 더 좋은 그런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에 정말로 내 본심이 바로 부처구나 석가모니와 또는 아미타부처님과 나와 둘이 아니구나 또는 우리마음이 정화 되면은 내가 한 발도 안 떠나서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구나 이렇게 꼭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순간 찰나에 우리는 성불되는 것입니다. 천도식도 안 하고 그야말로 참 우리가 인제 몇 년 동안 그래저래 인제 죽은 사람을 위해서 후손들이 복을 안 빌어준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죽는 순간에 정말로 내 본마음이 부처다 내 본마음 가운데는 무한 공덕이 갖추고 있다 이것을 분명히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 할 때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비약이 돼서 그때는 그야말로 정화가 돼가지고서 바로 성불 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또는 그때뿐만이 아니라 석가모니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불 하시고 맨 처음에  다섯 비구한테 법문을 말했다 말입니다. 석가모니법문이 하도 유창하고 그야말로 참 진실하고 하기 때문에 또는 위엄이 차 있기 때문에 같이 도반들 다섯 비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한 마디 말씀 따라서 그때는 사제법문 따라서 모두가 다 그냥 도인이 됐다 말입니다 그냥. 정말로 믿으면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중생들은  그냥 보기 때문에 번뇌가 꽉 차있어 놔서 우리중생들은 바로 못 믿는다 말입니다. 정말 그럴 것인가 바로 못 믿으면 그때는 바로 못 믿은 그 마음 때문에 그 마음 때문에 우리중생 마음은 바로 바로 부처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믿는 정도가 그때그때 차이 어떤 때나 차이가 있다 말입니다.


마땅히 환희심을 내고서 믿을 때는 우리마음은 비약적으로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중생들이 비록 느낄 수 있지 못 했다 하더라도

우리 본래 마음은 부처인 것이고 또는 불성자리를 바로 도파한 법문이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 법문이라 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을 도파한 것이고 또 조금 더 구체화시켜서 분석시키면 그때는 마음의 본체는 법신인 것이고 말입니다. 법신 자리에 들어있는 일체공덕은 그때는 보신인 것이고 거기에 일어나는 일체존재는 그때는 화신이라 말입니다.  이것 다 합한 것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나도 아미타불 너도 아미타불 그때는 모두가 다  아미타불인 것이고  참다운 염불은 이와 같이 바로 우주가 우주가 바로 부처임을 느끼면서 하는 염불이 참다운 염불인 것입니다. 지장보살도 관세음보살도 모두가 이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안 떠나는 염불 염불은 바로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니라는 그런 참선 염불이 하나가 되는 하나가 되는 진실한 공부인 동시에 바로 이것이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불의 첩경인 것입니다. 바로 성자가되는 길이라 말입니다. 과업(果業)과의(?) 차이 또는 정계(淨界)와의 그런 우열차이 그런 것 저런 것이 모두가 다 이런 방편문적인 이런 이런 법(法)ㆍ보(報)ㆍ화(化) 삼신(三身) 중 가장 구경(究竟)적인 그런 법신, 거기에 들어있는 일체만유의 그런 보신, 거기에 일어나는 일체현상인 그런 화신 이런 진리 가지고서 비춰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이런 것이 미처 못 들어 있으면은 종교의 정도가 아직은 미숙한 것입니다. 기독교도 역시 성신이나 천주나 또는 우리가 인제 하느님의 아들인 그야말로 참 그런 천자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삼위일체라 삼위일체 법문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구경적인 그런 것은 다 못 돼 있습니다. 아무튼 세계 종교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불교인데 그런 가운데서 이런 체계가 가장 이것이 고도한 체계인 것입니다.  이런 체계를 마음에 두고서 공부를 하시면은 하루에 될수록  많이 읽으시면은 처음에는 모르신다 하더라도 여태까지 제가 장황히 횡설수설한 그런 말씀을 참고로 하시면서 이것을 되풀이해서 읽으시면은 그냥 과연 우리마음은 부처구나, 또는 마음의 근본은 갖다 법신이구나, 또는 보신이구나 화신이구나 이런 것을 조금씩은 납득이 되실 것입니다. 천 번 만 번 몇 십만 번 외이시면은 꼭 정말로 우리마음이 성불은 미처 못 한다 하더라도 상사각이라 아, 정말로 내 맘이 부처구나 이렇게 느낄 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하시다가 임종 때는 임종 때는 정말로 비약적으로 이른바 돈오해서 그냥 우리가 부처자리에 꼭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들한테나 손자한테나 누구한테나 내 마음자리 내가 아는 우리마음을 가장 철저히 아는 가장 간단한 동시에 가장 깊이 아는 이 법문을 꼭 가장 큰 선물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간이 너무나 지리해서 참 그렁저렁한 말씀으로 해서 제가 보다 쉽게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인데 또 역시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마는 역시 어려운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스스로 새겨서 깊은 공부를 해주셔서 무상(無上)의 행복은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리를 떠나서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어떤 누구든지 간에 기업인이나 정치인이나 다 진리를 외면해서는 참다운 정치 참다운 실업도 참다운 평등도 참다운 자유도 없습니다.  마땅히 우리가 어느 지위에 있든지 간에 진리를 염두에 두고서 본체를 안 여의는 본성을 안 여의는 그런 행동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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