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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육조단경소참법문1.(2)

“육조스님께선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 불성을 떠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체설법(離體說法)이라,”


(41페이지를 펴십시오. : 정병조님이 번역한 육조단경)


2. 오소설법(吾所說法)은, 내가 말하는 법은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자성은 불성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근본을 떠나서 현상의 상만 가지고 말하지 않습니까? 허나 육조스님께선 내가 말하는 법은 자성 불성을 떠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체설법(離體說法)이라, 체를 떠나서 말 하는 것은 결국은 명여상설(名如相說)이라 이른바 상이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체라는 것은 내내야 불성 아닙니까? 자성, 불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내가 말 하는 법인데 만일 체를 떠나서 법을 설하면 이른바 상(相)으로 상을 따지는 말이라 한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상미(自性常迷)라, 상으로 상을 따져서 상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불성이 항시 미혹 된다 말입니다. 그러니 자성, 불성 이것은 똑 같은 것인데 우리가 상을 떠나 버려야 결국은 불성에 머물러 있고 자성에 머물러 있는 것인데 상에 빠져 버리면 자성은 상미(常迷)라 항상 미혹하단 말입니다. 수지일체만법(須知一切萬法) 개종자성기용(皆從自性起用)이라 마땅히 알지니 모름지기 수(須)자 모름지기 알지니 일체만법이 개종자성생(皆從自性生)이라 모두가 다 자성으로부터 일어난다 말입니다.


어떤 것이나 자성 즉 불성을 의지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잘나나 못나나 선(善)이나 악(惡)이나 그것도 역시 우리중생이 중생 차원에서 선이요 악이요 그런 것이지 모든 걸 다 근본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상에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모두가 자성이라는 하나의 불성에서 일어난다 말입니다. 일체만법이 모두 개종자성생이라, 모두 결국은 자성, 불성으로 일어난다 말입니다. 용(用)을 일으킨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자성에서 일어난다고 그렇게 안다고 생각 할 때는 시진(是眞)계정혜법(戒定慧法)이라, 이렇게 아는 것이 벌써 참다운 계요, 정이요, 혜요 이른바 삼학도(三學道)라 말입니다. 우리가 가령 그야말로 오계를 받는다 십계를 받는다 계를 받지 않습니까? 계를 받더라도 그냥 뭐 살생하지 말라,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그런 것은 하나의 상(相)이라 말입니다.


계상(戒相)이라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가 바로 불성인데 불성 그러면 만능 자리인데 말입니다.  불성, 자성이 시원찮은 자리 같으면 될 것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자성, 불성은 만능의 자리이기 때문에 만능의  자리인 이른바 만 공덕의 자리인 이 자리로 부터서 모든 법이 나왔다 이렇게 생각 하면 벌써 거기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걸로 해서 이른바 참다운 계(戒)와 정(定)과 혜(慧)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살계를 안 받습니까? 사람들은 보살계하고 일반계하고 잘 구분을 못 합니다. 보통 5계나 10계나 그런 계는 그 계상(戒相),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거짓말 말라, 그런 계상을 주로해서 상 차원으로 해서 말씀한 계라 말입니다.


그러나 보살계는 불성계라, 보살계는 불성계라 합니다. 이른바 불성 그 자리를 발휘 하는 그런 계라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무상계라 없을무(無)자 상이 없는 계(戒)라 말입니다.

상이 없는 계, 그러니까 소승계는 이른바 상이 있는 유상계라 말입니다. 아까 말한바와 같이 5계나 10계나 그런 것은 유상(有相), 상이 있는 계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성계는 상이 없다 말입니다. 여기도 무상계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 무상계(無相戒), 불성계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면은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다 불성으로 조차서 이른바 영혼을 일으킨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일체만법이 다 불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아는 이것이 벌써 참다운 계를 지키는 것이고 또는 선정을 지키는 것이고 지혜를 닦는 것이 된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청우게왈(請又偈曰) 지금 내가 말하는 게송을 들어라 말입니다.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요. 심지는 즉 말하자면 불성의 자리라 말입니다. 불성의 자리 심지(心地)에는 자성계라, 불성의 계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심지무치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요. 지혜(智慧)도 보통 뭐 좀 똑똑히 알고 그런 정도가 아니라 불성에 들어 있는 무한의 참다운 지혜기 때문에 이렇게 불성 일체 존재가 모두 다 불성에서 나왔다 이렇게 벌써 알면은 우리 마음자리가 불성무치자성혜(佛性無痴自性慧)라, 마음자리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심에서 그때그때 마음자리가 미처 못 되고 우리 중생의 상에 걸려야 어리석은 것이지 벌써 마음자리는 만능의 자리기 때문에 결국은 마음자리가 나투게 되면은 그때는 어리석음이 없는 참다운 이것이 지혜라 말입니다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이라, 이 마음 심지 불성자리에는 산란스럽다거나 혼란이 없다 말입니다.


이런 자리가 자성의 정이라, 정(定) 이란 것은 삼매(三昧) 즉 말하자면 선(禪)을 말합니다. 불성이라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다  자성에서 비추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부증문(不增門) 부증불멸(不增不滅) 자금강(紫金岡)이라, 그때 자리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기 때문에 더하지 않고 멸하지도 않는 자금강(紫金岡)이라  말입니다. 마치 금강석 모양으로 변함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심거심래본삼매(心去心來本三昧)라, 우리 몸이 가나오나 어디가 있으나 이른바 본래삼매가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우리가 선을 여의지 않는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참선이란 것은 결국은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마음의 자성 즉 불성을 여의지 않으면은 몸이 가나 몸이 오나 말을 하나 어디 있으나 그야말로 참다운 참선이라 말입니다.


* 질문


「스님, 그런데 왜 중국의 불교 풍토가 꼭 그렇게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해서 앉아야만 참선이 된다 이런 인식이 박혀 있습니까?」


- 그래 이것이 또 참 중요하거든. 먼저 참선을 할 때는 아까 말마따나 본체를 안 여의어야 참선이거든. 한데, 그 자리가 바로 부처는 아니란 말이야 가령, 본래에서 보면 우리가 공부를 좀 더하고 덜하고 그런 것도 우리 중생차원에서 봐서는 깊고 얕고 차이가 있지마는 본래 부처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우주가 다 자성, 불성뿐이라 말이야. 자성, 불성은 높낮이나 깊고 얕은 것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야. 더 완벽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 완벽한 자리를 미처 깨닫지를 못 한다 말이야. 즉 따라서 우리가 참선을 위해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애써 가부좌 틀고 앉고 그런 것은 모두  뭣인가 하면, 우리가 그렇게 아는 것은 그야말로 참 이론적 철학적으로 아는 것이지 참답게 부처의 공덕이 지금 나와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 즉 말하자면 이치로 해서 이론적으로  참 그렇겠구나  모두가 다 불성뿐이고 자성뿐이고 그렇구나!


이렇게 느낀다 하더라도 그렇게 느끼기만 할 뿐인 것이지 금생에 버릇을 녹여서 우리가 무슨 신통을 한다거나 또는 도인이 된다 그런 것도 아니란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나쁜 버릇, 금생에도 그 얼마나 부정적인 버릇을 많이 지었는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것도 하나의 버릇이거든. 자타(自他)가 본래는 없는 것인데 그런 버릇이 금생뿐만이 아니라 또 과거 오랜 세월동안에 몇 생을 거쳐 오면서 또 역시 버릇을 많이 지어 왔단 말이야. 불교말로 하면은 이른바 습기라. 구생(俱生: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갖추어 있는 번뇌)의 습기라. 구생번뇌라. 생과 더불어서 가지고 온 번뇌기 때문에 금생에 지은 버릇 또는 과거 전생 무렵부터 가져온 버릇, 그런 버릇을 없애야 이른바 참다운 부처의 힘이 생긴다 말이야. 그러지 않고서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서 부처한테 들어있는 자비나 지혜나 그런 무량공덕이 나오질 않는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부좌를 하고 그야말로 참 애쓰고자 지키고 그렇게 해서 버릇을 차근차근 소멸을 시켜야 그때는 나오거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6년 고행이라 몇 년 고행이라 고행도 하고 그러는 거거든. 우리가 그런 근기를 또 갖기가 쉽지가 않네.  업장이 무거워 놓으면 아까도 말마따나 상(相)에만 갔다 왔다 걸려가지고 오락가락 하고 이치를 설사 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잡고서 몇 년 동안이고 나가는 것이 잡았다고 할 수가 없거든. 그것은 아주 선근이 좋고 끈기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아까 말한 오랫동안 닦아야 금생의 버릇, 전생의 버릇 없애 가지고서 본래의 자성 불성자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참다웁게 이른바 실천적으로 우리가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험을 해야 부처가 되고 성자가 되고 하는 것이지 체험 없이 될 것인가?”


부처가 될 그야말로 참 근원적인 철학적인 논리적인 깨달음인 것이지. 그것이 참다웁게 이른바 실천적으로 우리가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험을 해야 부처가 되고 성자가 되고 하는 것이지 체험 없이 될 것인가?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선오(先悟)후수(後修)라, 후수(後修)가 있어야 되거든 후수를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가부좌 틀고 앉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은 고생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저마다는 못해, 저마다는 말야, 그런 점에서 OO은 내가 생각 할 때에는 참 잘한 셈이거든. 그것이 그렇게 해서 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지 이치로 좀 안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버리면 그때는 불교 학자나 포교사나 되었지 말이야 성인은 못 되지 않겠는가?


* 질문


「그 윤회는 상에 집착되면 계속 윤회 하지 않습니까?」


-그러지요.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서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까? 그것도 상을 더 집착하게 만드는 그런 결과가 아닌지요?」


-네, 그러니까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경(經)을 읽어 드려야 됩니다. 경(經)의 내용은 다 상(相)을 터는 것이니까 법성게나 반야심경이나 금강경 모두가 상(相)을 터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경을 읽어 드려야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제사 모실 적에 천도를 해 드리면 좋지요.  .


「계속 반복적으로 윤회를 할 때에 그 조상이 다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제사 지내는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많이 듭니다.」

 

-예, 우리가 윤회를 못 벗어나면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만  아까 말씀마따나 돌아가신 분들한테 가장 잘하는 것은 돌아가신 분들도 역시 그 영혼으로 해서 오랫동안 계시지 않고 영혼자리에서 바로 해탈 하면 더욱 좋고 그렇게 못 되면 천상이나 태어나고 천상에 태어나면 보다 더 해탈하기가 쉬우니까 말입니다. 


「근데 윤회를 해가지고 축생의 몸을 받았다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받았다거나 뭔가를 받았는데 그런 상태에 자꾸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그것도 의미가 깊이 있겠습니까?」


-네, 그렇게 설사 돌아가신 우리네 부모가 축생이 되었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주는데 우리가 설사 법문을 못 하고 불경을 외고 천도를 못 한다 하더라도 그 정성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성은, 저 영국에 가서 아들이 있다고 생각 할 때에 한국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마음으로 아들의 행복을 간절히 기원한다고 할 때는 기원 하는 그 정성이 전파보다 더 빠른 거거든요. 그냥 즉시에 간다 말입니다.


정성이 얼마만치 깊을 것인가 정도에 따라서 아들한테 가는 것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축생으로 태어나는 우리 부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있는 분이 정성을 들이면 그 정성만치는 그야말로 축생에서 행복을 더 받는다 말입니다. 축생보(畜生報)를 빨리 끝내고 나올 수가 있다든가 그런 것이거든요. 지옥도 그래요. 지옥도 나쁘다고 해서 영원히 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옥도 한계가 있거든. 그것은 내내야 업장만치 받거든. 그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후손들이 정성들이고 제사 모시고 하면은, 부처님 법문으로 해서 천도를 하고 불경을 읽어 드리면은 더욱 좋지마는 그렇게 못 한다 하더라도 공만 들여도 그때는 그만치 지옥이나 그런데서 득을 받아 지옥(地獄)고(苦)를 덜 받는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아까 말마따나 어느 누구마음이나 마음 본체가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라는 것은 무한공덕이 차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마만치 공덕이 있는 것인데 가령 지옥에 있는 자들을 생각 한다 하더라도 아! 지옥에 있지만 저 사람들도 내내야 본래 다 부처구나! 이렇게 생각하고서 공을 들이면은 훨썩 공덕이 크거든. 그만치 보다 더 강렬하고 신념이 깃들기 때문에 신념이라는 것은 마음의 공덕으로 우주에 통하는 하나의 에너지 아닌가.


* 질문


「업감(業感), 보통 우리가 업장을 지으면 받고 하는 연기를 업감(業感)연기(緣起)라고 얘기하잖아요. 근데 그 연기가 항상 윤회하는 연기가 아니고 지금 새로 시작하는 그런 인연도 있는 건가요? 항상 전생이나 과거생 부터 이어온 어떤 관계나 인연이 아니고 지금 새로 시작해서 맺어지는 그런 인연도 있는 건가요.」


-있겠지요. 그것은, 그런데 생명자체는 이른바 독립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관성이 있단 말입니다. 어느 것이나 다. 저 미국에서 하나의 나무가 움직이는 양상자체가 나와 남의 관계가 없다 이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생이 생각 할 때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마는 우주에 있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그야말로 중중무진이라, 하나의 티끌이나 모두가 서로 다 상관된 관계가 있다 말입니다. 관계가 보다 더 가깝고 멀고 인연이 가깝고 멀고 차이일 뿐인 것이지 다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그때는 과거부터서 금생으로 인연이 쭉 내려오고 업감연기로 업을 지어 놓으면 업을 지은대로는 금생에 받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 업도 자기생명 국한에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과 더불어서 관계성으로 해서 받으니까 그야말로 새로 짓기도 하고 다시 업종자가 돼서 거기에 플러스가 되고 그러겠지요. 업감연기는 연기법 가운데서 업을 짓고 받는 저차원의 연기인데 그 업감연기의 근본은 뭣인가? 이럴 때는 업감이나 업이나 뭣이나 모두가 다 근본은 진여불성이라 말입니다. 업감연기는  업을 지어 놓으면 업(業)으로 해서 고(苦)를 받고 한다는 중생차원에서 업감연기를 말하는 것이지 그 업 자체의 본질이 뭣인가 하면 업의 본질도 역시 진여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나 진여(眞如)연기(緣起)라, 결국은 참 근본적인 뜻에서는 아까 말한바와 같이 부처 아님이 없다고 하듯이 다 진여뿐이라 말입니다. 진여는 결국 불성을 말한 것인데 불성이나 진여나 똑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업감연기 할 때는 중생의 차원에서 업을 짓고 받고 그런 것에 국한 된 것이고 업 자체가 본바탕은 또 진여이기에 진여연기가 돼야 본래 참다운 연기입니다. 연기법에서 업감연기, 아뢰야연기, 진여연기 모두 그렇게 있는 가운데서 진여연기가 돼야  부처님께서 하신 참다운 본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생활이 어떻게 자기생활을 하든지 간에 우리마음이 불성을 지향해서 한걸음씩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인생에서 그야말로 참 자기생명의 본래적인 길을 허투로 안 보내는 셈이 되겠지요. 아무리 애쓰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영원을 지향해서 안 나가면 그때는 별로 의의가 없고 말입니다. 남한테 봉사 하고 여러 가지 것을 다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좋기는 좋은데 하나의 선(善)은 되어도 남과 더불어서 영원으로 지향해 나가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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