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소참법문 2.
“부처님 말씀은 같이 다해봐야 보다 더 자기도 버려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진리에 따라서 얘기해야, 그래야 진리성이 더욱더 빛나지 않겠습니까. ”
1. 부처님 말씀은 같이 다해봐야 보다 더 자기도 버려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진리에 따라서 얘기해야, 그래야 진리성이 더욱더 빛나지 않겠습니까. 육조단경을 번역한다는 것도 역시 제가 학문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주저가 안 되는 바가 아니어요. 그러나 학자 분들은 학자 분들을 위해서 문헌학적(文獻學的)하고 있고 우리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수행자의 견지(見地)에서 또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질문
「요즘에는 신해(信解)적으로 수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급속히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예, 예, 참 바람직한 일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들은 우리 사회의 진보라든가 발달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또 끝나면 끝나는 대로 해서 앞으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자각도 들겠지요. 공산주의 돼도 그것이 별것도 아닌 것이고, 여러 가지로 경험을 많이 해봤지마는 모두가 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고 다 시행착오를 겪고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전체적인 이른바 총합적인 그런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지성인들에 있어서는 당연히 일어나야 되겠지요?
결국 생각해보면 역시 우리 정치의 질적인 문제라 말입니다. 정치의 질적(質的)인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질적 문제로 생각 할 때는 또 역시 우리 마음을 닦는다는 것에 관심을 안 둘 수가 없겠지요? 그러기에 명상법도 별스런 명상법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자기 스스로 자기의 무지를 알아야 한다고 하듯이 천재적인 성자가 아닌 사람들은 천재적인 성자가 해 놓은 것을 따라서 가야지 미숙한 사람들이 자기 식으로 무엇을 또 만들라고 생각 할 때는 도리어 혼란만 가중을 시킵니다.
질문
「요즘에는 어떤 명상 단체에서는 7일 만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광고를 내고 요즘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한 것을 이용을 해서 그러는데 마음은 조급하고 뭔가 정신적인 것은 알고 싶고 .....」
-그래요. 산에 가서 기도를 좀 모시고 또 기독교 재림(再臨),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이름 붙여 가지고 종말론을 부르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았습니까마는 교회가면 날짜까지 주고 쓰고, 얼마나 허망한 일이 많습니까? 그와 같이 가여운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또 자의식 과잉이라, 자기를 뭐라고 내세우고 싶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가 천재적인 성자가 아니면은 우리 스스로 자기를 반성해 보면 알 일 아닙니까? 성자가 아니라면 역시 성인들이 해봐서 오랜 세월동안 결과적으로 점검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따라 공부를 하고 생명을 던져서 순교도 하는 그런것에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지 그냥 고식적으로 눈앞의 여러가지 공리적인 그런 것에 마음을 둔다고 생각 할 때는 생명의 낭비라고 밖에 할 수가 없겠지요?
『육조단경』을 열심히 보면 우리가 참선 할 때 달마스님 이후에 얼마만치 열성을 들이고 얼마만치 견성(見性)오도(悟道)를 우리한테 역설했는가 읽어보면 알거든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생명이 묻어있고 생명이 약동해 있거든, 일반사람들이 그런 것을 놓쳐버리고서 그냥 겉으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 별로 가치가 없고 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로 후대인들이 아무렇게나 위작(僞作)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비판 할 수도 있으나 정말로 그 속에 들어있는 생명을 감득할 때는 다르거든. 그리고 성자의 말씀이 아니면은 그렇게 절실한 말씀이 나올 수가 없어 그러기에 그 ◯◯◯가 “견성오도란 말은 후대인들이 육조스님 그 당시에 말한 것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말한 것이 틀림이 없다. 일본 도원(道元:일본 조동종을 개조(開祖)한 스님)선사(禪師) 같은 분도 『육조단경』에 견성(見性)이란 말이 있기 때문에 이 『육조단경』을 위경(僞經)이라고 말했다”고 말한 대목이 있어.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좁다랗게 생각한 것이 되거든. 일본 도원선사 같은 사람은 일본 사람의 조동종(曹洞宗)파에서는 도인(道人)이라고 하지마는 공인(公認)된 성자로 해서 우리가 추앙 하는 사람은 또 아니거든. 그런데 그 사람 말을 인용하면서 견성오도란 말이 단경에 있기 때문에 육조스님께서 직접으로 말씀 한 것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조작을 한 위작에 불과하다는 그런 투로 말한 대목이 있거든. 그러기에 우리가 인용할 때도 불경을 놓고 해제 글을 쓰고 서문을 쓰고 할 때라도 마땅히 도인이 아닌 사람들 말을 함부로 인용할 필요가 없어, 혼란을 주니까 말이야.
그 사람을 보면 자성(自性)하고 불성(佛性)하고 별도로 생각한다 말입니다. 같은 것이어서 같이 생각해야 되는 데 단경에서는 해석이 국한됩니다. 저는 그래서 『단경』을 팔십 쯤 되여서 낼까 생각하고 태호스님한테 제 서재에 있는 『단경』하고 관계있는 책을 가져오라해서 다시 또 봤습니다마는 지금은 번역할 생각이 안납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내가 지금 번역한다고 생각할 때는 내 주장을 배제하고서 낼 수 없지 않는가?. 내 주장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성싶어. 첫째는, 단경이 진짠가 가짠가 또 육조스님께서 직접 찬수를 했는가, 안 했는가, 하는 그 문제부터서 논의까지 문제가 돼 있으니까.
“우리가 부처가 되면 무슨 말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는 공덕이 따라야 되거든. 삼명육통이라,”
질문
「아니, 그래도 하시면은 후학들이 좀 더 연구도하고 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스님.」
- 그런 점에선 나도 할라고 생각을 한 것인데, 물론 지금도 황혼이 다 됐지마는 어른이 되면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어려워 특히 지금 가장 중요한 점을 들어보면 견성하면 바로 성불이라, 견성하면 바로 성불이라고 주장한다 말입니다. 후수(後修)가 없이 뒤에 닦음이 없이. 그러면은 견성(見性)에는, 그 부처님 성불(成佛)이라는 성불에는 공덕이 있지 않은가 이른바 삼명(三明)육통(六通)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면 무슨 말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는 공덕이 따라야 되거든. 삼명육통이라, 숙명통(宿命通)은 말하자면 과거에 통달하고 말입니다. 자기 과거를 적당히 좀 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무시이래 과거를 소급해 올라가 끝도 갓도 없는 때로부터 지금까지를 다 안다 말입니다.
그리고 천안통(天眼通)은 뭣인가? 천안통은 내내야 하늘 천(天)자, 눈 안(眼)자. 이것은 지금 현재 세계를 다 내다보고 동시에 미래를 다 통달하는 그런 지혜가 천안통이라 말입니다. 그리고 누진통(漏盡通)은 뭣인가? 누진통은 모든 번뇌를 다 끊어 버린다 말입니다. 누(漏)는 번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진통이라는 누(漏)는 번뇌와 같거든 그러니까 번뇌가 다 끝나는 것이 누진통이거든. 그래서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이 세 개를 통해야 비로소 삼명통이라 말입니다. 그리고 육통(六通)은 뭣인가? 삼명통에 다가 타심통(他心通)이라 남의 마음을 다 안다 말입니다. 남 타(他)자, 마음 심(心)자. 타심통. 그리고 신여의통(身如意通:神足通)이라, 신여의통은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 말입니다. 자기 몸을 차갑게 할라하면 하고 우주에 가득 차게 할라하면 하고 말입니다. 이런 통(通)을 성불(成佛)하면 다 돼야 할 것인데 그런 공덕이 없으면 성불했다고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리고 또 삼명육통을 다 한 분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존께서는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정통조사는 다 했다고 보거든. 부처님 일대기를 본다든가, 경전을 보면 신통 자재하는 신비부사의한 그런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 그걸 본다고 생각 할 때에 그래도 성불이 됐으면은 그런 공덕을 다 갖춰야 될 것인데, 그 내내야 견성이 성불이라 해 놓으면 돈오(頓悟)가 바로 성불(成佛)인 것이니까 그 뒤에 다시 또 닦는다 하는 이른바 후수(後修)문제 다시 말하면 점수(漸修)문제 점점 닦는다고 점수 문제, 이 점수가 없다는 것인데 보조국사(普照國師:1158~1210)는 점수가 있다 그랬거든. 보조국사뿐만이 아니라 불교 팔만사천법문이 모두가 다 마음이 통해서도 그것이 부처님지위 즉 말하자면, 불지(佛地)라 말이야. 불지까지 미처 못가면 결국 또 닦아가지고 가는 것이 있다고 했다 말이야. 거기 따라서 보조스님이나 그 분들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온당하니 했는데, 아까 말마따나 거기에서 다 끝나버려서 더 이상 점수가 없고 그것이 바로 깨달은 불지(佛地)라고 그렇게 말씀을 했기 때문에, 혹시 그 『원통불법의 요체』를 보셨는가 모르겠습니다.
원통불법의 요체에다가 내가 완곡하게 비판을 했어, 그래서 그런 것 저런 것 생각을 해서 고려하기로 했는데, 다만 그러나 해제(解題)문제 서문(序文)에 다가 대체로 요체(要諦)를 써야 되거든 그래야 책을 내는 보람이 있는 것이지 그냥 한문 재해석(再解釋)하고만 말아 버리면 책을 새로 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질문
「 그래도 지금 안 하시면 또 언제라고 기약 할 수도 없고요, 그냥 스님 생각 주창(主唱)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판을 않더라도 그것이 비판이 될 수밖에 없어. 아까 말마따나 주장을 내세우니까 주장이 정면으로 상치가 되지 않던가? 우리가 그 십식(十識)이라, 열 가지 식(識)이란 말이야. 우리가 보통 쓰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있지 않습니까?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이것은 일반 우리 중생이 쓰는 육식(六識) 아닙니까? 육식에다가 제 칠식(七識)이 칠식보고 말나식(末那識) 그래요. 불교 심리학이 즉 말하자면 유식론(唯識論)입니다. 불교심리학, 유식이라는 것은 오직 유(唯)자, 오직 우주가 식(識) 뿐이란 말입니다. 식뿐이니까 마음하고 같이 통하지 않겠습니까? 유식은 또 유심(唯心)이라고도 그래요. 오직 우주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는 이른바 유물론(唯物論)이 아니라 관념론(觀念論)이고 유심론(唯心論)이기 때문에 결국 불교는 유심론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요. 우주라는 것은 산도 있고 일월성수(日月星宿)도 있고 하지마는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의식의 대상으로 해서 의식에서 인식한 것이지 이른바 물(物)자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아까도 말마따나 산 그러면 산의 본래자리가 뭣인가, 산의 근원이 뭣인가 말입니다. 산의 근원을 따지려면 원자로 분석하고 소립자로 분석하고 그렇게 들어가야 되겠지요, 그렇게 하다가 더 들어가면 하나의 에너지가 될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그런 제한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분명히 산은 산이지마는 내(川)는 내야 산 자체는 분석해 들어갈 때는 에너지가, 될 것이고 에너지는 무엇인가? 에너지 저편은 현대 물리학도 모르지 않습니까? 산도 결국은 우리가 그렇기에 몰라 버린다 말입니다. 어떤 존재든지 파고 들어가면 끝에 가서는 뭣인지 몰라 버린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칸트말로는 물(物) 자체라, 칸트의 중요한 철학설이 뭣인가 하면 물질자체는 우리 인간의 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인간의 제한된 이론체계라든가, 이성내에서 아는 것이지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뿌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이른바 칸트의 물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물자체를 우리가 알려고 하면 측관(測觀)으로 순수한 순심적인 측관으로 알려면 모르거니와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해서는 알 수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생들이 아는 것은 결국은 우리 인간정도의 생각에서 아는 것인데 그 인간 정도의 말을 하기 위해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부처님법문이 또 있어요. 같은 물이지마는 중생 따라서 네 가지로 본다 말입니다. 사람이 본다면 결국 물 아닙니까? 또 거기서 사는 고기가 본다면 자기 집이고 말입니다. 또 귀신이 본다고 생각할 때 귀신이 보는 견해에서 우리 인간은 알 수가 없지요. 성인들이 귀신 정도의 경계를 따져서 말씀을 하니까 우리가 거기에 따라서 말 하는 것이지 귀신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결국은 물을 불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묘 자리나 그런 것도 수분이 있는 곳은 제일 싫어합니다. 그럼 천상인간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천상은 또 우리 인간에게는 안 보이니까 어떻게 생각 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천상도 분명히 있는 것인데 천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을 청정한 유리로 본다는 것입니다. 보통 유리가 아니라 구슬유리 말입니다. 보배유리. 그럼 부처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의 성품으로 본다 말입니다. 우리가 속담에도 부처가 보면 다 부처로 보이고 돼지가 보면 돼지로 보인다는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은 같은 물인데도 사람이 보면 물로 보지마는 부처가 볼 때는 다 하나의 불성으로 볼 것이고 하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업장 정도만큼 보는 것이지 사물의 실체는 못 본다 말입니다.
“『단경』에 삼신(三身)자성(自性)이라 내성품의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
그래서 모든 존재가 오직 식(識)뿐이다. 오직 마음뿐이다. 부처님 경계에서 일체만유의 근원을 통달해서 그러는 것이지 우리 중생들이야 산은 산대로 있고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대로 있고 그렇게 소박하니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칠식(第七識) 부터는 불교 술어로 해서 말나식 그래요. 그러면 제칠식(第七識) 말나식의 근본은 또 뭣인가. 우리가 쓰는 건 육식(六識)까지인데 육식의 근본이 말나식이고 말나식의 근본은 제팔식(第八識)이란 말입니다. 팔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아뢰야식의 근본은 뭣인가? 차근차근 파고 들어가야 논리적으로 그야말로 합당한 문제 아닙니까. 아뢰야식으로 끝나버리면 아뢰야식은 별것도 아닌데 그거로 해서는 근원적인 문제가 되지도 않는 것이고 아뢰야식의 근본은 제구(第九) 암마라식(菴摩羅識)이란 말입니다. 암마라식의 근본은 또 뭣인가? 이렇게 파고 들어가면 이른바 제(第) 십식(十識)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이제 불(佛)이란 말입니다. 십식으로 보태면 불식(佛識)이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 중생은 식의 진화 정도가 육식인 의식까지 해서 죽었다가 낳았다가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까? 육식까지 밖에는 모르는데 우리가 깊은 명상을 해 들어간다고 생각할 때는 육식의 근본인 말나식까지 볼 수가 있고 또 더 들어가면은 아뢰야식이라, 암마라식이라, 불식이라. 그러니까 그 『단경』에서 말하는 자성이라는 이것도 보통 우리가 생각 할 때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성 그러면 의식정도 밖에는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행히 부처님 가르침을 의지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 우리 인간성의 근본은 지금 우리가 의식밖에 사용 못하고 있지만 잠재적으로 있는 것은 결국은 다 불식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자성은 불식까지 돼야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할 때에도 가령, 우리가 어떤 염불을 하고 화두를 의심해서 참구하고 할 때에도 내 스스로의 인간성의 근본 뿌리는 육식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과 내가 미처 아직은 개발을 못하고 아직은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내 뿌리가 불식이다.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 하는 것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 불식(佛識)이라는 불식 내에 함장 되어 있는 것은 어떤 공덕이 있는 것인가? 불식에 들어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그 『단경』에 삼신(三身)자성(自性)이라 내성품의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우리 자성(自性) 가운데는 그냥 자성이라 해서 깊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성 가운데 청정법신불이 들어있고 또는 원만보신이 들어 있고 천백억화신이 들어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뭣인고 하면은 육조스님께서 단상에 올라가서 하신 가장 핵심법문이 “그대들로 하여금 일체 삼신(三身)자성불(自性佛)이라” 그렇게 『단경』에서는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체 삼신 자성불을 이해를 못 하면은 『단경』을 봤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일체 삼신자성불이라 법신ㆍ 보신ㆍ 화신 삼신이 세 몸이 아니라 말입니다. 오직 그 원융한 하나의 몸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 근본성품이라 말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보통 수준에서 자기면 자기라고 그렇게 소박하니 생각하고 마는 셈인데 성자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존재가 우리 인간성을 위시해서 다 일체 삼신자성불로 구성돼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단경』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마는 제가 번역한다고 생각 할 때는 그 돈황본이 제일 오래된 것입니다. 돈황본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을 보면은 육조스님께서 일반 대중한테 대해서 “여러분이 지금 나 따라 내 입을 따라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세 번씩 하시오.” 이렇게 삼창을 시켰어요. 제가 삼창한 것을 가져와서 보여드리지요. 이것이 돈황본인데 본래 필사해서 한 800년 세월동안 돈황석굴에 묻혀 있다가 1910년대에 영국사람 탐험대에 의해 이것이 유포가 됐지요.
여기 삼창이 있지요. 삼창. 세 번씩 육조스님 따라서 외우라 한 거거든요. 얼마만치 여기다 역점을 두었으면 그와 같이 자기를 따라서 세 번씩이나 외우라고 했겠습니까? 그런 정도로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들 본래가 아니고 당신들 본래면목은 결국은 다 삼신불(三身佛)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부처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믿고 이 자리를 개발하는 것이 이른바 『단경』의 가장 중요한 요체라 말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다 십식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불식, 이것이 아까 말한바와 같이 일체 삼신자성불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성을 다 개발했다고 생각 할 때는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삼명육통을 다 응당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견성이 견성으로 끝나버렸다면 견성이라는 것이 이 『단경』에서 말씀한 것으로 우선 봐서는 자기가 미처 증명은 못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 본래 마음자리가 부처라고 생각하는, 즉 말하자면 불성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견성 아닙니까? 볼 견(見)자 성품 성(性)자 “내 본래 성품이 내 자성이고 그것이 내 성품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은 견성이 될 것인데 “견성” 그것이 바로 성불이다. 그래 버리면 성불이라는 것이 그와 같이 쉽고 무슨 공리도 없는 것이라고 하면 신통할 것도 없지 않는가? 이것도 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까 유식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유식론은 불교적 심리학이지요. 유식론에서는 “유식5위”란 (칠판에 쓰시면서) 다른 것은 좀 복잡합니다만 유식5위는 간단하니까 “유식5위”란 우리 중생이 우리 마음 근원인 아까 말한 바 불식(佛識) 말입니다. 불식까지를 깨닫는 하나의 단계라 말입니다. 단계가 다섯 단계가 있는데 이것은 외워 두면 편리합니다.
우리가 성불하고자 해서 맨 처음에 말하는 자료 자(資)자, 식량이란 량(糧)자 말입니다. 자량(資糧)이란 뭣인고 하면 먼 길 갈려면 먼 길 갈만한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겠지요? 식량도 필요하고 뭣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수행 준비를 하는 그런 단계가 자량위(資糧位)입니다. 가사, 몸도 건강해야 할 것이고 이것저것 책도 보고 확실한 신앙심을 굳혀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준비가 됐으면은 정작 닦아야 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가야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정작 닦는 그런 지위가 가행위(加行位)입니다. 그러니까 가행정진이란 말 쓰지 않습니까? 준비가 됐으면 그 때는 애쓰고 힘을 모아 정진을 한다 말입니다. 그 가행이 그렁저렁 돼 버리면 중도이탈이 되고 말 수도 있지마는 가행을 바로 했으면 그때는 통달(通達)이라, 가행했으면 통달을 해야겠지요. 통달. 그러니까 이 닦는 과정을 몰라버리면 암중모색 합니다. 과정을 분명히 알아두어야 그야말로 참 중간까지 가가지고 다 됐다고 하는 그런 망동을 않게 되겠지요? 그래서 준비를 시원찮이 하면 그때는 가행정진이 못됩니다. 그러나 준비를 단단히 해서 확실한 신앙심이 생기면 자량위 준비를 잘했다고 볼 수가 있고 그렇게 돼야 가행(加行)이 된다 말입니다. 가행이 잘 돼야 통달위(通達位)라, 이른바 자기 마음을 통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견성을 하고, 이제 견성이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견성이 통달됐으니까 말입니다. 여기에서 끝나버리면 아직은 불지(佛地)가 못됐는데 부처가 되였다 해버리면 그것이 큰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수습위(修習位)라, 부처까지 구경(究竟) 즉 말하자면 아주 완벽한 성자가 될라 하면 또 닦아야 한다 말입니다. 견성한 뒤에 성불까지 닦는 것은 화엄경(華嚴經)식으로 말하면 보살(菩薩) 십지(十地)라 그래요. 보살 초지에서 통달이 되고 더욱 닦아 가지고 2지 3지 4지 이렇게 올라가서 열 단계에 올라가야 이른바 불지(佛地)인 구경지(究竟地)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수습위는 열 단계를 올라가는 닦아서 올라가는 그런 위치라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판에 구경위라 . 이때는 그야말로 성불하는 자리라 말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우리 수행자가 닦아나가는 여러 가지 경계에 대한 법문이 많이 있는데 가장 간단한 것이 이것이어요. 우리가 성불하려고 준비를 하고 준비를 한 다음에는 마땅히 애쓰고 자기 힘을 다해서 가행을 해야 될 것이고 가행할 때 바르게 했다고 생각 할 때는 통달위라 그때는 견성오도하는 그런 지위를 얻는 것이지만 그것도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그것을 닦아 나간다 말입니다. 닦아 나가면 2지(地) 3지(地) 올라가게 되고 구경위라, 성불하는 지위가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닦아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단계적인 소양이 없어 놓으면 오류를 범하지 않겠습니까?
“이치로 깨닫는 것이 해오(解悟) 아닌가? “아, 그렇구나! 이론적으로 내가 막힘이 없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우리가 체험을 해야 되거든. ”
2. 질문
「스님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분류가 되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애써한다고 해도 가행위도 아니고 자량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 그래. 이 자량위라는 것이 이치로는 어느 정도 막힘이 없어야 되거든. 그래서 가장 기초에서 중요한 것은 해석할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解悟)고 또 증오(證悟)라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선방에서 공부하는 수행자들도 사실은 맨 처음인 자량위에서 교육을 많이 받아야 돼. 어느 정도는 그래야 공부도 빠르고 괜찮은데 자량위에서 시원찮아 놓으면 고생만 많이 하고 얻음이 적다 말이야. 그러기에 이치로 깨닫는 것이 해오(解悟) 아닌가? “아, 그렇구나! 이론적으로 내가 막힘이 없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걸 우리가 체험을 해야 되거든. 체험을 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앉아서 그야말로 몇 십 년이고 수행하지 않는가? 그래야 증명이 오거든 증오(證悟)가. 그러니까 강원 나왔다고 해서 선방에 바로 보내 봐도 스승도 특별난게 없고 본인들도 자량위가 미처 안 돼놔서 아직은 준비가 못돼 있다 말이야, 그러니 이치로라도 먼저 선방 들어가기 전에 너무 세밀히는 안 된다 하더라도 대체로 암중선(暗中禪), 암중모색하는 정도는 면해야 되거든, 아까 말마따나 자량위에서 교리적인 해석을 다해서 본인이 “아, 이러면 토굴에 가서 혼자 공부를 해도 별로 손해는 없겠구나!” 이렇게 돼야 그때 비로소 가행정진을 한다 말이야.
가행정진 할 때는 뭐 새삼스럽게 책 보고 할 필요가 없이 닦으면 되는 것이니까 길목도 알았으니까 이 가행위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선근(四善根)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가행위하고 사선근은 같은 것이야. 같은 것인데 사선근은 어째서 그러는 것인가? 난법(煖法), 이것은 따스울 난(煖)자야. 그 다음에는 이마 정(頂)자, 정법(頂法)이고. 그 다음 참을 인(忍)자, 인법(忍法)이라 말이야. 그 다음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우리가 견성(見性)오도(悟道)하기 전에 가행정진 할 때 한계를 알아 두면 그때는 헤매지를 않거든, 그러니 나는 금타(金陀) 대화상님에 대해서 감사한 것이 뭣인고 하면 나란 사람이 어떻게 그걸 다 알 것인가? 그런 스승이 문자로 체계를 세워 놓았으니까 그냥 보고 느끼는 것이지. 그런데 이것은 원래 금타(金陀)스님께서 만든 것이 아니거든. 본래 있는 것인데 근래 모두 불립문자라고 참선 하면 문자를 볼 필요도 없이 앉아서 통하면 된다는 그런 식으로 나갔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원래 불경(佛經)에 다 있는 거거든 .
난법(煖法), 이것은 준비를 해가지고서 닦으면 이제 마음이 맑아져서 몸도 시원하니 몸에서 부담이 없다 말이야. 마치 전류에 감전된 모양으로 그냥 등골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그런 단계, 이것이 난법이거든. 그러니 그런 단계가 안 오면 결국은 업장이 무겁다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 참선이라는 것은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고 또 무슨 병이 있어도 웬만한 잔병은 붙어 있지도 못 하고 그래야 참선하는 보람이 있는 것이지, 참선해서 혼침(昏沈)만 막 오고 몸도 무겁고 그러면 벌써 아직은 자량위에 대해서 준비가 덜 돼있단 말이야. 그러니 하여튼 몸도 마음도 시원스럽게 되고 또 뭣이 어두운 것이 오락가락 하다가도 활짝 개는 그런 걸 느끼고 말이야.
그렇게 해서 있다가 공부를 거기서 끝내버리면 또 후퇴가 되는 거거든 그때는 더욱 더 임박한 가행이라, 가행하는 것을 안 쉬고 더욱더 빛나는 것이거든 가행공덕이라 가행정진이라 그래서 난법에서 시원스런 경계가 와서 쉬지 않고 애써서 닦아나가면 그때는 맑은 달 같은 것이 오락가락 하는 정법이란 말이야 맑은 기운이 더 증가가 되어서 그렇게 하다가 인법(忍法)에서는 정법(頂法)보다 더 맑아져서 아까 나오던 달이 줄었다가 늘였다가 그와 같이 불교 전문술어로 광협(廣狹)자재(自在)라, 자기가 넓히고 줄이고 하는 것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때가 인법이거든. 그러니까 내내야 차근차근 맑아 온다 말이야.
질문
「 순서대로 나타나는 겁니까?」
순서대로지. 순서대로이나 역시 그 사람 근기 따라서 비약적으로 가는 수가 있거든. 여기에서 바로 여기로 가는 수가 있는 것이고 그래. (칠판에 쓰신 것을 가리키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꼭 이런 순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대체로 이것 보고 법상 그래. 법상(法相)이 뭣인고 하면 정다웁게 나오는 것이니까 환상(幻相)이 아니라 말이야, 그래서 인법은 아까 말마따나 더욱 더 맑아져서 달 같은 것이 넓혀지고 좁혀지고 광협(廣狹)이라, 신축자재를 한다 말이야 그리고 세제일법(世第一法)은 인간에서는 제일가는 법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여기까지는 아직은 다 범부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닦는 수행자기 때문에 그런 가운데서는 우리 범부지(凡夫地)에서는 제일가는 법이다 말이야. 이때는 정말 달 같은 것이 빛을 내서 아주 빛나는 그런 해와 같단 말이야 그것보고 심일(心日)이라 그래. 마음 심(心)자, 날 일(日)자. 이 단계에서는 심월(心月) 그러고 말이야. 아직은, 여기도 심월이거든 똑같이. (칠판에 써 놓으신 것을 가리킴) 그러니 세제일법에서는 그야말로 달 같은 것이 해와 같은 걸로 해서 빛을 발한다 말이야.
질문
「십년, 이십년 제방에 다녀도 요거만 하고 있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그러면요?」
- 그래, 그런 것이 업장소관이야. 공부하는 방법도 문제고 그래. 그리고 여기를 거쳐야 견성이 온다 말이야.
질문
「요만큼만 느꼈는데도 큰 공부가 됐다고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겠습니다.」
-그러지. 심월이 아주 재미가 보통 재밌지가 않거든.
그러니까 이런 과정을 한국 승가나 일본 승가나 대체로 다 그래, 과정을 무시한다 말이야 과정을. 불립문자 거기만 요점을 두고서 그래버리면 그야말로 암중모색이라, 그전에 제가 말한바와 같이 암중선이란 말입니다.
질문
「원통불법의 요체를 저희들은 한 10번 이상 봤거든요. 그래서 내용은 알았었는데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니까 이제 그게 이해가 갑니다. 아, 그렇구나 하고.....」
질문
「자량위에 대해서는 설명하신 게 오늘 처음이신 것 같아요. 가행위에 대해서만 설명을 하시고 자량위에 대해서는 저는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이라는 것도 내내야 무량광불이야. 아미타불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빛나 있다 말이야.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질인 것이고.”
- 예, (웃으시며) 저도 기회가 없었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이 공부 하는 사람들한테 사실 꼭 필요한 거거든 말이야. 그래야 얼마만치 공부가 됐는지 자기 스스로를 점검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여기까지 순서있게 법상을 거쳐 가는 분도 있고 또 강하다거나 업장이 가벼워 놓으면 비약적으로 가는 수가 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육조스님 같은 분들은 아주 천재적인 분이였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갈 수가 있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보통 우리들은 이렇게 순서 있게만 가도 그것이 좋거든. 그런데 순서 있게도 못 가고 자네 말마따나 더러는 자량위에서 그대로 머물러 버리는 수가 있어.
이런데 있어서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부처 가운데는 행복과 지혜와 자비와 많은 공덕이 다 들어있다는 이미지가 굉장히 필요해. 그런 본래 자성(自性) 나한테는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이 다 내 마음에 갖추고 있고 다만 내가 느끼지 못해서 못 볼 뿐이거든 본래 있는 것인데 말이야. 그래서 그 자리를 화두라든가 염불이라든가 그런 것이 모두 다 구경적인 끄트머리 그 자리에다가 초점을 맞추거든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부처란 것은 무량공덕이기 때문에 무량공덕은 바로 부처 아닌가. 아미타불이라는 것도 내내야 무량광불이야. 아미타불의 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빛나 있다 말이야.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질인 것이고.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결국은 “오! 주여” 한다는 그것이 그네들은 인간 각자에 다 주가 들어있다고는 안보거든. 예수님만 하느님 아들이지, 그러나 바이블에 보면 예수의 본뜻은 그렇지 않아. 어떤 누구나가 예수와 같거든. 본래가 다 하느님이 들어 있거든. 모두에게 다 하느님이 들어 있다는 것과 우리에게 부처가 다 들어 있다 는 것은 같거든. 그러니까 이제 성자라는 것은 성자 아니면 모르거니와 성자라는 것은 벌써 우주를 통달 했으니까 말이야. 마땅히 그때는 같을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 우리 마음에 자성공덕, 자성이 원래 들어있다.
이 우주라는 것은 내가 깨달은 뒤가 아니라 본래 훤히 빛나는 것인데 우리가 지금 업장 때문에 느끼질 못하거든. 내 스스로도 그래. 내가 아직 부족 하다고 느낄 때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 할 것이고 옆에서도 그럴 것이나 지금 내가 자네를 볼 때도 “아, 저사람 아직은 여전히 범부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 이거든 이 사람도 똑같이 부처가 빛나 있거든 말이야. 다만 본인도 못 느끼고 옆에서도 못 느낀다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라마 크리슈티나, 지금부터 100년 전에 인도에서 돌아가신 분인데 아주 참 그야말로 현대에 있어서 석존이라고 숭앙도 하고 그러는 분이거든. 그 라마 크리슈티나도 “우주에 존재 하는 것은 다 브라만 신뿐입니다.” 우주에는 하나의 순수 생명뿐이거든. 생명을 우리가 얼마만치 느끼고 아는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 것인데 우리 마음이 어두우면 어두운만치 밖에 모르거든. 그때는 말이야. 그래서 우리 공부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아까도 말마따나 이 자성불(自性佛), 내가 지금 아직은 부처를 깨달아서 못 볼 뿐인 것이지 원래 부처는 그대로 조금도 흠절 없이 나한테 빛나있다 말이야.
그렇게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공부해야 공부가 빠르거든. 대승과 소승도 그래. 원칙은 우주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해지면 대승이란 말이야. 그래야 결국은 돈오(頓悟)고 말이야, 그게. 닦은 뒤에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인 것인데 우리 스스로가 못 느끼고 다른 사람도 못 해주고 그뿐이란 말이야. 그 훤히 빛나는 우주가 다 부처뿐이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공부해야 그야말로 원래 진리에 아주 참 합법이란 말이야. 원래 진리에 맞는 법이기 때문에 공부가 빠르거든, 우리 중생들이 나는 김 아무개, 박 아무개요 이런 것은 우주에 맞는 법이 아니거든. 그것이 우리 중생이 아무렇게나 스스로 자기 업장을 생각하는 것이지 진리에 맞는 것이 아니거든. 왜 그런고 하면 우주라는 것은 다 부처뿐인데 부처 아닌 것은 없는 것인데 다 부처라고 생각해야 그것이 맞는 법이란 말이야. 그래야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단 말이야.
질문
「화두 하는 분들은 육조단경을 강의 하면서도 거기다 화두법을 실어서 ......」
-그래 내내 육조스님께서 화두법을 말한 것은 한 군데도 없는데 공부를 할 때는 화두를 들어라는 거거든.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 육조스님께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 삼신(三身) 자성불(自性佛)을 외우게 한 것은 거기에 귀의해서 살라는 거거든. 그러니 따지고 보면 내내야 여래선이나 염불선이 되지 않겠는가. 부처를 염(念)해야 되거든. 부처를.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염해야 되거든. 부처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니까 말이야. 또 우주의 본질이고 ....
참선이라는 것은 안락법문입니다. 제일 간편한 것입니다.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고 우주 생긴 대로 지금 하는 거라 말입니다. 사실대로 말이야.
질문
「참선하는데 조금 소양은 적어도 앉아 있는데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래. 그것은 좋지. 업장이 그만큼 가벼운 셈이야. 가볍거든.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선방에 앉으면 자꾸만 몸만 부스럭거리고 불편을 느끼고 그래. 그리고 거기에서 너무나 무리가 되는 것이니까 병사고. 하여튼 음식이 또 굉장히 중요한 것이거든 음식 많이 먹으면 절대로 공부를 못해. 그러니 음식을 조절해서 소화 잘 되게 시리 조금 먹고 말이야. 특히 밤에는 정말로 소화 잘 되는 걸로 조금 먹는 둥 마는 둥해야 되거든. 부처님께서 오후불식을 말한 것이 그냥 식량이 부족하니까 오후불식 하라는 게 아니거든 공부는 부처님께서 정한 계율대로 모두가 다 공부에 꼭 필요한 것이야 모두가 말이야. 이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사선근위(四善根位) 이것은 공부하려면 꼭 필요 한 거거든 빠르고 더디고는 인간들의 이 근기 차이인 것이지 우리가 다 거쳐야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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