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안 된 것이 없고 우주가 마음뿐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화엄경』거기도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모두가 결국은 마음으로 돼 있다 말입니다.
2. 지리산에서 지낼 때에 언젠가 얘기 했는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천왕봉 밑에 부도암이라는 암자가 있었어요. 조그만한 암자인데 제가 거기서 두 철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처사가 그 뒤에 살았어요. 처사도 보통 처사가 아니라 자기 평생 수도한다는 그런 처사입니다.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 거기에 독사가 많이 나와요. 그때 처사가 약간 과장을 좀 했는가 모르겠지마는 독사가 나오다가 “네 이놈! 거기 섰어” 하면 독사가 못 가고 선다고 그래요 그 사람 보면은 그렇게도 생각이 돼요. 사람이 워낙 강해놔서 저 사람한테는 정말로 범이고 뭐고 달싹 못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강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그와 같이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안 된 것이 없고 우주가 마음뿐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화엄경』 거기도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모두가 결국은 마음으로 돼 있다 말입니다. 다만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마음으로 됐다는 것을 여실하게 읽을 수 있는데 우리 중생은 상에 갇혀서 자꾸 상만 세우고 상만 배우고 하기 때문에 마음이 둔화되어 모두가 마음이라는 깊은 도리를 제대로 느끼지 못 한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경에 보면 법묘추요물정(法妙麤要物情)이라, 그런 좋은 말씀이 있어요. 법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법(法)할 때는 달마, 진리를 의미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본묘(本妙)라, 본래는 아주 묘한 것인데 법이라는 것은 본래는 하나의 불심이고 청정심이고 법신ㆍ 보신 ㆍ화신이니까 묘한 신묘(神妙)한 진리가 다 포함돼 있다고 봐야 되겠지요.
그와 같이 법이라는 것은 원래 지극히 신묘한 것인데 추요물정이라, 거칠 추(麤)자, 좋지 않게 보이는 것은 물정(物情)으로 말미암아서 그런다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일체 물질은 본래 없다 말입니다. 중생이 물질을 본래는 모르니까 광물이 따로 있고 다이아몬드가 따로 있다고 보지마는 물질의 본질도 내내야 마음뿐이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안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묘하게 보일 것인데 묘하게 안 보이고 거칠게 보이는 것은 물정(物情)이라, 물질에 대한 중생의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말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범부 중생이니까 우리 눈에는 틀림없이 모두가 묘하게 안 보이겠지요.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은 모든 성자들의 실천이라든가 체험이라든가 그런 증명을 우리가 믿으니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안보이더라도 모든 것은 다 신묘하고 마음뿐인데 범부기 때문에 범부의 마음으로 보니까 추하게 보이구나! 이렇게 참회를 해야 되겠지요.
질문
「 제가 『육조단경』을 보니까 저는 한문 실력이 별로 없어서 해석본을 쭉 봤었는데 법문내용이 참 쉬워서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볼 수 있게 해놓은 위대하고 좋은 경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쭉 보면 『정명경(淨名經)』이라는 경이 있는데 그건 어느 경을 말씀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정명경』. 『유마경(維摩經)』 보고 그래. 유마거사를 정명거사라고도 그래. 그러니까 사실은 한문이라는 문화권에 들어서 한문을 상용으로 안 쓰기 때문에 어렵게 보이지 본뜻은 간단명료하거든 나는 한문학자가 아닌데 『단경』을 꼭 다시 번역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뭣인고 하면은 학자 분들은 좋은 책이니까 번역한다고 보통 하지 않는가? 그래서 『단경』도 훌륭한 경전이니까 번역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다르거든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런 식으로 공부하고 거기다 우리 온 생명을 경유하고서 번역하기 때문에 일반학자들의 번역은 우리 번역과는 좀 다르다 말이야 그런데서 아까 자네가 말한 대로 사실 바로 하면 참 쉬운거거든. 본체에서 본 다고 생각할 때 내내야 그 말 그대로 어김없이 연속되어간다 말일세. 아까 말한바와 같이 백 열군데 넘게 자성불(自性佛) 얘기를 하거든. 내내야 우리 본래 인간성에 들어있는 삼신불인 것이고 말이야 자성불을 깨달아라는 그 말씀이거든. 그것이 비단 육조스님뿐만이 아니라 달마 때부터 내려오는 똑같은 말씀이란 말이야 약간 초음은 다르다 하더라도 또 굳이 비단 달마 때 뿐만이 아니라 부처님 팔만법문의 가장 핵심이거든.
질문
「스님, 우리가 깨달음이라고 할 때 깨달음은 무슨 신성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고 참된 인간됨이라 이런 것을 제가 어디서 봤습니다. 깨달음이라는 건 참된 인간됨이고 인격(人格)의 완성이라는데 우리는 인격을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 그래, 우리가 성인 신성할 성(聖)자, 고요할 성(聖)자, 성인하고 참다운 사람하고 둘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야 깨달으면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고 성인은 바로 참다운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성인(聖人)과 현자(賢者)를 구분해서 말하는 분도 있고 한 번에 다 합해서 말 하는 분도 있고 그래. 그런데 현자라는 것은 성인이 되고자 해서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따라서 실천 공경해야 되지 않겠는가? 성인이 되고자 해서 모든 행동을 주의하고 도덕적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하자가 없는 그런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가장 선량한 사람이 현자고 말이야. 그리고 성자라는 것은 본래면목을 온전히 깨달아서 인격완성한 사람이 성자란 말이야. 지금 『단경』도 돈황본, 덕이본, 종보본 등 모두 다섯 가지 종류가 있어. 각기 특색이 좀 다른데 『육조단경』을 아주 훌륭한 책이라고 찬탄해서 송나라때 연규대사가 게송으로 찬문(撰文)을 썼는데 물론 이 분은 아주 대문장가고 당대의 훌륭한 선지식이어서 수식을 많이 했어, 말에다가 수식을 많이 해 놓으니까 『단경』은 그야말로 간단명료하니 딱딱 집기만 집어줘야 되는데 글을 좀 잘 쓴다고 해서 찬탄하는 말이지만 수식을 많이 해 놓으니까 내가 생각 할 때는 하나의 사족(蛇足) 같이 별 신비롭지 않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은 뗄라고 생각해. 누군가가 찬탄하고 찬탄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경은 『단경』대로 해서 충분히 이른바 완벽한 훌륭한 경(經)이거든. 그리고 내가 제대로 하여 누구나 다 간단명료하게 보도록 중요한 것이지 아름답게 문장을 꾸며가지고 한 것은 도리어 마음을 그마만치 혼란스럽게 하는 그런 염려도 없지 않아 있어.
질문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육조단경』스터디가 있어 참석해서 들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강의해주는 사람은 보통 역사적인 그런 걸 찾아 가지고 내용보다는 이게 왜 이렇게 해서 위경(僞經)이라느니 아니면 하나의 허구라느니 그래서 그냥 하나의 소설로 알고 있었습니다. 일행삼매(一行三昧), 일상삼매(一相三昧)라는 이 속의 중요한 말씀들을 스터디 했는데도 그런 데에 대해서는 강의도 별로 없었고 저희들도 연구를 하는 게 그 시대상황이라든가 부수적인 걸 찾아 가지고 발표하고 그랬던 스터디가 있었습니다. 『육조단경』을 연구하는 반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단경』의 중요한 포인트를 딱 잡고서 역시 그 본래 청정한 자성불(自性佛) 자리를 우리한테 역설하고 우리가 깨닫게끔 한다는 그 점을 아주 온전히 파악 해야지
-그래, 『육조단경』세미나가 한두 번 있는 게 아니여. 여러 차례 중국, 서구 학자들도 다 모여서 특히 그 ◯박사도 자기가 일본 가서 공부를 해놓으니까 그러겠지만 그 사람이 여러 가지 재주가 있어 놔서 그런 모임을 많이 만들었거든. 거기에 나온 연구논문을 나도 보고 했지마는 모두 참고가 되고 그래. 주로 역사적인 사료에 관해서 시야(是也)비야(非也)를 많이 하지 단경에 들어 있는 핵심 가르침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하는 점이 있는데 일본 동경대학 다마끼고지로라는 분이 지금 죽었는가 살았는가 모르겠어 그때도 명예 교수로 나이가 거의 팔십 된 분이었는데 그이가 낸 논문을 보니까 번뜩하니 참고가 되더라니까. 그게 뭣인고 하면 『단경』을 아까 자네 말마따나 거짓으로 뒷사람들이 만들었다 어쨌다 하는 그런 여러 가지 말들이 많이 있거든 말이야. 그리고 육조스님께서 신수대사하고 같이 법을 겨루던 그 게송 있지 않은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염진애(何處染塵埃)’ 하는 그런 게송문제도 그래 여러 가지 말이 많이 있는데, 게송문제도 본래무일물하면은 결국은 모두가 다 없다고 부정하기 때문에 본래무일물이라고 한 데도 있고 또는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 이라하는데도 있고 그래. 그러니까 박한영(朴漢永:1870-1948)스님 같은 분들은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 이라고 했으면은 불성이 원래 청정한 것이라 계율이 잘 설 것인데, 우리 한국에서 지금 계율을 무시하는 것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해버리니까 계율이 안 선다는 그런 말씀도 했는데 내가 생각 할 때는 그것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봤다고 생각이 되거든. 그러니까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고 아까 말마따나 『단경』의 중요한 포인트를 딱 잡고서 역시 그 본래 청정한 자성불(自性佛) 자리를 우리한테 역설하고 우리가 깨닫게끔 한다는 그 점을 아주 온전히 파악 해야지 그 점을 떠나서 자구(字句) 몇 자 해석여하로 그런 문제 가지고선 시야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거든. 그래서 그 ◯박사도 여러 차례 『단경』을 꺼내서 외국 학자들과 같이 토론도 하고 회(會)를 만들었거든 나도 그 회(會)를 잘 아는데, 보니까 자기도 거기에 한 몫 끼어서 『단경』에 들어있는 자구해석 가지고서 옳네 그르네 하는 그런 쪽에다 초점을 맞추었지 『단경』정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안 두었더라니까.
그러니 우리가 할일은 『단경』정신 문제란 말이야. 그러면 또 『단경』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이 공부하는 문제에 들어가서는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이야. 일행삼매가 돼야 되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단경』을 이래저래 여러 가지로 해서 천착(穿鑿)하고 참 그야말로 연구를 한다 하더라도 단경이 위대하다 그러면은 내 스스로 『단경』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런 것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말을 안했는데 아까 말마따나 동경대학교 명예교수 그이는 임제종(臨濟宗)파인데 자기도 참선을 해 가지고서 일본서 자기 조사(祖師)한테 자기 공부한 걸 말해가지고서 공부가 다 되었다고 인가(認可)를 받았다고 그래, 받아놓고 공부를 해보면 자기가 통한 것 같지도 않은데 통했다고 하니까 공연히 ‘나를 잘못 생각해가지고 인가를 했구나’ 그렇게 생각이 되어서 세 번째나 인가를 받았다는 거거든. 그래 해서도 나중에 보면은 내가 아직은 성자가 못 되는데 내 인가가 바른 것인가? 그래서 나중에 『단경』을 다시 보니까 정말로 온전히 불타(佛陀)가 들어가는 그런 삼매(三昧)를 경과해야 되는 것을 삼매(三昧)를 경과하지 않고서 그냥 이론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맞게스리 얘기하면 옳다고 인가를 해주고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는 걸 자기가 느꼈다고 그때 했더라니까. 그러니 『단경』내에서는 삼매에 들어가라 어쩌라 그런 말을 별로 없으나 결국 본인이 공부해가지고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신 일행삼매로 간다고 생각 할 때는 응당 삼매에 안 들어 갈 수가 없다 말이야.
육조스님께서 다시 또 일러 말하기를 “그대들이 만약 일체종지를 성취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달할지니라.” 여기서 종지(宗旨)라는 것은 부처가 갖는 모든 지혜내용을 가르켜 일상삼매라는 것은 뭐 간단히 말하면 천지우주를 불성 하나로 본다 말이야 우주는 다 일상(一相)이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일상삼매라, 일행삼매는 천지우주를 불성 하나로 보는 그 자리를 계속해서 생각 생각에 안 놓치고서 해 나가는 공부가 일행삼매라 말이야. 일행삼매를 공부할 때는 염불삼매라. 내내야 부처를 생각한다는 것이 그때는 바로 자성을 찾는다는 것이니까. 염불이라는 것은 부처를 생각 한다는 것은 우주 자체를 생각 하는 것인데 염불이라 하면 사람들은 아주 그냥 뭐 쉽구나 생각 한단 말이야. 부처가 돼서 우리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 그 개념 자체가 나까지도 포함한 우주를 말하기 때문에 염불이라는 것은 결국은 바로 우주를 몽땅 생각 한다는 것이나 같거든 그냥 아주 단편으로 사람들에게 쉽게 얘기하기 위해서 염불을 말하지만 염불의 본뜻은 아까 말한바와 같이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란 말이야. 그래서 어떤 것이나 깊은 공부는 염불이 안 될 수가 없거든. 우리가 부처를 생각 않고서 무슨 공부가 될 것인가? 부처를 생각 하고 부처를 깨닫는 것이 불교데 말이야.
그래서 일상삼매는 우주가 오직 하나의 불성뿐이다. 이것이 일상삼매고 일행삼매는 하나의 부처뿐인 그 자리를 끊임없이 그대로 생각 생각에 이어 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이야. 그래서 부처의 심심미묘한 지혜를 통달하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달할지니라. 그러면 마치 땅에다 종자를 묻어 놓으면 종자가 습기를 흡수하고 태양광선을 빨아들여 차근차근 익어서 열매가 맺듯이 우리 공부도 본래 부처인지라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계속해서 한다고 생각할 때는 결국 나중에 부처가 되어 간다는 그런 식이거든. 불경의 어느 경전이나 부촉품(咐囑品)이라는 것은 결론이나 같거든. 그래서 이와 같이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닦으라는, 닦아야 여래의 모든 지혜를 다 성취 할 수 있다는 그런 것인데 그 핵심 실천공부가 아까 말한바와 같이 염불공부거든. 그러기 때문에 염불선, 이행선(易行禪) 그런 것이 뭣인고 하면 이 여래라는 것도 부처거든. 여래는 바로 부처 아닌가 그러니까 여래를 생각하는 선(禪), 여래를 안 떠나는 선(禪)이 바로 염불선이란 말이야. 그리고 이행선이라 가장 쉬운 선(禪)이라는 것은 뭣인고 하면 우리가 화두를 의심하고 뭣을 하고 그러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 아닌가? 의심이라는 것도 어떻게 의심할 것인가? 또는 의심이 많으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고 하나의 의혹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갈등되는 것인데 의심도 뭣도 없이 생긴 대로 본래 부처기 때문에 부처를 생각한단 말이야. 생긴 그대로 닦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쉬운 선(禪)이라 말이야.
그리고 무생선(無生禪)이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경계는 인연 따라서 천차만별로 이루어지는 현상이기 때문에 복잡하지마는 본래 있어서는 불생불멸로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말이야. 어째 그런고 하면 일체 만법이 인연소생이기 때문인데 불교 핵심이 연기법(緣起法) 아닌가? 연기법이거든 연기법이라는 것이 인연 따라서 생기는 법이 연기법인데 심심미묘한 연기법이라는 것이 뭣인고 하면 모든 존재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낸다 말이야. 내 몸뚱이나 이 지구라든가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내서 그대로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도 그야말로 머무름이 없이 변화무상 한다 말이야. 무엇이 이루어져서 시간, 공간 중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있다고 할 것인데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생겨나서 순간 찰나도 멈추지 않고서 변화하기 때문에 있다고 볼 수가 없다 말이야. 내 몸이나 산이나 냇이나 모두가 이것이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인데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은 그와 같이 변화하고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본래 생겨남이 없다 말이야.
본래 생겨나야 존재하고 있다하는 말이지 잠시간 인연 따라서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마는 그것이 변화해 버리니까 결국은 있지도 않다 말이야. 그와 같이 모두가 본래로 있지도 않은 그 자리를 바로 느끼고 닦는 자리기 때문에 무생선(無生禪)이라. 또는 불성 그대로, 불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깨달은 뒤에 불성이 아니라 아까 말한바와 같이 우리 눈으로 봐서 있다는 것은 하나의 허상이고 환상에 불과하거든. 환상이고 허상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 이해를 잘 못한다 말이야.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범상한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소박하니 다 있어 보인다 말이야. 나무는 나무로 보이고 풀은 풀로 보이고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인데 우리가 엄격히 인연을 생각할 때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든 존재가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 있지는 않다 말이야. 그러니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그야말로 오온(五蘊)개공(皆空)이라. 또는 불생불멸이라 그런 것이 다 진리 그대로 말하기 때문에 쉬운 것 같지마는 우주의 본질을 그대로 꿰뚫어서 말했다 말이야. 오온개공도 오온(五蘊)이 뭣인고 하면 정신이나 물질이나 모든 것을 다 통틀어서 오온이라 한다 말이야. 오온개공이라, 오온이 다 비었다 말이야.
오온이 다 비었다고 비추어봐야 비로소 도(度)일체고액(一切苦厄)이라, 인생고를 떠난다 말이야.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인생고를 떠나는 것이지 그냥 있다고 생각하고 ‘나‘라는 몸도 존재하고 저것도 그대로 존재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소박한 견해로 해서는 인생고를 못 떠난다 말이야. 인생고라는 것은 죽음도 인생고인데 그런 생로병사라든가 모든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본래 진리를 우리가 알아야 떠난다 말이야. 본래 진리란 뭣인가? 오온이 개공(皆空)한 자리란 말이야. 오온은 뭣인가? 정신과 물질 그런 것이 오온이란 말이야. 근데 그 오온이 다 개(皆)자 빌 공(空)자 다 비었단 말이야. 그런데 자네더러 정신과 물질이 다 비었다 하면 직감으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말이야 그러나 사실은 다 빈 거란 말이야. 오온이 어째서 다 비었는가? 인연생이라, 실지로는 없는 것인데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말이야.
저번에도 말했지마는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가 뭣인고 하면 불교는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마는 간단한 가운데 심심미묘한 진리가 다 포함돼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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