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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육조단경소참법문 4.(2)

“비파사나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고공(苦空)무상(無常)무아(無我)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뤄졌기 때문에 우리가 안락스럽다고 생각한 것도 따지고 보면 고(苦)가 기본이 되어서 안락이 온다 말입니다”


2. 그 다음은 비파사나라. 비파사나라는 것은 다 들어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비파사나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고공(苦空)무상(無常)무아(無我)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뤄졌기 때문에 우리가 안락스럽다고 생각한 것도 따지고 보면 고(苦)가 기본이 되어서 안락이 온다 말입니다. 또 안락스러운 것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얼마 안 있으면 늙어지고 아파지고 죽어지고 그것도 고(苦)로 해서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인생은  모두가 다 고(苦)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이른바 인생고를 우리가 직시한다 말입니다. 그리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이른바 참 무상하다 말입니다. 항상이 없다 말입니다. 또 잠시간뿐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이라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법은 시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항상이 없이 금방금방 변화무상하기 때문에 그때는 무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공(空)이라 말입니다. 무상이고 공인지라 결국은 ‘나’라고 고집할 수 없는 무아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비파사나 이것은 현실적인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비파사나는 관법(觀法)이란 뜻인데 지금 버마나 태국이나 스리랑카 그런데는 비파사나를 주로 하지요. 더구나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서 초기에 말씀하신 그런 법문이기 때문에 그것의 내용은 고공(苦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 그러면 어째서 이와 같이 두 번이나 나왔는가 하면은 같은 고공ㆍ무상ㆍ무아를 관찰해도 맨 처음에는 한 번에 다 관찰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별상념주(別相念住)라,  차근차근 하나씩 떼어서 말입니다.


 인생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고(苦)뿐이구나 또 인연을 따라서 인생에 있는 것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구나! 무상한 것이니까 공인 것이구나 공인 것이니까 무아라 말입니다. 이와 같이 냉철하게 우리가 현실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말입니다. 비파사나와 사념주관이나 같은 뜻입니다. 인도말로 해서 비파사나고 우리말로 따져보면 사념주관이지요. 한데 이것과 이것이 다른 것은 뭣인가 하면 맨 처음에는 고공ㆍ 무상ㆍ 무아를 한 번에 관찰하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따로따로 나누어서 관찰한 것이 별상념주고 나중에는 뜻이 명료하니 이해가 되니까 그때는 한 번에 관찰한 것이 총상념주(總相念住)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까 식으로 말하면 자량위라, 지혜와 복덕을 준비해두고서 그 다음에는 하나의 수행법이 확립이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 자리에서 사선근을 닦아 간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선근은 무턱대고 닦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복덕으로 보나 지혜를 관조하는 법으로 보나 기초가 선 다음에 이른바 가행정진 해 간다 말입니다. 이것도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차적인 명상이 또 있다 말입니다.  사선정ㆍ 사공정ㆍ 멸진정, 멸진정을 성취 해버려야 비로소 참다운 도인이 되고 성인이 돼 간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멸진정을 완벽하니 이룬 것은 보살십지까지 가야 완벽히 이룬 것이고 맨 처음에 멸진정을 음미해서 멸진정을 어느 정도 들어가는 미세한 번뇌는 못 떼었다 하더라도 이치에 있는 거친 번뇌는 끊어 버려야 멸진정을 음미한다 말입니다. 멸진정은 견성오도하는 그때부터 성불까지 사뭇 닦아갑니다. 여기까지가 우리 수행체계의 전부라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은 다만 우리 수행체계뿐만 아니라 실지로 우리가 금생에 생을 마치고 태어나는 것도 맨 처음에 인간 정도밖에 선근을 못 심었으면 다시 인간으로 태어 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선근을 더 깊이 심었다고 생각할 때에 가령 십선근이라, 열 가지 선을 닦고 참선도 좀해서 명상도 깊어지고 그래 놓으면 우리가 하늘에 태어난다 말입니다. 하늘도 내내야 욕계, 색계, 무색계가 있습니다. 이 사선정(四禪定)부터는 같은 하늘나라도 이른바 색계이상에 해당한다 말입니다. 그리고 사선정은 무색계가 되는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이쪽까지 선정에 못 가면 항시 욕계에서 욕계의 범주 내에서 오락가락 윤회하고 헤맨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같은 명상을 한다 하더라도 이 사선정의 영역 내에 들어가야 비로소 욕계는 떠나는 셈이지요.  욕심이라는 것은 사선정부터는 욕심이 없습니다. 초선 막 들어가면 이때부터는 남녀도 성(性)이 없다 말입니다. 초월해 버린다 말입니다. 욕계의 범위 내에서만 남녀 성이 있고 그러는 것이지 색계이상에는 남녀 성을 다 초월해 버리는 셈이지요. 그러기에 기독교의 수녀 신부라든가 불교의 비구ㆍ비구니나 기본적인 자세가 성을 초월했다는 그런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질문 있으면 하세요. 아까 말씀마따나 이것이 부처님 수행체계이기 때문에 이 관념은 꼭 필요합니다. 과정을 잘 몰라서 이른바 사선근 가운데 난법상만 들어가서 마음이 개운해가지고 공부가 무던히 되었다 해서 함부로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렇게 알아두면 내 공부가 아직은 멀었구나 하는 것을 그때그때 느낄 수가 있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이른바 증상만, 증상만은 미처 어느 단계에 이르지 못 하고 이르렀다는 것인데 증상만을 느끼면 그때는 공부가 안 돼버린다 말입니다. 서울 가는데 미처 대전도 못가가지고 갔다 해버리면 공부가 될 수가 없듯이 증상만이 되면 공부가 전혀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자기 한계를 점검하고 누가 공부에 대해서 물어본다 하더라도 대략 이런 것에 비추어 가지고 저 사람은 어느 정도 갔구나 이렇게 해서 정확히 말해줘야지 도인도 아닌 사람보고 공부가 다 되었다고 해버리면 자기도 죄를 짓고 그 사람한테도 죄를 짓게 하는 그런 빌미가 되는 셈이지요.


“욕계를 떠나기 위해 출가가 필요한 것이지 사실 집에 있으나 어디 가 있으나 번뇌만 녹아지면 결국은 상관이 없습니다”.


질문

「 스님, 저는 극락세계에 대해 너무 궁금한 게 많아서요. 저희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들은 복을 어느 정도 지었다 해도 중품하생 단계에부터 해당이 되지요? 일단 출가를 안 하게 되면요?」


- 출가를 하고 안 하고는 별로 큰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출가를 안 한다는 것은 욕심이 욕계를 미처 못 떠났다는 하나의 징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욕계를 떠나기 위해 출가가 필요한 것이지 사실 집에 있으나 어디 가 있으나 번뇌만 녹아지면 결국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하품이나 그런 경계는 그것이 극락이어도 아직은 천상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말입니다. 온연한 가장 기본적인 극락은 상품이 돼야 참다운 극락인 것이지 중품 까지는 모두가 참다운 극락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 몸 받아 놓으면 몸이 있으니 몸이 닦여져야 마음도 따라가지마는 그런 극락세계라는 것은  몸이 없이 하나의 광명세계라서 극락세계에 한 번 들어가 놓으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광명 몸이기 때문에 그때는 마음만 독실하면 비약해 버린다 말입니다. 초월해 버린다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마따나 하품, 중품은 아직 참다운 극락은 못 됩니다. 상품이 되어야 참다운 극락에 생주하기 때문에 하품, 중품은 하나의 올라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그래야지요, 아직 영생의 단계가 못되지 않겠습니까? 차근차근 변해가고 또 잘못되면 떨어지고 그러기 때문에........


「그러면 『무량수경』에서 나오는 수행자가 라는 말은 꼭 출가를 했다 안 했다 에 관계없이 자기가  공부를 하면 수행자라고 얘기 하는 건가요?」


-네, 그럼요. 꼭 그렇습니다. 다만 아까 말씀 마따나 욕계라는 것은 욕계의 가장 무거운 욕인 남녀 이성간의 또 물질에 대한 욕망이라든가 잠 욕심 모두 그런 것이 욕계라는 징조 아닙니까? 그런 것을 떠난다고 생각 할 때는 출가ㆍ재가 상관이 없습니다. 뭐 출가를 했다하더라도 욕심을 못 떠나면 내내야 업을 더 짓는 셈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고 얼마만치 기본적인 욕망을 떠날 것인가 그것이 문제라 말입니다.


다음시간에 얘기를 더 하겠습니다마는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차원 높은 것은 불교의 명상기법인 셈인데 그런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뭣인가 하면 내가 어떤 법을 공부 할 것인가? 그게 제일 중요하다 말입니다. 지금 소승권에서는 아까 말씀대로 비파사나를 위주로 공부하지만


대승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상식은 갖추어 두고 어차피 모든 것은 고요 공이요 무상이요 무아인 것이니까 그리 인식은 분명히 해두고 말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실전인 것이니까........ 그러나 공부하는 것은 소승법에서는 이런 것이 하나의 실상이지마는 대승법에서는 어떤 게 실상인가?  대승법은 천지 우주를 하나의 불성으로 본다 말입니다. 자성으로 본다 말입니다. 그래서 대승과 소승의 구분도 그래요. 여러 가지 구분법이 많이 있지마는 가장 중요한 구분법이 대승에서는 어느 것도 모두가 다 차별이 없는 평등무차별한 불성으로 본다 말입니다. 유정ㆍ무정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고 다른 식물이나 무생물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우주는  불성 아님이 없다 말입니다. 그것 보고 불이법문이라, 둘이 아닌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자란 것은 우주의 근본을 깨달은 분이기 때문에 불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로 분명히 보이는 것이니까 차별을 둘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이 볼 때에는 천차만별이고 십인십색이고 차별 있게 보기 때문에 평등심을 못 내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공부할 때에는 현실적인 문제는 모두가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무아(無我)고 고(苦)이지만 실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사실은 도인이 보고 성자가 보는 것이 참말로 보는 것이지 중생들은 업장에 가려서 바로 못 본다 말입니다.  우리 공부하는 방법도 현실적인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 이렇게만 생각 하면 굉장히 답답하다 말입니다. 또 이런 것이 실상도 아닌 것이고 중도도 아니란 말입니다. 성자가 보는 것이 비로소 참다운 진리인데 성자가 보는 천지우주는 진여불성뿐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은 또 만덕을 갖추고 있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욕계를 못 떠나고 범부로 있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조금도 석가모니나 예수나 그런 분들과 차이가 없는 그런 만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느끼고서 공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경』에서 돈오(頓悟)라 돈오는 뭣인고 하면 천지우주가 우리가 보는 것을 따진다고 생각 할 때는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하고 미흡하고 추하고 그러지마는 성자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만덕을 갖춘 영원히 행복스러운 그런 자리인데 그런 자리가 내내야 우리 본성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 자리를 느끼는 것이 돈오고 참다운 성품이란 말입니다. 참고로 하십시오.


나는 『단경』을 번역하려고 보니까 여러 가지 장애가 많이 있고 복잡해서 안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자네가 또 하라고 해서 내가 자네 말 듣고 생각을 다시 하기로 했네.


『단경』에 대해서는 학자들 의견도 구구하기도 하고 또 관심도가 많아서  그것이 복잡해요. 그런 것을 감안하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단경』은 돈황본(敦煌本)ㆍ종보본(宗寶本)ㆍ덕이본(德異本)ㆍ대승사본(大乘寫本) 등 여러 가지 이본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다 대조해서 해야 되고 그런 가운데서 분단을 가르는 것이 여간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까? 여러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두고 있어 놔서 막상 하려고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하나의 독창적인 수필이나 논문을 쓰는 것이라면 몰라도 불교인들이 다 관심을 두고 있는 하나의 경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비가 있어 온 것이기 때문에 이제 팔십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 공연히 시비 가운데 앉아서 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했으나 지금은 갈래를 잡으려니까 여러 생각이 많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