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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육조단경 소참법문 4.(1)

육조단경 소참법문 4


“다른 종교하고 차이점이 뭣인가? 그것이 바로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삼법인이 있으면 불교이고 삼법인이 없으면 불법이 못 된다 말입니다.”

 

1. 다른 종교하고 차이점이 뭣인가? 그것이 바로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삼법인이 있으면 불교이고 삼법인이 없으면 불법이 못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행은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모든 존재가 무상이다. 항상(恒常)이 없다 말입니다. 어째서 항상(恒常)이 없는가 하면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일어난다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생겨나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에 항상(恒常)이 없다 말입니다. 고유한 것은 조금도 없이 이것과 저것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생겨나서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같지마는 사실은 없다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마는 그것이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어느 시간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시간이나 공간속에서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야 있다고 할 것인데 변화무상해서 순간도 머무름이 없기에 결국은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라는 것은 존재가 변화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 어느 것도 고유한 것이 없다 말입니다.  자기 몸도 내내야 세포가 60억 개가 모였다 하지마는 하루에 4억 개나 신진대사해서 바꿔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순간순간 세포도 1초전과 1초 후가 같지 않단 말이야. 그래서 모든 것은 고유한 자기가 없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걸 잘 못 보고 연기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고유한 뭣이 있고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 하지마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생겨난 것이 순간순간 변화무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항상이 없고 따라서 모든 존재는 역시 무아라, 집착할 나라 할 것도 없고 모두가 그야말로 고유한 것이 없다 말이야. 


이렇게 해서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이지마는 무상하고 무아한 실체가 뭣인가? 본래 모습은 결국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그때는 번뇌가 다 멸해버린 영원적인 열반, 이른바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성이나 열반이나 같은 뜻입니다. 『단경』식으로 말하면 자성(自性)이 되겠지요. 불성만이 자성만이 우주에는 존재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의 중생적인 견해에서 보는 허상인 것이지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말입니다.  모두 가상(假相)이고 환상(幻相)인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의 오온법(五蘊法)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물질이나 감수하는 것이나 상상이나 의욕이나 분별이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하나의 망상이라 말입니다.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허무한 것을 다 떠나 버리면 영원적인 불성만 존재한다 말입니다. 우주의 실존은 자성이고 불성이고 열반이고 다 그런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존재하는 연기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소중합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일어난 법이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봐서는 무상이고 공간적으로 봐서는 내 것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결국 무아, 무소유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허상을 다 떠나버린 참다운 실상(實相)이 즉 말하자면 열반(涅槃)이고 불성(佛性)이고 그런다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성이 바로 불성이라는 뚜렷이 인식을 가져야 됩니다.

『단경』속에도 불성이라고 표현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성을 찾는 공부로 묵조(黙照)하는 잠자코 명상하는 그런 선법(禪法)도 있고 화두공안 하는 선법도 있고 염불하는 선법도 있는데 이 세 가지 선법이 지금 세계 불교에 유포가 돼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육조스님께서 어떠한 식으로 본인이 했을 것인가? 이걸 생각 할 때는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삼신일불(三身一佛) 말입니다. 삼신일불(三身一佛)로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이제 비단 육조스님 뿐만이 아니라 달마 때부터 쭉 내려오면서  특히 그 4조 도신(道信:580-651)스님 때는 노골적으로 염불선(念佛禪)을 말씀을 했다 말입니다. 저번 때 팸플릿 해놓은 것을 복사해 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거기에 뚜렷이 나와 있습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로 염불선 하는 방식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방을 많이 다니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좌선하는 훈련도 되고 공부도 돼요. 그러나 이말 저말 필요 없는 말을 많이 들어 놓으면 도리어 그것이 손해 보는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단경』을 중심주체로 한 것은『단경』에 들어 있는 그 말 그대로 납득 하고서  공부를 해 나가야 되겠다는데 있고 내가 번역 하겠다는 것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무슨 뛰어난 역량이 있어서 그러는 것 보다도 『단경』대로 여태껏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단경』대로 같이 공부하자는 그런 의미에서 그런다 말입니다.


오소(吾所)설법(說法). 내가 말하는 법은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자성은 불성이라 내가 말하는 법은 다른 게 아니라 자성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불리일체설법(不離一體說法)이라, 체(體)를 떠나지 않고서 법을 설한다 말입니다. 체를 떠나서 법을 설하는 것은 명여상설(名如相說)이라, 결국은 상을 설하게 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체를, 자성을 떠난 설법은 이른바 하나의 상설(相說)이란 말입니다. 상대유한적인 그런 설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상설(相說)은 자성상미(自性常迷)라, 공연히 불성만 미혹되게 만들어 버린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지일체만법(須知一切萬法)이 개종자성기용(皆從自性起用)이라. 모름지기 알지니 일체만법이 자성, 불성 따라서 일어난다 말입니다. 하여튼 다른 어떤 불경이고 또 현상이고 모두가 다 본래는 자성, 불성 거기에서 인연 따라 일어난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자성, 불성 따라서 일어난다고 알아야 할지니 이렇게 아는 것이 시진계정혜법(是眞戒定慧法)이라. 이렇게 아는 것이 참다운 계행과 선정과 지혜를 닦는 법이란 말입니다. 이런것을 보면 자성만 불성만 닦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우리가 능히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계를 지켜라. 선정을 닦아라. 지혜를 닦아야 한다고 보통은 뿔뿔이 나누어서 가르치기도 하지만 근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불성 속에 참다운 만덕이 다 갖추어져 있어 불성만 바르게 보면 결국 이 속에 다 들어간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체 만법이 불성에 조차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불성만 일어나면,  진여불성만 일어난다고 생각 할 때는 이것이 진정한 계율이고 진정한 선정이고 진정한 지혜라 말입니다. “내가 지금 게송을 설 할테니 들어라.” 이렇게 하고서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라. 우리 불성의 심지에 원래 그릇됨이 없음이 참다운 자성의 계율이라 말입니다. 또 우리 불심의 심지에 조금도 어리석음이 없음이 자성의 지혜고 우리 불심의 심지에 흐트러짐이 없음이 자성의 선정이라 말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그 자리가 자성 그 자리가 바로 금강신(金剛身)이라 말입니다. 또 신래신거본삼매(身來身去本三昧)라. 이와 같이 몸이 가고 몸이 오고 활동을 하고 행주좌와에 여러 가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항시 자성자리 불성을 안 떠난다고 생각 할 때는 항시 삼매와 같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를 자성(自性)이라는, 불성이라는 여기다가 초점을 맞출 뿐이란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먼저 알고 닦는 이것은 오수(悟修)라, 하나의 깨닫는 닦기 쉬운 수행법이고 선수후오(先修後悟)는 이론을 모르고서 실천만 하고 뒤에야 깨닫는 것은 미수(迷修)라 미혹된 수행법이라 말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이론적인 확립이 필요해요. 부처님께서 다 닦으셔서 이론을 확립시켜 놓으신 것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이론을 의지해서 실천하면 쉬울 것인데 실천도 이론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엉뚱한 실천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요. 이와 같은 종류의 법문 내에서 이런 법문은 참 중요한 법문입니다. 만약 료심이수도(了心而修道)하면, 마음이 뭣인가를 깨닫고 닦으면. 깨닫는 것을 이론적으로 통해버리면 그때는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만약 마음이 뭣인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이 뭣인가를 먼저 알고 수도하면 생공이성(省功易成), 공을 별로 들이지 않고서도 성취가 쉬운데 또 그 반대로 불료심이수도(不了心而修道)하면, 마음이 뭣인가를 모르고 닦으면 내비공이무익(乃費功而無益)이라. 공만 많이 들이고서 별로 이익이 없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거든. 그리고 이미 벌써 석존께서 다 닦아 놓은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새삼스럽게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닦아 놓은 길을 따라가는 셈이거든. 사실은 그러기에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잘 안 따라가고 공연히 자기 주관을 내세우니까 복잡해. 중국에 불교가 들어 와서도 처음 달마 전에는 경(經) 풀이나 하고 훈고학적으로 재(再)주석(註釋)이나 하고 그런 쪽으로 관심을 두고서 정작 마음 닦는 공부는 별로 안했거든.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오직 마음을 닦아서 깨달아야 된다는 경책을 했고 그렇게 해오다가 육조까지 거의 완벽히 마음 닦는 공부는 체계가 된 셈이란 말입니다. 단순히 『육조단경』이 훌륭해서 경을 본다는 것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깨닫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거든. 또 그렇게 돼야 불교도 사는 것이고 말이야. 기독교도 종교개혁을 몇 번이나 했잖은가? 루터가 하고 칼빈이 하고 모두 했거든. 그게 뭣인고 하면 그 교주의 뜻을 안 따르거든 모두가 본래로 돌아가라는 뜻에서 종교개혁을 하고 그러지 않았는가? 아까 말한바와 같이 『육조단경』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 스스로가 『단경』에서 말씀한 부처님의 정법을 그대로 구현시키고자 해서 그러는 것이거든. 


<시간이 이번 시간하고 다음에 한번 하고 두 차례 밖에는 같이 공부할 기회가 없겠습니다.>


“우리 범부가 성불하는 그런 과정까지 유식5위가 가장 기본이 됩니다.”


저번에 유식(唯識)오위(五位)를 제가 말씀드렸지요. 불교라는 것이 하도 복잡해서 여러모로 다양한 의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범부가 성불하는 그런 과정까지 유식5위가 가장 기본이 됩니다. 자량위(資糧位), 즉 말하자면 우리가 여행할라 하면 식량이나 그런 준비가 필요하듯이 공부를 하기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우리는 지혜가 수승한 사람들은 복도 안 짓고 남한테 좋게 안 해도 지혜만 닦으면 된다든가 또 참선하면 된다든가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덕이란 것은 결국 심성을 바르게 쓰고 남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그런 정도의 보시 아니겠습니까? 이 복덕을 안 지어 놓으면 공부가 잘 안 돼요 자꾸만 나쁜 일이 생기고 말입니다. 공부 할 때 이상한 마장이 많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결국 다른 것도 이유가 있지마는 복을 많이 안 지었다 말입니다. 금생뿐만 아니라 전생에 우리가 없는 사람한테 밥 한 끼 준다든가 말 한 마디를 남 기분 안 사납게 한다든가 또 표정을 찡그리고 남한테 나쁜 인상을 주지 않는 다든가 이런 것이 모두가 복덕 아닙니까? 그래서 복을 지은 사람들은 장애가 별로 없는데 복덕을 지여 놓치 않으면 선방에 들어가도 닦을 때에 고생고생 하고 또 없던 병이 생기고 한다 말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자기 업장소관입니다 선방에 있어보면 별의 별사람이 다 있지 않습니까? 자기는 통 청소도  않고서 남한테 팩 팩 한다든가..... 사소한 것이지마는 남한테 양보하고 남한테 좋게 하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몸과 마음이 정화가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 하면은 복을 장애하는 인연이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도 필요하고 선정도 필요하지마는 복덕을 많이 지어서 준비를 해두어야 공부가 빠르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가행위(四加行位)를 사람들은 공부를 안 해요. 근래에는 사가행위에 대해서 누가 말도 잘 안 해요 그냥 선방 들어가서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지 뭐 그러냐면서. 그런데 불경(佛經) 보면 이 가행위라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4층 집을 올라간다 하더라도 계단부터 순서 있게 올라가야 하듯이 우리 공부도 중생들이 본래가 부처지마는, 나한테 분명히 완벽한 부처가 돼 있지마는 그래도 우리가 과거 전생부터 금생까지 다 함부로 살아 놓으니까 부처가 그만치 멀어졌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생각 할 때에 아, 단박에 올라가면 좋겠지만 과거부터 헤아려보면 몇 백 년 업을 지어놓은 것이 있는데 금생에 조금 공부 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냥  순식간에 초월적으로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꼭 사선근(四善根)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선근 보고 저번에 말씀마따나 사가행위(四加行位)라 우리가 이름하여 가행공덕이라 정기를 보다 더 증가 시키고 나간다 말입니다.


저번에 말씀한 바와 같이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제일법(世第一法), 세제일법 보고 무간정(無間定)그래요. 무간정은 여기까지 닦아 놓으면 바로 다음이 견성(見性)오도(悟道) 아닙니까? 견성오도까지 간격이 별로 없다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공부가 익숙히 되어서 그때는 번뇌가 사이에 낄 수가 없다고 해서 무간정 그래요. 무간정을 닦아 놓으면  아까 말마따나 그야말로 견도위(見道位)라, 도를 깨닫는다 말입니다. 견도하고 견성은 똑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유식5위로는 통달(通達)이라, 진리에 대해서 조금도 막힘없이 통달해 버린다 말입니다. 그래서 견성위를 성취해 놓으면 그때는 성인이지요. 이쪽은 아직은 성인이 못되고 말입니다. 불교의 경전가운데서 화엄경은 부처님의 맨 처음 깨달으신 내용 전부를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의 인생관, 우주관은 『화엄경』에 다 들어 있는 셈이지요.


『화엄경』에서 우리 범부가 성불하려면 보살 십지(十地)라 해서 십 단계로 올라갑니다. 보살 초지에서 견성해가지고서  십 단계에 올라가야 성불인 셈이지요.  통달위(通達位)는 범부생활을 떠나서 성자 생활로 들어온 셈인데 그래도 그것이 성인은 성인이지만 완벽한 성자가 못 되였단 말입니다. 습기가 아직은 미세한 습기가 남어서 미세한 습기를 차근차근 닦아가는 것이 수습위(修習位)라. 우리가 수도(修道)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마는 원칙적으로 말하면 견도위 전까지는 수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수도(修道)라는 말을 안 쓰는 것입니다. 여기 견성오도 하고서 견성오도부터 성불까지를 수도라고 하지요. 수습위라, 깨달아서 도인이 됐지마는 이른바 정각ㆍ 묘각성불이 안 되고 미처 못됐기 때문에 차근차근 닦아가는 즉 말하자면 보살 초지부터 십지까지라 말입니다. 그래서 구경위는 다시 더 갈 수 없는 정상의 깨달음인데 따라서 정각 ㆍ묘각성불 이것은 같은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알아 두시고.........


이것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성불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견성오도해서 성자가 미처 못되어 놓으면 현자라, 현자(賢者)라고 쓴다 말입니다. 공부도 않는 일반 사람들은 보통 범부고, 아직 성자는 못 됐지만 범부의 정도를 넘어서서 ‘내가 지금은 못 되어도 몇 생을 닦아서라도 기어코 공부해야 되겠다’ 해서 열심히 공부 하는 그런 과정이 즉 말하자면 현자라 말입니다. 이것이 간단하지마는 근본불교에 세 개가 들어 있습니다. 맨 처음에 3현이니까 3단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불도에 막 들어가 놓으면 어떻게 닦을 것인가? 그때는 세속에서 찌들은 마음을 차근차근 쉬어야 되겠지요. 마음을 쉬는지라 마음을 쉬는 다섯 가지 공부 하는 법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근원적인 번뇌가 뭣인고 하면 자기 몸뚱이가 금 쪽같이 아깝다고 생각하여 남을 때리기도 하고, 살인이나 전쟁 같은 것도 자기 이기심 때문에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공을 닦아가지고서 제법공(諸法空)을 알면 좋지마는 제법 공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가 일반 별 것이 아니라는 부정관(不淨觀)부터해요 내 몸뚱이 다 둘러봐도 눈물이나 콧물이나 오줌이나 똥이나 또는 피나 청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름ㆍ 피ㆍ 오줌 모두 그런 것을 보고 삼십육물(三十六物) 이라 그래요. 자기 몸뚱이에서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깨끗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이렇게 항시 생각해서 자기 몸뚱이의 애착이나 이기심을 줄여간다 말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공부를 한다 해도 남을 용서 못 하고 관용성이 없이 신경질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반성해 봐서 그때는 자비관(慈悲觀)이라, 나나 너나 몇 백 년 살 것도 아닌 것이고 어차피 몇 십 년 살다가 언제 갈지도 모르는 것인데 뭐 때문에 내가 이 하찮은 몸뚱이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소외할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서 상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그런 마음이 자비심의 근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이 자비관을 하고 우리가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인연법을 모른다 말입니다. 내 금생에 이 몸이라든가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위치라든가 모든 게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깨비가 이루어진 이른바 인연생이라, 모두가 인연 따라서 서로 만나는 것도 잠시간 만나는 것이고 그러다 헤어지고 마는 그 인연을 생각한다 말입니다. 인연에서는 주로 십이 인연법을 생각합니다. 십이 인연법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그런 단계를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분별심이 또 많은 사람, 그러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이 인연법을 알아야 어리석음을 제어할 수 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 마음 분별이 많은 사람은 숨이 거칠어 옵니다. 선방에 들어가서 보면 숨이 고요하지 않고 조금만 있어도 숨이 차 올라와서 헐떡거리며 오래 앉자 있지도 못 하는 사람들은 내내야  업장 소관인데 그런 사람들은 수식관(數息觀)이라, 이른바 호흡관이라 말입니다. 호흡관할 때에 가장 쉬운 것은 수를 헤아린다 말입니다. 수를 헤아린다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부터 백까지 가사 오십이라든가 육십 몇이라든가 그렇게 많은 수를 헤아리지마는 그렇게 하면 또 많은 수는 그것이 하나의 상이 되니까.  복잡한 수를 헤아리지 않고서 하나부터 열까지를 자꾸만 되풀이 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흡을 고르게 하고 산란심을 없앱니다. 그리고 이제 관불관(觀佛觀)이라, 업장이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겪어보면 자비심이 많은 사람 곁에 가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편 하듯이 우리가 만덕을 갖추신 부처님을 생각한다든가 원만한 부처님 상호를 본다든가 또는 부처님을 관찰하는  그런 관(觀)을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마따나 탐욕심 많은 사람들은 부정관(不淨觀)을 주로 하고 자비심이 적거나 진심이 많으면 자비관을 하고 마음이 어리석어서 사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인연관 하는 것이고 호흡이 거칠어서 산란스러운 사람들은 수식관하고 또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부처님 상호를 관찰하고 이렇게 해서 가장 기본적인 번뇌를 녹여가는 하나의 방편이 오정심관(五停心觀)이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