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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육조단경 소참법문 3.(1)

육조단경 소참법문 3.


이른바 체(體)ㆍ용(用)ㆍ성(性)ㆍ상(相)이라,  체용성상이라는 것이 아주 참 중요합니다.


1. 우리가 무슨 법회에 가서 법문을 들어 보면은 알맹이 있는 그런 법문도 있고 너절하게 말은 많지마는 별로 얻을 것도 없는 그런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이른바 체(體)ㆍ용(用)ㆍ성(性)ㆍ상(相)이라,  체용성상이라는 것이 아주 참 중요합니다. 체(體)는 본체 말입니다. 본래적인 근본자리가 체(體) 아니겠습니까? 본래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적인 것이 용(用)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성(性)은 체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체에 들어있는 성품이라 말입니다. 상(相)은 현상적인 것이니까 용(用)과 상(相)은 같은 레벨이고 체(體)와 성(性)은 또 같은 본래적인 것을 읽는다 말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내용에 알맹이가 없는 것은 체(體)는 별로 없이 용(用)만 가지고 한다 말입니다. 보통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키고 또는 계행을 받는다 하더라도 계행에 대한 여러 가지 계율을 보살계 때나 그런 때 받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에도 체인 근본을 들어서 얘기 하면은 훨썩 더 알아듣기도 쉽고 또 근본에다가 우리 마음을 안주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동적으로 용(用)이나 상(相)이 따라 오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서 뭐 뭣을 해라, 뭐 뭣을 지키라 이런 정도로만 얘기 해놓으면 결국 번다해 가지고서 별로 큰 요령을 못준다 말입니다.


그래서 특히 보살계를 가리켜서 불성계라, 바로 부처의 성품을 그대로 전달 한다는 것이란 말입니다. 부처의 성품을 전달하면 어떤 공덕이 있는가?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은 만덕의 자리이기 때문에 진여(眞如)불성(佛性)이다 또는 금강(金剛)불심(佛心)이다 그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마는 불성만 제대로 간직하면은 다른 공덕은 거기에 따라 온다 말입니다. 그래서 특히 보살계는 대계(大戒)라, 가장 큰 계율이기 때문에 불성(佛性)을 주로 발로(發露) 해라하는 그런 쪽에다 역점을 두고 얘기를 하지요. 그런 것을 감안해 본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마따나 체가 있어야지 체가 없으면 종교나 철학이나 기본적인 것이 한계가 안 되어 버리지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가질 때도 본체적인 문제 근원적인 문제로써 부처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 놓으면 다른 것은 그때그때 기회 따라서 보충하면 되는 것이고, 기독교도 마찬가집니다. 기독교도 하느님에 대한 개념 내용을 확실하게 파악이 돼야지 개념 내용이 모호해 놓으면 결국은 바른 신앙이 못 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아주 요령 있는 법문은 부처가 어떤 공덕이 있는가  그것을 우리한테 먼저  가르친다 말입니다.


『육조단경』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그런 근원적인 문제, 본체론적인 문제에 관해서 확실하게 여러 차례 지겨울 정도로 되풀이하면서 말씀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자성(自性)이란 말이 백 군데가 넘는다 말입니다. 얼마만치 중요했으면 그 조그마한 경(經)에서 백 군데가 넘게 했을 것입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성을 떠나서  불교 공부를 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이라 말입니다. 불성 그 자리를 그대로 가르치고 깨닫게끔 하는 것은 그야말로 진실이고 말입니다. 불교 공부나 무슨 공부나 진실과 방편이 있는 것인데 진실이라 할 수 있는 불성에 대해서 주요 내용을  말씀 한 것이 법신(法身)ㆍ 보신(報身)ㆍ 화신(化身)이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경』내용에도 제가 보면은 그대들로 하여금, 그런 위대한 분들은 절대로 일반 신도님들을 무시 한다든가 말을 함부로 하는 수가 없습니다. 다 선지식이여! 말입니다. 마땅히 경어를 쓸 것이지 말입니다. 가사 육조스님께서 법문한다고 생각 할 때에 육조스님 보다 훨썩 더 나이 많은 스님들도 있었을 것이고 나이 많은 신도님들도 계셨을 것인데 ‘해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번역을 한다 하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경어를 하게 되면 또 그것이 남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조금 부자연스러우니까? 어느 정도 극존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땅히 존칭을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까 말씀대로 이 부처란 내용이 둘이 있고 셋이 있는 것이 아닌 본래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른바 삼신(三身)일불(一佛) 아닙니까? 법신과 보신, 화신 세 몸이 뿔뿔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한 몸인데 거기 들어있는 공덕의 내용 따라서 생명자체를 전체적으로 의미 할 때는 법신이라고 얘기하고 또 법신 가운데 들어있는 자비나 지혜나 그런 것은 모두 보신이 되고 말입니다. 또 그러한 부처가 형상을 이룰 때는 화신이라 말입니다. 그러면은 법신ㆍ 보신ㆍ 화신은 인간 존재하고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부처를 떼어 놓고 얘기 할 때는 우리 인간이 도달 할 수 없는 별도의 하나의 신격적인, 영원적인 존재겠구나, 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항시 자기 마음을 떠나서는 보질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이란 결국은 전체적인 하나의 생명이고 자성(自性)청정심(淸淨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때는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란 것을 보통 생각 할 때는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을 비하(卑下) 하지 않습니까. ‘뭐, 내 마음이란 것이 별 것도 아니고 남 미워 할 때는 곧 죽일 듯이 미워하고 또 욕심 낼 때는 이상스럽게 남 생각하지 않고서 이기(利己)에 사무쳐 욕심을 내고 하지 않는가? 이런 것이 어찌 부처일 것인가? 이럴 정도로 자기 마음을 비하(卑下)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개별적으로 국한된 것은 이른바 참다운 마음이 못 된다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자기 전부라고 생각하는데서 그런 생각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 할 때 몸뚱이는 하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형체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 몸에 갇혀있는 어떤 존재는 아니란 말입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마음 아닙니까? 데카르트(프랑스의 수학자·철학자(1596~1650))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처럼 내가 생각 안하면 나라는 것을 어떻게 직감 할 것입니까? 그와 같이 내가 생각하니까 분명히 내 마음이 있는데 그럼, 마음은 어떤 것인가? 마음 풀이에 따라서 깊은 종교가 되고 그렇잖으면 범부가 되는 그런 차이가 있게 되겠지요


이른바 참다운 부처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한도 끝도 없는 무변무량의 생명자체가 마음의 본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도 똑같이 법신ㆍ 보신ㆍ 화신을 다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자기 마음을 자기 몸뚱이에 국한 시켜 보는 것은 범부 중생인 것이고 또 마음, 이것은 모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양이 없다는 것이 굉장히 심심미묘한 뜻이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모양이 없다는 것은 벌써 우주 전체적으로 끝도 갓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입니다.

마음 해석에 있어서 우리 신체에 국한된 마음이라고 생각할 때는 미혹된 범부 중생인 것이고 또 모양이 없는 그 마음을 바로 새겨서 끝도 갓도 없는 무변무량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 할 때는 부처하고 맞닿아 버린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시 우리 마음을 해방시켜서 끝도 갓도 없는 본연의 마음자리 그 자리, 사실 모양이 없으니까 끝도 갓도 없어야 되겠지요? 그 자리에다가 순간순간 우리 마음을  영원적인 그 마음으로 해방 시킨다 말입니다. 그 마음이 즉 말하자면 자성청정심입니다. 우리가 부처라고 생각할 때에 부처도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그런 부처님은  인간적으로 역사적으로 나오셔서 끝도 갓도 없는 부처의 참다운 마음자리 깨달아서 비로소 하나의 부처가 되신 분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참다운 부처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한도 끝도 없는 무변무량의 생명자체가 마음의 본체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도 똑같이 법신ㆍ 보신ㆍ 화신을 다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국한된 마음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못 느끼지마는 정말 본래적인 해방된 끝도 갓도 없는 그런 마음자리에서는 우리 마음도 역시 법신ㆍ 보신ㆍ 화신을 갖추고 있는 생명자체라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는 우주 전체를 그 가운데 다 포함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성청정심이란 우리 마음의 본체, 바로 우주 전체를 의미합니다.  기독교도 삼위일체가 있지 않습니까? 삼위일체가 채택이 된 뒤에야 비로소 기독교 신앙이 확립이 됐다 말입니다. 그래서 성부(聖父)는 내내야 하느님자리 아닙니까? 성자(聖者)는 예수고 말입니다. 성령은 이른바 성신(聖神)이고. 기독교도 예수는 하나의 사람이 아닌가? 사람이 어떻게 성부하고 같은 삼위일체의 같은 레벨에 속할 것인가? 이렇게 해서 논쟁이 많이 생겼어요. 성령은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니까 미처 체험 못한다 하더라도 모든 존재의 근원이니까 존재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근원도 생각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가 인정 할 수 있지마는 예수는 분명히 요셉의 아들이고 마리아의 아들인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훌륭한 성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성부가 될 것인가 하는 논쟁이 많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결국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서 모양만 생각 할 때는 성부하고 같을 수가 없겠지요.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들어있는 마음이 예수그리스도에 몸에 국한 될 때는 성부와 같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국한이 안 되고서 예수라는 몸을 초월한다고 생각 할 때에는 영원적인 하나의 생명이 거기에 진입되는 것이니까 결국 같아 버린다 말입니다. 따라서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 똑같은 레벨로 해서 같은 진리 자체다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 신앙이 확립이 되었겠지요. 그러기에 기독교나 불교나 간에 기본적으로 이 불타관(佛陀觀), 기독교는 내내야 하느님의 관(觀)이 돼야 되겠지요. 불타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부처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에 관해서 확실히 자기와의 관계나 일체 존재와의 그런 관계가 확립이 돼야 한다 말입니다. 나와 남의 관계도 이 모양으로 따지면 분명히 차이가 있지마는 하나의 생명자체가 참다운 것이고 모양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고 하는 것 아닙니까? 있다가 없고 없다가 생기고 하는 것은 참다운 진실한 것이 아닌 것이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진실한 것인데 그것은  모양이 아닌 생명적인 존재가 돼야 영원적인 존재가 되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자성청정심이요, 또 자성청정심이 온전히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한다고 생각할 때 법신(法身)이요, 그 가운데 내포 된 것은 자기 지혜, 여러 가지 성품 공덕은 보신(報身)이요, 거기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 것들은 화신(化身)이니 삼신(三身)으로 해서 우주를 다 통찰해버린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한계가 없고 국한이 없는 본래적인 청정한 마음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가 그것뿐이지 말입니다. 잘나나 못나나 도둑놈이나 독사나 모두가 다 그 가운데 포함돼 버린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장자(莊子)가 말하는 천지는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만물(萬物)여아(如我) 일체(一體)라, 만물이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 말입니다. 만물도 내내야 근원자리인 마음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야말로 상(相)을 떠나버리는 무위법(無爲法)이 되고 우리가 남한테 뭣을 준다 하더라도 저 사람은 불쌍하고 구차하니까 내가 보태준다 이렇게 생각하면 상(相)을 못 떠나는 것인데 내내야 저 사람이나 나나 본래야 하나의 생명이구나, 하나의 생명이니까 저 사람이 못 되면 나도 손해를 볼 것이고 내가 잘 되면 저 사람도 돈 벌 것이고, 그와 같이 하나의 생명이라는 유대감에서 남을 준다고 생각할 때는 보시도 무주상보시라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겠지요. 그래서 이와 같이 우주가 생명뿐이다, 하나의 우주에너지다 이렇게 관찰해져야 온전히 부처님에 대한 정다운 바른 견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 할 때도 섭상(攝相)귀체(歸體)라, 거둘 섭(攝)자, 모든 현상적인 모든 상대적인 것을 거두어서 귀체(歸體)라 본체로 돌아간다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나 현상적인 모든 것을 근본으로 돌리는 그런 자세에서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인간적인 공부에 손해가 없다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존재로 태어나서 손해 없이 살아야 할 것인데 손해 없이 산다는 것은 뭣인고 하면 우리가 미개한 때는 미혹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만 따지고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사이래 모든 성인들, 현자들 또는 철인들 그 분들은 모두가 다 상(相)을 거두어서 상(相)을 초월해서 본래적인 근본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언제 어느 때나 가치 있는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상(相)을 거두어서 본체로 돌아가는 것이 돼야 되겠지요. 그래서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라 말입니다. 그래서 항시 자기마음을 찾아라, 마음의 주인공을 찾아라, 그런 말을 불가(佛家)에서 하지 않습니까마는 결국은 마음의 주인공이 참다운 부처님이고 참다운 하느님이고 그렇게 되겠지요.  즉 마음을 떠나서 부처가 될 수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을 안 떠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자기 마음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하지마는 우리는 현상적인 상(相)에 집착해가지고서 상(相)에 얽매인 그런 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항시 자기와 같이 더불어 쓰면서도 우리가 마음을 잊어버린다 말입니다.

근원적인 자기마음을 찾기 위해서 화두도 있고 염불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는 다른 여러 가지 허드레얘기 다 쑥 빼 버리고 오직 자성 청정심만 자성만 닦아야 한다고 숨 돌이킬 틈도 없이 몰아세우니까 정말로 성불(成佛)만 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이 든다 말입니다 또 육조스님께서 학문을 많이 해가지고  이것저것 너절한 말씀을 많이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 깨달아서 통한 분이기 때문에 아주 간결하게 본래 성품인 자성(自性)만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더 절실하게 생각이 되고 우리 인간 존재라는 것은 근원적인 마음에서는 모두 하나니까 어느 때나 누구한테나  본래성품을 찾는 그러한 데에서는 가장 절실한 공부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어떠한 경우라도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모든 것이 원래 둘이 아니라 말입니다. 사업을 하건 누구를 대하든 하나의 곤충을 대하든 어떠한 경우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생명이다, 본래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가 잘 몰라서 분할하고 그런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