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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육조단경소참법문 5.(2)


저번에 말한 사선근(四善根)을, 사가행(四加行)을 거치지 않고서는 초선정(初禪定)에 못 들어갑니다. 초선정 들어가면 그때는 증상이 있어요.

 

2. 질문

「초선정에 들어가려면 일단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돼야 초선정 까지 들 수 있습니까?」


- 예, 온전히 증명하려면 그러지요. 저번에 말한 사선근을, 사가행을 거치지 않고서는 초선정에 못 들어갑니다. 초선정 들어가면 그때는 증상이 있어요. 『금강심론』에 보면 사선근 풀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금타(金陀)스님을 다시 한 번 재차 괄목하고 그 어른을 참고할 것은 뭣인고 하면 지금까지 근래의 선법들은 모두가 수행방법을 거의 다 무시했다 말입니다. 이른바 수행과정을 무시했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은 성불이지마는 어떤 방법으로 성불할 것인가 이 과정을 무시해 놓으니까 내 공부가 얼마만치 갔는지를 모릅니다. 망상이 나오든가 또 쾌적하고 기분 좋으면 그때는 한 소식 봤다 하고 인가(認可) 해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교에 없으면 모르거니와 방법론이 불교에 다 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것이 번쇄하고 귀찮으니까 아까 말마따나 방법 계제를 무시한 것인데 계단을 무시해 버리면 자기 스스로 점검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성자가 계실 때는 성자가 보고 “너 얼마만치 공부했다” 하고 비평도 해주고 점검해줄 수 있지마는 그런 분들이 없다고 생각 할 때는 저마다 암중모색(暗中摸索)이라, 껌껌하다 말입니다.


『금강심론』에 있는 사선근을 보면 거기 다 있어요 사선근을 거쳐야 이른바 사선정에 들어가는데 초선 들어갈 때 벌써 그런 증상이 나와요. 몸에서 팔촉이 생기고 마음에서 십공덕이라 말입니다. 팔촉ㆍ 십공덕이 발휘가 돼야 초선정에 들어갔다는 하나의 증좌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세계 종교가 지금 다 그래요. 불교가 아니더라도 내내야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 비약적으로 막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계단이 필요한 것인데 기독교도  기도 모시고 있으면 금방 하느님 곁에 가면 좋지마는 그렇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도해서 그야말로 신비직관이라, 신비적으로 경지에 이르러야 되겠지요. 그런 방법이 없으면 캄캄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사선근 이른바 사선정이 꼭 필요하고 또 성불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존재의 가장 구경지(究竟地) 아닙니까? 언제 가더라도 윤회를 벗어나서 간다고 생각할 때에는 벗어나야 가는 것이지 그냥 갈 수가 없으니까  말은 좋아도 그런 의미에서 거기에 올라가는 방법 계제라든가 그때그때 단계에서 나오는 그런 증상같은 것이 참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금강심론』의 사선근ㆍ사선정을 꼭 보시도록 하십시오. 불경 가운데서도 선정에 들어가서 사선정ㆍ 사공정ㆍ 멸진정이니까 이것이 이른바 구(九) 아닙니까? 그것 보고 구차제정이라 그래요 『아함경』은 부처님 육성 같은 즉 말하자면 부처님 금구친설(金口親說)로 네 편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네 편을 다 조사해 보니까 사선정ㆍ 사공정ㆍ 멸진정을 말씀한 데가 마흔한 군데여요. 중아함경에 사선정ㆍ 사공정ㆍ멸진정을 찬탄하는 말씀이 있어요. 이른바 구차제정 이것이 최제일이라, 가장 제일이고 가장 높고 가장 크고 가장 수승하고 가장 묘한 법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찬탄했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법을 지금 전혀 사용도 않고 참고도 안하니까 얼마나 큰 손해가 되겠습니까? 하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아직은 사선근이나 사가행위밖에 못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아는 길을 간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도 편하고 훨썩 더 능률도 빠를 것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을 전혀 몰라버리면 암중모색이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할 때에 꼭 본래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공덕이 불성공덕이기 때문에 또 불성 그것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사실은 불성뿐인데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불성뿐이다, 부처님뿐이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염불이라는 것도 사실은 모두가 부처님뿐이라는 그 소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미타불도 어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나 내 몸 가운데나 이 공기 가운데나 하나의 곤충 가운데나 말입니다. 모두가 바로 보면 부처님 아미타불의 광명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참다운 생명 이름이 아미타불인 셈이지요. 근래 우리 한국불교에서 가장 섭섭한 점이 뭣인고 하면 보조(普照:1158-1210)스님이나 서산(西山:조선시대스님)스님이나 나옹(懶翁:1320-1376)스님이나 그렇게 위대한 도인들은 다 같이 염불을 말했었는데 근래 한국스님들만 염불을 딱 빼버렸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도 일반 성불의 길이라면 팔정도인데 팔정도 가운데서 정견(正見)이 맨 처음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도 일반 성불의 길이라면 팔정도인데 팔정도 가운데서 정견(正見)이 맨 처음입니다. 다른 일곱 가지는 정견에 따라가요. 정견 바른 견해가 가장 중요한데 그러면 바른 정견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마는 간략하게 간추리면 여덟 가지라 말입니다. 먼저 아견(我見)이라, 쉽게 말하면 아상이라 말입니다. 그 아상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쉬운 것 같지마는 원리를 모르면 아상을 안 낼라 해도 자연적으로 우리 습기 따라서 안 낼 수가 없다 말입니다. 아상의 ‘아(我)’ 라는 것이 대체로 뭣인가? 불교를 공부할 때에는 존재론적으로 근원적인 것을 몰라 버리면 그때그때 막히고 또 번뇌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그럽니다. ‘아’는 이것은 결국 ‘아’가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아상도 안 낼라 하지만 저절로 아상이 나오는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사람들이 고민을 많이 하지 않겠습니까?  ‘아’의 반대는 ‘무아’ 아닙니까. 무아ㆍ무소유라, 무아ㆍ무소유가 돼야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말입니다.


어째서 ‘아’가 없는 것인가? 불교라는 것이 통틀어서 ‘무아’가 대전제가 돼서 풀려나가지 않습니까마는 어째서 ‘무아’ 일 것인가? 연기법을 몰라 버리면 불교는 참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연기법에서 우러나온다 말입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두가 그때그때 모여 있다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다 모여 있으면 그것이 그대로 가만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인연 따라서 모아진 것은 원래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순간순간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이른바 항상(恒常)이 없다는 무상(無常) 아닙니까.


하나의 사물이라든가 어떠한 것이나 태양이라든가 우주에 있는 각 은하계라든가 이것도 역시 하나의 인연 따라서 모여진 것이기 때문에 종당에는 결국 변화가 돼서 공으로 돌아간다 말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 육체라는 것은 과거 있던 것도 아닌 것이고 미래에 또 있을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금생의 한정된 수명의 범위 내에서 존재하지마는 그것도 그때그때 어떠한 찰나라도, 불교말로 수유찰나(須臾刹那)라고 간단한 시간을 말하지 않습니까. 어떠한 수유찰나지간도 ‘나’라는 존재가 그대로 고여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어제 세포 다르고 오늘 세포 다르고 일초전과 일초후도 세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지 않다 말입니다.


그래서 인연 따라서 잠시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마는 성자들이 본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 그대로 즉공(卽空)이라 바로 공이기 때문에 공을 느끼지마는 우리 중생은 기껏해야 분석한 뒤에야 모르거니와 그러지 않으면 공을 느낄 수가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무상ㆍ무아라 이것은 항상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 내에나 공간속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없다는 본래 없다는 무아라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물론 이거니와 우리마음 구성한 것도 오온 아닙니까? 오온이 본래로 공이라고 생각 할 때는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분석한 뒤에 미련한 사람도 ‘아, 그렇구나!’ 생각이 들지마는 불교의 공이라는 것은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본래로 바로 즉공이라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못 볼 뿐인 것이지 성자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색즉시공이라 말입니다. 내 몸뚱이 있는 그대로 공이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을 석공(析空)과 즉공(卽空) 두 가지로 공을 풀이를 합니다. 석공은 분석할 석(析)자, 분석한 뒤에 비로소 공을 느낀다 말입니다. 즉공은 분석할 것 없이 바로 그대로 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바로 보지 못 하니까 내가 있고 산하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생각할 때도 지장보살이 어디 가서 존재하고 또 우리 영혼을 인도하는 그런 쪽에서 지장보살이 어디 계시다가 우리가 부르면 응답해서 오시겠구나! 이런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이 지구덩어리 자체가 지장보살이라 말입니다. 지구덩어리가........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바위덩어리 하나 한라산 모두가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물질적인 자연계로 보이지마는 성자가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모두가 영(靈)의 뭉치라 말입니다. 일물일체가 다 영의 뭉치입니다.


따라서 지구 자체가 바로 지장보살이고  태양은 그야말로 참 일광보살이고 또 달은 월광보살이고 각 별들은 묘광보살이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중생은 자연적인 모양으로 봐서 모양밖에 안 보이지마는 형이상학적으로 근본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하나의 영 덩어리라 말입니다.  그래서 ‘아’ 라는 것도 오온이 연기법으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아진 것이지 원래 ‘나’도 없고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내 소유라는 것도 없고 허망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잘 몰라서 내 것ㆍ네 것 그러는 것이지 안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로 주인이 없다 말입니다.


둘째는 중생견(衆生見)이라 중생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개가 있다고 생각할 때 개나 소나 닭이나 그런 것도 하나의 중생 아닙니까? 그리고 또 비단 동물만이 중생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동물이 아닌 무정물도 하나의 중생이라 말입니다. 산도 흙도 모두가 중생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도 아까 말마따나 우리가 제대로 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 업식(業識)으로 보는 것이니까 개는 그대로 개고 소는 그대로 소고 하는 것이지 사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연기법으로 연기 고리로 해서 얽혀있다 말입니다. 단독적인 것은 우주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주 전체가 모두 하나의 연기법으로서 다 얽혀있기 때문에 불교 어려운 말로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서로 얽히고설키고 모두가 인연의 고리에 다 얽혀있다 말입니다. 저 영국에 있는 나무 한 그루나 여기 있는 우리나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 관계성 때문에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뭉쳐있다 말입니다.


세 번째 수명견(壽命見)이라. 나는 오십년이다, 나는 백세다 그와 같이 수명에 한계를 두지 않습니까? 그런데 물질이 생겨났다가 변화해 가다가 소멸되는 그 동안을 수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마는 그것도 역시 사실은 수명도 물질적인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수명이 있는 것이지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수명이 없습니다. 영원적인 시간인데 말입니다. 끝도 갓도 없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 같은 것도 있는 게 아닌 것이고 영원적인 생명의 흐름인데 우리가 딱 잘라서 물질적인 것이 있다가 없어지고 하는 생멸 따라서 우리가 본래는 다 없는 수명을 설정한다 말입니다.


네 번째는 사부견(士夫見)이라, 능력 있는 사람보고 불교에서 사부라고 합니다. 사대부라는 말도 있지요. 그거와는 좀 다르고 여기서는 뭣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사부입니다. 가령 우리가 뭘 하나 만들면, 절에 있는 사람들은 뭘 잘 만들지 않습니까? 그림도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조각도 하고 하나의 작품을 딱 내면 내가 제법 솜씨가 있고 내가 교양도 있고 예술적인 여러 가지 품성이 있으니까 만들었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런 것도 역시 하나의 범부소견이라 말입니다. 인연이 화합돼서 여러 가지 여건으로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어떻게 혼자 그걸 만들 것입니까? 물감도 있어야 되고 물감이 있으면 물감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하나의 집을 짓는다고 할 때에 돈 벌어서 집을 상당히 훌륭하게 지어 놓으면 내가 집을 지었다고 말입니다.


집을 지을 때는 목수가 있고 미장이가 있고 모두가 다 들어 안 갑니까? 그 인연 따라서 인연이 집합돼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슨 회사도 운수가 맞고 과거세에 복을 좀 지어 사람을 잘 쓰니까 회사가 흥성한 것이지 자기가 똑똑하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회사가 흥성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어리석은 사람들은 꼭 자기가 한 것이 자기 능력 때문에 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인연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 아무 것도 자기 혼자 능력으로 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만심을 낼 필요가 없지요. 자기가 무슨 능력이 있어 갖고 자기 스스로 뭣을 산출했다는 그런 망상이 사부견입니다.


다섯 번째는 상견(常見), 이것은 우리 몸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몸이 과거전생도 이와 같은 몸이 있었고 죽은 뒤에도 어디에 태어나던지 간에 금생의 내 눈 내 코 이런 모양으로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소박하니 일반 사람들은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해서 사후에도 또는 생겨나기 전에도 같은 생명존재다 이와 같이 갖는 그릇된 생각이 상견이라 말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존재는 분명히 아니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물론 존재 했었겠지요 과거 존재는 그전의 존재 때 어떻게 업을 지었던가에 따라서 과거의 몸이 있었을 것이고 금생에는 과거 생에 지은 업 따라서 금생에 우리가 받았고 내생은 또 금생에 어떻게 행동을 했던가, 금생의 업 에 따라서 몸을 받는 것이지 과거ㆍ금생ㆍ내생 같지가 않다 말입니다.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견입니다.


여섯 번째는 단견(斷見), 이것은 그 반대로 과거 전생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금생과 내생도 아무 상관이 없이 다만 금생뿐이다 는 단절된 생각이 단견이라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생명이라는 것은 원래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것이 사실이라 말입니다.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기 때문에 다만 업식만 업식에 따라서 그때그때 인연에 집합된 모양이 존재하는 것이지 생명자체는 죽음이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다만 과거나 금생 내생이 똑같지는 않지마는 생명존재는 지속돼 간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속이 안 된다는 끊을 단(斷)자, 이것이 단견입니다.


그 다음에는 유견(有見)이라,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은 다 있다고 생각 안합니까? 있다고 생각하나 아까 인연법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역시 유라는 것은 인연이 모아져서 잠시간 우리 중생이 근원을 못 보니까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반대인 무견(無見)이라, 죽어지면 아무 것도 없고 소멸되면 그대로 끝이라 하지마는 우주라는 것은 에너지 불멸법칙으로 생명의 근원적인 에너지는 항시 그대로 남아 있다 말입니다. 모양만 그때그때 바꾸는 셈 아닙니까? 이와 같이 모든 그릇되고 삿된 생각이 이른바 부정견인데 인연법적인 사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 이런  부정견을 가질 수가 없다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상황이라는 것은 고(苦 )ㆍ공(空)ㆍ무상(無常) 무아(無我)라, 결국은 그냥 무상이고 무아기 때문에 공이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