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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육조단경소참법문 6.(2)

내내야 지(地)라는 것도 4/5는 수(水)고 1/5은 화진(火塵)인데 이것이 합해서 지(地)가 됐을 뿐인데 따라서 해체해 버리면 결국 지성(地性)이 간 곳이 없게 되겠지요.


2.《우주의 본질과 질량 34. 좌선진(左旋塵)과 우선진(右旋塵)을 읽으시면서》


지진(地塵)의 이것은 이른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지(地)인데 『지진(地塵)의 4/5는 수진(水塵)이며 1/5은 화진(火塵)이므로 이를 해체할 경우는 지성(地性)을 얻을 수 없다. <내내야 지(地)라는 것도 4/5는 수(水)고 1/5은 화진(火塵)인데 이것이 합해서 지(地)가 됐을 뿐인데 따라서 해체해 버리면 결국 지성(地性)이 간 곳이 없게 되겠지요.> 수진(水塵) 혹은 화진(火塵)의 진체(塵體)란 또한 지성(地性)을 대(帶)하므로 지성(地性)을 띠었으므로 지성(地性)을 떠나서는 수(水)· 화(火) 이진(二塵)을 인정할 수가 없다. 냉열(冷熱)의 차(差)가 풍진(風塵)이므로 수(水)· 화(火) 이진(二塵)을 인정(認定)하지 않고서는 풍진(風塵)을 찾을 수가 없다. <풍진(風塵), 이것은 하나의 운동원인 즉 말하자면 동력 풍진(風塵)이라 말입니다.>


아무튼 사대진(四大塵)이 일신(一身)이 되어 떠날 수 없는 사실이므로 4대를 또한 객진(客塵)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다 같이 일금진(一金塵)의 4대 작용이다. <금진(金塵)이란 것이 어떻게 결합 됐는가, 어떻게 운동 하는가 그것 따라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 생겨나는 것이지 본래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 그대로 있지 않다 말입니다.>

좌선(左旋) 금진(金塵)이 <금진(金塵)이란 것은 아까 말마따나 물질의 가장 궁극적인 체(體)란 말입니다.> 수진(水塵)이며 우선(右旋) 금진(金塵)<우편(右便)으로 도는 금진(金塵)>이 화진(火塵)이다. 그리고 그 진체(塵體)가 <알맹이> 지성(地性)이며 좌선(左旋) 혹은 우선(右旋)이 풍성(風性)으로서 좌선(左旋)은 우선(右旋)에 대(對)해서만 좌선(左旋)·우선(右旋)은 좌선(左旋)에 대(對)해서만 우선(右旋)이다.  <좌편으로 도는 것은 우편으로 도는 것에 대해서만이 좌선인 것이고 또 우편으로 도는 것은 좌선에 대해서만이 우선이다. 결국 상대적이니까 말입니다.> 결국 좌우(左右)의 이름과 선회(旋廻)의 상(相)만 남을 뿐으로서 그 이름과 명(名)·상(相)을 떠나면 공(空)인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가 이와 같이 본래 공(空)인 것인데 그 가운데 이런 질료(質料)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운동 상황 따라서 차이가 생긴다 말입니다. 한 금진 이것이 근원인데 금진(金塵)이 좌편으로 돌면 수(水)가 되고 우편으로 돌면 그때는 화(火)가 된다 말입니다. >

그러나 다만 공(但空)이 아닌, 질신(質身)의 궁경(窮竟)으로서 분석할 수 없는 하나의 주진(主塵)을 이에 금진(金塵)이라 운(云)한다. <질료의 끄트머리로서 금진(金塵) 이라는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가장 미세한 소립자 원자핵을 말한다 말입니다.>


그리고 좌선진(左旋塵)은 동성(同性)상인(相引), 이성(異性)상척(相斥)<동성끼리는 서로 이끌고 이성끼리는 서로 배척하는> 특성(特性)이 있고 우선진(右旋塵)은 동성(同性)상척(相斥) 이성(異性)상인(相引)의 <또는 우편(右便)으로 도는 금진(金塵)은 동성끼리는 서로 배척하고 이성끼리는 서로 이끄는> 특성(特性)이 있기 때문에 드디어 사성(四性)의 차별이 일어나므로 동성(同性)상인(相引)을 <동성끼리 서로 이끄는 것을> 수성(水性), 이성(異性)상척(相斥)을 <이성끼리 서로 배척하는 것을> 지성(地性) 또는 동성(同性)상척(相斥)을<동성끼리 서로 배척하는 것을> 화성(火性), 또는 이성(異性)상인(相引)을 <이성끼리 서로 이끄는 것을> 풍성(風性)이라 말하므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4진(塵)이라 할지라도 한 금진(一金塵)이 좌선(左旋) 혹은 우선(右旋)으로 말미암아 사상(四相)을 정(呈)하는 것이다 <네 가지 상을 보이는 것이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4대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ㆍ수ㆍ화ㆍ풍이 어떻게 나오는가? 좌금진·우금진이라, 우주 끄트머리까지 가서 보면 전자기(電磁氣)가 충만해 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기는 어떤 것이고 자기는 어떤 것인가? 이것도 현대물리학이 그렇게 발달 되었지마는 명백히 누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원리는 못 밝히고 있는데. 금타(金陀)스님이 처음으로 물리적인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35. 자금진(磁金塵)과 전금진(電金塵)》

「좌선(左旋) 금진(金塵)이 우선(右旋)<우편(右便)으로 도는> 금진(金塵)에 대(對)하여 자기(磁氣)가 생(生)하고 우선(右旋)<우편(右便)으로 도는> 금진(金塵)이 좌선(左旋)<좌편으로 도는> 금진(金塵)에 대(對)해서 전기(電氣)를 발(發)하므로 좌선(左旋)금진(金塵)을 자기진(磁氣塵), 우선(右旋)금진(金塵)을 전기진(電氣塵)이라 말한다.」


불교 우주관은 삼천대천세계가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떠 있어요. 삼천대천세계를 비유해 보면 마치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금색바다에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빛입니다.


태양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파괴되는 데는 몇 백 년 걸린다 하는 이런 것들이 불경에 다 있습니다. 골치 아프게 누가 볼 라고도 안 하는 이런 것 들이  지금 여기에서 취급하는 이 숫자 이것이 삼천대천세곕니다. 즉 말하자면 백억세계여요. 그러니까 한 태양계가 백억이 있습니다. 불교 우주관은 삼천대천세계가 한도 끝도 없이 우주에 떠 있어요. 삼천대천세계를 비유해 보면 마치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금색바다에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빛입니다.


우리 중생이 본 다고 생각할 때는 어떤 모양으로 보이지마는 천안통(天眼通)을 통한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 광명뿐이라 말입니다. 아미타불도 내내야 무량광불 아닙니까? 우주는 무량무변의 금색바다에 금색광명이 가득 차 있습니다. 금색바다에 십억의 금구(金漚)가, 이것은 거품 구(漚) 자입니다. 한 우주가 영원적인 넓은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하나의 거품 같다 말입니다. 지구에 있는 중생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금색바다에 뛰노는 거품이나 같다 말입니다. 한 지구만 본다 해도 얼마나 중생들이 많습니까. 무량의 금구(金漚)가 인다라망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다라망은 모든 진리를 포함해 있다 말입니다. 작다 해서 진리가 아닌 게 아니라  티끌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무량의 진리가 거기에 다 들어 있다 말입니다. 그래서 무량의 진리란 뜻이 인다라망(因陀羅網)이란 뜻이어요.

 

《우주의 본질과 질량 마지막부분》

「또한 무량(無量)의 금구(金漚)가 인다라망(因陀羅網)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실제(實際)는 일우주(一宇宙)의 80억 배(倍)이나 대수(代數)로써 백억세계라 운(云)한다.」


우리가 우선 삼천대천세계만 두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백억 우주여요. 태양계 같은 것이 백억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 같은 것이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이 불교 우주관입니다. 그러니까 이 양반 수행법은 육조스님께서 한 수행법과 똑 같아요. 보리방편문(菩堤方便門)이 『단경』에서 말하는 삼신(三身)일불(一佛) 자성(自性)에 귀의하라는 그런 내용이지요.


해탈16지, 이런 것은 참 천고(千古)의 명저(名著)입니다. 우리 중생이 범부로 부터서 성불까지를 가는 과정을 16구분해서 16계단으로 말씀했다 말입니다. 화엄경도 십지가 있고 능엄경도 46지가 있고 그래요.  그런 데서 말씀하신 것이 하도 구구하니 여기저기서 장난(長難)하게 인용해놨기 때문에 후대인들이 종잡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래서 불경이나 논장에 나와 있는 모든 수행과정을 총 망라해서 우리 중생이 삼보에 귀의해서 성불까지 16구분으로 한 것이 16해탈지입니다.


그래서 이 가운데는 어느 경에서 뭐가 있고 뭐가 있고 인용을 다 해 놓으니까 본인들이 보고 싶으면 다른 경을 거기에 따라서 찾아보면 되겠지요. 어떻든 간에 하여튼 대승ㆍ소승ㆍ밀교ㆍ현교를 총 망라해서 중생이 삼보에 귀의할 때부터 완전히 구경해탈지 까지 가는 것을 16단계로 해 놨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 있으면 산중 가더라도 혼자 공부하더라도 ‘내 공부가 이만치 됐구나!’ 하고 스스로 안다 말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보면 모든 다 체계가 일관적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참 쉽습니다. 단지 술어가 전문불교술어라 좀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또 불성(佛性)에 대한 풀이라던가 하여튼 불교의 중요한 풀이중 가장 난해하고 중요한 풀이가 다 들어 있고 또 뒤에 가서는 밀교의 중요한 부분도 다 말씀해 놨어요. 그리고 내내야 보리방편문 수행법은 일상삼매ㆍ일행삼매 이런 대목은 하여튼 육조단경에서 있는 수행법하고 똑 같습니다.

 

《금강심론 304페이지에서》

「멸진정(滅盡定)이란 색음(色陰)을 멸진(滅盡)함에 따라 <물질적인 것을 다 멸해서 없앰에 따라서> 수(受)·상(想)·행(行)·식(識) <우리정신에 있는 수(受)·상(想)·행(行)·식(識)>사음(四陰)의 염심(染心)을<오염된 마음> 멸진(滅盡)하는 삼매(三昧)의 명(名)이니 초(初)·이지(二地)에서 색음(色陰)을 삼(三)·사지(四地)에서 수음(受陰)을 오(五)·육지(六地)에서 상음(想陰)을 칠(七)·팔지(八地)에서 행음(行陰)을 구(九)·십지(十地)에서 식음(識陰)을 상하품(上下品)의 십중(十重) 오위(五位)로 멸진(滅盡)함이오. 또는 십신위(十信位)에서 색음(色陰)을 십주위(十住位)에서 수음(受陰)을 십행위(十行位)에서 상음(想陰)을 십회향위(十回向位)에서 행음(行陰)을 십지위(十地位)에서 식음(識陰)을 오중(五重) 십위(十位)로 멸진(滅盡)함이니 십중(十重) 오위(五位)론 십주위(十住位)부터 오중(五重) 십위(十位)론 삼지(三地)부터 차제(次第)로 멸진(滅盡)함이니라.


곧 선수후증(先修後證)과 선증후수(先證後修)의 별(別)은 고사(姑捨)하고 색온(色蘊) 또는 차(此)에 염오(染汚)한 사온(四蘊)의 염심(染心)을 멸진(滅盡)하고 정심(淨心)에 주(住)하야 상락(常樂)의 일대(一大)인아(人我)를 성취(成就)하는 멸진(滅盡)삼매(三昧)의 명(名)이니라.


 그리하여 사선(四禪)· 사정(四定)에 이(此)를 가(加)하고 <저번에 말한 구차정(九次定)은 사선정(四禪定)·사공정(四空定)에다 멸진정(滅盡定)을 합한 것인데 우리 불경에서 범부가 성불(成佛)하는 과정을 가장 간명하게 설명한  것이 사선(四禪)·사공(四空)·멸진정(滅盡定)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이란 말입니다. > 구차제정(九次第定)이라 칭(稱)하는 바 사선(四禪)· 사정(四定)은 삼승(三乘)성자(聖者)와 외도(外道)가 공수(共修)하나 제구(第九)의 멸진정(滅盡定)은 성자(聖者)에 한(限)하는 동시(同時)에 외도(外道)는 법상(法相)에만 한(限)하고 정도(正道)에 부재(不在)하며 근기(根機)에 따라 차제(次第)점수(漸修) 또는 간초(間超)와 돈초(頓超)의 별(別)이 유(有)하니라.」

<이른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차이가 있다 말입니다.>


무슨 질문이 있으면 하시지요?


질문

「 수행방법에 있어서 좀 궁금한데요? 보통 선방에 들어가면 처음 8시간 동안 정진하다가 조금 가행하게 되면 10시간 12시간까지 하게 되는데 어쩌다가는 용맹정진 한다 해가지고 밤을 새거나 아니면 1주일동안 용맹정진 한다고 밤새고 잠 안자고 그런 방법을 택하고 하는데 그런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는 건지요?」


-예,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신심의 발로기 때문에 어떤 때 약간 무리를 할 때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나치게 무리하는 것은 공부에 도움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苦行)과 중도(中道)를 구분해서 말씀 안했습니까? 부처님도 처음에야 고행외도한테 가서 배우시고 또 아주 지독한 고행을 하셨지마는 그로해서 색신(色身)만 차근차근 쇠약이 되고 또 마음이라는 것은 색신에 의지해서 있는 것이라 놔서 색신도 필요하고 색신이 무리해 놓으면 우리마음도 그마만치 마음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삼매(三昧)에 드는 공부에서는 절대로 무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 같은 것도 역시 억지로 고행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리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는 여러 사람을 봤어요. 장좌불와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몸을 상해요. 몸 상해 놓으면 회복이 다른 때 같지 않아 공부하다 그래 놓으면 회복이 어렵습니다. 공부하는 것으로 해서는 손해 보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 연비하는 것도 그래요 쑥불로 손가락을 태우니 그때 순간의 고통도 고통이지마는 몸 전체로 아픈 영향이 가겠지요. 그런 것도 부처님 당시는 도리어 자기 몸을 훼손시키는 것을 금(禁)했다 말입니다.  그러나 하여튼 원력을 위해서 하는지라 우리가 그것을 비방할 수는 없지요. 비방할 수는 없으나 우리 스스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육근 청정이라, 육근이 온전해야 공부도 온전히 할 수가 있는 것이지 너무 무리해 놓으면 우리 공부에도 장애를 받는다 말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포만스럽게 먹는 것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적게 먹어 놓으면 그것이 망상도 일어나고 그마만치 힘도 줄어지고 줄어진 만치 시간도 못 채우고 그러겠지요.


불교에서 육재일(六齋日)은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인데 육재일은 어째서 정했는가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육재일날은 사천왕이 우리중생을 굽어보고 우리가 괴로우니까 몸과 마음을 근신하라 해서 정했다는 그런 말씀도 있고 또 일반 재가불자님들은 출가승같이 생활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육재일만이라도 출가한 기분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육재일 날은 일종(一種) 아닙니까? 부처님당시 우리 비구들은 원칙이 일종이어요. 낮에 탁발해서 먹고 아침저녁으로는 안 먹지요. 몸 약한 사람에 한해서 ‘약석’ 그래서 오후에 조금 간식 들듯이 먹으라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은 비구행이라는 것은 일종(一種) 일시(一時) 일식(一食)이라, 오전에 한 때 먹으라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오후가 지나면 일체 금절시켰지요.


그런 것이 모두 공부를 위해서 어떻게 공부에 필요할 것인가? 그와 같이 오후에 안 먹는 것을 주장 했지요. 그래서 육재일은 재가불자도 하루에 한 끼를 먹습니다. 마치 요새 기독교인들이 주일날 주님과 더불어서 생활하는 그런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듯이 우리 불교도 재가불자들이 출가한 셈 치고서 육재일날 만은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선방도 예전에 비해 많이 문란스러워졌어요. 그것은 뭣인고 하면 지금 현대일수록 새로운 편리한 것을 좋아하니까 거기에 따라 조금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무슨 법으로 공부할 것인가? 무슨 법으로 공부 할 것이며 공부법을 한 번 딱 간택(揀擇)한 다음에는 그야말로 참 결정신심을 내야 됩니다. 결정신심은 다시 후퇴할 수 없는 그런 신심이라 말입니다. 기독교 신학자 리출(Albrecht Ritschl, 1822-1889: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이란 분은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체계를 세운 신학자입니다만 참다운 신심이라는 것은 예수님이나 하느님이 그대를 죽인다 하더라도 끝끝내 변심이 없이 예수님이나 하느님한테 의지하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오로지 자기심신을 의지해서 믿는 것이 신앙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귀의라는 것은 귀명이나 같은 뜻입니다.


 귀명은 돌아갈 귀(歸)자, 목숨 명(命)자, 자기심신을 거기에 의지한다 말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 우리 생명의 근원인 우주생명 거기다 의지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보다 귀중한 것은 없고 또 금생이나 내생이나 어느 때나 필경에는 거기에다 의지할 것이니까 말입니다. 부처한테서 와서 부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위해서 우리 신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귀명· 귀의란 뜻이지요. 우리가 귀명· 귀의라는 뜻을 깊이 생각을 못 하였기 때문에 근래 한국선원에서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다 하는 그런 엉뚱한 망담까지 하게 됐다 말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에 생명으로 돌아가려는 과정에 있는 것이 우리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생명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생각하고 추구하고 그리워하고 흠모해야 할 것인데 그 의심이란 수행법은 신앙자체가 의심하고는 정반대라 말입니다.


 신앙은 100% 믿고 의지하여 신앙이지 어디다 대고 의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벌써 의심을 품는다고 생각할 때는 신앙이 안 되어 버리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 근래의 우리 신앙형태가 아주 잘못되었단 말입니다. 설사 의심이라는 것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무(無)자 화두를 들고 이뭣고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그 불심이 뭣인가 또는 불성이 뭣인가 그렇게 불심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방편으로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만 『육조단경』을 보나 『달마스님어록』을 보나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地)라, 우리 마음의 본바탕이 바로 여래고 부처기 때문에 그 자리 바로 가라는 것이지 의심해 버리면 신앙이 안 되어 버린다 말입니다. 바이블도 역시 “먼저 하느님과 하느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모두가 다 저절로 이루어지리라.” 그렇게 했듯이 우리가 신앙의 핵심을 그대로 안 놓치고서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육조 혜능스님까지 가서 거기 닿아야 이른바 순수한 순선(純禪)이라 순수한 순선을 우리가 다 음미(吟味)할 수 있다 말입니다. 






                                              육조단경소참법문 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