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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육조단경 소참법문 6.(1)

육조단경 소참법문 6


『능엄경(楞嚴經)』에 있는 법문입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億佛念佛)이라.


1.『능엄경(楞嚴經)』에 있는 법문입니다. 약중생심(若衆生心) 억불염불(億佛念佛)이라. 만약 중생의 마음에 부처님을 항시 기억하고, 부처님이라는 것은 내내야 우주의 원리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다른 부처님의 이름도 부처님이란 우주 생명의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한 개념으로 해서는 표현을 못한다 말입니다. 표현을 못하기 때문에 지혜광명이 영원히 빛나는 그런 쪽으로 봐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인 것이고 또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다 이런 때는 목숨 수(壽)자를 써서 무량수(無量壽)라.


이렇게 되는 것이고 또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 이런 때는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없을 무(無) 가 변(邊)자 갓이 없다 말입니다. 그와 같이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것이지 그렇게 고유한 이름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이름이나 부처님 이름은 모두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한도 끝도 없는 그 자리를 표현했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공덕이름을 붙이다 보면 이름은 아픈데 증상 따라서 약 주듯이 모두 중생 그릇 따라서 대기설법으로 중생의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무거운 대로 그에 맞는 이름을 붙이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헷갈려서 사람들 마음이 이래저래 이름에 집착하기 쉽겠지요.


그래서 이른바 총대명사가 있어야 한다 말입니다. 총대명사가 아미타불입니다. 아(阿)는 화신(化身)을 의미하고 미(彌)는 보신(報身)을 의미하고 타(陀)는 법신(法身)을 의미하고, 『육조단경』에 삼신(三身)일불(一佛)이란 말씀이 있는데 그 삼신일불이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 아미타불이라는 것이 우리가 타력적으로 우리 마음밖에 저만치 있다 이렇게 생각 하면 타력염불이 되고 방편염불이 되겠지요.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교의 본뜻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말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밖이나 안이나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는 우주생명 바로 자체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진리인 그런 부처님을 항시 마음으로 안 떠난다 말입니다.


억불이란 것은 진리를 안 떠난다는 그런 뜻입니다. 부처를 기억하고 부처의 이름도 외이고 그렇게 염불한다고 생각할 때에 현전당래필정견불(現前當來必定見佛)이라, 이것은 현세에 있어서나 내세에 있어서나 반드시 결정코 부처를 본다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없는 것을 만들어서 보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는 마음 밖에 어디 있는 부처를 보는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 갖춰 있는 것인데 우리 업에 가려서 못 보던 것을 항시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이름을 외이고 그러다 보니까 차근차근 접근되어서 현세나 내세에 반드시 결정코 부처를 본다 말입니다. 이것은 『능엄경』의 법문입니다.


근래의 한국 선방은 화두(話頭)공안(公案) 의심하는 선(禪) 밖에 없고 그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다른 것은 외도(外道)라고 할 정도로 치우쳤기 때문에 저는 거기에 대립된다기보다 그 마음을 좀 풀어 주기 위해서 염불(念佛)에 대해서는 제가 너무 많다 할 정도로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가 내내야 본래로 부처인데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다른 게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라 말입니다. 이 세상에 부처 외에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지우주가 진여불성 뿐이란 말입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자성(自性)이란 말을 백번도 더 말씀했다 말입니다. 자성이 불성(佛性)이란 뜻입니다. 불성으로 돌아가라는 간절한 마음을 얼마만치 가지셨기에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염불삼매라, 삼매(三昧)라는 것은 우리마음이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삼매 아닙니까? 명상도 하나의 삼매 기초고 다양한 삼매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든 삼매 가운데서 염불삼매라, 부처라는 것이 바로 우주생명이기 때문에 부처를 생각하는 삼매가 가장 심오하다 말입니다. 따라서 총섭일체제법이라, 염불삼매는 모든 일체제법을 다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염불삼매는 모든 일체법을 다 갖추고 있어놔서  소리만 듣고서 따라가는 성문이나 또 인연을 밝히고자 하는 연각승이나 이런 경계가 아니라 바로 대승 보살경계라 말입니다.


염불(念佛)삼매(三昧) 여기 삼매왕(三昧王) 삼매라, 많은 삼매와 명상법이 많이 있지마는 삼매가운데 이른바 왕(王)삼매라 말입니다. 그래서 염불은 임금 왕(王)자, 왕삼매라고도 합니다. 또는 보왕삼매라, 보왕삼매(寶王三昧)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보왕삼매는 중국 당나라 때 비석(飛錫)이란 훌륭한 스님이  보왕삼매론에서 많은 삼매가 염불삼매에 다 포섭되어 버린다는 그런 뜻으로 말씀을 다 했습니다.


금타(金陀)스님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더러 자기 은사스님이니까 과장하지 않는가?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정도는 아닙니다. 전에도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지금 현대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에 있어서는 일본불교가 가장 심오(深奧)하지만 일본불교가 수적으로 보나 어떤 의미로 보나 밀교 같은 그런 법문은 우리한국에서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진언종 그래서 저쪽 부산지방으로 섭외를 하고 있는 정도여요. 신라 때나 백제 때는 우리 한국이 스승 아닙니까마는 지금은 전도가 돼서 자기들이 하여튼 불법에 한해서는 세계 주인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수릉엄삼매도(首楞嚴三昧圖)는 밀교(密敎)계통이에요. 이 도식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징 아닙니까.


비밀스러운 아주 심오한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일본 진언종 밀교에서는 우주의 상징인 만다라를 굉장히 많이 작성을 합니다. 작성을 많이 하나 그것이 전승이 되는 과정에서 와전되어서 난해하기만 하고 원칙을 따르는 것은 별로 없다고들 말하는 셈인데 그 모든 만다라 즉 말하자면 우주의 상징도 가운데서 팔만사천법문을 하나로 압축한 것은 이 수릉엄삼매도라 말입니다. 그래서 열반경에 보면 이 수릉엄삼매에 대해서 이름을 다섯 가지로 말했어요. 그 다섯 이름은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ㆍ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ㆍ금강삼매(金剛三昧)ㆍ사자후삼매(獅子吼三昧)ㆍ불성(佛性)입니다. 그러니까 내내야 불성을 깨달은 그런 경계를 의미한다 말입니다.


불성을 깨달아 하나의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 반야의 지혜가 되고 또 견고부동해서 영원히 파괴될 수 없는 진리니까 금강삼매일 것이고 또 사자후삼매라, 사자라는게 백수의 왕 아닙니까? 백수의 왕이니까 이 보다 더 높은 삼매가 없다는 걸로 해서 사자후삼매라 말입니다. 따라서 다섯 가지 이름이 똑 같은 뜻입니다. 수릉엄도(首楞嚴圖)에는 이런 뜻이 포함돼 있어서 간단히 말하면 하나의 불성도(佛性圖)라 말입니다.


『육조단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삼신(三身)일불(一佛)에 귀의(歸依)하라’ 그 말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령 부처님을 등사한 것으로 못 모신다고 할 때는 이런 만다라나 이런 불성도를 모시는 것이 의의가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불상은 구상적으로 모양은 나와 있지마는 거기에 표현은 안 돼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량법문을 간추려서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여튼 그 팔만사천법문의 중요한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아까 말마따나 우주 자체가 우주생명이 부처고 그 대명사가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아(阿)는 화신을 의미하고 미(彌)는 보신을 의미하고 타(陀)는 법신을 의미하고 내내야 삼신일불이기 때문에 그래요. 『육조단경』도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지마는 『육조단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삼신(三身)일불(一佛)에 귀의(歸依)하라’ 그 말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단경』의 주체인 동시에 핵심은 삼신일불에 귀의하고 사홍서원을 서원하고 또는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그렇게 하면서 반야바라밀법문을 설하는 것이 『육조단경』의 핵심이라 말입니다.


여기서 식으로 본다면 유식론도 그래요.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이 여섯 가지 육식(六識)은 우리 중생이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반 동물은 분별 판단을 못 하니까 의식은 없다 말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의식까지는 있지마는 잠재의식은 안 되어서 사용을 못 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잠재의식 의식의 뿌리가 뭣인가? 의식의 뿌리는 제 7식 말나식(末那識)이고 또 깊은 뿌리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고 가장 깊은 뿌리는 암마라식(菴摩羅識)이라 말입니다. 암마라식은 바로 부처로 접근되어 버리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을 하고 삼매에 들어간다고 생각할 때에 차근차근 의식이 깊어져서 잠재의식을 통과해서 부처까지 간다 말입니다. 그래서 사가행위(四加行位)를 거쳐서 가행정진을 해서 초지(初地)에서 견성(見性)을 합니다. 그렇게 올라가서 십지(十地)에서 성불(成佛)해 간다 말입니다.


또 우주라는 것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러니까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 이것은 물리적으로 봐서는 땅 같은 기운이요, 물 같은 기운이요 따스운 온도요 또는 동력인 풍이요 다 그러지마는 물리적인 것의 근본은 능조(能造)사대(四大)라 해서 우주에 정신적으로 충만해 있는 거라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주라는 것은 어느 때나 중생이 미처 그것을 개발 못 하고 중생의 업력으로서 느끼지를 못했지마는 하나의 정신적인 흙기운ㆍ물기운ㆍ 불기운ㆍ풍기운이 항시 갖추고 있다 말입니다. 이것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구상적으로 눈앞에 보이게끔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대 물리학의 원소(元素) 이하 풍성(風性)전자(電子) 화성(火性)전자(電子) 양핵(陽核) 원자핵(原子核) 이란 말입니다.


 불교법문 가운데서 구사론(俱舍論)같은 것은 불교의 우주론입니다. 우주론을 그 속에다 하나의 논장으로 체계화 시켜 놓은 것이지요. 한데 그런 것이 원래 다 있어 왔다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다는 있지 못하고 그 뒤에 모두 부처님 법문을 주석도 하고 하는 가운데서 우주론적으로 체계가 된 것인데 그렇게 이 체계가 사뭇 한 2천년 3천년 동안 흘러 왔지만 지금까지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누가 어떻게 체계도 세우지 못하고 해석도  해부도 못했다 말입니다. 이런 것을 현대물리학과 불교의 우주론을 대비 시키신 분이 바로 금타(金陀)스님이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점만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굉장히 위대하신분이라고 생각 안 되겠습니까?


『우주(宇宙)의 본질(本質)과 형량(形量)』 이것을 학계에다가 내 놓고 그야말로 제대로 검증을 받은 바는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양반이 39세에 도(道)를 통했어요. 통해서 이 분이 갓 50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30대부터는 사회에 전혀 안 나왔다 말입니다. 전혀 안 나오고 또 그때는 불교에서 우주론 같은 걸 들먹이면 아니꼽다 해서 여러 가지 노장스님들이 비방한 셈이고 이른바 우주문제라든가 수학적인 문제라든가 그런 문제가 나오면 외도(外道)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제가 머리말을 쓴 금타(金陀)스님 천문학의 서문입니다. 「금타(金陀)화상(和尙)께서 저술한 바 미증유한 파천황(破天荒)의 우주론은 단순한 사변적(思辨的) 소산(所産)이 아닐 뿐만 아니라 경험 과학적 시도와는 그 차원을 달리한 순수 직관적(直觀的)인 현묘(玄妙)한 선정(禪定)을 통한 통찰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 현행 천문학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은 도리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천문학 또한 아직도 암중모색(暗中摸索)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니 설사 금타(金陀)화상(和尙)의 천문설이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너무나 거창하고 합리적인 체계를 어느 뉘라서 감히 부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또한 화상(和尙)의 우주론은 어디까지나 불설(佛說)에 그 근저(根柢)를 두었으며 불교 우주관인 삼천대천세계 곧 10억 우주에 관(關)한 초유(初有)의 체계화임을 감안 할 때 참으로 귀중한 불교 문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특히 불교인으로서는 불교 우주관에 관한 깊은 고려 없이 다만 일지(一知)반해(半解)한 천문(天文)상식(常識)만으로 천박한 비판을 함부로 한다면 도리어 방불(謗佛)훼법(毁法)의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훼손하는〉허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화상(和尙)의 우주론이 저으기 난해(難解)한 것은 천문학 본래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을 뿐 아니라 본 저술이 구체적인 주해(註解)가 없는 원리만의 논술(論述)이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니 모름지기 진지한 구도인의 자세로 숙독(熟讀)음미(吟味) 한다면 반드시 귀중한 조도(助道)의 자량(資糧)이 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이것은 금타(金陀)스님의 서문(序文)입니다. 「일미(一微)를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잘못 보면(誤見) 이것이 망상(妄想)이 되고 티끌이라도 바로 보면(正見)  진각(眞覺)이 〈참다운 깨달음이〉된다. 일체만사(一切萬事)가 자기의 견해에 의하여 진(眞)과 망(妄)이 간별(揀別) 될 뿐 일미(一微)나 일체(一切)에 본래 진(眞)망(妄)이 <본래 진과 망이 본래는 없다 말입니다. > 없으며 기세간(器世間) <기세간은 현상계 우주를 말합니다.> 이대로가 일진(一眞)법계(法界)로서 일체중생이 일불(一佛)의 화신(化身)이며 <중생이 모두가 다 우주적인 하나의 부처님의 화신이라 말입니다.> 개별적 화신이 바로 본신(本身)의 부처임을 망각(忘却)하고 전도(顚倒)망상(妄想)하여 미혹인(迷惑人)이 되고 <스스로 우리가 지어서 미혹인이 되고> 스스로 범부(凡夫)라 이름하나 일대인(一大人)에게는 성범(聖凡)이 없다. <성자의 견지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범이 본래 없다 말입니다.>


 만약 사람이 삼세(三世) 일체(一切)가 부처임을 요지(了知) 하고자 하면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가 바로 보면 삼세일체가 다 부처뿐입니다. 다 진여불성 이른바 자성뿐이란 말입니다.> 마땅히 법계성(法界性)을 관찰할지니 <법계성이란 것은 우주법계 본성을 관찰하라> 일체 모두가 유심(唯心)의 소조(所造)니라. <일체 모두가 불심이라는 마음으로 돼 있다 말입니다.>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灌法界性 一切唯心造) <이것은 화엄게입니다. 『화엄경』에 있는, 만약 사람이 삼세일체가 불임을 알고자 하면 뻑뻑이 마땅히 법계성을 관할지니 일체 모두가 마음으로 돼 있도다 > 함은 화엄게(華嚴偈)이다. 법계성(法界性)을 보고 그 이하는 색법(色法)으로써 전간(全揀)하며 이상은 심법(心法)으로서 전수(全收)하니<다 거두니>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공(空)이란 색애(色碍)가 없는 부단공(不但空)인 진공(眞空)을 말하며 색(色)이란 질애(質碍)이면서 <즉 질량 말입니다. 질량이면서> 그림자와 같이 진공체(眞空體)의 묘용(妙用)인 가상(假相)을 말하므로 즉체(卽體)즉용(卽用)으로서 <곧 체가 바로 용으로서> 성(性)· 상(相)이 <성품과 현상이> 일여(一如)이며 즉심(卽心)즉불(卽佛)이므로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므로 이 마음이 부처라는 것이 쉽기도 하고 굉장히 심오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란 것은 원래 모양이 없는 것인데 순 생명인데 이 마음이 결국은 바로 부처로 막 이어있다 말입니다. 묶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 내내야 법신불이라는 우주생명도 모양이 없는 순 생명이고 우리 마음도 내 마음 그러지마는 그게 모양이 있는 것입니까? 순 생명이기 때문에 똑같은 것인데 우리 중생이 공연히 구분해 보니까 거기에서 아상(我相)이 생기고 그런다 말입니다. 즉심 곧 바로 부처이므로> 삼세(三世)일체(一切)가 보현경(普賢境)이다.


 <삼세일체의 모양 자체가 보현무상경계라 말입니다.> 그리나 미혹(迷惑)한 사람(人)은 대일(大日)심체(心體)가 <훤히 우주에 빛나는 마음의 체가> 질애적(質碍的) <물질의> 그림자에 가리워 진지(眞智) <참다운 지혜의> 증명(證明)이 없이 망견(妄見)을 세워서 진리(眞理)라고 생각하며 주객(主客)이 전도(顚倒)한 사실마저 부인한다.< 현실에 대해서 금타스님이 비판 한 것이지요.>」


이에 몇 가지 예를 들면 열(熱)이 지륜계(地輪界)( 지구와 지구의 반경(半徑)을 배증(倍增)한 구상(球狀)의 허공신(虛空身)을 운(云)함) <그러니까 이 양반이 물리학이라든가 수학도 굉장히 깊이 공부하신 분이어요.> 자신의 열임을 모르고 열원(熱源)이 태양에 있다고 하며 광명 또한 지구 자아(自我)의 광명임을 모르고 태양이 광원(光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달은 태양의 반영체(反映體)라 한다. 그러나 만근(輓近)<최근> 비행술이 발달하자 태양을 향하여 상승할수록 냉기가 다가오고 또한 어둠을 느끼며 달밤에는 온기(溫氣)가 느껴지는 사실은 무슨 이유인가? 또는 달의 상현(上弦)과 하현(下弦)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리운 표징(表徵)이라 하는데 과연 의문이 없을 것인가?


현대과학문명을 자랑 하면서 아직까지 은하수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지 못하며 일월성수(日月星宿)가 어째서 허공에 부유(浮遊)<떠있고>하고 있는지 그리고 좌전(左轉) 또는 우전(右轉)하지 아니치 못할 이유가 나변(那邊)에 있는지 <그러니까 좌편으로 도는 것도 있고 우편으로 도는 것도 있습니다. 현대천문학이 그런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거거든요.>


이에 대한 해명(解明)이 애매하며 역년(曆年)일시(一時)가 365일과 6시 미만(未滿)임을 경험하면서 태양과 지구의 거리와는 무관한 사실이라 생각하고 굳이 지구반경의 23440배라 말하며 빛(光)이 태양에서 지구까지 여행하는데 8분20초 걸린다고 한다. 아무튼 수자(數字)는 형식과학에 속하나 요(要)는 주관점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이다. 이십세기 문명이 여지껏 우주를 해부하지 못하며 육안(肉眼)의 실성(實性)을 회복한 천안(天眼)에 의해서만 <그러니까 천안을 얻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를 다 열어본다 말입니다.> 발견 할 수 있는 양핵(陽核)의 칠분의 일에 해당하는 금진(金塵) 곧 원자핵(原子核)의 본질(本質)을 <그러니까 불교의 구사론에는 현상적인 자연과학적인 모든 것을 한 체계를 세웠지요. 물질의 가장 근원적인 미세한 것을 금진 그래요 지금 현대로 말하면 원자핵의 본질이라 말입니다. 그래서 물질의 가장 근본인 금진은 일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안통을 해야지.>


분석과학에 의하여 발견하려고 허로(虛勞) <헛된 수고>를 비(費)함은 바른 눈이 있는 자 입을 삼가고 있을 수 없으니 정견(正見)있는 사람은 채찍을 들고 일어서라!  그리고 성인(聖人)들이 인정한 바 장구(長久)한 세월을 두고 뼈가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된 정신문명을 등장시켜라!

본설(本說) 『우주(宇宙)의 본질(本質)(法界性)과 형량(形量)(行相)』인 편언(片言)척구(隻句)가 만(萬)에 일(一)이라도 정도(正道)를 지시(指示)하는 조도적(助道的) 자량(資糧)이 될 수 있다면 행심(幸甚)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본설(本說)을 육절(六節)로 대별(大別)하고 백항(百項)으로 소분(小分)하였으나 일관(一貫)된 도리(道理)로 시종(始終) 하였으며 더욱이 태장계(胎藏界)의 수치로서 일률적으로 계산한 수자(數字)이므로 백(百) 중(中) 그 일(一)을 인정(認定)  때 백(百)을 또한 부인(否認)할 수 없을 것이므로 췌언(贅言)이면서 이를 부언(附言)하는 바이다.」 이 말입니다.


하여튼 지금 현대 인간의 안목에서는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가까스로 원자핵까지만 현미경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지 원자핵의 본질인 물질의 가장 궁극적인 이른바 금진(金塵)경계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금진(金塵)은 비로소 마음을 통해서 견성(見性)오도(悟道)한 법성(法性)을 스스로 체험한 성자(聖者)의 안목이 돼야 금진을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4대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그것도 이 양반이 처음 표현했어요. 처음 현대물리학적인 수(數)하고 대비시키면서 표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