Ⅸ 육조단경(六祖壇經) 제십(第十)부촉품(付囑品) <要略 9>
여등 약욕성취종지 수달일상삼매 일행삼매
汝等 若欲成就種智 須達一相三昧 一行三昧
약어일체처 이부주상 어피상중 불생증애 역무취사
若於一切處 而不住相 於彼相中 不生憎愛 亦無取捨
불념이익 성괴등사 안한염정 허융담박 차명일상삼매
不念利益 成壞等事 安閑恬靜 虛融澹泊 此名一相三昧
약어일체처 행주좌와 순일직심 부동도량 진성정토 차명일행삼매
若於一切處 行住坐臥 純一直心 不動道場 眞成淨土 此名一行三昧
약인구이삼매 여지유종 함장장양 성숙기실 일상일행 역부여시
若人具二三昧 如地有種 含藏長養 成熟其實 一相一行 亦復如是
아금설법 유여시우 보윤대지 여등불성 비제종자 우자첨흡
我今說法 猶如時雨 普潤大地 汝等佛性 譬諸種子 愚玆霑洽
실득발생 승오지자 결획보리 의오행자 정증묘과 …
悉得發生 承吾旨者 決獲菩提 依吾行者 定證妙果
이것은『육조단경(六祖壇經)』제10「부촉품(付囑品)」에 있습니다.『단경(壇經)』은 돈황본(燉煌本), 종보본(宗寶本), 덕이본(德異本), 대승사본(大乘寺本)이 있으나 여기는 종보본(宗寶本), 덕이본(德異本)에 있는 것을 옮겼습니다.
대체로 지금 일반적으로 유포(流布)가 된 것은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종보본(宗寶本)과 덕이본(德異本)을 많이 씁니다. 돈황본(燉煌本)의 내용은 제일 오래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리가 안 되어 있어서 질서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기에 정리가 된 것은 가사 몇절 멏 절 해서 정리가 되었지만 이 종보본(宗寶本)과 덕이본(德異本)은 후대(10세기)에 나왔기 때문에 정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어느 경이나「부촉품(付囑品)」은 그 경(經)의 결론과 같은 품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핵심적인 것을 간략하게 내놓은 것이 「부촉품(付囑品)」입니다. 다시 말해서 후인들에게 이것만은 꼭 명심해야 된다고 강조한 것이 「부촉품(付囑品)」인 것입니다.
‘여등 약욕성취종지(汝等 若欲成就種智)라.’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는 부처님을 알 듯 말듯한 그런 것이 아니라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모든 것을, 즉 본체(本體)나 또는 현상(現象)이나 일체의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따라서 그대들이 만약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成就)하려고 하면 ‘수달(須達)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라.’ 모름지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지니라.「부촉품」외에도 「정혜품(定慧品)」이나「좌선품(坐禪品)」에 보면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말씀이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와 합해서 여섯 군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얼마만큼 역설(力說)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무엇인가. 이것은 본체(本體), 즉 우리 본래(本來)의 생명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서 그 자리를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놓치지 않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약어일체처 이부주상(若於一切處 而不住相)이라.’ 만약 모든 일체처(一切處)에 있어서 부주상(不住相)하고, 즉 상(相)에 머물지 않고, ‘어피상중(於彼相中)이라.’ 비록 상(相)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시 말해서 현상적인 문제에 있어서 분별을 한다 하더라도 ‘불생증애(不生憎愛)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불취상모(不取相貌)라.’ 또는 ‘역무취사(亦無取捨)라.’ 취하거나 버리지도 말지니라.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인지라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에서 본다면 ‘불념이익 성괴등사(不念利益 成壞等事)라.’ 무엇이 이익되고, 성취가 되고, 또는 이루어지고, 또는 파괴가 되는 이러한 세간적인 분별망상은 하지 말고, ‘안한염정(安閑恬靜)이라.’ 마음이 편안하니 고요하려면 우리 마음을 불심(佛心)에다 안주(安住)해야, 즉 거기에 머물게 해야 마음이 편안하고 동요도 없습니다.
‘허융담박(虛融澹泊)이라.’ 마음이 허공과 같이 맑아서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고 다른 어떤 복잡한 상념(想念)이 조금도 없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相)을 내지 않아야 되겠지만 어느 가운데 서운할 때는 너다 나다 하는 상(相)을 낼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상(相)을 낸다 하더라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또는 취하고 버리지도 말고, 또는 무엇이 이익된다, 또는 무엇이 파괴된다, 또는 나에게 손해가 있다 하는 공리적(公利的)인 생각을 내지 말고 마음이 편안하니 그야말로 허공과 같이 담박(淡泊)이 되어야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昧)가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가 모두 다 하나의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되어야 일상삼매(一相三昧)가 되는 것입니다.
‘악어일체처 행주좌와(若於一切處 行住坐臥)라.’ 만약 모든 일체처(一切處)에 어느 곳이나 행하고(行), 머물고(住), 앉고(坐), 눕고(臥) 하는데 있어서, ‘순일직심(純一直心)이라.’ 부처님을 지향한 순수한 곧은 마음이 ‘부동도량(不動道場)이라.’ 도량(道場) 이것은 공부하는 장소라는 뜻도 있고 우리 마음의 본체(本體)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순일(純一)한 그 마음의 본체(本體)를 떠나지 않으면, 즉 우리 심장을 떠나지 않으면 그때는 ‘진성정토(眞成淨土)라.’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이룩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는 ‘차명일행삼매(此名一行三昧)라.’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가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또는 취(取)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허공과 같이 고요하고 담박(淡泊)하게 되는 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다시 말해서 행하고, 머물고, 또는 앉고 눕고 하는 데 있어서 어느 때라도 순일(純一)한 순수한 마음, 곧은 마음이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으면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 즉 정토(淨土)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행삼매(一行三昧)인 것입니다.
‘약인구이삼매(若人具二三昧)라.’ 만약 사람이 이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갖춘다면 ‘여지유종(如地有種)이라.’ 마치 땅에다 종자를 뿌려서 오랜 동안 그 종자를 머금고서 이것이 ‘성숙기실(成熟其實)이라.’ 그래서 나중에는 드디어 열매를 맺음과 마찬가지로 ‘일상일행(一相一行)도 역부여시(亦復如是)라.’ 이와 같이 우리 마음에다가 부처님을 두고 오로지 생각하고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로 해서 수행(修行)한다면, 마치 땅에다 종자를 묻음과 같이 오래오래 공부를 한다면 마침내 열매를 맺어서 그야말로 훌륭한 성취(成就)를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금설법(我今說法)은 유여시우(猶如時雨)라.’ 내가 하는 이 설법(說法)은 마치 비가 내려서 온 대지(大地)를 촉촉이 적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등불성 비제종자(汝等佛性 譬諸種子)라.’ 그대들의 불성은 종자(種子)에 비길 수가 있는 것인데, 마치 종자가 비를 만나서 촉촉이 적셔져서 수분을 흡수해 가지고 싹이 터 나오듯이 ‘승오지자(承吾旨者)는’ 내 뜻을 받든 자는 ‘결획보리(決獲菩提)라.’ 결정코 보리(菩提), 즉 참다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고, ‘의오행자(依吾行者)는’ 내 뜻에 따라서 수행하는 자는 ‘정증묘과(定證妙果)라.’ 결정코 묘과(妙果)라. 성불(成佛)이라 하는 대각(大覺)을 성취(成就)할 수가 있도다.
이것으로 해서 대체로 여기 사본에 적혀있는 것은 말씀을 다 마쳤습니다. 제가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고 그 중간에도 누누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얽히고 살킨 정보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만 보더라도 종교인의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독교 인구가 20억, 이슬람이 13억, 또는 힌두교가 약 7억쯤 되고, 불교는 약 3억쯤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가르침으로 해서는 이 혼란한 정보의 가닥을 추려서 맞출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적어도 본체론적(本體論的)인, 존재론적(存在論的)인 문제를 다른 종교에서는 제대로 밝히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본체론(本體論)이 다른 종교(宗敎)에는 안들어 있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그 당시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밝히지를 못하고 체계(體系)를 안 세웠다는 그 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왕자로 태어나셔서 49년 동안 설법(說法)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왕자나 학자, 또는 누구에게나 말씀한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충분히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고, 또는 그 뒤에도 용수보살(龍樹菩薩), 제바보살(提婆菩薩), 바수반두 세친보살(婆藪槃頭 世親菩薩), 달마대사(達磨大師), 사조 도신대사(四祖 道信大師), 오조 홍인대사(五祖 弘忍大師), 육조 혜능대사(六祖 慧能大師), 그 뒤에도 많은 도인들로 해서 체계(體系)가 확립되고 더욱더 부연설명(敷衍說明)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체론(本體論)과 방법론(方法論)의 체계가 그야말로 굉장히 상밀(詳密)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느 철학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과학적인 문제, 철학적인 문제, 신학적인 문제 등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특히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 혜능(六祖 慧能) 때까지 한 법문(法門)은 그 핵심 가운데서도 핵심이 됩니다. 그러기에 순선(純禪)인 것입니다. 순선(純禪)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열(分裂)이 안 된 불조(佛祖)가, 즉 부처님과 조사(祖師)가 정다웁게 하신 법문(法門)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제가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 법문(法門)은 20세기에 있어서 문화의 혼란(混亂)을 충분히 맑히고 인간의 참다운 행복인 성불(成佛)을 성취(成就)하게 할 수가 있으며 동시에 세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성취해 주는 가장 수승(殊勝)한 법문(法門)이라고 생각 되었기 때문에 순선법회(純禪法會)를 마련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제가 말씀드린 것을 참고로 하시고 어느 때 공부하시든지간에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도인(道人)인가 아닌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몇 천 년 동안, 또는 몇 백 년 동안 무수한 성자(聖者)가 다 그대로 검증(檢證)을 해야 되는 것인데 검증(檢證)을 않고 ‘이 시대의 훌륭한 스님이다.’라고 하거나, 또는 어느 문중에서 도인으로 내세우면 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해서는 우리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째 됐든간에 우리 한국만 두고 보더라도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또는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태고 보우선사(太古 普愚禪師), 나옹 혜근선사(懶翁 惠勤禪師), 또는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기화 득통선사(己和 得通禪師),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四溟大師), 편양 언기선사(鞭羊 彦機禪師), 설파대사(雪波大師), 초의선사(艸衣禪師) 등 이분들의 말씀은 맥락(脈絡)이 거의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맥락(脈絡)이 같다는 말인가. 그것은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염불(念佛)과 참선(參禪)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韓國)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中國)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達磨) 때부터 육조 혜능(六祖 慧能) 때까지는 제가 법문(法門)으로 소개를 해드렸으니까 다시 말할 것도 없고, 그 뒤에 화두선법(話頭禪法)이 임제종(臨濟宗) 일파(一派)가 될 때도 역시 그렇습니다.
원나라 때 중봉 명본(中峰 明本)스님은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임제파(臨濟派)입니다. 이 스님은 원나라 때 불교(佛敎)를 주름잡았던 분인데 이분도 역시 염불(念佛)과 참선(參禪)이 둘이 아니고, 교(敎)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이후에 명나라 때에는 4대 고승(高僧)이 있습니다.『선관책진(禪關策進)』을 저술한 운서 주굉(雲棲 袾宏 : 1532~1612)이나, 또는 자백 진가(紫栢 眞可 : 1543~1603)나, 또는 지욱 우익(智旭 藕益 : 1596~1655)이나, 또는 감산 덕청(憨山 德淸 : 1546~1623)이나 이분들이 명나라 때의 4대 고승(高僧)으로 명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모두가 다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고 참선(參禪)과 염불(念佛)이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고찰을 해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정통(正統)만 믿기에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평생 동안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만 외워도 우리 인생은 너무도 짧습니다.
불자님들,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지 마시고 불법(佛法)의 정법(正法)을 만났을 때 꼭 금생(今生)에 위없는 도(道)를 성취(成就)하여서 무량(無量)한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南無 釋迦牟尼佛)
나무 석가모니불(南無 釋迦牟尼佛)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南無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南無 極樂導師 阿彌陀佛)
나무 마하반야바라밀(南無 摩訶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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