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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Ⅺ 단경(壇經) 참회품(懺悔品)<要略 11>

Ⅺ 단경(壇經) 참회품(懺悔品)<要略 11>

귀의 일체삼신자성불

歸依 一體三身自性佛

선지식 총수자체이수무상계 일시 축혜능구도 영선지식 견자삼신불

善知識 惣須自體以受無相戒 一時 逐慧能口道 令善知識 見自三身佛

어자색신 귀의청정법신불

於自色身 歸依淸淨法身佛

어자색신 귀의천백억화신불

於自色身 歸依千百億化身佛

어자색신 귀의당래원만보신불(이상삼창)

於自色身 歸依當來圓滿報身佛(已上三唱)

… 단오자성삼신불 즉식자성불

但悟自性三身佛 卽識自性佛

불리자성불

不離自性佛

오소설법 불리자성 리체설법 명위상설 자성상미 수지일체만법 개종자성기용

吾所說法 不離自性 離體說法 名爲相說 自性相迷 須知一切萬法 皆從自性起用

시진계정혜법 청오게왈 심지무비자성계 심지무치자성혜 심지무란자성정

是眞戒定慧法 聽吾偈曰 心地無非自性戒 心地無痴自性慧 心地無亂自性定

부증불감 신금강 신거신래본삼매

不增不減 身金剛 身去身來本三昧

『단경(壇經)』「참회품(懺悔品)」

 

이것은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의 법문(法門)입니다. 앞에는 사조 도신(四祖 道信)스님의 법문(法門)이기 때문에 사조(四祖)스님 것을 먼저 했습니다.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의 법문(法門)은 아시는 바와 같이『단경(壇經)』인데『단경(壇經)』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돈황(燉煌)에서 발견된 돈황본(燉煌本)이 있고, 종보(宗寶)스님께서 10세기에 한 종보본(宗寶本)도 있고, 덕이(德異)스님이 한 덕이본(德異本)도 있고, 대승사본(大乘寺本)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체로 네 가지 종류의『단경(壇經)』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돈황본(燉煌本)이 가장 오래된 것인데 이것은 인쇄본(印刷本)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붓으로 친히 배낀 필사본(筆寫本)이므로 오자(誤字)가 아주 많고 게송(偈頌)도 질서가 없어서 후학(後學)들이 볼 때는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종보본(宗寶本)이나 또는 덕이본(德異本) 등의『단경(壇經)』을 보면 북종(北宗)과 남종(南宗), 양종(兩宗)이 서로 시비하고 다툼질했다는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목은 육조(六祖)스님께서 했을 리는 만무할 것입니다. 도인(道人)들이란 시비(是非)를 가리지 않습니다. 도인(道人)들은 진리만을 밝히는 것이지 누가 옳다 그르다 하는 말은 도인들은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비(是非)하는 것은 후대인(後代人)들이 자기들 종파(宗派), 자기들 동아리가 옳다 하는 자시비타(自是非他)하는 데서 나온 것이지 원래『단경(壇經)』의 글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가운데서도 무슨 본(本)이나 또는 갖가지 다른 본(本) 따라 더하고 깎고 그러한 부분은 다 빼버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고 하면 앞에서 제가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은『단경(壇經)』에 있는 삼신일불(三身一佛)에 귀의(歸依)하고,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사홍서원(四弘誓願)에 귀의(歸依)하고, 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말씀하신 내용이며, 그 대목은 어느『단경(壇經)』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핵심이라고 안 볼 수가 없고, 또한 그 법문(法門)은 사실은 사조(四祖)스님이나 오조(五祖)스님이 하신 법문(法門)과도 다 상통(相通)이 됩니다. 그러기에 그와 같이 상통(相通)되는 것만 추려서 제가 여기에 옮겼습니다.

 

앞에서도 삼신일불(三身一佛)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이것은 육조(六祖)스님께서 스스로『단경(壇經)』에다 하신 삼신일불(三身一佛)에 대한 말씀이니다. 이것도 앞에나 뒤에나 많이 분은 것인데 아주 핵심만 골라서 간략히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要略 11>의 귀의 일체삼신자성불(歸依 一體三身自性佛)에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善知識들아! 총수자체이수무상계(惣須自體以受無相戒)라.’ 선지식들아! 모두 다 모름지기 자체에 있는 이 무상계(無相戒)를 지금 받았으니. 이러한 뜻입니다. 무상계(無相戒)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살계(菩薩戒)입니다. 보살계(菩薩戒)는 상(相)을 떠난 불성(佛性)의 도리(道理)를 그대로 말한 계(戒)이기 때문에 보살계(菩薩戒)를 무상계(無相戒)라고도 합니다.

그래서『단경(壇經)』 이것은 육조(六祖)스님께서 소주땅 대범사(大梵寺) 법단(法壇)에 올라가서 무상계(無相戒), 즉 보살계(菩薩戒)를 설(說)했는데 그대에 많은 대중들에게 설한 법문(法門)이 기초가 되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이 되었습니다.

 

모두 한꺼번에 ‘축혜능구도(逐慧能口道)라.’ 이 혜능(慧能)의 말을 따라서, 혜능(慧能)의 입을 따라서 그대들도 같이 말하라는 뜻입니다. 도인들은 대중들에게 절대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꼭 “선지식(善知識)들아!” 그렇게 말을 합니다. 모두가 다 부처로 보이므로 청중(聽衆)에 대해서 함부로 호령(號令)이나 하고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요.

선지식(善知識)들아! 그대들은 모두 무상계(無相戒)를 받았으니 이제는 모두 다 한꺼번에 이 혜능(慧能)의 입을 따라 말하라.

 

그래서 ‘영선지식(令善知識)이라.’ 그 선지식들로 하여금, 즉 여러분들로 하여금 ‘견자삼신불 어자색신(見自三身佛 於自色身)이라.’ 자기 몸에 있는 그 삼신불(三身佛)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이나, 자기 마음이나, 도는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에 있다는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마음과 몸에 있는 삼신불(三身佛)에 귀의케 할지니, ‘귀의청정법신불(歸依淸淨法身佛)이라.’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에 귀의(歸依)하고, 또는 ‘어자색신 귀의천백억화신불(於自色身 歸依千百億化身佛)이라.’ 색신(色身) 가운데 있는 천백억화신불(千百億化身佛)에 귀의(歸依)하라.

 

여기서는 화신(化身)을 보신(報身)보다도 앞에 내세웠습니다. 앞에 내세우나 뒤에 내세우나 원래 삼신일불(三身一佛)이기 때문에 똑같으나 삼신불(三身佛) 사상이 보다 더 발전됨에 따라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쪽으로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앞에서 제가 보신(報身)을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더러 가지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육조 혜능(六祖 慧能)스님께서 하신 법문(法門)을 보다 더 문장을 다듬어서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는 ‘어자색신 귀의당래원만보신불(於自色身 歸依當來圓滿報身佛)이라.’ 우리 몸 가운데, 마음 가운데 있는 당래원만보신불(當來圓滿報身佛)에 귀의(歸依)하고, 이렇게 해서 ‘이상삼창(已上三唱)이라.’ 삼신불(三身佛)에 귀의(歸依)한다는 것을 세 번이나 되풀이해서 나를 따라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조(六祖)스님께서 오직 삼신불(三身佛)에 대해서 그분이 깊이 느끼고 또는 일반 중생들에게 꼭 가르쳐 줘야 되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세 번씩이나 이 혜능(慧能)을 따라서 말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단오자성삼신불(但悟自性三身佛)이라.’ 다만 우리 자성(自性), 우리 불성(佛性),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삼신불(三身佛)을 깨달으면 ‘즉식자성불(卽識自性佛)이라.’ 곧 부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바로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육조단경(六祖壇經)』의 핵심은 삼신불(三身佛)에 귀의(歸依)하고,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사홍서원(四弘誓願)에 귀의(歸依)하고, 또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다르게 북종(北宗)이 옳으니, 남종(南宗)이 옳으니, 또는 돈오(頓悟)가 옳으니, 점수(漸修)가 옳으니 하는 것은 후인들이 더한 것입니다.

다음은 불리자성불(不離自性佛)이라.

 

‘오소설법(吾所說法)은’, 내가 말하는 법 이것은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여기서 자성(自性)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법(法)은 모두가 다 불성(佛性)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성(佛性)을 떠나면 그때는 하나의 상(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체설법(離體說法)은’, 부처라 하는 그 자성을 떠나서 설법(說法)하는 것은 ‘명위상설(名爲相說)이라.’ 이것은 상(相)에 떨어지는 말이다.

‘자성상미(自性相迷)하면’, 자성(子城)이 스스로 미록되어서 상(相)에 떨어지면 결국은 자성(自性)이 스스로 미혹(迷惑)되게 됩니다. ‘수지일체만법 개종자성기용(須知一切萬法 皆從自性起用)이라.’ 모름지기 일체만법(一切萬法)이 모두가 다 자성(自性), 불성(佛性)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체로『金剛經』을 많이 보셨으니까 다 아시겠지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도 무소주(無所住)의 자리, 머무름이 없는 자리, 집착(執着)이 없는 자리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을 내라는 말입니다.

 

또는 ‘개종자성기용(皆從自性起用)이라.’ 자성(自性)에, 불성(佛性)에 좆아서 그러한 용(用)을 내라는 말과 뜻은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누구한테 이야기할 때나, 또는 자기가 생각할 때나 ‘내 본래 성품(性品)은 다 불성(佛性)인데 불성(佛性)에서 보면 이것이 어떨 것인가.’ 이렇게 모두를 다 불성(佛性)으로 비추어서 생각하는 것은 자타(自他)를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불성(佛性)에 비추어서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와 남을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남을 함부로 부린다거나, 또는 자기가 어른 행세를 하려 한다거나, 또는 남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부리려고 하는 것 등은 모두가 다 부처님의 체(體)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항시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그 성품(性品)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용(用), 즉 행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시진계정혜법(시진계정혜법)이라.’ 이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참다운 계정혜법(戒定慧法)인 것입니다. 계율(戒律)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고, 또는 지혜(智慧)를 닦고 하는 것도 모두가 다 그 본체(本體)에다 마음을 두고 해야 참다운 계율(戒律)이 되는 것이고, 본체(本體)에다 마음을 두고 고요히 해야 참다운 참선(參禪)이 되는 것이고, 본체(本體)에다 마음을 두고 무슨 말을 했을 때 비로소 참다운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청오게왈(聽吾偈曰)이라.’ 내가 지금 그 게송(偈頌)을 읊으니 여러분들은 들으시오.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라.’ 마음 바닥, 마음 바탕의 그 불성(佛性)에는 원래 그릇됨이 없으니 이것이 자성계(自性戒)요, ‘심지무치자성혜(心地無痴自性慧)라.’ 우리 마음의 바탕, 마음의 불성(佛性)에는 원래 어리석음(痴)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자성(自性)의 지혜(智慧)요, ‘심지무란자성정(心地無亂自性定)이라.’ 마음의 바탕에는 산란스러운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자성(自性)의 선정(禪定)입니다.

 

‘부증불감 신금강(不增不減 身金剛)이라.’ 그래서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것이 우주에 가득해서 과거, 현재, 미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변함이 없는 이것이 바로 금강(金剛)이고, 또는 ‘신거신래본삼매(身去身來本三昧)라.’이렇게 공부할 때에는 몸이 가나 오나 모두가 다 참다운 삼매(三昧)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이『단경(壇經)』의「참회품(懺悔品)」에 설(說)해진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