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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2. 육조단경 소참법문

1.보리방편문 법문(1)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 큰스님께서 여러 번 보리방편문 법문을 하시였습니다. 이 보리방편문 법문은 1990년 4월21일 녹취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은 태안사에서 마지막법회 할 적에 나누어준 태프입니다

이번에 무상월보살님께서 녹취한 것을 올립니다 장시간 애쓰신 무상월보살님께 감사드립니다.

     

1. 보리방편문 연원(淵源)

우리가 아는 일입니다마는 우리 인간은 누구나가 다 자기의 그런 안전을 다 구해서 마지않습니다. 미개한 때는 안전을 구한다 하더라도 의식적으로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유(思惟) 활동 생각하는 그런 활동이 전개가 되고 차근차근 발전된 뒤에는 생각을 좀 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생활 하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 있어서 가장 안전한 생활인가 이와 같이 행복을 추구해서 마지않았습니다.


인류문화사 이후에 모든 것은 이와 같이 행복을 추구하는 그러한 우리 인간의 노력과 또는 실패와 또는 그때그때 여러 가지 참담한 그런 비극도 있었습니다마는 모두가 다 행복을 추구하는 안전을 추구하는 그런 노력의 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개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할 것인가 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마땅히 먼저 행위를 할 수 있는 그런 근거로 해서 우리 사고(思考) 사유체계가 먼저 필요 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생각 하는 것이 바른 생각인 것인가. 또는 우리인간의 본래는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의 그러한 교법(敎法)이 있습니다.


불교는 불교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현대과학은 과학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신지 2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마는 그런 가지가지의 사유체계, 가운데서 모두가 다 완전한 것을 볼 수가 없다 말입니다. 다시 말 하면은 그렇게 많은 사상체계가 있다하더라도 오늘날 와서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을 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다른 가르침은 하나의 상대적인 제한된 가르침이고 이것이 완벽한 가르침이 못 된다는 데서 그런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도 부처님 가르침 즉 2500년 동안이나 가지가지 비판을 다 거치고 또는 여러 가지 그런 사상체계를 다 수용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즉 인간이 구하는 그런 행복이라 하는 것을 그런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라 하는 그런 확신이 서기 때문에 제가 오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회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오늘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보리방편문 해설입니다. 보리방편문, 이것은 그 연원(淵源)이 어디가 있는고 하면은 물론 다시 말 할 것도 없이 부처님가르침이지마는 제2의 석존이라 하는 용수보살(龍樹菩薩:B.C2-3세기)의 저술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도 보리심론(菩堤心論)이라 하는 논장(論藏)이 있습니다. 보리심론은 어떤 것인고 하면은 보리(菩提)라 하는 그러한 말이 있듯이 보리는 아시는 바와 같이 참다운 진리 즉 다시 말하면 방편(方便) 방편적인 그러한 것을 떠나서 참다운 최상의 진리 이른바 우주만유의 본래적인 제일의(第一義)적인 진리 이것이 보리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보리심론이라 즉 보리심을 참다운 진리를 깨닫는 그런 방편적인 말씀이 용수보살의 보리심론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드릴 보리방편문도 보리심론에 근거가 있지마는 굳이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1898-1948) 금타 스님이라 하는 스님께서 공부도 하시여서 선정(禪定)중인 잘 납득이 안 가시는 분들은 모르실 것입니다마는 선정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마음의 산란한 마음을 잠재우고서 우리 마음을 참다운 본심자리에다 딱 머물게 한단 말입니다. 즉 상대유한적인 생각은 다 치워버리고서 우주와 나와 둘이 아니다는 그런 경계가 딱 머무는 자리 이것이 삼매(三昧)입니다. 이런 삼매에 딱 들어가면은 그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통특허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귀중하고 무한히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 뿐만이 아니라 과거 무수세월동안을 지나갔다 하더라도 불교 말로 무시이래라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오랜 과거도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그와 아울러서 한도 끝도 없는 무종이라 끝도 갓도 없는 미래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삼매의 기운이라 말입니다. 삼매를 무시한 분들은 그냥 이러한 삼매 가운데 들어있는 신통 자재하는 그런 기운을 무시도 합니다마는 이것은 부처님 경전에 있는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삼매에 들을 수가 있다고 그러면은 산란스러운 마음을 쉬고 상대유한적인 생각을 떠나서 영원적인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減)한 그런 참다운 우리 인간성 우리 불성 또는 우주성 여기에만 하나 된다고 생각 할 때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신비부사의한 힘을 다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타 대화상님께서 이러한 삼매에 들으셔서 용수보살한테 제 2의 석가라 하는 용수보살한테 직접으로 받은 수행(修行)방편문(方便門)이 즉 말하자면 보리방편문입니다.


따라서 이러는 것은 어느 동안에는 상당히 비판도 받았습니다. 괜시리 복잡한 것을 그렇게 내놓지 않았는가 또는 이런 것이 과연 사실인 것인가 하는 정도로 여러 가지로도 비판을 받았습니다마는 오늘날 여러 석학들이라던가 차근차근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하신 분들이 가치를 인정하니까 지금은 비판하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부처님 팔만 사천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정수(精髓)를 뽑아 있다 말입니다. 정수를 뽑아 있을 뿐만 아니라 또는 참선과 염불과 또는 각 주문과 모든 수행법을 하나로 통합시켜 있다 말입니다.


현대란 사회는 신앙을 우리가 한다 하더라도 신앙체계가 없으면 이것은 가치 있는 신앙을 못 합니다. 또는 다종교 사회인지라 각 종교가 이와 같이 탁종해 있고 이렇게 혼란스러운지라 다른 종교와의 그런 구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그런 체계가 아니고서는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리방편문은 짤막한 그런 법문가운데서 불교의 정수를 말해 있고 또는 다른 종교보다도 훨썩 더 앞서있는 그런 것을 우리가 거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금타 대화상의 말씀을 빌리자면 견성(見性)오도(悟道)의 첩경(捷徑)이라 견성오도 하는 그런 지름길이라 말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제 말씀을 들으시고서 나중에 공부를 하시면은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리방편문을 제가 말씀 드리겠는데 우선은 그런 골격을 먼저 말씀드리고 하는 것이 순서가 되기 때문에 제가 그 선행적으로 보리방편문을 말씀을 드리기 전에 우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또는 그 뒤에 각 도인들이 부처님법문을 한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오늘 짤막한 시간에 부처님 그 방대한 골격 체계를 제가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가장 간단하게 어떤 누구나가 납득이 갈 수가 있는 것이고 꼭 알아야 될 그런 체계만은 제가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2. 삼시교판(三時敎判)

이것이 이른바 삼시교판이라 말입니다. 이것은 각 도인이 나오면은 도인들이  자기들의 그런 견해에 따라서 자기들 공부한 그런 경계에 따라서 부처님의 일대시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가르침을 하나의 체계로 딱 비판해서 묶은단 말입니다. 가사 한국의 원효(元曉)스님은 원효스님대로 자기가 부처님 가르침을 느낀 대로 또 비판해서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또는 중국의 천태(天台)스님 같으면은 천태스님은 자기 나름대로 그 분이 또 부처님의 일대시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부다 비판 딱 해 가지고서 하나의 체계를 세웁니다. 삼시교판 이것은 법상종이라 하는 법상종은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하나의 형상적으로 구분을 세워서 비판한 즉 말하자면 그러한 비판적인 안목 이것이 삼시교판(三時敎判)이라 말입니다.


더 구체화 시키면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부처님의 그런 가르침의 상을  비판해서 해석 한 것이 판석이라 말입니다. 이것은 세 시기로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해서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세 시기라 하는 이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그 차원 정도에 따라서 깊고 옅은 정도에 따라서 세 가지 시기를 나누었단 말입니다. 이 정도는 우리 불자이면 꼭 알아 두셔야 만이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을 비판 할 때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됩니다.


맨 처음에는 제일시교(第一示敎)라 일시교는 이것은 제법(諸法) 실유(實有)이나 인아(人我)의 공무(空無)를 밝힘이라 말입니다.  제가 불교에서 말씀 드리면은 제법(諸法)이 가사 하나의 산이요 또는 냇이요 선이요 악이요 또는 우리 과학적으로 말하면은 그때는 지(地)요 수(水)요 화(火)요 풍(風)이요 말입니다. 바람기운이나 또는 물 기운이나 또는 흙 기운이나 그런 것이라던가 하여튼 인간이 볼 수 있는 유정(有情),무정(無情),유상(有相),무상(無相) 그런 법이 실지로 있다 한단 말입니다. 그런 제법이 실지로 있으나 인아(人我)의 사람은 결국은 공무(空無)라 사람은 텅 비어서 없다는 것을 밝힌다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 할 때는 조금 더 비장한 각오가 필요 합니다. 우선 복을 빌고 자기가 잘 되고 그런 차원에서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을 맛을 못 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복도 받아야 하고 여러 가지 기복적인 것도 필요 합니다마는 또는 그런 것이 부처님 가르침 내에 분명 있습니다마는 부처님 가르침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자기의 행복을 구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도 초월하고 또는 윤리도 초월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정도가 낮다 하더라도 가장 저 차원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인아의 공무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원래 비어 있다 말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즉 말하자면 인간의 상식을 떠나 있다 말입니다. 내가 분명히 있는데 내가 어떻게 비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하고 우리가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의 초구(初句)라도 알 수가 있다 말입니다. 또는 이와 같이 고도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가 소양이 없다고 생각 할 때는 다른 종교와 우리 불교와의 그런 한계를 우리가 모호해 지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초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가운데도 벌써 내가 원래 없다는 가사 아상(我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무아(無我)라 무아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무아란 말이 안 들어가면 불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으셔야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좋고 귀엽다 하더라도 무아란 것을 모르면 사실은 불교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째서 무아인가 이것은 불교를 공부 하신 분들이나 또는 희망을 가지신 분들은 대체로 알으십니다마는 지수화풍 사대 바람기운 땅기운 불기운 물 기운 이러한 기운이 잠시간 우리 몸의 세포를 구성해 있단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 그 외에 여러 가지 각각 원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합해져서 우리 몸에 붙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구성돼 있는 것이 우리는 인연 따라서 붙어 있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구성한 것은 그때그때 순간순간 현전해서 마지 않습니다. 이른바 전변(轉變)무상(無相)이라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비록 사람 몸 몸뿐만이 아니라 어떤 것이나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진 것은 그때그때 변동해서 마지않습니다. 따라서 고유한 나라는 몸뚱아리가 사실은 있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가장 초기적인 부처님의 가르침도 이와 같이 인아(人我) 무아(無我)라 사람이 원래 없다하는 사람 몸뚱아리가 우리 중생이 잘 못 봐서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 바로 본 다고 생각 할 때는 분명히 없다 하는  도리를 알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을 초구(初句)라도 안다 말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그것은 산소나 수소나 또는 질소나 탄소나 이러한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있다 말입니다. 세포가 합해있어 가지고 이것이 조금도 쉬지 않고 그때그때 변동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나 라는 것이 존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초기 불법에도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것은 이런 나 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그러나 인제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또는 지(地)나 수(水)나 화(火)나 풍(風)이나 말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이런 것은 있다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자기가 없다 사람이 없다 이것만도 엄청난 이것도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사람 몸을 구성한 각, 각 하나의 원소인 바람기운 또는 물 기운 또는 불기운 그런 기운마저 없다고 생각 할 때는 중생이 도저히 불교를 믿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하에서 성도(成道) 하시고서 내가 차라리 내가 말을 안 해버려야 하겠다 차라리 그냥 부처님께서 말씀 말으시고서 바로 열반에 들으실라고 마음 먹으셨습니다.

왜냐 하면은 욕심에 가리고 진심에 가린 중생들이 천상 천하에 둘도 없는  무상진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내가 진리를 말해 본댓자 일반 업장 많은 중생들이 못 알아 먹는다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집하고 사는 사람 데리고 자기 있다고 생각하는 중심에서 사는 사람들인 것인데 없다한다고 생각 할 때는 내 말을 고지 안 들을 것이다 또는 수긍한다 하더라도 지키지 못 할 것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나만 수고스러우니까 내가 말 안 해 버려야 쓰겠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성도를 하신 다음에 우주의 진리를 훤히 알아서 원래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모두가 허망 무상하다 인간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가 뜬 구름이요 또는 물거품 같다 이렇게 이런 진리를 해도 모를 것이다 해가지고서 그냥 열반 들으실라고 마음먹었지마는 훌륭한 신장 범천이라 하는 신장들이 나와서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비록 일반 어리석은  대중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런 대중 가운데는 과거 선근이 많아서 과거 전생에 닦아온 그런 사람이 많이 있어서 부처님의 그런 어려운 법문도 알아먹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반 들으시지 말고 돌아가시지 말고 법문을 설(說) 하십시오. 이와 같이 간청을 드렸단 말입니다. 간청을 들으셨으니까 부처님께서 할 수없이 가장 쉬운 법문으로 가장 쉬운 법문 하신 법문이 제일시교란 말입니다.


제일시교라 사람은 원래 텅 빈 공이어서 없는 것이지마는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인간이 보는 객관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주관은 허망 한 것이지마는 객관은 존재한다. 이런 정도의 가르침인 것이 제일시교란 말입니다. 이것은 아함경이라 하는 부처님 육성 같은 아함경이라 하는 경전에 가서 이와 같이 사람은 이것은 공무하다 사람은 비어있다 지수화풍 사대가 잠시간 합해져서 우리 몸이 이루어지고 우리 마음은 무엇인가. 나라고 고집하는 마음 너라고 고집하는 마음 또는 좋다 궂다 고집하는 마음 그 마음은 무엇인가 이 마음은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의욕하고 또는 분별시비하고 이런 것이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됐단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우리 마음이 됐지마는 과연 그 마음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좋은 마음 또는 궂은 마음 남 미워하는 마음 남 좋아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2조 혜가 스님께서 달마스님한테 가서 제가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그러니까 달마스님께서 불안한 마음 내놔봐라 2조 혜가 스님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불안한 마음 자취가 없다 말입니다. 남 미워하면 미워하는 마음 자취가 있습니까. 남 싫어하면 싫어하는 마음 자취가 있습니까. 내가 아프면은 아프다는 마음 자취가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디에도, 남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아프다는 그런 마음 마음이 흔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 몸도 역시 잠시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람기운 또는 불기운 물 기운 흙 기운 지금으로 말하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등 여러 가지 원소가 합해있지마는 합해가지고서 잠시간도 머물지가 않는 것인데 따라서 우리 몸도 다 비어 있지마는 또는 우리 마음도 역시 어디가 흔적이 없다 말입니다.


지금부터서 내 몸도 사실은 본래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우리 중생이 업장에 가려서 바로 못 보니까 나 같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보는 청정한 성자의 안목에서 본 다고 생각 할 때는 다만 세포만 질 질 돌아서 활동하고 결합돼서 운동이 있습니다. 전자현미경 놓고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다만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이 결합돼서 운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은 부처님의 안목, 전자보다도 또는 어떤 것보다도 가장 세밀하고 우주의 본래 면목을 볼 수 있는 부처님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때는 불성(佛性)기운이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불성기운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운동하고 있단 말입니다. 산이나 냇이나 사람이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불성기운이 광명 빛나는 불성기운이 잠시간 활동하고 있는 것이 자기고 또는 너고 말입니다. 나고 너고 또는 산이요 냇이요 일체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견해가 옳지 않다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범분(凡分)미도(迷道) 우리 중생은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전도(顚倒)몽상(夢想)이라 우리 중생은 전도몽상 거꾸로 있는 꿈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참다운 꿈이 아닌 참다운 깨달음의 불법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는 일시교에서 사람은 비록 공했지마는 사람은 비록 무아라 공했지마는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또는 일체 선이다 악이다 일반 중생이 아는 그런 것은 그런 객관은 있다 이렇게 아시겠지마는 이것은 중생이 너무나 허무할까봐서 일반 중생들은 자기가 제일 중요한데 말입니다. 자기 권속이 제일 중요한데 자기 재산이 제일 중요한데 없다고 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너무나 허무를 느껴버립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그냥 깊은 법요(法要)를 한 번에 말씀을 못 한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선 사람은 비록 공(空)하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 선이다 악이다 그런 것은 존재한다. 산소요 수소요 이런 건 참말로 있다. 지금 물리학자보고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그 분들도  회의를 품으실 것입니다. 다만 적당히 양성자 중성자 그런 것이 모여서 활동하는 것 운동하는 것 가리켜서 어느 과정에다가 전자 양자 그러는 것이지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실지로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중성자나 또는 전자나 그런 것이 결합이 돼서 그 결합 여하에 따라서 결합의 즉 말하자면 정도에 따라서 산소 수소 질소 그러는 것이지 산소면 산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는 수소면 수소가 고유하니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어느 순간 그런 순간 보일뿐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무상한지라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전자도 과정에 불과하고 또는 중성자도 과정에 불과 하고 말입니다.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지금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즉 변천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입니다.


제이시교라 그다음에 중생들의 근기가 좀 이제 높아져서 조금 더 현명해진 때에는 그때는 그야말로 참 소승(小乘)주의 소승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원래 없지마는 일반 객관은 존재한다. 이게 소승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소승 이것은 부처님께서 하고 싶은 법문이 참다운 내용은 못 됩니다. 그래서 제이시교라 일반 중생의 그런 근기가 조금 수승이 돼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소승주의 실법의 일체 만법이 다 비어있단 말입니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미(迷)를  밝혔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항시 외는 반야심경이나 또는 금강경이나 유마경이나 그런 경(經) 도리입니다. 모두가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사람이란 겉만 그 무아(無我)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객관 세계 합해있는 교리나 또는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다 비어있다 말입니다. 저는 항시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사실은 비어있다는 정도 이것은 현대 물리학도 증명을 다 한 것입니다 증명을, 그러나 물리학이 없었던 옛날에는 정말로 제법공(諸法空)이라 하는 그런 도리를 알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옛날뿐만 아니라 설사 물리학을 배웠다 하더라도 분석적으로 궁극적으로 분석해놓고 들어가면 결국은 다 텅텅 비어 버린다. 물질은 비어서 에너지만 남는다. 이것을 설사 안다 하더라도  모두가 비어 있다라는 말을 하면은 굉장히 허무감을 느낍니다.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인데 왜 어찌 없는 것인가 내가 분명히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인데 왜 어찌 없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가 의단을 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입니다. 또는 진리가 아니면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이 구하는 행복이라든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 참다운 민주화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것을 민주화를 부르고 뭐 부르고 뭐도 하지마는 참된 자유를 우리가 부르짖지마는 사실은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진리를 따라야 쓸 것인데 진리를 따라야 얻을 수가 있는 것인데 진리를 따르지 못 하면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무엇인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내가 비었다는 도리를 알아야 쓴다 말입니다. 또는 그와 동시에 우리 객관이 모두가 다 비어 있다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록 우리중생의 몸이 즉 말하자면 지수화풍 사대가 구성돼 있다. 현재 말로 하면은 그때는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결합되어서 하나의 우리 몸 세포가 있다. 그러면은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이런 것은 다 있는 것인가.


부처님법문에 따르면은 우리 지수화풍 사대 지(地)도 땅기운도 불가득(不可得)이라 얻을 수가 없고 말입니다. 또는 수(水) 물 수(水)자 물 기운도 불가득이라 물 기운도 얻을 수 없고 말입니다. 바람풍(風)자 풍 바람도 역시 불가득이라 얻을 수가 없고 또는 땅기운 이른바 질료도 얻을 수가 없고 말입니다. 지(地) 불가득이라 말입니다. 어떠한 것도 있는 것 없는 것 모두를 다 부처님 도리에서 본 다고 생각 할 때에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면은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이라 과거도 얻을 수가 없고 또는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이라 미래도 얻을 수가 없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하나의 물질을 중심으로 해서 물질이 변화되는 그런 과정 따라서 지나가면은 과거요 아직 안 오는 것은 미래요 하는 것이지마는 사실은 그런 공간적인 물질을  떠나버리면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는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어렵게 말씀을 해갑니다마는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금타 대화상의 보리방편문을 설명하려고 할 때는 이런 사전적인 것을 선행적인으로 지식을 굳이 안 하면은 보리방편문을 잘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튼 먼저는 먼저 부처님께서 하신 제일시교는 그냥 우리중생의 내가 결국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있다 이런 정도로 말씀 하셨고 그 다음의 제이시교에서는 나만 우리 주관(主觀)만 공(空)이 아니라 객관(客觀)적인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다 (1편 앞부분)


이른바 제법공 이라 말입니다. 반야심경 식으로 말하면은 오온(五蘊)개공(皆空)이라 오온이라 하는 것은 물질과 정신이 오온 아닙니까. 그런 오온이 다 비어 있다 말입니다. 오온개공을 잘 모르면은 그때는 반야심경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오온이 다 비어있음을 비추어봐야 만이 도(度) 일체(一切)고액(苦厄)이라. 우리는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행복을 바랍니다. 참다운 행복을 바라나 우리가 오온개공을 모르면은 그때는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나무위에서 고기를 구합니다. 진리를 떠나서는 참다운 자유도 참다운 행복도 없습니다. 꼭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참다운 인생복지를 약속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도리로 본 다고 생각 할 때는 다 비어 있다 말입니다. 어째서 비어 있는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있다 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산소 역시 내내야 아시는 바와 같이 이것은 그야말로 참 다 중성자 양성자 갖다 적당히 합해있다 말입니다. 중성자 양성자가 몇 개 합해있는 것인가 거기에 따라서 산소 질소 탄소 그런 구분이 있다 말입니다. 이것 떠나서는 산소나 질소나 탄소나 그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것도 역시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있다 말입니다.


그러면은 전자나 중성자나 양성자 그것은 무엇인가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 이것도 역시 이것도 에너지 하나의 진동에 불과 한 것이지 이것도 고유한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따라서 일체 모든 것은 에너지라 하는 우주의 정기라 하는 그것에 다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즉 에너지만 우주의 정기 에너지만 존재 하는 것이지 인간이 볼 수 있는 일체 현상적인 것은 모두가 다 에너지 적당한 결합 적당한 활동 적당한 운동에 불과하다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실은 모두가 텅텅 비어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은 증명은 못 해 있다 하더라도 체험은 못 해 있다 하더라도 우선 유추해서는 일체 만유가 다 비어 있다는 소식은 다 아는 것입니다. 현대는 그와 같이 벌써 불교가 아니더라도 현대 물리학은 모두는 비어 있다 나도 비어있고 또는 그야말로 너도 비어 있고 일체 만유는 다 에너지뿐이다.


일체 만유는 모두가 에너지 활동뿐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이 현대 물리학이라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물리학자는 이렇게 유추해서 분석을 통해서 알 수가 있지마는 정말로 공 도리를 체험을 못 한다 말입니다. 보살이라 하는 것은 공부를 해서 전부 체험을 해가지고서 자기 몸도 또는 환경도 텅텅 비어 버린 것을 체험 한다 말입니다. 이른바 우리가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해서 우리마음이 통일이 딱 되면은 우리 욕심이 줄어지고 또는 우리 탐 진심이 줄어지고 이렇게 가다가 번뇌가 딱 놓아지면 그때는 정말로 텅텅 비어버린다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는 공(空) 소식을 주관도 또는 공(空)이요 또는 객관도 공이요 다 공이 되는 소식을 그때는 우리가 공부를 해서 알 수가 있다 말입니다. 이래 버리면은 그때는 자기라 하는 것이 이른바 죽음도 떠나는 것이고 또는 다 떠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이른바 항시 영원의 자리에 있다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제이시교에서는 모두가 다 공한 도리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제법공인 도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공만 된다고 생각하면은 우리 불교가 너무나 허망합니다. 그러면은 석가모니께서 우리한테 애쓰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 아닌 무엇인가 있다 말입니다. 비록 공이지마는 비록 우리가 보는 것은 허망하고 실존이 아니지마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인연이 있으면은 사람이 생기고 뭣이 생기고 한다 말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가 엄밀히 본다고 생각 할 적에 우리가 보는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엇인가 즉 가상(假相)이 있다 말입니다. 임시간 가정적이나마 우리가 뭣인가 있다 말입니다. 그것 보고  가아(假我)라 거짓 가(假)자 나 아(我)자 가아라 합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망령된 나 내가 김 아무개 박 아무개 하는 그런 나는 이것은 사실은 그것은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뭣인가는 있다 말입니다. 뭣인가는 이른바 가짜 잠시간 있는 나 이것은 분명히 있다 말입니다. 그러면은 뭘 근거로 했는 것인가 근거가 그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의 정기 우주의 정기 불교 말로 하면은 그것이 불성(佛性)이라 말입니다 불성. 현대적인 말로 하면 그때는 에너지가 되겠지요.


에너지만은 이것은 물질이 다 텅텅 비어서 우주가 파괴가 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에너지만은 존재합니다. 존재 하다가 나중에 다시 에너지의 활동으로 해서 다시 그때는 우주가 생성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그와 같은 도리를 분명히 말해 있다 말입니다. 우주가 파괴가 되어서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텅텅 비어서 그야말로 즉 허공 무일물이라 텅텅 비어서 공겁이라 말입니다. 공겁이 된 뒤에는 다시 거기에서 순수한 생명기운들이 다시 그때는 우주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이렇게 우주의 생성 문제까지 다 풀이 했다 말입니다. 헌데 그러한 물질은 다 비어 버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보이는 그런 허망한 것은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참말로 있는 것이 그것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이고 또는 그야말로 참 순수에너지라 말입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이것이 제삼시교(第三示敎)입니다. 보살의 공집(空執)이라 보살이 모두가 다 비었다 하는 주관도 비고 객관도 비었다 하는 그런 공에 집착하는 것을 그런 것과 또는 소승(小乘)은 있다고 본다 말입니다. 소승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객관이 없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있다고 본다 말입니다. 소승의 그런 유집(有執)을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다 아울러서 우리가 부정하기 위해서 비공(非空)비유(非有)라 비지도 않고 또는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대로 있지도 않고 또는 소승이 보는대로 아직 낮은 보살이 보는대로 비어 있지도 않다 말입니다. 정말로 비어 있지 않고 정말로 즉 있지도 않은 참다운 중도를 참다운 중도를 밝혔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도(中道)실상(實相)이라 중도를 밝힌 것이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마지막 말 이것이 우리가 꼭 취해야 쓸 것입니다.


있다 하는 것도 또는 비었다 하는 것도 우리는 다 취해서는 안 됩니다. 비지도 않고 또는 있지도 않고 말입니다. 참다운 것 영생으로 존재하는 죽음과 또는 시간과 공간과 모두를 다 떠나서 항시 있는 즉 에너지 같이 우주가 다 파괴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에너지 불멸이라 우주에 항시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 들은 생사를 떠나서 모두를 다 떠나서 항시 있는 영원히 존재하는 그러한 중도실상의 불성을 보는 것이고 거기에 안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도 없고 또는 여러 가지의 불행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선행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세 차원으로 나누어서 검토를 해봤습니다. 가장 낮은 차원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는 허망하고 나는 참 그림자 같지마는 우리 객관적인 사물은 존재한다. 이렇게 말씀 하셨고 그 다음에 제이시교에서는 그때는 나도 비어 있지마는 나도 허망 하지마는 결국은 객관도 모두가 다 텅텅 비어있다 이렇게 말씀했다 말입니다. 또는 제삼시교 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다 비어있고 참말로 존재하는 진짜 내가 있다 말입니다, 진짜.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하시고 싶은 것은 뭣인고 하면은 참말로 나를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가르치신 참다운 가르침이라 말입니다.


법화경 같은 그런 즉 말하자면 마지막 경전 부처님의 결론 같은 그런 경전을 보면은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나오신 뜻이 뭣인고 하면은 무상(無上)대도(大道)를 중도의 대도 어디에도 안 치우치고 중도의 대도를 우리 중생이 알고 느끼고 깨달아서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오셨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도 역시 마땅히 중도라 한 중도라 하는 부처님의 마지막 법문을 꼭 느끼고 알으셔야 만이 우리가 구하는 참다운 그런 해탈과 자유와 참다운 행복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보리 방편문 이것은 그 골격을 제가 간추려서 이제 여기에 도식으로 표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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