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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17. 동안거 해제법문

                 <제 17 호>

         20000219-동안거해제법문

*본 법문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

 

 불자님들 저에게는 그지없이 반가운 고향故鄕사람들입니다.

 길을 가다 잠시 옷깃만 스쳐가도 삼세三世 인연因緣이라고 했는데 하물며 이와 같이 같은 자리에서 부처님 법을 설하게 된 다는 것은 정말로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무수한 생을 되풀이 하면서 만나고 또 만난 그러한 소중한 인연들이십니다.

 지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만나기도 하고 오늘도 처음 배웁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한결같이 똑 같은 그리운 고향 사람들이십니다.

 그러나 세월歲月이 또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그렇게 지나다 보면 다시 또  무상無常한 그 현실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헤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영원한 행복幸福을 구하고 또는 영생永生의 고향을 찾는 그러한 이른바 불성佛性 존재입니다.

 본래本來 우리 성품性品이 바로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불성까지, 본래 성품하고 하나가 되기까지는 영원한 나그네 길을 걸어가면서 고생 고생 윤회輪廻하고 다시 태어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저도 지금 가까운 시일로 해서는 지금 한 2년도 미처 안 지났지마는 그 많은 세월을 인생고해人生苦海에서 헤치고 나온 그러한 아득한 그러 것을 저는 심각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불자님들은 아까 말씀 드린 봐와 같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러한 무한의 그런 공덕功德과 또는 본래 죽음이 없는 그런 생명生命을 갖추고 있는데도 우리 현실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도 우리가 이 현세에서 사바세계의 그런 무상한 모든 그런 제한된 것을 다 우리가 초월超越해서 정말로 우리가 필경 돌아 가야할 그런 고향 자리를 재차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어려운 말씀도 있고 또는 방편方便 쉬운 말씀도 있곤 합니다만  모두가 다 고향 자리를, 영생불멸永生不滅한 남도 죽음도 없는 그러한 영생의 고향 자리를 우리한테 보여주신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는 그냥 우리가 보통 마음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명의 그 근본 도리道理를 알지 못 하면은 그 영원한 고향 자리는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이 우리 생명의 근본 도리인 것인가? 말로는 여러 가지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또는 법 법자, 성품 성자 법성法性이나, 또는 참 진자, 같을 여자 진여眞如나,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있으나 그런 말로만 그치는 그러한 것은 우리 근본 성품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이 인식認識하는 능력能力은 한계限界가 있어놔서 그 눈에 보이는, 우리 인간 존재의 눈에 보이는 그 현상적인 상밖에는 인증認證을 못합니다.

 나라는 상我相, 너라는 상人相, 또는 중생이다 또는 산이다 물이다 하는 이른바 상대 유한적인 그런 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밖에는 우리 중생은 인식을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으로 해서는 우리의 본래의 자리, 본래 생명 자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한말로 말씀드리면 모든 상을 거두어서 상을 여의고서 상을 초월한 영원의 자리로 돌아가는 즉 다시 말하면 본체本體로 돌아가는 그런 말씀이란 말입니다.<攝相歸體, 捨妄歸眞>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그러나 일반 분들은 극락세계하면 그 우리가 사바세계에서 고생을 많이 하니까 인생고해이니까 우리한테 우리를 위안시키기 위해서 아주 안락스러운 극락세계를 말씀했다. 이렇게만 쉽게 생각한 분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고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그런 방편설方便說이다. 이렇게 말씀한 분도 있습니다.

 또는 근래에 우리 불자님들 까지도 극락세계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생소하고, 또는 그 자리를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인가? 극락세계를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노력을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의심을 많이 품습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이것은 우리가 몇 만생을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꼭 도달해야 될 우리의 근원적인 영생의 고향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바꿔서 말하면 극락세계에 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여행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비단 우리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락세계라 하는 영원의 세계를 가기위해서 걸음걸음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극락세계를 꼭 가야 되는 것인가?

 우리 인간 존재가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본래가 극락세계에 가게시리 되어 있단 말입니다.

 본래 성품이 아까 말씀드린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불성으로 우리 마음이 이루어지고 모든 우주宇宙의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불성으로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부처의 성품으로,  부처의 성품인 그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불성과 합치가 되는 불성과 오로지 하나가 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서는 우리 마음은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그런 느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극락세계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비단 일반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서도 또는 우리 스님네 가운데서도 아, 극락세계는 하나의 우리 인간을 달래기 위한 그런 방편법문方便法門인 것이지 어디가 극락세계가 있을 것인가?

러나 극락세계는 분명히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존재하는 실상實相의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이것은 가상假相의 세계인 것이고 사실은 극락세계가 이것이 참다운 실상의 세계인 것입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십리의 반 틈이 오리五里 아니겠습니까. 무중霧中은 안개 무자, 가운데 중자, 아, 안개가 조그만 끼어도 그럴 것인데 오리나 십리나 안개가 끼어 놓으면 정말로 앞도 안보이고 뒤도 안보이고 답답하겠지요.

 우리 범부凡夫 생활이라는 것은 그와 똑 같습니다.

 자기 과거에 대해서도 우리가 알 수가 없는 것이고 아, 죽어서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것도 우리 범부는 모릅니다. 사실은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안하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성자가 되어야 비로소 뒤에도 보고 앞에도 보고 훤히 내다 볼 수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견성오도見性悟道라!

 자기 본래의 성품을 봐야 비로소 아는 거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 견성오도는 뭐~ 공부하는 스님네나 그렇게 갈 것이지 일반 우리 불자들이사 뭐~ 어떻게 말씀만 좀 따라가다 마는 것이지 어떻게 우리가 견성오도를 할 것인가? 그렇게 또 생각한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일하게 쉽게 생각을 마르셔야 됩니다.

 견성오도를 못하면 이거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내내야 육도윤회六道輪廻라! 지옥地獄이나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이나 아수라阿修羅나 인간人間이나 또는 천상天上으로 이런대로 뱅뱅 돈단 말입니다.

 과거에 위대한 철인哲人들 가운데서 그 윤회설輪回說, 우리가 지은바 그런 업보業報에 따라서 사람으로 축생으로 또는 지옥으로 뱅뱅 도는 윤회설을 말씀한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참다운 도인道人들은 말씀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과거나 현재를 뻔히 내다본 분들은 분명히 보이는 것이니까 그 윤회설을 긍정하고  또는 역설하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비록 우리가 인간의 몸을 받아 있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을 우리가 숙명통宿命通으로 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 더러는 귀신鬼神도 되고, 더러는 축생畜生도 되고, 또는 지옥地獄도 다 갔단 말입니다.

 우리 본래 성품은 다 부처이건마는 불성이건마는 우리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무지 때문에 무지無知에 가리어서 함부로 말도하고 함부로 행동도 하고 생각도 그 무지로운 생각으로만 그처버리면 아, 결국 개가 되었다 소가 되었다 좀 잘 살아서 인제 아,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런단 말입니다.

 인과因果라는 것은 조금도 이것은  흠절이 없습니다. 꼭 그대로 받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금생에 나와서 여러 가지로 인생 험악한 사회에서 그때그때 고생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어느 누구의 허물도 아닌 것이고 우리 스스로 지어서 그대로 받습니다.

 우리 몸뚱이라든가 우리 말하는 음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모두가 다 과거세 어떻게 살았든가? 과거세 자기 업의 과보果報로 해서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어길 수가 없습니다.

 또 내생도 마찬가지로 금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우리가 나뿐 생각 한 생각하면은, 불경佛經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념오백세一念五百歲라! 한 생각을 하며는 한생각의 그런 이른바 그 기운이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남 미워하면 미워하는 그 마음이 한 생 두 생 거듭해서 오백세 동안이나 흘러간단 말입니다. 남을 지나치게 너무나 좋아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계념무량겁繫念無量劫이라! 우리가 두고두고 ‘저놈 미운 놈이다’ ‘저놈 미운 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운 놈이다 그 마음이 우리 생리에도 그냥 바로 반영이 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비록 우리가 금생에 만나서 서로 정말로 참 반가운 고향 사람들이지만은 또 우리는 조금만 더 있으면 또 반드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숙명적宿命的인 우리가 무상無常의 물결위에 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그러면서 그야말로 참 영원한 고향이라 하는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 인생을 살 가치가 없습니다.

 어차피 죽어 갈 것이고 죽은 뒤에 오는 것이 아, 천상도 없고 극락도 없이 아, 그대로 그냥 자연적으로 뱅뱅 도는 그런 윤회만 있다고 생각할 때에 개나 소나 돼지나 사람이나 천상이나 그런 정도만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살 가치가 없단 말입니다.

 영원불멸永遠不滅의 그런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분명히 실존적으로 존재한단 말입니다. 실제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가상에 불과한 것이고 극락세계만이 실지로 존재하는 영원의 고향이고 참다운 이것은 실상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극락세계를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참 신묘神妙 불사의不思議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아, 목적을 제시해 놓고서 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무시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 극락세계에 가기 위한 그런 여러 가지의 법문이 이른바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란 말입니다.

 참선參禪하는 것이나, 또는 주문呪文을 외이는 것이나, 염불念佛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가기위한 그런 법문입니다.

 극락세계는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 마음을, 우리 마음이 열려야 갑니다.

 우리 마음이 깨달은 단계 어렵지만은 견성오도見性悟道하는 그런 단계가 되어야 극락세계에 비로소 우리가 도달한단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견성오도가 아, 견성見性이라는 것은 볼 견자, 성품 성자, 불성을 공부해서 우리가 체험 하는 것인데 그것이 또 쉽지가 않지 않습니까.

 오도悟道라! 깨달을 오자, 길 도자, 오도도 쉽지가 않는 것이고 말입니다. 견성하면 오도가 되고, 오도가 되면 견성이 되고 이제 그러겠지요.


 그 인도印度의 성웅聖雄 간디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말을 굉장히 의미 깊게 생각합니다.

 간디가 한 말이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찬을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리스찬들은 예수를 닮지 않기 때문에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이 그런 것이 예수를 닮으면 마땅히 그리스도를 좋아하니까 예수를 좋아하니까 다 좋아해야 되겠지만 예수는 그와 같이 훌륭한 분이고 하지만은 예수를 믿는다는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닮지 않는단 말입니다.

 욕심慾心은 욕심대로 부리고 진심嗔心은 진심대로 부린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간디가 우리 불교인들을 보면 그와 비슷한 말을 할 것입니다. 나는 불교는 좋아하지만 불교인들은 안 좋아한다고 왜 그러는가? 불교인들이 부처님을 닮지를 안는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닮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견성오도를 해야 되니까 말입니다.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결정적決定的으로 정확히 말하면 사실은 견성오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어느 누구나가 꼭 해야 됩니다. 견성오도를 하지 않고서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못합니다.

 우리 마음의 불안不安을 다 불식拂拭하고서 정말로 행복스러운 마음의 평화平和 또는 마음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그런것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정말로 오랜 나그네 길인데 과거 전생에도 무수생無數生을 우리가 되풀이 하면서 지내오고 또 미래에도 우리가 무수생을 또 그때그때 낳고 죽고 해가지고서 또 지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랜 나그네 길인데 그 어떻든 간에 영원의 의지가 되고 안락스러운 그러한 극락세계에 가지 못하면 또 역시 윤회 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윤회가 그것이 우리가 싫지만 무서운 그것도 하나의 진리입니다. 자기가 닦은 대로 뱅뱅 돈단 말입니다.

 우리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우리 말 하나하나가 우리 의식에 남아 있다가 그것이 업보業報가 되어 가지고서 그래가지고서 우리 생을 결정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 눈 하나하나 코 하나하나 모두가 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든가 그런거에 따라서 우리가 지금 업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같으신 분은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백겁이라 하는 무량 세월동안 자기 몸뚱이를 아, 범한테 받치기도 하고 또는 부처님 법을 듣기 위해서 몇 번이나 목숨을 받치기도 하고 그렇게 무수한 난행고행難行苦行 그렇게 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그런 만덕존상萬德尊像 32상80수형호三十二相八十隨形好라, 그런 존상이 되었단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기분 사나울 때 한번 찌풀어 보시고 찌풀 때에 거울을 한번이나 보십시오. 금쪽 같이 아까운 자기 몸뚱이지만 그 찌푸일 때에 자기 얼굴이라는 것이 얼마나 추한가 말입니다.

 

 망망한 우리 사바세계에 스승이 없다고 그러면 정말로 참 적막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같은 그런 위대한 스승, 예수 같은 스승 또는 공자 같은 스승, 우리 한국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 또는 고려 때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이조 때도 서산대사西山大師 아, 그런 훌륭한 스승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스승들이 그냥 그대로 쉽게 견성오도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도 무수생 동안에 닦아 내려오고 금생에 사람 몸 받아서도 아, 부처님께서도 오히려 6년 고행을 하셨단 말입니다.

 우리 일반 중생이사 그냥 거져 견성오도라 하는 우리 인생의 참 면목을 우리가 얻을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 인간이 아, 그렁저렁 살아도 되지 않는가? 이래도 우리가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한다고 생각할 때는 또 나중에 아무 때 가도 갈 길입니다.

 내생에 가도 가야 할 길이고 또 그 다음 생에도 가야 할 길인 것이고, 금생에 우리가 먹고 사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그런 아, 견성오도라 하는 성자들만이 갈 수 있는 그런 길을 갈 것인가? 이렇게 아득한 마음도 품의 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부처가 되는 길이 제일 쉬운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며는

부처한테로 가는 길만이 우리 마음의 불안을 씻어버리고 동시에 부처님한테 가는 길만이 사람 사람끼리 서로 화해할 수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진리眞理가 둘이 아닌지라 부처가 되는 길만이 부처님한테 가는 길 만이 각 종교하고 참다운 화해和解가 되는 것이고,

 또는 자기 자녀 간들한테, 돈을 많이 벌고 또 높은 지위에 올라서야 인제 아, 그야말로 인류 학교도 보내고 미국 유학도 보내고 할 것이 아닌가?

 그 보다도 우리가 부처님한테 가는 길에 대한 모범만 보여준다고 생각할 때는 부모한테 별다른 효성은 못했다 생각하더라도 그 자기 부모님을 위해서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을 역설하고 또는 권고 하고 했다고 하면 그 효성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영생永生으로 가는 길을 지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간에 부처님한테로 가는 길은 모든 해결이 그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제일 쉽단 말입니다.

 마음 편하고 몸 편하고, 남을 미워할 때는 우선 자기 마음도 안 편하고 자기 몸도 안 편합니다. 그러나 다 풀어버리면, 미운 사람을 어떻게 풀어버릴 것인가?  아, 좋은 사람은 분명히  좋은데 어떻게 좋은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고서 아, 그대로 평탄하게 지낼 것인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 공부를 해야 됩니다.

부처님 공부를 하는데 가장 방해가 무엇인고 하면은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자, 나 아자, 참다운 자기를 모르고서 자기를 우리가 망령되게 잘 못 안단 말입니다. 망아妄我라!

 이 몸뚱이라는 존재는 대체로 무엇인가?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모다 아, 그런 것들이 인연 따라서 결합된 것이 우리 몸뚱이 아닙니까.

 우리 마음은 또 무엇인가? 마음은 우리가 감수感受하고 또 상상想像하고 또는 의욕意慾하고 또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이런 것들이 또 모여서 우리 마음이란 것이 되었단 말입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마음이나 몸뚱이나 하나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불성佛性 아님이 없습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부처님 성품이 아님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러나 우선 이 현상적으로 나타나 있는 내 존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아, 분석적으로 보면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모다 그런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합해진 것이 이 몸뚱이고 내 마음은 금생에 태어나서 아, 느끼고 상상하고 의욕하고 분별하고 그런 것이 이제 자기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인간 존재가 그 마음과 몸뚱이 그 허망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그것이 즉 말하자면 우리가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망아妄我라, 망령 될 망자, 나 아자, 이제 망아란 말입니다.

그 망령된 나에 얼켜있는 한에는 우리는 도저히 풀려나올 수가 없습니다.

 내 몸뚱이와 그 무상한 그런 마음이 그렇게 결합 되어 가지고서 있는 그 인간 존재 그런 한계에서는 우리가 참다운 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몸뚱이와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가 감수하고 상상하고 또는 의욕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렇게 되어 있는 우리 마음과 몸뚱이 그런 것은 이것은 정확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없는 거란 말입니다.

 이것은 좀 어렵습니다만 좀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몸뚱이라든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마음이라든가 이런 것은 우리가 있다고 잘 못 생각한 것이지 정말로 과학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고 철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이 없단 말입니다.

 왜 없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저는 그 될수록 부처님 말씀을 쉽게 할여고 제가 애를 씁니다. 애를 쓰나 제 인간적인 또 한계가 있는 것이고 허나 또 한편은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말씀을 드려야 하기 때문에 또 매양 쉽게만 말 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 눈에 안 보이는 세계를 말해야 하니까.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가 분명히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 김아무게 박아무게 나라는 것이 지금 존재한다. 우리 인간인 한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겠지요.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서 과학적으로 분석해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것이 결국은 다 허망虛妄한 것이란 말입니다.

 바람기운 불기운 또는 물기운 흙기운 그런 각 원소 기운氣運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합해있는 것이 이 몸뚱이 인 것이고 우리 마음도 역시 금생에 우리가 태어나서 아, 느끼고 또는 분별하고 남 미워하고 좋아하고 모다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사실은 우리 중생들이 잘 못 봐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무아無我의 도리라! 내가 없다는 도리 아닙니까. 그 무아를 모르면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내내야 불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복이나 빌고 그런 정도 밖에는 바르게 더 못나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러한 가르침에 그치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행복 근원적인 영원한 그런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고 분명히 우리가 봐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영원적인 그런 길로 바로 못가는 것은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고 보지 못 하기 때문에 못갑니다.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고 봐져야 그래야 이른바 제법공諸法空이라!

 반야심경般若心經 여러분들 아까도 다 같이 외이셨지요. 반야심경 도리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이 잘 못 보는 잘 못 보니까 인제 뒤 바꿔서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전도몽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길을 못갑니다. 전도몽상 그것을 바로 봐 버려야 그래야 거꾸로 뒤 바꿔서 안보고서 바로 봐 버려야 그래야 바른길을 간단 말입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 몸뚱이나 우리 허튼 생각들이 모두가 다 그때는 다 무상하고 다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사실이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눈으로 보아서는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있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또 명명백백히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법공諸法空이라! 제법공 도리 여러분들 반야심경에서 수천 번 많이 하셨지요. 제법공이란 말은 우리 눈에 보이는 상은 모두가 다 비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제법공을 모르고 불교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라는 것이 이것이 신묘한 가르침인 것이고 방대한 가르침이지만은 사실은 반야심경 한편만 바로 알면 그때는 다 알아버립니다. 

 상에 걸려서 현상적인 눈에 보이는 상에 걸려서 우리가 바른 길로 못 나가는데 그런 모든 상이 본래로 허망하다 이런 것만 알아버리면 그때는 아, 불교를 다 깨달아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쉽지는 않겠지요.

 우리 마음이 본래로 하나라는, 본래로 다 모두가  비었다는 그런 소식을 알기 위해서는 또 우리가 부지런히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로 딱 뭉쳐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또는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 하거나 그런 공부가 모두가 다 좋은 공부인데 그런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생각 생각에 연결이 되어서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힘이 생긴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기도祈禱를 모시지 않습니까. 나병癩病 환자도 기도 모시면 낫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나병의 병균도 역시 우리가 부처님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으로 되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제한된 눈이나 현대 현미경 가지고 보니까 나병의 그 세균은 세균대로 폐 균은 폐 균대로 따로 있는 것이지  깨달은 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나병의 균이나 또는 폐 균이나 말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으로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이는 것도 그냥 입으로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불성 자리, 우주宇宙의 근본 순수한 그런 에너지인 그 불성 자리, 불성자리를 인격生命으로 표현 할 때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런 도리가 굉장히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불법을 생각할 때에 인격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인격을 배제해 버리면 그것은 우리한테 큰 도움이 못되어요.

 우리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모든 생명의 근본자리인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 이것은 하나의 이것이 생명이란 말입니다. 생명입니다.

그 생명도 제한된 생명이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이란 말입니다. 어떠한 공간 속에도 불성은 다 들어 있습니다.

 현대 그 기를 말하는 기를 넣준다 어쩐다 저도 병석에 누워있으니까 아, 여러분들이 와서 기를 넣어준다고 모다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 기를 내가 스스로 넣고 있으니까 안하셔도 된다고 그렇게 사양을 했습니다만.....

 우주에는 그런 에너지 기가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가장 순수한 상태가 이른바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입니다.

 따라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어떠한 병균도 불성이 다 근거가 된단 말입니다.

 불성이 어떻게 진동振動하는가? 어떻게 운동運動하는가? 그 불성이 어떻게 결합結合하는가? 그것에 따라서 암 균이고 무슨 균이고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교를 믿을 때도 그 암 균이나 또 폐 균이나 모두가 그런 균들도 한결같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가 근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현상적으로 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 자리에서, 근본 본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진여불성 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순간도 놓치지 않고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화두공안話頭公案이 있고 또는 염불念佛이 있곤 합니다.


 제가 인제 너무나 말씀을 또 많이 드리면 저도 좀 피로하고 여러분들도 기억하시기가 곤란스러우니까 제 마음을 인제 차차 말씀을 줄여서 이얘기 드리겠습니다만....

 그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여러분들 우리 불자님들께서 꼭 그 중요한 술어만은 외우셔야 됩니다.

 또는 자성自性이라!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견성오도라는 것은 자성을 통해야 된다. 그 자성이란 말은 불성이란 말하고 똑 같습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自性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 자성을 깨달으면 이른바 견성이지요. 견성하면 그 자리가 바로 그때는 오도라 도를 깨달은 단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영생불멸한 그 고향 자리, 그 고향에 들어가야 비로소 그야말로 참 영원히 행복을 얻습니다.

 그런께 우리가 지금 사바세계에 고생바다에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항시 우리가 그리워하고 동경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기가 자기 고향을  잃어버리고서 방황하는 그런 길에서도 아,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鄕愁가 있어야 고향을 사모思慕하고 흠모欽慕하는 그런, 고향에 부모가 계시고 반가운 친구가 있고 형제간이 계신다고 하는 그러한 그리움이 있어야 고향에 빨리 가지 않겠습니까.   

 극락세계가 우리 마음의 고향이고 영생불멸한 고향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극락세계에 가고 싶어 하는 간절한 그런 흠모심欽慕心과 그리움이 없으면 빨리 갈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를 그리워하고 흠모하는 그 마음이 우리 종교심의 굉장히 소중한 그것이 힘이 됩니다.

 법화경法華經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어요. 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이라! 심회연모라, 마음으로 그런 극락세계를 염모하고, 갈앙이라, 목마를 때 우리가 물을 찾듯이 그 간절히, 간절히 어린애들이 젖을 먹고 싶어서 보채듯이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그래야 즉종선근卽種善根이라! 우리 근성도 깊어짐과 동시에 빨리 간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그 미륵보살彌勒菩薩 너무나 많으니까 자칫 불교가 그 다신교多神敎가 아닌가?

 거기에만 그쳐버리면 다신교라고 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놓쳐버리면 불교는 분명히 다신교로 달락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장보살 문수보살 이렇게 많은 그런 부처님의 명호名號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이름 보고는 우리가 명호라고 합니다. 많은 명호가 있다 하더라도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단 말입니다. 

 그 진여 불성이라고 하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법신불法身佛이라 하는 하나의 자리입니다.

 하나의 자리가, 하나의 자리를 왜 그와 같이 많은 이름을 부를 것인가? 이것도 또 의심을 품을 수가 있겠지요.

  그 하나의 자리의 공덕功德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자비慈悲만 있고 지혜智慧가 없다든가 그러면 모르겠습니다만 아, 자비도 있고 지혜도 있고 별스러운 공덕이 다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개념으로 하나의 표현으로 다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쪽으로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문수보살 이와 같이 부르는 것이지, 사람 같이 김가 모양 박가 모양 뿔뿔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만약 뿔뿔이 있으면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불교는 그때는 다신교가 되지요. 그 미신 같은 종교가 되지요.

 그래서 우리 불교인들이 아주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부처님 사상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단 말입니다.

 실제 법신法身이나 또는 법성法性이나 진여眞如나 실상實相이나 실체實體나 중도中道나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다.

 만중생萬衆生을, 근기가 다른 만중생을 제도濟度하고자 해서 이렇게 저렇게 표현한 것이지 그 다른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우주는 진여 불성이라 하는, 불성이라 하는 그러한 신묘한 순수 에너지 순수 생명으로 해서 가득차 있습니다. 

 바다 물에 비기면 그 끝도 갓도 없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그런 바다는 이것은 불성에 해당하고 바람 따라서 일어나는 파도는 이것은 만중생에 해당 한단 말입니다. 파도가 친다 하더라도 내내야 물 성품이 조금도 변함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 같이 우주에는 진여 불성의 바다라,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는 것인데, 그 진여 불성 위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작은 파도 또는 큰 거품 작은 거품 그런 것이 제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똑 같은 다 물입니다. 물 성품이란 말입니다.

 사람이 되나 개가 되나 또는 지옥 중생이 되나 다 모두가 불성으로 되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사람 그러면 제법 거룩하니까 아, 불성으로 되고, 지옥 중생이나 이런 존재 같은 것은 불성으로 안 되었지 않겠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적인 인식 범위에서 말한 것이지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지옥에서 영원히 못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 들어가서 금생에 또 다생에 지은 그런 업장業障만 녹이면 또 역시 푹 이렇게 쑥 올라온단 말입니다.

 불교는 어느 누구나가 다 구제 합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구제를 받습니다. 영원히 그런 나락이나 영원히 지옥 가운데서 헤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부처님을 찾을 때에 아, 이것 부르고 저것 부르고 또 이제 아, 관세음보살을 여태까지 몇 십 년을 했어도 인제 또 나무아미타불을 좋아한 분들은 그만 두고 나무아미타불을 불으라고 또 지장보살을 좋아한 분들은 다른 것은 소용없고 지장보살만 부르면 공이 더 있다하고 이래버리면 그때는 참 곤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제경소찬諸經所讚 다제미타多在彌陀라고 했듯이 그 뜻이 무슨 뜻인고 하면 그 모든 경전, 모든 그런 극락세계라든가 또는 영혼의 세계 대한 그런 법문 가운데서 그 나무아미타불에 관한 법문이 제일 많습니다.

  이른바 본사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제아무리 부처님이 많이 이렇게 나열되어있다 하더라도 역시 다 근본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그 나무南無라는 것은 귀의歸依 한다. 우리 몸과 마음을 온전히 다 받쳐서 귀의 한다. 그런 뜻이고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은 이것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다 거기에 겸해 있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존재의 근본자리인 그런 법신과  또는 근본에서 이루어진 이런 현상계 모두와 또는 모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공덕과 모두를 다 포함한 그런 전체적인 포괄적인 이름이 이른바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런께 인제 제 생각은 참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한 집안에서도 지금은 뭐~ 부모님은 불교를 믿고 아들이나 딸들은 기독교나 또 가톨릭을 믿고 이런 집안이 많이 있는 것인데 사실 그것도 신앙의 자유이니까 나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기왕에 오른 길이라고 하면 가족적으로 똑 같이 믿어야 쓰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갈등도 적고 같이 합해서 기도 모시기 좋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또 불교 내에서도 아, 아들은 미륵존여래을 부르고 어버이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이고 하면 그도 서로 피차 달리 부르게 되겠지요.

 그런데 200부 이상 되는 불경 가운데 나무아마타불 법문을 제일 많이 했어요. 제일 많이 하고 아까도 말씀마따나 법신 보신 화신을 다 포괄한 눈에 보이는 세계나 안 보이는 세계나 모든 존재의 모든 것을 모든 공덕을 다 포괄한 경우는 통합적인 그런 명호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미타불 지지리 해 왔는데 꼭 지장보살을 해야 된다는 그런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또 지금 그 금강경독송회에서는 또 미륵존자를 부르라고 그런다고 그래요. 그렇게 미륵존자를 불러도 좋지요.

 좋으나 아까 말마따나 역시 그 의미 자체가 개념 자체가 일체존재를 다 포괄하는 일체 불호佛號 부처님 명호를 다 포괄하는 그런 이른바 이름이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소리를 내서 크게 할 때는  나무를, 나무아미타불에 귀의 한다는 나무를 보테야 그래야 인제 이 6자가 돼서 말입니다. 6자가 돼서 음률이 잘 들어맞습니다.

 그러고 또 우리가 참선을 주로 해서 묵묵하니 부처님한테 귀의 할 때는 나무를 빼버리고서 간단하게 아미타불만 그때는 화두 삼아서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200부 이상 되는 그런 경 가운데서 나무아미타불을 찬탄했단 말입니다.  찬탄하고 또 가장 많이 해오고 말입니다. 

 아, 신라 때 원효元曉스님은 우리가 뭐~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승배하는 스님 아닙니까마는 그 양반도 내내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로 해서 각 마을 다이면서 표주박을 목탁 대신에 치면서 이제 아, 그래가지고 나무아미타불을 그렇게 장도하신 분이 아니십니까마는 의상대사義湘大師도 마찬가지고,

 또 그 뒤에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옹懶翁스님이나 또는 보조普照스님이나 또는 서산대사西山스님이나,

 서산대사는 그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심즉연불경계心卽緣佛境界라! 마음은 곧 부처님 경계에다 두고서 이제

 억지불망憶持不忘이라!  간절히 생각하고 그런 우리 마음을 부처님한테다 부처님 경계에다 두는 것을 잊지 말고, 

구즉칭명불호口則稱名佛號라! 우리 입으로는 부처님 이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분명불란分明不亂이라! 분명히 불러서 조금도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서 그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부처님경계에다 둔 그 마음과 또 우리가 입으로 소리를 낸 그런 나무아미타불이란 이름과

 여시심구상응如是心口相應이라! 이것이 합치가 딱 되어서 상응 되어 가지고서

 일념일성즉능멸一念一聲則能滅이라! 한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80억겁생사지죄八十億劫生死之罪라!

  한 겁도 무량 세월인데 그 80억겁이나 된게 얼마나 많은 무량세월 입니까마는 80억겁 동안에 우리가 지은 죄를 다 녹이고서, 그와 동시에

 성취80억겁수승공덕成就八十億劫殊勝功德이라! 80억겁의 그런 무량 공덕을 성취한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다르게 부르신 분들을 억지로 제가 그만 두시라고 말씀은 않습니다. 내내야 그 자리가 그 자리이니까 이제 상관이 없으나 그래도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역설 하셨고, 한국의 도인들도 그대로 해서 그대로 우리한테 역설을 많이 했고, 또 부르기도 좋고 또 개념상 의미도 크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 누락되고 빠져있으면 모르건이와 그렇게만 불러도 된단 말입니다. 그 옹색하게 미륵존여래라 무엇이다 그렇게 부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만히 보면 꼭 자기식대로 하려고 그래요.  아, 부처님식대로 하고 정통 있는 도인들 식대로 하면 훨썩 쉬울 것인데,

 그 화두공안도 그래요.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이 나올 때 까지는 그러니까 대혜종고 스님은 북송北宋 때 분이니까, 북송 때 까지는 화두공안이란 말씀이 없습니다.

 그 양반이 재주가 좀 있어놓으니까 자기 식으로 참선은 곡 화두공안을 들어야 된다. 이렇게 해서 화두공안을 체계를 세워놓으니까, 또 그 파가 상당히 세력을 중국에서 떨치니까 꼭 그 파에서 하는 화두공안만 들어야 만이 참선이 된다고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아니고 그 후에 임제臨濟나 모다 백장百丈이나 그런 스님들께서 하신 말씀도 아닌 것이고,

 그 똑똑하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보통 꼭 자기 식을 만들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런 버릇이 지금도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말씀에 현혹 될 필요가 없이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가장 부처님께서 말씀을 많이 하고, 또 도인들이 가장 우리한테 권고를 많이 하고, 또는 부르기도 좋고 의미도 다 거기에 포괄되어 있고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극락세계, 극락세계의 교주가 또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극락세계의 교주인 동시에 우주의 교주 또한 동시에 우리 마음의 본 주인공主人公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주인공과 극락세계의 교주와 전 우주의 주인공 자리는 똑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진여불성 자리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습니다. 다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모양이 있어야 그것이 크다 작다 모다 그러는 것이지 모양이 없는 생명자체, 우리 마음이 분명히 있지만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와 똑 같이 부처님 그 법신 자리도 모양이 없지만 우주의 본바탕으로 해서 우주에 어느 때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간절히 외시기 바랍니다.

 소리를 내서 할 때는 ‘나무’를 보테서 ‘나무아미타불’ 그렇게 하시면 하기가 쉽고, 또 소리 없이 그냥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화두시 해서 말입니다. 참선하는 하나의 그야말로 공안으로 생각할 때는 아미타불만 하시면 되십니다.

  그러니까 아미타불은 아까도 말씀드린 봐 내 마음의 그런 근본 생명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생명인 것이고 우리가 종당에 필경에 돌아갈 그런 고향인 극락세계의 교주란 말입니다.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 우리가 죽을 때에 설사 우리가 업장을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열 번만 나무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그런 법문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본래로 부처이기 때문에 정말로 진실한 마음으로 우리가 부처님 명호를 외이면 진실한 마음으로 외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은 비약飛躍이 됩니다. 초월超越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이 아니면 모르건이와, 우리 불자님들께서 가장 중요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제가 한 번 더 말씀 드립니다.

  우리 마음과 부처와는 똑 같습니다. 우리 마음도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은 지금 분명히 살아 있으니까 이제 생명이 있는 것인데 이 마음도 역시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단 말입니다. 분명히 있지만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또는 부처님도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양을 나투신 부처님이신 것이지, 참다운 부처님은 법신불 이른바 불성인데 그 부처님도 역시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나다 내가 김아무게다 박아무게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비록 김아무게한테 있는 마음이나 또는 박아무게한테 있는 그런 마음이나 원래 똑 같이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은 그 법신 부처님 불성과 똑 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모양이 있고 물질이 되어야 이제 한계가 있고 아, 크다 작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제 구분해서 말 할 수가 있는 것인데  모양이 없는 것은 구분해 말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느 누구의 마음이든지 간에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주에 충만해 있고 동시에 그것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만 공덕이 갖추고 있습니다.

 능력能力도 자비慈悲도 지혜智慧도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폐 균을 이길 수 있는 힘도, 또는 나병의 균을 이길 수 있는 그런 힘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하물며 하찮은 돈 좀 버는 것이라든가 감투를 쓰는 것이라든가 그런 것은 문제될 것이 없지요.

 그러나 그런데다 우리 마음을 잘 못 써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인제 정말로 가야될 우리 고향 길을 더디게 가게 되는 것이고 또는 눈에 보이는 그런 재물이라든가 또는 명예라든가 그런 것에 우리 마음이 집착이 되어 버리면 그때는 우리가 정작 해야 될 일을 못하는 것이고 인제 우리 업만 짓는 그런 것에다 우리 생명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살고 또 명예롭게 살고 재물도 있어야 되고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 그런 것도 소중하나 설사 명예를 구하고 돈을 구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마음 자세는 항시 부처님 가르침대로 성자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다 따라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러서는 몽땅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만 따르는 쪽으로 우리 생명의 길을 그 쪽으로 돌려야 됩니다. 그쪽으로 회향回向해야 합니다.


오래동안 들다보면 불거이거不擧而擧라,  화두를 안 들어도 그때는 저절로 화두가 들어진단 말입니다.

 공부가 그렇게 익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익어져야 그래야 이제 액운厄運을 이긴단 말입니다. 병고病苦도 이기고 그때는 액운을 이깁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만능의 자리란 말입니다. 만능의 자리기 때문에 재주나 운수나 그런 것이 사실은 별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로, 나무아미타불로 인제 다 귀의歸依해서 말입니다 그 쪽으로 하시면 집안 식구도 다 그런 쪽으로 같이 온 가족이 합심合心해서 하나의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로....

 기독교인 집안에서는 하나님 부르고 다른 님 부르고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지금 20억 수가 믿고 있는 것은 그 신앙이 단순 소박하단 말입니다.

 불교는 너무나 다양해서 복잡하니까 이럴까 저럴까 다 헤맨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장 말씀을 많이 했고, 또 극락세계의 교주이고, 또 내 마음의 내 본 주인공자리 이름이고, 전체 우주의 이름인 것이고, 그러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로 해서 통일을 그렇게 해 나가십시다. 그것이 굉장히 우리한테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까 그 여러분들이 입정하실 때에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도 그런 도리어요. 

우주의 순수 생명자리인 법신불, 또는 법신불에 들어있는 만공덕 자비나 또는 지혜나 행복이나 능력이나 만공덕 자리가 보신인 것이고,  또는 그 자리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 천체 만물이 모두가 다 화신인 것이고,

그 법신 보신 화신을 합한 것이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금생에 얼마나 바쁘고 할 일도 많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우리네 그 도인들이라든가 또 불경에서 가장 말씀을 많이 했고 부르기도 좋고, 최상의 이름입니다. 최상의 개념입니다.

 꼭 기억하셔서 차를 운전할 때라든가 어느 때나 빠짐없이 어느 때나 그 중단되지 않게시리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염불念佛이 그대로 지속持續되는 것이고,  또는 순간 찰나에 교통사고를 당하실 것인데 항시 속으로 염불을 하고 있으면 염불소리 때문에 그 신장神將들이 자기한테서 못 떠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몽수경夢授經 더러 읽고 그러시죠. 가장 쉬운 몽수경에도 있습니다만 천라신지라신天羅神地羅神이라!

 우리가 염불을 하면 이 공간에 있는 신이나 또는 땅에 있는 신들이 우리를 못 떠난단 말입니다.

 염불소리를 듣고서 우리를 지킨단 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정말로 신비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하기에 매여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외이는 생활이라는 것은 아들한테나 딸한테나 어버이한테나 또는 자기 친척한테나 친구한테나 어느 누구한테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그 아미타불이 나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주인공인 동시에 너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또는 바로 우주의 주인공이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우리 극락세계의 주인공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염불을 많이 하고 극락세계에 갈 때는 성중래영聖衆來迎이라! 아미타불과 그 보살들이 우리를 마중 나온단 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신비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해서 안 보인다고 그래서 부정할 아무런 우리로서는 권리가 없습니다.  다 도인들이나 또는 그야말로 부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이니까 말입니다.

 생각 생각에 염불念佛 많이 하셔서 금생에도 행복幸福하시고 또는 우리가 금생에 인연이 다하면 그냥 아무것도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잘 못살아 놓으면 지옥이나 아귀로 뚝 떨어지는 것인데,

 죽음은 기약이 없습니다. 내일 갈지 모래 갈지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나이 많다고 해서 꼭 빨리 가고 나이 젊다고 그래서 늣게 가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허망한 이 몸뚱이 무상한 몸뚱이는 가고 마는 것인데 간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

 훤히 우리 갈 길을 알아야 됩니다. 제아무리 안개가 오리 아니라 몇 백리 안개가 끼었다 하더라도 우리 갈 길은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훤한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세계는 바로 광명세계光明世界입니다. 빛으로 빛나는 세계란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지금 저 미세한 단계에서는 모두가 다 방사 광선이란 말입니다.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은 모두가 다 하나의 방사 광명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부처님의 광명으로 지금 가득차 있어요. 모두가 다.

 우리 인간들이 나라는, 아까 그 망령된 나, 나라는 것에 얽매여 있으니까 그것이 안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명명백백이 존재하는 우주는 참 광명세계인데 우리 인간 중생들이 그 자기라 하는 잘 못 본 그런 망령된 망아 때문에 자기 몸뚱이에게 집착하고 자기 관념에 집착하고  그런 망령된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인제 그만치 본래 갖추고 있는 극락세계 광명세계를 우리가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정말로 빠짐없이 또는 끊임없이 그렇게 하시기 참 바랍니다.

 신앙信仰이라는 것은 간단한 가운데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지속을 시키는 끈기로 해서 마음이 하나로 딱 통일 되고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니까 우리 본래 주인공을 우리가 체험을 못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어서 정말로 통일이 딱 되면 그때는 삼매三昧라!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삼매란 말도 꼭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삼매에 들어야 됩니다.

삼매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산란스런 마음이 딱 다잡아서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하나의 경계에 머무르는 것이 삼매란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그래야 우리의 본래면목 자리를 우리가 체험을 합니다.

 삼매에 못 들어가면 말로는 제법 아는 소리를 하지만 그때는 체험을 못합니다. 체험하기 위해서는 꼭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는 공부 화두면 화두, 염불이면 염불, 주문이면 주문을 오로지 오로지 일념으로 외운단 말입니다.

 그래야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들어야 우리 본래 불성자리를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정말로 원래 갖추고 있는 행복을 스스로 만유감이 없이 빠짐없이 스스로 수용을 하시기를 간절히 빌어서 마지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20000219-성륜사동안거해제법문 청화대종사설법

20000219-삼영불교음반 학무 유락재 촬영

20000219-정안 이성도 촬영

20050712-본정 김영동 DV편집

20070223-본정 김영동 녹취정리










*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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