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호>
20020226-신사년 동안거 해제법어
*본 글은 동영상법문 자막 작업용으로 사투리를 포함한 구어체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
선방에 계시는 우리 대덕스님들이나 후원에서 공부하시는 우리 재가 불자님들 정진하시느라고 여러모로 고생을 많이 하시고 또한 장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제解制날은 공부를 다 마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부를 재점검하는 그런 날입니다. 과연 내가 얼마만치 공부가 되었는가, 또는 그 지겨운 그런 상相을 내는 상은 얼마만큼 줄었는가,
또는 우리가 본래성불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하더라도 과연 내가 부처가 되어 있는가, 또는 몇 걸음이나 부처가 되는데 우리가 앞으로 지금 앞으로전진해있는가 하는 그런 것을 재점검하는 그런 날이 해제 날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범부凡夫가 바꿔져서 성인이 되는 것이 공부하는 분들의 최상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범부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가 본래로 부처의 성품은 다 똑같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나쁜 버릇을 부쳐왔습니다. 따라서 그런 버릇을 떼지 않고서는 본래 부처라는 그런 자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번뇌망상煩惱妄想을 지극히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인 한에는 번뇌망상을 도저히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번뇌망상을 떼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최상의 법이 무엇인가?
이것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말로는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그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없으면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범부를 초월해서 성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반야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반야의 지혜는 일체존재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른바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생명의 실상의 지혜입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또는 나요 너요 하는 것은 또는 나라는 아상我相을 내고 너라는 인상人相을 내고 또는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내는 것이 우리 중생인데 그러한 상을 지양을 시겨서 그런 상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버릇으로 해서 공연히 상을 낸단 말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나와 남이 분명히 둘이고 이것과 저것과 다 분별해 있는 것이고 선과 악이 다 분별해 있는 것인데
왜 모두가 하나라고 볼 것인가? 그것은 우리 중생들은 겉만 봐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들은 차별 분별하는 겉으로 봐서 그런 것이지, 근본성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한결 같이 부처의 성품입니다.
참선공부를 가리켜서 불교 모음이 불심종佛心宗이라,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종이라. 참선하는 것은 바로 불심종을 닦는 것인데 요즘 세상이 발달되고 또는 혼란스러운 것이니까 사람들이 마음을 어디다 의지할 데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명상법이 아주 유행이 됩니다.
시골도 그러고 도시에도 그러고 또 외국가서 보면 그 별별스런 명상이 다 있습니다. 기氣 운동이네, 단전호흡이네 별별 것이 다 있습니다.
또 같은 불교도 버마나 스리랑카나 태국이나 그런디는 비파사나毘婆舍那Vipasyana(위빠사나)라 그런 관조법觀照法이 있단 말입니다. 위빠사나 관조법도 훌륭한 법이지만 달마스님께서 전수해 내려오는 순수한 참선이 못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선 일반 보통 명상과 참선법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가지셔야 됩니다.
자고로 우리 불가에 내려오는 그런 선을 분별하는 가르침이 있어요. 우리가 분별할 때는 분별에 대한 명확한 그런 생각이 있어야 다른 것과 구분해서 좋은 것을 선택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외도선外道禪이라, 외도선은 무엇인가 하면 불교 밖에서 명상도 하고 무엇도 하고 그런 선이 외도선입니다.
즉 말하자면 인과도 모르고 부처님 가르침도 믿지 않고서 그냥 덮어놓고서 우리가 명상하면 몸도 좋아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또는 재수도 있어진다. 이런 정도로 이른바 공리심功利心을 떠나지 못하면서 마음을 닦는 이런 법이 외도선입니다.
그 다음은 범부선凡夫禪이라, 범부선은 부처님 법을 어렴풋이 믿기는 믿으니까. 좋은 일 하면 반드시 행복이 오는 선인선과善因善果라, 나쁜 일하면 또 반드시 나쁜 과보로 해서 고통이 오는 악인고과惡因苦果라, 이런 것을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피하고 좋은 선善을 닦는 그렇게 하면서 마음을 맑히는 그런 법이 이른바 범부선이지요.
그 다음에는 소승선小乘禪이라, 부처님 법 속에 들어와 닦는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승법大乘法이라야 참다운 부처님 법입니다.
소승법은 근기가 낮은 사람한테 제시한 그런 법인데,
소승선이라, 이것은 나我라는 존재가 이것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런 정도는 알고 닦는 그런 명상법이 이른바 소승선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꼭 이대로 본래로 존재한다. 실존적인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면 이때는 소승선도 못됩니다. 적어도 소승선만이라도 되기 위해서라도 꼭 “나라는 것이 본래 무아無我다. 또는 무소유無所有다” 이렇게 알아야 그래야 이른바 소승선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들어가는 가장 어려운 관문關門이 무엇인가 하면, 그 관문은 꼭 통과해야 합니다. 이 관문을 통과 못하면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 관문이 무엇인가 하면 나라는 것이 원래 실제로 있지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불교의 특징은 그러기에 없을 無자, 나 我자, 무아無我입니다.
그 말은 쉽고 우리가 무아! 무아! 하지만 과연 내가 무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얼마만큼 내가 무아로 들어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보통 다 한심스럽습니다.
그런데 무아란 것이 우리 중생이 욕심을 내니까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이제 하셨다.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本來로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본래로 내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불교의 가장 초보적인 특징이 제행무상입니다. 제행무상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법이 모든 존재가 항상恒常이 없습니다. 이른바 고유固有한 것이 없습니다. 산이나 내(川)나 우리 생각이나 모두가 다 그때그때 변화무쌍變化無雙해 마지 않습니다. 그대로 가만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장 강도가 높다는 다이아몬드도 그대로 가만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볼 때는 순간순간 그저 마멸되어 갑니다. 이른바 닳아져 갑니다. 어느 순간도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어느 순간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말은 바로 없다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때그때 변화해 마지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제행무상諸行無常 아닙니까. 변화해 마지않으니까 필연적으로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라, 나라고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나는 항시 어제의 나나 오늘의 나나 아까 나나 지금의 나나 똑 같다고 생각해야 그래야 이것이 참다운 나라는 존재가 실존적으로 실제로 있다고 볼 것인데 사실은 엄격히 본 다고 생각할 때는 같은 자기는 없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범부의 망상妄想으로 해서, 태어날 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다고 보는 것이지, 그동안 우리 세포는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몇 천 번 바꿔지고 다시 새로워지고 그런 것입니다.
어떻든 간에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의 얄팍한 그 번뇌로 보아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사실은 내 소유도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건이 내 소유가 어디가 있습니까? 내 몸뚱이가 이것이 꼭 내 것이다. 이것게 생각하니까 내 집이 있고, 내 아내가 있고, 내 남편이 있고 하는 것이지,
자기라는 존재가 그와 같이 본래로 무상한 존재, 무상하다는 것은 즉 허무한 존재입니다. 그 무아의 존재, 내가 없는 존재, 따라서 그 무아를 내가 없는 것을 느끼고 닦아야 비로소 소승참선이 됩니다. 소승 명상은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대승 명상은 못됩니다. 대승명상大乘瞑想은 무엇인가? 대승명상은 나도 역시 없고 또 우리 주변에서 보는 모든 대상이 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소식을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 현대의 과학문명은 모두가 다 변화무쌍하고,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을 다 하고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라,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물질이나 에너지나 모두가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란 것은 아무리 분석해 봐도 그 위치라든가 그 운동을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을 성인聖人들은 직관력直觀力으로 해서 훤히 아십니다.
그래서 나만 허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적으로 보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제가 너무나 딱딱한 말씀만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부처님 가르침은 상식적인 가르침이 아니지 않습니까. 초상식超常識 상식을 초월한 가르침입니다.
성인 자체가 그 모든 것을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업業에 가리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지금 보지 못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니까 인제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것을 다 비뚤어지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욕심慾心을 내고 지나치게 진심瞋心을 내고 이런 것도 모두가 다 근원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지금 바르게 보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본다면 나라는 것도 다 허무한 것이고 너라는 것도 허무한 것이고 또는 내 재산, 내 패물 그 자기가 소중히 아끼는 모두가 다 허무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못 갑니다. 자기 몸뚱이도 못 가지고 가는데 무슨 패물인들 가지고 갈 수 있으며 대통령했다고 해서 그 직함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도 공空하고 이 대상 모두가 이것이 다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느끼고 우리가 마음을 닦아야 비로소 대승참선 그럽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달마스님을 통해서 이렇게 오신 참다운 참선법은 아직은 못 됩니다.
참다운 참선법은 최상승선最上乘禪이라, 참다운 참선법이 되어야 비로소 참선이라고 우리가 문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참선한다. 허나 그 저 밑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다 그런 것은 이제 분별시비分別是非에 얽매여 가지고 하는 그런 좌선하는 참선은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최상승의 참다운 참선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나도 부처고 너도 부처고 모두가 다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성자가 보면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 업장業障대로 봅니다.
우리가 똑같은 휘영청 밝은 달을 본다고 하더라도 슬퍼서 보면 달도 눈물에 어리어서 보이겠지요. 그러나 기쁠 때는 달님도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업으로, 업의 프리즘으로 비춰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아까 말씀대로 그 우리가 명상 한다 우리가 참선 한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인과因果도 모르고 덮어 놓고 앉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다 이런 그 잔뜩 상相만 가지고 앉아 있으면 이것은 참선이 못됩니다. 그렇게 되면은 안 하는 것보다는 좀 나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범부를 초월해서 성자가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돈오頓悟란 말씀을 들으셨지요. 돈오라. 돈오는 문득 頓자, 깨달을 悟자, 문득 깨달아버린단 말입니다. 문득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 범부가 바꿔져서 단박에 성인이 되기는 쉬운 문제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치理致로는 우리 중생들이 생각할 힘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유思惟하는 힘이 있고 판단하는 힘이 있으면 학문을 많이 안한다 하더라도 또는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인지라, 그 절실한 진리에 걸 맞는 그런 가르침은 우리가 안 배운다 하더라도 정말로 진정으로 말씀만 해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문득 “아! 정말로 참 내 마음이 부처고 천지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구나” 이런 소식을 들으면 그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모르지만 보통은 마음이 편해지고 또는 어느 사람들은 그 말만 들어도 마음이 깨달아져서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돈오頓悟라 문득 깨닫는 그런 경계에 이른단 말입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먼저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이치를 깨닫고 닦아야 합니다. 이치는 무슨 이치인가?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라, 반야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의 부처님뿐이다, 하나의 진리뿐이다, 하나의 생명뿐이다, 이렇게 되어야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불법佛法이 못됩니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기도를 모시든 간에 그런 자세로 그런 반야지혜가 항시 전제가 되어가지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가령 우리가 남한테 무엇인가 베풀고 사회봉사를 하면 분명히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대적인 생각을 우리가 떠나지 못 하고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저 사람은 나보다 구차하니까 내가 좀 도와준다. 이렇게 해서 베푸는 것은 그것은 참다운 베풂이 못됩니다.
이른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 상이 있는 보시란 말입니다. 상대를 떠나서 저 사람과 나와도 본래로 둘이 아니다. 사실은 둘이 아닌 것인데 우리 중생이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나누어서 보는 것은 우리의 허물입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세월동안, 시간과 우리 생명은 같은 것 아닙니까. 생명이란 것은 시간위에 있는 것이라서 소중한 시간을 한달 두달 몇 달이나 참선한다고 생각 할 때에 참 정말로 많은 복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데 그 모든 인연因緣을 끊고서 몇 개월 동안씩 또는 몇 년 동안씩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지극히 큰 복을 우리가 받은 그런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중한 동안에 허송세월 말고서,
참선할 때 가장 큰 두 가지 큰 원수가 있는데 그 원수가 무엇인가 하면 산란심散亂心과 혼침昏沈입니다.
산란심이란 이것인가 저것인가 자꾸만 우리 마음으로 헤아리고 또 평소에 누구 섭섭하면 섭섭한 마음을 내고 또 누구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마음을 지나치게 내고 하는 것들이 산란심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부처님 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를 섭섭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누구를 지나치게 애착을 품을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바로 보면 우리가 잘 못 봐서 그런 것이지 바로 보면 다 똑같은 부처님의 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보면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일체만법이라는 것은 우리 사람을 위시해서 자연계 모두를 다 포함한 현상이 일체 만법입니다.
“수지일체만법須知一切萬法 개종자성기용皆從自性起用이라”
스스로 自자, 성품 性자, 자성自性이 그 스스로 인연 따라서 나툰거란 말입니다. 자기 인간이라든가 또는 다른 모든 자연계라든가 이 환경 모두가 다 본래 자성이라 하는 스스로 自자, 성품 性자, 자성이라는 말이 아주 그 중요한 말씀이니까 잘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자성은 이것은 부처 佛자, 성품 性자, 불성佛性하고 똑 같은 뜻이어요.
스스로 自자, 성품 性자, 자성自性이나 또는 부처 佛자, 성품 性자, 불성佛性이나 불심佛心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일체 만법이 어디서 왔는가 하면 모두가 다 자성, 곧 불성에서 왔다는 말입니다.
어느 나쁜 사람이든 또는 좋은 사람이든 또는 그 짐승도 사자 같이 그런 용맹스런 것이나 또는 쬬끄만한 눈끔만한 그런 곤충이나 모두가 다 근원적인 제일원인第一原因은 모두가 다 불성佛性입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자성기용自性起用이라” 모두가 다 불성에서 왔단 말입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불성의 바다에서 인연 따라서, 불성의 바다에서 그때그때 거품이 일어나듯이 그때그때 이렇게 인제 나온 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만유萬有의 제법諸法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때 마음이 지독하니 무슨 섭섭한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 버릇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모든 것이 섭섭한 것은 모두가 다 똑 같이 근원을 따져보면 다 부처한테서 왔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냥 금방 해소가 된단 말입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좋아하는 마음도 그래서 참선할 때에 아까 말씀 드린 봐와 같이 그 산란심을 우리가 잘 제거를 못합니다. 중생은 자기 업으로 보니까
우리 중생은 자기 업으로 보니까 자꾸만 이것 저것 한도 끝도 없이 분별시비를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나서 공부도 안 되고 그러시지 않습니까.그런 것이 산란심散亂心입니다. 몇 시간동안 앉아도 산란심 내다가 인제 판나버리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다음은 무엇이고 하면은 아, 공부를 좀 잘 해 간다고 싶으면 인제 그때그때 피로하니까 꾸벅꾸벅 혼침昏沈이 온단 말입니다.
이 산란심과 혼침이 이것이 우리가 공부할 때 좌선할 때 두 가지 가장 큰 원수입니다.
혼침과 산란심을 우리가 이겨 놓아야 극복해야 그래야 이제 이른바 본래 마음자리, 본래 마음자리는 조금도 흠절이 없는 아주 영롱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바로 부처님이 다 될 것인데, 그 산란심 때문에, 산란심은 금생에만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전생부터 우리가 짊어지고 온 우리 업이 있단 말입니다. 금생에도 잘못 배우고 학교에서 배우고 사회에서 배우고 모두가 다 사실은 산란심이란 말입니다.
아, 수학이고 물리학이고 모두가 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때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도두가 다 걸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좌선할 때는 아까 말씀 드린 봐와 같이 우리 마음을 아상我相이라든가 또는 대상적인 모두라든가 모두를 다 비워버려야 그래야 본래 마음자리로 우리가 돌아간단 말입니다.
그 ‘이무기’란 놈이 이무기는 이른바 용이 되려다 못되고 이제 못池이나 그런데서 죽치고 살고 있는 큰 구렁이가 이무기 아닙니까. 그 이무기는 자기가 용이 되려다 못되었으니까. 이무기도 역시 불성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좋은 쪽으로 차근차근 진화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진화론進化論 같은 것도 허무맹랑한 말이 아닙니다. 일체 존재는 어느 것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모두가 다 본래 불성에서 되었단 말입니다. 불성에서 안 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자가 본다면 생각할 때는 모두를 다 일매지게 부처님의 성품 자성自性으로 본단 말입니다.
제가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번역하려고 이래저래 여러 차례 읽어보고 조사해 보니까 자성自性이란 말이나 불성佛性이란 말이 100군데가 넘어요. 조그마한 책에 가서 자성·불성이란 말이 100군데가 넘습니다.
자성·불성은 바로 우리의 주체성主體性입니다. 참다운 자기眞我입니다.
우리가 보통 참 자기를 다 잊어버리고 사니까 우리가 함부로 행동한다. 이렇게 보통 각성도 하고 남한테 우리가 비판도 당하고 남도 비판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자성·불성을 모르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바르게 생각할 수가 도저히 없습니다.
오직 그 자성이라는 불성, 불성에서 모두가 다 연원淵源되어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자성에 안주해 버려야 비로소 마음의 산란심散亂心을 지울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내 자성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만공덕萬功德을 다 갖추고 있다는 이런 희망적인 생각, 이렇게 생각을 두어야 참다운 신심信心이 나온단 말입니다.
불교의 소승신앙과 대승신앙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소승신앙은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한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마음 밖에서만 구합니다. 이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참다운 부처다. 물론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처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성本性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성입니다.
우리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고 자꾸만 분할을 시키고, 이분법 삼분법으로 분할을 시키면 절대로 우리 마음은 안정이 안 됩니다. 안정이 안 되면 그때는 공부도 안 되겠지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자리, 육조단경에서 조그마한 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얼마만치 우리에게 역설하고 싶으셨으면 조그마한 경에서 100번 이상이나 똑같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자성·불성· 스스로自자, 성품性자, 부처佛자, 성품性자, 불심佛心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꼭 외어두셔서 그 모든 것이 모양은 달라도, 우리 중생들은 모양만 보니까. 모양은 달리 보여도 근본성품根本性品은 모두가 다 부처님이요, 불성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남한테 보시할 때나 우리가 남을 교육을 시킬 때나 또는 집안에 어른이 돼가지고서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도 아들이나 딸이나 자기 소유물이 아닙니다. 아, 우리가 낳았으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해도 되지 않는가?
모두가 다 부처님의 기운을 받고 다만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부모의 인연을 빌렸을 뿐인 것이지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저 같이 나이가 이렇게 많이 먹었어도 공부를 다 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생각하기를 성불成佛하기가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생각만 해도 그때는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가 그 헤매다가 본래 부처자리, 자기 고향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 공부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향광장엄이란 무엇인고 하면 향기 향香자, 빛 광光자, 향광장엄은 자기 마음이나 자기 몸을 향기나 빛으로 장엄을 시킨단 말입니다. 꾸미는 것이 장엄 아닙니까.
어느 누구나가 자기 마음이나 몸을 향기나 빛으로 장엄을 시키겠지요.
부처님을 생각할 때와 또는 우리가 기분 나쁠 때와 우리 표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처님은 얼굴은 32대인상三十二大人相과 80수형호八十隨形好라!
부처님 인상人相은 조금도 어디가 흠절欠節이 없습니다. 모두가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해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그 무수생 동안에 낳고 낳고 하시면서 더러는 남한테 물질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새끼를 낳고 굶주린 범을 위해서 자기 몸을 조금도 회한 없이 바로 몽땅 바쳐버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32대인상 80종호라는 원만덕상圓滿德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얼굴을 이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 마음이 흐뭇해지고 감사해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자비와 지혜가 원만한 부처님의 덕상德相입니다.
그런데 향광장엄이라, 향기와 광명으로 해서 우리 마음과 몸을 장엄시키는 그런 법法이 무슨 법인가? 그런 법이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향광장엄이 되려면 다른 어려운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그런 시비분별是非分別을 떠나서, 사실은 시비분별은 허망虛妄한 것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가 괜스레 잘못 봐서 허튼 분별시비을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를 부처님같이 숭앙하고 또는 부처님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생각생각에 부처님 생각을 이어 간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바로 향광장엄입니다.
우리 몸에다 향을 간직하면 우리 몸에서 향기가 풍기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또한 끊임이 없는 향기란 말입니다. 진리의 향이고 자비의 향기 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화두공안話頭公案으로 해서 우리가 화두공안을 드는 것도 ‘이뭣꼬’라든가 ‘무無’자 화두라든가 모두가 다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 본래면목 자리, 우리 불성 자리, 우리 자성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과 우주가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하시면서 부처님 생각을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어가면 바로 그것이 향香과 광명光明으로 해서 우리를 장엄시키는 것이 됩니다.
오늘 해제解制날에 다시 스스로 공부를 재점검하셔서 아까 말씀 드린 봐와 같이 향광장엄으로 해서 가장 행복스럽고 또는 주변을 정화淨化하는 그런 우리 일상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본 글은 동영상법문 자막 작업용으로 사투리를 포함한 구어체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
*2002년 2월 26일 신사년동안거해제법어 청화대종사 설법
*2002년 2월 26일 삼영불교음반 학무 유락재 촬영
*2006년 3월 31일 DV동영상 작업 본정 김영동
*2007년 2월 10일 워드작업 및 정리 본정 김영동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
1)향광장엄
2)일체만법 자성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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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2상80수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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