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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13. 성륜사 11월 정기법회

                <제 13 호>

              * 2001.11.4 성륜사11월 정기법회*

   

  무생청정보주명호 나무아미타불


상에 지금 올라올 때 제 스스로도 충분히 올라올 수가 있는데 옆에서 그냥 그 붙들어주니까 제가 무슨 극노인같이 생각이 되어서 딱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뭐 아직은 어디 아픈데도 없고 아주 참 건강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법문은 여러 가지 갈래가 많이 있습니다. 있는데 같은 그런 갈래에도 그 달마스님 때부터서 6조 혜능慧能스님 때까지의 법문을 순선시대純禪時代, 순수할 순자, 고요할 선자, 그 조금도 섞이지 않는 잡스런 것이 없는 그런 순수한 선법이란 뜻으로 해서 달마스님 때부터서 6조 혜능스님 때까지를 순수한 참선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면 순수한 참선시대의 가장 주장된 법문이 어떤 법문인가.

 이것이 그때그때 가끔 제가 말씀한 기억이 있습니다만, 이때 법문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편안할 안자, 마음 심자, 글씨도 쉽고 내용도 아주 편안하고 그러한 법문이 안심법문입니다.

 따라서 그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달마達磨스님은 부처님 법을 다 포괄해서 가장 간략히 말씀하신 법문이 달마스님 법문 아닙니까. 가지가지의 여러 가지 그런 복잡한 교리를 단순간명하게 우리한테 그렇게 알으켜주신 법문이 달마스님의 이른바 안심법문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도 그렇고 그 다음에 혜가慧可스님, 혜가스님이란 분도 그렇고 또는 그 다음에 3조三祖 승찬僧璨스님이라, 이분도 신심명信心銘이라, 믿을 신자, 마음 심자, 새김 명자 말입니다. 우리 그런 깊은 신심을 북돋우는 말씀을 그이가 우리한테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4조四祖 도신道信스님, 네 번째 즉 말하자면 중국에 있어서 정통조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분이지요. 4조 도신스님은 또 그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이라. 이분 법문도 내내야 똑같이 우리 마음이 어떻게 해서 편안하게 안심할 것인가. 이런데다가 역점을 두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정통법문正統法門에 있어서 3조까지는 그때그때 그 일정한 처소도 없이 만행萬行도 하고 탁발托鉢도 하고 지냈지만 4조 도신스님 때는 한 500여명 대중이, 하도 대중이 많이 모여드니까 이제 한 500명나뭇 됐다고 합니다. 500명 대중이 한 처소에 모여서 공부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4조 도신스님 법문이 양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내용도 역시 그 달마스님 때뿐만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그 법문을 모두를 다 포괄적으로 간단하게 체계를 세웠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라는 그 책을 어느 거사님한테 부탁해서 이제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했는데 능가사자기에 보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해서 마음을 안심하게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주로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말씀 결론도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을 안심하게 할 것인가? 그런 것을 결론적으로 인제 마무리해서 말씀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법회 허두에서 이 명상생활瞑想生活, 명상이란 것은 이것은 비단 부처님사상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라든가 일반 세속도 명상생활을 지금 하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로 무슨 기를 충족을 시키는 그런 명상도 있고, 또 초월명상超越瞑想이라, 우리 마음을 초월적인 경계에다 이르게 하는 그런 명상도 있고,

또 기독교 하느님을 주로 우리가 신앙을 하고 거기에 가까워지는 그런 명상도 있고, 또는 요가법이라, 요가법도 역시 그 브라만Brahman 이라, 브라만신을 명상하는 브라만신을 생각하고 또는 브라만신과 일체가 되어가는 그런 명상법도 있습니다.

 헌데 그 부처님명상은 그런 명상을 다 모두를 종합시킨 그런 명상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명상법도 아까 말씀드린 그 안심법문하고 다 상통이 됩니다. 안심법문이 되어야 명상법문이 되고 또 참다운 명상을 해야 안심법문이 되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지극히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로 해서는 얼마나 참 편리합니까. 이 후기 산업사회란 것이 모든 편리한 기계도 많이 나오고 또는 지식이나 정보도 그냥 굉장히 많단 말입니다. 우리가 뭣이 적당히 있으면 좋은데 너무 과다하게 지식이나 정보가  범람汎濫이 되니까 우리가 그것을 적당히 처리를 못한단 말입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모든 그런 복잡한  지식가운데서 어떤 것이 가장 그 골수지식인가? 어떤 것이 우리 인간한테 꼭 필요한 것인가 말입니다.

 이런 것을 알려면 적어도 우리가 그런 것을 그 전체적으로 포괄적으로 정리를 할 수 있는 그런 이른바 철학적인 통찰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보통 통찰이나 또는 철학이나 그런 말도 흔히 많이 쓰지 않습니까.

 헌데 그것을 정작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것이 철학적인 통찰인가, 이렇게 되어 가면 또 잘 모른단 말입니다.

 철학적인 통찰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가. 근본뿌리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전체적인 것을 모르면 그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나열돼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을 우리가 유효적절하게 흡수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일반 철학계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철학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과학철학科學哲學이라 무슨 실존철학實存哲學이라 그런 철학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실존철학도 따지고 보면 어떤 것이 우리 생명의 실상인가 우주만유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아는 철학이란 말입니다.

 허나 여러 가지 그런 분야에 있어서 공부를 많이 한 세계적인 석학들도 그런 분들도 제대로 그 인간의 실상, 우주의 실상에 대해서 제대로 밝히지를 못했다고 지금 보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정말로 온전히 밝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후래인後來人들이 거기에 의지해서 정말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어야 할 것인데 그 훌륭한 그런 석학들이 증명을 못했으니까 우리가 인제 거기에 따라서 안심입명을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런 그 교리적인 철학으로 해서는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이론이 많다하더라도 이런 것은 우리 생명의 그 본바탕을 드러내서 말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그 본질 내 인간성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꼭 그 교리적인 그런 것도 필요하고 그러나 거기에 의거해서 우리 마음이 본바탕을 깨달아야 한단 말입니다.

 여러 불자님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깨닫는 공부아닙니까. 그런데 깨닫는다고 말을 하면 우리 불자님들도 상당히 그것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많이 느낍니다.

 그건 어째 그런고 하면 깨닫고자 해서 우리 스님네도 지금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비구 비구니 상당한 많은 수가 있지 않습니까.

 또는 자고로 많은 그런 수행자도 있었고 한데 그 깨달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게 오로지 깨달음 거기다가 자기 인생을 걸고 공부한 사람들도 깨달은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이런 것에 관해서 굉장히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같이 나이먹은 사람이 경험을 해보니까 게으름을 부리고 또는 길을 잘못 선택해서 깨닫는 법도 여러 가지가 많이 있는데 길을 잘못 선택해서 그것이 어려운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제가 지금 다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도 지금 깨달으려고 애쓰고 지금 몸부림치는 중입니다.

 헌데 그 80평생 이래저래 경험을 많이 해보니까 저는 깨닫는 길이 제일 쉽다고 생각이 되어져요.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 온전히 다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하루만치 깨달으면 하루만치 우리 행복幸福이라든가 여러 가지 우리 능력은 더 증장增長이 됩니다. 더 증가가 된단 말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우리 범부凡夫를 바꾸어서 성인聖人이 되는 길 아닙니까. 성인이 되는 것인데 성인이 되는 길은 절대로 가시밭길이 아닙니다.

 하루가면 간 만치 마음도 즐겁고 몸도 가볍고 이른바 불교적으로 말하면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희선열이라,

 법희선열이라는 것은 진리에 따라서 진리를 듣고 진리를 이해함으로 해서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이 법 법자, 즐거울 희자, 법희法喜아닙니까. 선열禪悅이라, 선열은 참선이란 고요할 선자하고 기쁠 열자 우리 마음이 고요해짐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안정됨으로 해서 우리가 기쁨을 느낀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법희선열을 꼭 느껴야 됩니다. 그런데 법희선열을 미처 못 느껴놓으면 항시 부처님공부란 것이 어렵고 그것이 난해하고 가시밭길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근원적으로 법희선열을 느끼도록 돼있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우리 마음자체가 그 모든 그런 공덕功德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쉽고도 어려운 것이, 제일 쉽다는 것은 본래 갖추고 있으니까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자아내니까 그건 쉬운 것이고 말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나쁜 버릇을 잘 못 뗍니다. 나쁜 버릇을 떼기가 절대로 그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문을 어려운 쪽으로만 생각하면 우리가 더욱 더 어렵다고 마음도 답답하고 그러겠습니다마는 사실은 부처님께서 하신 법문은 아주 일상적日常的이고 말입니다. 어느 때나 할 수 있는 그런 공부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쁜 버릇 때문에 자꾸만 어두운 쪽으로만 지금 가고 있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세간적世間的으로 육재일六齋日이라, 일반 재가불자님들 중에 육재일이란 말씀을 들으시면 잘 감도 안잡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육재일이란 것은 가장 쉬운 재가불자님들이 꼭 지켜야 할 법문입니다.

 어떤 것인고 하면 한 달에 육재일 그러면 여섯 날 입니다. 이건 뭐 음력으로 따지는 것입니다만 음력 양력이나 내내야 그것은 차이만 있을 뿐인 것이지 깊은 뜻은 차이가 없습니다만 한 달에 8일 14일 15일 또 23 29 30일 이것이 육재일이란 말입니다.

 육재일 그래서 재가불자님한테 부처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이 육재일을 꼭 지켜야 한다,  육재일 날은 우리 몸과 마음을 재계齋戒한단 말입니다. 재계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단 말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 몸과 마음이 얼마나 어지럽혀지고 또는 오염됩니까. 먹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스스로를 자기가 지금 오염시키고 있단 말입니다.

 남 미워하는 마음, 남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마음, 또는 음식을 필요 없이 많이 먹을라고 하는 마음, 또는 고기를 먹는 마음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우리 몸과 마음을 지금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이란 것은 정말로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제일 좋은 것도 아닌 것이고 우리 인간은 지금 해탈解脫을 위해서 영원한 해탈을 위해서 우리가 의의가 있는 것이지 금생에 잘먹고 잘살고 거기에가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육재일 날은 이것은 부처님께서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그 출가, 오로지 부처님 법을 닦는 출가인보다도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이니까 하다못해 육재일만이라도 출가하는 그런 각오를 하고서 공부하라는 그런 걸로 해서 육재일을 제정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육재일 날은 하루에 한 끼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아무 때나 한끼를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오정 때, 어째서 하필이면 오정을 정했는고 하면 우리 인간의 생리가 그 오정 때가 제일 소화가 잘돼요.

 그래서 오정 때 한끼를 먹되, 한끼 먹으니까 아, 세끼 몫을 한번에 몽창 먹는다고 생각하면 또 안되겠지요.  한끼도 역시 그 보통 적게 먹는 한끼 그런 정도로 한끼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그 가정에서 내외간 부부가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부부간도 그 한자리에 눕지를 말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고약한 욕심이 다 알으시지 않습니까.

 우리 먹는 욕심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 아닙니까. 이 욕심을 한사코 그 떼야지 못 떼면 인간이 이 욕계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 욕심세계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욕심세계란 것은 인생고해人生苦海 가운데도 가장 가장 지독한 고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욕심세계에서 또 지독한 그런 욕심이 무엇인고 하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먹는 식욕과 남녀 이성간 욕심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이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정말로 절제해서 그 육재일만이라도 그 부부간에 한자리에 눕지를 말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고기도 먹지 말 것이고, 오로지 그 날만은 부처님과 더불어서 진리와 더불어서만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8일 14일 15일 23 29 인제 30일 말입니다.

 불자님들은 여러 가지로 공부를 많이 하셔서 잘 알으실 것입니다만 그 유태교, 유태교도 안식일安息日이 있습니다. 안식일이라,

 유태교 안식일은 토요일 날이어요. 토요일 날. 그네들은 토요일 날마다 안식일로 정해서 안식일은 편안 안자, 쉴 식자, 우리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쉰단 말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날은 주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 법만 위해서 헌신한다는 그런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일주일 공일날 이른바 주일主日이라. 주일이란 것은 그때는 일요일 아닙니까. 일요일 날, 기독교에서 이것은 오로지 기독교에서도 하나님만 위해서 그 날은 봉사한날이 즉 말하자면 기독교 주일입니다.

 그 중동지방에서는 지금 이슬람교가 굉장히 아주 그야말로 참 번성하지 않습니까. 이슬람교도 역시 그네들 나름대로 철저히 지킵니다.

 이슬람교는 하루에 다섯 번씩 자기들 성지 메카를 향해서 참배를 해요. 그네들은 전쟁 가서도 그 시간이 되면 메카를 향해서 참배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라마단Ramadan-이슬람력9월, 그래서 9월 달에는 온달 한 달 동안에 그네들은 해가 뜨기 전에 좀 조금 무엇을 먹는둥 마는둥 요기하고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는 그네들은 안먹습니다. 한 달을 온전히 그래요. 그리고 해가 진 뒤에 조금 주림을 달래기 위해서 먹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느 종교나 간에 그렇게 절제를 안한 종교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불자님도 구태여 꼭 육재일을 정해가지고 우리가 안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우리 평소에 생활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음식 음식절식을 하고 남녀이성간의 욕심을 줄여야 됩니다.

 그래야 금생에 우리가 태어난 보람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사실은 사람으로 와서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업을 잔뜩 지어놓으면 또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업이란 것은 틀림없이 과보果報를 받습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몸도 과거에 우리가 업을 지은대로 받지 않습니까. 설사 업을 지어서 금생에 잘 못산다하더라도 우리가 걱정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당장에, 당장에 내 마음 바로 먹고 내 행동 바로 하고 내 말 바로하면 당장에 그때는 우리 운명의 코스는 바꾸어진단 말입니다.

따라서 업이란 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구속이 아니라 우리 구속을 사실은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그 생명의 본질 쪽 우리 마음의 본 주체主體에다 우리 마음을 항시 머물게 해야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혼란스러운 때 불안스러운 때는 어째서 불안스러운고 하면 우리 마음이 이른바 주체성主體性이 없단 말입니다. 주체성이.

 그 주체성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생명의 본래의 자리가 주체성입니다.

 우리 부처님법문도 여러분들은 법문도 많이 들어봐서 인제 아 여러분이 비판을 스스로 하실 것입니다만 그 말을 많이 하는데 아무런 주체성이 없는 알맹이가 없는 그런 법문도 있지 않습니까.

또 그런가 하면 그 현상적인 그런 문제는 소홀히 하고 말마다 꼭 주체성을 또 안 떠나는 그런 이른바 그 알맹이 있는 법문을 또 그 하는 분도 많단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 육조스님께서는 오소설법吾所說法이라, 내가 하는 지금 말은 육조스님이 육조단경에다 하신 말씀입니다. 육조단경은 이것은 참선의 교과서 같은 경이 육조단경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참선한 분들은 꼭 육조단경을 우리가 귀감龜鑑으로 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헌데 그 가운데서 육조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소설법吾所說法 내가 하는 말은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내가 하는 말은 그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자성이란 말은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자성自性입니다. 자성의 뜻은 내 본래의 생명을 말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본래의 생명자리도 자성이고 또는 모든 존재 우주만유의 근본자리도 자성입니다. 또는 자성이나 불성이란 것은 똑같은 뜻입니다.

 이런 불교적인 아주 그 근본적인 술어는 꼭 외두시기 바랍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인간성의 본질도 자성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지금 제주도에다가 조그마한 절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것도 자성원自性苑 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사람들이 하도 그 자성 불성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절 이름을 부를 때라도 자성을 생각하고 불성을 생각하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서 보시면 알으실 것입니다.

 헌데 자성하고 불성하고 똑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그 육조스님께서는 오소설법 내가 하는 설법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그 횡설수설 많은 말씀을 하셔도 그 도인들 말씀은 조금도 자성에 빗나가지 않습니다. 꼭 자성에 근거해서 말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말은 많은데 나중에 듣고 보면 근원적인 그런 주체성은 조금도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도 제 말씀 들으나 또는 다른 말씀 들으나 스스로 그런 비판을 하시기 바랍니다.

 “아, 저 양반 지금 말은 자성을 떠나서 할 것인가 그냥 이래저래 말은 많이 하지만 알맹이가 있는가 없는가”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비판하실 정도로 그렇게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육재일을 꼭 지키셔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음력식으로 8일이나 또는 14일 15일 23 29 30일 그렇게 안 지키시더라도 여러분들께서 편리하신대로 일요일을 정하든가 또는 토요일을 정하든가 말입니다. 적당한 날짜에 꼭 한달에 적어도 그 여섯날 정도만은 자기생활을 식욕이나 또는 음탕한 욕심이나 그런 걸로 해서 우리가 좀 떠나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업장業障이 소멸됩니다. 누누이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인생에 태어나서 업장을 소멸해야지 더욱 더 업장을 더 많이 지은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참 지극히 불행하고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인간의 자성이 우리 인간의 불성이 깊이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인간성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나는 공부를 내가 무던히 해서 나는 지금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고 내가 공부를 무던히 했는데 내 인간성이 아무리 찾아봐도 아 별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보통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그 학문적인 교리체계만 가지고서 많이 배워도 그걸로 해서는 우리 인간성의 깊이가 그렇게 많이 못 들어갑니다.

설사 학문적인 지식은 조금도 없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닦여져서 청정한 행동을 하고 또는 깊은 명상에 들어서 우리 마음을 다스리고 나갈 때는 우리 마음은 한도 끝도 없이 깊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가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치 그야말로 우리가 쓰는 마음은 지금 빙산의 일각氷山一角입니다. 그 산더미 같은 얼음덩이가 지금 바닷물에 들어있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가 쓰는 김아무개 박아무개 그런 마음은 지금 그 얼음조각 결국은 뾰쪽이 바다위에 나온 그런 것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빙산정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은 그 우주, 우주만유에 가득 차 있습니다. 끝도 가도 없이 무량무변無量無邊한 것이 우리 마음의 본바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은 끝도 가도 없는 그 자리, 끝도 가도 없는 그 자리가 바로 아까 말씀드린바 자성자리 불성자리입니다.

 그래서 불성자리에까지 못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항시 뱅뱅 윤회輪廻한단 말입니다. 내 귀중한 생명 과연 윤회가운데서 우리가 인제 헤매다가 말 것인가?

 그러지 않으면 금생에 한사코 윤회를 벗어나서 내 생명의 그 본래의 자리를 깨닫고 말 것인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결단에 매였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행복은 절대로 다른 데에는 없습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외에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것은(상대적인 것은) 행복 같은 것이지 행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이란 말입니다.  상대란 것은 항시 변화하고 변질이 돼갑니다.

 영원적인 절대적인 것은 이것은 역시 성자의 가르침만이 성자들은 그 영원적인 절대에 자기 생명을 거기에 하나로 다 합친 분이란 말입니다.

 마니보주摩尼寶珠란 그런 보배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그 귀한 희귀한 보배를 마니보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금강석金剛石보다도 훨씬 광명이 빛나서 그 광명이 한도 끝도 없는 그런 보배를 마니보주라고 하지요.

 그래서 그 마니보주라는 그 영롱한 구슬을 흐린 탁수에다 딱 넣으면 그냥 그 즉시에 흐린 물이 맑아진단 말입니다. 그런 보배가 마니보주입니다.

 그 마니보주를 흐린 탁수에다 흐린 물에다가 넣으면 흐린 물이 바로 정화가 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다가 우리 마음은 지금 혼탁한 마음 아닙니까.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도 이것이 혼탁한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보면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을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겉만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하는 것이지 근원적으로 그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타가 없단 말입니다.

 자타가 없다는 소식을 여러분들이 모르시면 사실 불교를 모르시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성자말씀에 어디가 거짓말이 있습니까. 꼭 그 사실대로 하신 말씀이란 말입니다.

 헌데 그 사실대로 하신 말씀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자타自他가 본래로 없단 말입니다. 자타가.

 여러분들은 아, 내 얼굴은 이렇게 생기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는데 아, 저것은 다르지 않겠는가. 그것도 역시 우리가 겉만 봐서 그럽니다. 얼굴 다르고 또는 그 섣불리 좀 아는 것 다르고 하는 것이지 근원적인 뿌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지금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것이 소박한 비유 같으나 저는 그런 쉬운 비유를 가끔 얘기를 합니다마는 지금 여기 지금 몇백명 우리 불자님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계시는데 몇 100명이니까 인제 아, 몇 100의 모두 차이가 있다고 생각이 되시겠지요.

 허나 우리 몸이 지금 무엇으로 돼있습니까. 내내야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런 원소로 해서 우리 몸 안 돼 있습니까. 각자가 다 그렇습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 원소가 어떻게 모여 있는가. 모인 정도는 차이가 있으니까 차이가 있게 보이겠지요.

 또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이 공간은 무엇인가. 이 공간도 역시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그런 것이 없는 공간이 없지 않습니까. 이 공간도 역시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우리가 현미경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이 여기에 꽉 차있습니다.

 따라서 내 몸이나 저 사람 몸이나 모두가 다 각 원소로 구성돼 있고 또는 이 공간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미경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리 미인도 이쁘게 보이겠습니까.

 우리 참 불자님들, 우리 인간의 그런 우리 인간의 감각感覺이 이것이 절대絶對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지금 우리 인간의 감각정도로 우리가 느낀단 말입니다. 밉다 좋다 또는 나요 너요 한 것이 모두가 다 인간의 감각으로 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이지 본바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원소의 차원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이 공간이나 결국은 이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 모두가 그 원소 투성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원소고 무엇이고 원자고 무엇이고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성이고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것은 자성이고 불성입니다. 부처자, 성품자, 바로 불성입니다. 따라서 불성차원에서는 똑같아 버린단 말입니다.

 성인들은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중생의 업장으로 해서 그 원소차원도 못되고 그러지 그 모양 생긴 대로 겉에 뜬 모양 생긴 대로 이것만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말씀대로 하면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가 본 것은 모두가 다 꿈이나 허깨비나 그림자 같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환상幻想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은 무엇 때문에 하고 염불念佛을 무엇 때문에 하겠습니까. 우리 환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實相으로 가기 위해서 한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무엇인가. 나무아미타불은 바로 그 실상자리, 그 불성자리, 불성자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러한 생명의 이름 이것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무엇인가. 이것도 똑같습니다. 그 부처님자리 불성자리는 이렇게 저렇게 본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불성자리에 만덕萬德을 갖추고 있어놔서 이것을 우리가 한말로는 표현을 못한단 말입니다.

 자비慈悲도 원만하고 지혜智慧도 원만하고 아 능력能力도 원만하고 행복幸福도 원만하고.

 그런 자리기 때문에 자비로운 쪽으로 보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보현보살普賢菩薩 말입니다.

 지혜로운 쪽으로 보면 그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또는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다스려서 극락極樂이나 천상天上으로 인도하는 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말입니다. 그러는 것이지 아 뿔뿔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중생들은 모두가 무슨 이름이 있어놓으면 이름에 집착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아까 육조단경에서 말씀을 했다는 그와 마찬가지로 오소설법吾所說法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내 법문은 모두가 다 자성자리 불성자리에서 하는 법문이라는 그런 말씀인데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그 현재생활에 있어서 우리 생활이 불안스럽지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따지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미운사람 좋은사람 궂은사람 얼마나 수가 많습니까.

 학문 차이도 그래요. 가사 여러분들 학문들 많이 하셔서 알지만 지금 우리가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 철학만  다 정독하고 나설라고 해도 그것이 굉장히 정력이 필요합니다.

 또는 그 공자孔子님 가르침을 또 알기 위해서 논어論語만 우리가 독파하고 내용을 알라고 해도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해보신 분들은 알으실 것입니다. 하나의 그야말로 화엄경華嚴經 한 권만 보더라도 우리가 정독할라고 생각할 때는 몇 개월 동안 걸려버립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이 하시는 것도 좋지만 우리 마음을 자성自性에다 두고 우리 불성佛性에다 두고 공부를 하면 화엄경봐도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렇게 되고 반야심경般若心經 보더라도 아이 참 정말로 진정으로 모두가 다 공이구나 말입니다. 모두가 공이란 말은 무슨 뜻인지 알으시겠지요.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란 뜻입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은 물질을 말하지요. 색은 물질을 말하는데 물질 이것은 하나의 겉에 뜬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자들은 그것을 다 압니다. 물리학자들은. 분석하고 분석하고 쪼개놓고 보니까 결국은 물질은 어디로 간 곳이 없단 말입니다. 없이 에너지만 딱 남습니다.

 물리학자는 아나 우리 보통 요새 사람들은 우리가 스스로 분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모른단 말입니다. 꼭 우리가 지금 느끼는 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어려운 말로 하면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라. 그 소박한 결국은 실재론이란 말입니다. 소박실재론이라. 우리 중생은 소박하니 우리가 육감으로 아는 것이지  이것은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공부하시는 분들은 꼭 그 우리가 느끼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고 그렇게 우선 생각하시고서 경전도 보시고 또 부처님명상도 하시고 그래야 됩니다.

  

 헌데 아까 제가 마니보주말씀을 드렸지요. 마니보주란 보배는 그 흐린 탁수에다 놓으면 흐린 물이 그냥 금시 즉시에 맑아버린단 말입니다.

허나 그 마니보주만 그런 신통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도 그런 신통한 힘이 있습니다. 신통한 힘 이것이 이른바 염불念佛이란 말입니다. 신통한 힘 이것이 염불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우리 마음은 지금 혼탁하지 않습니까. 혼탁한 마음을 그대로 두고 차곡차곡 또 번뇌 망상만 우리가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업장은 더욱더 무거워지고 몸도 무거워지고 머리도 무거워지고 합니다.   세상에 보면 참 불쌍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아파서도 고생도 하고 몹쓸 병으로 고생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보면 참 불쌍하기는 불쌍하나 참 딱하단 말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지어서 그럽니다. 잘 못 먹어서 그러고 잘 못 생각해서 그런단 말입니다. 바른 생각하면 바른 생각이 그냥 이념적으로 그냥 관념적으로만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도 즉시에 다 반영을 합니다.

 남 미워할 때 우리 생각이 얼마나 옹졸하고 우리 몸도 얼마나 참 괴롭습니까. 그러나 다 용서하고 다 용서하고,

 우리 뒤에 부처님같이 부처님 손을 드신 이것은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무외시인이라, 모든 중생들을 다 구제하고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이 하는 하나의 상징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을 가진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만 편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몸도 그냥 편하단 말입니다.  몸이란 것도 물질 아닙니까. 몸은 그래서 허망한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마음의 하나의 환상으로 이 물질이 지금 된 것입니다.

 과거전생에 우리가 부모님을 선택해서 금생에 나올 때에 무슨 몸으로 나왔습니까. 맨 처음에는. 우리 마음이, 전생에 우리 업식業識이 부모님을 선택해서 사람의 몸돼서 나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근원은 결국은 마음뿐입니다.

 우리가 죽어지면 또 내내야 그도 역시 우리 몸은 그냥 화장하면 재만 되어서 아무것도 없어진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생기지 않고 죽지 않고 우리 마음그대로 영생永生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생에 살다가 몸뚱이 죽는다 하더라도 슬퍼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자마자 조금도 시차가 없이 그냥 또 생을 받습니다.

 그 교통사고 만나서 아, 선지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우리가 죽는다하더라도 우리가 선업善業을 지었으면 죽자마자 우리 영혼은 그냥 천상天上에 태어납니다.

저같이 나이 많이 먹은 우리 노보살님들이나 여러분들께서도 절대로 죽음을 두려워 마르십시오. 두려울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지금 살고 있는가, 어떻게 맘먹고 있는가, 우리 신앙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 그것만 가늠할 것이지 절대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조금도 걱정 않습니다. 아, 내일가도 그만 오늘가도 그만 아무런..... 다만 그 빚만 잔뜩 지고 빚을 갚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만 안타깝게 괴로울 뿐입니다마는....

 

 그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마니보주는 흐린 탁수에 넣으면 그냥 탁수가 금방  맑아지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혼탁한 마음이란 것은 나라는 마음 너라는 마음 그것도 역시 혼탁한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 부처님 마음같이 그 그야말로 청강수淸江水같이 맑으면 나나 너나 그런 구분이 설 수가 없어요. 흐리니까 그런 구분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범부중생 마음은 혼탁한 마음인데 혼탁한 탁수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부처님, 그 부처님 이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부처님 이름을 딱 그 속에다 놓고서 일념으로 생각을 상속시키면 그때는 그냥 즉시 맑아온단 말입니다.

 불자님들 한번 경험을 해보십시오. 그런 경험은 절대로 손해가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그 법희선열法喜禪悅만 더욱더 증장을 시킵니다. 법희선열이라, 법희선열을 맛봐야 그래야 인제 신앙인信仰人으로 해서 신앙을 했다는 그런 보람도 느껴지고 더욱더 힘도 강해지고 합니다.

 법희선열을 느끼면 우리 잔병은 어디로 간곳이 없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많이 경험을 해봤습니다. 아, 내 몸이 어디가 아프다, 어디가 찌뿌듯하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 마음으로 모두를 다 놔버리고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온전히 온전히 100% 귀의할 때는...

 우리가 귀의歸依라는 것은 온전히 거기에 생명을 바쳐야 귀의가 되는데, 그 온전히 바치지 못하면 그때는 귀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갈 귀자, 의지할 의자.

 우리 마음과 모두를 부처님한테 온전히 바친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바친다는 그 말은 저 밖에 있는 무엇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래 생명자리, 우주의 본래자리에 우리가 바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성人間性이란 것은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같이 그렇게 얄팍한 마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 이 마음 바로 실상이며 바로 그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우리가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아, 마음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의  바로 실성實性으로 해서 마음의 본질로 해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란 것은 만능萬能의 자리인데 우리가 뭘 슬퍼하고 좌절할 것입니까.

 그런것은 나이도 필요없습니다. 꼭 젊다고 그래서 불성도 젊고, 나이 많다고 그래서 불성이 이그러지고,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나이 젊으나 어린애나 또는 100세 노인이나 진여불성자리는 아까 말씀마따나 불생이불멸不生而不滅이라, 나지않고 죽지않는 영원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인 것이고,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그러기에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한도 끝도 없는 광명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아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우주宇宙가 전부가 다 부처님의 한도 끝도 없는 영원의 광명으로 다 빛나는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 현대물리학도 방사광선放射光線이라, 여러분들 방사선 알으시겠지요. 방사선은 우주의 근원에서 나오는 하나의 빛이란 말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우주의 근원은 결국은 다 방사광선이다. 광양자光量子라, 그 광명의 빛이 항시 비추어있단 말입니다.

 지금 그 원자력原子力 같은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그런 것이 모두가 다 그 방사선 그런데서 다 나오는 하나의 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경험을 못하고 몰라서 그런 것이지 일반물리학자는 정말로 우주의 본바탕이란 것은 그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심심미묘한 생명이 가득 차 있는 것이고 그 생명은 한도 끝도 없다, 이렇게 느낀단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속에 몽땅 다 들어있습니다. 죽지 않고 나지 않고 영원히 빛나는 생명!

 그래서 그런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처님 이름보고는 명호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름 명자, 이름 호자, 명호名號라고 그러는데 부처님 명호를 우리마음에다가 흐린 우리 마음에다가 턱 두고서 생각생각에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서 상속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마니보주를 탁수에 넣으면 그냥 그 탁수가 맑아오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본래불성을 갖는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그냥 즉시 우리 마음은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고 화두를 하고 무엇을 하고 다 그런 공부도 그렇기 위해서 합니다. 우리 마음에다가 부처님의 광명을 딱 심어두어서 생각생각에 끊임없이 지속을 시킨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혼탁한 마음이 사라진단 말입니다.

  그 혼탁한 물이 흘러가면 자정작용自淨作用이라. 스스로 자자, 청정할 정자, 자정自淨작용이라, 혼탁한 물도 자꾸 이렇게 흘러가다보면 차근차근 맑아져서 시내 바닥이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그 생각하시겠지요.

 그와 똑같이 우리 마음도 본래 혼탁하다하더라도 그 맑은 쪽을 향해서 그때그때 지속을 시키면 차근차근 우리 마음에 있는 혼탁한 것은 흐려지고 다시 맑아져서 본래 맑은 물로 회귀를 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도 역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남 좋아하고 싫어하고 또는 여러 가지 그 복잡하고 또는 헛된 생각을 많이 했다가도 우리마음에다가 그 부처님의, 부처님의 청정무비淸淨無比한 그런 명호를 딱 두고서 말입니다. 항시 생각하고 부르고 외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냥 맑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것은 무량생사지죄탁無量生死之罪濁이라, 불경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제가 지어서 한 말이 아닙니다.

부처님경전에 있는 것인데 무량생사지죄탁이라, 과거전생부터서 무수한 동안 우리가 죄를 지은 혼탁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 명호를 생각생각에 외고 부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다 그것이 정화가 되어서 그래서 즉득왕생卽得往生이라, 우리 마음이 바로 깨달음이 온단 말입니다.

 깨달음 그것을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절대로 어렵다고 생각을 마르십시오. 깨달음 자체가 우리한테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런 계기契機를 만들어 안주어서 그럴 뿐입니다만 그래서 우리는 우리 공부에 있어서 우리가 공부하는 경우도 꼭 그 자기식으로 자기식만 옳다고 고집해서도 그건 안 됩니다.

 성자의 말이란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태교라든가 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다 진리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들이 표현을 좀 우리와는 달리한다하더라도 그것도 역시 하나의 진리라고 우리가 관용寬容해야지 꼭 우리식의 것만 이것이 옳고 다른 것은 옳지가 않다 그래버리면 이른바 다종교사회에서 지금 다원화 사회 아닙니까.

 모두가 서로 지식도 이것도 종교도 모두가 다 얽히고설키고 많은 것이 이렇게 한번에 지금 같이 공존하는데 그런 사회에서 아, 자기식만 옳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또 역시 벽을 쌓고 우리가 남들을 구분한단 말입니다.

 본래 구분이 없는 것인데 예수님이라고 그래서 저쪽에서 난 성인이니까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가 말을 했든 석가모니가 말을 했든 내내야 진리는 똑같단 말입니다.

 또 사실은 우리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기독교 바이블을 보고 또 부처님 불경佛經을 본다고 생각할 때 거의가 비슷비슷해요. 그때그때 상황 따라서 조금 달리 표현했다 하더라도,

 따라서 우리 오늘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정보와 지식과 종교가 얽히고설킨 이런 때는 꼭 자기스스로의 것만 벽을 딱 쌓고서 다른 것을 배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행적으로 먼저 모든 성자의 말은 다 똑같다, 그렇게 딱 정해놓고서 그 다음 문제는 아, 기독교도 연구도 하고 또는 이슬람교 연구도 좀 해봐야 그래야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우리가 수긍할 수가 있겠지요.

 정히 다른 것을 공부 안해 놓으면 그때는 역시 그 공연히 벽을 쌓고 벽쌓은 그대로 허물지를 못해버린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선 딱 허물어놓고서 본래 성자의 말은 이것은 둘이 아닌지라 꼭 다 옳다, 이렇게 해놓고서 우리가 신학神學도 공부도 해보고 말입니다. 또 이슬람교도 공부도 해보면 그렇구나 그렇구나 수긍이 간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날 같은 그런 사회는 꼭 그 보편적으로 모두를 다 높은 자리에서 그 포괄하는 그런 자리에서 우리가 통찰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서 눈에 보이는 것 상대유한적인 그런 면에다가 우리 마음을 딱 붙들어놓으면 우리 마음도 괴롭고 남하고 화해도 못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그 육재일, 육재일날을 꼭 기억해 두셔서 날짜를 꼭 무슨 그 전 식으로 8일이나 또는 14일 15일 모두 그렇게 기억해두시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달에 여섯날 정도는 그 절제일로 자기욕망을 금욕하는 그런 날로 꼭 정하셔야 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저도 이따금 주변사람들은 압니다마는 지금도 가끔 한 사흘도 단식하고 그래요. 하루 먹는 것도 별로 많지도 않지만 한 사흘동안 단식하면 또 그 머리도 개운하고 몸도 개운하고 참 좋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는단 말입니다. 많이 먹고 또 영양이 좀 그 어떻게 해서 실조 되는 것같이 옆에서 얘기하면 꼭 그 가끔 또 몰래 고기를 먹고 그래요.  

 그 우리 스님네 가운데도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그래요.

 그런 것은 절대로 살로 안갑니다. 우리 불자님들, 정말로 우리가 원칙대로 살아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은 절대로 거짓말이 없습니다.

 몸 약하면 몸 약할수록 적게 먹고 깨끗이 먹으면 훨씬 몸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집니다.

 육재일 날에 우리가 하루에 한끼를 먹고 또 음욕도 안가지고 말입니다. 고기도 안먹고 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우리 건강이나 우리 그것은 마음건강뿐만 아니라 우리 몸건강이나 다 거기에 다 포함돼 있어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 몸이나 마음이나 신성해지고 말입니다. 깨끗해지고 청소가 참 되고 합니다.

 정말로 저같이 이렇게 80 다 된 사람도 며칠이나 단식한다고 생각할 때 남들이 보면 아, 저 노장 참 청승스럽구나, 생각할랑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함으로 해서 새삼스럽게 젊어서 그 게으름부렸던 것을 새삼스럽게 뉘우치고 반성하고, 또 모든 그런 우리 체내에 있는 여러 가지 노폐물을 다 몽땅 뽑아버린단 말입니다.      

 

 그 제 말을 간단히 끊을라고 해도 서울서나 모두 멀리서 오셨는데 그 한 30분하고 끊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이따금 하다보면 횡설수설 그냥 말이 길어지고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명심하셔서 아까 제가 말씀한대로 부처님 가르침은 절대로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 근원적인 주체성, 주체성은 이것은 바로 자성 불성인데 말입니다. 거기다가 마음을 두고 모든 공부가 화두한 사람은 화두, 또는 염불한 사람은 염불, 또 주문하는 사람은 주문, 모두가 다 그 주체성을 근본체根本體를 안 여의기 위해서 우리가 공부해야 한단 말입니다.

내 본래생명이 바로 부처인데 부처님을 생각한 것같이 더 쉽고 간절한 공부는 없습니다.

 하나의 논리로 해서 이치라든가 뭘 갖다가 의심을 잔뜩 해가지고서 의심을 풀어간다든가 그런 공부도 좋지만 그보다는 “내 스스로의 생명이 바로 부처고 우주의 본바탕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흐린 탁수에다가 마니보주를 넣으면 즉시 맑아오듯이 우리 마음도 우리 마음은 즉시즉시 그걸로 해서 마음이 정화가 되고 다 사회를 정화시키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또 그것도 역시 염불念佛도 보통 염불이 아니라 우리가 바른 견해 바른 반야般若의 지혜智慧가 전제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전제가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모두를 다 하나의 생명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없을 때는 그때는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다 이렇게 보지만 반야의 지혜라는 것은 근원적인 성품에서 본체에서 보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본단 말입니다.

 하나로 보는 위해서 우리가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고 화두도 들어야 그래야 참다운 공부가 됩니다.

가령 우리가 이뭐꼬 화두話頭를 한다거나 무자 화두를 한다하더라도 그냥 덮어놓고서 의심만 하고 그런 것은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은 참선이 아닙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지 간에 모두가 다 본래의 자리, 본래의 자리는 바로 부처 아닙니까. 부처의 자리를 안 여의고 참선을, 우리가 화두도 들고 염불도 하고 그래야 그것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자성자리 말입니다. 불성자리를 안 여의는 공부를 해야 그래야 참다운 참선도 되고 참다운 염불도 됩니다.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그와 같이 그냥 덮어놓고서 타력적他力的으로 아,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니까 내가 여기서 부처님을 기원 드리고 부처님한테 귀의하면 나한테 가피를 주신다, 이런 것은 보통 염불이고 말입니다.    그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하게 부처 아님이 없다, 반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그런 도리입니다.  모두를 다 하나로 본단 말입니다.

 하나의 반야로 보는 그런 지혜가 슬기가 먼저 있고서 그 다음에 거기에 따라서 우리가 수행의 실천을 해야 그래야 그것이 바른 수행이 됩니다.

 보시布施를 하고 사회사업을 하고 그렇다하더라도 그 반야바라밀에 입각해서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지혜 그것에 입각해서 우리가 사회사업도 하고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그래야 이른바 상이 없는 상을 떠난 참다운 보시가 되고 참다운 이른바 보살菩薩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보살이란 것은 그냥 보통 행동이 아닙니다. 먼저 그 반야의 지혜 참다운 지혜가 있어 가지고서 모두를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고서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우리 행동을 해야 그래야 참다운 보살행菩薩行이란 말입니다. 보살이란 것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일반 소승적인 것은 나와 남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마음을 못 떠나지만 보살이란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그 반야의 지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하나의 그 근본에다가 마음을 두고 우리의 모든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 몸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해야 그래야 이른바 참다운 보살행이고 보살의 대행大行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하는 것은 그것은 소행小行인 것이고, 정말로 그 대행적인 그런 행동은 꼭 그 반야의 슬기로운 지혜가 전제가 되어서 하는 것이 이것이 대행이 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우리 마음도 몸도 주변도 다 편한 것입니다.

 남한테 베푼다하더라도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다 이렇게 베풀면 그 베풂을 받는 사람도 마음이 괴롭단 말입니다.

 허나 조금도 그런 것이 없이 그 흔연스럽게 이 뭐 자타가 원래 없는 것이고 물건도  이것은 잠시간 내가 관리한 것이지 내 소유도 아니고 말입니다.

 참다운 지혜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도 허망한데 자기 소유가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큰 기업도 해서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설사한다하더라도 꼭 이것은 내 소유가 아니다, 그렇게 느껴야 됩니다.

 진실로 그것이 소유가 아닌 것인데 그것이 잠시간 모두가 관리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 몸뚱이도 금생에 내가 잠시간 관리하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의 무아무소유란 것이 얼마나 편합니까.

 그 짐도 많고 금생에 참 죽어갈 때 다 가져갈 것도 아닌데 그 재산도 이것저것 복잡하고 자기 패물도 많고 하면 그것은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급적이면 다 털어버리고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참 가벼운 마음으로 금생에 살다가 가볍게 가는 것이 이것이 최상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스님네도 삼의일발三衣一鉢이라, 옷 세벌 좀 갈아입을 것 하나있고 또 바리때鉢多羅 공양供養할 것 하나있으면 그 외에는 사실은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인생에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음식 좀 적게 먹고 말입니다. 고기 먹어서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정말로 살로 안갑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적게 자시고 고기 안 먹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한 달에 그래도 몇 번씩 정도는 그래도 일종日中一食도 해보고 또 단식斷食도 해보고 그렇게 해서 몸을 다스리면 참 건강합니다.

 물질도 덜 들고 병도 덜 들고 말입니다. 고기 먹으면 고기 먹는 것이 부처님 법에서 보면 부정소출이라, 그 더러운 것을 낳는단 말입니다.

 암이요 무슨 병이요 문명병文明病들은 대체로 우리가 잘 못 먹어서 그럽니다. 정말로 깨끗이 자셔야 됩니다.

 그렇게 하셔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 비록 혼탁한 마음일지라도 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다르게 불러도 좋습니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시면서 정말로 금시 금시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어서 행복해지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 본 글은 청화대종사님의 중생 구제를 위한 간절한 서원이 담긴 글로 동영상 자막용으로 사투리를 포함한 구어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 20011104-성륜사 11월정기법회-청화대종사설법

* 20011104-삼영불교음반-학무 유락재 촬영

* 20011104-정안 이성도 촬영

* 20050709-DV작업-본정 김영동

* 20070123-녹취작업-만덕화 이주미

* 20070127-교정 및 정리-본정 김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