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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10. 금타대화상 열반재일법문

             <제 10 호>

              20020307-금타대화상 열반재일 법문


리 불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세계화시대가 아닙니까. 세계화시대가 되어서 더구나 각 여러 가지의 그런 정보情報가 지금 정보의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때 그 더구나 문서포교의 그런 홍수도 거기에 또 하나 일 분야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 권의 책을 내는데 있어서도 그냥 그것이 어느 누구의 그런 공이 크고 적고 그런 것을 떠나서 책을 내는 그 자체가 모든 분야의 그러한 필요한 또는 우리 생활에 긴요한 그런 물자들을 많이 소모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말들어보면 저 그 아마존 강 이라든가 그런 밀림지대의 숲이 차근차근 황폐화되어 간다고 지금 그렇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그 밀림을 남벌을 함부로 한단 말입니다. 남벌을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그 목재을 갖다가 그 펄프를 만들어서 이른바 종이를 제지한단 말입니다.

 그 부처님 경전經典이나 또는 성자말씀이나 그런 말씀만 지금 인쇄해서 낼 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그런 그 인류의 소중한 자원들이 낭비를 많이 합니다.

 

 여러 불자님들, 저는 성자가 아닙니다. 저는 성자가 아닙니다.

 성자란 것은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부처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온전히 깨달아서 행해상응行解相應이라, 말이나 행동이 조금도 법도法道에 어긋남이 없어야 그래야 성자聖子입니다.

 우리 부처님 석가세존釋迦世尊은 말할 것도 없고 적어도 2000년 세월동안 모든 그런 비판을 다 거쳐오고 또는 많은 중생들한테 혜택을 끼쳐 오신 위대한 분들, 공자라든가 노자라든가 또는 예수라든가 그런 분들은 분명히 다 성자입니다.

 우리가 불교인이라고 그래서 다른 성자를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각기 성자도 자기 개성이 있고 또는 그 당시에 사회적인 여러 가지 환경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진리眞理도 다르게 표현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모두가 다 자기의 아집我執을 떠나고 또는 자기만이 옳다는 그런 법집法執을 떠나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위해서 모두를 다 온전히 바친 그런 분들이 참다운 성자입니다.  

 그러고 제가 이곳저곳 다니면서 한 말씀들이 모두가 다 부처님말씀을 이제 좀 외워가지고서 옮긴 것이지 제가 독창적으로 한 말씀은 한 말씀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부처님말씀을 조금도 흠절이 없이 그대로 옮겨야 되겠다. 그런 마음은 저는 가졌습니다.

 따라서 제 말씀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부처님이나 각 성자들이 갖춘 것이지 제 가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제 어록이라고 그래서 제가 또 내지 말라고 몇 번 했지만 이미 나온 것도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 정도도 너무나 참 과남하게 생각을 하고 또 그 가운데가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또 대부분 했습니다.

 하는데 그 참 우리 극성스러운 그런 몇 분 우리 법 도반들이 그렇게 책을 또 내서 이른바 봉정한다고까지 그렇게 하시니 저는 정성은 한없이 고맙습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아 내가 또 금생에 나와서 빚을 그렇지 않더라도 빚이 많은데 내가 빚을 또 짊어지고 가는 구나’ 이렇게 제가 생각이 되어서 저는 참 곤혹스럽습니다. 어떻든 정성만은 한없이 고맙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중국 당나라 때 중국에서 인도로 구법승求法僧들, 구법승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 정말로 우리 모든 분들이 허투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을 항시 절감을 하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도 조금 마음으로 해태심懈怠心이 날 때는 구법승들을 상기를 합니다.

 구법승들은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기에 보통 한 3년 걸립니다. 가는 데만 해도 3년 세월 걸립니다.

다 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우리가 생활해보면 알지만 그때그때 몸도 아프고 여러 가지 또 인생의 그런 고난이 많지 않습니까. 허는데 3년 동안 나그네 길에서 지내야 됩니다.

 다른 교통수단이 있는 때도 아닙니다. 또는 중국에서 인도까지 갈라면 한 70여 국경을, 한 국경만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한 70나라나 그런 국경을 또 다 통과해 넘어서야 됩니다.

 또 각 그 밀림지대라든가 또는 사막지대라든가 고비사막 같은 그런 사막도 우리 한국의 몇 배나 되는 넓은 그런 사막입니다.

 또 히말라야 산을 넘어야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가니까 3년동안 열사람 가면 열사람 다 가는 것이 아니라 반 이상이 쓰러지고 만단 말입니다.

 고비사막을 넘을 때는 먼저 가다가 쓰러진 분들의 해골이 여기저기 다 뒹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면 또 언어의 장벽이라, 그쪽 말을 배워야 불법佛法을 배우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하필이면 그와 같이 고생고생하고 인도로 갈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번역은 되었지만 다 번역된 것이 아닙니다. 번역되다 말다 그렇게 한 것도 있고 또 중국에서 번역된 것이 아, 지금 무슨 경에가 있는 말씀이다. 그렇게 인용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그런 경들이 미처 중국에는 안 들어왔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그 경전을 그 소중한 경전을 모조리 중국으로 옮기기 위해서 그렇게 구법승들이 그렇게 가시고 오고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영광스럽게 우리 혜초慧超스님, 우리 한국태생의 혜초스님도 역시 그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래서 혜초스님께서 그 저술하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

 옛날 인도를 가리켜서 천축국天竺國이라고 합니다. 천축국을 내왕한 그런 이른바 여행기,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입니다.

 그 세계적인 훌륭한 그 당시 풍속을 알 수 있는 그런 훌륭한 그런 보배로운 그런 그것이 하나의 여행기가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인도에 가서 또 몇 년 동안 그쪽 말을 배워야 됩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충분히 알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또 머무르면서 그쪽 언어를 공부를 해야 되고 또 그쪽 스승들한테 많이 배워야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도에서 그 체류하는 그 시간이 벌써 한 6, 7년동안 또는 길면 10년동안 그와 같이 세월이 흘러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또 이쪽으로 중국으로 또 책을 경전을 구해서 가져와야 되겠지요. 그냥 빈 몸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 가지고 인도에서 거기서 경전을 다 자기가 추려서 얻어가지고 이제 낙타에다 싣고 또 자기 등에다가도 자기 힘껏 짊어지고 오신단 말입니다. 그런 그림이 있습니다.

 그 수만리 길을 가다가 쓰러질랑가도 모르는 것인데 그런 경전을 또 짊어지고 또 그 경전에 대해서 고마움과 또 감사의 뜻으로 손에다가는 향을 피워서 또 자기가 짊어진 경전을 그마만치 받들고 또 기리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오신단 말입니다.

 가면서 3년 또는 올 때 3년 더 많이 걸리기도 하고 또는 더러는 어떤 분들은 육로로 갔다가 육로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어느 분들은 아, 뱃길로 한번 내가 가서 길을 떠나야 또 되겠구나, 뱃길로 해서 또 가신 분도 있습니다. 뱃길로 갔다가 육로로 오신 분도 있고 또는 육로로 갔다가 뱃길로 오신 분도 있고.

 법연法演대사 또는 현장玄藏대사 또는 혜일慧日대사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한국의 혜초慧超국사....

 우리는 그렇게 해서 소중한 그런 경전들을 많이 가지고와서 오늘날 우리는 앉아서 쉽게 공부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제가 생각할 때는 무슨 책을 낼 때는 단의금구성언但依金口聖言이라, 단의금구성언이라, 다만 자, 의지할 자 말입니다.  금구성언이라, 금구성언은 쇠 금자, 입 구자, 성인 성자, 말씀 언자 말입니다.

 그 성인들 말씀은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그분들은 사실을 사실대로 진리를 진리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하는 그런 말들은 아무리 가감 없이 성인들 말씀을 그대로 옮긴다하더라도 자기 섣부른 개성이 거기에 들어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의할 것은 꼭 그 금구성언金口聖言, 성인들 말씀을 금구성언 그럽니다. 쇠 금자, 입 구자, 이 범부의 말씀이 아니라 이른바 성인의 말씀이란 말입니다.

 성인의 말씀은 내용은 무엇인고 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그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영원히 멸치 않는 진리眞理의 말씀이란 말입니다.

 

 저는 여러 불자님들께서 서울서나 부산서나 대구서나 먼데서 오신 것 생각하면 같이 얘기도 하고 또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질문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장소가 좁아서 밖에 계신 분도 있고 한데 제가 그것을 생각하면 송구스러워서 말씀을 빨리 끝내야 되겠구나 그렇게 또 서둘게도 됩니다.

 그러나 역시 어느 정도는 말씀을 드려야 여기까지 오신 보답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법과 다른 법의 차이는 무엇인고 하면 부처님 법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般若의 지혜智慧입니다. 다른 법과 부처님 법의 차이는 거기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가 들어있는가 안 들어있는가 반야의 지혜가 들어있으면 불법이고 반야의 지혜가 들어있지 않으면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반야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반야의 지혜는 오직 하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법회 때 허두에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봉독을 했습니다. 보리방편문은 어떤 것인고 하면 6조혜능慧能스님,

 6조혜능스님이 저술하신 책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인데 그도 지금 같이 6조혜능스님이 저자가 되어서 스스로 글을 쓰고 해서 낸 책은 아닙니다.

 자기 제자분 들이 어록語錄으로 해서 6조스님께서 하신 그런 행록을 거기에 그대로 충실히 다 적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후래인後來人들이 그 점수법漸修法이요, 돈오법頓悟法이요, 해가지고서 또 자꾸만 후래인들이 많이 싸운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시비하고 그런 것도 역시 육조단경에는 들어있어요.

 즉 다시 말씀을 드리면 성인의 법이 아니라 우리 범부로 헤아린 그런 법도 거기에 묻어서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후래인後來人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성인들 법이 왜 이렇게 돼있을까 그렇게 의단을 가질 정도로 그런 야릇한 그런 대문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가감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냉철한 그런 우리 불심으로 해서 그것을 잘 검토하지 않으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온전히 다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니 세속적인 지혜로 해서 분별하는 것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육조단경에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분별하고 또는 중요하지 않은 그런 분야는 우리가 그때그때 우리가 선택적으로 잘 알아차려야 됩니다.

 헌데 육조단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고 하면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에 귀의歸依하라, 그런 대문이란 말입니다.

 헌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하고 그 내용이 똑같습니다. 표현만 좀 다른 것이지 육조단경의 핵심이 즉 말하자면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이라,

 부처란 것은 밖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때는 우리 마음이 바로 참다운 부처다.

 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 마음과 부처와 모든 제법諸法이 원래 하나의 법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법은 그 하나는 무엇인가. 참다운 그 하나의 자리, 이른바 참선법參禪法으로 말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또는 그 모든 그런 분별을 떠나버린 참다운 참사람 자리,

 이런 자리는 우리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말이나 문자를 초월한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분별하고 남한테 전달하고 그렇기 위해서 문자로 표현도 하고 또는 책도 내고 하는 것이지 참다운 진리는 그와같이 문자나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자리나 우리 마음은 똑같은 자리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우리가 해독하기가 어려운 것이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이 부처일 것인가.

 그러면 부처는 무엇인가. 부처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말로 표현하면 오직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이 우주란 것은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바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한 생명의 유기적인 하나의 자리입니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구분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본체本體를 모르고서 본래면목을 모르고서 우리 중생들이 겉으로 현상적인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천차만별로 구분이 있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서 우리가 본래의 자리, 본래의 참다운 자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차별시비 분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어떠한 지금 대상적으로 무슨 존재가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이것은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전도몽상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아무리 학문적으로 많이 했다하더라도 실상實相을 보지를 못해요. 참다운 참사람자리를 보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중생인 한에는 아무리 학문적으로 많은 체계를 세웠어도 또 분별시비 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별시비와 동시에 또 아집我執을 낸단 말입니다. 아집이라,

 아집이란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사실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이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법집法執은 무엇인가. 법집은 이것은 대상적으로 상대적으로 무슨 존재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집과 법집이 있으면 중생이고 아집과 법집이 없이 반야의 지혜, 반야바라밀을 제대로 알면(身證心悟하면) 그때는 성자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저는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는 상식적常識的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마땅히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아먹게 시리 그런 성인聖人들이라든가 선지식善知識들이 말씀을 하시겠지만 우리 불법은 상식을 초월超越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할 때는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또는 너라는 존재도 있고 또는 나와 남이 있거니 그때는 내 것이라는 자기 소유所有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이것은 하나의 가상假相입니다. 실상實相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뒤바뀌어 거꾸로 봐서 나라는 것이 있고 너라는 것이 있고 내 소유가 있고 또는 선이나 악이나 그런 시비가 있는 것이지 영원적인 차원,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영원한 진리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그 분별과 시비를 떠나서 그 본체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자리입니다.

 기독교도 그 분명히 진리입니다. 우리가 허심탄회虛心坦懷하니 기독교 성전을 보고 또는 기독교에서 아주 훌륭한 그런 신학자들의 그분들의 말씀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분들은 사실은 지금 현행 기독교보다 훨씬 더 내용이 깊습니다.

 왜 깊는고 하면 대체로 훌륭한 신학자말씀은 다 범신론汎神論이라,

 우리 불자님들 일신론一神論, 범신론汎神論은 외시겠지요. 일신론은 세계를 오직 하나의 하나님이 창조하고 섭리하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예수고 이렇게 해서 믿는 것은 이것은 일신주의一神主義입니다.

 그러나 범신론은 무엇인고 하면 힌두교라든가 우리 불교라든가 세계적인 그러한 주로 인도나 그런데서 이루어진 그런 종교는 꼭 범신론의 범주에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바로 우리가 철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범신론에 해당이 된단 말입니다.

 범신론은 무엇인가. 범신론은 넓을 범자, 귀신 신자, 일체존재가 신이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어떠한 특정한 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는 예수만이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고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모두가 다 결국은 이른바 영원적인 존재의 아들이고 딸이란 말입니다.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가 다 한결같이 결국은 신이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신이다, 다 신이다. 이런 도리가 즉 말하자면 이것이 범신론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서기 3,4세기경에 나온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Aurelius354-430,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훌륭한 신학자도 역시 범신론자입니다.

 9세기에 에리우게나Eriugena810~880나 이 사람도 역시 훌륭한 신학자인데 이분도 역시 범신론자입니다.

 즉 말하자면 지금 현대 기독교와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두가 신이 아님이 없다는 그런 도리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불교와 그때는 가까워지는 셈이지요.

 13세기에 나온 토마스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14세기에 나온 에크하르트Eckhart,Meister 1260-1327,

 15세기에 나온 니콜라우스 쿠자누스Cusanus, Nicolaus1401-1464, 이런 분들이 모두가 다 그분들 신앙을 보면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 아닌가 이럴 정도로 우리가 착각을 일으키게 돼요.

 훌륭한 신학자는 절대로 오직 하나의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고 또는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 예수고 이렇게 치우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참 어떻든 간에 아까 제가 육조단경 말씀을 드렸는데 6조스님께서 스스로 지으신 것은 아니지만 6조스님의 사상을 그대로 닮아있는 것이 육조단경인데 그 가운데는 6조스님말씀이 아니라 후래인들이 또 그때그때 시비한 말씀들까지도 한번에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아주 냉철하게 잘 보지 않으면 자칫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몰라버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번역한 분들도 그냥 그대로 번역해놓고 보면 자칫하면 후래인들한테 아, 참 병주고 약주고 그렇게 그것이 돼버리기가 쉬워요.

 그래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와같이 훌륭한 성자의 가르침이란 것도 역시 우리가 그때그때 취사선택取捨選擇해야 되는데 6조혜능스님께서 가신지 지금 1300년이 되었습니다.

 됐는데 저같은 사람이 말한 것은 그야말로 참 새발의 피나 같아요.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아까 말씀마따나 그 귀중한 그런 밀림지대 수목을 갖다가 벌초해서 모두 종이를 만들고 다 그러는 것인데 지금 신문도 보십시오.

 그 전에 우리 젊어서는 달랑 하루에 신문 한 장 아닙니까. 지금은 몇 장 입니까. 신문만 그냥 볼라도 이거 뭐 몇 시간 걸려버립니다.

 그렇게 많은, 물론 그 세계정보를 다 담을라고 생각하면 10장인들 부족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 중요한 것만 골라서 꼭 우리 인간생활에, 우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한다고 생각할 때는 한 장 가지고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아, 우리 스님네 가운데도 그 시집詩集을 낸 다 뭣을 한다 그 자랑삼아서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참 주의해야 됩니다.

 지금 기왕 이렇게 해서 제 어록이라고 해서 내주셔서 아까 말씀마따나 그 노고에 대해서는 정말 한없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 진정을 말씀드리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한테 인생의 빚을 하나 더 지어주셨어요. 그래 그 생각을 하면 제가 참 곤혹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더할 겨를도 없지만 앞으로는 하여튼 제가 낸 글도 하여튼 제가 글재주가 또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도 사투리도 많이 쓰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그렇게 허투로 한 말 그래버리면 아, 제가 제 어록이라고 보고 있으면 굉장히 참 저는 참 싫증을 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제발 좀 그런 그렇게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서울다가도 지금 서울 광륜사光輪寺도 지금 광륜지光輪誌라고 기왕 또 절이 하나 생겼으니까 또 회보를 내야 되겠지요.

 그래서 거기다가는 우리 불자님들께서 그때그때 좋은 글을 주십시오마는 그것도 저는 앞으로 종이도 하여튼 그 값이 비싼 펄프로 해서 나온 종이가 아니라 기왕이면 재생지로해서, 재생지는 약간 거무스름하지 않습니까. 재생지로 해서 냈으면 되겠다고 생각이 되어져요. 될수록 하여튼 우리가 지구의 자원을 아껴야 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설사 우리가 자기 스스로 시집을 낸다하더라도 그 곱게 하고 잘 다듬어서 책 장정을 훌륭하게 할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그 재생지로 내놓으면 얼마나 그것이 도리어 돋보이고 말입니다. 자기가 인생에 대해서 그마만치 빚을 덜진 셈이지요.

 여러분들께서도 공부를 많이 하셔서 어록을 내고 무슨 책을 내신다 하더라도 꼭 그렇게 하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헌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말씀을 좀 더해야 그래야 여러분들께서 오신 보람이 있어서 제 말씀을 조금 더 드리겠습니다마는 역시 우리가 그 아집我執이라는 것 나, 아자, 집착할 집자, 아집이라는 것, 아집은 이것을 못 버리면 공부했다는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참선參禪해도 아, 한 철 보다도 두 철하면 두 철 된만치 사람이 더 부드러워지고 모서리가 없어져야 돼야 할 것인데 가만히 더러 보고 있어놓으면 아, 참선도 선방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모서리가 더 많아진단 말입니다.   

 부처님법문 가운데서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유연선심이란 것은 부드러울 유자, 연할 연자, 우리가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고 그런 것이 유연 아닙니까. 선심善心, 착할 선자, 마음 심자, 우리 마음이 부드럽고 또는 선량하고 그런 마음이 유연선심인데,

 우리가 불경 보면 공부를 하면 공부를 한만치 차근차근 우리가 더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온화해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연선심이 되어야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아만我慢이나 또 그야말로 교만심驕慢心이라든가 그런 것은 나올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차근차근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모서리가 떨어지고 말입니다.

 자기라는 그런 고집이 떨어지고 또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옳다는 그런 법집이 떨어진단 말입니다.

 그렇게 돼야 공부가 참 될 것인데 더러는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들이 모서리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그냥 남 비판 좋아하고 남하고 화해도 못하고 그런단 말입니다.

 우리 사람 가운데서 제일 보기싫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 아만심我慢心이고 교만심驕慢心입니다.

 그 아만심과 교만심을 낼 건덕지가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무슨 필요로 아만을 낼 것인가. 이것은 아집이 있으니까 아만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집은 무엇인가. 아집이것은 이 몸뚱이가 김아무개라는 몸뚱이가 꼭 이것은 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 몸뚱이가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김 누구도 그 몸뚱이가 김아무개 그 사람 것이 아니고 박 누구도 역시 몸뚱이가 그 사람 것이 아닙니다.

 잠시간 업으로 해서 그 김이란 사람, 김 누구같은 사람 몸뚱이같이 보이는 것이지 그것이 실지로 김이란 사람 몸뚱이가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고 하면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이 눈에 보이는 존재는 모두가 다 자기 몸뚱이든 이 세계전체든 또는 금이든 은이든 모두가 다 이것은 하나의 참다운 존재가 아닙니다.

 참다운 존재가 아니라 지금 시시각각으로 순간순간 변화해가는 하나의 이것이 허상虛想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자님들은 소중한 금강경金剛經을 부인을 못하시겠지요. 금강경 도리가 무엇입니까.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유위법有爲法이라하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이는 이 대상이나 자기몸뚱이나 모두가 다 유위법입니다.

 이런 것은 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이슬이요 번개나 같단 말입니다.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이 있지가 않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아무리 매꼼히 잘낫다 하더라도 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금생에 나와서 이것저것 주워 배워가지고서 하나의 그런 것을 우리가 이른바 전도몽상顚倒夢想한 것을 그것을 주워모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도 조건부條件附인 것이지 꼭 자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집이 자기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 공장工場이나 자기 회사會社가 자기 것이 되겠습니까.

 모두가 다 조건부로 해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입니다.

 불교를 공부해서 그 집착을, 나라는 집착을 부린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를 안 한 것입니다.

 나라는 집착을 끊어버렸으면 그때는 법집이라, 내 것이라든가 또는 이 대상이 내가 지금 눈으로 보는 대로 존재한다는 그런 집착이 나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라, 유위법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하나의 가상假相입니다.

 유위법이라는 것은 우리 보는 모두가 유위법입니다. 우리 몸뚱이도 유위법이고 다 유위법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

 그 우리가 보는 것이 단지 상 아닙니까.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좋다는 상, 궂다는 상, 상이란 말입니다.

 그런 상이 사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이, 상이 아닌 것을 봐야 그래야 즉견여래라.  그래야 부처님을 뵈온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자리입니다. 우리  마음과 부처는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란 것은 우주의 도리고 우주생명宇宙生命아닙니까. 우주생명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무엇인가? 우리 마음은 지금 보입니까.

 부처님말씀이나 또는 조사스님들 말씀에 마음 떠나서 부처가 없고 부처 떠나서 마음이 없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마음과 부처가 온전히 하나입니다.

 부처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2500년이상에 역사적으로 나오신 그런 어른이겠지요.

 그러나 참다운 부처, 참다운 부처는 법신불法身佛 아닙니까.

 석가모니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의 생명, 우주의 진리가 바로 법신부처인데 그 우주의 생명인 법신부처와 우리 마음은 똑같습니다.

 달마대사達磨大師께서 2조 혜가慧可스님한테 말씀하신 법문도 오직 그 마음법문이란 말입니다.

 마음이 어디가 있는가?

 우리 마음이 지금 어디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우리 머리에가 있습니까? 뇌에 가 있습니까? 우리 가슴에 가 있습니까?   내 몸뚱이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이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밖에가 있는 것인가?

 밖에 어디에도 마음이 어디가 보입니까.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한은 틀림없이 지금 있기는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있기는 분명히 있으면서 모양은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생명은 틀림없이 나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마음은 있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분명히 있는 것인데 모양은 어디에도 없단 말입니다.

 모양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더 확실히 말하면 천지우주에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씀이나 똑같습니다.

 마음과 부처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법신부처님의 모양도 어디에도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나왔다고 그래서 부처가 둘이 있고 셋이 있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주에 항시 계시는, 석가모니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법신부처님, 

 그 법신부처님은 이것은 그 무슨 제한된 한정된 그런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법신부처님하고 우리 마음은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다만 우리 중생들은 그 법신부처님도 모양도 없고 사람마음도 모양이 없으니까 다 똑같다 여기까지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럼 어떤 작용이 있는 것인가?

 마음 작용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마음 작용은 이것은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서 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공부하는 것은 보통은 암중모색暗中摸索이라. 참선도 암증선暗證禪이라.

 암증선이 무엇인고 하면 내 공부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공부가 지금 옳게 되는 것인가? 또 공부를 해가면 그 닦아나가는 그런 과정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모르고서 덮어놓고서 참선한다고 앉아있는 것 그것이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입니다. 

 우리는 참선한다하더라도 그 소중한 시간, 소중한 시간을 몇 개월 동안이나 애쓰고 앉아서  공부하니까 꼭 분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정곡그대로 우리가 닦아야 그래야 우리 생명도 낭비 안 되고 우리 공부도 더욱 더 진척돼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부처님 법은 우주의 도리를 그대로 다 말씀하셨고 또는 부처님 법은 꼭 우리 중생들한테 유익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는 부처님 법은 부처님 법대로 닦으면 그때는 스스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항시 기쁨이 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부처님 법은 좋기는 좋은데 닦을 때 그냥 괴롭고 우리한테 아무런 기쁨도 없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우리한테 최상의 이익을 준단 말입니다.

 부처님법과 건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모두가 다 부처님의 불심佛心으로 돼있습니다.

 불심으로 돼있는데 또 불심 그 자리는 우리 마음, 그 자리는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만공덕萬功德의 자리입니다.

 제대로 깨달으면 틀림없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나 그런 신통지혜神通智慧가 나오는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아함경阿含經이나 그런데 보면 깨달은 그런 도인들 말씀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어젯밤에도 얘기했습니다마는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陀羅票Dravya, 다라표비구는 14살 먹어서 사미승 때, 14살먹어서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했어요. 14네살먹어서 아라한도를 성취한다는 것은 그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은 누구나가 다 삼명육통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원래 갖추고 있습니다.

 현재 지금 우리 여기 한 200여명 나뭇 우리 불자님들이 계십니다마는 우리 가운데는 우리 각기 마음 가운데는 다 똑같이 삼명육통을 할 수 있는 아라한도를 성취해서 성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 어째서 못하는 것인가. 아니 나는 지금 이밖에는 아닌, 나 같은 것이 어떻게 내가 성자가 될 것이며 삼명육통은 뭐 가망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겠지요.

 부처님말씀은 조금도 오류가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부처님같이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같이 또는 용수보살龍樹菩薩같이 그런 능력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자기를 비하卑下시켜서는 안됩니다.

 나는 본래本來로 부처다, 조금도 닦지 않았어도 우리는 본래로 부처입니다.

 석가모니같은 그런 능력, 달마스님같은 그런 능력이 지금 우리한테 모조리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제한해버리고 또는 그 갖추고 있는 그 자리를 우리가 스스로 개발해야 할 것인데 엉뚱하니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도몽상顚倒夢想해서, 전도몽상해서 나라는 것은 이 몸뚱이고,  내가 배운 것은 금생에 나와서 학교에서 배우고 내가 책을 좀 읽어서 배우고 아, 이것이다.

 이렇게 한정限定을 딱 세워버리니까 우리가 갖추고 있는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 지혜智慧가 솟아나올 길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지금 딱 막아버린단 말입니다. 

 그 임제臨濟스님같은 그런 위대한 분들도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 무위진인이라는 것은 조금도 걸림이 없는 이른바 참사람이 무위진인입니다.

 무위진인無爲眞人이 어디가 저만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그런 성자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그런 참사람이 우리 눈앞에 항시 있단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바로 그런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대로 그렇게 믿고서 닦아나가면 쉬울 것인데, 우리가 한정限定하고 또는 분별시비分別是非하고 그러니까 이른바 그야말로 똥묻은 막가지 같이 우리 존재가 되어버리지요.

 대승불교大乘佛敎란 것은 우리를 절대로 비하시키면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어느 부처님, 어느 보살님 못지않게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킨다하더라도 우선 다섯가지 5계가 있지 않습니까. 5계를 지키고 있어 놓으면 25선신善神이 우리를 다 가호加護합니다.

 이 천지우주에는 모든 존재가 모든 신장神將들이 부처님법을 다 지키고 있단 말입니다.

 우주의 근본자리는 바로 부처님자리인데 그 부처님자리를 부처님자리는 어느 신장이나 어느 보살菩薩이나 다 숭배하고 다 지키고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다섯가지 계율戒律만 지켜도 5×5=25라, 한 계율마다 다섯가지 선신이 다 옹호해가지고서 25선신이 지킨단 말입니다.

 그러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어떤 것인가?

 그 아까 원통불교圓通佛敎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부처님가르침은 원통불법이 따로 있고 원통불법아닌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원통불법입니다.

 본래로 원통불법인데, 원통불법으로 불법이 못나가니까 원효元曉스님이나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나 서산대사西山大師나 모두 그런 위대한 분들이 원통불법을 지향해서 우리한테 각성을 시켰단 말입니다.

 염불念佛 따로 있고 참선 따로 있고 뭐 따로 있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자의 가르침도 꼭 석가모니부처님만이 다 옳은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세계화 시대란 것은 세계 각 민족들이 서로 상종하고 서로 부딪히고 그런 시대아닙니까.

 민족도 많고 또는 종교도 많고 여러 가지 주의주장도 많습니다.

 따라서 자기만이 옳다는 자기 것만이 최상이라는 이른바 법집法執, 요새말로 하면 그것이 원리주原理主義 근본주의根本主義입니다.  

 이슬람교도하고 기독교도하고 왜 그와같이 싸우는가. 내내야 할애비도 같아요. 모두가 다 가르침도 내내야 비슷비슷합니다.

 그러면서 왜 싸우는 것인가. 꼭 자기들 식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염불念佛도 그래요. 염불도, 같은 염불도 어느 분은 꼭 그 내 식대로 해야 된단 말입니다.

 또 참선參禪도 아, 부처님법이 모두가 다 따지고 보면 다 참선법인데 꼭 화두話頭를 의심하고 그것만이 참선인 것이고 다른 염불은 참선이 아니다, 이래버리면 그것이 뭣 되겠습니까.

 참선이란 것은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우리 본래면목자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 참선 아닙니까.

 이뭐꼬를 하든 또는 무자 화두를 하든 또는 묵조선黙照禪같이 아무 화두 없이 우리가 명상瞑想을 하든 또는 화두를 염불로 하든 그 본래면목자리를 우리가 안 떠나고서 참구參究하면 다 참선입니다.

 아무리 무자 화두를 들고 뭣을 들고 의심한다하더라도 의심, 그것만 가지고는 참선이 못됩니다.

 그 분명히 그 본래의 자리, 본래 우리 불심佛心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을 저 티벳스님네같이 티벳불교인같이 한다하더라도 옴마니반메훔을 외도 우리 마음이 본래면목자리 본래의 자리를 안 떠나면 그것도 훌륭한 참선입니다.

 그래서 일본불교는 참선하는 것도 3종파가 있어요. 3종파가.

 화두를 참구하는 화두를 의심하는 임제종파臨濟宗派가 있고, 또 화두가 없이 잠자코 명상하는 묵조선파黙照禪派가 있고, 또는 화두를 아미타불 넉자로 하는 그런 염불선파念佛禪派가 있습니다.

 그래서 화두없이 하는 것은 조동종曹洞宗이고, 또는 화두를 염불로 하는 것은 황벽종黃檗宗입니다.

 3파가 나란히 이렇게 해서 마치 솥발모양으로 나가는데 우리 한국은 이조李朝 500년동안에 우리 불법이 발전이 못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려高麗 때, 고래말엽에는 우리 불교가 굉장히 부패했습니다.

 특히 고려 중엽 때 중국으로 부터서 이른바 화두하는 법이 들어왔단 말입니다.

 신라新羅때는 화두하는 법이 없습니다. 중국도 없고 한국도 없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6조 혜능스님이 화두한 것도 아닌 것이고 달마스님이 화두한 것도 아닙니다. 마조馬祖스님이나 또는 황벽黃檗스님이나 그런 분들이 화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중국북송때 송나라도 북송 남송이 있습니다. 북송때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이란 똑똑하고 재주있는 그 분이 우리 본래면목자리를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해서 그 화두를 그때 정형화시켰단 말입니다.

 그래도 그 당시도 화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천동정각天童正覺은 또 화두없는 묵조선을 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헐청료眞歇淸了란 스님은 또 역시 그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화두로 해서 아미타불을 참구하는 그런 또 참선법으로 해서 이른바 염불선 쪽을 추구했단 말입니다.

 그 3가지가 다 좋은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무엇인고 하면, 그 본래의 자리, 본래 우리 자성자리, 본래 불성자리, 자성이나 불성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본래 불성자리를 안 떠나야 참다운 참선이란 말입니다.

 잠자코 명상을 하든 또는 아미타불을 우리가 참구하든 옴마니반메훔을 외든 또는 무슨 의단을 품든 그런 것은 하나의 방법적인 문제인 것이지 우리 본래의 것은 우리 부처님 우리 마음을 어떻게 그 마음의 한도 끝도 없는 공덕功德을 어떻게 해서 우리가 깨달을 것인가. 부처와 나와 어떻게 해서 하나가 될 것인가.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이것이 근본주의 원리주의입니다.

 그 우리는 이슬람과 또는 기독교사회와의 우리는 그런 투쟁을 지금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두고두고 두고두고 또 그와 유사한 비극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 있어서 이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가장 주의할 것은 특히 지성인들이 공부했다는 분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고 하면 꼭 자기식만 옳다는 그런 근본주의를 우리가 한사코 타파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도 그래요. 우리 마음이란 것은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것인데 꼭 자기식만 옳다는 그런 주장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도 오그라듭니다. 우리마음이 좁아집니다.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마음자리, 광대무변한 마음자리를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그래요. 한도 끝도 없는 광명光明의 생명生命이라, 부처란 말은 생명이란 뜻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것은 무엇인가.

 아미타불이란 것은 이것은 그 모든 진리를 다 합한 하나의 우주의 종합적인 진리, 우주의 본체의 그런 생명을 하나의 대명사를 붙여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도 꼭 나무아미타불, 나무를 꼭 붙여야만이 하는 것은 아니어요.

 같은 염불도 어느 사람 보면 염불한 사람도 꼭 자기 식으로 염불해야 극락세계에 빨리 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옹졸한 사람들이 어디가 있습니까.

 언젠가 한국 다니면서 자기 식으로 소리를 내야 극락세계에 빨리 간다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소리를 내나 안내나 상관이 없어요. 그것이 내고 싶으면 내는 것이고 안내고 싶으면 안내도 우리 마음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우리 본래의 진리眞理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가 우리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참다운 염불念佛이고 참다운 선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원리주의 근본주의, 원리주의 근본주의는 이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가장 암적 존재입니다.

 자기한테도 손해고 자기가정도 손해입니다. 지금 우리가 한 집안을 생각해보십시다.

 우리 부모님께서 무슨 어떤 방법을 공부한다고 그래서 우리 아들이나 딸이나 우리 며느리나 우리 사위나 그 사람들이 꼭 부모님을 따를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따르면 좋지만.

 다만 우리가 기독교를 자기 사위가 믿든 며느리가 믿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성인의 가르침은 다 똑같은 가르침입니다.

 사소한 것은 그것은 가지나 이파리 같은 문제인것이지 우주는 오직 하나의 진리다 오직 하나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반야의 지혜란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를 하나의 지혜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를 하나의 지혜로 보는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반야가 있으면 참다운 그것이 진리고, 반야가 없으면 그때는 그것이 다 그마만치 결국은 그것이 올바른 지혜가 올바른 진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祈禱를 모시든 또는 무슨 일을 하든 사업을 하든지 간에 반야의 지혜로 해서 자기 밑에 사람들을 쓴다 하더라도 저 사람과 나와 절대로 둘이 아니고 똑같이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化身이다,

 이렇게 보시고 또는 비단 사람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의 관계도 그래요.

 돼지나 소나 이런 것도 우리 사람과 절대로 다른 별도의 존재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업장業障이 좀 무거워서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못하니까 우리가 함부로 그런 고기를 또 우리가 허투로 먹는단 말입니다.

 고기를 먹는 것이 해악害惡이 얼마나 큰 줄 알으십니까.

 그 고기를 먹을라고 우리 한국에서 1년에 소가  몇 마리씩이나 수입을 시킨 줄 아십니까?

 동물성단백질 안 취해도 우리 건강에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지금 그 소 한 마리, 우리집에 기르는 개 한마리가 과거전생에 우리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우리 형제간이 되고 다 그랬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고기를 우리가 먹을 수가 있습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고기 먹고 술 먹고 모두 그런 것이 부처님 그런 계율에 없다, 계율에 없는 것이 아니라 명명백백히 있습니다.

 보살계菩薩戒란 것이 십중금사십팔경계十重禁四十八輕戒 가운데서, 무거운 계율가운데는 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빠트렸지만 사십팔경계 보면,

 사십팔경계 맨 처음 허두에 가서 스승과 자기 도반을 존경하고 받들어라. 이런 대목이 있고,

 두째번에 가서는 고기를 먹지말라. 사십팔경계 두째번에 가서 고기를 먹지말라,

 셋째번에 가서는 술을 마시지말라.

 넷째번에 가서는 오신채五辛菜를 먹지말라. 부처님말씀은 우리를 손해 보게시리 하는 말씀은 조금도 없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부처님법문은 다 우리한테 이익되고 또는 부처님법문을 법을 지킴으로 해서 우리한테 우리 건강으로 보나 어떤 걸로 보나 우리를 그렇게 행복스럽게 유도하신단 말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말씀이나 또 금강경金剛經말씀이나 또는 화엄경華嚴經말씀이나 모두가 다 근원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들이 꼭 그 외워두실 아집我執 법집法執이라, 아집 법집을 떠나는 거란 말입니다.

 아집 법집을 떠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 떠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됩니다.

 우리 중생들은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도몽상顚倒夢想으로 봅니다.

 반야심경에서 그 모두가 다 모든 가르침이 전도몽상을 떠나서 참다운 진리를 깨달으라는 그런 말씀아닙니까.

전도몽상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가 다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해악이 끝도 갓도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말씀대로 살면 마음도 가볍고 몸도 가볍고 자기집안도 화목하고 사회도 그럴 것인데 이 생명이란 것이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인데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가 반야바라밀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거꾸로 보고 뒤바뀌어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너는 너고 나는 나란 말입니다.

 하나의 불성佛性위에서 우주는 지금 진여불성이 우주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주에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각 원자, 원자가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원자의 끄트머리가 무엇인가, 원자의 근원이 무엇인가. 이것은 현대물리학에서는 근원을 모릅니다.

 근원은 오직 성자의 투철한 안목에서만 원자의 그런 기본을 압니다. 원자의 기본이 즉 말하자면 진여불성입니다.

 알기도 천하에 쉽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물리학은 모양이 있는 자리까지만 규명해내는 것이지 모양이 없는 것을 현대물리학은 알아차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물질적인 것만 현대물리학은 압니다. 그러나 물질의 그 가장 끄트머리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原理라.

 그 투철한 물리학자가 다 증명해낸 걸로 보면 확정스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원자 그것도 시시각각으로 변동해서 마지 않습니다.

 서로 상호교환相互交換되고 또 몇 초도 못가서 원자의 그런 경계에 있는 소립자素粒子는 그때그때 변화가 되고 맙니다.

 어느 것도 물질이란 것이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이런 도리를 부처님께서는 벌써 그 당시에 그 당시에 투철하고 소상히 말씀했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것은 다 실지實際가 아니단 말입니다. 다 가상假相에 불과하다,

 우리 몸도 이것도 저것도 그 소중한 다이아몬드도 모두가 다 허상虛像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말씀을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확실히 믿어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우면 피가 맑아져서 우리 몸이 병고病苦로 나쁜 그런 병액病厄으로 해서 침범을 당하지 않습니다.

 가장 건강한 생활도 부처님말씀을 그대로 오로지 믿는 생활입니다.  

 여러 가지 부처님 공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마는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의 것을 고집은 절대로 말고 또는 자기가 인연因緣 따라서 취한대로 화두를 선택했으면 화두공부를 열심으로 하고, 또 염불을 선택했으면 염불을 하고 다만 그 뿌리는 다 똑같단 말입니다.

 오직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본래의 자리를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헌데 공부를 하다보면 자기 공부가 좀 잘 되어가면 아이 이것은 내가 하는 공부만 제일 좋고 다른 사람은 이건 좋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은 모두가 다 성불成佛하는 길로 인도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우리가 그 법집을 말으시고 법집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말로 해서는 근본주의 원리주의입니다.

 법 법자, 집착할 집자, 법집 이것이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고 사회도 해칩니다.

  따라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니 천지우주는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 진리뿐입니다. 진리뿐인 것을 우리가 그래저래 거꾸로 보는 지혜로 해서 우리가 시비분별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마음도 괴롭고 자기 가정도 괴롭고 또 가정도 화합도 안 되고 말입니다.

 부처님 진리로 사는 것이 자기 개인적으로 보나 가정으로 보나 사회로 보나 어느 면으로 보나 제일 수승한 법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참 건강하게 금생을 지내시고 또 우리 죽음이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업에 따라서 잠시간 모아진 이 몸뚱이 이 가상假相, 가상만 그때그때 인연因緣이 다하면 바꾸어지는 것이지 우리 생명生命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아닙니까.

 생명은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숨이 끊어지면 그냥 그 허튼 업으로 해서 모아놓은 이 몸뚱이 세포는 그대로 사라지겠지요.

 그러나 생명자체는 그냥 즉시에 일초의 시차도 없이 즉시에 또 내생에 가서 몸을 받습니다.

 천상天上도 분명히 있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천상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 선업善業 따라서 어느 공간에 공해가 적은 공간에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극락세계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 마음에 번뇌가 없으면 우리 마음에 아집과 법집이 없으면 어디에나 다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또 그와 동시에 정거천淨居天이라, 청정한 또 성자가 지내는 그런 처소가 있어요. 그런 데가 모두가 다 극락세계입니다.

 성자들은 성인들은 그 도처에가 이대로 극락세계고 제가 더 확실히 말씀드리면, 이 세계가 본래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스스로가 어두워서, 어두워서 이렇게 보고 저렇게 보고 그런 우리가 좁혀서 보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아주 옹졸한 그런 세계가 된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마음만 닦아지면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 따라서 마음이 5만치 닦아지면 이 세계도 5만치 정화가 되고 우리 마음이 10만치 닦아지면 또 그때는 10만치 정화가 되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정화여하에 따라서 이 세계는 좋게도 보이고 나쁘게도 보이는 것입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평등일여平等一如의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입니다.  


 이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은 위대한 스님입니다. 금타대화상은 제가 생각할 때는 1300년전에 나오신 6조혜능스님,

 6조혜능스님 그 법문하고 금타대화상께서 내놓으신 금강심론金剛心論, 저는 대조를 다 해봤어요. 대조를 여러번 해봤습니다.

 헌데 그 6조스님 다음에 6조스님법문을 가장 충실하게 깨닫고 또 펴신 분이 저는 금타대화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그 법문에 증거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증거는 무엇인고 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맨 처음에 우리가 봉독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

 6조혜능스님이 그 내놓으신 육조단경六祖壇經, 단경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과제가 즉 말하자면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로 부처인데 우리마음 그 본래로 부처공덕은 삼신三身이라. 청정법신淸淨法身이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의 본체성은 청정법신이요,

 우리 마음에 들어있는 모든 공덕은 원만보신圓滿報身이요,

 또는 일체차별 지혜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은 그때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요,

 이래서 6조스님께서 하신 육조단경의 핵심이 즉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 삼신사지三身四智를 다 온전히 갖추고 있다, 이런 뜻이란 말입니다.

 또는 6조스님께서 단경의 육조단경의 부촉품付囑品에서, 부촉품이란 것은 그 경의 가장 마지막에 아주 결론結論같은 말씀입니다.

 부촉품에 가서 여러분들이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종지는 모든 종종 차별의 지혜를 다 종합한 지혜가 일체종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체종지를 깨달을라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닦을지니라.

 이런 대목이 있고 또 육조단경의 법문에 가서는 다섯 군데나 일행삼매란 말씀이 언급돼 있어요.

 그러고 육조단경에서는 또 자성自性, 불성佛性,

 스스로 자자, 성품 성자, 그런 자성自性이나 부처 자, 성품 자, 불성佛性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자성 불성 말씀이 100군데가 넘습니다. 조그마한 육조단경에 가서 100군데나 자성 불성이란 말씀이 넘어요.

 그렇게 해서 그 고구정녕苦口丁寧하게 말씀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지금 금타대화상 금강심론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그대로 해서 역설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법문에 있어서 똑같으니까 결국은 그야말로 6조스님께서 떠나신 지가 1300년동안인데 1300년동안에 위대한 그런 선지식들이 많이 나오셨지만 그 6조스님말씀을 그대로 신수봉행信受奉行해서 구현俱現한 분이 금타대화상이라고 저희들은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육조단경도 보시고 또 금강심론도 보시고 비교를 해보시면 아, 과연 그 말이 이것이 사실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고,

 또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보리방편문하고 6조스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

 그 우리 마음속에가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부처의 공덕을 조금 더 부연시키면 법신 보신 화신이란 말입니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다 몰아서 다 종합을 시켜가지고서 하나의 생명체로 하나의 우주적宇宙的인 생명체生命體로 표현하면 그것이 아미타불阿彌陀佛입니다.

 그것이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이란 것은 그냥 저만치 우리 밖에 있는 어느 부처가 아니라 우리 몸에나 우리 마음에나 바로 우주의 생명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 유기적인 우주의 생명이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리고 아미타불을 우리가 부르는 것은 마치 자기 생명의 본래의 자리 자기생명의 고향자리 영원한 마음의 고향자리를 우리가 흠모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신장이나 어떠한 아귀나 귀신이나 제일 좋아하고 또는 제일 두려운 것은 아미타불 우주생명자리입니다.

 귀신이나 그런 나쁜 업장이 무거운 것은 부처님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고,  천상사람들은 부처님과 거리가 좀 가깝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다음이고 그러겠지요. 지옥이나 그런 것은 부처님과 가장 거리가 먼 자리입니다.

 그러나 지옥중생도 역시 지옥도 역시 그 부처님의 성자의 바른 눈으로 보면 다 모두가 다 한결 같이 진여불성입니다.

천지우주에 부처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승적인 불법은 다 그러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어두워서 그때그때 분별시비로 해서 우리 스스로 마음도 괴롭고 또는 다른 사람과도 그런 사이가 그마만치 다 부자연스럽고 부조화調和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본래는 반야의 지혜라,

반야의 지혜가 있어야 불법이고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불법이 아닙니다.

 반야의 지혜는 우주를 일원적一元的으로, 이원二元이나 삼원三元이나 나누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일원적으로 보는 지혜가 바로 반야바라밀의 지혜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앞으로 훌륭한 불자님이 되시고 또 필연적으로 갖추고 있는 불교의 불교가운데 불교의 가장 그런 공덕 가장 수승한 공덕이 즉 말하자면 우리 생명이 보다 빛나고 부처님과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공부한다는 것은 부처님과 더욱 더 가까워질 것이고 또는 동시에 우리한테 있는 모든 그런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아집과 법집이 떨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아집과 법집의 모서리가 떨어져야 이른바 유연선심이라,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온화해지고 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우리가 바꾸어져야 됩니다. 바꾸어져야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바꾸어져야지 오늘도 그만 내일도 그만 참선방에 가서 몇 철 공부해도 그대로라면 우리는 닦은 보람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때그때 바뀌어져서 부처님 가까워져서 우리 스스로가 그런 모서리를 떠나서 아집 법집이 없이 우리가 금생에 정말로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고 그렇게 아주 행복스러운 그런 생활을 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 본 워드작업은 동영상 자막용으로 큰스님 구어체 그대로 받아쓴 것입니다.*              


20020307-금타대화상재일법문-청화대종사 설법

20020307-삼영불교음반 학무 유락재 촬영

20050508-DV작업-본정 김영동

20070105-녹취 워드작업-만덕화 이주미

20070108-정리-본정 김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