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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8. 성륜사정기법회

                          < 제 8 호 >

                          20020407-성륜사정기법회


도몽상顚倒夢想이라, 전도몽상이라는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전도몽상이 나와 있으니까. 불교인들은 전도몽상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몽상하면 보통 생각하기를 우리 보통사람들은 전도몽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전도몽상이 거꾸로 보는, 모든 사태를 거꾸로 보는 이른바 아주 꿈같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보통 차원에서는 전도몽상이라는 것이 나한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전도몽상은 사실은 우리 범부凡夫가 보는 범부의 견해는 모두가 다 전도몽상에 해당합니다.

 제가 좀 감기기가 있어서 음성도 바뀌고 그래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견해見解와 성자聖者가 보는 견해見解와 우리가 구분해서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범부가 보는 견해는 모두가 다 하나같이 사실은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중생들은 무슨 물질 그러면 물질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물질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법이 잘 못됩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이나 또는 부처나 또는 모든 중생, 우리 불교에서 중생할 때는 그냥 사람이라든가 또는 동물이나 그런 것만이 중생이 아니라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모두가 다 중생衆生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사람이나 또는 일반 동물이나 또는 무생물이나 일체존재가 모두가 다 이것이 다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마음뿐이기 때문에 어떠한 물질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사실은 우리가 바로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전도몽상으로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가르침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이 없는 것이란, 그런 소식은 사실은 어떤 누구나가 다 상식적으로는 긍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의 여러 가지 그런 과학적인 사고로 본다 하더라도 물질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쇠는 쇠대로 존재하고 또는 흙은 흙대로 존재하고 공기는 공기대로 존재하고,

이렇게 대상적으로 우리가 느낄 때는 모든 존재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보는 현대인들의 그런 감각에서는 도저히 긍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성자의 견해, 성자의 견해만이 진실을 진실대로 봅니다. 헌데 성자의 견해는 분명히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고 이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에 와서는 현대의 초정밀과학에 있어서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사실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분석하고 들어가서 저 끄트머리 가서는 이른바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이 된다는 것이 과학적인 결론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이른바 초미립자超微粒子단계 아주 미세한 그런 미립자단계에 있어서는 그 중성자나 양성자나 그런 아주 미세한 것은 사실은 분석을 해놓고 보면 무엇인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무엇인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른바 현대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 중요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불확정성의 원리,

불확정성不確定性의 원리原理 이것은 하이젠베르그Heisenberg, Werner Karl 1901-1976가 내놓은 것인데, 불확정성의 원리는 무엇인고 하면 모든 존재는 결국은 이것은 확정적으로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와같이 현대의 그런 아주 최첨단의 정밀과학에서는 물질이란 것은 무엇인가 지금 결론을 낼 수가 없습니다.

 결론을 낼 수가 없는데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 물질이 무엇인가는 모르기는 모르는데 그 물질이란 것은 아주 끄트머리에 가서는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그 무엇이란 말입니다.

 신비부사의한 그 무엇이란 것은 어렴풋이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까 이른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그런 말씀이 나왔겠지요.

 그와같이 물질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그런 것을 그런데 벌써 그 우리 부처님가르침은 물질이란 것은 이것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이 무엇인가 모르는 그런 것이 아니라 물질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물질의 끄트머리에 가서는 이것은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부처님께서는 이미 말씀해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란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범부중생의 전도몽상, 범부중생이 상식적으로 그렇게 보는 견해에서 우리가 있다고 보는 것이지 정말로 부처님 그런 견해에서라든가 성자의 견해,

 사실은 성자만이 모두를 바로 보고 전도몽상을 않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상식적으로 대상으로 우리가 산이 있으면 저건 산이다 또는 물이 있으면 물이다 이렇게만 보는 것이 중생의 견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봐서 물질이 존재하는 것이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존재를 깊이 파고 들어가서 가장 근원적인 자리에 이르면 무엇이 무엇인지 몰라버린단 말입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몰라버리는 자리가 이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의 마음이라 하는, 마음이라 하는 그러한 신묘神妙한 그런 경계境界에 이르게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학문적으로 많이 공부를 했다든가 또는 무얼 안다든가 이렇게 우리가 이제 생각하고 자기스스로 아만심我慢心을 낸다하더라도 결국 따지고 보면 그것은 참말로 아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범부가 아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도몽상해서 거꾸로 봐서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우선 나라는 그런 관념, 나라는 관념觀念이 이른바 불교에서 아집我執 아닙니까.

 나라는 관념도 우리 중생이 전도몽상해서 나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우리 중생들이 전도몽상하지 않으면 즉 다시 말하면 잘못보지 않으면 그때는 나라는 관념을 가질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가 나라고 생각할 때는 우선 내 몸뚱이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몸뚱이 보고 나라는 관념을 가질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라는 관념도 사실은 내 몸뚱이는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보통 내 몸뚱이는 지금 체중體重은 얼마나 되고 신장身長은 얼마나 되고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허나 우리가 정확히 생각해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라는 그런 관념도 역시 그런 물질이라는 물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전제에서 나라는 그런 관념을 우리가 형성시킬 수가 있는 것이지 물질이란 것은 본래로 없는 것이다,

모두가 다 순수한 생명生命뿐이다, 순수한 생명이라고 말할 때는 순수한 생명 이것은 개별적인 생명이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생명이 없이 그 모든 존재가  사실은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개별적인 생명 이것은 우리 중생들이 잘못 봐서 개별적인 생명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 성인聖人들이 바로 보는 그런 차원次元에서는 우주宇宙가 바로 하나의 생명체生命體란 말입니다. 하나의 동일한 생명체입니다.

 이른바 동일철학同一哲學이라, 우주자체가 동일한 그런 생명체인데 우리 중생들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전도몽상이라, 거꾸로 보니까 잘 못 보니까 상식적으로 보니까 우리가 이제 동일한 생명체가 아니라고 우리가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나라는 관념, 이것은 동일한 생명체를 갖다가 우리가 국한시켜서 자기 몸뚱이라는 것이 있다고 전제해서 우리가 자기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성인들과 우리 범부들의 차이는 거기에 있습니다. 성인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공부를 꽤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 우주를 동일한 하나의 생명체, 즉 다시 말하면 하나의 생명체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고 그러겠지요.

 그런 모든 존재가 자타自他를 떠나고 또는 시비是非를 떠나고 그런 자리에서 하나의 생명체로 우리가 볼 수가 없다고 그러면 아직은 범부입니다. 범부중생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금생에 나와서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책무가 무엇인고 하면 우리 인간들이 이른바 아집我執이라, 나 아자, 집착할 집자, 아집이라, 아집을 떠나고 법집法執을 떠나서 우리가 해탈解脫로 가는 길입니다.

 아집을 떠나지 못하고 법집을 떠나지 못하면 불교 인생관人生觀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윤회輪廻를 면치를 못합니다.

 우리 생명은 금생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전생도 무수생無數生 동안에 존재해 왔고, 또는 우리가 금생에 해탈을 못하면 미래에도 여전히 존재해 갑니다.

 일반사람들은 윤회를 잘 믿지를 않습니다. 우리 불교인들 가운데도 윤회를 잘 믿지를 않아요.

 과거에도 우리 생은 무수생 동안에 나고죽고 나고죽고 존재해왔고 또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해탈을 못하면 또 몇 만생을 우리가 헤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해놓으니까 지금까지도 우리 중생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영국의 「철의 여인」이라고 대처수상이란 분이 있지 않습니까. 대처수상. 아주 참, 나이로 보니까 저보다 한 살 덜 먹었어요. 덜 먹었는데 철의 여인이란 그이가 영국보수당으로 해서 처음 여자 당수가 되었고 영국으로 해서 처음으로 여자수상이 되었어요. 그렇게 아주 유명한 분이고 또 어떻게 강력한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든가 철의 여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번에 어느 신문쪽지에서 보니까 철의 여인이라는 그이도 의사들이 자기한테 충고하는 것이 앞으로는 어디 대중석상에 가서 얘기를 하는 대중강연이라든가 대중집회 그런 자리를 피하라고 그랬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위험하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제가 신문쪽지를 보다 보니까 그것이 저한테도 그것이 해당한 것 같아요. 가급적이면 참 대중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그런 자리를 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래도 그때그때 무리가 된다고 생각이 되어져요.

 여태까지는 저도 그걸 못 느꼈는데 제가 요즘 조금 무리를 해가지고서 자리에 몇일 동안 누워있다 보니까 참 과연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는 저도 가급적이면 철의 여인도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은 철의 여인 같은 그런 강력한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가르침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인데 우리 중생들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거꾸로 보는 전도몽상 하는 그것 때문에 어렵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일체존재가 다 이것은 그 근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참 쉬운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근원에서 보지 않고서 그런 현상적인 상에서 본단 말입니다.

 성인들의 가르침과 우리 범부의 생각은 확실히 그런, 성인들은 성품에서 근본자리에서 보고 있고 우리 중생들은 현상에서 보기 때문에 당연히 그때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요.

 모든 철학이나 모든 종교가 사실은 그런 종교의 근원적인 것은 일체존재의 근본바탕에서 봅니다. 바탕에서 보고 일반중생들은 현상적인, 우리 중생들의 생각은 얇으니까 현상적인 상에서 본단 말입니다.

 이른바 요새 쉬운 말로 상이 있다 상이 없다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지금 상에서 봅니다.

 열반경涅槃經, 열반경에 있는 참 소중한 법문法門이 있어요. 열반경에 있는 것인데.

 사자후자獅子吼者 명결정설名決定說이라,   사자후라는 것은 지금 사람들은 누가 웅변만 잘해도 사자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사자후라고 않습니다.

 사자후는 무엇인고 하면 사자후자 명결정설이라,

 그 아주 결정적인 그런 진리를 말하는 것을 가리켜서 사자후라고 합니다.

 결정적인 진리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이른바 성자의 가르침에서 이루어진 그런 말씀인데 그 모든 존재의 그 실상實相을 조금도 흠절이 없이 말씀한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성자의 조금도 흠절이 없는 가르침이 이른바 비로소 사자후라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말씀이나 성인들의 말씀이 이른바 사자후가 된 셈이지요. 사자후자 결정설이라,

 지금 이것은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

 여래상주如來常住 무유변역無有變易이라,

 여래상주 무유변역이라. 그러니까 사자후자 결정설인 그런 그야말로 대결정적인 법문의 핵심이 무엇인고 하면 여래상주 무유변역이라,

 여래는 바로 부처님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이 상주라, 항상 상자, 머물 주자, 항시 계신단 말입니다.

 여래상주 무유변역이라, 부처님이 항시 계시면서 무유변역이라, 없을  무자, 있을 유자 그리고 변할 변자, 바꿀 역자 말입니다.

 부처님이 항시 계시면서 조금도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소멸도 없고 또는 조금도 변동이 없는 그런 것이 이른바 이런 내용이 사자후자 명결정설, 다시 변동이 없는 그런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이지만 석가모니 부처님 말고 어느 부처님이 계실 것인가? 이렇게 또 흔히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참다운 부처님 불교전문 술어로 말하면 법신法身부처님 법신부처님은 항시 영구히 계십니다.

 영구히 계시면서 부처님은 어디가 계시고 어디가 안계시고 그런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언제 어느 곳에나 부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그리고 천지우주가 사실은 바로 부처님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바로 진리眞理뿐이고, 진리란 것은 하나의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언제 어디나가 생생하게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바로 우주생명宇宙生命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아, 부처님은 언제 어디나 계신다 하더라도 나하고 별상관이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언제 어디나 계신다는 것은 사실은 특별한 사람한테만 부처님이 계시고 특별한 그런 처소에만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도, 나한테도 부처님이 분명히 내 몸 전신 내 마음에도 부처님이 생생하게 그대로 계신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다만 우리 범부중생이 자기 스스로를 잘못 추슬러서 자기 스스로를 잘못 닦아서 부처님이 발동發動을 못한단 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언제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나한테도 분명히 부처님은 생생히 살아서 움직이는 그런 부처님이고, 또 너한테도 그러는 것이고, 또는 언제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한테나 또는 징그러운 그런 독사한테나 어디나 부처님은 그대로 생생하게 계십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한계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여래상주 무유변역이라, 부처님은 조금도 변동이 없이 언제 어디나가 생생한 생명으로 해서 존재하신단 말입니다.

 또 부처님이라는 것은 만능萬能의 자리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도 자기 스스로가 번뇌煩惱라는 그런 독심毒心 때문에,

 번뇌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번뇌의 기본이 내내야 탐욕심貪慾心과 또는 불룩거리는 진심嗔心과 어리석은 치심癡心이 삼독심三毒心아닙니까.

제일 무섭고 제일 포악스럽고 한 것이 이것이 삼독심三毒心입니다.

 탐욕심과 또는 그런 조금 자기 기분이 내키면 자기 마음에 내키는 것에 대해서는 탐욕심을 내고,

 자기 마음이 안내키면 그때는 진심을 내고,   또 모든 존재의 실상을 그대로 모르는 것이 이것이 어리석은 마음,

 이것이 이른바 삼독심 아닙니까.

 삼독심 때문에 우리의 그런 본래적인 순수한 부처님성품을 우리가 오염汚染시키고 산단 말입니다.

 우리가 오염만 안시키면 우리 스스로 바로 그때는 똑같은, 석가모니釋迦牟尼나 다른 성자나 똑같은, 그러한 이른바 아주 순수한 부처님마음이 돼요.

 부처님마음이란 것은 아까도 얼핏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부처님 초기 아함경阿含經에 보면 그 성인들은 다 모두가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했어요.

 삼명육통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마음이 순수한 상태, 순수한 상태에 이르면 어떠한 누구나가 다 본래 순수한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신통묘지神通妙智가 삼명육통입니다.

 삼명육통을 다 했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우리 중생들이 순수하지 못하니까 순수하지 못하니까 우리 중생이 자기 스스로 자기 순수성을 오염을 시키고 약화를 시켜가지고서 우리가 아무런 신통묘지를 갖추지를 못하는 것이지, 정말로 순수할 때는 그 어느 누구나가 다 삼명육통을 다 한단 말입니다.

 그 증거로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陀羅票Dravya비구, 다라표 비구는 14세에 승려가 되어가지고서 16세에, 2년 동안에 공부를 마치고서 이른바 삼명육통을 다 했습니다.

 삼명육통을 다 해서 밤에나 일반 백성들이 찾아오면 밤인지라 어두우니까 그런 때는 자기 손바닥에서 광명光明을 내서 손바닥에서 내는 그런 빛으로 해서 훤하게 해가지고서 일반 밤에 오는 백성들을 안내를 했다고 그래요.

그런 것을 보나, 또 그 성저聖著라는 음광부飮光部(迦葉遺部)를 창시한 그분은(迦葉善歲:BC345~246) 7세에 단 일곱 살을 먹어서 삼명육통을 해가지고서 한 교단을 형성을 했어요.

 그래서 그 우리 중생들도 누구나가 다 그와같이 삼명육통을 충분히 할 수가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다만 순수성을 아까 말씀드린 삼독심으로 해서 오염을 시키니까 하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현대 같은 이렇게 아주 그야말로 물질 만능시대고 또는 특히 아주 기술과학이 이렇게 최고도로 발달되고 이런 때 있어서는 우리 인간들이 우리 중생이 그런 중요한 그러한 아주 소중한 것을 우리가 망각하기가 참 쉽습니다.

 그전에 그야말로 물질문명이 발달이 안되고 그런 때는 훨씬 더 우리가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가 있었지만 현대 같은 때는 모두가 다 하여튼 기계문명으로 해서 우리가 편리를 다 보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여튼 물질 아닌 것은 없는 것이고 물질뿐이라는 그런 사회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를 소홀하기 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따져보면 이런 때일수록 물질의 그런 기기묘묘하고 편리하고 이런 때 일수록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마음은 불안스럽기가 쉽습니다.

 마음이 불안不安스럽기가 쉽기 때문에 이런 때일수록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 같은 모든 것을 아주 근원적根源的으로 볼 수 있는 그런데다 우리 마음을 두어야만이 그래야만이 우리가 이른바 그야말로 마음의 혼란을 느끼지 않고 안정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가르침은 그런데 있어서 현대일수록 더욱 더 소중한 가르침으로 해서 우리들을 경각警覺을 시키고 있고,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우리 행동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정말로 그 오늘날 부처님가르침이 아닌들,  부처님 가르침 같은 소중한 가르침이 아니면 모든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아까 허두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주가 오직 이것은 하나의 생명이란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것은 이것은 이른바 가장 근원적인 대명제大命題입니다.

 하나의 생명자리에서 우리가 비추어보고 하나의 생명자리로 생각하고 그래야만이 모든 그런 판단이라든가 그런 것을 바로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자타自他가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타를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의 생명이란 근원을 몰라서 그럽니다. 

 그 장자莊子에서 보면 보통 지금은 이제 하나의 상식화된 그런 말입니다만 와우각상蝸牛角上이라, 와우각상의 다툼이라, 와우란 것은 이것은 하나의 달팽이 아닙니까. 달팽이 뿔이 양쪽에 두 개가 있어요. 달팽이 뿔이 2개 있어 가지고서 달팽이 뿔이란 것이 볼품도 없고. 그런데 달팽이 뿔이 서로 다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그것이 사소하고 그야말로 초라하고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장자가 아주 비유를 즉 말하자면 그때 장자 때도 나라가 그야말로 분립되어가지고 서로 다투고 모두 그랬겠지요.

 조그마한 나라에서 서로 옳다고 생각하고 전쟁으로 해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비참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장자 같은 그런 위대한 인물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마치 그런 조그마한 나라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모두 싸우는 것이 달팽이의 뿔이 서로 겨누고서 옥신각신하고 하는 것이나 같다는, 그렇게 아주 그야말로  허무하게 보였겠지요.

 그래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서로 다투고 서로 싸우고 그런단 말입니다.

 세상이 다 그야말로 그런 영원적永遠的인 차원 부처님 같은 차원이 사실은 가장 바른 차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가 지금 현재 어떠한 입장에 있든지 간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항시 근원적根源的인 차원 영원적永遠的인 차원이 가장 본질적本質的인 차원입니다.

 본질적인 차원에다 자기 행동을 비추어보고, 내가 참 부처님차원이라든가 영원적인 차원에서는 내 행동이 지금 어떻게 지금 돼있는가, 이렇게 반조返照해보고 우리가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됩니다.

 역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가 오직 이것이 하나의 생명이라, 하나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때는 자타가 없습니다.

 자타가 없다고 생각할 때 자기를 위해서 남을 해코지 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은 자기를 위해서 남을 우리가 해친다든가 또는 자기가 조금 잘나기 위해서 남을 폄하貶下한다든가 이런 것은 일반적인 세속적인 그런 데서 가치가 있을랑가는 몰라도 우리 생명자체의 그런 견지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생명자체에서 보는 그런 견지를 항시 마음에다 두고서 자기 행동을 반조해나가는 것이 가장 우리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또 그렇게 함으로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그런 만공덕萬功德의 자리, 어느 누구도 할 수 있는 삼명육통의 자리, 삼명육통의 자리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가장 중요합니다.

 그 나한테 갖추고 있는 순수한 그야말로 만능의 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서 그 사소한 것 때문에 우리가 자타를 가리고 자타를 그야말로 시비하고 또는 자기를 위해서 남을 우리가 폄하하고 이런 것은 이것은 자기 순수성만 차근차근 더 오염을 시키고, 또는 자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 갖추고 있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자기 능력能力을 우리가 그만큼 훼손을 시켜버린단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오직 모두가 다 만공덕萬功德을 갖추고 있는 하나의 순수생명純粹生命자리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본래의 자리가 우리 중생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망정 이것은 중생의 전도몽상에서 보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 중생이 바로 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은 우리를......

 현실생활에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몰두하다보니까 부처님가르침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역시 간과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식적인데서 머물지 말고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우리 생활을 반조返照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가 음성도 바꾸어지고 여러 말씀을 많이 드리게 되지 못해서 먼데서 오신 분들도 있는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본 법문의 글은 동영상 자막 작업을 위해서 큰스님 말씀 그대로 받아 정리한 글입니다.*


20020407-청화대선사 설법 성륜사 법성당

20020407-삼영불교음반 학무 유락재 촬영

20020407-정안 이성도 촬영

20020407-음성녹음 자훈 박병섭

20050508-본정 김영동 DVD동영상작업 및 mp3작업

20061203-만덕화 이주미 녹취

20061209-본정 김영동 워드정리

   


    <본문과 관련된 큰스님 친필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