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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14. 함평용천사법문

                           <제 14 호>

                   2001.9.16 함평용천사龍泉寺 꽃무릇축제법문


러분들이 안정이 되셔야 그래야 차분히 말씀을 드릴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 가을만큼은 우리 한국이 세계에서 제일 좋습니다. 저는 일본도 가서 있어보고 아 또 미국도 가서 있어보고 여러 곳 다녀봤으나 한국의 가을만치 이렇게 빼어나게 좋은 나라는 없습니다.

 그 이른바 금풍金風이 소슬蕭瑟하고, 금풍이란 것은 가을 서늘한 바람보고 금풍이라고 그럽니다. 금풍이 소슬하고 또 끝도 가도 없이 하늘은 높고 말입니다. 이른바 천고마비天高馬肥라, 하늘 높고 말이 살찐다는 그런 격언이 그 전부터서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천고마비가 아니라 천고인비天高人肥라, 사람 인자 살찔 비자 하늘 높고 금풍이 소슬하니 사람이 참 살찔 판입니다. 들에는 또 그 황금물결이 그 넉넉하게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 본래로 행복 되게 시리 태어났습니다. 태어나고 또는 우리 능력도 역시 행복을 충분히 향수 할만치 우리는 그러한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무지무명無智無明에 가리워서 그 무지에 가리워서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을 한단 말입니다.

 오늘날 인류사회를 우리가 살펴본다 하더라도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물질도 풍족하고 그 기계문명도 우리가 편리한만치 발달돼 있지만 우리 사람들이 바로 수용을 못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번에 잘 들으셔서 또는 텔레비전도 보시고 신문도 보셔서 알으시는 바와 같이 그 미국의 그런 테러폭발사태9.11 그것도 얼마나 무시무시한 그런 인간의 비극입니까.

 사람들은 그 원인을 여기가 있다 저기가 있다, 여러 사람들 여러 그 단체들에 대해서 원인을 지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의 그 어중된 그러한 원인에 불과한 것이고 근원적인 원인은 역시 인간의 무지무명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잘 몰라서 그럽니다.

 그 여러분들께서는 현재 공부들을 많이 하셔서 한 1000년 전에 있었던 그 십자군의 원정을 상기를 하시겠지요. 십자군의 원정이라,

 십자군의 원정은 어떤 것인고 하면 그 11세기 말부터서 13세기말까지 한 200년 동안에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이슬람국가를 아주 그 정벌하기 위해서  200년 동안에 그 7차례나 원정군을 냈습니다. 원정군을.

 원정군의 수가 한 700만이 된다고 그래요. 700만이 상상이나 되시겠습니까.

 지금 한국의 지금 무슨 면 무슨 면은 한 면 인구가 고작 만명 아닙니까. 만명인데 그  700배가 되는 그런 수란 말입니다. 그런 수의 원정군을 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이슬람교도를 아주 박멸시켜서..

 그 이유는 무엇인고 하면 팔레스타인 거기 가서 예수님의 묘가 있어요. 그 묘 땅이 지금 이슬람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을라고 그랬습니다.

 그 200년 동안에 7차례나 700만정도의 원정군을 내서 싸웠지만 결국은 성공도 못했어요. 성공도 못하고 희생은 역시 희생자가 인명희생이 사람목숨 잃어버리는 희생이 또 한 200만쯤 된다고 그래요. 그 얼마나 많은 인구입니까.

 광주인구가 인제 100만 좀 넘는다고 그렇습니다만 광주인구의 2배정도가 모조리 다 죽었다는 그런 계산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자랑스러운 불법佛法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래서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그 진리 아니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가르침이나 또는 이슬람의 그 교주인 마호메트 가르침이나 그분들이 다 성자기 때문에 다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현행된 그런 제도를 이룩한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다분히 문제가 있어요. 성인들 그런 가르침을 떠나서 이른바 집착을 많이 합니다.

 부처님 법문으로 하면 법집法執을 많이 합니다. 꼭 자기들 식만 옳다고 그럽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기독교내에서도 그 구교가 옳다 신교가 옳다 즉 다시 말하면 카톨릭이 옳다 프로테스탄트가 옳다 해서 자기들끼리도 또 30년 동안이나 서기 18세기에 싸웠어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이 바른 진리인가, 바른 진리인가를 우리가 확실히 알아두어야 자기가 믿는 그런 신앙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생기고 또는 이 다종교사회, 많은 종교가 서로 갈등하고 서로 공존하는 사회에 있어서 우리가 비교 비판하는 그런 슬기가 생긴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그 기본적인 상식이 없어놓으면 아, 우리 불교가 어떤 것이고 다른 종교들이 서로 싸운다 하더라도 그 원인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자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지킬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소중한 자녀들도 우리가 바르게 이끌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가르침은 다른 종교하고 특이한 점이 무엇인고 하면 그 열반경涅槃經에 나와 있는 삼법인三法印이라, 삼법인이라,

 그런 세가지 법의 표징이 있단 말입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고 하면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제행이 무상이라, 제행이란 것은 모든 것이 모든 그런 이루어진 이 현상 모두가 다 무상이라, 그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서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과 부처님가르침의 기본적인 차이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만 그 대두리를 말씀드리면 3가지 확실한 차이인데 그것은 한 가지는 제행이 무상이라, 모든 것이 그대로 머물지 않고서 항시 변화무쌍하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과 참다운 진리를 아는 사람의 차이도 거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아, 내 몸뚱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구히 이것이 내 몸뚱이가 아닌가, 내 재산도 역시 마찬가지고. 우리 대상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도 역시 항시 이것이 다 똑같은 물질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엄격하니 바른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모든 것은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순간순간 변화무쌍하단 말입니다.

 그 전에는 현대 자연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제행무상이다 해도 아, 그런가 보다 했지만 지금은 다행히 현대물리학이나 그런 현대자연과학이 그걸 다 증명을 해요.       

 여기 있는 이 탁자라든가 이 마이크라든가 이런 것도 역시 우리가 생각할 때는 쇳덩어리로 돼있고 나무로 돼있으니까 꽝꽝하게 변화가 안 되는 그런 고형固形으로 생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전자현미경을 놓고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나무가운데도 지금 각 각 원자原子가 움직이고 있고 말입니다. 쇳덩이 가운데도 원자가 지금 활동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의 시각視覺이 우리 중생의 그 때 묻은 눈이 그걸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사실을 사실대로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은 지금 가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금강경金剛經에 있는 부처님께서 그렇게 고구정녕苦口丁寧하니 말씀해주신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이 대상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이것은 다 꿈이요 또는 그림자요 허깨비요 물거품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마따나 현대자연과학이 다 증명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로 해서는 대단히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아, 그 전이사 우리가 물질을 쪼갤 수도 없는 것이고 물질은 물질인갑다 쇠는 쇠인갑다 하지만 지금은 하여튼 그 아무리 강도가 높은 다이아몬드 같은 것도 역시 그 안에는 원자가 지금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다 무상하다, 변화무쌍하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의 차이로 해서 두드러진 특징이고 그 모든 존재가 그와 같이 변화무쌍한 것이니까 내 것이다 네 것이다 또는 나다 너다 이렇게 고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아, 고유하니 어느 시간時間이나 어느 공간空間 속에 그것이 존재하고 있단 말이지 그냥 일초전이나 일초 후도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변화무쌍하거니 그땐 내 것이다 나다 내 몸뚱이다, 이렇게 고집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제법諸法이 무아無我, 모두가 인제 없을 무자, 나 아자, 아, 사실은 나라고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불교가 인제 다 무아라, 내가 없다, 모두 말을 잘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작 어째서 무아인가. 분명히 이 금덩이 같은 내 몸뚱이가 있는 것이고, 그 몸뚱이 우리가 사치하기 위해서 그 화장도 예쁘게 하고 또는 금패물도 달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아프리카인들 보면 그런 얼굴에 다는 그 패물도 여러 가지입디다. 귀에 달고 또는 코에 달고 모두 그렇게 해서 달아요. 우리는 그렇게 보기 싫게는 안 달아도 우리도 역시 지금 달라고 애쓰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필요 없는 데다 신경을 많이 쓰고 가장 중요한 자기 마음단속은 별로 않습니다.

 우리 주인공主人公은 역시 마음 아닙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엄격하니 현대 이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똑같은 것은 조금도 없고,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공간적으로 보나 시간적으로 보나 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놔서 제행이 무상이고 또 제법이 무아라, 나라고 할 것도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나라고 할 것도 없으니 너라고 할 것도 없지요. 우리 중생들이 나요 남이요 하는 것은 이것은 겉만 봐서 그럽니다.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이 없어요. 그것이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똑같아버립니다. 

 

 우리가 그 가난한 사람한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보시布施해야 되고 아픈 사람을 또 우리가 부조扶助하고 도와줘야 되고, 그런 것을 어려서 부터서 우리가 인제 도덕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 사람들이 나하고 본래가 다 다르지만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고 그러니까 이제 마땅히 더 나은 사람이 도와줘야 되지 않을 것인가, 이와 같이 당위적으로 의무적으로 그런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본래 본질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본래는 모두가 사실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나와 남의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성품性品에서 보면 나나 너나 또는 다른 식물이나 다른 동물이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란 것은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바와 같이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이나 일반 중생이나 또는 부처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가르침가운데서 대승적인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무엇인고 하면 이것만은 오늘 나오신 우리 불자님들이 꼭 명심해서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라, 하나의 생명입니다.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인도 힌두교의 우파니샤드Upanisad 고대인도의 철학서, 우파니샤드는 부처님도 그 우파니샤드 가르침을 참고로 많이 하시고, 우파니샤드는 굉장히 훌륭한 동양의 철학이고 종교입니다.

 우파니샤드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가 무엇인고 하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일체존재가 둘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아까도 제가 언급했습니다만 하나의 진리란 것은 이것은 비단 옛날에는 그 부처님진리라든가 또는 힌두교나 동양적인 그런 태극설太極說이나 그런데 가서 역설해왔지만 지금 현재는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이 증명한단 말입니다. 물리학이.

 현대물리학은 일체 존재가 쪼개고 쪼개놓고 보니까 드디어는 하나의 에너지Energy만 남는단 말입니다. 이른바 정기精氣만 남습니다.   

 그 원자로 쪼개고 또는 소립자素粒子로 쪼개고 쪼개다 보면 결국엔 나중에 남는 것은 다 텅 비어버려서 에너지라는 하나의 정기만 남는단 말입니다. 그것이 현대물리학의 지금 결론입니다.

 따라서 우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두가 종당終當에는 하나의 진리라, 하나의 진리는 무엇인가.

 여러분들 귀가 닳도록 많이 들으셨지요. 부처자 성품자 불성佛性이라.

 우리가 지금 염불念佛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주문呪文도 외는 것은 뭣 때문에 합니까. 그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불成佛을 위해서란 말입니다.

 불성을 깨닫는 것이 성불아닙니까. 염불하고 참선하고 화두話頭를 들고 우리가 별스럽게 여러 가지 그 무량법문無量法門이 많이 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그럽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따라서 아까 그 화엄경에서 예를 들어서 말씀해드린 바와 같이 그 부처란 자리, 그 불성이란 자리는 이것은.....

 현대물리학은 모두가 텅 비어서 다 공空이 되어버리고 에너지만 남는다, 여기까지는 알지만 그네들은 그 스스로 자기 생명의 진리를 증명을 못하니까 말입니다. 그 에너지가 무엇인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성자는 그것을 스스로 증명한단 말입니다. 도인들은 그냥 그 청정한 안목으로 해서 그 자리를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부처님이나 달마達磨스님이나 6조혜능六祖慧能스님이나 다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마음의 때를 다 녹여서 마음을 정화해서 그 우주의 근본자리를 훤히 깨달아버린단 말입니다.

 부처님가르침은 그냥 이론적으로만 체계를 세우고 그냥 이치理致로 아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바로 부처가 되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 부처님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영원적인 우주 생명자체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나님인데.

 예수 같은 분은 분명히 그분도 역시 청정하게 수행을 많이 해서 40일 동안 금식기도禁食祈禱도 하고 그래가지고서 하나님하고 하나가 딱 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하나님과 예수님과 둘이 아니라는 그런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 성인들 가르침은 근본바탕은 다 똑같은 것인데 뒤에 사람들이 그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자꾸만 파당派黨을 가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분열되고 엉뚱한 쪽으로 인제 방향이 그렇게 돌아지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든 법은 이것은 제행이 무상이라. 조금도 변함없이<항상恒常> 항시 변해마지않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제법이 무아라. 모두가 나라고 할 것이 없이 사실은 따지고 보면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고  또 한 가지 부처님가르침가운데서 다른 그 외도外道와의 차이가 무엇인고 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열반적정이라.

 이 말은 좀 어려운 말이나 사실 내용은 쉽습니다. 바로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 이런 뜻이 열반적정이란 말입니다.

 제가 한번 되풀이를 해드립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모든 것은 그 순간찰나도 변함없이<항상恒常> 변해서 마지않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인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이 모두가 다 이것은 그야말로 참 일매지게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잘못 봐서 자기 존재를 이것이 고유한 걸로 보는 것이지 그 본질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고유한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데 그 실상實相, 그 본래면목자本來面目자리, 그 본래의 자리가 즉 말하자면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또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때는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아, 진리眞理 쪽으로 말하면 진여眞如고, 아, 생명生命쪽으로 말하면 그때는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 불교가 다른 외도와의 근원적인 차이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오늘 여기 오셔서 이것만 잘 알으셔도 상당히 큰 수확이 되십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부처님가르침은 그렇게, 다른 종교도 세계적인 종교는 다 그런 도리를 갖추고 있지만 그런 도리를 불교와 같이 그와 같이 체계 있게 확연히 말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석가모니부처님 뒤에도 그 무수한 도인들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다듬고 자꾸만 다듬고 다듬고 해서 그 골수 정수가 즉 말하자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열반경涅槃經에서 말씀하신 그 제행이 무상이라, 모든 것은 이것은 변함없이<항상恒常> 조금도 고유한 것이 없이 변화해서 마지않는다 하는 제행이 무상이라,

 또 모든 것은 이것은 그 변화해서 마지않으니까 고유한 자기라고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어느 시간이나 어느 공간대에 존재하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참말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참말로 존재하는 것이 없으면 불교가 허무주의가 되어버리겠지요. 그 제행이 무상이요, 제법이 무아라, 이런 도리만 알면 그때는 불교는 허무주의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제행이 무상이고 제법이 무아지만 참말로 존재하는 생명의 실상, 생명의 본래적인 생명은 이것은 이른바 열반적정이라, 이른바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그 부처님, 부처님이 바로 불성인데 불성은 그러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은 여기 있고 저기 있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은 여기 있고 저기 있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나 너한테나 이 공간 속에나 어디나가 사실은 다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불교의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불교의 아주 다 몰아서 부처님말씀을 한말로 하면 그 천지우주가 다 그 불성뿐이다, 이런 도리란 말입니다.

 다른 빈틈이 있다든가 다른 것이 있다든가 하면 그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대승법문이 못됩니다.

나나 너나 원수나 이것이나 다 사실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번뇌煩惱가 없이 바른 청정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같이 봐져야 그 때 묻지 않고 보는 것이 됩니다. 성인들은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어느 것을 보든지 부처님같이 보신 것이고 우리 중생들은 자기 업장業障으로 본단 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아, 원수가 있고 무엇이 있고 자기한테 좀 좋게 하면 좋게 보이고 그러겠지요.

 우리가 사는데 있어서 어떻게 생활하는 것이 가장 행복幸福스러운 생활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이 항시 편안便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불안스러우면 행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이 불안스럽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이 가을하늘같이 맑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한계限界가 있지가 않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마음이나 부처님이나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이나 부처님이나 또는 모든 중생이나 이것이 셋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란 것은 국한局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들은 아, 나는 지금 김아무개인데 내 마음도 내 몸뚱이같이 지금 이렇게 제약되어서 갇혀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스스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 마음을 묶어놓는 것이지 우리 마음은 본래로 한도 끝도 없이 우주와 더불어서 광대무량廣大無量한 것입니다.

 여기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마음이 그 하루에도 그때그때 진심嗔心을 내고 탐심貪心을 내고 여러 가지로 변동이 많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중생이 잘못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심을 낼 것도 없고 탐심을 낼 것도 없단 말입니다. 끝도 가고 없이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마음뿐만 아니라 다 그렇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다 기독교를 믿으나 다른 종교를 믿으나 유교를 믿으나 다 마음은 똑같이 끝도 가도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자리인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알면 이슬람과 또 기독교와 또는 유대교도가 싸울 필요가 아무것도 없겠지요.

 그 잘못생각해서 자기들 종교만 옳고 다른 것은 이것은 다 마귀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좁은 마음도 역시 마음을 다 몰라서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는 심종心宗이라, 불교는 마음종교라, 이렇게 말씀도 한단 말입니다.

 아무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은 끝도 가도 없는 그런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자리가 우리 마음인 것이고,

 또는 그만 텅 비어서 광대무변하고 아무것도 없으면 또 허망하겠지요. 그러나 그 가운데는 그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모든 그런 공덕功德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 같은 사람은 아, 우리 부모님도 별로 배운 것이 없고 내가 금생에 나와서 학벌도 별로 없으니까 아, 내가 아는 것도 이거 시원찮는가? 이렇게 또 우리가 자비심自卑心을 이렇게 자기 스스로 자기비하를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누구든간에 학교교육을 받든 안 받든 또는 우리가 그런 그 몸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기가 곤란스럽든 어떻든간에 또는 뇌가 이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는 그 본래 그것은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그 아인슈타인이나 또 슈바이처나 그런 분들은 천재天才아닙니까. 슈바이처 같은 사람도 얼마나 참 훌륭합니까. 정말 훌륭한 신학자요 철학자요 또 의사요 음악가요...

 우리들은 한 가지만 하기가 어려운데 그런 분들은 하여튼 그 과거전생에 업이 가벼워서 철학자 신학자 음악가 의사, 그와 같이 다 겸했단 말입니다.

 그래서도 갖다가 자기 아내한테 대해서는 자기 아내도 훌륭한 사람이라 놔서 간호학을 연구하고 그래서 아프리카의 그 원시림에 들어가서 30년 동안 안 나오고 거기서 인제 그 원시림 속에서 아프리카 토인土人들을 갖다가 치료하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자비심이 많겠습니까.

 여러분들 다 잘 아시는 그 테레사 수녀 같은 분도 보십시오. 그 얼굴은 꼭 남자같이 울룩불룩하게 생겼지만 그래도 하여튼 그 자기 평생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을 위해서 봉사 하다가 가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분들을 생각할 때는 우리 스스로도 역시 참 저분들은 정말로 참 훌륭한 분이다, 아주 그 모범적인 분이다,

 그런데 아까 제가 마음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분들의 마음은 광대무변한 마음이란 말입니다. 본래 마음 그대로 썼습니다.

 우리 중생은 본래 마음 그대로 쓴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자기 몸뚱이, 자기 몸뚱이 하나 건사하고 자기 가족들 몸 건사하고 말입니다. 자기 재산지킬라고 애쓰고 자기 명예 때문에 그 때문에 봉사하고 말입니다.

 자기 당을 위해서 그냥 뭐 싸움도 하고 서로 그냥 그 여당 야당 그렇게 물어뜯기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들은 그것은 그 옹졸한 마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인연因緣 따라서 정치인이 되든 자기 입장이 어디 있든지 간에 내 마음만은 내 마음 나한테 가장 소중한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따라서 내 마음만은 본래 마음자리를 항시 간직해야 한단 말입니다.

 농사農事를 지으나 또는 자기가 지금 입장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자기 마음이 광대무변한 것이 내 마음이고 즉 말하자면 석가모니마음이나 예수마음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그런 천재마음이나 그런 마음이나 본래적인 마음은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개발하고 못하고 그 차이뿐인 것이지 본래 갖추어진 능력은 똑같이 한도 끝도 없는 그런 능력能力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행복은 절대로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있단 말입니다. 하루 세끼 잘 먹으나 또는 하루에 한끼 먹고 사나 또 한 사흘 동안 단식斷食하나...

 많이 먹는다고 그래서 행복스럽겠습니까? 그런 음식에도 우리 행복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재산도 역시 많다고 그래서 행복스러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의 사소한 조건에 불과한 것이지. 따라서 우리 행복이나 불행은 다 모두 우리 마음에 있단 말입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아, 저 잔디위에서 그냥 드러누웠다가 가만히 그때는 죽어도 행복스러운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인간이란 것은, 마음의 그런 종교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무수한 그런 성인들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할 것인가.

 

 그 제가 여기 올라올 때 제가 아는 스님이 얘기를 너무 많이 말고 한 40분 딱 그냥 끊고서 내려오십시오, 그래서 아 고맙네, 그렇게 하세, 그런데 이렇게 또 올라와 보면 여러분들 만나뵙기가 반가운 분들 만나뵙기가 사실 기회가 많지가 않지 않습니까. 자꾸만 말이 하고 싶어요. 그래서 조금 얘기를 더 하겠습니다. 그러나 많이는 안 할 랍니다. 너무 지루하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여러분들께서는 부처님 믿으시는 공부가 상당히 고되고  또는 아주 고행苦行이 되고 또는 부담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공부는 그 마음의 불안不安을 다 떨쳐버리고서 마음의 부담을 없애고서 마음을 그 한가롭고 가볍고 행복스럽게 하는 그런 공부입니다.

 가령 우리가 참선參禪도 하다보면 아, 처음에는 그냥 이렇게 앉기만 해도 앉기도 거북하고 아, 앉으면 그냥 이래저래 망상妄想이 많이 나오고 그러겠지요. 두시간 앉으면 한시간 내내 또 망상하다 판나고 누구 또 그 다소 미운 사람이나 있어놓으면 또 그 사람 미워하느라고 또 두시간 온전히 거기에 다 소일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다보면 자꾸만 하다보면 그때는 마음이란 것이 본래 마음자리가 고요하니 가라앉히고 가라앉히고 통일을 시키면 그때는 차근차근 정화가 되어옵니다.

 우리가 흐린 그 탁수도 가만히 두면 앙금이 밑에 가라앉고서 바닥이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그와 똑같아요. 그 이 생각 저 생각 하여튼 오만 생각 다하지만 그 통일을 시키고 가만히 두다보면 차근차근 그때는 마음의 앙금이 가라앉고서 바닥이 훤히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빨리 그렇게 맑게 정화를 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이른바 염불참선念佛參禪아닙니까. 염불참선입니다.

 다른 주문도 외고 또는 경도 외고 다 마음공부이나 그래도 가장 주장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가 염불참선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더러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염불과 참선이 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러는 또 싸우고 또 싸운단 말입니다.

 염불念佛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 참선 그 않더라도 염불하면 거기에 다 들어있지 않는가. 또 화두話頭들고 또 참선 가부좌  틀고 하는 사람들은 아, 염불은 그것은 방편공부고 타력적인 공부기 때문에 화두들고 공안公案 들고서 의심해야 참다운 참선이 아닌가. 또 이런 분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란 것을 그 원칙을 말씀하면, 여러분들 대체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란 경을 말씀 들으셨지요.

 육조단경은 참선의 교과서같은 경입니다. 그런데 육조단경에서 있는 6조스님말씀이 많이 나와있지만 육조스님께서 가장 역점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대들 마음을 일체삼신一體三身 자성불自性佛에 귀의歸依하라 이런 말씀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육조단경도 그냥 아, 건성으로 봐버리면 무엇이 무엇인지 몰라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그런 노장들은 자꾸만 여러번 보니까 말입니다. 대체로 그 핵심을 짐작한단 말입니다.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말씀이 제 말씀 듣고 여러분들이 육조단경을 가서 보십시오. 가장 중요한 법문이 무엇인고 하면 “여러 선지식들, 내가 지금 여러분들한테 말씀을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고 하면 여러분들이 스스로 여러분들 마음에서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을 깨닫게시리 하리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란 것은 우리 마음이 공덕功德이 한도 끝도 없지만 우선  그 간추려서 말하면 우리 마음에 가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 이런 뜻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법신法身이란 것은 마음의 근본자리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한 바와 같이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 광대무변한 마음자리가 법신法身인 것이고, 또 보신報身이란 것은 광대무변한 마음자리에 한도 끝도 없는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幸福이나 그러한 만공덕萬功德이 한도 끝도 없이 충만해 있는 그런 자리가 이것이 보신報身입니다.

 화신化身이란 것은 그 법신과 보신에서 일체 행동을 할 수 있는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그 모든 행위 모든 작용 이것이 화신입니다.

 부처님이란 그런 여러분들 개념가운데서 적어도 이 정도는 외두셔야 그래야 부처님 그 팔만사천법문을 공부하시면서 보람 있는 공부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육조단경은 이것은 참선의 교과서 같은 것이어요.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아, 참선을 소외할 수가 없는 문제 아닙니까. 헌데 그 교과서 같은 그 육조단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고 하면 그 삼신일불三身一佛에 귀의歸依하라, 이 말씀을 부처님께서 여러번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러면 삼신이 무엇인가. 여태까지 여러분들 부처님 믿으신다 하더라도 아, 삼신三身을 잘 모르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 부처님은 부처님인데 부처님이란 그 개념가운데 그 의미가운데는 세가지의 공덕功德의 속성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한 가지는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한 마음자리가 바로 법신자리인 것이고, 광대무변한 마음자리에 만덕이 갖춘 자비나 지혜나 행복이나 어느 것이나 다 만덕이 갖추고 있는 그 자리가 보신자리인 것이고, 또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작용이 이 화신자리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에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우리가 그 사소한 결국은 자기 개인이라든가 사소한 물질적인 그런 것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계발하는 즉 말하자면 인제 작업이 참선 염불입니다. 참선 염불인데 참선은 여러 가지 그 종파에 따라서 같은 불교도 원불교 같은 종파는 아, 묵조선黙照禪 그래서 잠자코 명상하는 아무 문제가 없이 명상하는 그런 쪽으로 하는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또 지금 일본사람들은 참선하는 방법을 3가지로 하고 있어요. 한 가지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묵조선黙照禪이라, 잠자코 명상하는 그런 쪽으로 하는 참선이 있고, 또 한 가지는 화두로 하는 어느 문제를 딱 놓고서 문제를 의심하는 그 화두공안선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이라. 화두공안선을 하는 그런 또 종파가 있어요. 그래서 그 화두 없이 잠자코 명상하는 그런 쪽은 조동종曹洞宗이라고 하고, 또는 화두를 가지고서 그 의심을 참구하는 그런 종파는 임제종臨濟宗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또 한 종파가 있는데 그것은 화두를 염불로 한단 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넉자를 화두로 해 가지고서 부처님을 바로 깨닫게 하는 그러한 종파가 있는데 그 종파는 황벽종黃檗宗입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그와 같이 고루고루 다 해요.

 헌데 저같이 지금 저는 조계종에다가 몸담고 있지 않습니까. 조계종에서는 주로 참선하는 방법을 주로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그런 쪽에다가 역점을 둡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해야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이 참선하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면 아까 구구하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하는 목적은 우리가 내내야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 떠나서 참선하는 목적은 없습니다. 다른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부처가 되니까 염불이란 것은 그 부처의 자리 그 부처의 자리를 그대로 바로 생각한 거란 말입니다.

 생각 염자, 부처 불자, 부처를 생각하는 것인데 우리가 지금 부처가 안보이지 않습니까. 안보이니까 우리가 아, 부처가 어디 가서 지금 계시다가 우리가 애쓰고 부처님 이름을 외면 우리한테 와서 가피加被를 주고 도와주시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때는 이것은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일반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알고 또 그 화두를 들어야 이것이 참다운 참선이고 염불하면 참선이 못된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역시 염불을 그냥 그마만치 밖에다 부처님이 밖에 계신데 우리가 밖에 있는 부처님을 우리가 아, 기도모시고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지,

염불의 본뜻은 그 부처라는 것이 내 마음의 본바탕인 동시에 바로 우주생명의 본바탕입니다. 부처란 것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주생명宇宙生命인 동시에 바로 우리 마음의 본래의 자리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렇게 왼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은 바로 염불참선입니다. 불자님들 깊이 외두시기 바랍니다.

 이래저래 필요 없는 것 가지고서 우리가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한국의 신라때 원효元曉스님이나 의상義湘스님이나 또 대각국사大覺國師나 보조국사普照國師나 서산대사西山大師나 그런 분들은 모두가 그런 수행법修行法이 조금도 치우침이 없습니다. 다 원만스럽단 말입니다.

 그러나 원만스럽지 못한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 식만 고집합니다.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닌 것이고 또는 교학과 참선도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교학으로 해서 참선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그래야 참선이 잘 되지 않겠습니까. 또는 아무리 교학을 많이 안다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우리 마음을 명상으로 해서 또 맑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이나 또는 염불이나 또는 교학이나 다 모두 하나란 말입니다.

 서로 더불어서 빨리 우리 본래면목자리 부처를 깨달아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 필요한 것이고 꼭 한 가지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우리 한국은 그 고려 때 중국이 송나라 때 그때 화두선이 그때 성한 때라놔서 그때 화두를 들여오기 때문에 그때 그냥 고려말엽까지 다 화두일변도가 돼버렸고 그 뒤에 이조 500년 동안에는 중국하고 교류를 못해버리니까 그것이 딱 굳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의 선방에서는 아, 마음 속좁은 사람들은 화두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이런단 말입니다. 그건 속이 좁아서 그럽니다. 부처님 법은 그렇게 좁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 가사 옴마니반메훔을 외든 또는 불경을 외든 말입니다. 또는 나무아미타불을 하든 또는 관세음보살을 외든 간에 그 부처님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니까 부처님은 언제 어디나 존재하는 바로 우주의 생명인 것이고 동시에 우리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래면목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도 그것은 염불참선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 않고서 부처님이 저 밖에 계신다, 이렇게 하면서 하면 그때는 아, 염불은 되어도 참선이 못되겠지요. 참선이란 것은 참선이란 그런 개념의 그런 규정이 말입니다. 개념풀이가 본래면목, 그 우주의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본바탕자리, 이 자리를 공부하는 것이 이것이 참선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무‘‘자를 무자 화두를 들고 무자를 의심을 하나 또는 옴마니반메훔을 부르나 또는 하나님을 부르나 말입니다.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아까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본래면목 자리, 본래 우리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우주의 본래 자리를 안 떠나고서 하는 공부는 모두가 참선인 것이고, 그 반대로 아무리 무자 화두를 하고 이뭐꼬 화두를 하고 또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그 본래의 자리를 떠나버리면 그때는 참다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알으시겠지요.

 부처님께서 하신 공부라든가 그 뒤에 나오신 그런 정통도인들 말씀은 다 똑같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저는 부처님말씀을 그대로 제가 옮깁니다. 제가 지어서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들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란 거기다가 그 초점을 두어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지금 용천사龍泉寺는 그 6.25 동란때 아주 그야말로 참 비극적인 하나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이 용천사 주변에는 지금도 역시 무주고혼無主孤魂들이 많이 있습니다. 비참하게 아무런 죄도 없이 그 시대의 하나의 그야말로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아무 죄도 없이 사라져간 그런 영가靈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영가들도 깊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영가들이여! 영가들도 역시 그 영가란 저승세계에서 빨리 떠나야 됩니다. 영가란 그러한 세계는 절대로 오래 머물 세계가 아닙니다. 저승세계는 스승도 없고 어두운 세계입니다. 어두운 그런 세계기 때문에 그 세계를 떠나기 위해서는 또 역시 중요한 공부를 해야 됩니다. 어떤 공부가 필요한가.

 영가들이시여! 자세히 듣고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가들이 쓰던 과거 몸은 지금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가들이 그 전에  업 따라서 잠시간 몸을 받아 있다가 인연因緣이 다하니까 영가들의 몸은 그대로 사라지고 영가들의 몸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생명자체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죽음이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정이不垢不淨라, 우리 생명자체는 영원히 죽음이 없습니다.

 왜 죽음이 없는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자체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란 것은 생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여! 영가들은 비록 사람의 몸을 받았다가 사람의 그 몸은 사라졌다하더라도 절대로 생명자체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가들은 과거에 쓴 몸이 내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마음을 떠나지 못하니까 영혼세계를 못떠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영가들이 사람으로 살던 그때 아버지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이런 권속도 역시 그때 잠시간 인연 따라서 만난 것이지 영원히 만날 그러한 아무런 아무런 건덕지가 없는 것입니다.

 영가들이 쓰던 재산이나 또는 집이나 또는 세간살이나 또는 패물이나 이런 것도 역시 그 몸으로 있을 때 인연 따라서 자기한테 붙어다녔던 것이지 영가의 몸이 없거니 그런 패물이나 재산이나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영가들이시여, 그러한 허망된 생각을 버리고서 오직 그 부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가들이여, 부처님은 영가들의 본래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분명히 천상天上에 태어나고 마음이 온전히 맑으면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천상도 분명히 존재하고 영원한 우리 모든 생명의 근본고향인 극락세계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시여, 부디 망상妄想을 다 떨쳐버리고서 영가들의 본래생명자리, 부처님만 생각하고서 한시 바삐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여 마지않습니다.

 

 오늘 우리 불자님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생명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우리 생명이나 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유대교를 믿는 그런 사람들이나 모두가 다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지무명을 없애는 것입니다. 무지무명을 없애지 못하면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런 싸움을 영원히 면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보복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가 같은 생명이거니 누가 누구한테 무슨 보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보복하면 다시 또 보복이 돌아오고 맙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본래생명자리 생명의 고향인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공부 염불공부 그런 공부를 하셔서 하루빨리 부처님 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 본 글은 동영상 자막 작업용으로 큰스님 법어의 사투리를 포함해서 구어체 그대로 받아쓴 글입니다.*


*2001년 9월 16일-함평 용천사 야단법석 청화큰스님 설법

*2001년 9월 16일-삼영불교음반 학무 유락재 촬영

*2005년         -DV작업 본정 김영동

*2007년 1월 31일-워드작업 만덕화 이주미

*2007년 2월 3일-워드정리 본정 김영동



* 염불 念佛

* 불이불 不異佛

* 불리불 不離佛

* 일상삼매 一相三昧

* 일행산매 一行三昧

* 반야바라밀 般若波羅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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