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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4. 금강륜

16. 동산반야회법문

  *동영상은 없음*     <제 16 호> 

                         20001104-동산반야회창립18주기법문


심이 사무친 우리불자님들을 만나 뵙게 돼서 아주 반갑고 감명스럽습니다.

 우리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한문 세대라서 한문을 가끔 말씀드리게 된 점을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화룡점정이란 것은 무엇이고 하면 용을 그려 놓고서 마지막 판에 그 이른바 용의 눈동자의 점을 찍는단 말입니다. 아무리 용을 잘 그렸다 하더라도 눈동자가 없으면 참다운 용은 못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용을 그려 놓고서 용의 동자를 찍으니까 이것도 전설적인 중국고사에 나오는 얘긴데 그 눈의 동자에 점을 딱 찍으니까  그냥 그 용이 생기발랄해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가버렸다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에 있어서 여러 가지 훌륭한 그러한 교리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심수 오묘하고 그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면에서 일체 만사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염불이 없으면 염불念佛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라 하는 그러한 소중한 개념이 없으면 마치 불교가 하나의 철학哲學으로 전락해 버리고서 참다운 종교적宗敎的인 구제역할救濟役割을 못해버린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점을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불교의 그 심수오묘한 가르침이 정말로 우리 인생의 보배롭고 다시없는 보배로운 가르침이지만, 그 염불이라 하는 그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또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운다하는 그런 가르침과 또 우리 이상향理想鄕인 극락세계에 우리가 태어난다 하는 그러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가 참다운 종교 역할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정도로 염불과 극락세계라는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정토삼부경에 있는 삼부경 가운데 하나의 경이 관무량수경 입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의 전체 내용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대강 말씀드리면, 관무량수경은 그 볼 관자, 무량수는 이것은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영생의 생명이 무량수 아니겠습니까.

 헤아릴 수없는 이른바 무량수라!  목숨 수자 인제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이 이른바 무량수인데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무량수불입니다. 영생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무량수불이라! 또 그런가 하면  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이름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그 아미타불이란 것이 이것이 우리 인간이 대상화 시킬 수 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생명 자체, 우주 생명 자체, 또는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체가 바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이름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서 이름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봐와 같이 영원한 생명 자체다. 이런 때는 무량수불인 것이고,

 또 아미타불 가운데는 자비慈悲나 지혜知慧나 모든 공덕功德이 한량없이 많다. 한량없이 지혜ㆍ공덕이 충만해 있다. 이런 쪽에서 의미할 때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빛 광자를 넣어 그 한도 끝도 없는 하나의 생명의 빛이란 말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무변광불無邊光佛이라, 무변이란 변자는 갓 변자인데,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해서, 한도 없는 그런 우주의 모두를 다 그 가운데 포섭해 있다는 이른바 공간성을 초월한 그러한 생명이다. 이런 때는 무변광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아미타불에 대해서 그 공덕功德이 하도 많으니까, 청정하다고 해서 청정광불淸淨光佛, 헤아릴 수 없다고 그래서 난사광불難思光佛,不思議光佛, 또 한도 끝도 없는 행복幸福이라 해서 그때는 감로왕불甘露王佛이라, 세상에 감로수라는 것은 그야말로 참 영생의 하나의 생명수가 감로수 아니겠습니까 불교에서, 그래서 영생하는 그런 바로 생명 자체다. 그런 때는 이른바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이름 자체에 가서 그와 같이 어떠한 공덕이나 불교의 공덕이 거기에 모조리 다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 우리의 육안으로 지금 보이지가 안는단 말입니다. 극락세계는 또 어떤 것인가. 극락세계도 분명히 우리 불교인들의 이상세계일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의 바로 마음의 고향이란 말입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우리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극락세계에서 와서 다시 극락세계로 간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고, 또 방편을 떠나서 사실 그대로 말하면, 이 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이런 것도 우리가 이해하기가 좀 곤란스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 혼란스럽고 그야말로 여러 가지로 해서 제약이 많은 아, 이런 사바세계가 어떻게 해서 바로 극락세계일 것인가?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의심을 품을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런 것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런 점을 제가 들어서 한 시간 동안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인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체적인 말씀은 다 못한다 하더라도 대강 중요한 것은 이야기 해 드릴 수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훌륭한 법사님들 특히 우리 동산반야회 회장님이라든가 여러 법사님들 가르침으로 해서 충분히 깊은 불교 소양을 얻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재차 한번 더, 저 역시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 드리는 내용도 있을 것입니다.


 그 우리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일반 외도外道와 우리 불교의 정도正道와 차이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간단히 말하면 삼법인三法印이라! 삼법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석 삼자, 법 법자, 도장 인이라, 삼법인이라!

 삼법인이 있으면 정법正法이라 말하는 것이고 삼법인이 없으면 정법이 아닌 외도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삼법인은 그러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대체로 다 아시겠지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것은 결국은 다 무상하단 말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그것은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무상은 내내야 없을 무자, 항상 상자 항상이 없다. 그리고 덧없다는 말입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이것은 고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인간 존재의 눈에 비치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바꿔 말해서 유위법有爲法이라, 상대 유한적인 법은 모두가 이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상만 있는 것이지 그 성품性品이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금강경을 자주 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 如夢幻泡影이라, 그 상대 유한적인 법은 대상화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은 여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또는 거품이요 그림자 같이 실체가 없단 말입니다.

 일체 만법은 그와 같이 사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은 제행무상이란 말입니다.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은 그러한 제행무상 같은 명백한 가르침이 별로 없습니다. 어렴프시는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 단호하게 명백하니 그렇게 말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외도와 정도와의 차이가 그런데 가서 있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이 현상적인 이 상대 유한적인 유위법 이것은 모두가 무상하단 말입니다. 고유한 것 없습니다.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습니다. 이른바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어느 공간에 무엇이 고유하게 무엇이 존재하고, 어느 시간에 있어야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식의 그런 패턴이라는 것은 내내야 그런 시간성ㆍ공간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 제행무상이라는 그 소식을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천재적인 근대 물리학자를 가리켜서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그」, 보어하고 3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3사람이 천재적인 현대 물리학자 3사람의 말이 제행무상이란 소식을 방불하게 말했어요. 부처님 가르침의 연기법을 방불하게 말했습니다.

 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라, 이것도 일체 존재란 것은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있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不確定의 원리原理도 역시 이것도 일체 존재의 그러한 운동량을 제대로 바르게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위치를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보통 눈에 보이는 것은 대체로 어름어름하게 우리가 측정이 되겠지마는 이른바 미시적인 전자라든가 중성자나 그러한 미시적인 단계에 이르면 측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운동량을 바르게 측정하려고 생각하면 그때는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확률적確率的으로 말하는 것이지, 확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보어는 상보성相補性의 원리라, 모두가 서로 어울려서 무슨 모양을 내는 것이지, 단독으로 모양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인연因緣 따라서 인과 연이 합해져서 모양을 내는 것이지 그 고유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차근차근 현재 천재적인 물리학자가 우리 불교의 그런 인연법因緣法을 그대로 말씀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다는 말씀은 못하겠지요.

 왜 다 말씀을 못하냐 하면, 그네들은 그 인연법의 본래적인 본래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다만 인연법을 상대적인 인연 상황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까지도 분명히 깨달은 분이 부처님이고 역대 조사祖師란 말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그것을 모르면 그때는 불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 불교의 정도 이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고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모두가 상대적으로 잠시간 상을 냈을 뿐입니다. 상 그것은, 상은 현상적이기 때문에 실재實在가 아닙니다. 실체實體가 아니기 때문에, 아까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거품 같은 것입니다. 실재로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법무아諸法無我입니다. 모든 존재는, 제법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를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무아라, 나라고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거니 내 소유所有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부처님 법은 명백합니다. 부처님 법은 그 어중된 것이 없습니다.

 금강경에서 보면 부처님 법은 여어如語라, 같을 여자, 말씀 어자 여어라, 진리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진어眞語라, 참 진자, 말씀 어자, 진리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무이어無異語(不異語)라, 없을 무자, 다를 이자, 다른 것은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꼭 진리만 말씀하신 것이고, 또는 불광어不誑語라, 아니 불자, 속일 광자, 어느 누구도 속이는 말씀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진리 그대로 말씀하시고 또 바로 그것이 진리고, 또 진리 아닌 것은 조금도 없고, 또는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은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열반경27涅槃經二十七에 가서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인용합니다.  사자후자獅子吼者 명결정설名決定說이라, 사자후라는 것은 그야말로 사자가 한번 포효를 하면 모든 짐승들은 다 그 앞에서 쩔쩔매고 뇌가 망가지곤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듯이 부처님 말씀은 사자후같이,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같이, 모든 그런 외도나 모든 삿된 것을 다 그대로 절복折伏을 시킨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決定說이라,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꼭 사실대로 말씀했습니다. 사자후 같은 결정설이 무엇인고 하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불성을 다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아, 그러면은 사람은 유정중생有情衆生이니까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일반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은 어떨 것인가?

 불교에서 일체중생을 말할 때는 다만 우리 인간 존재만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山河大地라든가 하나의 천체天體라든가 어떠한 것도 일체중생의 범주 가운데 다 들어갑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심장에 가지고 있거나 뇌에 가지고 있거나 하는 부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 불성이란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분명히 있지만은 지금 안 보이지 않습니까.

  불성이란 것은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 이것은 우리 마음의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바로 우주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은, ‘모든 존재가 바로 불성이다.’ 이 말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말씀이, 부처님의 사자후 같은 결정설이고 확실한 단호한 그런 진리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있는 가르침이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그 여래는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상주라, 항상 상자 머물 주자, 부처님이 항시 머물면서 무유벽역이라, 조금도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더러는 상대적인 그런 분야를 얘기를 했습니다만은 부처님의 대승불교는 바로 우주 자체를 하나의 부처님의 생명 덩어리로 봅니다.

 여래상주 무유변역이라, 그 여래는 부처님인데, 부처님이 항시계시면서 무유변역이라, 조금도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오늘 계시다가 내일 안 계시고 그런 것이 아니 단말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부처님은 존재하는 생명자체이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아까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이셨지요. 반야심경에 그 모든 법이 공해 버린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이 반야심경에 여실히 나와 있습니다.

 그 물질을 구성한 지수화풍地水火風 각 원소라든가 그런 것도 다 공한 것이고, 또는 우리 관념을 구성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우리 감각으로 느낌이라든가 생각이라든가 의욕이라든가 분별시비하는 그런 판단이나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사실은 우리가 근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비어 있습니다.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란 말입니다. 오온개공은 현대 물리학보다 훨씬 철저한 우주물리학입니다.

 모든 것이 공해 버린 그 자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모두가 공해 버렸거니, 그 남(生)도 없고 죽음(滅)도 없단 말입니다.

 무엇이 있고,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고 상대적인 문제가 되어야 그래야 생사가 있고 남(生)도 있고 죽음(死)도 있고  그런 것이지, 모두가 공한 그 자리, 제법이 공한 그 자리는 생사가 없단 말입니다.

 또는 더러운 것도 청결한 것도 없습니다.(不垢不淨), 보고 더럽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물질이 되어야 그래야 인제 더럽고 더럽지 않고가 있을 것인데, 물질이 아닌 순수 생명이기 때문에 더럽고 또는 청결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더하고 덜함도 없습니다.

 

 우리가 염불하고 극락세계를 추구할 때는 이것저것 다 떠나서 순수하게 감성感性으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의 교리를 따질 때는 그때는 정말 명석한 철학적인 사색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사유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고도한 철학이란 말입니다.

 칸트철학이나 니체철학도 미처 모르는 소식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공부를 많이 하셔서 칸트의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란 개념도 아르시지요. 물자체라, 물질의 본래 무엇인가? 이것이 물자체인데, 칸트 말이, 그 물질이 본래는 이것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중생의 인식주관認識主觀으로는 볼 수가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물자체物自體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지금 본다는 것은 아까도 말씀 드린 봐와 같이 우리 인간 존재, 인간 정도의 업장業障을 가진 우리 인간의 눈으로 지금 보는 것이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의 실상實相을 보시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가상假相을 봅니다. 허상虛想을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유한적인 존재란 것은 결국은 꿈이요 허깨비요 거품이요 그림자나 똑 같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이 현대 천재적인 물리학자가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우리가 측정할 라야 측정할 수가 없다.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것이다. 이런 자리를 분명히 증명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에 그 허망 무상한  측정할 수가 없는 그 자리가 아니라 정말로 참말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참말로 있는 것이 아까 제가 열반경27에 있는 여래상주 무유변역이라, 부처님께서는 항시 존재하신단 말입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란 뜻이나, 부처님이란 뜻이나 똑 같습니다.

 불교가 하도 여러 가지 개념이 많으니까 우리가 혼동을 일으키기가 쉽습니다만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그 불성이라고 말 하나, 또는 법 법자, 몸 신자, 법신法身이라고 말하나 또는 부처님이라고 말하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은 이것은 제법이 무상한 것이고, 또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소유라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나라는 것도 이것도 역시 진리에서 보면 허망한 것이구나, 내가 허망한데 하물며 나한테 붙어 있는 아,내 권속이고 내 재산이고 내 지위고 이런 것도 사실은 허망한 것이구나, 이렇게만 분명히 알아도 우리가 집착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확실히 아직은 아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수행修行을 통해서 우리가 체험體驗해야 되는 것인데, 체험을 못한다 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만이라도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따지고 따지고 보면 결국은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고, 또는 모두가 무상한 것이니까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소유라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가 버리면 이것은 제법이 공이라는 이런 도리는 알아서 공 소식은 좀 안다 하더라도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우리가 긍정하기는 어렵단 말입니다.


 그리고 불교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무엇이고 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모든 것을 다 초월해서 영생永生의 행복幸福을 우리가 충분히 얻을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제행이 무상하고 모든 존재는 그때그때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제행이 무상하고, 또 그러기 때문에 제법이 무아라, 나라는 것이나 저것이나 어떤 것이나 고유한 존재가 없단 말입니다.

 제법이 무아라! 따라서 내 소유도 없는 것이고 내 권속도 잠시간 인연 따라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이지 꼭 영구히 내 권속이 될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같이 만나 있다 해서 내생도 꼭 같이 만날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업을 똑 같이 지어 놓으면 범부 중생으로 같이 태어나고 그러겠지요.

 아무튼 금생에 잠시간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만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제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모든 법(諸法)이 나랄 것도 없고 내 소유라고 고집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허망무상한 것은 허망무상하지만, 그 진실한 본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영생불멸한 불성 열반이란 말입니다.

 영생불멸한 그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그 모든 존재의 본체는 내가 여가 있고 저만큼 가서 영생불멸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대로 있는, 이 현상 이대로, 이 현상의 실체 자체가 영생불멸의 실체란 말입니다.

 그와 마찬 가지로 우리 인간이라든가 우리가 사고하는 모든 것이 허망무상하지만

우리 인간 존재나 그 허망무상한 그 본래의 참다운 자리가 이른바 부처님의 법신法身이고 바로 아미타불阿彌陀佛란 말입니다.

 

 또 그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이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염불수행자念佛修行者 인중분다리화 人中芬陀利華라! 인중人中은 사람 인자, 가운데 중자, 사람 가운데 분다리화芬陀利華라, 분다리화는 가장 청정한 향기로운 연꽃이 분다리화입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참다운 향기로운 연꽃 같은 그런 존재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도와 정도와의 차이를 알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나 설사 그런 철학적인 깊은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영생불멸한 실존 자체, 실상 자체인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자는 그대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과 똑같단 말입니다.

 인중분다리화라, 그러기 때문에 관음세지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대세지보살 그런 상수보살, 그 보살들 가운데서 보살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수승한 위대한 보살이 내내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런 보살들 아닙니까. 그 보살들이 위기승우라, 그러데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나 그런 위대한 보살들이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는단 말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심오한 뜻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뜻을 모르고 한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그 자체만으로 인중분다리화라!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동시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보현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가장 훌륭한 승우勝友라, 이길 승자, 벗 우자, 가장 훌륭한 벗이 승우입니다.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아미타불 또는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봐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개념 가운데 가장 고귀한 그런 개념입니다.

 불교적인 전문 술어로 말하면,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없을 무자 날 생자, 그 무생이라, 생사를 초월한 보주명호라, 보배 구슬 같은 그런 이름이란 말입니다.

 무생청정보주명호라!

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위대한 이름 이것이 부처님 이름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서 그 우주의 실상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최상의 이름을 갖는 부처님이니까, 그 이름 가운데 부사의不思議功德이 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하면, 삼세제불三世諸佛이 본래 의지할 곳이고, 또한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기도 하고, 가장 무섭기도 하고, 가장 자비스럽고 가장 지혜로운 이름이기 때문에, 어떤 신장이나 나쁜 귀신이나 좋은 귀신이나 하늘의 천상에 있는 천신들이나 모든 존재가 다 나무아미타불을 아미타불을 숭앙하고 받들고 지키고 그런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뜻도 모르고서 나무아미타불 한번 왼다고 생각할 때는 그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으로 해서 모든 신장이 우리를 다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이 또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이름입니다. 가장 권위가 있고 두럽고 하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얼씬도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의 부사의한 명호를 우리는 간직할 수 있는 인연을 가졌습니다.


 불교를 믿는다 해도 염불은 방편 가르침이고, 화두를 들고 선방에서 애쓰고 의단疑團을 품고 해야 참다운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염불 공부와 비교할 때는 사실은 비교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고 하면 설사 우리가 선방에서 몇 10년 동안 화두를 들고 인제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단을 품는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마음이 화두하는 마음 밑바닥에 깔려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가 참으로 익어지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한다 해서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하는 마음이 왜 깔려야 하는 것인가? 우리 마음의 주인공, 참선이란 것은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공부가 참선 아닙니까.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6조 혜능대사六祖 慧能大師의 가르침도, 선이라는 것은 본체를 안 떠나야 선이란 말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본체를 떠나 버리면 그때는 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설사 우리가  ‘이뭐꼬’ 화두를 드나, ‘똥막대기(乾屎橛)’ 화두를 드나, 어떻게 들든 간에 똥마른막대기나 이뭐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산란스런 마음을 통일시켜, 본래 우리 생명이 부처이고 바로 아미타불인데, 부처를 찾고자 해서 우리가 임시로 의심을 품은 것이지, 의심 그것이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됩니다. 그래서 화두를 드는 것도 좋기야 참 좋은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빨리 타파해서 의심이 없는 그 자리, 의심이 없이 부처님을 확실히 확신하는 그 자리로 빨리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서 화두를 드는 하나의 의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본말이 전도가 돼서, 그 의심 그것이 거기에 붙은 것도 아닌 것인데,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의심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의심이 있으면 신앙이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 100% 그대로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 그런 증거로 달마스님도 의심하란 말 한 마디도 안 하셨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더라도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마조스님이나 백장스님이나 또는 임제스님이나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중국 남송 때 대혜스님께서 비로소 인제 그 방편으로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우리 주인공을 찾는 그런 하나의 방편으로 해서 의심하란 것이지 거기에 무슨 방편으로 낀 것이지 그것이 절대로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우리 한국에서는,

 그 6조 혜능스님이나 그 뒤에 마조스님 백장스님 황벽스님 또는 임제스님, 그 분들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사람 마음 가리켜서 마음 깨닫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쪽의 선법은 차근차근 이울어지고,

 그 남송 때 대혜종고스님이 낸 화두법이 그 당시에 융성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 때입니다. 고려 때 그런 법이 한국으로 수입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국 자체는 또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아닙니까. 그 명나라 때 불교가 상당히 융성했어요. 그 명나라 때는 4대 고승이 있습니다.

 명나라때 4대 고승이 누구인가 하면 운서주굉雲棲株宏1535~1615, 감산덕청憨山德淸1546~1623, 자백진가紫栢眞可1542~1603, 우익지욱藕益智旭1599~1655하는 분들인데, 그분들이 명나라 때 4대 고승이어요.

 그분들이 모두가 다 화두를 염불로 했습니다. 아미타불을 다 화두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그때 아미타불을 화두로 하는 염불선, 그 때 융성한 법이 한국에 들어왔으면 오직 좋으련만, 그 때가 이조 오백년 때입니다. 이조 오백년 때는 우리 불교가 중국과 교류를 했습니까? 이조 오백년 동안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가 교류를 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의 교화를 위해서나 우리 불교의 참선을 위해서나, 굉장히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 오백 년 동안 중국과 교류를 못했습니다.

 명나라 때 4대 고승들이 화두를 염불로 하는 그런 풍조가 한국에 쑥 들어왔으면, 지금 한국 선방에서 그 화두 한다고 끙끙 앓고 의심만 하는 그런 풍조는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한 봐와 같이 저는 화두를 비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100% 의심 없는 그 자리, 마조 같이 백장 같이 그렇게 해서 믿으라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 내가 염불을 하는데 기왕이면 나도 염불선을 하고 싶다.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러시겠지요. 저 같은 사람도 이제 일반 염불과 염불선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문제 가지고 고민도 하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염불하신 분들은 기왕이면 염불 뿐만아니라 염불선을 한번 해보았으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신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염불선의 체계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염불도 꼭 자기 식으로 소리를 나무아미타불 자기식으로 자기 의견대로만 해야 한다는 그런 분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염불은 꼭 고유하니 어떤 음정에 따라서 그렇게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 내도 좋고 안내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계행 지키면서 염불하면 더욱 좋고,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못한 대로 염불해도 좋고 말입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소리를 내나 안내나 염불하는 것은 어느 때나 좋습니다. 장사할 때나 밥 먹을 때나 어느 때나, 밥 먹을 때는 소리를 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염불念佛이라는 것은 생각 염자, 부처 불자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생각하는 것은 아, 소리를 안내고 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따라서 염불이란 것은 소리를 내나 안내나 어디서나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빨리 해도 무방한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보면, 극락세계에서 꼭 어떤 식으로 하란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그야말로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우리 사람 같이 이와 같이 이런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모두가 광명세계란 말입니다. 몸도 광명몸입니다.

 극락세계 중생은 무극허무지신無極虛無之身이라, 그 물질이 아닌 광명으로만 된 무량의 몸이란 말입니다.

물질 아닌 몸이니까, 극락세계 중생은 개체個體인 동시에 바로 전체全體입니다. 자기 몸과 우주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몸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사실은 극락세계 중생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우리 존재도 우리가 똑바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제법의 공 자리를 느끼고, 제법 공 자리 이것은 그냥 우리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제법 공입니다.


 따라서 제법의 공자리를 느끼고 불생불멸한 그런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이대로 이 몸도 역시 개체인 동시에 전체입니다. 개체와 전체는 절대로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과법因果法을 알면 그냥 짐작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이른바 중중무진重無盡이라, 중중무진이란 것은 모두가 다 한 고리로 얽혀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몸인 것을, 우리 중생은 전체를 못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인연법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다 본래로, 우리가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하나의 몸인 것을 압니다. 우리 중생은 그 바탕을 보지를 못하니까. 성품을 보지를 못하고 우리 중생이 상만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 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로 볼 수만 있다면, 바로 불수만 있으면 저절로 참다운 대비大悲가 나온단 말입니다. 참다운 자비慈悲가 나온단 말입니다. 참다운 무주상행無住相行을 하지 말라 해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남한테 베풀면서 나라는 상을 내겠습니까. 따라서 그 근원적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염불念佛을 한다 하더라도 일반 보통 염불과 염불선의 차이가 무엇인고 하면, 염불선念佛禪이란 것은 근원적인 문제, 본체를 여의지 않고서 염불하면 그것이 염불선이 됩니다.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그와 같이 내가 아직은 정말로 깨닫지를 못해서, 내가 증명證明을 못해서 천지와 나와 둘이 아니다는 소식은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는 본래로 불생불멸이고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가 바로 내 자성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가 참 자기다. 이렇게 해서 그 진여불성 자리를 안 여의고 염불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염불 참선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저 밖에, 내 밖에 저기 계신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는 염불은 염불선이 못됩니다. 보통 염불은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염불 참선이 못 된다 하더라도, 또 염불을 열심히 하다 보면 마음이 모아진단 말입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본래가 둘이 아닌지라, 결국 그때는 본래적인 우주의 본 바탕인 진여 불성과 하나로 계합된단 말입니다. 우주의 본체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혼란한 시대아닙니까. 그 산업사회란 것이 그 무서운 사회 아닙니까. 그 산업사회라는 것이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고, 또 그 물질이란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인데 사람 욕심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무시무시한 경쟁사회가 안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 사람끼리 화해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참 별스러운 사회적 폐단도 나오고 또 환경 파괴가 나오고 그러겠지요.

 모두가 다 바른 진리를 모르는데서 오는 무명심에서 오는 필연적인 폐해입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가 하면, 모든 존재의 근원에다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생명의 본체에다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생명의 본체 이것이 불성이고 법신이고 또 이것은 진여라, 진여불성이라, 그 부처님께서 마르고 닳도록 말씀하신 법신ㆍ진여ㆍ불성 또는 실상ㆍ실재, 또는 주인공, 이런 말씀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참다운 대승불교가 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열반이고 바로 극락입니다.


 그래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불생불멸한,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우리가 진리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이대로 사바세계 이대로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 몸이 이대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전체 우주의 생명과 내 생명과 이렇게 뿔뿔이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생명인 것을 우리 본바탕을 보지 못하고서 이렇게 상만 본단 말입니다. 들 떠 있는 상만 보기 때문에 몽환포영 같은 꿈이요 그림자요 거품이요 그림자요 우리 중생은 지금 그것만 봅니다. 우리 중생이 인식 능력이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업장 때문에,

 우리가 마음이 통일되어서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정작 진여불성을 깨달은 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근본 바탕을 본단 말입니다. 그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너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나와 둘이 아니고 모두가 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해서 다 통일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꼭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사윤회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이 염불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버려야 됩니다.

 삼매라는 것은 내내야 참선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개념상 억지로 따져보면 좀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삼매란 말이나 선이란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우주의 본 생명, 진여불성과 하나 되는 것이 이른바 참선의 목적입니다. 삼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우리 산란스런 마음을 쉬어서 우주의 본바탕과 하나가 되는 것이 이것이 삼매의 목적입니다.

 허나 그런 삼매 또는 그런 참선 가운데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가? 기왕이면 우리 불자님들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하시고 싶어 하시겠지요.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삼매念佛三昧입니다. 조금 공부를 해 본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 별별 앉아보면 오만 생각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그 생각 다 거두어서 하나로 딱 모아서 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게 어려우니까 마지못해서 화두란 법도 잠시간 나왔단 말입니다.

 천재적인 분이라든가 과거전생에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마조나 임제나 백장 같이 그냥 바로 즉시에 직지인심이라, 그냥 바로 내가 부처란 것을 느끼고 앉을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 범상凡常한 사람들은 그 여러 가지 잡다한 정보, 정보과다情報過多 시대에서는 좀처럼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이른바 삼매 참선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때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화두 참선 할 때도 굉장히 병이 많이 걸려요.  참선병參禪病이라 합니다. 화두를 낸 대혜종고스님이 화두10종병을 말씀 하셨고, 거기다가 보조스님이 4가지를 보테서 화두할 때 생기는 병이 14가지로 말씀한 법문이 있곤 합니다. 그와 같이 화두에 따르는 병은 많이 있는데, 아, 그러면 병을 어떻게 퇴치할 것인가? 그 병을 다스리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그 참선할 때 상기上氣가 되고 여러 가지 참선의 병이 많지 않습니까. 병을 다스리는 것이 부처님 법으로는 참 쉽습니다. 이것저것 다 놔두고서 염불하면 다 고쳐집니다.

 머리가 상기되어서 그냥 머리가 곧 깨질 듯해도, 그 의심하는 마음을 놓고서 천지 우주가 무량의 공덕을 갖춘 부처님으로 충만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얼마 안 되어서 다 풀려갑니다.

 그러고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는 그야말로 아, 행복감이라든가 몸도 마음도 가볍고 그런 것을 느껴야 되겠지요. 그 이른바 법회라! 법에 대한 그런 기쁨도 역시, 법에 대한 기쁨이 없이 공부를 오래 하기가 곤란스럽습니다.

 법에 대한 기쁨도 그 극락세계, 극락세계는 우리 이상향, 그 극락세계의 장엄스러운 그 광명 세계,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추어진 영원한 고향, 영원한 우리 고향에다 마음을 두고 우리 이미지를 영원한 고향에다 두고서 항시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갈등은 그때그때 바로 해소되는 것입니다.

 또는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봐와 같이 아미타불의 그런 명호는 무생청정보주명호라, 바로 이름자체에 가서 일체 공덕이 갖춰져 있어놔서, 우리 참선병參禪病이라든가 우리 세간의 병이라든가 정말로 마음만 모아지면 다 치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때그때 곤란스러울 때도 많이 있었어요. 더러는 금방... 무던히 많이 살았으니까 생명이 참 그야말로 혼수에 빠질 때도 있고, 그런 때도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지속시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다 풀려갑니다.


 이 우주란 것이 그 부처님의 공덕으로 충만해 있어서 정말로 마음이 부처님한테 모아지면 차를 타면 차 엔진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있고, 바람 불면 바람소리도 나무아미타불하고 있고 말입니다. 시냇물 가에 가면 시냇물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신묘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다말다 하다말다 그렇게 마르십시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봐와 같이 소리 낼 때는 내도 좋고, 소리 내는 것이 훨썩 좋습니다. 고성염불高聲念佛 10종 공덕 가운데도 아, 염불공덕 하나에 가서 천마경포天魔驚怖라! 그 나무아미타불 염불소리를 나뿐 귀신들이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우리한테 침범을 못합니다. 동시에 선신善神들은 법을 지키려고 해서,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나 가장 소중한 공부 방법이, 또는 우리 마음을 가장 쉽게 통일시키는 방법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법희라, 법에서 느끼는 행복, 또는 선열이라, 마음이 통일되면 통일된 데서 느끼는 행복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꼭 무슨 소리를 내야만하고 안내야만하고 그런 한계를 지울 필요는 없습니다. 소리 내면 낸 대로 좋고 안내면 안 낸 대로 좋고 또는 아까도 말씀 드린 봐와 같이 기왕이면 고기를 안 먹고 하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먹고 싶으면 먹고도 하는 것이고, 그러나 고기를 안 먹고 계행을 지키면서 하면 훨썩 더 효험은 더 있습니다. 남하고 싸울 때도 좋고 말입니다. 어느 때나 아무튼 허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본래 마음자리로 차근차근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그 순간도 놓치지 말으시고 우리의 필경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 영원한 고향은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어느 때 가도 극락세계는 꼭 가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깨달아 버리면 바로 이대로 이 자리에서 극락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다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극락세계의 이미지를 놓치지 마시고서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염불해서 다시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본사아미타불!

<질문 1, 답변>

  실상염불實相念佛이나 우리가 그 참 나무아미타불를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그런 염불이나 다 대동소이한 것인데 그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봐와 같이 그 우주 자체가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실상이 됩니다.

 구분을 세우지 않고 본래本來로 우주宇宙라는 것이 하나의 부처님 생명 덩어리인데, 따라서 거기다가 마음을 두고서 염불을 하면 실상염불實相念佛이나 그야말로 관상염불觀想念佛이나 모든 염불이 거기에 다 포함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일이  그런 자리를 항시 의식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선 이념적으로 모두가 다 어떤 것이든지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 이대로 극락세계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실상이기 때문에 우주의 실존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서 염불을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봐와 같이 실상염불 또는 관상염불 무슨 염불 거기에 다 포함이 됩니다.

  <질문 2, 답변>

 좌선坐禪이라는 것은 바로 그때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의미 합니다. 그러니까 자성미타自性彌陀라 내 자성 내 본래면목이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뜻이니까. 그와 같이 자성을 여의지 않으면 결국은 다 똑 같아 버립니다. 여의면 그때는 그것은 화두를 들어도 참다운 화두가 못되는 것이고 염불을 해도 그 때는 참다운 염불이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제 자성을 안 여의면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동산반야회 창립18주년 기념법회에서 청화대종사께서 설하신 귀중한 법문입니다. 큰스님의 깊은 뜻을 그르칠가 염려되어 구어체 그대로 정리했습니다. 本淨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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