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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24호 부처가 되기 위해서 지켜야 될 보살의 계

금륜 24호 불기 2546년 9월 】



            

부처가 되기 위해서 지켜야 될 보살의 계율



                    

이 글은 2002년 8월 4일 성륜사 정기법회에서 하신 큰스님 법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대단히 희유한 선지식들이십니다. 여러 종교가운데서 부처님 가르침을 믿게 되고 또 부처님의 그런 가르침 가운데도 방편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본체를 그대로 드러낸 법문을 여러분들은 지금 공부하고 계십니다.

 방금 낭송한 보리방편문 역시 그냥 방편적인 그런 법문이 아닙니다. 보리방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마음의 본성품이 무엇인가, 내 존재의 근본실상은 무엇인가, 또는 우주와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그러한 관계를 아주 간명직절하게 표현한 법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한다하더라도 그렁저렁 형식적으로 믿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의 우리 불자님들은 집안에서나 절에서 정진하시다가 오늘 보살계를 받게 되셔서 무척 장한 일을 이루셨기에 축복하는 마음 한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즉 다시 쉽게 말씀드리면 참사람이 무엇인가, 그런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많은 도덕적인 가르침 또는 철학적인 모든 문제가 사실은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우리 인간의 참 마음을 밝히고자 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아전인수격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람, 내 마음의 본성, 또는 우주의 본래 참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 가르침같이 진리 그대로 우주의 사실 그대로를 말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공자님 가르침 또는 예수님 가르침, 노자의 가르침도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공자님은 춘추전국시대라는 몇 백년을 두고 싸움판이 되어 있는 전란속에서 우선 도덕적인 데다 역점을 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참다운 성품자리, 또는 인간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어떻게 윤회하는가,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소홀히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역시 유태지방에서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유태교의 박해 밑에서 우리 인생문제의 그런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낱낱이 말씀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만 삼년동안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다가 빨리 가신 분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비해서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그 모든 문제에 있어서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현대 물리학이라 하더라도 모든 문제를 다 밝히고 있지는 않지 않습니까? 나라는 존재, 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대상적인 것은 어떠한 것인가, 또는 물질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이런 문제에 관해서 현대 물리학도 그 정밀한 체계를 자랑하지마는 우리 눈에 보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로 모든 문제의 본질을 말씀했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는 어떤 것인가, 또는 이 현상적인 대자연계는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를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실은 우리가 금쪽같이 아끼는 우리 몸뚱이도 실존적인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우리가 욕심을 내어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고 하는 물질이란 대상도 역시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면 사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것은 사실은 여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같고 뜬구름같은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여실히 밝힌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입니다. 우리가 그때그때 고민하고 또는 서로 싸우고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것도 우리 중생에서 상식적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로 있다고 생각한 데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고 자기 재산도 자기 지위도 대상적인 모든 그런 금이나 은이나 금강석이나 그런 것도 모두가 허망한 것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인데 우리 중생이 잘못 보고서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받으시는 보살계는 한번 받았으니까 다시 안 받는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그때그때 자주자주 받으셔야 됩니다. 우리 중생이 지은 업장도 많고 따라서 그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우리가 두고두고 성불하기까지 지켜야 될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를 다시 확실히 하기 위해서도 보살계는 그때그때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네는 한 달에 두 번씩, 보름마다 대중과 함께 그때그때 서로 차서에 따라서 어느 선배가 계율을 읽어주면 다른 대중들은 참회하고 받아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두 번씩이나 그와 같이 보살계 계문을 읽어서 우리가 우리 마음을 성불의 길로 나가도록 이끌어야 됩니다.

 

 재가불자님들은 철저하게 육재일을 지켜서, 육재일날마다 여덟가지 계를 지켜야 됩니다. 신라때나 고려때나 이조때도 불교를 믿는 분들은 팔관계(八關戒), 여덟가지 계행을 지켰습니다. 계율이란 것은 우리 인간존재가 참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존재는 과거세의 업장따라서 금생에 태어났기 때문에 참다운 사람이 아직은 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이나 우리 실상은 본래로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도 지금 마음이야 어떻게 됐든지 간에 우리의 본래 마음은 불성입니다. 그 부처님의 성품은 내 인간성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이 바로 불성입니다. 따라서 보살계를 다른 이름으로 하며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계佛性戒라, 우리가 실제로 다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될 그런 계율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는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이 있고 불여의不如意한 불행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가 다 자업자득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될 윤리도덕이 바로 계율인데 윤리도덕을 바로 지키질 않았습니다. 아내가 지키지 않았든가 남편이 지키지 않았든가 또는 우리 조상들이 지키지 않았든가…. 모두가 다 우리가 인간된 도리를 지키지 않았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우리 개인적인 성불을 위해서나 우리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나 또는 사회의 평안을 위해서나 어떤 면으로나 꼭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를 마음 심心자 땅 지地자, 심지계心地戒라, 우리의 참다운 마음 바탕은 바로 부처아닙니까? 따라서 부처의 도리, 부처의 도리에 걸맞는 우리 인간의 윤리행위가 바로 불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성이라 하는 것은 그냥 이론적으로 저 만치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래 생명이 부처기 때문에 우리 생명자체도 광명으로 충만해 있고 또는 천지우주도 바로 빛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감득도 못하고 눈으로 보지도 못할 뿐인 것이지 그러한 생명의 빛은 우주에 언제나 어느 때나 조금도 간단間斷없이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우주의 생명입니다.

 

내 생명과 우주의 생명은 둘이 아닌 것이고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간에 늦고 빠른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꼭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나같은 사람은 능력도 부족하고 또는 내가 별로 마음도 그리 선량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가 안되어야 되겠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게으름부리고 게으름부리지 않고, 지키고 안지키고 그런 차이에 따라서 조금 더디 되고 빠를 뿐인 것이지 어느 누구나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됩니다.

 성불의 길에는 여러 가지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 행위를 진여불성에, 우주의 도리에 맞게 계율을 먼저 지켜야 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고요히 가라앉지도 않고 또는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우면 참다운 지혜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같이 범부심을 미처 못떠난 것은 우리가 참다운 지혜를 몰라서 그럽니다.

 이른바 무명심無明心이라, 무명이란 것은 무지無知나 똑같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나는 무지하지 않다, 이렇게 장담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우주의 진리를 모르면 모두 다 무지 무명에 휩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무명 무지가 아닌 진리일 것인가?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수행을 많이 해야 되겠지마는 수행을 않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간단한 것은 외셔야 됩니다. 무명이 아닌 것은 천지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라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무엇을 많이 알고 복잡한 교리를 통달한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실존이다, 하나의 생명이다는 진리를 모르면 그때는 아직은 무명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우주 자체를 하나의 진리로 봐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혜가 짧아서 하나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이래저래 이 것과 저 것과 나와 너를 항시 구분해서 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도 나와 너를 구분해서 볼 때는 우선 자기 스스로의 마음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남하고의 화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나 또는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나 또는 나라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나 꼭 진리를 알아야 되는 것인데 진리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생명자리를 여실히 아는 것은 성자인 것이고 마음이 짧아서 천차만별로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인 것입니다.

 이른바 부처님의 청정안목淸淨眼目이라. 부처 불佛자 눈 안眼자, 불안佛眼인데 부처의 눈으로 봐야만이 바로 보이는 것이고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께서 설사 공부를 많이 하셨더라도 모든 문제를 하나의 진리로, 모든 존재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지 못하면 아직은 공부가 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하나의 자리, 하나의 진리에서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자리를 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두가 다 우리가 안보인다 하더라도 하나의 진리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되고 그 다음은 그런 진리 밑에서 우리말을 바르게 하고 우리 행동을 바르게 하고 우리 생각을 바르게 해서 불교말로 하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진리에 맞추어서 행하는 것이 계율의 참다운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말씀드리고 싶으나 또 너무 말씀을 다른 일반적인 말씀을 많이 드리면 정작 보살계 열가지 무거운 계와 또는 마흔여덟가지 가벼운 계를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계율을 받을 때는 먼저 참회를 해야 됩니다. 참회를 하고서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허물을 다 뉘우치고 뉘우친 뒤에 우리가 그야말로 맑은 마음으로 부처님의 청정계율을 받도록 하십시다. 연비라는 것은 우리 팔뚝이나 우리 손가락이나 우리 몸을 불로 지지면서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지켜야 할 계율의 종류가 많이 있습니다. 또는 불교의 법으로 해서 여러 가지 소승계도 있고 대승계도 있습니다마는 보살계는 모든 계율을 다 종합한 그런 최상의 계율입니다. 가사 비구의 250계, 또는 비구니의 348계 또는 10계라든가 여러 가지 계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모든 계를 종합한 가장 중대한 그런 순수한 청정한 계율이 바로 보살계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보살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보살계를 받는 분들은 보살이 다 완전히 된 셈치고서 자기 행동을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로 경계해 나가야 됩니다. 그러시면 여러 불자님들께서 참회를 하셨으니까 보살계의 열가지 무거운 계와 마흔여덟가지 가벼운 계를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제일(第一) 불살생(不殺生)이라, 살생하지 말라, 부처님게서 말씀하시되 너희 불자들이여,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을 써서 죽이거나 찬탄하여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또는 죽는 것 죽이는 그러한 모든 짓을 하지 말지니 죽이는 그런 원인이나 죽이는 연이나 또는 죽이는 방법이나 죽이는 업을 지어서 일체 생명이 있는 것을 짐짓 죽이지 말아야 할 것이니라. 보살은 응당히 항시 변치않는 그런 자비심과 효순심을 내어 방편으로 일체중생을 구원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방자한 마음과 즐거운 생각으로 살생하는 이는 보살의 바라이죄니라.


바라이죄는 중죄란 뜻입니다. 단두斷頭죄라, 우리 목을 한번 끊어버리면 목이 다시 본자리에 돌아갈 수가 없듯이 용서받지 못하는 그런 죄가 이른바 바라이죄입니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은 바라이죄를, 중죄인 바라이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것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보다 더 큰 죄여서 다시 용서받을 수가 없고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은 이것은 가벼운 죄에 해당해서 우리가 참회하면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치면 그 죽임을 당하는 그 사람만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살생하는 그 사람도 역시 똑같이 무거운 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금생에도 당할 수가 있지만 우리 인간이란 것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 내생에도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때인가는 거기에 상응한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이는 그러한 살생죄를 해서는 안됩니다.

 

제이(第二) 훔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일체 재물의 바늘 하나 풀 한 포기라도 짐짓 훔치지 말지어다. 보살은 마땅히 불성(불성은 자기 본성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모든 존재의 본성)에 효순한, 그런 마음과 자비심을 내어 항상 모든 사람들을 도와 법이 되고 즐거움이 되게 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남의 재물을 훔치는 이는 보살의 바라이죄니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기 인연에 맞는 거기에 항시 지족(知足)해야 합니다. 우리가 금생에 잘 살고 그러는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라 과거세에 틀림없이 잘 살 만큼 행동을 많이 했단 말입니다. 남한테 보시도 하고 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도 하고 또 금생에 복을 받을 만한 일이 과거세에 있었습니다. 과거 전생도 그러고 금생에 태어나서도 역시 그와같이 베푸는 마음,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있는 분들이 금생에 잘 살고 잘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병치레도 많이 하고 그때그때 불행한 것은 꼭 거기에 상응하는 허물이 우리한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현재인과경이라, 과거에 살았던 그대로 거기에 걸맞는 여러 가지 불행을 받는 그것이 과거현재인과경에 있습니다마는 마땅히 우리는 그 원인이 없이 결과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금생에 제 아무리 못살고 그때그때 불행을 당한다하더라도 즉시에 우리 마음을,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느끼면서 남한테 잘해주고 베풀고 그러면 우리 운명은 그냥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제삼(第三) 음란한 행위를 하지 말라.


우리 인간들은 욕계에서 나서 다른 욕심도 많지만 특히 남녀 이성 간의 욕심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렁저렁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부처가 된다는 것은 우리 인간존재의 최상의 또는 최선의 의무입니다) 꼭 음욕을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욕계나 또는 색계나 무색계나 삼계에서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성불을 못하는 우리는 욕계를 떠나야 되고 또는 색계를 떠나야 되고 무색계를 떠나야 됩니다.

 너희 불자들이여, 불자로서 스스로 음란하거나 남을 시켜 음란하게 하거나 모든 이성에 대해 음욕심을 내어서는 안되느니라. 보살은 응당 효순한 마음으로 진리에 충실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널리 구원하고 청정한 법을 일러주어야 하거늘 더리어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아니하고 음행을 하며 자비심이 없는 이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그런 가운데서 음식욕이라든가 여러 가지 욕심이 많이 있지만 특히 남녀이성 간의 욕망이 제일 강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위대한 분들은, 이른바 성인들은 단연코 남녀 간의 음욕을 단절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처음에는 결혼도 하셨지만 나중에는 진리에 눈뜨게 되니까 하나의 수행자가 되어서 그래서 평생동안 청정하니 수도와 교화에 자기 모든 힘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도 진리에 맞게 살려면 꼭 음욕을 절제하고 절제하다가 드디어는 꼭 끊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라때 무상無相대사는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무상대사는 왕자로 태어났는데 자기 막내 누이동생이 있어요. 그 당시 신라는 여러 가지 부처님 법을 아주 숭앙하고 또 거기에 독실한 신앙을 두는 분위기였습니다. 무상대사의 막내동생이 혼기가 되어서 혼담이 오가고 부모님의 강요 때문에 결혼을 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혼인날이 오니까 자기가 칼로 자기얼굴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얼굴이라는 것은 남녀간에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생명의 상징아닙니까? 그런데 아직 소녀신분으로 해서 더구나 왕녀로 해서 자기 얼굴에다 상처를 입히니까 그것이 무엇되겠습니까. 그래서 상처를 입혀가지고서 스스로 자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상대사가 생각할 때 “저와 같이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녀도 역시 그렇게 했는데 대장부인 나라고 못할 것인가.” 그래서 무상대사도 스스로 머리를 깎고서 역시 승려가 되어서 중국들어가서 굉장히 위대한 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인이나 또는 일본사람들이나 중국에 들어가서 공부를 많이 했지만 특히 무상대사같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아주 무시하고 멸시하는 그런 버릇이 있는 중국사람들을 제자로 많이 삼아 위대한 도인이 되신 분은 드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티베트 불교까지 영향을 주고서 티베트 불교의 초창기에 있어서 많은 공로를 세우신 분입니다.

 음욕, 음탕한 마음이란 것은 욕계 중생에 있어서 우리가 피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진리를 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과감히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말로가 뻔합니다. 건강도 유지를 못하고 사업도 안되고 또 가정도 지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그 식욕과 음욕, 욕계에서 가장 저속한 먹는 것과 또는 남녀 이성간의 욕심, 이것을 못 떠나면 자기 인생은 가치있는 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는 각오는 있어야 됩니다. 그런 결단심이 없이 진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第四)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보지못한 것을 보았다 말하거나 본 것을 보지 못했다 말하여 몸이나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지어다. 보살은 항상 바른 말하고 바른 소견을 가져야 하며 또는 일체 중생들에게도 바른 말과 바른 소견을 갖게 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일체중생들에게 삿된 말과 삿된 소견 삿된 업을 내게 하는 것은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우리가 계율을 지킬 때도 그냥 무엇무엇 꼭 지켜야 된다, 이와같이 그냥 의무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보살계가 아닙니다. 보살계라는 것은 먼저 원리를 따져서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일체 생명이 다 더불어 함께 성불의 길로 간다는 이런 기본적인 도리를 알아 행동도 거기에 따라야 보살계의 참다운 계율정신이 빛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보살계는 불성계인지라 내 생명이나 모든 존재의 근본생명이 불성이 아님이 없다, 이렇게 확실히 믿고서 그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해야 보살계가 됩니다.

 

제오(第五) 술을 먹지 말고 술을 팔지 말라.


우리 불자님들 가운데 조금쯤은 먹어도 무방하겠지 하고서 자시는 분들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들어보면 술이라는 것이 먹다보면 취해버리는 것이지 처음부터서 그 어느 정도로 가늠하고 적당히 먹을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아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또 가급적이면 술을 파는 직업도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금생이란 것이 참 무상한 것인데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생명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의 계율에 부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다 금생 뿐만 아니라 내생에 우리 불행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그야말로 금석같은 그런 계율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부처님 계율을 어기게 하는 그런 술을 먹는다거나 술을 판다거나 이렇게 함으로해서 우리 마음을 전도시키는 우리 마음을 뒤바뀌게하는 그런 행동은 안해야 됩니다.

 그래서 같은 계율도 이와같이 열가지 무거운 계지만 열가지 무거운 계율가운데서 사바라이죄라,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탕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이 네가지가 가장 무거운 죄입니다. 네가지 가운데도 자기가 진리를 모르면서 알았다고 해가지고서 남을 그릇 인도하거나 또는 어느 경계, 높은 경계를 증득을 못하고서 내가 증명을 했다, 이런 것은 대망어大妄語입니다. 대망어, 이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허물입니다. 보통 거짓말 이것은 대망어는 아니고 소망어小妄語입니다마는 이것도 역시 꼭 지켜야 됩니다. 그래서 술먹는 것이나 그런 것은 아주 무거운 죄는 아닙니다. 무거운 죄는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그때 참회하면 그냥 즉시 소멸이 됩니다.

 

제육(第六)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한 가르침인지라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한다거나 또는 남들이 비방하도록 그대로 둔다거나 이런 것은 우리가 진리의 힘을 훼손시키고 진리의 힘을 없애버리는 그런 행위입니다. 따라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이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스스로 불법을 욕하고 불법을 헐뜯는 행위가 되어서 불법의 소중한 중요한 가르침을 그만큼 줄어들게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사부대중은 출가한 스님네인 비구나 비구니, 또는 집안에 계시면서 닦는 보살님들 거사님들 허물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허물이 있으면 자기가 스스로 그분을 만나서 가만히 충고하고 격려하고 그래야지 대중앞에서 비방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불법의 소중한 가르침을 그만큼 훼손을 시킨단 말입니다.


 제칠(第七) 자신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


비겁한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별것도 아닌 것을 칭찬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은 그대로 봐주지 않고서 그냥 비방하고 헐뜯는단 말입니다. 보살은 응당히 일체중생을 대신하여 남의 훼방을 받아서 나쁜 일은 자기에게 돌리고 좋은 일은 다른 이에게 양보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자기의 공덕을 드러내고 남의 착한 일을 숨기거나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훼방을 받게 하는 이는 보살의 그러한 무거운 죄니라.


제팔(第八) 자기 것을 아끼고 남을 욕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너희는 인색하지 말며 남을 인색하도록 가르치지도 말지니라. 보살이 나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돈 한 푼, 바늘 하나, 풀 한 포기라도 보시해주지 아니하고 법을 구하는 이에게 한 구절의 법문과 한 마디의 게송도 일러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쁜 말로 욕설하는 이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보살은 일체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거든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어야 하거늘, 우리는 남한테 베푼다는 것이 얼마만큼 어렵고 끝도 가도 없는 공덕이 많다는 것을 느끼셔야 됩니다. 남들이 와서 구걸하거든 요구하는 모든 것을 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보시한다는 것은 그냥 자기가 쓰다 남아서, 찌꺼기를 남한테 보시한다거나 또는 주기는 싫지만 아까운 마음으로 우리가 보시한다는 것은 참다운 보시가 아닙니다. 보살의 그런 보시라는 것은 원래 진리가 앞서야 한단 말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말, 이것은 본래 나라는 존재가 고립적으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고립적으로 있지 않다는 것은 내 소유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무아 무소유란 말씀을 많이 들으셨겠지요. 우리 불자들은 어느 누구나가 다 마땅히 진리에 비춰보면 무아 무소유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 없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본래 없거니 내 소유가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집이 없어가지고 내 집으로 쳐들어온다고 생각할 때 우리가 양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참다운 불자라고 하면 양보를 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과거 전생담을 보면 그때그때 눈물겹고 우리 보통사람들은 능히 참을 수가 없는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범이 새끼를 낳고 죽게 생겼는데 그런 범한테까지 자기 심장을 대꼬치로 찔러 일부러 피를 내가지고서 그 범새끼들한테 먹였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과거전생에 그 외에도 그때그때 여러 가지 모든 것을 남한테 조금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그런 전생의 베풂으로 해서 금생에 석가모니 얼굴은 삼십이상 팔십종호라, 그 얼굴 그 어디에도 찌푸린다거나 또는 남을 미워한다거나 그런 빈축된 모습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원만덕상,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그와같이 과거전생부터서 차근차근 오랫동안 닦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전생부터서 닦아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란 것은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고치면 그걸로 해서 바로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저만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모든 진리를 다 원만히 갖추고 있어서 우리가 참회하고, 그 순간 바른 맘 먹고 바른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우리가 성자의 지위로 비약적으로 올라갈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우리 마음은 만능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자비 지혜 행복 능력, 모두를 다 갖추고 있어서 우리가 비록 지금까지 도둑질만 했다하더라도 그만큼 참회하고 ‘ 내 마음은 원래 부처인데 만 공덕을 갖춘 부처인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할 것인가’ 그리고 모든 존재는 나라는 것이 원래 없고 내 존재가 따로 없기 때문에 내 소유가 따로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와같이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러한 평등무차별한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남한테 베푼다고 생각할 때는 순간적을 비약하여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성자가 한 대로는 못따라간다고 하더라도 하여튼 이치로만은 나와 남은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는 집, 나한테 가지고 있는 재산, 이것은 원래 내 소유가 아니다, 다만 내가 잠시간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행동과 이치로 아는 지혜는 우리 중생들한테 일치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먼저 이치만은 알아두어야 그때그때 우리 행동도 이치에 따라갈 수가 있는 것이지 이치를 모르면 우리 행동이 바로 나갈 수가 없고 또는 한 번 두 번을 간다하더라도 항시 어느때나 변함없는 그런 착한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실은 여기 경문에 있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이 무엇을 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를 다 아낌없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구(第九) 화내지 말고 참회하면 받아주라. 너희 불자들이여, 보살은 마땅히 모든 중생에게 착하게 대하여 다투는 일이 없게 하며 항상 자비심과 효순심을 내야 할 것이어늘 도리어 일체중생이나 중생아닌 물질을 대해서라도 나쁜 말로 욕설을 하고 폭행과 구타를 하고 좋은 말로 참회하고 사과하여도 성낸 마음을 풀지 않는 이는 보살의 바라이죄니라.


이것은 자기 집안에서나 남한테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도덕적으로 무던히 행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나누어서 천차만별로 보나 그 속을 보고 그 성품을 보고 본체성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아닙니까? 하나의 생명도 그냥 보통 하나의 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능을 갖춘 하나의 생명의 빛이란 말입니다. 우주를 바로 보면 모두가 광명세계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우주의 상징되는 이름이 내내야 부처님의 명호아닙니까?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이른바 우주생명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나무아미타불이란 것도 무량광불이라,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생명의 빛이 부처입니다. 우리 참 생명은 바로 무량광불입니다. 우리 생명뿐만 아니라 천지우주도 똑같습니다. 천지우주가 우리 생명과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주의 근본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참선도 하고 계율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마음은 항상 편하고 남들과 화해 못할만한 이유도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설사 자기 부모를 살해한 불구대천지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가 용서를 해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느 누가 우리 부모를 살해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원인이 없이 그냥 살해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과거생의 어느 때인가는 살해당한 자기 부모가 어느 누구한테 못할 일을 하고 또 그 사람을 죽였거나 그랬단 말입니다. 어떤 것이나 모두가 인과적으로 다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때그때 누구한테나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그 사람이 나쁘다고해서 우리가 그 사람한테 욕을 하고 보복을 하면 그때는 더욱 더 원수된 마음이 풀리지 않고 풀리지 않으면 그때는 사회적으로도 그만큼 심각한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제십(第十)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너희 불자들이여, 자신이 삼보를 비방하거나 남을 시켜 비방하게 하지 말지어다. 보살은 한마디라도 부처님 비방하는 소리를 듣거든 마치 삼백자루 창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여겨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자기 입으로 삼보를 비방하리오. 신심과 효순심을 내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인과 사견을 도와서 비방하는 이는 보살의 무거운 죄니라.


삼보란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 법을 지키는 출가승이나 또는 재가불자나 모두가 다 이른바 삼보아닙니까.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보배가 삼보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보다 귀중한 삼보, 부처님과 부처님 법과 부처님 법따라서 실천하는 그런 분들, 그런 분들을 우리가 비방하고 그런 분들에게 손해를 끼치게 해서는 안됩니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여러 어진 이들이여, 보살의 열가지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이것은 조목조목 따져서 우리한테 일러주신 계율의 차서가 바라제목차입니다. 그런 계율을 응당히 배워서 그 가운데서 낱낱이 티끌만큼도 범하지 말지니라. 만약 범하는 이는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며 또한 국왕의 자리와 전륜왕의 지위를 잃을 것이며 비구 비구니의 지위를 잃을 것이며 삼악도에 떨어져서 이겁 또는 삼겁을 지내도록 부모와 삼보의 이름도 듣지 못하리라. 이런 까닭에 한가지라도 범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너희들 일체보살이 지금 배우고 당래에 배울 것이며 이미 배웠으니 이와같은 열가지 계를 응당히 배워서 권장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가질 지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시되 이미 열가지 바라제목차, 열가지 그런 계율을 설하였으니 이제 마흔여덟가지 가벼운 계율, 가벼운 계율을 설하리라.

 

 지금까지 부처님의 열가지 무거운 계율을 했습니다. 보살계는 그냥 의무적으로 무엇무엇 해라, 그것이 아니라 당위적으로 우리 스스로 자진해서 하는 그러한 중요한 대승의 계율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라는 그 중요한 대전제를 꼭 마음에 두셔야 됩니다. 이 사람을 보나 저 사람을 보나 자기 가족간에 또는 사회에서나 꼭 상대편을 자기와 다른 존재로 보지 말고 본래 바탕은 한 생명이다는 하나의 생명자리에서 비추어 보고서 계율을 지켜야 보살의 대승계가 되는 것입니다.

 마흔여덟가지 가운데 몇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마흔여덟가지 가운데 제일(第一)스승과 벗을 공경하라. 마땅히 자기한테 진리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나 또는 같이 공부하는 그런 도반을 우리가 공경해야 됩니다. 마흔여덟가지 가운제 제이(第二)에 가서 술마시지 말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술같은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그때 우리가 사교를 하기 위해서나 조금 마셔도 무방하지 않은가’ 그러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든 것을 감안해서 우리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신 말씀인지라 꼭 지켜야 됩니다.

 제이(第二)고기를 먹지 말라. 고기에 대해서도 우리 스님네도 더러는 먹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이렇게 보살계를 받은 분들도 역시 집에 가면 ‘남편을 위하고 자식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영양적으로 먹어야 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 몸에나 사회적으로 보나 어떤 의미로 보나 우리한테 이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잘 못먹어서 우리 몸이 약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잘못 먹어서 몸이 약하고 병들고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개나 소나 돼지나 닭이나 모두가 우리하고 같은 생명 아닙니까. 우리가 금생에 사람이라고 해서 내생에도 사람이 돼야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금생에 사람이지만 금생에 잘못 살면 틀림없이 우리도 소나 돼지나 그렇게 다른 짐승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엄격하니 우리 불자들이 정말로 부처님을 숭상하고 우리가 앞으로 성불하겠다는 뜻이 계신다고 생각할 때는 꼭 고기도 먹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몸에도 안좋고 우리 마음에도 안좋고 또는 사회에도 안좋습니다. 고기를 먹는 이는 대자비불성,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것이 자비심 아닙니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생명이 말짱한 그런 것을 잡아서 우리가 맛을 취하기 위해서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똑같은 생명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그래서 개나 소보다 더 훌륭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의 우주적인 생명가운데서 개가 있고 소가 있고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명을 먹을 때는 우리한테 절대로 좋지가 않습니다. 돼지나 소가 죽을 때 얼마나 그야말로 비참한 소리를 내고 또는 원망을 품고 죽습니까. 그 원망을 품고 죽고 그런 비참한 소리를 내고 죽는 그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잔인하게 그걸 좋아라고 먹을 수가 있습니까? 지금 자시는 분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정말로 생명같이 믿고 우리 인간이 꼭 장차 성불해야 된다, 이런 대목적을 가지고 육식을 끊으십시오. 그런 대목적에 따르지 않는 말하자면 하나의 반대 행위란 말입니다. 당뇨나 또는 심장병이나 또는 고혈압이나 대체로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아요.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면서까지 또는 우리 몸에도 별로 이로울 것도 없는 그런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정말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고기드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사십팔 가벼운 계가운데서 네번째가 오신채를 먹지 말라. 오신채는 파나 마늘이나 부추나 그런 것 아닙니까? 이것도 불교를 믿는 집에서도 더러 안지키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또는 절에서도 역시 ‘그까짓 것은 좀 먹어도 무방하다’ 그래서 안지키고 있는 것 같단 말입니다. 절대로 이것은 우리한테 도움이 못됩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경에도 분명 나와있고, 또는 어째서 먹지 않는가, 이럴 때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오신채를 많이 먹으면 담이 많이 생기고 또는 진심이 많이 생기고 또는 음탕한 마음이 생깁니다. 부처님게서 말씀한 법문은 이유가 없이 그냥 한 법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정확한 과학적인 증거가 있어가지고서 우리한테 그와같은 경책한 말씀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입으로 많이 불행을 사서합니다. 공연히 남을 헐뜯는 말을 한다거나 또 잘못 먹는다거나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지금까지 말씀드린 열가지 무거운 계율은 꼭 지켜야 할 것이고 이른바 가벼운 계라 하더라도 근거가 확실하고 우리 행복이나 우리 건강을 위해서 꼭 필요한 그런 계율도 한사코 시켜야 합니다.

 

 우리 불자는 불성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성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불을 지향한 우리 불자님들은 한사코 열가지 무거운 계와 또는 가벼운 마흔여덟가지 계 가운데서 술먹지 말고 또는 고기 먹지 말고 또는 오신채 먹지 말고 이런 정도의 계율은 꼭 지켜야 불자로서의 자긍심도 생기는 것이고 그래야 우리한테 여러 가지, 우리 중생이 살려면 신장도 도와야 되고 부처님도 우리한테 가피를 주어야 할 것인데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안듣는데 어떻게 우리들을 부처님께서나 신장들이 도우실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호념護念이라, 부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또는 무수한 신장이 있는 것인데, 신장이란 것은 부처님의 법을 지키는 하나의 호신신장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신장도 부처님 법을 잘 지켜야 우리를 돕는 것이지 부처님 법을 잘못지키면 돕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기를 먹는다고 생각할 때는 고기먹는 사람은 그냥 냄새가 풍겨요. 냄새맡고서 그런 좋은 신들은 도망갑니다.

 우주의 도리인 부처님 가르침을 확실히 바로 믿는 것과 또는 그와 동시에 우리들의 그런 입으로 짓는 모든 그런 부정적인 행위, 남을 험담한다거나 또는 진리아닌 것을 진리라고 억지로 그와같이 꾸며서 한다거나 우리가 그런 말을 절대로 안해야 할 것이고 또 우리 입으로 먹는 것, 그러한 것을 잘 생각하셔서 앞으로는, 지금까지는 더러 함부로 했다 하더라도 술마시지 않고 또는 고기먹지 않고 또는 오신채를 먹지 않으면 그런 것이 사소한 것 같지만 우리 공부에나 또는 건강에나 이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산중에서 살다보면 그런 파나 마늘이나 그런 것을 안넣어도 아주 담백한 맛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많이 넣어버리면 개운한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호법선신들은 그 냄새 때문에 우리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파나 마늘이나 그런 것도 안먹는 사람들은, 먹는 분들은 몰라도 안먹는 사람들은 그런 것 먹는 사람 옆에 가면 그냥 나쁜 냄새가 풍깁니다. 우리 사람끼리도 그와같이 나쁜 냄새가 풍기는데 하물며 선신들은 더욱 더 나쁜 냄새 때문에 선신이 우리를 지킬래야 지킬 수가 없어요. 이렇게 이런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 행복을 위해서는 사소한 것이 아니고, 또는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당부하신 것은 모두가 다 우리 행복을 위해서 당부하신 것들입니다.

 따라서 꼭 지키셔야 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꼭 지키겠습니까? 우리가 금생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금생만 살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히 우리가 성불할 때까지 몇 만 생 되어도 성불할 때까지 우리는 지켜야 됩니다. 우리 금생의 마지막까지 지킬 수가 있습니까. (네) 우리가 인간으로 갔다가 또는 천상으로 올라갔다가 그렇게 우리가 몇 생을 두고도 성불은 꼭 되어야 됩니다. 성불할 때까지 비록 몇 만 생을 통한다 하더라도 꼭 지킬 수가 있습니까?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