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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21호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금륜 21호 불기 2546년 6월 】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위대한 인권선언이자 심오한 해방선언


이 글은 2002년(불기 2546년) 5월 16일 성륜사 조선당에서 가진 청화큰스님과 정해숙신도회장님의 대담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도회장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사부대중은 물론 일체중생이 참으로 즐거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종교를 초월하여 일체중생들에게 축제의 날로 가르쳐주셨습니다. 큰스님, 부처님 오신 날의 뜻을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좋은 질문이십니다. 저희같이 부처님 밥을 먹고 지내고 중생들한테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마땅히 모든 중생들에게 도움 되는 말씀을 해드릴 그런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자면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탄생하실 때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은 불교인들은 다 알지 않습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이것을 풀이하면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 다시 말하자면 천지우주 전체에 있어서 나 홀로 존엄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나’ 라고 하는 것은 망녕된 나(妄我)라든가 개인적인 나(個我)인 이른바 소아小我는 아닙니다.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 또는 큰 대大자 나 아我자, 이른바 대아大我입니다. 말하자면 참 사람, 참 존재를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 중생들 차원에서는 상대유한적인 문제만 생각하고 따지고 하지 않습니까. 깨달은 성자의 분상에서는 상대유한적인 그런 경계를 떠나서 절대적인, 불교말로 하면 이른바 성품자리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비단 석가모니부처님 뿐만 아니라 공자 노자 예수 등 모든 성인들은 다 성품자리에서 생각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품자리를 깨달으면 그때는 나와 남의 차별도 없고 내 종교 네 종교, 내 민족 네 민족하는 그런 분별시비를 다 떠나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를 온통 하나의 생명으로 본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자타시비하고 있지요. 때문에 우리 중생들이 보이는대로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른바 삼독심三毒心이라, 탐욕심이나 분노하는 마음, 또는 어리석은 마음을 완전히 여의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때묻은 그런 마음이 우리 중생들 마음입니다. 상대적인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중생이란 존재는 우주의 진상을 바로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성자에 한해서만 우주의 참모습을 온전히 봅니다.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부처님께서 깨달은 대아·진아, 이른바 참사람, 그런 경계에서 보면 우주는 참사람뿐이고 참 진리뿐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때묻은 눈으로 봐야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밉다 사랑한다, 그러는 것이지 영원적인 차원, 절대근원적인 차원에서 볼때는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자리를 깨달으면 성자고 하나의 생명자리를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맨 처음에 오직 세상에는 하나의 생명뿐이다, 하나의 진리뿐이다, 우주자체가 바로 하나의 생명덩어리다, 이렇게 선언하신 것이지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은 따지고 보면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인권선언인 동시에 해방선언입니다.


신도회장  많은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열심히 살다가도 무상과 허무를 느끼고 또한 숱한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 진리를 깨닫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들도 많이 하면서 영생해탈의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그런 현실입니다. 안심법문을 들려주시지요.


큰스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할 때, 나한테 진리가 없는데 진리를 구한다, 그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교의 대승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는 나한테 이미 진리는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눈으로 보면 천지우주가 본래로 다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 성품이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아닙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 그럽니다. 모든 진리와 생명을 다 갖추고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소중한 보배를 우리 중생이 미처 깨닫지를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우리 마음이나 예수님 마음이나 성품공덕은 똑같습니다. 우리 스스로 미워하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욕심부리는 그런 마음 때문에 나한테 생생하게 약동하고 있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방금 회장님 말씀마따나 어느 누구든 그런 쪽으로 영생해탈을 구하고 고통이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같은 분도 인간은 그런 쪽으로 유한자가 무한을 구하는, 또는 한정된 자가 영생을 구하는 마음을 본래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진여불성의 자리, 성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면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 중생계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행복뿐인 것이지 절대적인 행복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행복은 모든 고난을 해탈해버린 참다운 자유인인 성자의 경계에만 있습니다.

 그러면 그 행복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른바 수행론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종교나 철학에 있어서 근원적인 본체론이 있으면 또 본체를 증명하기 위한 방법적인 수행론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도 역시 근원적인 것을 우리가 인식할 때 올바른 수행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원래는 완전무결한 만덕을 갖춘 진여불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과거세에 지은 나쁜 업業때문입니다. 이른바 업이라는 사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도말로 하면 카르마라고 하는 것인데 업이라는 것이 어째 중요한 사상인가 하면 우리가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고 또는 개로 태어나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업때문에 그럽니다. 또 미래 역시 현재 우리가 뭘 생각하는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 지은 업으로 미래를 받습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의 완전무결한 즉 말하자면 부처님 생명, 불성뿐이고 그야말로 원만한 만덕을 갖춘 생명인 것인데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스스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업을 짓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과거전생에 업을 잘 지었으면 분명히 존재하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천상도 과거전생의 업따라서 욕계천상 또는 욕심을 다 떠나버린 색계천상, 또 모든 물질을 떠나버린 무색계천상, 그렇습니다. 우리가 과거전생에 업으로 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만 생각할 때는 불교는 숙명론이 되겠지요. 그러나 불교는 절대로 숙명론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우리가 업을 잘못 지었으면 금생에 업의 과보로 해서 우리가 고통도 받지만 또 지금 현재 이 순간부터서 우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업을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는 숙명론이지만 현재부터 미래까지는 업을 해탈하는, 즉 말하자면 그야말로 자유무애自由無碍한 위대한 존재라고 볼 수가 있지요.


신도회장  지난 금륜지 5월호에 목사님하고 수녀님이 석가탄신일을 맞아서 축하한다는 메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참 기독교인이 참 불교인이고 참 불교인이 참 기독교인이다,라는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요즘에는 기독교와 불교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종교간의 소통, 종교의 회통會通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우리가 흔히 남남끼리 만날 때 각각이 기독교인 불교인 입장에서 서로 상종도 하고 그렇지만 사실은 가족끼리도 딸이나 아들이 기독교를 믿는데 부모는 불교나 유교를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한 가정 안에서도 종교가 다른 경우가 많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정보화사회에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종교간의 동일점과 차이점이 무엇인가하는 그런 것에 대한 상식이 없으면 화합을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모든 종교나 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진리를 깨달으면 위대한 성자고 훌륭한 철인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범부중생이 될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기독교든 불교든 어떤 종교이든간에 그때 그때의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표현을 달리하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가 다 진리를 지향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깨달은 분상에서 볼 때는 다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언어적 표현이나 문자적 표현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옥신각신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근원의 자리에서 본체적인 자리에서 비춰봐야 됩니다. 육조단경은 참선의 교과서같은 그러한 경전입니다마는 육조단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오소설법吾所說法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내가 하는 말은 모두가 다 불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대적인 생각에서 말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주의 참다운 생명을 깨달은 성자의 분상에서는 상대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본체적인 차원에서 말씀합니다.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본체를 여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말하자면 하나의 수행의 태도입니다.

 가사 오! 주여나 하느님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모두가 다 우주의 본래생명자리, 내 생명의 근원자리를 말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논리적인 표현으로 하면 그때는 진여요 불성이요 하지만 생명적인 표현으로 생각할 때는 그때는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오! 주여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본래의 자리에 우리 마음이 머물도록 애써야 되고 그 자리를 증명하고 체득하면 그때는 성인이고 체득을 못하면 그때는 범부중생이란 말입니다.


신도회장  지난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저희들 역시 평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러주시고 또 그것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청화큰스님을 큰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아울러 큰스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업에 의해서 그런지 전법傳法은 그만두고 개인적인 실천마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천만다행으로 요즘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큰스님의 염불선이 잔잔한 가운데 널리 퍼져가고 있다는 말을 많은 불자들이 이야기하더라구요. 염불선에 대해서 평소에 가르쳐주셨지만 이 자리를 통해서 다시한번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잘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큰스승은 못됩니다. 하나의 수행자로서 부처님 법을 깨달으려고 애쓰는 한낱 구도자, 수행자일뿐입니다. 염불선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본사람, 다나베하지메란 분이 있어요. 그이는 일본 ‘니시다철학’의 체계를 세운 위대한 분입니다. 그래서 일본철학이 세계적으로 좋은 손색없는 철학으로 발돋움한 것입니다. ‘니시다철학(일명 京都철학)’은 니시다기타로(西田幾多郞)라는 분이 맨 처음에 창도를 했고 다나베하지메란 분이 체계를 보다 더 안정시킨 분입니다마는 그 분이 한 말이 있어요. 그 분은 철학도기 때문에 염불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요. 논리적인 것을 주로 하기 때문에. 그러나 그 분 말씀이 일본불교는 염불선이 아니면 재생의 약동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나베하지메란 그 분의 철학서가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논리적이기 때문에 아주 그야말로 참 까다롭고 또 그것이 논리전개가 너무나 번쇄煩憬해놔서 알아먹기도 어렵고 해서 사람들은 잘 안보려고 하는데 저는 인연이 닿아서 접하게 되었지요. 다나베하지메라는 그 이가 낸 책중에 철학통론이란 것이 있어요. 철학개론이 아니라 철학통론이라는 책인데 까다롭지만 까다로운 가운데서 논리가 명석하기 때문에 저는 여러번 봤습니다.

 그런데 불교인도 아닌 순수철학도가 일본불교가 재생의 힘을 얻으려면 염불선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분은 아마 깊은 명상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사실 이 염불선이란 문제는 제가 창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부터서 흘러나온 것인데 사람들이 소홀히 했습니다. 소홀히 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불교의 역사를 살펴볼 때 중국 당나라 때까지는 그렇게 분열이 많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때 분열이 아주 심했어요. 화두선話頭禪이 생기고 잠자코 명상을 주로 하는 묵조선黙照禪이 생기고 또는 염불선念佛禪이 생긴 것은 다 송나라 때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우리가 본래 부처인 바로 부처님 자리에 마음을 두고 추구하였습니다. 설사 명상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에 대한 명상이었습니다.

 송나라때 묵조선을 한 분은 천동정각天童正覺(1091~1157)이라는 스님이지요. 그리고 화두를 정형화시킨 분은 이른바 대혜종고大慧宗豈(1088~1163)라는 스님인데 두 분은 친한 친구예요. 친한 도반입니다. 한 예로 천동정각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화두파인 대혜스님이 호상護喪이 되어가지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들 사이에는 이것이든 저것이든간에 예각銳角적인 대립이 없었습니다. 묵조선이든 화두선이든 염불선이든 그것은 다만 하나의 경향일 뿐입니다. 그 후에 대혜종고파가 따로 생기고 천동정각파가 생겨가지고서 묵조선이다, 화두선이다, 해가지고 뒷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싸우고 종파가 생기고 그런 것입니다.

 한국도 지금 불교종파가 오십종파가 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대의명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걸 그런 자리에서 보면 다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근원을 깨달아야 올바른 것이 될 터인데 근원을 무시하고서 그냥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시야비야하니까 문제가 생기고 공부도 안되는 것입니다. 염불선 문제는 사실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이지요. 화엄경을 보나 법화경을 보나 능엄경을 보나 대승경전은 염불말씀을 한군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능엄경楞嚴經은 선수禪髓라고 그럽니다. 그야말로 참선의 정수라는 경이 능엄경인데 능엄경에 있는 그 말씀도 염불에 관한 것입니다. 억불염불현전당래필정견불憶佛念佛現前當來必定見佛이라,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외고 공부하는 것은 현전에나 당세에나 반드시 부처를 성취한다 그말입니다. 참선의 정수같은 수능엄경에서 그렇게 말씀했어요. 또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염불행자인중분다리화念佛行者人中芬陀利華라, 염불하는 사람은 사람가운데서 가장 향기로운 연꽃이나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관음세지위기승우觀音勢至爲其勝友라,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그런 염불하는 사람을 가장 좋은 벗으로 여긴단 말입니다.

 염불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생각할 염念자 부처 불佛자 아닙니까. 우리 본래가 부처고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인데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무슨 방편공부가 될 수가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가장 정수라고 볼 수 있지요.

 달마대사를 비롯하여 이조 혜가스님, 삼조 승찬스님, 사조 도신스님, 오조 홍인스님, 육조 혜능스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조 승찬스님 때까지는 일정하게 공부하는 처소가 없이 그냥 탁발을 주로 하고 이른바 고행을 주로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조 도신스님때 이르러 비로소 오백명 칠백명씩 모여서 집단적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사조 도신스님때 집단적으로 안주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도신스님은 아주 저술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도신스님이 저술한 법문이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입니다. 그런데 입도안심요방편법문이란 것은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란 책에 나와 있는 것인데 결국은 철저한 염불입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일상삼매라,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하나의 생명에다 마음을 두는 것이 이른바 염불이지요. 부처란 개념가운데는 천지우주가 다 들어갑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타시비, 그런 것이 있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또 하나의 생명, 그럴 때는 내 마음과 부처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화엄경에도 있는 바와 같이 심불중생삼무차별心佛衆生三無差別이라(야마천궁보살설게품), 우리 마음이나 또는 부처나 또는 중생이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차별로 보는 것이지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으로 본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그대로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하느님 아님이 없습니다. 이렇게 천지우주를 깨달은 분상에서 바로 파악하고 지장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그때는 다 염불선이지요. 오! 주여, 해도 결국은 표현만 다르지 그것은 하나의 염불선입니다. 우주가 하느님뿐이고 하느님 아닌 것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진리의 본체를 여의지 않으면 그때는 그것이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참선이 되지요. 그러나 본체를 여의고 대상적으로 부처님을 설정하고 하는 염불은 방편염불이고 타력염불입니다. 모든 것이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본체론적인 입장에서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으면 그것은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바로 염불선입니다.


신도회장  감사합니다. 종교마다 심지어 같은 종교안에도 가르침이 다른 현실 속에서 우리가 통불교通佛敎를 통해서 통종교, 그리고 모두가 하나의 진리로 화회和會해야 될텐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큰스님  좋은 질문이십니다. 그것은 확실히 역사적인 큰 과제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과제를 풀지 못하면 그만큼 우리가 변화하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리 스스로도 그만큼 마음의 불안의식을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불교자체는 그야말로 원통무애圓通無碍라, 이른바 통불교적인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근기가 낮아서, 화엄경만 공부한 사람들은 화엄경만 옳다 하고 법화경 공부한 사람들은 법화경만 옳다 하고 그렇습니다. 허심탄회하게 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금강경 보면 금강경만 보고 다른 경전은 별로 보지 않고 말입니다. 한 경전에 치우쳐 버리면 결국은 집착을 해버리지요. 그래가지고 이른바, 화엄경을 주로 한 파는 화엄종을 만들고 법화경을 주로 한 사람들은 법화종을 만듭니다.

 신라때 원효元曉스님이나 의상義湘스님, 또는 고려때 대각大覺국사나 보조普照국사, 조선시대의 서산西山대사 그런 분들은 모두 회통불교, 원통불교를 말하셨습니다. 불교자체가 원통하고 회통이 되니까요. 앞으로 우리 불법이 살기 위해서는 틀림없이 불교의 정수법문을 우리가 탐구함과 동시에 그런 각기 종파적인 대립을 지양하여 회통·원통불법이 되어야 합니다. 아까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원통불법 뿐만 아니라 원통종교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과학이나 종교나 철학이나 모두가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정보화사회에 있어서는 하나가 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스스로도 괴로울 뿐만 아니라 피차 갈등 반목을 겪게 되어 우리 사회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인 그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신도회장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생태환경이 심각하기 그지 없습니다. 또한 지금 현실이 너무나 각박하고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현대인들이 정말 어떻게 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보다 더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이 무엇일까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참 좋은 말씀입니다. 역시 참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의 비전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 인생관이라든가 또는 우주관에 대한 것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무시할 때는 소위 말하는 철학의 빈곤에 빠집니다.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빈곤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원적인 생명자체 문제, 또는 우주와 나와의 문제, 또 환경과 나와의 문제, 그런 문제에 관해서 명확히 알고, 행할 때 그런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환경문제만 보더라도 환경 따로 인간 따로입니다.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인간 따로 동물 따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교 우주관에서는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인간 따로 동물 따로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모든 것이 이른바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원만한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현상적인 상대유한적인 것에만 머물러 버리니까 근원적인 실상을 모릅니다. 환경이라든가 자연이라든가 그런 현상이 우리하고는 별개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천지우주의 모든 것은 불교연기법으로 볼 때 서로 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그런 관계의 그물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겉만 볼 것이 아니라 근본성품자리에서 볼 때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치면 우리한테 해가 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환경을 훼손하면 당장 그것이 우리한테 되돌아 옵니다. 그러므로 천지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하나의 원융무애한 생명으로, 모두가 다 관계가 있는 연기적 생명으로 볼 때 그런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소되리라 생각합니다.


신도회장  우리 나라 현실을 보더라도 그동안 속이는 역사, 또는 속아온 역사가 자꾸 되풀이되는 가운데서 모두가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특히 권위주의 체제, 개발독재시대에서 어렵게들 살아오면서 그동안 우리 국민들의 심성마저 몹시 거칠어졌습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넓혀 보더라도 미국의 테러사건을 비롯해서 아프가니스탄 폭격 등 이런 총제적인 면을 볼 때 부처님의 가르침 아니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그런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희 불자들과 우리 사회전체 구성원에게 지침이 되는 말씀을 해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큰스님  좋은 말씀이십니다. 종교는 그야말로 우리 인간을 철학적으로 지도하고 인간의 생활에 정신적 복리福利를 주며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이상을 주는 그런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우선 자기들 종교에 순수해야 합니다. 불교는 불교인대로 불법에 순수하고 기독교는 기독교인대로 하느님 사상에 순수하고 이슬람교도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사상에 순수해야 합니다. 인류의 평화, 자기 이웃을 무시하는 그런 가르침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종교에 우선 철저히 순수해야 되는데 순수하지를 못하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만 보더라도 순수하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종파가 생기고 하찮은 감투때문에 법의法衣 입고서 싸움도 하지 않습니까? 그걸 볼 때 그 얼마나 순수하지 못합니까.

 그러니까 우선 자기 종교에 순수할 때는 모두가 다 참다운 진리를 지향하니까 자동적으로 화해가 됩니다. 지금은 좋든 싫든 간에 지구시대고 세계화시대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피차 상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때는 우리가 한시라도 늦으면 늦은 만큼 우리한테 불행과 해악이 오고 빠르면 빠른 만큼 우리한테 복리가 오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교는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에 비해 더 화해로운 종교입니다. 구체적으로 교리자체가 모든 자연현상을 하나의 생명으로 포괄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아주 풍부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이 먼저 선도적인 역할로 정말로 순수하고 모범적으로 회통적인 실천을 해야 합니다.


신도회장  큰스님,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부처님정법을 펼쳐주시느라고 무척 애를 많이 쓰시고 계시는데 그런 모습에서 저희들은 너무나 많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앞으로 많은 중생들을 위해서 하시고자 하는 불사가 있다면 말씀을 해주시지요.


큰스님  참 과분한 말씀입니다. 마음닦아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과도 더불어서 깨달음의 길로 함께 가는 것 이상의 훌륭한 불사는 없습니다. 이른바 유위법적인 불사는 그때그때 인연따라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것은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가능하면 우리 성륜사聖輪寺가 본산정도의 규모를 갖추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고 그런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성륜사가 어떻게 하면 본산의 규모로 발돋움할 수 있을까하는 그런 쪽에다 우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서울도 이제 광륜사光輪寺가 생겼는데 서울 불자님들을 위해서 교화의 한 마당을 마련한 셈이지요.

 불사에 대해서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더불어서 우리가 공부한다는 불사에 비중을 두고 보다 더 광범위하게 공부할 수 있는 마땅한 틀을 마련하고자 본산규모로 나간다는 계획인 것입니다. 무슨 형상적인 확장이라든가 그런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다 많은 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그때그때 실천하는 장소로 보다 더 규모가 크고 또 환경역시 더 넉넉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불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金輪


정리 / 정진백·이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