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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23호 인계생정(因戒生定)하고 인정생혜(因定生慧)하라

금륜 23호 불기 2546년 8월 】




  인계생정(因戒生定)하고 인정생혜(因定生慧)하라



이 글은 2002년 7월 7일 성륜사 정기법회에서 하신 큰스님 법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자기를 구현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참배하고 있는 법당안의 탱화 부처님도 저만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참 마음의 공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마음은 사실은 참 마음이 아닙니다.


 불교말로 하면 이것은 망아妄我라, 망령될 망妄자, 나 아我자, 망령된 나입니다. 여기서 “나는 제법 꽤 많이 배우고 명상도 좀 하고 했는데 왜 나같은 사람이 망아인가, 망령된 것인가” 이렇게 의아심을 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이 참 마음자리를 깨달으면 이른바 성인인데 성인이 못된 한에는 우리 누구나가 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망아. 망령된 나를 면치를 못합니다.


 그래서 망령된 나가 항시 언제나 존재한다는 그런 생각을 불교전문술어로 하면 망집妄執이라 그럽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아직 성자가 못되었으니까 누구나가 다 지금 망집을 하고 있지요. 분명히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렇게 존재하는데 왜 이것이 망령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나라고 고집하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비롯해서 우리가 대상적으로 보고 있는 산이나 물 모두가 다 사실은 그 실존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인연생이라,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인연따라서 잠시간 생겨났습니다. 인연따라서 생겨났다는 말은 어느 하나가 고유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과 조건부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몸도 역시 각 원소가 잠시간 합해져서 지금 부단히 어느 찰나도 중단하지 않고 신진대사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몸뚱이 자체가 이것이 하나의 변화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지 고유한 내 몸뚱이가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이 아주 극명스럽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내 몸뚱이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그래요. 내 마음도 어제 마음 오늘 마음 다 똑같지 않은가. 그러나 똑같지가 않습니다. 어제 누가 나한테 좋게 하면 그냥 집착하게 되고 자기도 기분이 좋겠지요. 그러나 오늘은 또 그 사람이 배신한단 말입니다. 배신하면 곧장 그 사람을 내치고 싶고 보복하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도 그때그때 순간순간 철나찰나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뿐인 것이지 다 변화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 말씀하신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개공은 우리 몸을 구성한 물질이나 관념이나 모두가 다 본래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상식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철두철미, 과학적인 동시에 또는 형이상학적인 그러한 순수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 몸을 비롯한 모든 그런 물질적 존재란 것은 사실은 있지도 않는 것인데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겉만 보고서 성품을 미처 보지를 못하니까 있다고 착각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제법이 공이라. 모두가 다 비어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제법공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상식적인 가르침으로 해서는 아무리 애써도 항시 있다는 것에 집착해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아집我執이라,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또는 법집法執이라, 대상적으로 보이는 산이나 물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니까 실제로 그것이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우리 중생은 보이지 않지만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진여불성이라, 어느 때나 변치가 않는 천지우주가 다 파괴되어서 텅텅 비어버리는 그때도 변치 않는 그런 실상적인 경계가 이른바 이것이 불성 아닙니까,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입니다. 그 자리는 바로 진리자체이니까 진여라고 그럽니다. 사람한테나 동물한테는 불성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또는 자연계의 무생물이나 그런 법은 법 법法자 성품 성性자, 법성法性그러는데 내내야 똑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 자체가, 오직 하나의 성품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불성이라고 말하나 법성이라고 말하나 또는 진여라고 말하나 똑같은 뜻입니다. 비단 부처님 가르침이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그런 가르침이나 또는 그 가르침뿐만 아니라 옛날 그리스 로마의 위대한 철인들 가르침이나 사실은 똑같습니다. 표현이 다른 것이지 위대한 철인들 말씀은 똑같습니다. 똑같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천지우주가 모두가 하나의 생명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서기 오백사십년 전에 나온 파르메니데스라든가 또는 그 시대에 나온 헤라클레이토스라든가 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서나 이런 분도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하나의 진리다 이런 도리를 말했습니다. 표현은 좀 다르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중세기에 나오신 분들, 이른바 스피노자는 십칠세기에 나오신 분 아닙니까. 그 분은 마흔 넷에 작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마흔 네 살 넘으신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요. 마흔 넷에 가신 분인데 적어도 십칠세기 이후에 칸트라든가 위대한 그런 철인들이 스피노자 영향을 안받은 분이 별로 없어요. 그렇게 위대한 분입니다.


 그이의 전기를 제가 구체적으로 많이 연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전에서 스피노자 사진만 봐도 아무런 무슨 흐림이 없어 보여요. 그렇게 온화하고 고상하고 친절하게 보입니다. 마흔 네 살에 가신 분이 현대철학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고 있어요. 피히테Fichte라든가 또는 헤겔이나 그런 철인들 모두가 다 스피노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어떤 문제에 관해서 영향을 받고 있는가,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신이요 하나의 부처입니다. 이른바 범신론이라, 우리 불자님들 좀 어려우셔도 신이 있다 없다 그런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우주를 섭리했다는 그런 도리는 주로 기독교나 유태교나 이슬람교나 그런 데서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뜻이라든가 또는 모두가 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불교의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또는 힌두교의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바라문으로 돼있다, 이런 것이 표현만 좀 다른 것이지 결국은 똑같단 말입니다.


 일체존재는 하나에서 와서 다시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포함돼 있는 그 만능의 공덕자리에서 인연따라서 사바세계, 모든 그런 세계가 이루어지고 또 인연이 다하면 다시 모두가 다 진여불성자리에, 하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진여불성에서 와서 다시 진여불성으로 갑니다. 진여불성은 바로 생명이니까 인격이니까 그때는 부처님이지요. 부처님이나 진여불성이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바꾸어서 말하면 모두는 부처님한테 와서 도로 부처님으로 돌아가고 부처님의 참다운 성품이 바로 우리 마음이듯이 우리 마음과 부처님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참선과 보통 공부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보통 공부는 교학적으로 단계단계 올라가는 공부 아닙니까. 참선은 그냥 직통으로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고 깨달아 증명하는 공부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만 있는 사람은 자기 마음은 부처고 못된 것 생각하고 못된 짓 하는 사람 마음은 부처가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못된 짓을 하나 좋은 일을 하나 그 사람 마음도 똑같은 부처입니다. 다만 그 사람 스스로 부처의 자리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서 가장 최상의 공덕이 무엇인가 하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도리를 아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지금 내가 별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숨어있는 공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나 공자나 노자나 그런 성자와 똑같이 한없는 그런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우리 인간에 있어서 최상의 공덕입니다.


 “나는 조금만 잘못해도 몸도 아프고 재수도 없고 그러는데 나같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잘못 살아서 성자의 가르침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못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들께서도 집안에 어려운 일이 많이 계시겠지요. 아들이나 딸도 말을 안듣고 사업도 부진하고 내외간도 어떤 때는 화목하지 못하고…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인간이 잘못 살아서 그와같이 모든 불여의하고 부정적인 사태가 벌어집니다.


 정말로 석가모니같이 살고 예수님같이 살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불여의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란 늘 한계상황을 마주하고 삽니다. 생로병사라, 한 번 났으니까 당연히 그때는 죽어야 되고 더러는 늙어야 되고 아파야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또한 만나면 결국은 또 헤어지고 만단 말입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가르침과의 차이를 간단명료하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행은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행위라든가 도는 자연계의 모든 이른바 신진대사하는 그런 행위라든가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무상하단 말입니다. 무상이란 것은 이것은 시간적으로 그때그때 항상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정밀한 내용을 잘 모르니까 겉으로 봐서 어제와 오늘과 또는 내일과 모레의 내가 다르지 않지 않겠는가, 어릴 때의 나와 똑같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몇 십억되는 그런 세포도 역시 하룻동안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바뀌어집니다. 그런 사실을 현대물리학이 증명해 낸 것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어릴 때와 지금과는 몸 세포구조가 완전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때그때 변화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변화한 것을 잘 볼 수가 없으니까 항시 지금 눈에 보이는대로 모두가 다 있어야 된다는 기대 때문에 마음으로 괴로워합니다. 한 번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언젠가 죽어야 되겠지요. 몸뚱이란 것은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 것인데 그렇게 체념해버리면 좋은데 오래 살려고 또 발버둥치고 별의별 약을 찾아먹으며 불로장생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자기 부모님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한테 효순하는 것은 좋은데 그런 비싼 보약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 몸뚱이란 것은 하나의 몸뚱이만의 기관이 아닙니다. 몸뚱이만의 기계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반영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란 것은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적인 모든 폐해나 모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유물주의라, 모든 존재는 물질뿐이다, 물질이 주인이다, 이런 데서 온단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사실은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가는 그 무상한 존재인 것인데 우리 중생이 무상한 존재를 항상 있는 것이라고 고집한 데서 우리의 여러 가지 고민이 생기고 이른바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 역시 모두가 다 물질이 사실로 있다고 보는 거기에서 옵니다. 노인들이 보약을 많이 자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 생각을 하면 틀림없이 그때는 우리 마음이 우리 몸에 영향을 줍니다.


 기독교 바이블의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그대들이 겨자씨 한 알만큼의 신심이라도 있으면 지금 저기 있는 뽕나무더러 뿌리채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이러면 틀림없이 심어집니다.”

 우리 마음의 힘이란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의 힘을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 것이지 마음의 힘은 불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삼명육통이라, 별 신통도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자기 몸을 우주에 가득 채울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자기 몸을 천개 만개 화신으로 나툴 수도 있습니다. 또는 공중에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고 하여튼 그 못할 것이 없이 다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어떻게 내 몸이 공중으로 날아갈 것인가.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서 조사스님들, 부처님법을 받으신 위대한 조사들은 대체로 보면 열반에 드실 때에(물론 그때도 중생의 교화를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랬습니다마는) 공중으로 솟아 올라갑니다. 공중으로 솟아 올라가서 십팔변이라, 그 부사의한 십팔신변을 해요.


 그 다음에 돌아가실 시간이 되면 그때는 자기 가슴에서 불을 냅니다. 자기 가슴에서 불을 내는 삼매를 화광삼매라, 불 화火자 빛 광光자, 화광삼매火光三昧라고 그래요. 자기 가슴에서 불을 내서 자기 몸을 태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금관에 넣어서 역사들이 기름을 붓고 해서 관을 태우려고 했지만 관이 도저히 불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게서 자비심으로 관 안에서 화광삼매에 들어서 스스로 가슴에서 불을 내서 관을 태웠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힘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석옥청공石屋淸珙화상이란 고려 때 청공화상이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받으신 선사님이 석옥청공화상이지요. 석옥청공화상도 돌아가실 때 한탄을 했어요. 하, 내가 화광삼매에 들어가서 불을 내서 내 스스로 몸뚱이를 태웠으면 되는 것을 그 하찮은 몸뚱이를 태우려고 그냥 나뭇더미가 있고 또 무엇이고 있고, 금방 결국은 참 나뭇더미 위에서 내 몸뚱이를 태워버리면 아무 것도 없어질 것인데… 그래서 석옥화상이 한탄하는 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대문이 있어요.


 고아야무삼매화顧我也無三昧火라, 내가 나를 돌아보니 삼매의 불이 없단 말입니다. 저같은 사람도 지금 죽어지면 틀림없이 그런 한탄을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깊은 삼매의 공부를 많이 했으면 틀림없이 하여튼 조사스님들 모양으로 스스로 가슴에 불을 내 화광삼매에 들어서 몸을 태울 것인데 아 참선한다고 조금 했지만 그렇게 깊은 삼매에 못드니까 자기 몸을 태울 만한 불이 안나온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불교라는 것은 거짓된 나(假我)를, 망령된 나(妄我)를 떠나서 참다운 나(眞我), 큰 나(大我)를 찾는 공부길입니다. 내가 우주요 우주가 나라는 조금도 한계를 갖지 않는 이른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런 자기 생명자체가 바로 대아․진아입니다. 그러면 대아․진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철저한 계율이 필요합니다. 더러는 ‘우리가 깨달음이란 것은 재주가 있고 그때그때 그냥 훌륭한 스승을 만나 돈오를 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식으로 속단을 합니다. 물론 이치는 불교말로 하면 해오解悟라, 해석할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이치로 해서는 단박에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이즉돈오理卽頓悟라, 이치는 알 수가 있지만 우리 스스로 과거 전생부터서 지어내려온 습관성, 우리 지금 의식 가운데는 과거 전생이나 금생에나 여러 가지 나쁜 습관성이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습기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은 단박에 녹아질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이 선방 들어가서 그때그때 공부도 하시고 명상도 하시고 그렇게 하시는 것도 그냥 모두가 단박에 되어버리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치로는 그럴 것 같지만 사실은 부처님한테 갖추고 있는 그런 무량공덕이 우리한테는 지금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치만 알 뿐이지, 어째서 없는가 하면 그 습기, 습관성이 안녹아 있단 말입니다. 습관성은 그때그때 화두도 참구하고 엽불도 하고 명상도 하고 또는 경도 보고 또는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이런 선근공덕이 쌓여져야 그래야 차근차근 습기가 녹아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공부를 애쓰고 하는 것은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꼭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됩니다. 계행을 지켜야 깊은 삼매에 들어갑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갑니다. 먹을 것 다 먹고 세속에서 하는 그런 향락스런 짓을 다 하고서 명상에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들 말씀도 인계생정因戒生定이라, 계율로 말미암아서 비로소 선정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선정에 들어가야 우리 습관성이 녹아납니다. 그 사람의 근기라든가 여러 가지 상황 따라서 선정도 오래오래 들어 있어야 녹아나는 분도 있고 또는 선정을 별로 얼마 안해도 업장이 습기가 녹아나는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불교말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생사를 초월한 그런 영원적인, 진여불성을 온전히 우리가 증득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불자님들한테 저는 그때그때 육재일 말씀을 항시 드립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재가불자는 하다못해 육재일만이라도 지켜야 한단 말입니다. 육재일만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성불의 가망이 없습니다. 성불의 기약이 없습니다. 계율도 안지키고 참선도 안닦았으니 어떻게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너무나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철저한 계율을 지켜야 되는데 철저히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함부로 먹지 말아야 됩니다. 함부로 먹지 말아야 되고 또 한 가지는 이성간에 너무 탐착을 말아야 됩니다.


 부처님 법문이 어렵다고 생각을 말으십시오. 너무 탐식을 않는 것은 사실은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맑아지고 옆엣 사람한테도 피해를 덜 끼치고 훨씬 좋은 것입니다. 또 이성간에도 역시 인연따라서 같이 내외간 됐으면 동기가 되어서 피차 서로 격려하고 서로 편달해서 성불의 길로 나가면 되는 것을, 꼭 같이 불어서 다녀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제 아무리 좋은 정치가 생기고 제 아무리 훌륭한 국토가 생기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이렇게 많아서는 안돼요. 인구정책은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십구세기에 영국의 멜더스라는 분이 산아제한이나 그런 문제를 내서 사람이 식량이나 그런 것을 생산할 때 이것은 산술급수적인 것이고 우리 인간의 인구팽창은 기하급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인구증가를 따라갈 수가 없다, 사실 이대로 태어나면 정말로 큰 일입니다. 팔․일오 해방된 때에 비하여 지금의 세계인구가 배가 늘었다고 그래요. 앞으로 배가 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차도 배가 늘어야 되겠지요. 환경오염은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인구문제는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인구문제란 문제해결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남녀 이성간에 성욕을 절제해야 됩니다. 이것도 역시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쉬운 것입니다. 그리기에 이슬람교나 기독교나 불교나 보십시오. 성자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 독신생활을 권장하지 않습니까. 성인들의 행동은 모두가 다 인간의 과거나 현재나 모든 면을 통찰합니다. 우리 범부들은 그냥 우선 자기 향락적으로 자기 기분 좋으면 좋다, 이렇게 무책임하지만 성자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아요. 인구문제나 식량문제나 무슨 문제나 모든 문제를 다 통찰하기 때문에 절대로 무절제한 그런 행위를 할 수가 없도록 우리한테 금욕을 권장합니다.

 

 어떠한 가르침도 금욕이 없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가사 우리가 기독교를 두고 본다고 합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불교는 그냥 무엇 무엇을 말아라, 하는 금욕하는 그런 조목이 많이 있지만 기독교는 그러지 않지 않는가. 그렇지가 않습니다. 기독교는 사순절四旬節이라, 사순절은 사십일동안, 예수가 광야에서 여러 가지 마구니의 시련을 받으면서 시련을 다 이겨내서 이른바 도를 깨달아서 성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가 사십일동안 광야에서 헤맨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것을 추모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사십일동안은 사실은 원칙으로는 단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못하니까 하루에 한 끼도 먹고 두 끼도 먹고… 적당히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이 있겠지요.


 이슬람교도 아무렇게나 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루에 다섯차례 씩이나 이슬람 성지(메카)를 향해 참배를 해야 됩니다. 아침 세시에 일어나 한 번 하고 해뜨기 전에 한 번 하고 정오에 한 번 하고 오후에 한 번 하고 밤에 잘 때 한 번 하고 다섯 번씩이나 메카를 향해서 땅에 대고 오체투지하고 참배를 해야 됩니다. 또는 구월이 라마단 달인데 구월에는 온전히 한 달동안 해뜰 때부터서 해질 때까지 음식을 한 끼도 안 먹습니다. 다만 해가 진 뒤에야 요기를 위해서 조금 먹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가르침이나 모두가 다 성자의 가르침은 꼭 금욕이 전제가 됩니다. 나는 믿기는 믿어도 금욕은 귀찮으니까 안해야 되겠다, 이러면 자기 손해입니다. 금욕이란 것은 자기 건강에도 좋고 가정의 화평에도 좋고 사회를 위해서나 다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아까 말씀마따나 인구정책을 근본적을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따라서 육재일날, 일주일마다 한 번씩 하면 육재일이 거의 해당되겠지요. 음력으로 8 14 15 23 29 30일인데 그날만은, 계율을 지켜야 됩니다. 그 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루에 한 끼 일종을 하고 또는 남녀부부간에도 그 날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지내고 술 먹지 않고 고기 먹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고 삼장재월三長齋月, 삼장재월이란 것은 석 삼三자, 길 장長자, 재계할 재齋자 달 월月자입니다. 삼장재월은 정오구正五九라, 정월하고 오월하고 구월, 세 달에 있어서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그와같이 육재일날 하듯이 일종하고 내외간도 자리를 따로 해서 안자고 말입니다. 고기 안먹고 술 안먹고 오직 부처님만 생각한단 말입니다. 정월도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그러고, 오월도 초하루부터 그렇게 하고, 구월도 그런단 말입니다. 정오구월이라, 그래서 정오구월은 삼장재월 그럽니다. 보름씩이나 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재가불자도 차근차근 부처님한테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렁저렁 살고 부처님한테 가까워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 본래 생명자리인 진여불성이 빛나기 위해서는 꼭 금욕이, 절제가 따라야 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서 참선도 해야지, 먹을대로 먹고 이것저것 그런 계율을 지키지 않고서 참선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선에 깊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경에 보면, 능엄경에 있는 법문입니다마는 부단음욕수선정자不斷淫慾修禪定者는 증사작반蒸沙作飯이라, 음탕한 마음을 끊지 않고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지은 것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음탕한 마음 끊지 않고 욕심을 다 부려가지고서 삼매에 참선하고 선정에 들라고 마음먹으면 증사작반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우리는 매서운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성불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무 때나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도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욕심을 더 부려서 돼지가 되고 소가 되고 잘못 살아서 지옥으로 우리가 전락되고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불하는 장소로 우리 인간세상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여러 불자님들, 오늘도 상당히 더운 날이데 좀 청량하고 시원한 말씀을 드렸으면 좋은데 이렇게 금욕을 하라고 말씀을 드리니까 제 마음도 답답합니다.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인계청정因戒淸定하고 인정생혜因定生慧하라, 계율을 지킴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마음이 정신통일이 되고 삼매에 들고 삼매에 들어야 비로소 그때는 그야말로 우리 마음이 훤히 트여서 이른바 아집과 법집을 다 열어버리고서 이른바 망령된 나(妄我)를 떠나고 가짜 나를 떠나서 활연대오해 참다운 자기의 성품을, 우리가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최상의 행복입니다. 또는 동서 모든 성인들이 우리한테 당부하고 또 당부한 가르침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가실 때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