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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22호 먼저 이치로 깨닫고, 나중에 부처의 자리를 증명하기를

금륜 22호 불기 2546년 7월 】





먼저 이치로 깨닫고, 나중에 부처의 자리를 증명하기를


이 글은 2002년 3월 부산 통도사신도회가 사찰순례로 성륜사에 왔을 때 큰스님께서 하신 법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인솔하신 스님네께서 염려가 많으셨습니다. 영남지방에 기라성綺羅星같은 선지식도 많이 계시고 수천명 들어갈 수 있는 법당도 있고 회관도 있는데 이렇게 좁은 데에 오셔서 고생을 하시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같이 쉬운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의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또는 우리 몸에서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생명 자체인 내 마음에서 스스로 구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법을 바르게 전하신 도인들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삽삼조사號三祖師라, 삼십삼 조사들은 가장 정통적으로 부처님 법을 우리에게 전달해주신 어른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마지막 분인 육조혜능입니다. 그 스님의 법문 핵심은 혜능스님께서 지으신 경전인 육조단경입니다. 물론 스스로 글을 지어서 쓰신 것은 아니고 제자분들이 혜능스님 말씀을 옮긴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가르침인 육조단경의 핵심골자가 무엇인가 하면 “귀의자성불歸依自性佛하라”, 즉 자기 스스로의 부처님한테 귀의하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귀의삼신불歸依三身佛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하면 너무 막연하게 느낍니다. 부처님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하면 바로 삼신일불三身一佛입니다. 다시 풀어 말하면 육조스님께서 육조단경에서 말씀하신 가장 소중한 법문은 바로 귀의삼신불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있는 우리 마음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우리 마음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부사의하고, 그러면서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지혜롭고 자비로운 것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꽤 공부도 많이 했건마는 내 마음이 대체 무엇인가”하고 의심하실 분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의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범부중생들은 제 아무리 학문적으로 높은 체계를 세우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범부중생인 한에는 자기 마음을 제대로 모르고 삽니다. 깨달은 성자만이 비로소 자기 마음을 안단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태어나서 자기 마음을 안다면 그보다 더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 마음을 모른다면 그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습니다. 자기 마음이라는 것은 비단 금생뿐만 아니라 전생의 수만생 동안에 걸쳐서 가지고 왔으며 또 미래에도 영구히 가지고 갈 마음입니다. 이런 소중한 마음을 모른다면 얼마나 큰 손해이겠습니까?


 불자님들, 이 세상에 와서 우리 마음을 모른 채 간다면 이 세상에 나올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근본자리가,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 부처님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삼신일불三身一佛입니다. 삼신일불이라는 것은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요,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이요, 그리고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입니다. 이 삼신불이 우리 마음에 다 들어있습니다. 자비와 지혜, 그리고 일체 만공덕이 들어있는 것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 이와 같이 머나먼 길에 고생하고 오셨는데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이른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계기가 되었으면 다행이겠습니다. 우리 마음은 정말로 자신 안에 모두 다 들어있습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적인 지혜도 스스로의 마음에 몽땅 다 들어 있습니다. 또한 을지문덕乙支文德·이순신같은 장수적將帥的인 기질도 우리에게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다 들어 있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모르고 살고, 다 들어있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지 못하니까 허망한 것을 자꾸만 구합니다.


 마음 자리에서 본다면 본래 나와 남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자기 대상과 자기도 둘이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이런 환경과 나도 둘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연보호를 하고 공해문제가 심각합니다마는 이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우리 마음을 아는 데에 있습니다. 내 마음을 아는 것이 근본 해결책입니다. 한 포기의 풀이라든가 나무라든가 모두가 나와 더불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공기도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니고 물도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니고 흙도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닙니다. 공기를 오염시키면 우리 생명과 공기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생명이 그냥 바로 해를 받습니다. 물을 함부로 해도 우리가 바로 해를 입습니다. 땅을 함부로 오염시키면 우리 스스로 내 몸뚱이를 오염시키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따라서 육조 혜능스님 말씀이나 또는 소급해 올라가서 이십팔대조사이시고, 중국에 와서는 초대조사인 달마대사 말씀도 모두가 다 마음 깨닫는 법입니다. 마음 닦는 법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절대로 어렵게 생각을 마십시오. 육조 혜능스님께서도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여러분들이 나한테 자주 올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스스로 깨달으면 된다. 내 말을 잘 듣고 다시는 나에게 오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자심귀의自心歸依라, 각자 마음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으며 지금 모두가 그같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조금도 중단이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우주는 사실은 마음뿐입니다. 지금 현재 내 생명도 오직 마음입니다. 나도 너도 환경도 있고 천차만별의 구분이 있는데 왜 마음뿐이라고 하는가?


 우리 중생들은 상으로 보기 때문에, 현상만 보기 때문에 이것이 있고 저것이 있고 천차만별로 분별시비를 합니다. 그러나 근본성품으로 본다면 차별이 없습니다. 상을 떠나버리면 성품은 다 하나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보는 경우는 성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깨달은 사람은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본바탕으로 보는 것은 옳게 보는 것이고 현상적인 상으로 보는 것은 차별과 분별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산업사회입니다. 산업시대는 물질문명이 발달해서 여러 가지 기계라든가 복잡한 것이 많습니다. 이 복잡한 문명은 기계문명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지식정보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가령 신문만 본다고 하더라도 달랑 하루에 한 장 뿐이었습니다.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지금은 그 일간 신문들이 하루에 몇 장씩입니까? 저같은 사람은 신문도 안봐버리니까 편합니다마는 세상에 살려면 또 보고 살아야 되겠지요. 정보를 알아야 하니까요. 그 외에도 나날이 격변되어가는 문명사회에서 환경이라든가 여러 가지 지식 정보를 모르면 살 수가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불자여러분. 부처님 가르침 같은 간단명료하고 직절간명直截簡明한 가르침이 아니고는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신경이 쇠약衰弱되어 이른바 스트레스 때문에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그러한 시절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으로 볼 때는 한도 끝도 없이 복잡다기 합니다. 그러나 성품으로 보면 오직 하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우리 불자님들이 몇 백명 계십니다마는 겉으로 보면 얼굴이 다르듯이 마음도 다르다고 보시겠지요. 그러나 성품으로 즉 마음으로 본다면 모두가 하나의 마음입니다.

 하나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하면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佛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먼저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인 상만 보기 때문에 천차만별로 보고 그래서 항시 마음이 바쁘고 괴롭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모양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자리에서 보면 모두가 일미평등一味平等하게 일매지게 하나의 불심뿐인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본다면 다르게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똑한 사람이나 불량한 사람이나 모두가 본바탕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쉬운 말로 깨달은 분들이 본다면 부처 아닌 것이 없고 우리 중생이 본다면 뿔뿔이 다르게 봅니다. 그것은 중생의 입장에서 업으로 보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단박에 성자가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치는 우리가 비록 범부라 하더라도 성인들 말씀을 그대로 믿어서 철학적으로(이론으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치로 깨닫는 것을 불교말로 풀이해서 해석할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먼저 해오를 분명히 하셔야 됩니다. 이른바 이론적으로 분명히 알아두셔야 마음이 불안스럽지가 않습니다. 이 복잡한 후기산업사회 다변화시대 또는 다원화시대 지식정보화시대에 있어서 모든 존재를 하나로 볼 수 있는 그런 철학적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또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의 도리인데 우리 중생이 미처 몰라서 그러니까 우리가 증명해서 깨닫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론적으로는 모두가 하나의 진리다, 이렇게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해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육조단경에서 하신 말씀도 이치로는 단박에 깨달아버리는 해오를 꼭 해야 합니다. 설사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해오는 믿음만으로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시보장 제일법信是寶藏 第一法이라, 우리의 바른 믿음, 이것이 모든 보배의 가장 중요한 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은 보배 가운데서 제일이란 말씀입니다. 어떻게 믿는 것인가. 우리가 상으로 봐서 천차만별로 구분해서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의 분별시비인 것이고 우리가 바로 보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불경에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이라도 천견유리天見琉璃라, 즉 하늘나라 사람이 보면 유리같은 보배로 봅니다. 또 인견수人見水라, 사람이 볼 때는 마시는 물로 봅니다. 또 물에 사는 물고기들은 자기 집으로 봅니다. 귀신들이나 아귀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우리 중생이 안보인다해서 귀신이 없고 영가靈駕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귀신이 본다면 귀신은 물을 불로 봅니다. 똑같은 물인데도 업따라서, 천상사람은 물을 유리같은 보배로 보고, 사람은 마시는 물로 보고 물고기는 자기 집으로 보고 아귀나 귀신들은 불로 본단 말입니다.

 그러면 성인들은 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자들만이 바로 봅니다. 천상사람이나 인간존재나 귀신이나 고기같은 것은 다 바로 못봅니다. 자기 업장에 가리어서 바로 못봅니다. 사람들은 육안으로 보고 천상사람들은 천안으로 보고, 그러나 부처님이 불안佛眼으로 보시면 부처 불佛자 눈 안眼자, 불안佛眼으로 봐야만이 참다운 실상이 보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가상假相인 것이고 부처님이 보는 것이 실상인데 실상으로 본다면 모두가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즉 불성佛性이요 불심佛心은 다같은 뜻인데 다 불성으로 봅니다. 이렇게 여러 불자들이 각각이 계셔도 부처님께서 보시고 성인들이 보신다면 다같이 하나의 불성으로 부처로 본단 말입니다.


 집안에서 아들을 보나 딸을 보나 미운 짓을 하나 예쁜 짓을 하나 다 부처로 봐야만이 바로 본 것이란 말입니다. 참으로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쉬운 가르침입니다. 가장 행복스런 가르침입니다.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부처로 보고 자기 남편이나 아내를 부처로 보고 하는 것같이 행복스러운 가정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들이 학생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를 하는 분도 똑같습니다. 자기 당 사람이 아니어도 모두를 부처님으로 봐야만이 바로 보이고, 바르게 결론이 나옵니다. 또 바른 합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 가장 그릇된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집착하는 근본주의根本主義입니다. 근본주의는 꼭 자기생각만 옳다는 주의입니다. 기독교 믿으면 기독교만이 옳고 불교 믿으면 불교만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공자의 말씀, 석가모니 말씀, 예수 말씀은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영원적인 도리, 영원적인 진리 즉 불교로 말하면 불성이고 불심이고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표현이 다르다고 해서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성자가 아니고 공자가 성자가 아니면 몰라도 성자라고 한다면 차별로나 분별심으로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실상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다만 역사적인 사유에 따라서 표현만 달리 하겠지요. 오늘날에 와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근원의 자리에서 실상적인 성품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모두가 다 분명히 어김없는 부처님 화신입니다. 다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다 부처님같이 보라는 공부가 화두공부요 바로 염불공부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애쓰고 의심할 것이 아니라 다 모두 부처님같이 보라는 것이 화두공부입니다. 본래면목 자리에서 보라는 것이 화두입니다.


 나무아미타불하면 아미타 부처님이 저밖에 어디 가서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심이, 내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이고 그 모든 사람, 또 모든 환경이 다 아미타불이란 뜻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오직 부처님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우리 중생은 겉으로 보기 때문에, 상으로 보기 때문에 모두가 돌이면 돌, 나무면 나무로 보이지만 근원적으로 바로 본다면 모두가 다 부처님같이 보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공부를 해 가시면서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그때는 바로 보입니다. 혼탁混濁한 물도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고 바닥이 보입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 마음도 혼란스럽고 산란스럽지만 참선 염불을 부지런히 하다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마음이 가라앉아서 마음바닥이 보인단 말입니다. 마음바닥이 무엇인가. 바로 불심佛心이고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 공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간에 화두공부를 하나, 염불공부를 하나 또는 반야심경을 외나 모두가 다 성불의 길입니다. 그래서 무슨 공부나 다 좋은 것인데 다만 중요한 것은 먼저 해오로 철학적으로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인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의 진리를 인식해놓고 이론적으로 깨달아 놓고서 차근차근 우리 업장을 녹여야 합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라, 이치로 문득 깨달아 놓고서 본래 부처의 자리를 증명(證悟)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셔서 한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원드리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金輪



정리 / 자훈慈薰 박 병 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