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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19호 끊임없는 부처님 공부로 향광장엄을 합시다

금륜 19호 불기 2546년 4월 】



끊임없는 부처님 공부로 향광장엄을 합시다


이 글은 2002년 2월 26일 성륜사 신사년 동안거 해제법문입니다.

 


 선방에 계시는 우리 대덕스님들이나 후원에서 공부하시는 재가 불자님들, 정진하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해제解制날은 공부를 다 마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부를 점검하는 날입니다. 과연 내가 얼마만큼 공부가 되었는가, 집요한 내 상은 얼마만큼 줄었는가, 또는 내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하더라도 과연 내가 지금 부처가 되어 있는가, 또는 부처를 향해 몇 걸음이나 앞으로 전진해 있는가를 재점검하는 날이 바로 해제날인 것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범부凡夫가 성인으로 달라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최상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범부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비록 본래 부처의 성품은 똑같다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나쁜 우리 버릇을 떼지 않고서는 본래 부처인 그 자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번뇌망상煩惱妄想을 지극히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중생은 번뇌망상을 도저히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번뇌망상을 떼는 데 있어서 가장 최상의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곧 반야지혜般若智慧가 없으면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범부를 초월해서 성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반야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반야의 지혜는 일체존재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이른바 일미평등한 생명의 실상을 확연히 보는 실상의 지혜입니다.

 부연하면 이것인가, 저것인가 또는 나요, 너요 하는 등의 아상我相을 내고 인상人相을 내고 또는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내는 것이 중생인데 이러한 상을 지양하고 모든 상을 여의고 모든 것이 하나인 도리를 보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의 지혜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나와 남이 분명히 둘이고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있는 것이고 선과 악의 분별이 있는 것인데 왜 모두가 하나라고 보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 중생들이 겉(表)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차별 분별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 때문에 즉 겉밖에 못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생이 근본성품을 볼 수 있다면 모두가 다 한결같이 부처의 성품입니다. 부처로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의 참선공부를 가리켜서 불교술어로 불심종을 닦는다고 합니다. 부처 불佛자, 마음 심心자, 불심종佛心宗을 닦는 것인데 요즘 세상이 발달되고 또는 혼란스러우니까 사람들이 마음을 어디에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명상법이 아주 난립해 있습니다.


 별별스런 명상이 다 있습니다. 기氣 운동이네, 단전호흡이네 별별 것이 다 있습니다. 또 같은 불교지만 미얀마나 스리랑카나 태국 등에서는 위빠사나(관조법觀照法)를 합니다. 위빠사나도 훌륭한 법이지만 달마스님한테서 전해받아 내려오는 순수한 참선은 못됩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선 일반 보통명상과 참선법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가지셔야 합니다. 자고로 우리 불가에 참선을 분별하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별할 때는 분별에 대한 명확한 견해가 있어야 다른 것과 구분해서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외도선外道禪이 있습니다. 외도선이 무엇인가 하면 불교 밖에서 하는 명상이나 선을 말합니다. 인과도 모르고 부처님 가르침도 믿지 않고 그냥 덮어놓고 “명상하면 몸도 좋아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재수도 있다”. 이런 정도로 인과도 떠나지 못하면서 닦는 법이 외도선입니다.


 둘째 범부선凡夫禪입니다. 범부선은 부처님 법을 어렴풋이 믿기는 믿습니다. 좋은 일 하면 반드시 행복이 오는 선인선과善因善果라, 나쁜 일하면 또 반드시 나쁜 과보로 해서 고통이 오는 악인악과惡因惡果가 있는 것을 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피하고 좋은 선을 닦는 것으로 해서 마음을 맑히는 법이 범부선이지요.


 셋째 소승선小乘禪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 속에 들어와 닦는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승선大乘禪이라야 참다운 부처님 법입니다. 거기에 비해 소승법은 근기가 낮은 사람한테 제시한 법인데 소승선이란 나라는 존재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닦는 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꼭 본래로 존재한다, 실존적인 것이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소승선도 못됩니다. 적어도 소승선만이라도 되기 위해서는 “나라는 것이 본래 무아다, 또는 무소유다” 이렇게 알아야 이른바 소승선입니다.


 넷째로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들어가는 가장 어려운 관문이 무엇인가 하면, 나라는 것이 원래 실제로 있지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 관문을 통과해야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문을 통과 못하면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특징은 그러기에 무아無我입니다. 무아라는 말은 쉽고 간단하지만 무아를 내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또는 얼마만큼 내가 무아로 들어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대개는 다 한심스럽습니다.

 무아란 것은 우리 중생이 욕심을 내니까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로 무아란 말입니다. 본래로 내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불교의 가장 초보적인 특징이 제행무상입니다. 제행무상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존재가 항상함이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고유한 것이 없습니다. 산이나 내(川)나 우리 생각이나 모두가 다 그때그때 변화무쌍해 마지 않습니다. 그대로 가만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가장 강도가 높다는 다이아몬드도 그대로 가만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현미경으로 볼 때는 순간순간 그저 마멸되어 갑니다. 이른바 닳아져 갑니다. 어느 순간도 똑같은 것이 없다는 말은 바로 없다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때그때 변화해 마지않는다, 이것이 제행무상입니다. 변화해 마지않으니까 필연적으로 제법이 무아라,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어제의 나나 오늘의 나나 지금의 나나 같아야 나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한다면 항상 같은 자기는 없단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범부의 망상으로, 태어날 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똑같다고 보는 것이지, 그동안 우리 세포는 신진대사해서 몇 천 번 바꿔지고 다시 새로워지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번뇌망상으로 보기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사실은 내 소유도 없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내 소유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꼭 내 소유다, 이것이 내 것이다 생각하니까 내 몸뚱이가 있고, 내 집이 있고, 내 아내가 있고, 내 남편이 있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본래로 무상한 존재라면 그것은 허무한 존재란 말입니다. 그 무아의 존재, 내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닦아야 비로소 소승참선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대승참선은 못됩니다. 대승명상大乘瞑想은 무엇인가? 대승명상은 나도 역시 없고 또 우리 주변에서 보는 모든 대상이 다 허망하단 말입니다. 모든 대상이 보는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대승입니다.


 옛날에는 이런 소식을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행히 현대의 과학문명은 모든 것이 다 변화무쌍하고, 항시 그대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는 물질이나 에너지나 모두가 다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란 것은 아무리 분석해봐도 그 위치라든가 그 운동을 정확히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을, 성인들은 직관력으로 훤히 아십니다.

 그래서 나만 허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적으로 보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상식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상식을 초월한 가르침입니다. 성인 자체가 모든 것을,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업에 가리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것을 다 비뚤어지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욕심을 내고 지나치게 진심瞋心을 내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의 근원은 우리가 지금 바르게 보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본다면 나라는 것도 다 허무한 것이고 너라는 것도 허무한 것이고 내 재산, 내 패물 등 소중하게 아끼는 모든 것이 다 허무한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죽을 때 아무 것도 못 가지고 갑니다. 자기 몸뚱이도 못 가지고 가는데 무슨 패물인들 가지고 갈 수 있으며 대통령했다고 해서 그 직함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도 공空하고 대상 또한 허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 허망하다고 느끼고 마음을 닦아야 비로소 대승참선이 됩니다.


 참다운 참선법은 최상승선이라야 하고 참다운 참선법이 되어야 비로소 참선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할 때 저 밑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하는 분별시비에 얽매여 있으면 참다운 참선이 못됩니다. 최상승, 참다운 참선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고 보고 닦는 참선입니다. 나도 부처고 너도 부처고 모두가 다 이른바 진여불성 뿐이라고 느끼고 닦아야 합니다.

 성자가 보면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 업장대로 봅니다. 우리가 똑같은 달을 본다고 하더라도 슬퍼서 보면 달도 눈물에 어리어서 보이겠지요. 그러나 기쁠 때는 달님도 미소를 띠고 있는 것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항시 업의 눈으로, 업의 프리즘으로 비춰봅니다. 따라서 인과도 무아도 다 무시하고 나도 있고 너도 있고 하는 상만 잔뜩 가지고 앉아 있으면 참선이 못됩니다. 그렇게 참선을 하면 안 하는 것보다는 좀 나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범부를 초월해서 성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돈오頓悟란 말씀을 들으셨을 줄 압니다. 돈오는 문득 깨달아버린단 말입니다. 문득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 범부가 단박에 성인이 되기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치로는 생각할 힘만 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유하는 힘이 있고 판단하는 힘이 있으면 학문을 많이 안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인지라, 적실하게 진리에 걸맞는 가르침은 안 배운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말씀해 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득 “아! 정말로 내 마음이 부처고 천지우주가 부처아님이 없구나” 이런 소식을 들으면 보통사람들은 다 마음이 편해지고 어떤 사람은 말만 들어도 마음이 문득 깨닫는 경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먼저 선오후수先悟後修라, 먼저 이치를 깨닫고 닦아야 합니다. 이치는 무슨 이치인가? 반야般若의 지혜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의 부처님뿐이다, 하나의 진리뿐이다, 하나의 생명뿐이다, 이렇게 되어야 반야지혜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없으면 불법佛法이 못됩니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기도를 모시든 간에 반야지혜가 반드시 전제가 되어 공부를 해야 됩니다. 가령 우리가 남한테 무엇인가 베풀고 사회봉사를 하면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상대적인 생각을 못 떠나고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자리에 서서 그 사람이 나보다 구차하니까 도와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베풀면 그것은 참다운 베풂이 못됩니다.


 이른바 유주상보시有住相布施, 상이 있는 보시는 참된 보시가 못됩니다. 상대를 떠나서 저 사람과 나와도 본래로 둘이 아니다고 보고 베풀어야 무주상無住相 보시입니다. 사실로 둘이 아닌 것인데 우리 중생이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나누어서 보는 것은 우리의 허물입니다.


 생명이란 것은 시간위에 있는 것이어서(육체적 생명) 소중한 시간을 한달 두달 몇 달씩을 참선한다는 것은 정말로 많은 복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데 모든 인연을 끊고 몇 개월씩 또는 몇 년씩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지극히 큰 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시간을 허송세월말고 공부하셔야 됩니다. 참선할 때 가장 큰 두 가지 원수가 있는데 산란심散亂心과 혼침昏沈입니다.

 산란심이란 이것인가 저것인가 자꾸 헤아리고 상대방에게 섭섭한 마음을 내고 또는 좋아하는 마음을 지나치게 내는 것들이 산란심입니다. 부처님 법에서 보면 사실은 누구를 섭섭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지나치게 애착을 품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똑같은 부처님 화신化身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보면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일체만법一切萬法 자성기연自性起緣이라”, 자성自性이 스스로 인연 따라서 사람을 포함한 자연계 모두가 이렇게 나툰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나 자연계나 이 환경 모두가 어디서 왔는가 하면 모두가 다 자성, 곧 불성에서 왔다는 말입니다.

 나쁜 사람이든 또는 좋은 사람이든 사자나 곤충, 미물이든 다 근원적인 제일원인第一原因은 모두가 불성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자성이란 말이나 불성이란 말이나 같은 뜻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체만법이 자성기연이란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모든 만물이 불성에서, 부처님한테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불성의 바다에서 거품이 일어나듯이 그때그때 나온 것이 모두가 다 마음이고 제법諸法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때 마음이 지독하니 무슨 섭섭한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기 버릇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섭섭한 것도 근원을 따져보면 “부처한테서 왔는데…”라고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해소가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좋아하는 마음도 우리 중생은 자기 업으로 보니까 자꾸만 끝도 가도 없이 분별심을 냅니다. 그래서 산란심을 제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공부가 안되는데 이런 것이 산란심입니다. 몇 시간동안 앉아있어도 산란심 내다가 끝나버린 경우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 다음이 혼침昏沈입니다. 공부가 좀 잘돼간다고 생각이 들면 그때그때 피로하니까 꾸벅꾸벅 혼침이 옵니다.

 산란심과 혼침은 우리가 참선공부할 때, 찾아오는 두 가지 원수입니다. 혼침과 산란심을 이기고 극복해야 이른바 본래 마음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본래 마음자리는 조금도 흠절이 없는 아주 영롱하고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바로 부처님인데 산란심 때문에 바로 가지 못합니다. 산란심은 금생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과거전생부터 짊어지고 온 우리의 업입니다. 금생에 잘못 배우고, 특히 사회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실은 산란심입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참선할 때는 우리 마음을 아상我相이라든가 대상적인 모든 것을 비워버려야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무기’란 용이 되려다 못되고 못이나(방죽같은 곳) 그런데서 죽치고 살고 있는 구렁이가 이무기인데, 그 생명체에도 불성이 들어 있습니다. 용은 못되었어도 불성이 있어서 용이 되려고 합니다. 모든 존재가 좋은 쪽으로 차근차근 진화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진화론도 허무맹랑한 말이 아닙니다. 일체 존재는 어느 것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모두가 다 본래 불성이 있어 진화하는 것입니다.

 불성 아닌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성자가 본다면 모두가 다 일매지게 부처님의 성품, 곧 자성으로 본단 말입니다.


 제가 육조단경을 번역하려고 이래저래 여러 차례 읽어보고 조사해 보니까 자성이란 말이나 불성이란 말이 백 군데가 넘습니다. 자성·불성은 바로 우리의 주체성입니다. 참다운 자기입니다.

 우리가 보통 참 자기를 잊어버리고 사니까 우리가 함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자성·불성을 모르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바르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성에서, 불성에서 연유되어 만유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자성에 안주해 버려야 비로소 마음의 산란심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내 자성이 불성이기 때문에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성에 안주해야 참다운 신앙심도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소승신앙과 대승신앙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소승신앙은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하는 점입니다. 부처님을 마음 밖에서만 구한다는 점입니다.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참다운 부처다”라고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처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내 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성입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 분별하여, 이분법 삼분법으로 분할하면 절대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안정이 안되면 공부도 안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의 진리, 하나의 부처입니다. 육조스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역설하고 싶으셨으면 백 번 이상이나 똑같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자성·불성·불심이란 말씀은 다 똑같은 뜻입니다. 꼭 외어두셔서 모든 것이 모양은 달라도 근본성품은 모두가 부처님이요, 불성이요, 자성이란 생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남한테 보시할 때나 남에게 가르칠 때나 자녀를 가르칠 때나 그 대상, 상대방은 자기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두 부처라고 보고 베풀고 가르치셔야 합니다. “내가 낳았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의 기운을 받고 다만 인연 따라서 잠시간 부모의 인연을 빌렸을 뿐입니다. 모두 다 인연이야 어찌 되었든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저같이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공부를 다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성불成佛하기가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생각만해도 마음이 편하고 몸도 편합니다. 본래 부처가 헤매다가 본래 부처자리, 자기 고향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 공부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향광장엄香光莊嚴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향광장엄은 자기 마음이나 자기 몸을 향기나 빛으로 장엄을 시킨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할 때와 자기 기분이 나쁠 때와 그 표정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부처님은 삼십이 대인상大人相과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를 지니셨기 때문에 어디에도 조금의 흠절欠節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지혜와 자비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무수생 동안에 나고 죽고 하시면서 때로는 남한테 물질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낳고 굶주린 호랑이를 위해서 자기 몸을 조금도 회한없이 몽땅 바쳐버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삼십이대인상 팔십종호라는 원만덕상圓滿德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얼굴을 이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 마음이 흐뭇해지고 감사해지고 하지 않습니까? 자비나 지혜가 원만한 부처님의 덕상이기 때문입니다. 향광장엄, 향기와 광명으로 우리 마음과 몸을 장엄시키는 법은 무엇인가? 그런 법이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향광장엄이 되려면 무슨 어려운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시비분별을 떠나서야 합니다. 사실로 시비분별도 허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데 괜스레 잘못 봐서 허튼 시비분별을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를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또는 부처님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생각생각에 부처님 생각을 이어 가는 것이 바로 향광장엄입니다.

 우리 몸에다 향을 간직하면 우리 몸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또한 끊임이 없는 향기란 말입니다. 진리의 향이고 자비의 향기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또는 화두공안話頭公案으로 해서 화두공안에 드는 것도 모두가 다 우리 본래 면목자리, 우리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우주가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처님 생각을 이어가면 바로 그것이 향香과 광명光明이 되어 향과 광명으로 우리를 장엄시키는 것이 됩니다.

 오늘 해제解制날에 다시 스스로 공부를 재점검하셔서 향광장엄으로 가장 행복스럽고 우리 주변을 정화淨化시키는 일상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金輪


정리 / 자훈慈薰 박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