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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17호 계율戒律이 청정해야 삼매三昧를 얻는다.

금륜 17 불기 2546년 2월 】

 

 

 

 

 계율戒律이 청정해야 삼매三昧를 얻는다.



이 글은 청화큰스님께서 불기 2545년 11월 29일 성륜사에서 행하신 동안거 결제법문입니다.



 오늘 같이 음산한 날씨에는 저희같이 고희古稀가 넘고 팔십이 가까운 사람들은 한결 심각한 인생의 허무를 느낍니다. 부처님 공부는 조금도 무리한 공부가 아니라는 말씀을 오늘 삼동결제三冬結制를 하시는 여러분께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 공부는 한 마디로 본래本來대로의 공부입니다. 우리 중생은 본래대로 있는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망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따르는 업을 짓고, 인생고의 여러 가지 재난을 스스로 지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방금 여러분들이 들으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중심사상인 “귀의 삼신불歸依三身佛하라” 또는 “삼보에 귀의하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깨달으라” 는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참선參禪의 근본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 왔지마는, 적어도 문리를 배제背除하고 오직 마음만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달마 스님 때부터서 특히 역설, 강조되어 왔습니다. 달마 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입니다. 두 이二자 들 입入자 넉 사四자 행할 행行자, 이입사행론은 이입理入이라, 다스릴 이理자 들 입入자로써 먼저 이치로 들어가고, 또 행입行入이라, 행할 행行자 들 입入자인데 우리가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이른바 행동으로 옮긴단 말입니다. 이치理致로 들어간다고 하는 말은 달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한다면 “일체중생이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일체 모든 중생이 다 한가지의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상식으로 중생衆生이라 할 때는 사람만 중생이라 생각하지마는, 또는 일반 동물만 중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마는 부처님 가르침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합니다. ‘중생’ 이라 하면 유정중생有情衆生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는 “무정중생無情衆生이라,” 동물이 아닌 식물이나 그런 것이 다 중생 가운데에 포함됩니다.

 또 “무색중생無色衆生이라,” 모양도 없지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관념이라든가 우리의 사고도 없을 무無자 빛 색色자, 모양이 없는 중생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중생’ 하면 유정중생과 무정중생 그리고 무색중생 모두 다 포함해서 중생이라 합니다. 그래서 “일체중생一切衆生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동일진성이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중생 모두가 다 하나의 참다운 성품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상相만 보기 때문에 우리 중생과 깨달은 분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은 현상적인 상만 보는 것이고, 깨달은 분은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봅니다. 바다에 비하면 바다 물결만 보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고, 깨달은 분들은 그 물자체物自體를 본단 말입니다. 즉 성품性品을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현상계現象界 모두가 다 중생에 포섭이 됩니다. “모든 중생이 동일진성이라,” 하나의 참다운 성품이란 말입니다. 진성이라 할 때도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법성法性·법신法身·불성佛性·불심佛心 또는 자성自性·본래면목本來面目 등 모두가 참다운 성품, 진성眞性에 해당합니다. 조사祖師님들이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말씀을 많이 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되지마는 뜻은 같고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 동일진성이라” 는 달마 스님 말씀은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범부들은 자꾸만 분할해서 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운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고, 이렇게 나누어 봅니다.


 성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래 성품을 본다면 본래 모두가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범부와 성자는 그러한 구분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삼동결제를 하는 것도 잘못 보는 범부중생凡夫衆生의 망념妄念을 떠나서 모든 생명의 본래 자리, 실상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공부에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근래 중국에 허운虛雲 대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빌 허虛자, 구름 운雲자’ 허운 대사는 위대한 선지식善知識입니다. 허운 대사는 120세까지 장수를 했습니다. 1959년에 돌아가셨으니까 얼마 안된 분입니다. 교학적으로도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신심信心도 독실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보타산普陀山에서 오대산五臺山까지 갈 때 삼년배행三年拜行을 하셨습니다. 절 배拜자 행할 행行자입니다. 삼보일배三步一拜, 도보로 세걸음 세걸음을 보행하면서 땅을 향해서 오체투지五體投地 한번씩 하는 것이 삼보일배행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범부 중생들은 얼마나 업장이 무겁습니까?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본래는 업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몸을 받아 나와서 삼계를 윤회輪廻하는 중생차원에서는 굉장히 업장이 무거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는 분들은 삼보일배하는 배행이 참으로 숭고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게 안해도 되지만, 그것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허운대사는 삼년 동안 한 데서 자고 한 데서 걸음 걸으면서 그때그때 조금씩 얻어먹고 하면서 세걸음 떼고 또 한번 땅에 대고 오체투지하며 오대산까지 가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공부는 얼마만치 진실하게 했는가를 미리서 짐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중국 당나라 때나 수나라 때, 인도까지 가서 법을 구하는 스님네(求法僧)가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의 혜초慧超대사도 구법승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때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사막을 넘어야 되고 또 히말라야 산맥과 파미르고원은 고도가 평균 오천미터입니다. 그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됩니다. 그런데 도보로 가니까 꼬박 가는 데에만 삼년 걸렸습니다. 삼년 걸려 무난히 다 가는 것이 아니라, 국경을 몇 십 개나 넘어야 합니다.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열 사람쯤 가면 보통 아홉 사람은 물러나거나 죽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법을 구했습니다.

 어째서 그와 같이 까다롭게 법을 구했는가 하면, 부처님 당시에 해놓으신 법문이라든가 그 뒤에 훌륭한 조사가 해놓은 법문들이 중국으로 한꺼번에 다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 것 들어오고, 저 것 들어오고 했기 때문에 무슨 경經을 보면, 그 속에 여러 가지 다른 경 말씀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볼래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 불경 속에 들어 있는 경을 다 보기 위해, 중국 가서 경을 다시 또 모셔와야 했습니다. 꼬박 삼년 걸리고 또 인도 들어가서 그냥 말(語)이 안 통한단 말입니다. 외국 갔다 온 사람들은 짐작이 되실 겁니다. 외국어 실력이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가를 말입니다. 인도에 가서도 역시 그쪽 말을 배워야 됩니다. 그것이 또 몇 년 세월 걸려 버린단 말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려고 해도 그냥 빈 걸음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불경佛經을 또 몇 십 권 짊어지고 와야 됩니다. 갈 때도 삼년 걸리고 거기서 머물면서 공부도 하고 말도 배우고 하는 데서 사오년 걸리고 올 때도 지루했겠지요. 또 삼사년 걸려 버린단 말입니다. 한번 갔다 오면 보통 이십년 걸립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경전經典을 중국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할 때 조금 무엇이 불편스럽다든지 또는 재가불자들이 집안에서 공부할 때도 공부하지 않고,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쉬는 게으른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범부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달마 스님 말씀과 같이 “일체 중생이 동일진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금생에 그렁저렁 편히 살고 부처가 안되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못되면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를 뱅뱅 윤회합니다. 윤회전생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안되고 그렁저렁 살면 업業만 짓는단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사람 몸 받은 것도 과거 전생에 사람 몸 받을 정도로 다섯가지 계율 정도는 닦았기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십선계十善戒를 닦았으면 천상에 태어났겠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천상이라 하면 천상이 어디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셨겠지, 방편법문方便法門이겠지”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이렇게 있듯이 천상天上도 역시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실상세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헤매는 영가생활이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너무나 까다로운 말씀을 해서 여러분들이 긴장을 하시니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마음을 푸셔서 부처님 공부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옹색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우리는 부처를 어디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없습니다. 본래 우리 마음의 본성이, 본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참다운 법신부처가 없고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귀가 닳도록 자주 듣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道를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달마 스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우리 불성이나 또는 개(犬)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천지우주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뿐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서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 부처와 중생이 모두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자꾸 갈라서 분할을 시킵니다. 분할시켜서 둘이나 셋으로 보는 것이 중생일반입니다. 그리고 본래적인, 근원적인 생명 자체를 깨달은 것은 역시 성인聖人이고 부처입니다.

 그러면 이와같은 성인이나 부처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시겠지마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제일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저도 공부하는 중입니다. 어째서 쉬운 것인가 하면, 천지우주의 본래자리가,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로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따르는 것이 우리 건강으로 보나, 우리 마음으로 보나, 제일 편하고 제일 쉽습니다.


 가령 우리가 한 가정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부처기 때문에 남편도 아내를 부처같이 생각하고, 아내도 남편을 부처같이 생각하고, 아들딸들을 부처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애써서 부처같이 보려고 해야 합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부처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參究하고 염불念佛하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일체중생이 부처인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며칠동안 불행한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같은 사람이 조금 더 법력法力이 있으면, 저런 분들을 다 구제해 줬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 법력이 없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하다 못해 예수 같은 법력만 있어도 만져서 낫기도 하고 또 가만히 보고 있어도 낫기도 하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그런 법력이 없으니까 여태까지 “팔십 다 먹어 가면서 중생들한테 빚만 지고 참 게으름만 많이 피었구나” 하고 참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 공부가 어렵다고 해서 기피하면 큰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가불자님들이 이십명 정도 결제結制를 하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공부하실 때에 꼭 주의해야 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증선暗證禪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울 암暗 자 증명할 증證자, 암증선입니다. 우리가 우리 공부를 스스로 점검을 못하고 어두운 가운데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 공부를 치우치게 해서 공부에 여러 가지 차서次序가 있는 것을 모릅니다. 가령, 『수능엄경首楞嚴經』을 두고 말한다면, 『수능엄경』에서는 선禪의 골수骨髓라 해서 선수禪髓라고 합니다. 왜 선수인가 하면 『수능엄경』에 보면, 우리가 참선할 때는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지의 참선의 차서가 갖추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지의 참선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런 차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과거 전생에, 숙생宿生에 많이 닦아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한마디로 깨달아 버리면 좋을 텐데 보통 차원普通次元에서는 그렇게 안됩니다.


 역시 분분단단分分段段으로 닦아서 올라가야 합니다. 모두가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돈오頓悟 다음에는 암중모색할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올라가는 차서를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되고, 생활은 어떻게 해야 우리 공부가 빠를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부처님 법대로 잘 따르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암중모색할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같이 아침부터 안개가 끼어 있으면 앞뒤가 잘 안보입니다. 우리 공부도 똑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앞뒤를 훤히 알고 지금 내 공부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가, 앞으로 어떤 지표에 따라서 공부할 것인가를 안다면 암중모색하지 않습니다. 암중모색하면 공연히 교만심만 일어납니다. 가령 어느 경계에도 이르지 못해 가지고 무엇인가 한계를 모르니까, 자기 공부가 웬만히 되었다고 교만심을 내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문자선文字禪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불경을 많이 봐 가지고 예를 들면, 능엄경楞嚴經도 법화경法華經도 보고 구사론俱舍論도 보고해서 공부하는 차서에 따라서 올라가는 한계는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으로 해서 공부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닦아서 그 자리를 증명해야 참다웁게 아는 것인데, 그냥 이치, 이론으로만 알아 가지고 닦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불가佛家에서는 문자선, 또 구두선口頭禪이라 합니다. 입으로만 안단 말입니다. 문자선과 구두선을 안해야 합니다.

 세번째는 야호선野狐禪입니다.

 야호는 들여우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진리를 증명하지 못하고도 증명했다고 하고, 어떤 경계를 성취했다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단 말입니다. 여우가 꾀가 많아서 거짓이 많지 않습니까. 사람도 짐승도 속이는 간교한 꾀가 많습니다. 여우처럼 교활하게 속이고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은 야호선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경계해야 하고, 문자만 알고 입으로만 알고서 실지로 닦지 않는 문자선·구두선을 안해야 하고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 하거나 또는 수승殊勝한 경계를 체험도 못하고도 체험했다 하는 야호선을 안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주의해서 공부하실 것이고,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존재가 본래로 오직 하나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확실히 알고 또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꼭 계율이 청정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만 닦으면, 그만인 것이지 계율이사 다 마음 따라 가는 것인데, 아무렇게나 살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음 닦는 공부는 여러 가지로 복합적으로 계행도 거기에 곁들어 있어야 되고 지혜도 거기에 곁들어 있어야 되며, 선공덕善功德도 복합적으로 합해져야 이른바 공부가 이루어집니다.

 음식만 함부로 먹어도 절대로 공부가 안됩니다. 근래에 우리 스님들이 음식을 함부로 먹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뜻이 아닙니다. 또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남녀 이성간의 성적性的인 문제도 절대로 금해야 됩니다.

 

 『수능엄경』에 보면, “부단음심不斷淫心이라”, 사람이 음심을 끊지 않으면, 남녀 이성간의 음탕한 마음을 끊지 않고서 선정에 들려고 한다면 “여증사작반如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드려고 하는 것이나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 재가불자님들, 명심하셔야 됩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육재일六齋日 계행 지키는 것을 잊지 말으셔야 됩니다.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하다못해 육재일(음8, 14, 15, 23, 29, 30일)만이라도 출가出家한 셈치고서 부처님 계율을 지켜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살고 있습니다. 욕계라는 것은 색계만도 못하고 무색계 만도 못합니다. 욕계·색계·무색계 삼계를 초월해서 참다운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욕계의 특징이 무엇인가, 욕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이란 말입니다. 가정에서 지금 화목하게 가족생활을 하시는데 이런 말씀드리면 “아, 자기가 성자니까 우리네 가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정에 부부관계가 형성되면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냥 문란스럽게 서로 사는 데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법의 도반道伴, 똑같은 법의 도반이 되어서 같이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가는 데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렇게나 그냥 문란하게 사는 것이 부부의 본질本質이 아닙니다. 금생에 부부가 된다는 것도 굉장히 소중한 인연 아니겠습니까. 과거 전생에도 부부간도 되고, 형제간도 되고, 그렇게 해서 금생에 부부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의 본래 사명자체使命自體가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성불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외간도 가급적이면 식욕 문제라든가, 남녀이성 문제는 절제하고 도반으로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외간의 참다운 도리인 동시에 우리 불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의무인 보살행菩薩行이기도 합니다.

 

 저는 조주趙州 스님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마는, 조주 스님은 먼저 서두에서 설명드린 천구백오십구년에 열반 드신 허운 대사와 똑같이 백이십세를 사신 분입니다. 대체로 장수하신 분들을 보면, 덕德이 많습니다. 물론 전생에 자기 업 따라서 금생에 수명壽命을 받기도 하지만, 대체로 덕이 많은 분이 오래 사는 것 같아요. 그것은 왜 그러는가 하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자기 혼자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덕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하루에 몇 번씩 공양을 먹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 벌어서 농사를 지어서, 길쌈을 해서 입고 먹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남의 덕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절도 부처님 도량道場을 만들기 위해서 불자들이 시주를 하고 목수가 고생하고 여러 사람들이 공을 들여서 이와 같이 절이 만들어져 수행이 가능한 공간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사실은 ‘살려 주는 것’ 이지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절대로 분할分割이 안됩니다. 여기 몇 백 명 불자님이 계십니다마는, 우리가 뿔뿔이 김이라는 존재, 박이라는 존재로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모두가 붙어 있습니다. 눈에 안보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나, 공기나, 나무나 다른 어떤 돌멩이나 모두가 우리 생명하고 별도로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소 차원元素次元, 원자 차원原子次元에서는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생명은 따지고 보면, 근본 바탕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코지하면 자기 자신한테 그냥 보복이 옵니다. 다른 생명을 우리가 존중하면 그 공덕이 바로 자기한테 옵니다.


 우리가 삼동결제三冬結制하고 스님네는 선방에서 오로지 좌선坐禪 공부를 합니다마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젊은 스님들도 많이 계시는데 마땅히 사회에 참여해서 사회봉사도 하고 해야 할 것인데, 젊은 사람들이 선방에서 자기 좋다는 식으로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 산중에 가서 혼자 토굴에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공부하는, 마음을 맑히는 그것이 벌써 우주를 맑히는 것입니다. 선방禪房에 있으나, 자기 방에 있으나, 어디에 가 있으나, 우리가 공부하면 우리 생명 자체가 모두 다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 혼자 공부가 아니라 공부하는 그것이 우주 전체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는 법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어느 것도 모두 다 본래 부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일정하게 꼭 어느 식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좁은 공부라든가, 배타적인 공부는 어느 식만 옳다고 할 수 있겠지마는, 적어도 부처님 공부는 부처님이 어디에 별도로 계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일매지게 똑같이 모두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화두를 참구하는 것도 또는 염불을 하는 것도 또는 주문을 외우는 것도 모두가 다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안 여의고 한다면 다 옳은 공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요즘 저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대강 보시고 짐작이 되시겠지마는, 저 같은 사람은 신문을 안 보는 주의니까 잘 모르지만, 그 사람들 싸움은 지금 주로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세 가지 종교의 싸움입니다.

 이 세 가지는 어떤 것인가 따지고 보면, 창조주 하느님이 있고 모든 존재는 다 창조받은 피조물입니다. 그와 같이 하느님과 중생간을 나누어 봅니다. 그렇게 나누어 보는 특징을 지닌 세 종교들입니다. 제가 지금 비방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로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근거로 본다면 결국 셋이 똑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것, 같은 것 가운데서도 꼭 자기 식으로 믿는 것만 옳고 자기 식으로 믿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철학적으로 근본주의라고 합니다. 또는 원리주의라고도 합니다. 우리 불교용어로는 ‘법집法執’ 이라 하겠습니다. 화두를 공부한 사람들은 “꼭 화두만 의심해야 성불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들은 “꼭 염불만 해야 한다” 한다면 모두 다 이런 것도 결국 하나의 법집인 것입니다.


 항시 말씀드립니다마는, 서울서도 오고 부산서도 오고 하시는데, 제가 한 이십분이나 말씀하고 그만 둘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몇 말씀을 더 드립니다. 불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제일 쉽고 마음 편한 공부입니다. 나한테 부처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래장如來藏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여기서 장자는 감출 장藏자, 부처가 나한테 들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란 만덕萬德의 자리입니다. 만덕의 자리란 말은 지혜나 행복이나 자비나 능력이나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래장이라고 합니다. 여래장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래장이나 부처님이나 마음이나 다 똑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여래장이나 법성이나 법신이나 불성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족하더라도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일체존재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인연 따라서 화두를 의심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주문을 하든지 상관없이 다 성불합니다.


 삼동三冬에 그렇게 부담 없이 공부하시고 음식을 주의하시고 고기 자시지 마시고 또 많이 자시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또 가족 생활에서도 내외간에 동기同氣가 되셔서 청정하게 적어도 삼동결제만은 재가불자님들도 우리도 못한 것이 없다 하시고 철저한 절제 생활을 하시면서 공부하시면 틀림없이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보실 것입니다. 법희선열이 무엇인가, 불교 용어로 말하면   ‘경안輕安이라,’ 가벼울 경輕자 편안 안安자,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편안하다는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할 뿐만 아니라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수명도 길어집니다. 자기 피가 청정해지니까 다른 병이나 유행병流行病도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피가 오염될 때 몹쓸 병들이 생기는 것인데 에이즈나 무슨 병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피가 오염되어서 결국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을 절제하고 주의하십시오.

 욕심도 굉장히 큰 해독을 우리한테 주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지금도 금생에 사람으로 왔고 또 그대로 살면 내생來生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단을 내리셔서 꼭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하십시오. 부처님 말씀은 우리를 최상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법희선열이라,” 법에 따르는 기쁨이, 한도 끝도 없는 행복감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법희선열을 맛보고 계시면 며칠 동안, 몇 십일 동안 공부해도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건강에도 좋고 집안에도 좋고 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 않습니다. 金輪




정리 / 자훈慈薰 박병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