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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26호 금타선사의 가르침 (상)

금륜 26호 불기 2546년 11월 】

 

 

 

금타선사의 가르침 (상)

 

 

이글은 큰 스님께서 2002년도 10월 27일 성륜사에서 하신 금강심론 특별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날씨도 쾌청하고 계절로 봐서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인데 이렇게 많이 오셔서 대단히 반갑고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모양이 없으면서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실존적인 생명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모양이 없지만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모양을 허상 적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라 하는, 모양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나 법신法身 부처님도 역시 모양은 없지만 우주의 진리로 존재하는 실존적인 하나의 생명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알라신이나 바라문신이나 모두가 다 모양이 없으면서도 존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입니다.

 

형상이 있고 또는 이름이 있어야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양이 없으니까 비교할 수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간단한 논리로 보더라도 부처님이나 하나님이나 알라신이나 또는 바라문 신이나 우리 마음이나 모두다 본래는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천착을 하지 않고서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이 훨씬 우월하고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은 훨씬 더 하열下劣한 것이다, 이렇게 차별분별을 합니다마는 사실은 본래적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인 진리 안에 있단 말입니다.

 

제한된 시간에 금타선사金陀禪師의 금강심론金剛心論에 나와 있는 그러한 체계를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생각합니다.

 

근대에 있어서나 또는 현대에 있어서나 우리 한국에도 훌륭한 선지식들이 많이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도 그런대로 우리 한국불교를 위해서나 진리를 위해서 여러 가지로 큰 공헌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금타선사도 아주 훌륭한 대선사님이신데 사실은 그분 인연이 …, 선지식들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공부복을 더 많이 타고 나오신 분도 있고 또는 세속복世俗福을, 가사 권속복眷屬福이라든가 그런 복을 많이 타고 나오신 분도 있고 하는데 금타선사는 권속복이라든가 세속복이라든가 그런 복은 좀 부족하신 분이어요. 그러나 공부복은 어느 선지식 못지않게 훌륭한 그런 선사입니다.

 

 

오늘 새삼스럽게 금타 선사의 가르침을 조명하는 것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법집法執에서 벗어나자는데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병통炳通은 불교적인 술어로 말하면 이른바 법집法執이란 말입니다. 무슨 법이 옳다, 내가 공부하는 법이 최상인 것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들이 숭상하는 그러한 수행법이 제일 낫고 그렇지 못한 것은 별 볼일이 없다고 그렇게 비하를 합니다.

 

이 무서운 정보지식사회에 있어서 혼란스러운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천차만별의 분별시비에 있어서 가장 수승한 정보,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선택하고 여과를 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법집은 현대적인 말로 하면 근본주의 교조주의입니다.

 

같은 공산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교조주의라, 맑스 ․ 레닌이나 그 분들 말만 모두가 100프로로 옳다고 시인한단 말입니다. 그런 주의가 이른바 교조주의 아닙니까? 현실적인 사회상황도 감안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결국은 나중에 비뚤어지고 파멸되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사회를 보아왔지 않습니까?

 

그렇게 탄압도 많이 하고 숙청도 많이 하고 했지만 가까스로 한 70년 넘도록 까지 지탱하다가 파멸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나중에는 자기들이 우상같이 숭배하던 레닌의 동상마저도 끌어내리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근본주의, 불교말로 하면 법집에서 꼭 떠나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의 싸움이라든가 유태교와 기독교의 싸움, 그리고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싸움도 모두가 다 그런 집착에서 옵니다. 근본주의 교주주의 때문에 인류사회에 무시무시한 해악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다하더라도 이것을 극복해야 한단 말입니다. 불교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자기들 수행법만 옳다고 고집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금타 선사의 가르침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점을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세계적인 성자聖者문제입니다. 불교 역사상 빛나는 성자들이 그야말로 부지기수로 많지 않습니까?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을 통해서 종교를 빛내고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신 위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자기 종교의 성자만이 위대한 성인이다 는 주장을 우리는 여러 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가령 유교라 하면 공자님이나 맹자님이나 또는 성리학을 대성한 주자나 그런 분들을 위대한 성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국은 다 외도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자의 표준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가령 각 종교마다 다 그렇게 자기들 나름대로 위대한 성자라 하면 그것은 인류사회에 도움보다는 혼란을 주게 되고 나중에는 또 싸움을 야기시킵니다.

 

 

우선 중국만 보더라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이 아주 치열했습니다. 한 나라가 흥망하기도 하고 또는 여러 문제와 갈등으로 중생들이 고난을 당하는 그런 패악이 많았단 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금타 선사께서는 각 종교의 성자들의 한계를 정했습니다. 그러면 금타 선사가 정한 각 성자의 한계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를 것인가, 그런 문제가 대두되겠지요. 믿는 사람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안 믿는 사람은 또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다른 종교는 그런 것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똑같은 성자여도 공부를 어떻게 얼마만큼 하는가, 또는 삼매에 얼마만큼 깊이 드는가, 이런 것에 따라서 공부의 한계와 차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위차位次가 있단 말입니다. 그 위차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화엄경의 십지론十地論이나, 십지경론十地輕論입니다.

 

십지경론에서, 우리 중생이 마음을 깨달아서 범부심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영원적인 진리자체의 그런 성자의 영역에 들어가서 성불까지, 갓 견성오도한 그러한 도인이나 성불한, 그야말로 완벽한 도인이나 다 똑같은 성자의 범주에 넣습니다. 그러나 같은 성자라도 그 업장을, 불교전문적인 말로 하면 습기(습관성)를 얼마만큼 더 녹였는가, 거기에 따라서 위차를 정합니다.

 

맨 처음에 견성오도해서 성자된 그런 지위를 보살초지라 그렇게 말하고 점차 올라가서 이지삼지 완벽한 보살십지를 다 성취할 때는 이른바 성불이라고 합니다. 금타선사께서는 그러한 위차에 따라서 세계 각 종교의 교조와 성자를 감정하셨습니다.

 

그런 그 감정이 얼마만큼 정확한가, 이것이 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은 그런 문제는 어느 누구나가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공부를 했다고 해서 예수가 얼마만큼 올라간 성자고 마호메트가 얼마만큼 위대한 분인가 그런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바른 깨달음을 한 사람들은 꼭 거기에 걸맞은 법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법의 능력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면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면 분명히 거기에 상응하는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입니다. 삼명육통을 제대로 해야 바로 깨달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삼명육통도 못하면 그때는 아무리 자기 스스로 󰡐�내가 도인이다󰡑�, 󰡐�우리 스님이 위대한 분이고 우리 문중을 다스리는 어른이 위대한 도인이다󰡑�한들 그것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 성도하실 때는 그냥 보통으로 그렁저렁 마음이 열려가지고 되신 것이 아닙니다. 과거 무수생 동안에 젖어온 여러 가지 번뇌망상을 모조리 다 없애고서 비로소 성취하신 것입니다. 모조리 없애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없애면 없앰과 동시에 무량공덕이 다 거기에 나타납니다. 그 무량공덕이 이른바 삼명육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삼명육통을 제대로 했으면 온전한 도인입니다. 못했으면 당연히 온전한 도인이라고 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했다는 것에 대해서 수승한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몇 생을 두고 범부노릇 많이 하고 잘 못 살아서 저 지옥도 가고 또는 축생도 되고 하다가 금생에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인간존재의,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 아닙니까? 사람만 성불한 것이 아닙니다.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존재가 다 부처의 성품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종국적으로는 모두가 다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특수한 사람만이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마땅히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무거운 번뇌가 무엇이냐면 지금 나라는 존재가 내가 생각한대로 내가 있다󰡑�는 이른바 아견我見입니다.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아견이란 번뇌가 제일 무거운 근본적인 번뇌입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불교와 다른 가르침과의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시초부터서 무아입니다. 나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항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나라는 것은 왜 없는 것인가. 그냥 무턱대고 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모두가 다 제법공諸法空 아닙니까? 사람 몸뚱이 뿐 아니라 모두가 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현대의 유물론과는 정반대 아닙니까?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設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모두가 다 공인 것입니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여져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나투어 있는 유위법이라 하는 이것은 일초의 몇 천 분의 일동안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가장 철학적이요 가장 과학적인 가르침입니다.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이것은 어느 순간도 가만있지가 않는 그러한 이른바 제행무상의 법이란 말입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철인 헤라클레이토스도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그 모든 것은 다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존재가 없는 것은 움직일 수 없지만 인간이 대상화시켜서 볼 수 있는 그런 존재는 모두가 다 움직이고 있습니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한 시간 동안 움직이고 또 이렇게 쉬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초의 몇 천 분의 일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유의법이라는 것은 제행무상이라, 󰡐�있는󰡑�모든 것은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어느 공간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럼 결국은 없다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행무상이기 때문에 제법무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도 없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 세포가 그대로 가만있는 것이 아니기에 일초전과 일초후가 같지가 않습니다. 일초의 몇 조 분의 일도 우리 세포가 지금 그대로 가만있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불교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의 하나가 말하자면 무아란 말입니다. 왜 무아인가 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두가 움직여서 마지않고 무상한 것은 결국 그야말로 참 바로 그때는 공空이요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현대인들은 법집, 이른바 근본주의를 지양해야 됩니다. 지양을 시키려면 바른 정보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수행법이 성불하는데 가장 요긴한 수행법인가? 수행법 때문에도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고민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선 참선하는 법만 두고도 생각해봅시다. 특히 조계종에서는 참선하는 법으로 화두공안을 의심해라, 그거 아닙니까? 또 일본에도 역시 임제종이 있습니다. 임제스님은 화두공안을 한 분도 아니지만 임제종이란 이름 밑에서 일본 임제종도 화두공안을 의심합니다.

 

또 반대파가 있습니다. 목조선이라, 화두공안을 배격하고서 화두공안이 없이 그냥 잠자코 명상에 잠깁니다. 가사 한국으로 말하면 원불교나 그런 종교의 가르침 아닙니까? 일본 조동종은 화두 하는 임제종보다는 훨씬 수가 많습니다. 조동종은 화두 없이 그냥 잠자코 명상에만 잠깁니다.

 

또 한 파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별로 없지만 일본은 황벽종黃檗宗이 있습니다. 황벽종 선원이 수백 개 수천 개나 있습니다. 황벽종은 공부하는 방법을 염불선에 두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미타불을 공안삼아서 공부하는 그런 염불선이 일본 황벽종입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자기들이 세계불교의 주인공같이 행세를 합니다. 하여튼 그렇게 화두공안을 드는 임제종도 있고 화두공안을 안 드는 이른바 조동종도 있고 그런가하면 묵조도 화두공안도 아닌 염불을 주로 하는 염불선도 있습니다. 세 파가 솥발모양으로 정립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만이라든가 중국이라든가 베트남에서는 염불선을 주로 합니다.

 

그런 방법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선택해야 할 것인가? 우리 한국에 있는 스님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화두공안을 의심하면 외도선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그런 풍토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나 좋든 싫든 간에 어린이가 되었든 노인이 되었든 화두공안을 의심해야 이른바 참선이라는 영예스런 이름을 얻는단 말입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근본주의와 무슨 법만이 옳다는 법집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들한테 우리가 말씀을 들은 경우 같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는 우리 스스로가 불교를 역사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공부를 해야 어떤 법이 어느 시대에는 더 융성했고 어떠한 법이 어느 시대에는 더 쇠미하였던가를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금타 선사께서는 그런 문제에 관해서 아주 관심을 많이 두고 육조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육조혜능스님은 화두공안을 의심한다든가 묵조를 한다든가 또는 염불선을 특별히 한다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두고서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선수봉행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육조혜능스님께서 떠나신 지가 1300년이나 됩니다. 그런데 1300년 동안에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육조혜능스님 법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금타 선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까 우리가 보리방편문의 그 내용을 간단히 읽었습니다만 보리방편문이라는 내용이 육조혜능스님께서 하신 선법하고 똑같습니다.

 

그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번역하셨는데 육조단경은 참선의 교과서 같은 경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서 연구발표도 숱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저도 육조단경을 번역하려고 또 다시 몇 번을 봤습니다.

 

몇 번을 보니까 육조혜능대사가 스스로 공부도 하시고 일반 중생들한테 교화하신 법문내용이 말하자면 보리방편문 내용하고 똑같습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육조스님께서 한 몇 천 명 모인 대중 앞에서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을 단정히 해서 내 말씀을 잘 들으시오󰡓�해놓고서 󰡒�여러분들이 지금 나 혜능 따라서, 세 번씩 되풀이하십시오.󰡓�하셨습니다. 육조단경의 고본이 돈황본인데 돈황본보면 석 삼三자 부를 창唱자, 삼창三唱이라고 써졌습니다.

 

육조스님께서 󰡒�내 입 따라서 세 번식 부르시오󰡓� 한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귀의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원만보신불에 귀의합니다. 또 우리 마음에 있는 천백억화신불에 귀의합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육조단경이라는 경전의 내용의 핵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그 가르침을 주석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내용을 금타 선사께서 조금 더 풀이해서 알기 쉽게 해 놓으신 것이 아까 스님이 읽은 보리방편문입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삼위일체로 종합하면 아미타불입니다. 혜능스님께서는 참선의 그야말로 할아버지같은 그런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이가 한 것을 알고 보니까 내내야 염불이란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염불 그러면, 가장 쉽고 차원이 낮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화두공안을 의심하면 훨씬 차원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있다면 서도 부처님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너무나 홀대합니다. 내 본래면목이 부처고 천지우주 또한 바로 보면 부처 아님이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모두다 진여불성덩어리입니다. 그 부처님을 생각한 것이 염불아닙니까? 본래 부처인 우리 마음이 망상에 젖어 있다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본래 부처인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서 다시 또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 우리네 공부입니다.

 

육조혜능스님은 참선의 할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치고 육조혜능스님을 들먹이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육조혜능스님이 그러한 말씀을 했는데 그것은 비단 육조혜능스님의 말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조 홍인스님, 특히 사조 도신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대부분 옮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달마 때부터서 일조 달마, 이조 혜가, 삼조 승찬, 사조 도신인데 삼조 승찬시대 까지는 탁발하고 지내면서 일정한 처소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사조 도신스님 때 비로소 도량을 꾸며서 오백 명 칠백 명 같이 단체로 공부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조 도신스님께서 법문을 굉장히 많이 하셨습니다. 능가사자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사조 도신법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그대로 계승해서 밝혀 놓으신 것이 육조단경에 있는 일체삼신자성불一切三身自性佛입니다. 우리 마음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있고, 이것이 우리 마음의 본체입니다. 또는 원만보신 노사나불이라, 이것은 우리마음의 공덕상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천백억화신불, 이것은 우리 마음의 모든 작용을 말합니다. 체體와 상相과 용用을 다 겸비한 것이 말하자면 이른바 삼신불입니다. 이러한 삼신불 귀의라는 사상이 육조단경중심사상입니다. 육조단경을 번역하신 분들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안두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재주가 있어서 그것을 터득한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육조단경의 세계󰡑�라는 김지견 박사가 낸 책이 있어요. 그 책에는 일본사람 중국사람 대만사람 등 세계적인 불교학자들이 육조단경에 대해서 연구한 논문이 실려 있습니다.

 

그 논문 가운데 경도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다미키 고시로란 분이 있어요. 그 분은 나이가 아주 고령인데 임제종 선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한 분이에요. 학자인 동시에. 그래서 도를 깨달았다고 인가를 몇 번 받았습니다. 깨달았다고 인가를 받았는데, 생각하니 깨달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아무런 공덕도 없고 신통한 지혜도 없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선방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스승한테 가서 인가를 또 받았어요. 몇 번 인가를 받았지만 내내야 결국은 범부심을 떠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육조단경을 다시 봤더랍니다. 재차 보니까 단경의 중심사상이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법신을 관찰하고 우리 마음의 보신을 관찰하고 우리 마음의 화신을 관찰해서 하나의 아미타불로 귀의를 시킨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육조단경의 가장 핵심사상은 내내야 결국은 일체삼신자성불一切三身自性佛인 것입니다. 우리 자성불에 귀의하라는 그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더 연구해보니까 비단 육조혜능스님 말씀뿐만 아니라 사조 도신스님 때의 말씀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금타선사의 수행법은 육조대사의 그런 수행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시간이라든가 정력을 낭비하지 않고서 올바른 정통으로 바로 갈 것인가, 즉 다시 말하면 우리가 공부할 때에 있어서 필요한 그런 차서 문제입니다. 1년 동안 참선을 했는데 내 맘이 지금 얼마만큼 정화가 되었는가, 이런 것도 우리가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몇 십 년 동안이라든가 몇 년 동안 공부를 했으면 우리 맘이 얼마만큼 정화가 되었는가 가늠해야 할 것인데 통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그렇게 점차로 올라가는 과정이 없다면 또 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유식론이나 화엄경이나 또는 법화경이나 또는 능엄경을 보면 공부해서 올라가는 그런 차서가 있어요. 모두가 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차서가 있긴 있는데 우선 공부한 사람들은 맘이 급해서 그런 차서를 일일이 보고 있으면 골치가 아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보려고도 않고서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점수법이다고 합니다.

그런 한계도 모르고 자기공부가 얼마만큼 되는 줄도 모르고 덮어놓고서 공부하는 것을 가리켜서 어두울 암暗자 증명할 증證자, 암증선 그럽니다.

 

몇 십년동안 공부했다하더라도 자기 공부가 얼마만큼 되었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늠할 수 있는 가르침이 원래 불경 가운데 없다고 그러면 할 수가 없지요. 우리가 새삼스럽게 연구할 수 없고. 그러나 원래가 다 있단 말입니다.

 

여러분 능엄경을 강원 나오신 분들은 다 배우셨겠지요. 능엄경에 세밀하게 올라가는 과정이 다 있습니다. 화엄경에도 열 단계로 구분한 것도 있고 오십 단계로 구분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전혀 참고 않고서 암증선이라, 어두운 가운데서 그냥 이렇게 암중모색하는 그런 식이란 말입니다. 암중모색할 때 더러 맘이 활짝 열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맘이 활짝 열리면 그냥 내 공부는 이제 다 되었다. 한계를 알면 공부가 얼마만큼 갔겠거니 하고서 가늠할 수가 있지만 그런 것이 없으니까 자기가 그때그때 기분이 좋으면 󰡐�아, 공부가 지금 잘 되어서 그런다󰡑�이렇게 착각한단 말입니다.

 

일본에서 18세기경에 임제종의 중흥조란 위대한 선사가 있어요. 이 선사가 백은白隱선사라고, 흰 백白자 숨을 은隱자, 일본서는 아주 유명한 선사입니다. 이 분이 18세기 때 사람인데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그래요. 그래서 화두선 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부처님같이 숭상하는 그런 분입니다. 이이가 공부를 몇 년 동안 하니까 마음이 활짝 열린단 말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통쾌하고 쾌적한 기운을 어디에 비길 데가 없단 말입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일본 참선불교에 있어서 3백 년 동안 나같이 통쾌히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식으로 자부심을 냈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가지고 대선사가 된양 하고 지내는데 나중에 얼마 안가서 차근차근 맘이 어두워진단 말입니다. 몸도 아파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깊은 산중에 숨어있는, 그 분은 불교인이 아니라 도가공부를 하는 분인데(제가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만) 그분한테 가서 관법공부를 해가지고서 일체유심조라는 맘공부를 주로 하였습니다. 그런 관법공부를 해가지고서 자기의 병을 낫게 했습니다. 조그마한 책자가 있어요. 거기에 즉 말하자면 공부하고 고생하고 스승 만나서 자기 병을 고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자기가 공부하는 것이 얼마만큼 깊이 들어갔는가, 그런 한계를 모르면 그런 오류를 범하고 고생을 많이 합니다. 불경가운데나 불교의 여러 가지 논장가운데는 올라가는 과정 과정의 말씀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런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도 범부의 머리로는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아예 무시를 하는 것입니다. 아예 무시해버리니까 화두만 들고서 죽도록 의심하고 몇 년 동안 그렇게 지내지요. 그렇게 하다가 세월이 흘러서 몸도 쇠약해지고 억지로 의심하다가 상기가 되어 또 병이 들고 그러면 또 약 먹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지금 우리 한국의 보통 선원에서 하는 것이요. 금타선사께서는 그런 것을 해보다가 지극히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과거 숙세에 많이 닦아가지고 마음이 열려서 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뒤로 훤히 트인 머리로 각 경론을 참고해서 차서의 순서를 매겼단 말입니다. 그 후 이것이 이른바 해탈 16지입니다.

 

금강심론 가운데 해탈 16지란 장절이 있습니다. 해탈 16지에 부처님이나 위대한 조사스님들 그리고 우리 범부가 성불까지 올라가는 그런 한계를 조목 조목하니 비교해가면서 해설을 했어요. 어떠한 데에 올라가면 우리 마음이 어떻게 맑아지고 또는 우리 마음에서 어떠한 증상이 나오고 말입니다. 이런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선을 오랫동안 안 해보신 분들은 별로 느끼지 못하시겠지만 참선을 적어도 10년이고 얼마고 해본 분들은 그렇게 공부를 무던히 했지만 깜깜하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아까 깨달음의 증상을 다 말씀드렸지만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에 업장이 다 녹아지니까 숙명통을 깨달으셨습니다. 숙명통은 과거를 다 훤히 아는 지혜란 말입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과거, 바로 앞에 있는 과거가 아니라 무시이래로 무한 세월동안의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가 숙명통 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그때그때 쾌적하고 기분 좋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경솔한 사람들은 그냥 내가 지금 공부해가지고 이만하면 무던히 됐겠지, 이렇게 착각한단 말입니다. 그런 때라도 숙명통을 못했으면 공부가 아직 멀었단 말입니다. 숙명통을 꼭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야 깨달았다는 증거가 된단 말입니다.

 

그 다음 무엇인가. 천안통 입니다. 천안통은 미래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까 숙명통은 과거를 다 아는 것인데 천안통은 미래를 다 알고 또는 우주 만유를 모두가 앉아서 다 볼 수가 있단 말입니다. 태양의 중심을 볼 수가 있고 별의 중심도 볼 수가 있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맘이란 것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마음 깨달으면 다 되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무량공덕이 우리 마음에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꿇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안통이 생겨서 미래세계를 다 내다보고 우주만유를 그대로 통괄한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진통이라, 우리 중생의 번뇌망상, 무명심을 다 없애버린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석 삼三자 밝을 명明자, 삼명통인데 삼명통을 해야 제대로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것은 공부를 학문적으로 많이 했다고 해서 할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문하고는 오히려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 통하면 되는 것입니다. 학문을 많이 해놓으면 자꾸만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다가 결국은 참선을 못해버리니까 우리 마음이 안통하지요. 어떤 경우나 꼭 삼매에 들어야 깨닫는 것이지 교리체계를 이리 뒤집고 저리 보태고 깎고 해가지고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자분들은 불교의 많은 교리를 체계적으로 이렇게 공부하고 저렇게 공부하고 해서 여러 가지로 훌륭한 논문도 쓰고 하는 것은 갸륵합니다. 갸륵한데 그렇게만 해서는 도움이 못됩니다. 어느 때인가는 다 놔버려야 됩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의 자리, 본분 자리는 부처가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아까 입이 닳도록 소개한 육조혜능스님도 일자무식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일자무식인가 아닌가는 확증을 못하지만 아무튼 학문을 많이 한 분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랬어도 참선 그러면, 육조혜능 스님을 할아버지같이 우리가 존중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모든 과정을 불경 내에 있는 것으로 총망라해서 16단계로 체계화한 것이 후학들을

위한 금타선사의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통해서 성자가 되는 한계를 분명히 외두시기 바랍니다. 꼭 삼명육통이 되어야 올바른 성인입니다. 아무리 자기 문중어른이고 또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이 숭앙을 많이 하더라도 도를 통해야 도인 아닙니까? 이름만으로 해서는 그때는 도인이 못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얼마만큼 공부를 해야 되는가, 얼마만큼 참선공부를 해야 되는가는 꼭 깊은 삼매 들어야 합니다. 깊은 삼매에 들려면 또 무엇이 필요한가, 그냥 바로 삼매에 들 수가 없지 않습니까. 특히 우리 출가한 스님네들이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삼매에 들려면 철저히 계행을 지켜야 합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凈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시라는 계율을 말하는 것인데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절대로 삼매에 못 듭니다.

 

그러면 계율이 청정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음식 함부로 먹지 말고 남녀이성간의 음욕을 떠나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못 떠나면 절대로 삼매에 못 듭니다.

 

우리 불자님들, 특히 재가불자님들은 그야말로 육재일을 꼭 지켜야 한다고 제가 그때그때 법문 때마다 역설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스님 네는 항시 육재일 기분으로 출가생활을 해야 되지만 재가불자들은 하다못해 육재일 만이라도 출가한 셈치고 하루 일종하고 고기나 술이나 기타 그런 잡스런 것을 먹지 마십시오. 또한 육재일만이라도 남녀이성간에(자기 내외라 하더라도) 꼭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들 능엄경을 보신 분들은 알지만, 능엄경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음식을 떠나지 않고서 삼매에 들려고 하는 것은 증사蒸沙가 작반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이나 같단 말입니다. 모래를 삶아서 밥이 됩니까? 음심을 떠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외간이라 하더라도 다생겁래의 훌륭한 도반으로 알고 사귀어야지 그야말로 세속적으로 사귀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렁저렁한 가르침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불하는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 가운데는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위대한 성인들이 열반 드실 때는 공중에 올라가서 신통을 다 하셨습니다. 다는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한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한테 다 있는 것입니다. 우선 저 같은 사람도 한탄스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래도 무던히 애쓰고 한다고는 했는데 지금껏 신통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변명할 여지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온전히 제대로 다 지키지를 못하고 온전히 공부를 못해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래서 삼매에 들라면 그 전제조건으로 해서 꼭 음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정도로, 가급적이면 일종하면 더욱 좋고 그렇게 못한다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적게 먹어야 됩니다.

 

고기나 또는 오신채 그런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게 하고 남녀이성간도 같이 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좋은데 하여튼 음욕만은 삼가십시오. 음욕하고 먹는 것 하고 그 두 가지 못 끊으면 능엄경 말씀마따나 증사蒸沙가 작반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이나 같습니다.

 

그렇게 유의하셔서 꼭 삼매에 드십시오. 요즘 별 명상이 다 나오지만 가장 수승한 명상이 우리 참선법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법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광과 행복을 생각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십시다.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