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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참다운 자성自性 ․ 불성佛性을 참구參究합시다

금륜 28호 불기 2547년 1월 】

 

 

 

참다운 자성自性불성佛性을 참구參究합시다

 

 

이글은 큰 스님께서 2002년 11월 19일 성륜사에서 하신 동안거결제법문입니다.

 

우리의 번뇌, 다생겁래로 내려온 번뇌는 보통 질긴 것이 아닙니다. 내 번뇌는 내 개인인 것이고 이것은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번뇌란 것은 우리 중생계에 있어서 무량 세월동안 내려온 업業의 습기習氣기 때문에 떼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번뇌를 방치할 때는 인생고라 하는 그러한 굴레에 항시 얽매여 가지고서 욕계의 생로병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절에 가면 후불後佛탱화나 여러 가지 만다라 그림들이 있습니다. 특히 후불탱화라는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보기 좋게 그렇게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처님 세계의 실상, 참으로 ‘있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실상세계를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가상세계만 느끼고 분별시비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볼 수가 없고 깨달은 성자만이 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이른바 실상세계, 실존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는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물질이 아닌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물질에 구속된 그런 세계인데 중생들은 이 세계가 다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중생이 보고 직감하는 세계는 실지로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중생의 업장으로 우리가 보는 이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존재한다, 산은 그대로 산으로 존재하고 물은 물 그대로 존재한다, 이렇게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산은 우리 중생의 감각을 통한 하나의 지각의 속임수인 것이지 실제로 있는 실상의 세계가 못됩니다. 가령 서양철학의 위대한 선지식인 플라톤도 이데아의 세계야말로 존재하는 세계고 우리 현상계라 하는 것은 사실 허망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데아의 세계라 하는 것은 깨달은 경계의 세계기 때문에 진실로 존재하고 우리 감각의 세계는 허망한 세계기 때문에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이래저래 우리가 헤매듯 분별 시비하는 그런 세계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선을 하든 또는 우리가 무슨 경을 외든 간에 우리 목적은 모두가 다 허망의 세계를 떠나는 데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반야심경을 보더라도 그 반야般若의 공空사상, 이른바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어버이나 같습니다(般若佛母). 왜 그런가 하면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그런 실상의 지혜, 참다운 지혜가 없이는 부처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부처든 어느 도인이든 모두가 참다운 지혜의 힘으로 반야를 깨달을 때, 이른바 선지식이 되고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지혜란 것은 반야심경에 있는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존재성이 없는 텅 빈 지혜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 불교는 너무 관념적이고 실제적인 그런 지혜가 아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중생이 실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있지가 않습니다. 왜 있지 않는 것인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법萬法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는 소식을 옛날에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 물리학의 도움 때문에 모두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각 원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공기나 또는 물이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면 그 원소는 무엇인가? 원소는 그 원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원자라는 것은 대체로 어떠한 존재인가, 원소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밖을 뱅뱅 돌고 있습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 하나가 돌면 그때는 수소 아닙니까? 여덟 개가 돌면 그때는 산소입니다. 그런데 원자핵을 도는 그것이 기묘하게도 우리 태양계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나 달 또는 다른 별들이 도는 이치와 똑같다고 그래요.

우리 지구도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자전自轉과 동시에 공전公轉을 합니다. 하루에 한바퀴 돔과 동시에 삼백육십오일 동안 그렇게 태양주위를 돌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 것도 이치가 똑같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미세한 것도 천지우주의 모든 질서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무질서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원자핵은 또 무엇인가? 원자의 중심이 되는 핵은 무엇인가? 핵은 양성자나 중성자나 중간자나 그런 것이 또 소립자라 하는,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알갱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소립자는 또 어떠한 것인가? 소립자는 모든 물질이 더 쪼갤 수 없는 그런 조그마한 알갱이기 때문에 알래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알 수가 없는가? 소립자란 그 알갱이는 그냥 금방 생겨나고 금방 없어지고 또 서로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이른바 물질만능시대, 또는 정보홍수시대 아닙니까?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우리 마음은 사실 컴퓨터나 텔레비전 등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불안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불교인이니까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같은, 물질이고 뭣이고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서 말씀하신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그 물질이란 것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를 아주 극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불교에서 볼 때는 간단하게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입니다. 여기서 물질이 공이라고 그러면 소중한 금쪽같은 몸뚱이가 굉장히 허망하지요? 그러므로 다만 공이 아니라 공의 실상은 그야말로 만 공덕을 갖춘 자성自性이고 불성佛性입니다. 천지우주는 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모든 존재의 성품자리입니다. 섭섭하게도 우리 중생들은 성품자리를 볼 수가 없어요. 어째서 볼 수가 없는 것인가? 번뇌에 가리어서 보지를 못합니다. 번뇌란 것이 무엇입니까? 내내야 탐심貪心이나 진심瞋心, 치심痴心 그런 것이 번뇌아닙니까?

자기를 한번 반조해봅시다. 나한테는 과연 탐심이 없는 것인가, 또는 기분 좋지 않을 때 불룩거리는 진심을 안낼 수가 있는 것인가, 또는 내가 과연 모든 존재의 성상, 존재의 성품, 존재의 현상을 다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못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중생이고 번뇌에 칭칭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번뇌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연 따라서 우리가 없을 짓고, 사람으로 태어나고 또 업을 더 많이 지어서 다른 동물로 태어나고 더 많이 지으면 지옥도 갈 수가 있겠지요. 또 십선업을 닦아서 참선도 좀하고 기도도 모시고 하면 그때는 천상에 분명히 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가운데 들어갑니다.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삼계가운데 들어갑니다. 삼계는 자기가 지은 업 따라서 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런 데가 아닙니까? 욕계 ․ 색계 ․ 무색계말입니다. 나는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서 재주도 꽤 있고 재산도 꽤 있고 명예도 높은데 이런 인간으로 다시 왔으면 좋겠구나,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참 무던한 사람인데 그 사람하고 같이 사는 행복스런 생활을 영원히 누렸으면 좋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심장이 한번 멈춰버리면 그때는 주검 아닙니까? 인간이 별로 좋은 데는 아닐망정, 그 좋은 데도 아닌 인간도 역시 생로병사生老病死라, 늙고 죽고 다 허망부실하단 말입니다. 좀 오래 살고 늦게 산다하더라도 결국은 다 가고 만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를 구성한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는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화장하면 재만 남을 것이고 매장하면 땅 속에서 썩을 것이고, 그러한 물질이라는 것은 종당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정신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정신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덜 배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신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죽을래야 줄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설마 죽을까봐 여러 가지로 불안해하면서 조심하고 영양을 섭취하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영양을 많이 섭취한다고 장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가만 그대로 두어도 우리 생명은 죽지가 않아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뚱이만 그때그때 인연이 다해서 사라졌다 또 업 따라서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 우리 정신 자체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아닙니까? 나지도 죽지도 않고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해서 영원히 우리 정신은 존재합니다. 비단 개별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깨달은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다 그런 생명체로 해서 충만해 있습니다. 실질적인 생명자체는 영원히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우주가 모두 다 생명인 불성으로, 자성으로 충만해 있다는 그런 소식이 바로 반야의 참다운 소식입니다.

 

반야바라밀이란 것은 반야가 있어야 도피안倒彼岸이라, 이 중생계의 고해를 건너서 영생해탈의 그런 경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이나 성인도 모두가 다 반야를 의지해서 깨닫는단 말입니다. 반야는 어떠한 것입니까? 우주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도리가 반야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모두가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뿐인데 어떻게 해서 우주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가, 이렇게 의심을 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우리가 느끼는 대로 공기가 없는 데가 있습니까? 모든 곳이 지금 공기로 충만 되어 있습니다.

 

공기는 내내야 산소 ․ 수소 ․ 탄소 ․ 질소… 모두 그런 것으로 구성되지 않습니까? 물론 희박하고 더 농후하고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주란 것은 이 공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공기는 또 각 원자로 해서 그대로 거기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가 공기로 충만해 있듯이 모든 존재의 참다운 생명, 참다운 성품인 불성 ․ 자성도 역시 그 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아까 제가 플라톤의 말을 인용했습니다마는 이데아란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우주에 언제나 충만해 있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생로병사를 초월해서 영원히 있는 하나의 생명 자체입니다. 플라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대한 철인들은 다 그런 소식을 전합니다. 플라톤보다도 훨씬 먼저 난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그분도 일자一者만 존재한다, 오직 하나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결국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란 것은 존재 자체, 존재의 실상 자체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의 실상을 모릅니다. 우리 중생은 기껏해야 가상만 압니다. 허망상만 안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꼭 진리에 그대로 맞게 합리적으로 말씀했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중생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와 같습니다. 물거품 같고 또는 풀끝의 이슬 같고 또는 거울에 비친 허상 같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양이 사실로 있지 않아도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꼭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 중생이 나요 너요 또는 좋다 궂다 하는 모두는 다 그런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은 허상으로 알면 좋은데 허상을 허상으로 모르는 것이 중생의 아견我見이에요. 우리 불자님들, 아견을 꼭 깊이 외두시기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집我執입니다. 자기라는 개아에 대해서 집착을 못 떠난단 말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중생은 자기라는 아집을 미처 떠나지 못합니다. 또는 법집法執에서도 못 떠나고 있습니다. 대상적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도 다 똑같이 허망한 것인데 이런 것도 사실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주관 ․ 객관이 우리 중생의 견해에서는 구분되어서 존재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하기 위해서 겨울에 결제하고 여름에도 결제하고 또 그때그때 조석으로 좌선도 하지 않습니까? 참선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흐린 물을 가만히 두면 시간이 가면서 앙금이 차차 가라앉아 나중에는 그냥 맑아져서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또한 과거 전생에 업이 있고 금생에 나와서도 업을 짓다 보니까 흐려질 대로 흐려졌단 말입니다. 아주 혼탁해 있습니다. 혼탁해 있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혼탁이 무엇인가 하면 ‘나’라는 생각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하더라도 ‘나’라는 생각을 그냥 금방 뗄 수가 있습니까? 상당히 인격자같이 보여도 어느 고비에 이르고 보면 욕심을 부리고 자기중심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 같으면 좋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영원히 있는 것 같으면 그렇게 소중히 아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죽을 때 당해서만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나’가 분명히 없습니다.

 

사대오온四大五蘊이라, 지수화풍 사대라 하는 그런 원소로 해서 우리 몸이 구성되고 우리 마음도 역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느끼고 또는 분별하고 감상하는 부스러기가 모여서 마음이 됐습니다. 사대오온을 떠나면 그때는 ‘나’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와 같이 돼가지고서, 그것도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은 항상이 없단 말입니다. 일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그런 미세한 변화를 보지 못하니까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또는 몇 십 년 뒤의 ‘나’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입니다. 시간적으로 그때그때 같은 것이 없는 무상한 것은 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도 공空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이렇게 움직이고 있고 변화무쌍합니다. 그리스 철인가운데서 유명한 헤라클레이코스도 만법萬法이 유전流轉이라, 모든 것이 다 변화한다고 보았습니다. 일초동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머무름이 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어떻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적으로 봐서 무상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공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어떻게 그렇게 이천오백년 이상 동안에 걸쳐 우주의 실상을 정밀하게 전했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존재론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현재 실존철학이나 생철학生哲學같은 것도 존재의 실상을 그 어떻게든 말해보려고 어려운 논리를 다 구사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간단명료한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가 못되니까 못합니다.

 

우리가 참선은 왜 합니까? 사변적인, 이론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서 우리가 실상 자체가 되는, 불성하고 자기가 하나가 되어 버리는 그런 곳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 이르지 못하면 그때는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에 드나 화두공안 삼매에 드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허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을 찾아 가기위해서 우리 마음을 오로지 실상경계에다 멈춰야 합니다.

 

우리 업장이 가벼우면 하루 이틀 앉아도 다 깨달아버리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은 업이 너무 많습니다. 능엄경이나 대혜大慧종고선사 어록에도 이런 법문이 있어요. 이즉돈오理卽頓悟라, 모든 존재의 원리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총명하기 때문에 다 분석해 놓고 보면 하나가 되고 일체존재는 근원적인 실상으로 가야 되겠구나, 이런 것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본래면목이 부처다, 이렇게 쉽게 비약적으로 느낄 수는 있지요. 그렇게 느끼는 것을 가리켜서 일단 돈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원리는 그러하나 사비돈제事非頓除라, 그때그때 지어내려온 업장은 빨리 다 녹아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야 모양이 없는 것이니까 마음으로 그렇구나 해도 우리 몸에 붙어있는 업장은 좀처럼 안 녹아집니다. 우리가 불경을 보고서 아, 그렇구나하고 마음으로 납득하고 느낀다 해도 행동으로 옮길 때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점차로 계행도 지키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그렇게 닦음으로 해서 차근차근 없어진단 말입니다.

 

업장이 가벼우면 빨리 없어지겠지요. 그러나 보통 차원에서는 단박에 될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삼동三冬 내내 결제에 들어가는 스님들도 계시고 여러 재가불자님들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업장을 단박에 떼면 좋겠지만 그냥 단박에 다 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선근善根따라서 차이는 있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적과 싸워서 조국을 지키는 것처럼 우리 본래면목을 찾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분들은 다 성자가 됩니다. 참답고 바람직한 사람을 어떤 사람인가? 결국은 성인 아닙니까? 성인이 참되고 바람직한 사람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다 바람직한 사람을 만들 수도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어떤 분야를 보나 참다운 아버지가 되고 참다운 어머니가 되고 어떤 면으로 보나 정당한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고 최선의 일입니다.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음식을 잘 만들어서 맛있게 해드리고, 그런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런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인간다운 인간, 자기 본래면목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살면서 그때그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혼수상태가 되어가지고 의식회복도 못한 때도 있었고, 그런 때는 죽더라도 한이 될 것이 없지요. 다행히도 이제 공부를 좀 더하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인연이 살려주어서 인연에 대해서 감사합니다마는 사실 우리 인간의 급선무가 자기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 실상을 아는 것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가장 정확히 깨달으라고 하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한테 세례를 받고 사십일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모시면서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광야에서 사십일동안 시련을 극복할 때 자기라는 아견我見, 아집我執을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성자가 되었지요. 마호멧도 히라산 동굴에서 삼년동안 명상을 했습니다. 삼년동안 명상할 때 번뇌가 녹아져서 그래서 하늘의 계시를 받고서 그야말로 그런 위대한 성자가 되었지요. 다만 그 시대상황 따라서 그때그때 적당히 방편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후대인들이 잘못 전해서 조금 이상한 대목이 있으나 적어도 세계적인 성자들은 모두가 다 기본적인 것은 공자나 노자나 소크라테스나 다 본래면목 자리, 생명의 근본자리,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를 깨달은 분들이라고 봐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처님은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구경각은 무엇인가 하면 조금도 흠절이 없이 모든 것을 다 깨달아서 아는 것이 구경각입니다. 다른 성인들도 위대하나 구경각까지는 못 갔다고 생각합니다. 저쪽 사람들은 조금 다르겠지요. 그러나 어떻든간에 성자라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자기 본래면목을 깨달은 사람들이고 또 성자만이 아니라 사유 활동을 할 수 있는 정신능력이 있는 우리 인간들은 누구든지 깨닫기 위한 수행을 마다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이것이 최 급선무입니다. 한 달이고 몇 달이고 참선을 하고 또는 몇 년이고 참선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고 잘 못하면 참선하는 것이 하나의 고된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나 선지식들이 말씀하신대로 여법하게 공부를 할 때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공부하는 환희심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참선을 잘해서 참선 가운데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정당하고 환희로운 경계를 맛본 사람들은 그만둘래야 둘 수가 없어요. 그와 같이 매력 있고 인간의 의의를 느끼는 그런 경계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고 또는 명예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우리가 참선에서나 기도모실 때 느끼는 그런 행복감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 재가불자님이나 출가불자님들이 한 일주일쯤 이따금 기도 모시러 오는데 만나보면 일주일이라도 얼굴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독스런 것이 아견我見입니다. 결국은 자기라는 아상我相이란 말입니다. 아상이 있으면 벌써 눈도 흐리고 얼굴도 흐리단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모실 때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그렇게 독실하게 지내면 얼굴이 맑아지고 눈도 맑아집니다. 사람들은 근기가 약하니까 오랫동안 지속을 못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 자신을 찾는 일입니다. 내 자신은 무엇인가, 참다운 자신, 참다운 자기는 자성이고 진여불성입니다. 우리가 진여불성을 그대로 증득해야 생사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진여불성을 증득하지 못하면 번뇌의 노예가 되어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면 내내야 삼계내에서 뱅뱅 돌면서 지옥으로 갔다 어디로 갔다 하지요.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할 때는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행복과 영생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있는데도 우리가 그걸 마다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결단을 내리셔야 됩니다. 결단을 내리시고 그 다음 문제는 삼학도三學道라, 삼학도의 관념을 항시 마음에 두고 거기에 준해서 공부를 하셔야 됩니다.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삼학도 아닙니까? 계율이 없이 절대로 선정에 못 들어갑니다. 근세에 있어 더러는 계율이 없더라도 무애행無碍行도 하고 아무렇게나 먹고 막행막식莫行莫食해서 도인이 된다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이나 정통 조사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꼭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이 계율을 지켜야 선정에 들어갑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삼매불현전三昧不顯前이라, 시라는 인도말로 해서 계율입니다.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가면 그때는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미혹이나 무명 또는 칭칭 감겨있는 그런 업장이 안 녹아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심리心理와 생리生理가 온전히 녹아져야 참다운 깨달음이 온단 말입니다. 그렁저렁 사는 사람은 절대로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우리 재가불자님들은 좀 고생스러워도 육재일六齋日을 지키십시오. 육재일이란 것은 하다못해 엿새만이라도 출가한 스님 네같이 생활을 좀 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끼 먹고 내외간에 잠자리 같이 않고 고기도 안 먹고 술도 안 먹고 말입니다.

 

현대가 얼마나 무서운 때입니까? 금년만 하더라도 제가 아는 사람이 암으로 해서 네 분이나 죽었어요. 암을 퇴치하려고 얼마나 몸부림칩니까마는 아직도 결국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암이 모두다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대체로는 우리 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또 우리 생각이 삼독심三毒心을 못 떠납니다. 독 가운데 제일 무서운 독이 삼독심입니다. 탐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또는 어리석은 마음을 내고 말입니다. 진심을 내면 그 즉시에 우리 세포를 오염시킵니다. 우리 인간 세포가 지금 육십조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세포가 없어졌다 생겼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세포가 우리 생각 하나하나를 다 반영합니다. 좋은 생각은 우리 세포를 정화시키는 것이고 좋지 못한 생각은 우리 세포를 중독시킵니다.

 

따라서 내내야 암이나 무엇이나 다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잘못 먹거나 또는 잘못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공부하는 방법도 역시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염불만 애써 하는 그런 공부도 있고 또는 천수다리니를 외서 하는 공부도 있고 또는 화두공안을 참구해서 하는 공부도 있지 않습니까? 다 훌륭한 성불成佛의 법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 반야바라밀을 떠나지 않아야 됩니다. 남한테 우리가 무엇인가 베푼다 하더라도 그냥 ‘저 사람은 나보다 못사니까 불쌍하니까 베푼다’ 이러면 이것은 단순한 선행밖에는 안됩니다. 선행을 했으니까 그런대로 과보를 받겠지요.

 

그러나 이른바 도업道業이라, 도를 성취하는 진리를 성취하는 그런 업과는 이것은 거리가 좀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본래로 둘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떠나지 않으셔야 합니다. 도둑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니고 살인죄인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닙니다. 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일매지게 하나입니다. 거기다가 우리 마음을 두어야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중생은 사실을 외면하고서 허상에다 우리 마음을 집착시킵니다. 모두가 나와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베풀어야 참다운 보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됩니다.

 

부처님을 생각해서 부처님이 되어가는, 염불공부가 사실은 제일 쉽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면서 부처가 되어가니까 그때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화두공안 의심하는 것도 화두공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 자성을, 우리 불성을 깨닫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따라서 어떤 공부든지 간에 반야의 지혜, 천지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서 화두공안을 들거나 염불을 하셔야 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렇게 하는 것도 염불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고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동경하고 그러면 우리한테 가호를 준다, 이것은 참선은 못됩니다. 단순한 타력염불他力念佛은 돼도 참선은 못됩니다. 참다운 염불도 못됩니다. 진여불성자리, 참다운 실상자리를 떠나지 않고 하는 염불이 이른바 실상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입니다. 따라서 우주에 충만해 있는 한도 끝도 없는 무량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 자성자리, 본래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화두를 참구해야 됩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공부해서 내년 봄에 우리가 서로 지금의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공부가 훨씬 더 진척되고 우리 마음도 몸도 그야말로 청정한 그런 불자가 되어서 서로 상봉하도록 하십시다.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