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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의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금륜 30호 불기 2547년 3월 】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의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글은 큰 스님께서 2003년 2월 15일 오후 1시 성륜사에서 하신 임오년 동안거해제법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과의 만남은 어느 때나 반가웁기 그지없습니다마는 이번에는 더욱더 반가운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우리가 한 번 얼핏 스쳐가는 것도 굉장히 큰 인연이 아닙니까? 한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하는 것도 오백생 인연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있습니다. 하물며 한 설법전에서 여러 차례 만나서 부처님 법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한 생의 인연뿐만 아니라 여러 생의 인연이 되풀이 돼서 만나게 되는 그런 지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같이 그렇게 다생겁래로 이른바 삼아승지겁을 닦아 오신 그런 성자는 아무런 고통 없이 평생 잘 지내신다 이렇게 생각하시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부처님 같으신 분도 당신 평생에 열 번이나 곤란스러운 경우를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님께서는 삼아승지겁을 닦아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부처님을 가장 시달리게 한 사람이 자기 친종제 제바달다提婆達多아닙니까? 제바달다提婆達多는 종제이면서도 심지어 부처님의 생명까지도 빼앗으려 하는 아주 표독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두가 다 부처님 스스로 받은 업의 보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업이라는 것이 굉장히 지독한 것입니다. 겪어보면 업을 짓고서 몇 십 년이 지나도 그 업이 소멸이 안 됩니다. 몇 십 년이 아니라 몇 겁, 백천겁의 세월이 흘러가도 한번 지어 논 업은 소멸이 안 됩니다.

그 업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신구의 삼업 身口意 三業이라, 우리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우리 뜻으로 짓는단 말입니다. 가령 남을 한번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저 사람 참 고약하다, 차라리 어디 가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런 생각을 찰나동안만 한다 해도 그것이 소멸이 안 됩니다. 그 생각 하나로 자기의 온 세포가 오염이 됩니다. 또한 우리 생명은 나뿐만 아니라 우주와 더불어서 있습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저 다른 나라에 있는 돌멩이 하나나, 여기 있는 나뭇가지 하나나 모두가 다 같은 인연 가운데서 생겨나고 변화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화엄계서 말하는 중중무진입니다. 얽히고설키고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인연 가운데 있습니다. 때문에 그 부처님도 제바달다한테 당한만큼 부처님 스스로도 역시 과거 전생에 제바달타를 못살게 굴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누구나 부처님 공부가운데는 참선하는 공부가 그야말로 가장 높은 공부고 부처님 공부의 핵심이므로 기왕이면 참선을 좀 했으면 쓰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형편상 선방에도 갈 수가 없고 또 그때그때 절을 찾아가 재가 불자님들과 더불어서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니까 참선은 도저히 안 되겠구나 이렇게 체념하신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참선은 사실 천하에 제일 쉬운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것은 천하에 쉽고 좋지 못한 것은 천하게 어렵단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실만을 말씀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근원적인 말씀이고 실존적인 말씀입니다. 다만 허물은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왕 불법을 공부하고, 불도를 닦기 위해서는 출가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출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세속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세속을 떠난다는 것은 세속적인 여러 가지 잘못된 견해를 다 씻어버리고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도리를 깨닫기 위함입니다. 나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영원한 도리를 알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이 출가자 아닙니까? 따라서 비록 출가하였더라도 마음으로 세간적인 집착을 못떠나면 그것은 출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출가身出家 또는 심출가心出家라, 몸으로 출가하고 마음으로 출가해야 참다운 출가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출가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느끼고 진리는 분명히 진리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기준은 명백합니다. 나 아我 자, 볼 견見 자, 아견이 있으면 그때는 진리가 아니고, 아견이 없어야 진리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다 현상 아닙니까. 이런 것은 다 인연생입니다. 인연따라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내 몸뚱이나 내 관념이나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하나의 상인데 이런 것들이 있는 것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 그대로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이라. 눈에 보인 모든 대상들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꿈이나 허깨비와 같단 말입니다. 꿈이 사실 있습니까? 허깨비가 사실 있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그러면 어째서 바로 보지를 못하는가, 업장 때문에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지금 업장 덩어리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업숙체業熟體라, 업덩어에 꽁꽁 묶여 있단 말입니다.

참선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 얽히고설킨 업덩어리를 녹이기 위해서입니다. 계율은 무엇 때문에 지키는 것인가,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하면, 업덩어리가 녹아지지 않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결연히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우리한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성불이라는 것은 부처님 말씀대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꼭 그대로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닦으므로 선정에 들어가고 또 선정에 들어야 참다운 깨달음을 얻는단 말입니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한 공식이나 같습니다. 정확한 수학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궁극적인 모든 것을 다 달관해서 체계화시킨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모든 복잡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가르침 말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시대를 초월하고 모든 것을 완전히 초월해서 우주의 모든 문제를 다 포괄시켰습니다. 기독교 진리나 유교 진리, 또는 현대 물리학이나 그런 모든 것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으로 볼 때는 안 풀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 불자님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간에 주인공 자리, 우리 본래면목 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지 주인공 자리는 내내야 마음자리 아닙니까. 우리 마음이 주인공이니까요. 그러나 남을 미워하고 남을 좋아하고 욕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나는 김 아무개다, 나는 누구 남편이다, 나는 누구 아내다, 이런 것은 참다운 자기 면목, 본래면목자리가 되지를 못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천지우주의 근원적인 문제, 천지우주의 근원적인 생명이란 것은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증명하다시피 모든 존재는 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로 합해져 있습니다. 세상만사 눈에 보이는 것을 분석해놓고 보면 다 원자가 되지 않습니까. 원자는 소립자로 구성되고, 또 소립자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알 수 없는 우주 정기로 꽉 차 있단 말입니다. 그 알 수 없는 우주 정기는 무엇인가, 이것은 물리학이 모르는 분야입니다. 왜 모르는가, 시간 공간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이란 것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어야 축적이 되는 것인데 시간 공간을 떠난 문제는 물리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지만 신묘한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눈방울이나 물방울이나 공기나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원자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두가 다 근원자리에서는 하나의 신비로운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자리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성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가 우주의 진리이기 때문에 진여불성이라 부릅니다. 나는 여기에 있고 우주의 근본자리인 진여불성은 저 멀리 대상적으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대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라는 것은 오직 그 진여불성 뿐입니다. 육식이 있고 또 그 밑에 말나식이란 잠재의식이 있고, 말나식의 잠재의식보다 더 깊은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깊은 암마라식이 있는데 그 암마라식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생명체인데 그 자리가 이른바 불성입니다.

따라서 그 근원적인 것을 볼 수 있는 그런 분들이 이른바 성자입니다. 자기 스스로 근본 자리하고 하나가 돼버려야 성자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몇 년 또는 몇 개월동안 애쓰고 공부하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냥 보통으로 해서는 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업장이 가벼운 분은 빨리되고, 업장이 무거운 분은 더디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 근본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가르침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꼭 붙습니다. 가령 하루 참선하면 하루 참선한 만큼 마음도 몸도 맑아지고 우리 건강도 더 좋아집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바른 참선을 하지 못하면 이른바 상을 여의지 않거나, 근본을 여의고서 하는 공부는 그렇게 안 된단 말입니다. 근본을 여의고 하는 공부는 몸도 안 풀리고 마음도 안 풀리고 참선 공부에 따르는 법열이나 행복감도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을 할 때는 꼭 그 근본자리, 본래면목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우선 중요한 것은 천지우주가 모두 다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뿐이다, 진여불성뿐이다 라는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겨울에 가까스로 육조단경 번역을 마쳤습니다. 그 육조단경에 보면 불성․자성에 관한 말씀이 일백 군데가 넘습니다. 불성 자성에 대해서 얼마나 역설을 하셨길래 그러겠습니까. 우리는 그 자리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따라서 불성자리, 자성자리, 본래면목자리,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해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화두를 참구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참구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선 이치로 천지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이다 라고 생각할 때 나와 남의 구분이 없습니다. 불성이라는 것은 나와 남의 자리를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 자리란 말입니다. 그 진여불성 외에 다른 것은 없는 자리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 중생이 근원을 못 보고서 가상적인 상을 봐서 그럽니다. 금강경을 보나 반야심경을 보나 모두 제법공이라, 색즉시공이라, 원래 물질이란 것은 있지를 않습니다.

 

일체가 유심조라, 모두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물질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본래 없다는 말을 가장 명백하니 말씀한 분이 부처님 아닙니까? 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보다도 훨씬 먼저 태어나신 분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그분들도 역시 실존이 무엇인가, 우주심이 무엇인가, 로고스가 무엇인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시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다락방에서 안경알을 닦으며 자기 생계를 유지해가면서 철학체계를 세웠습니다. 그 분의 체계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범신론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철학을 깊이 있게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일신론과 범신론의 차이는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사상은 범신론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사상은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특히 부처님 사상은 철저합니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른바 이 범신론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브루노라는 분은 17세기 위대한 기독교 천주교 수사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분이기 때문에 그 당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즉 말하자면 일신론만 옳다고 생각하는 그 것과 또 우주가 그야말로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그런 식의 이론을 반대했습니다. 저는 하도 비참해서 연대를 외우고 있어요. 1600년 3월에 불태워져 죽었습니다. 부처님 사상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이른바 범신론입니다. 다행히 기독교 가운데서도 이단시 당하거나 심판을 받으면서도 범신론을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15세기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나 또는 19세기 슐라이어마허 같은 그런 분들은 다 기독교인인데도 결국은 범신론을 주장해서 당당히 나오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불이법문不二法門 이라.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둘이 아닌 법문입니다. 모든 원리가 둘이고, 셋이면 우리 마음이 안정되겠습니까? 오직 하나로 통일되어야 우리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안정이 되겠지요.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일체 존재가 신이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가르침은 차근차근 우주를 통일해 갈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경계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이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그때그때 가만히 앉아있으면 별의별 경계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경계라 하는 것은 사실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모양을 하는 경계도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관세음보살과 같은 경계도 나올 수가 있는 것이고, 또는 광명도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비교적 더 좋고 나쁜 것은 있겠지요.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계가 나오든지 간에 제아무리 재미스럽고 환희스러운, 그야말로 광명찬란한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면 되려 악화가 됩니다. 그래서 집착은 말고서 근원적인 생명의 본래자리, 한도 끝도 없는 진여불성의 그 자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무량광불 자리고, 진여불성 자리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불성 가운데는 자비라 지혜가 원만하고 충만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성을 자비로운 쪽으로 보면 관세음보살이고, 지혜로운 쪽으로 보면 문수보살이고, 또 전체로 보면 그때는 아미타불인데 모두가 다 그것이 우리 불성공덕입니다. 불성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많아서 그와 같이 여러 갈래로 이름을 말씀하신 것인데 그 본래의 자리는 똑같이 우주의 근본 자리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미평등한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일미평등한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공부를 해야 결국은 우리가 근본을 안 떠나게 되고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똑같은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더라도 단순히 우리가 복을 비는 자세에 얽매인 채 상에 걸리면 그때는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같은 염불도 염불참선이라, 염불인 동시에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자리를 안 떠나고서 염불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입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기독교를 오랫동안 믿은 분들은 진여불성자리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서 오! 주여 하면서 공부해도 되지요. 그것 역시 하나의 참선이 됩니다. 꼭 불교적인 이름만 붙여야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본래 고향자리.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면 그때는 화두를 드나 화두를 안드나 염불을 하나, 주문을 하나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아무런 벽이 없습니다.

 

진여불성 자리는 우리 생명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와서 거기로 갑니다. 업을 많이 지면 더디 가고, 윤회전생을 많이 하겠지요. 우리 업이라는 것은 수백겁 지나도 우리가 보상해야 합니다. 그 업 가운데서 먹는 것과 또는 남녀 이성 간에 사귀는 것, 그것을 꼭 떼어야 업이 녹아서 윤회를 하지 않고 해탈로 갑니다. 우리 선배들 가운데 그런 깊은 삼매에 못 들어서, 알기는 제법 알지만 함부로 행동한 분들이 없지 않아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오解悟는 조금은 쉽게 이룰 수 있지요. 그러나 증오證俉는 깊은 삼매에 들어야 가능합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사허부구게四虛浮漚偈 가운데 “가사,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하여, 하늘꽃 감동하고 돌멩이 끄덕여도,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로다(假使說法如雲雨 感得天花石點頭 乾慧未能免生死 思量也是虛浮漚).”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선정의 물이 없는 바싹 마른 지혜 (乾慧), 곧 허망한 분별 지혜로는 생사의 업을 못 녹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분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분이나 생각생각에 부처님 자리, 자기 본래면목 자리, 영원한 마음의 고향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최선의 길인 부처님 되는 공부를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金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