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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부산신도님들 친견 소참법문 2001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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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륜사]까지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우리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그 말씀을 누구든지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 전도몽상인가? 전도顚倒라는 것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바로 보지 못하고 뒤바꿔본단 말입니다. 이른바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생각할 때 나는 바로 내 이성적으로 판단하는데 내가 무슨 전도 몽상이 될 것인가?

 

나만은 전도몽상이 아니고 바로 정견正見을 한다. 이렇게 자부심을 가지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만은 전도몽상이 아니고 정견正見을 한다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들은 범부성凡夫性을 못 떠난 한에서는 모두가 다 전도몽상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존재의 실상實相을 참으로 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가상假相만 보고 허망한 현상만 보는 것이지, 이 모든 인간사회라든가 일체존재의 실존實存을 우리는 지금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령 여기 이렇게 꽃이 있습니다마는 우리 인간들은 감각적으로 비춰진 꽃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꽃의 실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업에 가린, 우리 인간의 업이라 하는 하나의 바르지 못하는 관점에서 이와 같이 꽃으로 보이는 것이지 꽃의 실상實相이 아니다 말입니다.

 

그러면 실상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생각할 때 똑같은 것도 과학적[현대물리학]으로 볼 것인가, 또는 상식적으로 볼 것인가, 또는 깊은 종교철학적으로 볼 것인가, 이렇게 여러 가지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꽃으로 보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지금 상식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과학자는 어떻게 볼 것인가? 물리학자는 이런 꽃을 볼 때도 모두를 다 원소라든가 원자라든가 그런 물질의 근원적인 알맹이가 인연 따라 잠시간 모여서 꽃으로 보이고, 인연이 흩어지면 꽃으로 안보이게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 실존 철학적으로 본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아무리 철학을 깊이 많이 연구한다 하더라도 그런 이론적인 이른바 사변적인 범위 내에서는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역시 일반 상식인 사람보다도 일반 물리학자가 보는 것 보다는 더 깊이 생각할 수는 있을지라도 참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실상으로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실상을 실상으로 보는 것은 누구일 것인가. 이는 부처님이나 부처님 가르침을 깨달은, 우리 마음을 깨달은 성자聖者만이 바르게 봅니다.

 

우리는 굉장히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도 불안하고 우리 마음도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면 불안스러운 원인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간과 모든 존재의 실재·실상을 바르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현상적인 상만 보고 느끼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삽니다. 그러나 현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가령 연기가 나오면 그 밑에는 반드시 불이 있겠지요. 불이 없으면 연기가 나올 수가 없겠지요.

 

이와 똑같이 현상이 있다면 현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근원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은데 모든 존재를 물리적으로 본다면 원소나 보다 더 세밀한 소립자들이 적당히 인연 따라 결합해서 존재가 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리학자가 보는 것입니다.

 

 

참말로 그 원자란 무엇인가’, ‘전자가 무엇인가또는 양성자는 무엇인가’, 이렇게 추구追求해 들어가면 물리학으로는 결국 물질의 바탕과 근원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모를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시간성時間性이나 공간성空間性이나 무슨 제한이 있어야 측정도 하고 실험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물질을 분석하고 쪼개다 보면 결국은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어져 버립니다. 물리학자들이 애쓰고 분석하고 그렇게 물리적인 정밀한 체계를 세웠지만 끝에 가서는 실측을 못하기 때문에 물리학으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확정적으로 확실한 것이 없어서 현대 과학으로는 존재의 실상을 확실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의 혜택으로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으나 무엇인가 확정적으로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과학 자체가 근원적인 실상론·실재론에 있어서는 결국은 실상이나 실재를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부처님 제자인 우리 불교의 성자들 또는 좀 차이는 있지만 기독교도 그 성자들은 실상을 훤히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2500년이 경과했지만 진리니까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신 뒤에도 무수한 성자가 나왔습니다. 그분들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증명을 했습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이론적으로 알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스스로 닦아서 자기도 성자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체계가 있으면 그 체계를 스스로 다 공부하고, 또 마음의 번뇌를 다 없애서 스스로 깨달아서 성자가 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하게 믿지 않을 수 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과 같이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든 것을 바로 못보고 성자만이 바로 관찰하고 바로 실증적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중생들은 겉만 보고 성자들은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는 것입니다. 근본 본체를 봅니다.

 

 

일반 중생은 근본자리를 보지 못하고 겉만 보고살기 때문에 겉이 좀 좋으면 마음으로 기뻐하지만 겉이 자기에게 불여의不如意하고 좋지 않으면 마음도 불안하고 불행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무서운 시대입니다. 이른바 정보의 홍수라! 그 모든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은 지극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정보가 대관절 어떤 것인가, 정보를 정확히 판단하고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판단하고 필요 없는 정보는 걸러버리고 좋은 정보만 가지고 살아야 편안할 것인데 쓸데없는 정보나 좋은 정보나 과잉이 되어서 사람 마음이 항시 혼란스럽고 불안스럽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겉에 뜬 이 현상적인 좋다 궂다 상대적 시비를 떠나서 가장 근원적인 생명 자체가 무엇인가, 다시 바꿔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야 그래야 우리가 불안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여기 오신 것도 그 마음을 깨달아서 모든 것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우리 마음의 고향자리가 무엇인가를 다소라도 아시기 위해 여기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 말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면 마음이 더 놓이시겠지요. 우리가 근원을 모르면 항시 마음이 불안한 것입니다.

 

그 마음의 근원은 체험을 당장 못한다 하더라도, 체험은 스스로 닦아서 번뇌가 없어져야 체험이 됩니다. 탐심貪心이나 불룩거리는 진심瞋心이나 어리석은 치심癡心, 그런 독스러운 마음, 그런 떼 묻은 못된 마음이 없어져야 우리가 본래적인 본래면목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이론적으로 이치로라도 알아버려야 내 본래면목은 어떤 것인가, 또는 이 복잡한 우주의 현상은 본래 어떤 것인가 등을 우선 알아야 마음이 놓입니다. 우리 마음은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 부처님 말씀은 바로 보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여실如實하게 바로 보고, 또는 우리 중생한테 부처님은 틀린 말은 중생을 속일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그 사실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법이 위대한 것이 무엇인가하면 부처님 법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나 우주에 존재하는 우주의 법입니다. 우주의 자연법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을 가리커서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우주의 법 그대로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법 그대로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 자기 마음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잘못 생각하면 마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몸뚱이라는 것은 마음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몸뚱이 역시 그냥 괴로워집니다. 마음이 불안스러우면 몸뚱이도 그냥 그만만치 반영을 받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앞서 말씀과 같이 전도몽상이라, 우리가 뒤바꿔서 거꾸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성자의 가르침은 분명히 우리 마음이 주인공인 것이고, 모든 존재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부처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지금 거꾸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양보고 사실이고 실재고 우리 마음은 그 모양에 따라붙은 하나의 반영적인 지각으로 본단 말입니다. 애쓰고 불교를 믿는다는 분도 가만히 얘기하시는 것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을 그대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적唯物論的, 유물론은 산은 산대로 있고 내 몸은 내가 느낀 대로 이렇게 있고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다 환상幻相인 것입니다. 전도몽상입니다. 이른바 유물론적 사고입니다. 모든 일체존재의 근본을 물질로 본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가만히 생각해보시면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살림을 하고 무엇을 하던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자기 기분을 상하게도 하고 좋게도 하고 모두가 다 물질이 지배한다고 보통은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고 궂다고 생각하고 나라고 생각하고 너라고 생각하는 모두가 다 지금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도몽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전도몽상을 없애주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한번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을 생각해 보십시다. 멀 원, 떠날 리, 거꾸로 보고 잘못 보는 생각을 멀리 여읜단 말입니다. 그래야 불법이 되고 그래야 우리 마음이 불안스럽지가 않습니다.

 

잘못 보는 그것을 못 떠나면 어느 때나 불안스러운 마음을 짊어지고 갑니다. 내생까지도 짊어지고 갑니다. 과거전생에도 우리 생명은 틀림없이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 전생에 우리는 어떻게 살았던가, 틀림없이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살았으면 우리가 해탈하여 인간존재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인생고해로 다시 와서 그때그때 고생스럽고 현재같이 불안스러운 생활을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 전생에도 업장業障을 다 못 떼어서, 앞서 말씀과 같이 탐욕심貪欲心 도 온전히 떼지 못하고, 진심瞋心도 떼지 못하고, 모든 것을 바로 보는 정견正見도 없이 그렁저렁 살았기 때문에 금생에 인간으로 와서 이와 같이 고생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최상의 과제가 무엇인가, 최상의 목적이 잘못 보고 있는 전도몽상을 없애는 길입니다.

 

없애기 위해서 먼저 바른 인생관人生觀, 바른 가치관價値觀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생은 바른 가치관을 못 갖습니다. 왜냐하면 중생 안목으로는 바른 실상實相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상假相밖에는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실상을 보면 어떠할 것인가. 실상을 본다는 것은 말로 하기는 참 쉽습니다.

모두가 다 천지우주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단 말입니다.

지금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다이렇게 말하면 참 덤벙[]하시겠지요.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절대로 조금도 에누리[실제보다 더 보태거나 덜어서 말하는 일]해서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십니다. , 우리 마음이 바로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내 마음이 본래 부처님이라고 하면, 그러면 나는 왜 금생에 별로 재주도 없고 그때그때 판단도 흐리멍덩하게 사는가?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국한을 딱 시켜버립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다 구속을 시켜버립니다. 나는 지금 김아무개다 나는 박아무개다. 내가 아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것 그것밖에는 아니고 책도 이것밖에는 안되겠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배운 대로 책을 본대로 그 밖에는 나는 모른다 이렇게 제한을 시켜버립니다.

 

제한을 시키지 않고서 그 곧이곧대로 우리 생명의 본 모습 그대로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이 마음만 확실히 가져버리면, 부처님 경전을 보면 정말로 확신을 가저버리면 그 순간에 우리 마음의 고뇌苦惱는 다 풀린다는 것입니다. 다 풀어지고 동시에 우리 발이 하늘로 올라갈듯이 가벼워진단 말입니다.

 

우리 생각의 짐이라는 것이 우리생각의 부담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우리인간을 지금 꽁꽁 묶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 망상을 불교적인 전문술어로 농두각태籠頭角馱라 합니다. 농두籠頭는 말()이 사람을 태우고 가면서 풀을 뜯어먹으면 엉뚱한 데로 가버리니까 사람도 부려버리고 그러겠지요. 그래서 풀이 무성할 때는 풀을 뜯어먹지 못하게 머리에다 그물을 씌운단 말입니다. 각태角馱는 무엇인가. 이나 소나 사슴鹿에다 짐을 실을 때는 등골에다 짐을 실어야 할 것인데 뿔에다 짐을 실으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마치 우리 중생들은 지금 풀을 뜯지 못하게 말의 입에다 망을 씌우고, 소나 사슴이나 그런 짐승에게 무거운 짐을 뿔에 실으면 얼마나 불편 하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들은 그 나쁜 견해, 그 좋지 못한 생각이 마치 입에다 씌우는 그물이나 같은 것이 부자유스러운 것이 우리한테 있고, 그와 동시에 우리가 뿔은 없지만 마치 머리에다 필요 없는 짐을 지었단 말입니다. 짐을 지었다는 것은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고 엉뚱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란 것은 현재 있는 김아무개 박아무개 이것은 가짜에 불과하고 참다운 자기는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가 다 본래 부처라는 말씀을 고구정녕苦口丁寧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모든 공부가 다 부처가 되기 위해 근원적인 업장을 녹이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훌륭한 가르침이 있으면 우리 중생은 어떻게 해서 그런 가르침을 빨리 깨달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분들은 불경을 많이 외우고 잃으면 그걸로 해서 빨리 깨달을 것 아닌가? 또는 법화경法華經을 주로 한분들은 법화경만 외우고 읽어도 된다고 말씀도 합니다.

 

특히 일본日本 중세기에서 나오신 일연一然대사 계통은 법화경도 일본식으로 나무호랭겟교만 애쓰고 외우면 그것 가장 최상의 성불의 길이다 그런단 말입니다. 지금 일본 불교 상황을 간단히 말씀합니다만, 또 임재종臨齋宗 계통에서는 화두話頭 공안公案만 애쓰고 외워서 의단을 품고 참구를 하면 그것이 성불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라고도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조동종曹洞宗 계통에서는 묵조선黙照禪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본래가 다 부처라고 그랬는데 무슨 필요로 무얼 의심하고 그럴 것인가. 그럴 필요가 없이 본래가 부처라고 하는 가르침만 믿고서 그 깊은 부처님 명상만 하고 있으면 저절로 본래가 부처니까 부처가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가르치는 가르침이 이른바 묵조선입니다. 잠잘묵, 비출조, 지금 한국의 불교로 따지면 원불교圓佛敎는 묵조선 계통을 합니다. 조계종曹溪宗 계통은 화두공안이라, 어느 문제를 주어서 거기에다 의심을 품게 해서 우리 번뇌 망상을 없애는 그런 가르침을 시킴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소중하기는 소중해도 이 종파는 이렇게 말하고 저 종파는 저렇게 말하고, 또 같은 스님 네도 이 스님은 자기가 공부해서 닦어가는 대로 자기식 대로 지도하고, 그래버리면 일반 불자님들은 어떻게 해서 어디가가 마음을 붙여야 할 것인가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러분들은 참 부처님을 잘 믿으셔서 여기까지 오셨습니다만 여러분들의 자녀간들은 앞으로 그냥 그대로 그런[다종교 대종파 다양한 수행방법] 신앙면에서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 분위기로 보면 기독교가 훨썩 수가 더 많아 보이고 또 기독교 계통은 교화하는 시설이 화려하기도 하고 더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 간들은 역시 기독교 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안 믿으리라고 볼 수가 없다 말입니다. 따라서 아들이나 딸들은 자기 부모님은 불교를 믿지만 기독교를 믿을 수 가 있고 또 며느리나 사위나 다른 존교를 믿을 수가 있다 말입니다.

 

 

가족끼리도 종교가 제 각각인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지금 이런 때입니다. 지금 대학 다니는 아들이나 딸이 종교가 이렇게 많이 있는데 부모가 어떤 종교는 어떠한 것이고 또 부모님께서 믿고 계시는 불교는 다른 존교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는 부모로서 자기 자녀에게 어떤 종교는 어떤 종교다고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불교는 어떠한 종교냐고 물을 때 바른 대답을 못하면 참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부모님들은 이런 물음에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세밀한 비교종교학 공부는 못한다 하더라도 지금 유포되어 있는 기독교, 이슬람교는 어떠한 것인가 등 세계적인 몇 가지 종교만이라도 체계를 세워 두어야 소중한 자녀들에게 바른 대답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다른 찌꺼기가 하나 없이 일체 만유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는 위대한 가르침임을 배워 알게 해야 참다운 부모가 됩니다.

 

우리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불성·불심이 내 마음의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잘못 알고 잘못 가늠할 수 있습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불심佛心은 어느 고유固有한 데나 특정한 곳에 별도로 있지 않습니다.

 

일체 존재가 모두 다 불성뿐이다란 뜻입니다. 일체 존재가 지금 이대로 불성이란 뜻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부처님만 있다는 뜻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도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끄트머리가 원자原子, 소립자素粒子"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불성이라고 하면 산소는 무엇이고 수소는 무엇이고 전자는 무엇인가 양성자는 무엇이고 하는 의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각 원소라든가 원자라든가 하는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는 현대과학이 알지 못합니다.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은 전자나 양성자 가운데는 아주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현대과학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폭탄, 수소폭탄 등이 곧 원자력이니까 따라서 그 눈꼽만도 못한 원자가운데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원자나 소립자 안에는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단 말입니다.

 

우주의 끄트머리까지 있는 에너지, 우주의 기운, 우주의 정기는 한도 끝도 없구나하고 과학자도 감탄한다고 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힘이 바로 불성의 힘입니다. 어느 것도 불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 천지 우주가 불성이며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이 나와 더불어서 한 몸 하나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불성 곧 부처님 성품이라는 우주의 정기精氣가 어떻게 진동하고 운동하고 결합해서 전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고 양성자가 되었는지는 앞으로 과학자가 밝힐 문제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일체중생一切衆生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일체중생하면 사람만의 마음에 불성이 들어 있지 아니한가 하여 국한시켜서 봅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체중생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느 것이나 분석하고 분석해서 들어가는 미세한 알갱이인 전자나 양성자나 모두가 중생입니다. 중생이기 때문에 그러한 미립자들도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모두가 다 불성이 있습니다.

 

<그래서화엄경華嚴經에서는 "두두물물 화화초초頭頭物物 花花草草가 비로자나진법신毘盧遮那眞法身"이라 했습니다. 꽃 하나 풀 한 포기가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만유가 다 불성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성, 그것은 그저 존재의 근원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원자의 힘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듯이, 그보다 더 미세하고 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의 힘은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성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일체의 공덕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성 차원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또한 불성은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불성 속에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불성은 불교 말로'대아大我, 진아眞我'고도 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말하는''라고 하는 것은 소아小我나 망아妄我입니다. 그런데 참답게 깨달아서 아는 바른 나, 이른바 참진, 나아자 진아眞我, 큰대자 나아자 대아大我라합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힘은 또 역시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부처님에 대해서 능력을 제한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의 능력은 제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알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80평생 부처님 공부를 했지만 부처님 공부를 다 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란 우리 마음의 본체인 동시에 우주의 본래면목 자리인 부처님한테 들어 있는 힘이라는 것은 한도 끝도 없는 무량무변의 힘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들어 있는 행복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불교에서는 부처님한테 들어 있는 깨달아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합니다.

 

<즉 불성과 똑같은 힘이 내 안에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아, 대아가 바로 불성이요 불성은 내 본성, 자성, 본래면목이나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소중한 불성이고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삼명육통이란 말은 불경에 수백 군데가 있습니다. 삼명은 석삼, 밝을명, 먼저 숙명통宿命通이라, 과거를 훤히 아는 지혜입니다. 텔레파시나 현대적인 시설이 없이도 밝은 마음만으로 과거 전생뿐만 아니라 무수 생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다 아는 능력입니다.

 

다음은 천안통天眼通입니다. 천안통은 우주를 다 내다볼 수 있고 미래를 다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합니다. 또 누진통漏盡通이 있습니다. 누진통은 번뇌의 근원을 다 알고서 번뇌를 다 없애고 마음을 깨닫게 하는 그런 지혜를 다 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숙명통·천안통·누진통인데 성자가 온전히 되면 그 삼통三通은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저나 어느 누구나 삼명통을 못하면 공부가 아직 덜된 셈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공부는 평생 동안 참선한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다고 해서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다된 증거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또 육통六通은 삼명통도 들어갑니다마는 천이통天耳通은 모든 음성을 다 들어서 안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영어를 안 배워도 다 알아듣는 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힘이라는 것은 굉장히 엄청난 것입니다. 누구나 우리에게 이런 힘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잘못해서 "나는 나일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뿐이다."이렇게 자기능력을 국한시켜버리는 나쁜 생각 때문에 마음이 그 능력을 확대를 못합니다. 확장을 못합니다.

 

불교는 마음을 한도 끝도 없이 키우는 공부입니다. 제한된 우리 마음을 키워서 본래 영원불멸하고 광대무변한 그런 자리, 본래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따라서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지혜이기 때문에 우리도 온전히 공부한다면 그런 신통神通이 꼭 그렇게 나 와야 됩니다.

 

신통이 안 되면 금생에 중생으로 생활 하다가 죽어서 내생 가서도 또 중생으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도 윤회전생輪廻轉生을 아시듯이 뱅뱅 돌아서 이리저리 윤회를 해서 개나 소나 축생도 됩니다. 지금 애완용 동물도 그 개가 전생에는 형제간이나 친구이거나 부모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법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생명의 뿌리에서 보면, 불성차원에서 본다면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어리석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내 마음을 제한시켜 버리고 꽁꽁 구속시켜버려서 능력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훤히 열린 광대무변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과 같이 일연종 계통과 같이 나무호랭갯교를 부르는 것도 있고, 요즘은 불경을 사경을 많이 하는데도 있으나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제일 좋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 이름을 외이는 염불이라든가, 화두공안을 의심하는 화두법이라든가, 또는 화두 없이 묵조 하는, 일본사람들은 화두 없이 묵조 하는 쪽이 훨썩 많고 세력도 강합니다.

그와 같이 본래가 부처인데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본래 부처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명상하면 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묵조선인데 그런 방법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여러 방법 중에서 어떤 방법이 제일 쉬울 것인가?

 

2석가라고 하는 용수龍樹보살은 부처님 정통 조사 가운데서 열네 번째 분입니다. 그 위로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는 바로 마명馬鳴대사라 합니다. 마명존사는 12대 존사입니다. 14대 조사가 용수보살인데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하는 분입니다. 그분들이 대승불교에 대해서 훌륭한 체계를 많이 세웠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기신론은 일어날 기자 믿을 신,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데 중점을 둔 그런 가르침이 대승기신론입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12대조사인 마명대사가 저술을 했고, 14대 조사인 용수보살은 중관론中觀論이라든가 여러 가지 훌륭한 책을 많이 저술한 가운데, 우리 불교를 어려운 문과 쉬운 문과 구분해서 어떠한 것은 불교의 어려운 문이고 어떤 공부는 쉬운 문인가 구분해서 우리한테 말씀하셨기 때문에 즉 이행문易行門과 난행문難行門으로 구분해서 말씀하셨는데 재가 불자님같이 바쁘고 공부할 여건이 어려운 분들은 당연히 쉬운 문으로 공부를 하셔야 되겠지요.

 

불교적 표현으로는 이행문은 쉬울이, 행할행, 쉽게 행할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어려울난자 난행문이란 말입니다. 이행문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자상한 말씀은 못 드려도 어느 정도는 말씀드려야 여기까지 오신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이행문은 부처님을 흠모欽慕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내 생명이면서 우주의 생명입니다. 내 생명의 고향이며 내 본래면목입니다. 바로 우주자체이시고 영원한 내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면 찬탄하고 찬탄해도 부족한 우리의 ''입니다. 이 자리를 바로 파고들어서 놓치지 않는 것이 염불이고 갈앙심渴仰心과 그리움으로 부르고 사모하는 것이 또한 염불선이기도 합니다.>

 

서기 400년전 나오신 분으로 아리스토텔레스 훌륭한 제자인 위대한 플라톤이 있습니다. 그분의 중요한 저술 가운데 국가론이라는데 가서 '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요지를 말씀드리면 중생들은 동굴 안에 갇혀 있어서 어두워 잘못 보고 잘못 판단을 하고 동굴 안에서 흐리멍덩하게 감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철인哲人이나 성인聖人들은 동굴 밖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광명세계에서 바르게 판단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중생은 감각으로만 보고 판단하니까 동굴안에서 사는 것과 같고, 철인이나 성자는 감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태양 같은 밝은 빛으로 보니까 사실을 바르게 옳게 본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플라톤이 위대한 것은 80세가 되도록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진리만을 위해 봉사하다가 청정하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우리 중생은 감각적인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하는 중생 차원의 상식적인 감각적 견해가 지금 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은 바른 견해가 아니라 전도몽상입니다. 성자의 청정한 눈으로 봐야지, 번뇌가 없는 눈으로 봐야지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맑은 거울이 되어야 모든 것을 바로 비출 수가 있듯이 조금도 때 묻지 않은 마음이 되어야 바로 볼 수 있다는 즉 말하자면 전도몽상을 떠나버린 성자의 마음과 중생의 잘못 보는 견해를 대비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우선 자기 존재가 그만 만치 제한되어 있고 지금 바로 보지를 못한다. 가장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들은 그 눈에 보이는 물질이 사실로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감각으로 반영되는 우리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사실로 있는 대로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바로 알지를 못합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불교의 본래적인 말씀으로 하면 사실은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굉장히 마음으로 거부반응을 느끼시겠지요. ", 내 몸도 물질이고 오늘 타고 온 차도 물질인데 물질이 왜 없다고 하는가 하시겠지요. 없다는 말씀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면 자동차, 몸뚱이면 몸뚱이, 세포면 세포, 금패물이면 금패물이 우리가 지금 생각한 대로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만 본다 하더라도 금패물이나 몸뚱이나 세포가 모두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또 원소차원으로만 본다하더라도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가 본다면 원소 차원을 훨씬 넘어서 원소의 근본바탕이며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물질은 물질이 아니고 불성입니다.

 

따라서 일체 존재가 바로 불성으로 되어 있다고 느껴야 모든 성인들이 우리한테 말씀하신 실상을 우리가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 호랭갯교를 부르나 뭘 부르든 간에 내내야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우리 감각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물질 뿐'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우리가 모든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길이 바른 수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의 길들 중에서 제일 쉬운 것이 이행문 입니다. 그래서 그 쉬운 이행문은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근본생명에 대한 간절한 믿음과 그리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모신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본고향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간절히 흠모하는 추구심이 없으면 우리 마음이 빨리 비약이 안 됩니다.

 

과거 전생에도 잘못 생각하고 금생에도 잘못 느끼고 그런 버릇이 우리 마음에 잔뜩 들어 있어서 정말로 사무치게 본래자리에 대한 본래 우리생명의 근원자리 실상 즉 불성에 대한 간절한 흠모심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플라톤도 역시 에로스라 간절한 그리움이 있어야 현상적인 것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으로 우리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또 기독교에서 , 주여하고 하느님을 흠모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하느님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처님 가르침 같이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포섭하고 모든 것이 본래로 하느님 아닌 것이 없다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불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창조한 하느님은 따로 있고 자연계나 인간은 별도로 있고, 그렇게 보는 것이 기독교에서 보는 하느님의 개념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지금 모든 것을 포섭하고 화해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이 화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봐야 합니다. 지금 기독교는 제도가 있어서 그 제도를 지키려고 별스럽지도 안는 사람들이 보태기도 하고 깎기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도 그런 범례가 많이 있습니다. 일본 일련대사는 위대한 분은 위대한 분인데 꼭 자기 식으로 나무호랭갯교만 불러야 성불이 빨리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만 고집하면 다른 사람과 화합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일본 중세기에 같은 불교끼리 싸움을 많이 했어요. 서로 죽이기도하고 서로 절을 불태우기도 하고, 우리 한국은 그런 비극이 없었으나 일본 사람들은 그런 비극이 많이 있었습니다. 꼭 자기식만 옳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유태교라든가 또는 기독교라든가 또 중동지방의 이슬람교라든가 세 종교는 근본 뿌리는 똑 같습니다. 근본 교조는 다르지만 다 모두가 하님이 창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그런 주의는 같지요. 그 일신론一神論이라, 오직하나의 신을 믿으니까 일신론 아닙니까.

 

그네들은 창조주인 하나님과 창조된 자연과 인간은 질적으로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것이고 우리 중생은 창조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질적으로 밑이고 다르다고 합니다. 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위대하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못되고 창조물로 보니까 훨썩 밑으로 봅니다. 그래 놓으면 차별적인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아들이나 딸 들이 기독교도 이슬람도 믿을 수가 있겠지요. 예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믿으면 갈등 될 것이 없는데 그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위대하고 피 창조물인 인간이나 자연은 원죄를 짊어진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다 하면 참 딱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별로 진리가 아닌 것을 억지로 주장하는 것을 근본주의根本主義, 원리주의原理主義라 합니다. 종교도 원리주의 근본주의를 믿어 버리면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래버리면 남들하고 화합하지를 못합니다. 학식이 높은 우리 한국의 가정에서 자기는 천주교를 믿고 자기 아들이나 딸은 기독교를 믿고 또 부모님은 불교를 믿고 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은 무던히 마음이 너그러워서 갈등이 없을 란가 모르겠습니다만 그 종교를 극성스럽게 믿을 때는 견해가 달라놓으면 화해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며느님을 얻든 사위를 얻든 자기가 믿는 종교에 대해서 극성을 부리면 도저히 화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일신교一神敎를 믿는 그 사람들 같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말하면 불교나 힌두교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범신교는 넓을 범, 귀신 신자 인데 모두가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종교입니다. 자연自然이 곧 신이고 신이 곧 자연입니다. 어느 것이든 다 이른바 영원적인 생명 자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론적으로 따져보면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태교도 범신론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론리 체계를 안 세워서 그렇지 이론적으로 정당하게 추구하면 모두가 다 범신론이 됩니다. 일체 존재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 일체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서로 다툴 것이 없습니다.

아무튼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쉬운 문은 부처님을 생명으로, 부처님을 하나의 우주생명宇宙生命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주생명으로 받아들일 때는 내 마음이 지금 현제 어떤 형태로 있든 간에 우리 마음의 본체도 똑같이 바로 우주생명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진여불성이거니 어떤 사람의 마음에나 부처님은 균등하게 들어 있습니다. 불교의 표현으로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어떤 누구 마음이나, 우리한테 잠재해 있는 본래성품은 다 일미 평등한 불성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우리가 믿는 것이 대승적大乘的인 신앙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을 믿는 것이 대승적인 신앙이고 대승적인 신앙을 가져야 비로소 참선에 들어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냥 선방에 들어가서 화두 의심하고 명상하고 염불하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자세가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에 놓여 있어야 비로소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공부하시든지 간에, 화두를 의심하는 식으로 하시든 또는 잠자코 묵조를 하시는 명상식으로 공부를 하시든,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시든지 간에 여러분 마음이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본래 생명의 본체자리인 진여불성에 입각하면 모두 다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도 어떤 제한이나 위축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방에 앉아 애쓰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견해인 일체 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내 마음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하고 똑같은 마음이다이렇게 확신을 못하면 참선이 못됩니다.

 

그래서 같은 염불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면 부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호법선신도 보호하겠지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래면목자리에 입각하지 않고 명호만 부르는 것은 염불선念佛禪이 못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천지우주 모두가 다 조금도 차별이 없이 일미 평등한 진여불성이다이렇게 확신하고 염불을 해야 염불선이 되고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에 인연 따라서 공부 방법을 선택합니다. 어느 스님을 만나서 법문을 듣는다거나 불경을 보면서 공부를 선택을 하는 것인데, 그런 공부 방법을 선택할 때에 가령 한 김이라는 선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선사가 앞서 제 말씀과 같이 근원적인 문제 모든 실상實相문제에다 우주만유의 실상에다 마음을 두고 공부하는, 바꿔서 말씀드리면 본체를 여의지 않는 근본적인 원리를 여의지 않는 공부를 했다고 하면 남을 그릇 지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무리 이름이 높고 사회적으로 신뢰받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그 본체적인 근원적인 생명의 근본자리, 생명의 실상 자리를 중요시하지 않고서 그냥 선방에서 몇 십년동안 공부했다. 이것만 가지고는 자기 공부도 미숙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끈다고 할 때도 그도 역시 '한 소경이 많은 소경'을 이끄는 것 같이 굉장히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하시는 분들은 그 점을 잘 감별을 하셔야 됩니다. 저분이 과연 우주만유의 본래면목자리를 지금 인식하고 있는 것인가. 온전히 깨닫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가 참답게 증명해야 되겠지만 증명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증명한다고 했을 때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분명히 삼명육통을 다 해야 합니다. 삼명육통을 온전히 못했으면 아직 다 증명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윤회를 참선을 좀 하신 분들 중에는 윤회는 일반사람들이나 생각할 일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윤회전생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소흘히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치로는 부처님 가르침의 윤곽을 알고 진여실상 진여불성에 대한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우리 존재는 과거의 업에 얽매어 있습니다.

 

알기는 알아도 아직 미운 사람은 밉고 자기에게 좋게 해준 사람은 좋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두가 버릇입니다. 과거 생의 업입니다. 업을 다 없애지 못하면 중생계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중생계를 떠날 수가 없다는 말은 금생에 죽어지면 떠나지 않는가. 금생에 죽는 다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시 금생에 우리가 지은대로 내생에 업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두를 다 초월해서 근원적인 앞서 말씀과 같이 진여불성에다가 마음을 안주시키는 것은 전제적으로 꼭 필요한데 그렇다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지금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 나라는 존재의 업장이 얼마나 무거운가에 대해서 깊이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역시 지금 우리가 참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만 부처님은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 부처님 얼굴은 모든 자비慈悲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닮아야 합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인데 잘못 살아서 부처님을 닮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 자비스러운 삼십이대인상三十二大人相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의 얼굴을 갖기 위해서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무량세월동안 남에게 베풀고 남을 위해 자기 몸도 희생하고 그 가지가지의 보살행菩薩行 이른바 육도만행六度萬行이라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지켜서 가지가지의 보살행을 무수한 세원동안 몇 만생동안 되풀이하면서 그 삼십이상 팔십종호라는 자비스러운 얼굴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부처님 얼굴을 닮아야 할 것인데 우리가 생각하기는 앞서 말씀과 같이 자기 개인적인 국한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를 보든, 어떠한 경우든 꼭 그 부처님 사상대로 본체를 여의지 말고, 우리가 본체를 여의지 말고 생각한다는 것은 어느 것을 보나 다 부처의 화신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좀처럼 그렇게 안 보이지 않습니까. 집안에서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요 딸이요 하지만 좀 미운 짓을 하면 그냥 미워지고 더러는 진심도 내고 때리기도 할 수가 있겠지요.

 

허나 그렇게 해서는 결국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드는 것이 못 됩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좋은 일을 하나 나쁜 일을 하나 사실은 모두가 다 근원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조금도 부처님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단 말입니다. 어느 것이나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령 앞서 말씀과 같이 애완용 개를 기른다 하더라도 개 역시 못된 짓도 하고 오물을 아무데나 보겠지요. 어떻게 하던지 그것도 역시 부처님의 차원에서 보고서 부처님 화신으로 봐야 사실은 본연대로 보는 것입니다. 본래대로 보는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꼭 선방이나 절 같은 특정장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부처님 가르침은 최선의 생활방법입니다. 우리가 직장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상사를 대하나 부하 직원을 대하나 어떻게 지내던 간에

 

<녹음생략>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상만 보고 성품은 못 봅니다. 본체를 못 봅니다. 우리는 본체를 못 보는 중생인데 우리가 본체하고 하나가 되어야 성불할 것인데 현상만 가지고 좋다 궂다 따지고 시비분별하면 공부가 성취될 가망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으로 해서는 우리 참다운 우리 생명의 고향 자리가 부처님 자리다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고향자리의 생명 자체의 이름이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란 우리 생명의 고향에 모두를 다 바칩니다. 이것이 나무南無를 넣어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지장보살地藏菩薩님도 마찬 가지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한도 끝도 없어서 하나의 말로는 다 표현을 못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기운이 지구덩어리에 있으면 지장보살입니다. 부처님 기운이 산에가 있으면 산신山神이라, 부처님 기운이 물에가 있으면 용왕龍王이란 말입니다. 또 부처님을 자비慈悲로운 면으로 표현하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 부처님을 지혜로운 쪽으로 표현하면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 부처님을 또 원력願力으로 표현하면 보현보살普賢菩薩 그러는 것이지 뿔뿔이 사람 같이 김가 따로 있고 박가 따로 있고 하지를 안는다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명호名號를 부르든지 간에 모두가 다 하나의 우주생명이다이렇게 해서 부르면 우리 마음도 빨리 넓어지고 동시에 부처님이 우리한테 베풀어 주시는 공덕도 훨썩 큰 것입니다. 부처님의 기운이 우주에 충만해 있어서 명호를 한번 부르면 부른 만큼 부처님의 가피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지독히 미워하면 그 미운 기운이 미워하는 그 사람한테 가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가는지는 몰라도 남을 저주하고 남을 미워하면 그 사람에게 틀림없이 그 염파念波의 파동이 간단 말입니다. 또 그 사람을 생각하고 공경恭敬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祈禱를 모시면 그 사람한테 그러한 기운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일본 가서 유학하고 있는 아들이나 딸한테 기도를 모시면 일본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그 기운이 가는 것입니다. 기도해 준 대상에게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를 모시면 기도를 모신 대상한테 틀림없이 그런 기운이 간단 말입니다. 우리가 정성들인 만큼 갑니다. 수학적으로는 얼마 마큼 가는가는 측정할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우리가 정성 드린 만큼은 간단 말입니다. <: 우리 마음은 시공을 초월해있기 때문에 실험적으로 측정해서 정량적定量的으로 수치화 할 수는 없고 정성적定性的으로 언어나 문자로만 표현가능 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파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 병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모시면 정말로 정성들이면 틀림없이 그 기운이 갑니다. 우주라는 것은 부처님 기운으로 공간도 없이[빈틈도 없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흠모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울 때에는, 우리가 그냥 생각만 해서는 여러 가지로 복잡하니까 부처님을 생각하는 정도가 그때그때 그냥 중단 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단이 안 되고 지속적으로 해야 그래야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런 공덕이 차근차근 우리한테 성장해 옵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는 우리 마음에 부처님 기운으로 꽉 차 버리면 성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에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부처님기운이 꽉 차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불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밥 먹을 때나 어딜 가나오나 자거나 누울 때나, 밤에 주무실 때도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주무시면 자기는 잠자버려서 모르지만 옆 사람이 들으면 잘 때도 나무아미타불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공부를 하셔야 잠재의식에 때묻어있는 몹쓸 여러 가지 생각 업장을 녹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업장이 무겁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업장이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천상도 못가고 극락도 못가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벌써 업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별로 죄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지마시고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벌써 허물이 있어요. 중생노릇 하는 것 자체가 허물입니다.

 

성자가 못되고 우리가 본래는 성자인데 본래는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고향은 바로 부처인데 부처가 못된 것은 우리한테 허물이 있습니다. 허물을 벗기는 방법은 불경을 외워도 좋고 사경을 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그런 가운데서 가장 쉬운 문이 이행문 곧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일입니다. 잠잘 때도 하고 밥 먹을 때도 하고 차운전하실 때도 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하셔서, 이렇게 하는 것 보고 염염상속念念相續이라 합니다. 그 생각 생각에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다 말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마음이 통일되고 사무쳐야 업장이 녹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금생에 꼭 윤회를 벗어나 내생까지 안가고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질의응답>

큰스님 : 아는 것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신도 : 아함경에 업보는 있는데 작자는 없다고 했는데 의심이 풀리지 않습니다.

큰스님 : 아주 참 좋은 질문이십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을 모르면 부처님 법을 모르는 것인데 연기법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소승연기법은 가령 구사론이나 또는 대비파사론이나 하는 그런 소승연기법은 우리가 업을 짓고, 업을 지어 놓으면 그 과보로 해서 그야말로 여러 가지 고통이나 또는 안락을 보를 받아야 되겠지요. 그러나 그 소승연기법은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고 업을 짓고 그런 과보를 받는다는 이른바 혹업고惑業苦, 혹업고가 연속되어가는 그런 것은 하나의 소승적인 견해인 것이고, 그러나 대승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이른바 작자作者가 없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입니다.

 

진여불성이라는 하나의 우주적인 실상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 진여불성이 스스로의 기운 따라서 우주가 형성 됩니다.<: 성기문,(반대는 연기문) 본래는 둘이 아니다.> 다시 비교해서 말씀드리면 바다에서 바람이 불면 천파만파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파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바다 본래 바닷물이나 파도나 다 똑 같이 다 물입니다. 높은 파도나 낮은 파도나 거품이나 다 똑 같은 물입니다.

그와 똑 같이 우주라는 것이, 같은 연기법도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우리 중생은 법계연기를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깨달은 분들은 법계연기 우주 진여법계를 훤히 실감을 다 스스로 하고 다 체험을 해야 그래야 이른바 깨달은 성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깨달은 분들이 보는 것이 바른 견해인데 그것이 법계연기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번뇌가 있고 업을 짓고 과보를 받곤 하지만 법계연기에서 본다면 업도 없고 번뇌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 업도 진여불성, 번뇌도 진여불성, 모두가 다 진여불성> 그래서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은 근원적인 대승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일체존재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중생 차원에서 보면 아!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 짓는 사람[작자]도 있고 업을 받는 사람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이른바 업감연기業感緣起, 업을 짓고 또 그 과보로 해서 인생고를 받고 그런 차원의 현상적으로 받는 것은 그것은 이른바 엄감연기입니다.

 

이른바 엄감연기[혹업고 삼법전전 상속무궁], 업으로 해서 무명으로 업을 짓고 고를 받고 하는 것은 소승연기입니다. 대승연기법은 우주의 실상 그대로 그때는 중생도 없고 그때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닙니다. 오직 결국 하나의 진여불성 부처님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도를 하셨을 때에 부처님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청정 불안으로 볼 때는 산천초목 모두가 다 진여불성 뿐이다 말입니다. 지금 설사 나쁜 사람이 있어서 도독질도 하고 표독스러워서 살인도 했다고 합시다. 우리가 현상적인 의미에서는 굉장히 나뿐 사람이고 용서할 수 없는 도둑놈 살인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적 면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죽임을 당한 사람이 죽이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똑 같단 말입니다. 불생이불멸이라, 영원의 차원에서 보면 좋은 것도 없고 해로운 것도 없다 말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근원에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 뿐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 [때 묻은]눈으로 보기 때문에 차별이 있고 이것이 있고 업이 있고 고가 있고 낙이 있고 한단 말입니다. 참 좋은 질문 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 20011201-성륜사 법성당 청화대종사 설법

* 당일 성륜사 녹음실 녹음<영상은 구하지 못했음>

* 20171012-본정 워드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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