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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20호 2006년 겨울 (3)

1

선오후수(先悟後修)

 

()이란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것을 잘 명심해야겠습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개념적으로 깨달아 버리고 닦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실상관(實相觀)이 우리 마음에 확연히 박혀야 합니다. ‘다만 내가 업장에 가리워서 모를 뿐 내 본바탕, 천지우주 바탕은 실상묘유(實相妙有)요 진공묘유(眞空妙有). 이것은 색즉공(色卽空)이다. 변증적인 표현으로는 공, , (空假中)이다. 인격적인 표현은 법, , (法寶化) 삼신(三身) 아미타불이다. 또는 이러한 생명의 활력이 관세음보살이다.’ 이와 같이 파악을 해버려야 합니다. 그런 후에 공부를 해야 만이 백천만겁 동안 쌓이고 쌓인 업장이라 하더라도 즉시 다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견성오도를 다 해가지고 닦는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혜지(乾慧智)로 깨닫는 해오(解悟)를 먼저 해놓고서 닦아야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삼세제불의 정설입니다.

석존께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해서 설산에서 닦을 때는 선오후수가 못되었겠지요. 만약, 석가모니 전에 정말로 명안종사(明眼宗師)가 있어서 ‘그대는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고 했을 때는 6년 고행이 다 걸릴 필요가 없었겠지요. 석존 전에는 선오후수(先悟後修),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 공부 방식인 것이고, 석존 뒤에는 석존께서 모든 방법을 다 분명히 밝혀 놓으셔서 그 말씀을 따라서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닦음도 올바른 닦음이 되고 성불에 이르는 첩경(捷徑)이 되는 것입니다.

 

 

2

믿음

 

() 공부는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먼저 본래(本來) 부처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있다는 병, 내가 있다는 병, 대상적으로 실존적으로 무엇이 있다는 병, 우리 불자님들의 평생동안에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있다는 병을 쳐부수는 일입니다. 있다는 병을 우리가 못쳐부수면 참다운 불자가 못됩니다. 따라서 참다운 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서로 피차 갈등을 하고 가정적으로 불화스럽고 여러 가지 불평등이라든가 그런 모든 문제는 있다는 병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근본 성품자리에 우리 마음을 두고 하시면 됩니다. 성품이 안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을 둘 것인가? 이것도 부처님 말씀에 우선은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비어 있고,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만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은 충만해 있다. 이렇게 먼저 믿어야 합니다.

 

오직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이요 부처요 모두가 다 차별이 없이 불성(佛性), 불심(佛心) 뿐입니다. 이렇게 알고 믿는 것이 참다운 대승적(大乘的)인 신앙입니다. 대승적인 신앙을 가져야 참다운 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공부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부처님의 본원(本願)이라, 우주(宇宙)는 우주 자체의 목적(目的)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인가 하면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 하는 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외우지 않습니까?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다 무량법문(無量法門)을 알게 하소서! 그런 것이 우주의 뜻입니다. 우주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부처님의 본원이라 합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본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불교를 안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대과학을 안믿을 수가 없듯이 불교는 진리(眞理)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미련한 사람들은 불교를 더디 믿겠지요. 금생에 못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금생에 믿고 닦아서 성불하실 것입니다.

 

 

3

일행삼매(一行三昧)와 일상삼매(一相三昧)/()과 혜()

 

천지우주를 한 덩어리로 보는 견해인 일상삼매(一相三昧)를 안 끊기고 계속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를 한 덩어리로 보는 그 견해는 일상삼매이고, 이러한 것을 간단(間斷)이 없이 계속하는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앞 생각 뒷 생각에 딴 잡된 생각이 안 끼이도록 까지 사뭇 이어가는 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해야 만이 참다운 선()입니다. 좀 어렵지만 꼭 일상삼매를 우리 생명과 같이 중요시해서 마음에 심어두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마음의 등불인 그 자리에 딱 머물러 두고서 지속적으로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육조단경 식으로 육조 혜능스님 말씀으로 말하면 일상삼매는 혜적(慧的)이고 지혜를 의미하고, 일행삼매는 정적(定的)이고 선정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혜와 선정이 어울러져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참다운 선()이 됩니다. 지혜와 선정이 균등히 되어야 참말로 참선이 됩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삼매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마땅히 먼저 반야바라밀을 들어야 한다.”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반야가 있으면 불자이고 반야가 없으면 불자가 못됩니다. 반야가 없으면 결국은 속물입니다. 반야가 있어야 참선이 되는 것이고 반야가 없으면 참선이 못됩니다. 반야는 무엇인가?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또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지혜입니다.

 

“그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배운 연후에야 능히 일행삼매에 들 수가 있다. 그래야 후퇴도 물러남도 없고 또는 파괴함도 없고 거리낌도 없고 또는 상이 없다. 선남자 선여인들이 일행삼매를 정작 공부하려고 할 때는 잡요한 시끄러운 인연이 없는 한가한 곳에서 모든 산란스러운 생각을 다 버리고 상을 취하지 않고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 매어 두어야 한다.

 

‘부처의 경계는 무슨 경계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이 부처의 경계를 잡기가 좀 곤란스럽습니다. 부처란 것은 ‘본래면목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는 알지만 우리 마음을 부처의 경계에다 맨다고 할 때에는 어떻게 맬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부처란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일체 존재의 생명인 동시에 상이 아니지만 인연이 닿으면 또 현상계에 상을 나투는 것입니다. 즉 유()도 아니고 가()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를 감견(感見)을 했으면 좋은데, 미처 감득(感得)을 못한 사람들은 부처에다 마음을 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나라는 이 몸뚱이나 너라는 몸뚱이나 천지 우주에 있는 모든 두두물물이 다 비어 있다.’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자리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비어 있는 무량무변한 자리에 무량공덕을 갖춘 청정적광(淸淨寂光)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마음을 매는 것이 실상관(實相觀)입니다.

 

 

4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정견(正見)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나 금강경(金剛經) 도리는 모두가 다 비었다는 도리 아닙니까?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삼천대천세계가 명명백백(明明白白)이 있고, 깨달은 뒤에 보면 모두가 다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눈꼽 만큼도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는 확신이 서고 공부를 해야 선()공부가 됩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과 더불어서 하셔야 그래야 참다운 공부고 참다운 염불(念佛)이고 참다운 주문(呪文)이고 참다운 화두(話頭)고 참다운 관법(灌法)이고 참다운 선()입니다.

 

필연적으로 오온환신, 오온법이 다 공()인 도리를 모르면 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른 정념은 모두가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다. 일체가 하나의 일원적으로 불성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정견(正見)입니다. 이러한 바른 정견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일상성에 매몰되어서 그런 정념을 상속시키지 않으면 우리 공부가 참다운 선()으로 이어지기가 어렵습니다.

 

 

5

계행

 

()을 닦으면 자연적으로 우리 생리(生理)나 심리(心理)가 정화(淨化)되어서 악을 저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음식도 함부로 먹고 계행을 함부로 파계(破戒)하는 것은 참선을 많이 못한 증거입니다. 참선을 많이 했다 하면 응당, 계행은 지켜야 하고 그때는 또, 저절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인격완성을 하기 위해서 뛰어 넘을 단계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인데, 참선을 많이 했다 하면 이런 삼계(三界)를 다 초월해야 하는 것입니다.

 

 

6

모양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가부좌(跏趺坐)하고 앉기가 어렵다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처음에 습인(習忍)이 발득 될 때까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나쁜 버릇만 떨어지면 제일 쉬운 것입니다. 가부좌한 정삼각형 모습이 기하학(幾何學)적인 의미에서도 가장 안정된 모습인 것입니다. 둥그런 것은 아예 안정이 될 수도 없겠고 네모꼴보다도 정삼각형은 아래가 무겁고 넓고 위가 좁아서 제일 안정된 것입니다. 이 모습이 가부좌하고 똑같습니다. 따라서, 가부좌할 때는 가장 몸이 안정되고 지혜가 제일 발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에 대한 공덕을 이와 같이 표현하는 것은 모두가 다 경론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가부좌 모양을 취하면 참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참다운 선()은 못됩니다. 오직 마음이 본분사,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우리는 선()에 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합니다. 달마 스님의 어록을 보나, 육조단경을 보나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상을 여의고 본래면목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하나의 테크닉이나 형식적인 모양으로는 참선 같은 모양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진정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이해(理解) 바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바른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얻지 못하고서 선방(禪房)에 앉아서 그냥 하나의 테크닉으로 하나의 기능(技能)으로 해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선() 공부가 잘 나아가기는 어렵습니다.

 

() 공부는 그냥 앉아서 모양만 의젓이 취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 털어 버려서 내 걸망까지도 내 몸뚱이까지도 이것저것 몽땅 다 비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을 하면 용이 물을 얻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또는 호랑이가 언덕을 얻어서 천리만리 달려가듯이 그와 똑 같은 도리입니다.

 

 

7

하나의 공부

 

()은 선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집안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운전을 하던지 간에 언제나 우리 마음이 상에 걸리지 않고 우리 마음이 일체존재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 이른바 생명의 실상자리에 입각하면서 공부하면 어느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참선공부나 염불공부나 무슨 공부나 다 하나의 공부입니다. 다만 우리 본체, 본성품(本性品)을 안 떠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그러한 말씀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내 법()은 본성품을 안여읜다.’ 본성품을 여의지 않고 공부를 해야 참다운 공부이고 그래야 선()이 됩니다.

 

()공부를 하실 때는 자기가 하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는 무자(無字) 화두나 그런 공부 방법을 바꾸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것은 현상 따라서 인연 따라서 제시된 방편인 것이지 그런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본래의 성품자리를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본래 성품자리에 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을 하나 무엇을 하나 다 한가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장보살님을 외우는 분들이 관세음보살님하고는 다르지 않는가? 또는 화두를 해야 참선인데 지장보살을 하면 참선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의 명호(이름)자리나 모든 보살님의 명호(이름)자리는 본래가 하나입니다. 이러한 사상(思想) 밑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주문(呪文)을 해야 참다운 염불(念佛)이고 참다운 화두(話頭)입니다.

 

나쁜 버릇 습관성(習慣性) 때문에 화두(話頭)라는 때 묻지 않은 그런 문제를 들고서 우리가 오랫동안 의단(疑團)도 하는 것이고 참구(參究)도 하는 것이고 또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 명호를 들고서 생각 생각에 그런 나쁜 습관성이 나올세라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때 묻지 않은 그런 생각을 해나가야 때 묻은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잠재의식 같은 것이 차근차근 힘을 못 쓰고 줄어져 갑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습관(習慣)을 붙여 놓았으니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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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 법어

화두(話頭)

 

 

화두(話頭)라는 것은 어느 스님이 깨달은 도인(道人)들에게 법()을 물어 깨달은 도인들이 그때그때 질문자의 집착을 깨트리기에 적합한 해답(解答)을 내린 것에서 유래합니다. 도인(道人)들이 그때그때 하신 말씀은 때 묻지 않은 말씀입니다. ()이 없는 말입니다.

 

따라서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인 화두(話頭)도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때 묻지 않은 말을 가르켜서, 어려운 말로 하면 격외도리(格外道理)! () 밖의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들은 항상 격내(格內)에서 규격(規格) 따라서 말합니다만 성자(聖者)의 말은 전부(全部)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하나를 말하면 그것에 집착(執着)해서 말하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때 묻은 것이고 유한상대(有限相對)의 말 밖에는 안 되지만 도인들은 상대가 없는 그런 자리에서 말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격 밖의 소리입니다. 따라서 ‘이뭣꼬?’ 화두(話頭)나 무슨 화두(話頭)나 모두가 다 격 밖에 도리를 말한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우리가 의심을 하다보면 그때는 거기에 마음이 모아지고, 또는 우리 자성(自性)이 우리 마음의 바탕이 본래(本來) 부처이기 때문에 또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본래로 법신(法身)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명심(無明心)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흩어지고 저렇게 흩어지고 산란스럽기 때문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못 보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 딱 모아지고 응집(凝集)되고 그렇게 해나가면 마음이 맑아 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화두(話頭)의 의단(疑團)을 품음으로 해서 마땅히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우리가 아직은 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의심이 나올 수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의단을 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 모아져 차근차근 본래면목 자리로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화두(話頭)를 참구하던지 간에 근본성품 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참다운 선()입니다. 어디에 의지해서, ()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상에 의지하지 않고서 자취가 없고 모양도 없고 이름도 붙일 수가 없는 그 자리, 우리 본래 성품자리에 우리 마음이 입각해 있어야 그래야 참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화두(話頭)가 되든 무엇으로든 딱 모아지고 모아져서 가만히 있으면 그때는 탁한 물에 흐린 앙금이 가라앉고 바닥이 보이듯이 우리 마음도 차근차근 맑아집니다. 맑아지면 그때는 드디어 본래면목 자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훤히 밝은 부처가 나온단 말입니다. 간단 명료(明瞭)한 도리(道理)입니다.

 

운문대사(雲門大師)가 ‘부처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똥마른 막대기다!’라고 대답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똥은 더럽고 막대기는 하찮다.’라는 식으로 더럽고, 하찮은 것과 깨끗하고, 귀한 것을 구분하는 고정관념을 깨트려주기 위해서 그런 말로 대답을 삼았습니다. 이것은 가장 더러운 것도, 가장 좋은 것도 모두가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삼마(是甚摩)’라!

한문자(漢文字)를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시심마’라, 이시()자 심할심()자 어찌심()자 라고도 합니다. 어찌마(). 따라서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입니다. 심할심()자를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삼’이라고 발음을 합니다. 같은 뜻이지만 중국식으로 발음할 때는 ‘시삼마’이고 우리식 발음은 ‘시심마’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육조단경 식으로 말하면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한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생명의 본래면목 자리라는 말입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검기는 칠()보다 더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우리 중생들의 생각에는 해와 달보다 더 밝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천지 우주를 두루 비추는 광명의 생명이고 또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이고 있으니 천지우주에 가득 차 있고 그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그것은 불성(佛性)이 아닌가 그냥 짐작이 되시겠지요. 따라서 따지고 보면

‘시심마’는

‘이것이 무엇인가?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법계(法界)가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하나의 도리가 무엇인가?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무엇인가?’ 와 똑같은 뜻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이뭣고?’라고 의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성(佛性)입니다.’ ‘그것은 법계(法界)입니다.’ 그래 버리면 간단히 끝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불성 도리를 중생들이 보고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습관성이 다 걷혀버려야 불성을 우리가 증명(證明)할 수가 있는 것이지 습관성이 남아 있을 때는, 쉬운 말로 말하면 습기(習氣) 아닙니까? 습기가 녹아지기 전에는 우리가 이치(理致)로만 알 뿐이지 증명(證明)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증명해서 알아야 만이 무한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자기도 좀 맛보고 좀 쓸 수가 있는 것이지 그냥 이치로 해서 밥 좀 덜먹으면 배고프고, 또 욕계(欲界)에 있으면 이성적(異性的)인 욕심과 같은 욕심을 못 떠납니다. 습기(習氣)가 빠져버려야 욕심(慾心)도 빠지고 진심(瞋心)도 빠지고 다 빠져 버립니다. 불성(佛性) 가운데는 세간적(世間的)인 욕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우주에 충만(充滿)해 있고 바로 우주가 불성이다.’ 이런 도리야 불교 초보인도 대부분 알 것이지만 증명(證明)은 못한 것입니다. 증명을 못했을 때는 괴로운 것은 괴롭고 남이 자기를 좀 구박하거나 자기를 비방하면 성을 내곤 합니다. 죽을 때는 자기 몸뚱아리 아까워서 죽기 싫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은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 고통 가운데 가장 지독한 고통이 죽음에 대한 고통 아닙니까? 불교(佛敎)라는 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떠나 위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인데 우리가 그냥 이치(理致)로만 알아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증명(證明)을 하기 위해서, 불성 도리와 자기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마음을 하나로 추스르고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방법인 기도를 모시고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무자화두(無字話頭)’가 어떤 것인가 하면 어느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 경전에 개나 소나 사람이나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님의 성품(性品), 부처가 되는 성품(性品)이 있다고 말했으므로 어렴풋이 그 분도 믿었겠지요. 믿었으나 확실히 자기가 보지 못했으므로 확실히는 느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개 같은 막나니 짓도 많이 하고 판단도 못하고 자기 먹을 것만 좋아하는 그런 중생에게 어떻게 불성이 있을 것인가? 불성이라는 것은 완전무결(完全無缺)한 것인데 그런 개 따위에 무슨 불성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어서 조주스님께 가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단 말입니다. 그때 조주스님 말씀은 ‘무()’라 ‘없다.

왜 없다고 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개한테는 불성이 개 안에만 있고 밖에는 없다고 보겠습니까? 또는 그 불성이 개 머리에 있다고 보겠습니까? 가슴에 있다고 보겠습니까? 우리 사람한테 불성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불성이 우리 발에 있습니까? 머리에 있습니까?

 

그 불성이라는 것은 바로 우주의 성품(性品)인데, 이것이 개 안에 있고 밖에 있지가 않습니다. 잘 몰라서 잘 못보고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그렇게 의심나서 물었지만 적어도 이치라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밖에 있고 안에 있고 하지 않습니다. 도처(到處)에 개 몸 전체에 개 몸 전체가 불성(佛性)덩어리고 또는 밖에도 역시 불성(佛性)덩어리고 또는 우주 자체가 결국은 불성(佛性)덩어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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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 법어

염불(念佛)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영원불멸한 우주 자체의 대생명(大生命)이 바로 부처님이요,

그 부처님의 대명사(代名詞)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며

부처님의 자비화신(慈悲化身)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부처님의 지혜화신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입니다.

 

아미타불은 다만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이실 뿐 아니라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을 겸전한

삼세 일체불(三世一切佛)의 본체로서,

그 영원한 생명과 자비를 위주로 할 때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요,

무한한 지혜공덕을 위주로 할 때는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여러 경전에 수없이 많은 부처님의 명호(名號:이름)가 나오나,

부처님의 대명사인 아미타불의 공덕에 따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염불(念佛)이라 할 때의

()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

 

우리 중생은 본래의 자성(自性)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이요, 우리가 본래 살고 있는 고향은 극락세계인데, 짖궂은 번뇌 업장에 가리어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지없이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방황하다가 다행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서, 비로소 참다운 자아(自我)와 진정한 고향인 극락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자신의 이름이요,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이름이기도 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생각하며 그 이름을 외우고 부르는 것은 우리 중생이 찰나 찰나에 끊임없이 스스로 부처임을 자각하면서 부처가 되어가는 절실하고 안온한 성불의 첩경(捷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에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의 실상(實相)을 여의지 않는 염불은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이요 보왕삼매(寶王三昧)로서, 바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여의지 않는 염불선(念佛禪)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과 염(), ()과 혜()를 함께 쌍수(雙修)하는 심심미묘한 염불 공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은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이러한 염불(念佛)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이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念佛)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다 부처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염불(念佛)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도 부처요 좋아하는 사람도 부처라고 깨달으면 미워도 미운 사람에 걸리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는 사람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에게나 남에게나 이런 도리를 역설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가 저 십만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또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 우리 마음 밖에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참다운 염불(念佛)도 못되고, 염불선(念佛禪)도 못됩니다. 부처님께서 극락세계가 밖에 있다고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우리 마음이나 부처가 내 밖에 있어서 애쓰고 생각하면 우리를 돕는 가피를 주신다고 생각하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요, ‘시방여래시법계신(十方如來是法界身)’이라, 부처는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근본 뜻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 행법이 정해지지 않으신 분들은 우선 제일 쉬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로 염불(念佛)하면서 자기 속으로 염불(念佛)을 되뇌이면서 생각 생각에 그런 염불(念佛)을 할 때는 참 쉽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하지 않은 분들은 염불(念佛)을 화두로 해서, 염불(念佛)도 ‘나무 아미타불’할 때는 ‘나무’ 빼버리고 될수록 간략히 ‘아미타불’을 화두로 해서 하셔도 좋습니다. 아미타불 화두가 근래에 와서는 저 만공(滿空)스님이나 더 올라 가서는 저 서산(西山)스님이나 다 하셨습니다.

우리마음이 실상에 안주(安住)해서, 실상인 진리에 머물러서, 진리를 한시도 안 떠나는 공부가 바로 선()입니다. 이것이 참선(參禪)입니다.

따라서 염불(念佛)도 역시 그와 똑같이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되 우리 마음이 부처님의 진리를 안 떠나야 만이 실상염불이 되는 것이고 바로 염불선이 됩니다. 실상염불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나 염불선이 되려면 자기의 본래모습, 부처님의 실상 곧 진리를 상상하면서 해야 염불선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공부할 때는 항상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우선 관념상 ‘내 본바탕도 역시 부처고, 우주가 모두 부처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냥 이름만 불러도 그때는 실상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바로 법계(法界)가 몸입니다. 법계란 삼천대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바로 법계가 몸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두루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는 사람만이 중생이 아니라, 유정 무정 모두가 다 중생입니다. 사바세계의 두두물물이 다 중생이니까 또는 그런 중생으로 모든 법계가 구성되었으므로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원래 들어 계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 속에 들어 계신다는 의미는 모든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입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불성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중생한테 들어계신다는 것은 바로 온전히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개한테 불성이 있다고 할 때도 개의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머리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온전히 전체가 바로 부처의 덩어리입니다.

 

“염불과 참선이 같지 않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참선이란 다만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려 함이요, 염불은 자기 성품이 미타(彌陀)요 마음이 곧 정토(淨土)임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니, 어찌 그 이치에 둘이 있으랴. 아미타불 넉자를 화두 삼아 자나 깨나 분명히 들어 쉬지 않고 한 생각의 분별도 나지 않는데 이르면, 차서를 밟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뛰어오르리라.

- 천여유칙天如惟則

 

“모든 부처님은 바로 법계(法界)를 몸으로 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들어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할 때 이 마음이 바로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를 갖춘 원만 덕상(德相)이니라.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이루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니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불의 청정 미묘한 법신이 두루 모든 중생의 마음에 계시므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곧 마음이다. 아미타불의 명호(이름)를 끊임없이 분명히 생각하고 외울지니, 힘써 정진하여 그 공덕이 성취되면 홀연히 분별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참 몸이 뚜렷이 나투신다.

- 태고보우太古普愚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튕길 수고도 없이 서방 극락 가리라.

- 육조혜능六祖慧能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끊임이 없고, 입은 부처님의 명호(이름)를 분명히 불러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이렇듯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능히 팔십억 겁 동안 생사에 헤매는 죄업을 소멸함과 동시에 팔십억겁의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

- 청허휴정淸虛休靜

 

“염불(念佛)이란 바로 자기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며 마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부처를 구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식()이란 형체가 없고 부처란 무슨 모양이나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도리를 안다면 바로 마음이 안심(安心)이다.

- 도신道信 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

 

“부처를 염()하는 염불(念佛)하는 마음이 바로 불()이요 망상(妄想)하는 마음이 바로 중생(衆生)이며 염불(念佛)은 곧 염심(念心)이고 구심(求心)은 바로 구불(求佛)인데, 왜 그런가 하면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고 부처 ‘불()’ 또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닌 도리(道理)를 알면 바로 이것이 안심(安心)이니라.

-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