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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21호.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 광륜 21 2007년 봄 】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부처님 오신 날

 

 

◎ 가장 숭고한 축제

 

우리 인간세계 뿐만 아니라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나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해 가장 숭고한 축제는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천상 천하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행복스럽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약속한 축제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사람이 너무 기쁘거나 슬플 때는 목이 메이고 감격해서 말을 미처 못합니다. 부처님의 무한공덕,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처님의 행복스런 메시지 이런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총명해서 인간의 복잡미묘한 마음 헤아림을 알 수가 있고 또는 광대무변한 허공세계를 능히 측량할 수가 있고 또한 지나쳐 가는 바람을 잡아매는 신통묘지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공덕은 한량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공덕을 압축해서 간추린 말씀이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즉 하늘 위에나 하늘 밑에나 천지간에 유아독존이라. ‘오직 유()’나 아()’홀로 독()’높을 존()’천상천하에 나만 홀로 존재하고 높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그냥 문자만 가지고 해석할 때는 부처님 말씀이 독선적이고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닌가 의단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유아(唯我)’란 뜻은 독선적인 그런 개인적인 의미만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다 심심미묘한 뜻이 있단 말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오직 유()’나 아()’자 의()’는 유한삼계(有限三界)의 그런 제한된 나를 말한 것이 아니라 가짜 나, 가아(假我)나 또는 번뇌망상에 사로 잡혀서 번뇌망상의 구속을 못 벗어난 그런 망령된 나, 망아(忘我)가 아니라 진짜 나, 진아(眞我)를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란 말입니다. 그냥 많은 수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를 다 통틀어 많고 적고 하는 그런 수의 개념을 초월한 오직 전부 · 하나란 말입니다.

이러한 진아(眞我)는 불심(佛心) 불성(佛性) 또는 대아(大我) 라고도 표현합니다. 박가나 김가나 또는 사람이나 사람이외의 동물이나 식물이나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像無像) 어느 것이나 다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유아(唯我)’에 다 포섭이 됩니다. 이와같이 참다운 나라는 것은 개인적인 어떠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감싸 있단 말입니다. 박아무개의 참나도 우주에 두루해 있고, 김아무개의 참나도 역시 우주에 두루해 있고 참나 즉 대아(大我) · 진아(眞我)만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번뇌에 가려서 우주의 참나, 대아(大我)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인 참나 또는 대아만이 높고 고귀한 것입니다.

 

 

◎ 삼계 무안 오당안지三界無安吾當安之

 

‘삼계무안(三界無安)’이라없을 무()’편할 안()’, 삼계라는 것은 어느 순간도 편안할 때가 없습니다. 삼계는 욕계 · 색계 · 무색계로 우리 중생이 나고 죽고 하는 생사윤회의 세계입니다. 인간이나 또는 천상이나 축생이나 지옥이나 그러한 모든 상대유한의 중생들이 나고 죽는 윤회하는 세계가 삼계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번뇌가 치성해서 탐욕이나 또는 분노심이나 그런 번뇌가 많기 때문에 중생이 사는 세계는 과거 요순시대나 세종대왕 때나 위대한 사람들이 이상향을 추구하지만 역시 완전무결하게 편안한 때는 없습니다. 중생계란 것은 어느 때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괴로움이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이 사는 세계는무안(無安)’이라 안락스러운 때가 없는데오당안지(吾當安之)’나 오()’마땅할 당()’편할 안()’이 지()’, 그러한 안락이 없는 고통세계를 나 홀로 만이 오직 안락스럽게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쓰고 있는 제한된 번뇌에 덥혀있는 나, 일체 망상에 구속된 나가 아니라 참다운 나, 불성에 사무친 나, 이런 불성과 하나가 된 대아 · 진아 만이 삼계중생의 모든 고난을 다 제도할 수 있단 말입니다. 불교인이 아닌 분이 들으면불교인들은 너무 아전인수가 아닌가? 다른 종교도 마땅히 일반 중생을 다 구제할 수 있는 것인데 어째서 오직 부처님 가르침만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적인 그런 대아(大我) · 진아(眞我) 만이 비로소 인간세상의 모든 고난을 구제할 것인가?” 이렇게 의단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저 원시시대나 또는 중세나 그런 때는 상식만으로도 별로 살기가 어렵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모든 것을 다 관통한 오직 하나의 진리를 모르면 바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고를 제도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상도 단조롭고, 생각도 단조롭고 여러 가지가 단조로운 미개한 때는 소박하게도 상식의 범주내에서 살기가 별로 어렵지 않지만 현대와 같이 복잡미묘한 시대에 있어서는 참다운 나, 모든 것의 본바탕(실상)을 드러내는 그런 진리를 모르고서는 바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분들은부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도 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가신 뒤에 한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손은 땅을 가리키면서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무안 오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三界無安吾當安之)”라 말씀했단 말입니다.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 옆구리로 나오셔서 막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어가서 하신 말씀이하늘 위나 하늘 아래나 하늘 땅 천지 우주 가운데 나만 홀로 높거니, 삼계는 언제나 안락스럽지 못하고 항시 고통뿐인데 오직 나 홀로 만이 이것을 안락스럽게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어린애가 했을 것인가? 이것은 불교의 심심미묘한 상징적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불교용어로 하면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는 근본 원리가 본래 아닙니까? 본래시불이라이 시()’자는바로 시()’자 라고도 그럽니다. ‘바로 시()’부처 불()’, ‘본래 바로 부처다.’란 말입니다. ‘나같이 못난 사람이 어떻게 본래 부처일 것인가?’ 의심을 품습니다만 사실은 불교의 방편을 말하지 않고 부처님의 생각, 부처님의 안목으로 보는 생각을 그대로 말씀하면 본래시불이라, ‘본래 모두가 다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는본래시불이란 말을 숙지해 가지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 인생은 나요 너요 또는 선이요 악이요 각 부조리가 있는 것이지만 바로 보면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 부처란 말은 불교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아는 것이 제한되어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견해를단견(短見)’이라짧을 단()’볼 견()’자 단견이라, 마치 바늘 구멍같은 그런 눈으로 우리가 보는 것이지 사물을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제한된 안목, 중생의 업 때문에 가려서 바로 못 보는 것이니까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지 조금도 번뇌가 없고, 탐욕심도 없고, 분노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이러한 욕심이 없다면 그때는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 세계로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안목, 성자의 안목으로 바로 보면 그때는 본래시불이란 말입니다. 본래시불이라, 본래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본래시불이란 말을 두고두고 음미하고 참구해서 그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본래 부처자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가 성불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탄생하시자마자천상천하에 내가 가장 위대하다.” 그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참다운 진아, 참다운 나를 깨달을 수 있는 나만이 천지우주에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 이와 같이 말씀했던 것도 역시 본래시불이라 하는 본래 자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경계에서 하나씩 닦아서 올라가는 점차적인 그런 경계가 아니라 성불의 경계, 성자의 경계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비록 어린애라 하더라도 불성차원 영원적인 차원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이나 또는 나이를 많이 먹으나 적게 먹으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통 자기가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부인을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있다.’하는 물질적인 세계만 가지고 공부했기 때문에 특히 안 보이는 세계는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그러나 안 보이는 세계에 인간의 생명의 뿌리가 있습니다. 안 보이는 세계에 모든 존재의 뿌리가 있단 말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다만 뿌리 위에서, 안 보이는 생명체 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물위에 뜬 거품과 같단 말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무수한 생을 되풀이했던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금생에 잘못 닦아서 부처님 도리를 못 깨달아서 참다운 진아, 참다운 나 또는 가장 큰 나, 대아 여기까지 못 가면 무수생 동안 헤매고 뱅뱅 돌면서 개미 쳇바퀴처럼 돌면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성불이라는 생명의 고향에 들어가야만 우리의 윤회는 끝나는 것입니다.

 

 

◎ 인간의 사명 · 불교의 목적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무안 오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無安吾當安之)”라 하는 거룩한 진리의 말씀은본래시불이라는석가모니 부처님이 나오고 안 나오고 상관이 없는 진리는 항상 있다.’는 그런 진리에 입각해서 진리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태어나자마자 하신 말씀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사명, 인간의 목적은 대아, 참다운 성품, 참다운 나, 진아를 성취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불교의 목적입니다.

 

 

◎ 참다운 지혜 · 반야

 

어떻게 대아를 성취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문제로 하는 가장 중요한 수행의 방법 문제란 말입니다. 제아무리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목적에 이르는 방법, 체계가 확실치 못하면 목적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참다운 대아가 될 것인가? 대아를 인식하고 대아가 되는 그런 공부를 가리켜서 반야행, 참다운 지혜라고 합니다. 반야지혜가 앞서야 합니다. 또한 반야지혜를 모르는 즉, 말하자면 우주의 본 생명이고 인간의 본생명 자리인 대아 또는 불성자리 거기까지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을 가르켜서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밝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오늘 왜 등불을 켜는가 하면 그런 무명을 거두어서 참다운 영원적인 불성 광명을 빛내기 위해서 등을 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그런불성이 무엇인가?’ 또는대아가 무엇인가?’ 또는참다운 나가 무엇인가?’ 이런 것을 모르면 그때는 무명(無明)이라없을 무()’, ‘밝은 명()’자 밝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무명 가운데 있습니다.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비록 제아무리 학식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시비분별하는 상대적인 지식은 많이 있다 하더라도 반야지혜 즉 참다운 그런 대아의 지혜, 성불의 지혜를 모르면 이것은 무지(無智)에 해당합니다.

 

어떻게 해야만이 우리가 그러한 무지를 헤치고서 참다운 지혜를 얻을 것인가? 불교의 법문 가운데 12인연법이란 법문이 있습니다. 12인연법이란 법문 이것은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과정을 열두 범주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죽고 살고 헤매고 고생하는 그런 경계를 12범주로 구분한 것인데 맨 처음이 무명이라, 중생이 무명이 없다면 열두 단계를 헤매면서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중생이 무명이 없으면 사람으로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무명이 있기에 참다운 자기를 모르기에 자기의 본 생명인 동시에 우주의 본 생명인 그런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가 망동을 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업()을 짓는단 말입니다. 업은 우리 몸으로 우리 입으로 뜻으로 짓는 행위가 업입니다. 무명이 없으면 고통을 초래하는 업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무명이 있기 때문에 무명 따라서 행동하는 우리 몸이 살생도 하는 것이고 또는 훔치는 짓도 하는 것이고 또는 음란한 짓도 하는 것이고 가지가지 망정이 나온단 말입니다. 무명이 있기 때문에 말로는 욕설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거짓말도 하고 가지가지 그런 여러 가지 부당한 언어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무명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죄악도 많은 것입니다. 무명이라는 뿌리에서 탐욕도 내고 또는 진심도 내고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명의 제거가 우리 불교인들이 할 일이란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로 갈등도 있고 또는 자기가 구해도 얻지 못하고 또는 가정적으로 여러 가지 반목도 있고 온 사회가 술렁거리는 여러 가지 모순 현상 모두가 다 원인을 따지고 보면 근본 뿌리는 인간의 무명입니다. 진리를 바로 못 보는 데서 기인한다는 말입니다. 무명의 반대가 참다운 지혜, 반야지혜입니다. 반야지혜는 비록 우리중생의 어두운 눈에 번뇌로 때 묻은 중생의 눈에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인다 하더라도 성자의 안목, 번뇌를 여읜 안목, 참다운 지혜 다시 말하면일체만유의 근본본질이 불성이다.’하는 지혜말입니다. 일체만유의 본질이 불성이거니 일체만유의 현상 또한 불성이 아님이 없습니다. 바탕과 바탕의 여러 가지 현상이 마치 바닷물과 바람 따라서 일어나는 파도가 둘이 아니듯이 사람이나 일반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떤 것이나 간에 일체존재의 바탕이 불성이거니 불성에서 형상화된 사람이나 또는 동물이나 일체존재 삼라만상이 모두가 다 불성 아님이 없습니다.

 

이와같이 삼라만상 모두가 다 불성 아님이 없다는 지혜 이러한 지혜가 부처님의 반야지혜입니다. 부처님 오신날에 다른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참다운 지혜 참다운 나 또는 우주에서 가장 큰 나 이런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의 구분이 없습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생물이나 기타 무생물이나 어떤 존재나 다 불성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불성이 아니라 인간의 제한된 눈에 안 보이는 전자나 또는 하나의 소립자나, 공기나,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불성인 것입니다.

 

공기도 분석하면 산소, 수소, 질소 그렇게 구성되었습니다. 산소, 수소의 구성 요소인 원자도 불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분석하고 분석해 보면 공기 역시 가장 기본적인 가장 근원적인 본바탕은 불성이란 말입니다. 어떤 것이나 간에 하나의 컵이나 무엇이나 다 원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가 불성 아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가 옆에 있는 사람과 내가 우리가 보기에는 분리가 되어 있지만 정말로 불성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다 붙어있다 말입니다. 불성차원이 아니라 원소만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더라도 딱 붙어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그것을 잘 못 보니까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그런단 말입니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구분하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나한테 좋으면 탐심을 내는 것이고, 나한테 싫으면 진심을 내는 것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원융무애한 불성 생명인 것입니다. 우주는 모두가 다 딱 붙어있는 하나의 생명체인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워서 그걸 모른단 말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너요 나요, 내 땅이요, 네 땅이요 구분한단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품이 무엇인가 하는 그 본래 면목을 알지 못하면 제아무리 제도를 고쳐도 잠시 미봉책만 될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만 가지 선행이 거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근본을 모르고 그때 그때 조금 선행을 짓는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선행은 못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훈 역시 천상천하에 더 이상 위없는 대아 그런 진아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이것만이 인간의 고난을 구제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럼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와같이 복잡한 시대에 재가 불자의 처지에서 참다운 진아를 얻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 근원적인 파악 · 불성

비록 몸으로 출가는 못해 집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불성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지금 이대로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나 우리한테 있는 불성이나 불성은 똑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 살아서 지금 버릇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버릇은 하나의 그림자뿐인 것이고 알맹이는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똑 같습니다. 다이아몬드로 반지를 만드나 또는 장신구를 만드나 다이아몬드의 빛나는 특성은 변질이 없듯이 불성은 사람으로 되나 또는 동물로 되나 식물이 되나 불성이란 그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비록 중생인 우리가 잘 못 배우고 잘 못 살아서 설사 반야지혜를 몰라 도둑질을 한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도 불성차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똑 같습니다. 불성은 조금도 변치 않는단 말입니다.

 

근원적인 성찰이 없으면 우리 마음이 참다운 정화를 못 받습니다. 그런 신앙을 마니보주에 비유해서 말씀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마니보주, 이것은 우리 인간의 안목으로는 볼 수 없는 영원적인 구슬을 말합니다. 마니보주가 있다고 하면 마니보주를 물에다 한 번 넣어보면 그때는 그냥 마니보주를 한 번 넣음과 동시에 즉시 흐르는 물은 청정히 됩니다.

 

이와 같이 마니보주가 흐린 물을 바로 정화시키는 작용이 있듯이 참다운 신앙, 반야 신앙은 우리 마음이 혼탁한 번뇌를 즉시 녹입니다. 그러기에 참답게 이것을 수용도 하고 참답게 간절히 믿는 분들은 사실은 일언지하에 가슴이 툭 트인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도 역시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천지 우주의 본바탕은 모두가 다 불성뿐이다. 나의 본성이나 또는 개의 본성이나 소의 본성이나 하나의 원래 본체다. 다 같다. 조금도 변질이 없다.’라는 말씀만 듣고도 가슴이 툭 트이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불성이 대체로 무엇이기에 그것 때문에 사람이 되고 하늘에 있는 별이 되고 할 것인가? 불성은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무량무변의 가능을 갖춘 생명체인 것입니다. 첫째로 불성은 영생불멸합니다. 생로병사를 몇 천 번 몇 만 번 되풀이 한다 하더라도 불성은 변동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불성은 영생불멸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을 초월해 있고 또는 불성은 무한의 부피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성은 무한의 부피이기 때문에 공간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또는 불성가운데는 일체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체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으니 인과율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와같이 불성에 깃들인 공덕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불성에 대한 관심도 깊어지는 것이고 불성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한단 말입니다. 불성은 영생불멸하고 또한 자비와 지혜, 행복을 원만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법을 초월해서 조금도 구속을 안 받습니다. 이러한 것이 불성입니다.

 

 

◎ 바른 신앙 · 참다운 신앙

 

이렇게 불성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가 수행해서 불성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공덕은 차근차근 더해지고 증장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 관세음보살 · 옴마니반메훔 … ’ 우리가 그런 부처님의 공부로 한걸음 가면 한걸음 간만치 우리 마음은 불성에 접근되는 것입니다. 염불이나 화두는 모두가 다 불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제시된 방법입니다. 이러한 불성을 분명히 믿는 것이 불교의 참다운 신앙, ‘정신(正信)’이라바를 정()’믿을 신()’자 바른 신앙이란 말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불성을 바로 못믿으면 바른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짧은 생각으로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석가모니나 공자 예수같은 성자가 나오고 안나오고 상관이 없이 말입니다. 공자가 나오고 안나오고 상관이 없이 예수가 나오고 안나오고 상관이 없이 참다운 우주의 본성, 우주의 실체인 불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생불멸하고 무한 광대무한하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무한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이와같이 이것이 우리 생명의 본질이자 실상인 것입니다. 생명의 실상, 생명의 본질을 느껴야 바른 신앙이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서 12인연법에서 말한 무명을 우리가 비로소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행동은 여실히 불성 따라서 행동을 못취한다 하더라도 그와같이 불성에서는 나와 너의 그런 구분이 없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우리 인생관이 무아(無我)가 안될 수 없겠지요. 나와 너와 또는 모든 중생이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거니 어떻게 해서 나와 너의 구분이 있습니까? 나와 너의 구분이 없으니 사실은 따지고 보면 내 소유도 없단 말입니다. 내가 없고 내 소유도 없다는 즉 말하자면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란 말입니다. 내가 없고, 내 소유가 없다는 그 생활의 표본이 우리 출가승의 생활입니다. 불법은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 비었다는 우리가 본 것이 사실이 비었다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제법공상(諸法空相)’이라 비었다는 단계까지 가야 비로소 불교의 깊은 뜻을 음미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중생이 시비 분별하는 것이 참말로 보면 비었거니 빈 그것 가지고 시야비야 싸우겠습니까? 있다는 그런 차원에서는 결국 갈등과 반목은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좀 차원을 높여서 보다 더 높은 차원 우주의 본질을 보는 생명의 실상 차원에서 보면 그때는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는 불성광명, 부처님의 성품이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불성이나 또는 진여나 진성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진여나 도나 보리나 불성이나 같은 뜻입니다. 우주는 이와같이 불성(佛性) · 진리(眞理) · 진여(眞如) · () · 보리(菩提) 이것만이 우주에는 충만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참답게 우주를 보는 견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법을 할 때는 설법하신 내용을 간추리면 그것은 3단계로 구분합니다. 그것은 3단계로 구분합니다. 그것은유교(有敎)’, ‘있을 유()’가르칠 교()’, ‘공교(空敎)’, ‘빌 공()’ 그리고가르칠 교()’자 또는중도교(中道敎)’ ‘가운데 중()’가르칠 교()’자 이와같이 세차원으로 구분합니다. 중생들이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원소도 못보는 것이고 또는 보다 더 미세한 그런 원자도 못 봅니다. 인간은 인간이라 하는 제한된 만큼만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좋다 궂다 밉다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참말로 미운 것도 없고 참말로 이쁜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 차원에서 봐서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것이지 본 바탕은 밉고 좋고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미운 것도 역시 천상 사람이 본다 할 때는 밉게 안 보이는 것입니다. 더욱 더 올라가서 부처가 본다 할 때는 다 부처로 보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자기차원의 견해를 항상 겸허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으로 몸 받아 나온 사람들은 먼저 누구나 참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나고 못나고 좀 배우고 안 배우고 상관이 없이 인간은 사물을 바로 못보니까 바로 행동할 수 없단 말입니다. 바로 못보고 바로 행동을 못하거니 우리는 응당 반성하고 참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단계, 성자의 단계만이 바로 보고 바로 행동한단 말입니다.

 

 

◎ 부처님의 광명

 

부처님 오신날은 부처님의 광명을 다시 우리가 우리 가슴에 켜는 날입니다. 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광명인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우주에 전자기 광파가 충만한 것을 압니다. 일체 존재는 우주에 충만한 전자기 광파가 인연 따라서 입자가 되어서 하나의 형상을 만든다 말입니다. 물리학으로 보더라도 일체 존재는 모두가 다 우주의 충만한 전자기의 광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그보다도 더 근원적으로 광파의 근본 속의 순수 생명,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대로 불성이고 이것이 하나의 부처님 마음 불심(佛心)입니다. 이러한 불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중도실상(中道實相)’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물질 하나의 조그마한 티끌 모두가 다 오직 진리 뿐이란 말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워서 미처 못볼 따름입니다. 오직 허물은 자기 번뇌에 있습니다.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물을 바로 못본 자기에게 허물이 있습니다.

 

자기의 탐욕심, 자기의 분노하는 마음 또는 자기의 무명심 즉 자기 무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와같은 탐욕심이나 성내는 마음이나 사물을 바로 못보는 어리석은 마음 이러한 삼독심으로 병든 병자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자기가 아직 범부인 한에는 모두가 다 병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는 남을 책망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병자인 줄을 분명 알아야 합니다. 번뇌의 병을 앓고 있단 말입니다. 탐욕병 또는 성내고 불룩거리고 남을 저주하는 그런 병 말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바로 못보는 병 이러한 삼독심의 병자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급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에게 있는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삼독심의 병 이것이 우리 생명을 해치고 우리 본 생명을 못 보도록 한단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나오신 일대사 인연이라, 가장 중요한 일은 석가모니만이 아니라 우리 중생 누구나가 다 느끼는 큰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원수인 탐심, 진심, 치심을 제어하고 참다운 불성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앓고 있는 병인 탐욕심을 억제하고 또는 진심을 없애고 치심을 없애서 참다운 불성을 성취해야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오신날, 어떻게 이 감격스러움을 표현하려 해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생명의 근본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것은 부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진리는 석가모니가 나오시나 안나오시나 영원히 존재한다 하더라도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왜 존엄한 것인가?’하는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증명할래야 할 수가 없습니다.

 

안심입명을 하려고 생각할 때는 마땅히 일체 존재를 관통해 하나의 불성으로 보아야 하고 또한 불성이 되기 위해서 거기 걸 맞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합리적인 방법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는 성을 넘어서 왕자의 자리를 그만두고 출가를 했고 출가한 뒤에도 그냥 안일한 차원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석가모니 같이 빈궁하고 가장 청빈한 생활을 한 그런 수행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께서 불성을 성취한 그런 수행공덕을 다시 되새겨야 합니다. 각고의 난행고행 끝에 닦아서 깨달은 것이 우리 인간생명과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차원으로 보지 않고서는 우리의 본래 면목인 우리 본 생명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내 생명의 본바탕은 불성이고 김 아무개 또는 박누구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가아입니다. 망아입니다. 이것은 망령된 나, 이것은 가짭니다. 가짜를 진짜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짜는 분명히 가짜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어떻게 했다. 학벌이 어떻다.’해도 이런 것은 결국 인간적인 하나의 시비분별에 의한 것이고 참다운 지혜는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가짭니다. 진짜는 인간의 탐욕 또는 분노심 또는 어리석은 마음 이러한 삼독심을 딱 바꾸어서 조금도 혼탁이 없는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이른바 불심을 얻어야 그래야 만이 참 자기란 말입니다. 그래야 그때는 대아란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대아를 얻기 위해서 6년 고행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 참 내가 되는 것 이것은 출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불교인만의 일도 아닙니다. 비록 종교는 다르다 하더라도 예수님 말씀도진리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참다운 자유라 하는 것은 진리만이 참다운 자유를 보장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진리나 불교 진리나 표현의 차이인 것이지 알맹이는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불성 또는 불심 또는 부처님을 진리라고 말하나 진여라고 말하나 어떻게 말하나 알맹이는 똑같습니다. ‘참다운 것은 불성뿐이다.’하는 차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한 번 태어났다 하면 과거 전생에 입장을 지었기에 금생에 사람으로 오는 것이지 정말로 맑아서 청정무구했다고 생각할 때는 인간으로 올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성자가 못됐으면 항상 참회와 자기반성과 수행을 겸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번뇌를 녹여서 불심으로 가는 공부가운데서 가장 쉬운 것이 부처님 이름도 외우고 주문도 외우고 또는 화두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주문이나 또는 화두나 또는 염불이나 간에 모두가 다 불심자리를 대변한 것입니다. 아침마다 절에서 종치면서 하는 염불가운데나무 서방정토 극락세계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아미타불 (南無 西方淨土 極樂世界一十一萬 九天五百 同名同號 阿彌陀佛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이상세계를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저만치 십만억국토 멀리 가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심에서 보면 저 서방으로 안가고 동쪽으로 안가고 북쪽으로 안간다 하더라도 이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본래 부처란 것이 훤히 풀리면 우리 가슴이 툭 트인단 말입니다. 나무 서방정토 극락세계 즉 본래세계 본래 불성세계란 말이나 서방정토 극락세계란 말이나 뜻은 똑같습니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아미타불이라 말입니다. 인간의 영원한 이상향 극락세계는 수가 하도 많으니까 일십일만 구천오백이라 이러한 것은 그냥 수치가 아니라 수가 하도 많으니까 그와 같이 말을 한 것입니다. 일십일만 구천오백 동명동호 금색여래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동명 동호라 이름도 같고 또는 호도 같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계에는 피부가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하고 합니다만 극락세계는 모두가 다 얼굴도 다 금색광명이 빛나고 광명신, 광명의 몸이란 말입니다. 몸에 중량도 없고 다만 생명의 광명만이 몸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서방정토 극락세계는 모두가 다 동명 동호라, 이름도 하나 또는 호()도 하나란 말입니다. 몸은 모두가 다 금색여래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두두물물 모두가 다 아미타불인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는 먼저 결과를 알아버려야 만이 우리 마음이 답답하지 않고 안심입명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지금 안보이지만 바로 보면 결국은 천지우주가 다 동명동호 금색여래 아미타불인 것입니다. 천지가 다 아미타불이거니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겠습니까? 다만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아미타불을 못보는 자기를 책망해서 탐욕심을 녹이고 분노를 녹여서 우선 인식만이라도천지 우주는 오직 부처님뿐이구나.’ 이와 같이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면서 자기 생활을 가장 청렴하게 해야 합니다.

 

남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자기 소유가 없을 정도로 청렴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무아, 무소유라 원래 진리에서 본다고 할 때는 내가 없는 것이고 또는 내 소유가 없단 말입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거니 하물며 나한테 권력이나 재물 이런 것들이 내 것일 수가 없습니다.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몇 십년 동안 내가 쓰다가 버리는 물건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나무 아미타불이나관세음보살이나지장보살은 모두가 다 영생불멸하고 천지 우주에 가득 차 있고 동시에 무한 공덕을 갖춘 불성공덕을 우리가 개발하는 작업입니다. 성불하는 차원입니다. 또한 불성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의 본질인 불성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은 우리가 바라면 동시에 몇 천 가지 모양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면 동시에 한순간에 몇 천 몇 만의 모양으로 우리한테 보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사의하단 말입니다. 우리 생명의 본고향으로 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의무입니다.

 

부처님 오신날, 일체중생 모두가 우러러서 마지않는 영광된 날, 어떻게 말해도 다 말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날, 등을 켜시는 지금 이 순간 찰라 또는 등을 다 켜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우리 평생이 다 할 때 까지 부처님의 영원한 광명, 불성광명을 우리 마음에서 놓치지 말고 항상 간직하시면서 자기가 선택한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또는 화두나 주문을 외우시기 바랍니다.

 

 

-1988년 5월 23 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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