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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20호 2006년 겨울 (2)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

 

대화로 보는 안심법문(安心法門)

 

 

 

 

우리 공부하는 분들이 6조 혜능스님 이후의 선지식들 법문도 물론 참고로 많이 해야 합니다만, 부처님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의 법문을 가장 중요한 전거(典據)로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스님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 이루어진 선()사상은 바로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의 시초법문은 달마 스님과 혜가(慧可) 스님이 거량(擧揚)한 법문입니다.

 

달마와 나와 둘이면 무아(無我)라고 할 수가 없고 석가와 나와 둘이면 무아라 할 수 없습니다. 또는 2조 혜가와 나와 둘이면 역시 무아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혜가 스님과 달마스님의 거량도 역시 자기 자신의 문제로 우리가 수용을 해야 합니다. 분명히 자기 문제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떠나 있습니다. 내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법이라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실아실법(實我實法)이라 하여 내가 있고 법이 있다는 것은 범부소견입니다. ‘나’라는 실다운 것도 없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좋다 궂다 하는 시비분별의 법도 원래는 없습니다. 성자와 범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성자는 무아, 무법입니다. 곧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문제나 자기 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마와 혜가의 대화

 

일찍이 달마(達磨)대사는 인도의 향지국 왕자였는데, 27()인 반야다라존자를 스승으로 하여 진리를 깨닫고, 바른 불법(佛法)을 중국에 펴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중국 광주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중국불교는 경론(經論)의 교리에만 집착하고 정작 마음공부는 소홀히 하여 달마 대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사는 숭산 소림사 뒷산에 있는 석굴에 들어 앉아 걸식하러 나가는 외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벽을 향하여 바위덩이 처럼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9년 세월 동안 말 한마디 없는 벙어리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때 신광(神光)이라는 젊은 스님이 달마 대사의 위대함을 전해 듣고 눈보라를 무릅쓰고 소림석굴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광은 달마대사의 등 뒤 석굴 어귀에 꿇어 앉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한 밤을 지새웠습니다. 눈발이 무릎을 덮고 온 몸이 얼어붙어 사뭇 저려왔으나, 죽음을 각오한 신광의 뜨거운 구도의 열기는 추호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호젓한 침묵 가운데 하루 해가 지나자, 그토록 목석마냥 앉아만 있었던 달마 대사가 넌지시 돌아앉아 신광을 굽어보았습니다. 신광은 반색하여 큰절을 올리고 나서,

 

“스승님, 이 어리석은 제자가 법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거두어 주옵소서.

 

달마 대사는 오랜 침묵을 깨트리고

 

“위없는 대도(大道)는 얕은 지혜나 가벼운 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이에 신광은 비장한 마음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단숨에 왼팔을 잘라 달마 대사께 바쳤습니다.

 

솟구치는 선혈(鮮血)로 하얀 눈은 붉게 물들고 이내, 상처에서 희뿌연 젖이 솟아나와 상처를 아물게 하였습니다. 이때 사납게 울부짖던 눈보라도 숨을 죽이고, 달마 대사의 엄숙한 표정에도 깊은 감동의 빛이 역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광의 지극한 구도의 정성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신광은 마음이 좀처럼 안정을 얻을 수가 없어서 스승 앞에 나아가

 

“스승님, 저의 마음은 아직도 편안하지 않사옵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그럼, 편안치 못한 그대 마음을 가져 오너라. 내가 편안케 하여 주리라.

 

그러자 신광의 마음은 당혹하여 어리둥절하였습니다.

 

‘본래 마음이란 형체가 없거니, 불안한 마음이건 흐뭇한 마음이건, 마음이란 아예 형상화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스승님, 마음이란 모양이 없어 드러내 보일 수도 얻을 수도 없지 않사옵니까?

 

“그렇다. 마음이란 필경 자취가 없는 것이니라. 그것을 분명히 깨달았으면 그대 마음은 이미 편안해졌느니라.

 

이리하여, 어두운 무명(無明)에 갇힌 신광의 불안한 마음은 활짝 열리고, 맑은 하늘같은 환한 마음으로 정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대도를 성취하여 제2() 혜가(慧可)대사가 되었습니다.

 

 

혜가와 승찬의 대화

 

그 뒤에, 혜가 대사의 회상(會上)에서 오랜 병마에 찌들어 몹시도 초췌한 젊은 수행자가 찾아와서 여쭙기를,

 

“스승님, 저는 죄업이 무거워서 불치의 풍병으로 여러 해를 앓는 몸입니다. 아무쪼록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죄업을 소멸하여 주시고, 가엾은 목숨을 구제하여 주옵소서.

 

“정작 그렇다면 그대의 죄업을 이리 내놔 보게, 내가 바로 소멸시켜 줄테니”

 

이에, 말문이 막힌 젊은이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마음이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빈 것, 이미 마음이 그 자취가 없거니 죄업인들 어디 흔적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젊은이가 여쭙기를

 

“죄업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도무지 그 형상이 없사옵니다.

 

“진정 그러하니라. 마음이란 본래 공()하여 형체가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니, 그대를 괴롭히는 죄업 또한 그 뿌리가 없느니라. 그대가 정녕 그러한 도리를 깨달았으면 이미 그대는 죄업을 참회하여 소멸해 버렸느니라.

 

이 말씀에 총명한 젊은이의 마음은 활연히 열렸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혜가 대사에게

 

“스승님, 저는 앞으로 스승님을 섬기려 하옵니다.

 

“그대 같은 풍병환자가 나를 따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이가 말하기를

 

“몸은 비록 병이 있사오나, 제 마음은 스승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래서 혜가 대사가 그를 대견하게 받아들이니, 젊은이는 차차 건강도 회복하고 더욱 정진에 노력하여 드디어 제3조 승찬(僧璨)대사가 되었습니다.

 

 

승찬과 도신의 대화

 

몇 십년의 세월이 흘러 승찬 대사가 환공산(晥公山)에 머무를 때, 13세의 영특한 사미(沙彌)동자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큰절을 하고 대뜸 여쭙는 말이,

 

“스승님, 자비를 베푸시어 저에게 번뇌를 해탈하는 길을 일러 주옵소서.

 

승찬 대사는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누가 너를 속박하였기에 풀어달라고 하는 것이냐?

 

동자는 불현듯 가슴이 막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참으로 생각해 보니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 누가, 그 무엇이 내 마음을 구속했단 말인가? 그저 마음 안에서 공연스레 일어나고 스러지는 번뇌망상이 아닌가? 마음 자체가 형상이 없으니, 대체 번뇌망상이 그 어디에 존재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승님, 아무 것도 제 마음을 속박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속박하는 것이 없다면 다시 무슨 해탈을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한마디에 갸륵한 동자는 문득, 본래 비어있는 허공 같이 장애없는 마음자리를 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동자가 장차 대도를 성취하고 제4조 도신(道信) 대사가 되었습니다.

 

도신대사가 출가하여 60여 년 동안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여, 아예 자리에 눕는 일이 없었습니다. 평소에 눈을 감은 듯 지냈으나 눈을 바로 뜨고 사람을 바라보면 그 위엄있는 총기에 사람들이 움츠려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깊은 삼매에서 우러나온 초인적인 도력(道力)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정통법맥(法脈)은 끊임없이 이어져 제5조 홍인(弘忍)대사를 거쳐 제6조 혜능(慧能)대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마 대사로부터 혜능 대사까지는 오로지 순수하게 마음의 해탈만을 문제시하였다고 하여 순선(純禪)시대라 하고, 그 무렵에 주로 제창(提唱)한 법문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경전에 이르신 바,

‘마음이 바로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心卽是佛佛則是心)’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일체만유는 모두 한결같이 불성의 광명으로 이루어진 화신(化身)부처님이며, 우주의 실상은 바로 장엄 찬란한 연화장(蓮華藏)세계요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운 번뇌에 가린 중생들이 그러한 자기 근원을 모르고 만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따라 이루어진 전변무상(轉變無常)한 가상(假象)만을 집착하여 너다 나다 내 것이다 라며 탐착하고 분노하고 아귀다툼하면서, 파멸의 구렁으로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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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이 법문 가운데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가운데는 일체 걸림이 없어서, 밖으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앉음(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이니라.

 

今記汝 是此法問中何名坐禪

此法問中 一切無碍外於一切境界上

念不起爲坐內見本性不亂 爲禪

 

어떤 것을 선정이라 하는가? 밖으로 모양(상相)을 떠남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니라. 가사 밖으로 모양이 있어도 안으로 성품이 어지럽지 않으면 본래대로 그대로 깨끗하고 그대로 정()이니라.

그러나 다만 경계에 부딪침으로 말미암아 부딪치게 되면 곧 어지럽게 되나니, 모양(상相)을 여의고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라. 모양(상相)을 떠나는 것이 곧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은 것이 곧 정()이니, 밖으로 선()하고 안으로 정()함을 선정(禪定)이라 이름 하느니라.

 

何名爲禪定

外離相曰禪內不亂曰定

外若有相 內性不亂本自淨自定

只緣境觸 觸卽亂離相不亂 卽定 外離相 卽禪 內不亂 卽定

外禪內定 故名禪定

 

 

참다운 참선의 가르침을 자상히 설명하고 있는 혜능대사 육조단경(六祖壇經)의 한 부분입니다. 평소에 생각하고 행하고 있던 것을 한번 반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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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뽑은 법어

 

· 선禪

() 공부는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먼저 본래(本來) 부처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화두話頭

화두(話頭)를 우리가 의심을 하다보면 그때는 거기에 마음이 모아지고,

또는 우리 자성(自性)이 우리 마음의 바탕이 본래(本來) 부처이기 때문에

 

· 염불念佛

염불(念佛)은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이러한 염불(念佛)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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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 뽑은 법어

()

 

 

()이란 무엇인가? 우선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은 산스크리트어로 dhyāna, 빨리어로 jhāna의 음역으로

한역하면

 

사유수(思惟修)

사유수(思惟修)입니다. 바른 생각으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그냥 보통 생각이 아니라 정사유(正思惟) 곧 바른 생각으로 닦는다는 말입니다. 바른 생각이란 반야(般若)의 도리, 제법공(諸法空) 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 도리를 분명히 알고서 다만 공()이 아닌 중도(中道)의 도리,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도리로 바르게 생각하면서 닦는 공부입니다.

 

적려(寂慮)

그 다음에는 적려(寂慮)라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하고 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분사(本分事)에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기악(棄惡)

그 다음에는 기악(棄惡)의 뜻이 있습니다. 상대 유한적인 악만 아니라, 내가 있다 네가 있다 무엇이 좋다 궂다 하는 분별망상도 버리는 것입니다.

 

공덕총림(功德叢林)

또는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합니다. 달마 스님과 양무제(梁武帝)가 거량할 때에 양무제는 “절도 많이 짓고 다리도 많이 놓고 많은 스님들께 보시도 했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니까 달마 스님이 일언지하에 무공덕(無功德)이라 했습니다. 달마 스님은 선()의 조사(祖師)이기 때문에 상대 유한적인 공덕을 말씀하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상대적인 공덕도 분명히 있으나 영원적인 진여법성에서 볼 때는 때묻은 공덕인 것이지 무루공덕(無漏功德)은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공덕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하나 둘 있는 것이 아니라 총림같이 무더기로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공덕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무루 지혜를 얻는 것이거니 무한공덕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해하실까 봐서 부언합니다만 우리가 설사 무주상(無住相)이 못된다 하더라도 밥 한 끼 베푸는 것도 꼭 공덕이 됩니다. 저희들은 공부할 때 느낍니다만 유위공덕(有爲功德)의 복덕도 많이 지은 사람들은 공부할 때 장애가 적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이 중요하고 인간성이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무엇을 좀 배우면 알고 안배우면 모르는 정도 같으면 우리 인간성의 존엄이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와 같이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우리 불교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참선할 때 분별시비를 항시 못 끊어 버립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비로소 끊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이 딱 되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마음이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려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고 삼매를 성취해야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천안통, 숙명통, 누진통의 삼명통(三明通)을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 있습니다. 밝은 것을 능히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훤히 보는 천안통이요 또는 숙명통이라, 무시이래의 과거를 다 아는 것입니다. 지금은 최면술만 좀 잘해도 몇 생을 거슬러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무량무변의 불지(佛智)를 통한다고 할 때에는 정말로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또는 누진통(漏盡通)이라, 모든 번뇌 습기(煩惱習氣)를 다 떼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기를 못 떼었을 때는 아직 공덕이 못 나옵니다. 이른바 현법락주(現法樂住)라든가 하는 공덕이 못 나오는 것입니다. 습기를 떼어버려야 비로소 우리 심리와 생리가 정화되어서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경에, 우리 마음에서 욕심의 뿌리만 뽑아버리면 우리 발이 하늘로 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을 비행하다가도 순간만 욕심을 내면 이른바 신족통(神足通)이 다 소멸되어 땅에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심공덕(佛心功德)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여불공덕이 분호불수(與佛功德分毫不殊), 부처의 과불공덕(果佛功德) , 불과를 성취한 공덕이 나와 더불어서 눈꼽만큼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참다운 믿음입니다. ‘부처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부처 공덕은 부처의 것이지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믿음이 못되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다 아는 것이고, 자기 번뇌를 다 끊어 버리는 신통(神通)도 얻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도 얻고, 우주만유의 모든 음성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청각도 얻고, 또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통도 얻고 아무튼 그와 같이 모두를 알 수 있고, 모두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이 공덕총림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선()으로부터 나옵니다. 지금 우리 같은 수행자들이 그런 신통을 못하는 것은 선을 많이 못 닦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닦으면 삼명육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나 그 뒤에 위대한 조사(祖師) 스님들이나 정평있는 도인들은 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선()은 공덕총림이라, 공덕이 수풀같이 많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현법락주(現法樂住)

또한 선정(禪定)을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 합니다. 이 현법락주라는 것도 우리가 크게 관심을 둘 문제입니다. ‘참선하면 아무런 재미도 없겠지’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선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음식도 있으나마나 별 문제가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상()이 점차로 가시게 됩니다. 이 상에 얽히고 저 상에 얽히면 굉장히 괴롭고 구속되는 옹색한 구속감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인데 우선 나라는 생각이 차근차근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가다가 죽어도 무방하고, 언제 죽어도 무방하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집착이 스러지다가 드디어 욕계를 초월한 법락(法樂)을 얻어서 한량없는 행복에 잠기는 것이 현법락주입니다.

 

삼매(三昧)

삼매(三昧)는 삼마지(三摩地 samādhi)와 같은 의미입니다. 앞에 든 것이 모두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하여 우리 마음이 한 경계에 머물러서, 즉 본체에 머물러서 분별망상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또한 선종(禪宗)의 선()은 그 이름은 동일하나 그 체()는 바로 열반묘심(涅槃妙心)입니다. 열반묘심은 바로 불심(佛心)을 말합니다.

선종(禪宗)이 이루어질 때는 화엄종이나 법화종 등 다른 종파와 대립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화엄종이나 법화 등 모든 경론이나 종파를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참선하는 분들은 다른 종파와 대립하거나 교()와 대립한 것도 아닌 것이고, 팔만사천 법문 모두를 포괄하고 초월해서 선종이 나왔기 때문에 조금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상을 내지 말고 설사 경을 안 배웠다 하더라도 불심(佛心) 가운데는 모두가 다 함장(含藏)되어 있으니 ‘우주의 진리 모두를 다 갖춘 공부를 한다.’하는 자부심으로 우리 선객(禪客)들은 공부를 지어 나가야 합니다.

 

최학도(最學道), 안락법문(安樂法門)

또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제공덕이 선정에 의하여 발득(發得)되므로 최학도(最學道)라 곧, 배우는 길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길이란 말이요, 또는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합니다. ()이란 것은 몸도 마음도 가장 안락스러운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은 우리 지혜나 덕성(德性)이나 정서나 모두를 다 조화롭게 성취하는 우리 인격완성의 가장 최고도의 방법인데, 풀이한다면 위와 같은 풀이가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