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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19호.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 광륜 19 2006년 가을 】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부처님의 진리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기쁨도 따로 없고 슬픔도 없을 것이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분상에서는 분명히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있습니다.

 

오늘은 두 가지 경사가 겹쳐있는 기쁜 날입니다. 한 가지는불환희일(佛歡喜日)’부처님께서 환희롭게 생각하시는 좋은 날입니다.

 

또 한가지는우란분재(盂蘭盆齋)’ , 우란분재를 풀이하면 도현(救倒懸)이라 구할 구(), 거꾸로 도(), 달아맬 현(), 거꾸로 달아맨 고통을 구제받는 날입니다. 우란분재는우리 중생이 잘못 살아서 거꾸로 달아맴을 받는 고통에서 구제받는 날입니다.

 

따라서 특히 여름 삼개월 동안 사월 보름부터 칠월 백중까지 오로지 참선 공부하신 스님들이 업장도 많이 녹이고 바른 소견도 얻어서 참다운 불자가 되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환희하시는 날인 동시에 산 사람만의 기쁜 날이 아니라 돌아가신 영혼들도 거꾸로 달아맨 무간지옥에서 구제받는 날입니다.

 

중생들은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많은 영역을 모릅니다. 비록 공부는 좀 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 안목에서는 지옥도 안보이고 귀신세계도 안보이고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 세계도 안보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더 높은 심심미묘한 천상세계라든가 모든 존재의 근본 공()한 자리인 극락세계가 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현인들이나 무수한 성자들이 다 그런 세계가 있다고 했지만 우리 중생은 업장에 가려서 그것마저도 없다고 부인합니다. “지옥도 없고 아귀 귀신세계도 없고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 세계도 없고 또는 천상도 없고 극락세계가 무슨 필요가 있는 것인가?” “마음이 편하면 극락세계가 아닌가?” 이런 말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만 마음속에만 극락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극락세계는 분명히 실존적으로 우리 사람들이 존재하듯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절대로 꾸며서 한 말이 없습니다. 비유를 드신다 하더라도 거짓을 꾸며서 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또는 거짓말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진실한 말, 꾸며서 하지 않는 말, 오직 모두가 다 천지우주의 도리에 맞는 말 이런 말씀만 부처님은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백퍼센트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옥이나 귀신세계도 자기 업장 따라서 가는 것인데 그런 세계에 있는 중생들은 굉장히 괴롭습니다. 제법 불교문화가 발달되어서 스님도 많이 나고 성자가 많이 나왔지만 지금 우리 세상의 혼란과 혼돈상태 보십시오. 하물며 스승도 없고 어두컴컴한 세상인 저 귀신세계, 영혼세계라든가 더구나 그보다도 훨씬 못한 지옥세계 이런 세계는 굉장히 괴로운 것입니다. 이런 괴로움을 도현(倒懸)이라, 거꾸로 도()자 달아맬 현()자 거꾸로 달아맨 무간지옥이라, 끝도 갓도 없이 쉴 자리가 없는 고통받는 세계입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신통제일입니다. 신통제일이라는 목련존자는 지옥도 보고 여기저기를 다 통달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자기 어머님이 지은 죄가 너무 무거워서 어머님이 계신 곳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지혜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어머님이 계신 곳을 알아냈더니, 어머님이 해골만 남아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단 말입니다. 신통자재하니까 어머니를 그냥 업거나 보듬고 나올 수가 있겠습니다만 길이 다르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부처님의 지혜, 불법의 지혜가 아니고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칠월 백중날 우란분을 여셨는가 하면 칠월 백중(百中)까지 공부를 열심히 한 참다운 수행자들에게 보시하고 백가지 음식을 차려서 만 중생에게 베푸는 그런 백중 따라서 백중은 원래 백종(百種)이라, 백가지 음식을 차려서 참다운 수행자에게 받들어서 보시하고 또는 모든 중생에게 보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아픈 사람 한사람에게 보시하는 공덕도 막중합니다. 같은 보시를 한다하더라도 오염된 마음, 괴로운 사람에게 하는 보시보다는 청정한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훨씬 더 수승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참답게 수행정진한 그런 스님들에게 하는 보시는 굉장히 수승합니다. 따라서 이런 날 참다운 수행자들에게 보시하고 닦아나온 힘, 불법의 수행이라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인생고를 해탈하는 수행입니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본질적인 면에서는 둘이 아닙니다. 잘나고 못나고 또는 성자고 성자가 아닌 우리 속인도 모두가 다 근본적인・본질적인 의미에서 똑같습니다. 나쁜 쪽으로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쪽으로 똑같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하는 부처님 성품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천만번 되뇌여서 부처님 성품을 확실히 확신해야 합니다. ‘명신불지(明信佛智)’, 불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밝을 명(), 믿을 신(), 부처 불(), 지혜 지(), ‘부처님 지혜를 분명히 믿는다는 것은 바로 내 생명의 본바탕을 믿는 것입니다. 또는 우주의 본질을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연설(因緣說)이라, 그저 높고 높은 지혜를 바로 말하면 잘 못알아 들으니까 그냥 쉬운 인연법을 말해서 차근차근 높은 데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비유설(譬喩設)이라, 이래저래 비유를 많이 들어서 높은 차원으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가장 고도한 법문이 무엇인가 하면 법설(法說)이라, 부처님 진리를 직설적으로 바로 말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차원 낮은 인연설이나 비유설 같은 법문도 중요합니다. 부처님 당시는 분명히 중요했고 지금도 더러는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법문은 현대적인 상황에서는 맞지 않습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현대적인 인생고를 제도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가 받고 있는 고난은 너무나 큽니다. 대체로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 주변에는 기독교, 유교, 도교 그리고 별스러운 사이비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인연을 이래저래 적당히 있다고 말하고 또는 비유하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도한 종교 또는 사이비 종교, 여러 가지 주의 주장 이런 것들이 많이 있는 사회에서 그런 법문으로 해서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꼭 법설(法設)이라, 진리를 바로 찾고자 하는 그런 법문을 우리가 알아들어야 만이 참다운 힘이 됩니다.

 

그런데모두가 다 똑같은 부처님 성품을 갖추고 있다.’ 이런 법문을 하는 것은 바로 직설적으로 부처님 법문을 그대로 한,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을 성불시키고자 하는 법문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잘못 살아서 지옥이 있고 또는 아귀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도 본래는 모두가 똑같은 부처님 성품입니다. 또는 지금 지옥고를 받고 거꾸로 달아맨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런 고통을 받는 중생 역시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부처님 성품이란 말입니다. 또는 귀신이 되어서 갈 길을 못가고 고생고생하고 헤맨다 하더라도 그 본래는 역시 똑같은 부처님의 성품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이고 천상세계도 모두가 다 똑같이 부처님의 성품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그런데 지옥이나 아귀나 일반 동물의 축생 세계나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 귀신세계나 사람세계나 천상세계나 이런 세계는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참다운 성품인 부처님 성품을 온전히 모릅니다. 모르는 정도에 따라서 가장 모르면 지옥가는 것이고 좀 나으면 차근차근 고통을 덜 받는 세계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하다가 온전히 마음을 깨달아서 부처님 성품하고 하나가 딱 되는 것이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이 하는 일 가운데서 어떤 일이 가장 소중한가? 직업도 소중하고 먹고 살고 의식주가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귀한 것은 우리 생명 그 자리, 우리 생명의 본바탕 자리로 돌아가는 공부가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어떠한 철인들이나 어떠한 도인들이나 어떠한 성자나 모두가 다 그 길로 해서 다 나아갔던 것입니다.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모두가 다 그런 길로 나아갔단 말입니다. 다만 역사적 배경, 개성적 차이 또는 그분들이 공부한 정도의 차이 때문에 다소 차이있게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성인들이 모두가 다 진여불성자리・천지우주의 본래면목자리・본래생명자리를 깨달은 분들입니다. 그런 가르침 가운데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장 완전한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인간 세상에서 오로지 닦아가는 분이 출가수행자 아닙니까! 따라서 그런 출가수행자가 삼개월 동안이나 애쓰고 공부를 했으니 공부한 그 공덕은 수행자 본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도리를 잘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이 가운데 나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쁜 마음을 품는 악령 그것이 우리 주변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이 성실하고 청정한 사람이 있을 때는 그 사람의 맑은 기운으로 해서 분위기가 청정하게 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십 명의 청정한 수행자가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공부기운이 비단 태안사뿐만 아니라 곡성군, 전라남도 또는 대한민국 나아가 전세계의 분위기를 그만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은 불환희일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일 좋아하신 날입니다. 선방도 여러 군데에 있고 공부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다 삼개월동안 공부하고 오늘 해제 하는 그야말로 환희용약하는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공부라 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월 보름날 결제할 때는삼개월 동안 공부를 기어코 잘해서 부처가 온전히 되야 하겠구나!” 이렇게 마음먹지 않은 분들은 한분도 없습니다.

 

어느 스님이건 다 그렇게 단단히 결심을 합니다만 해제할 때 자기를 돌아보면 참 심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로 깊이 생각해서 자기가 그때까지 못 깨달았다고 할 때는 통곡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불하는 길이 지금 새로 발견하는 길도 아닌 것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발견하셔서 우리에게 안내하신 길이고 또는 무수한 스님들이 증명도 하셨습니다. 또는 어떤 성자, 철인들이 조금 더 많이 가고 더디 가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다 그 길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 길을왜 나는 삼개월 동안이나 애쓰고 공부했지만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인가?” “중생성불 찰라간(衆生成佛 刹那間)이라, 우리 중생이 성불하는 것이 찰라・순간에 있다는데 왜 나는 삼개월 동안 깨닫지 못했던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통곡을 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 우리 중생, 우리 불자들의 깊은 고뇌가 있습니다.

 

비록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우리가 금생에 지은 버릇이나 금생에 지은 업이 얼마나 많습니까? 카르마, () 보고 카르마라 하지 않습니까? ()이라, 우리는 사람 업만큼 지어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래 부처입니다만 돼지 업을 지었기 때문에 돼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업으로 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풀포기 하나, 나무 한그루 모두가 다 지은 바 업장대로 태어났습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라, 부처님 성품우주의 참다운 정기인 순수에너지가 충만해 있는데 다만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업을 짓기 때문에 업의 정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으로 모두가 다 자기가 지은 바 업장 따라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과거전생에 업을 많이 짓고 금생에도 중생들은 굉장히 업을 많이 짓습니다. 어떤 업을 지었는가? 분명히 실존대로 있는 실상(實相)을 잘 모르니까 없다고 하고, 없는 가상(假相)을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의 방편법문(方便法問)은 우리 중생의 근기 따라서 중생들이 보는 대로 있다고도 하고 중생들이 보는 대로 없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법문(眞實法問)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는 물질, 우리 몸뚱이도 물질 아닙니까?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물질 뿐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는 것이 물질인데 그런 물질이 부처님의 참다운 방편 법문이 아닌 참다운 법문에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참선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렁저렁 우리가 방편공부를 하려면 모르지만 아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교가 불교인 점, 참다운 공부를 하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실법문(眞實法問)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 중생차원에서 분명히 있다고 하는 것을, 또는 과학자도 흐리멍텅하게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하다고 말하는 것을 부처님의 법문은 분명히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자님들, 어렵더라도 이런 것을 꼭 문제시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제법공(諸法空)’이라, 모든 법이 다 공한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색()이 바로 공()이요, 물질이 바로 공()이요 또는 공()이 인연 따라서 다시 물질이 되고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의 근본참다운 실상모습은 공()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아주 비었다고 생각할 때, 그 때는 불법이 못되는 것입니다. 아주 빈 것이 아니라 중생이 잘못 보는 것은 비었다고 하더라도 성자가 보는 영생의 자리성자가 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이것은 분명히 불생불멸(不生不滅),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언제나 있습니다. 참으로 있는 실존, 진여불성 만이 진실로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몸, 있는 이대로 아무 것도 없다고 할 것인가? 우리 중생이 생각하는 정도로는 없습니다. 그러나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진 부처님의 성품으로 이루어진 이 몸은 있습니다. 그것이 참다운입니다. 그리고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진이것은 어떤 것하고도 구분이 안됩니다.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지고진여불성으로 이루어지고나무공기천지우주는 모두가 다진여불성이라 하는우주의 정기로 꽉 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단계에서는라고 고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것이 참다운 자기인 것입니다. 참 자기를 아는 공부가 참선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참선을 꼭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선만이 현대적인 고뇌를, 현대의 번뇌를 구합니다.

 

‘나’라는 것은 대체로 무엇인가? 나무는 무엇인가? 중생은 어떠한 문제 하나도 근본적으로 해답을 절대로 못내립니다.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다해도 절대적인 바른 판단을 못내립니다. 부처님 법만이 제대로 해답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식적인 범주에서 우리 중생이 검으면 검고 희면 희고 좋으면 좋고, 궂으면 궂고 하는 차원으로 해서는 현대적인 고뇌를 절대로 해결 못합니다.

 

참다운 대승 (大乘)의 진리, 이것은 우주의 본질을 훤히 아는 진리입니다. 내 생명의 본바탕이 무엇인가? 우주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아는 지혜가 되어야 만이 참다운 대승진리인 동시에 이런 지혜에 입각을 해야 만이 참다운 공부, 참선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근본뿌리에서 따져보면 석가모니나 어떤 성자가 모두가 다 똑같은 부처이고 본성품은 똑같은 진여불성이지만 워낙 우리가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색즉공(色卽空)이라 하나 우리가 색즉공 도리를 분명히 느끼겠습니까? 또는 우리 행동을 색즉공 도리에 그대로 맞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무서운 원자력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원자력 시대는 자기가 잘못하지 않고 상대편이 잘못한다 하더라도 같이 다 멸망당하기 쉽습니다. 그냥 자기만 문제가 아니라 원자력 잘못쓰면 자살하는 것이고 멸망적입니다. 그런 원자력을 나쁜데 안쓰고 바로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 이렇게 바른 해답을 얻으려면 이것 역시인간의 본성품은 무엇이고 우리가 지금 미워하고 있는 이 좁은 성품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이며 또는 원자력은 무엇인가?’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확실할 때는 우리 마음이 항상 불안합니다. 인간의 불행 가운데서 가장 큰 불행이 불안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왜 불안스러운 것인가? 무지하기 때문에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대학을 나오고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왜 무지한가? 많이 배웠다 하더라도 참다운 우주의 참 성품을 모르면 결국은 무지한 측에 속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자기반성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시대는 꼭 깨달아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진리의 근원자리 · 일체 존재의 근본 참다운 모습자리 · 실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실상을 등지고 사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근본적인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광명을 등지고서 어둠으로 갑니다. 플라톤의동굴의 비유, 동굴은 굴속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금 굴속에 갇혀있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태양의 비유, 성자의 출현은 태양이나 똑같습니다. 굴속에 갇혀서 시야도 좁고 모든 것을 잘 못 봅니다. 한 말로 말하면 있는 것을 없다고 보는,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거품이나 그림자는 잠시 있다가 말겠지요. 그 그림자, 우리 중생들이 눈으로 봐서 있다가 마는 그림자가 우리 몸뚱이나 우리가 보는 물질세계입니다.

 

이런 것을 현대 과학도 어렴풋이는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것도 모두가 불확실해서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라, 저 원자세계 그야말로 저 미세한 소립자세계에 들어간다고 생각할 때는 있는 지 없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공간성도 없고 따라서 시간성도 없을 것이고 또는 전하 마이너스 플러스 전기도 없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미세한 소립자의 세계입니다. 이런 공간성이 없는 것들이 모여서 전자가 되고 양자가 되고 그것들이 모여서 원소가 되고 또는 수소가 되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런 물리학적인 기본적인 지식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모르는 분이 많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 양자역학이라, 물리에서 말할 때는 어떠한 물질이나 모두가 다 원소로 구성되고 원소는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자, 양자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소립자라 하는 물질인가 물질이 아닌가 모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간성이 없으니 물질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이렇게 물질인지 아닌지 모르는 그런 것은 결국은 에너지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전기란 말입니다. 하나의 전기가 운동하고 이렇게 저렇게 진동해서 전자가 되고 또는 저렇게 진동해서 양자가 되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산소나 수소나 탄소가 되는 것이고 그것들이 모여서 분자가 되어 우리 세포를 구성한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나 파고 들어가서 저 끄트머리 가서는 물질인가 아닌가 모른단 말입니다. 물질이 결국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부처님께서는 훤히 보십니다. 참선 할 때는지관타좌(只管打坐)’, 오로지 반듯이 앉아서 공부해라. ‘지관타좌 신심탈락(只管打坐 身心脫落)이라’, 몸과 마음이 다 자기라는 관념에서 쑥 빠져버린단 말입니다.

 

오직 앉아서 공부를 많이 하면 그 때는 몸과 마음이 자기라는 관념도 점차로 희미해지고 그런 자기 몸뚱이 무게가 차근차근 가신단 말입니다. 내 몸무게가 오십킬로다 하지만 이것이 고정불변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비행기 타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중력은 줄어집니다. 진공으로 간다고 생각할 때 그 때는 몸무게가 없어지고 맙니다. 번뇌가 있으니까 몸뚱이가 무겁다 하는 것이지 정말 없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 무게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 무게도 없기 때문에 번뇌를 다 떠나버린 삼명육통 (三明六通)한 도인들은 자기 몸을 마음대로 천지우주에 비행자재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이치로 이래저래 알아서 한 법문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실존적으로 참다운 가르침입니다. 과거를 훤히 알고 미래를 훤히 알고 일체 진리를 다 알고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말입니다. 또는 우주에 있는 모든 음성을 다 듣고 우주에 있는 모두를 다 보고 하는 신통 이것이 비유나 방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이런 것은 비유도 방편도 절대로 아닙니다.

 

부처님 진리라 하는 것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체 가능을 다 갖춘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 가르침이 그렇지 않고 그냥 이치로만 좀 알고 불경이나 좀 외고 그런 도리나 얘기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애쓰고 수행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이라 하는 것이 부처님 · 자기 본래 성품자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차근차근 행복해지고 지혜도 밝아져서 드디어 부처님의 참다운 불성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이른바 삼명육통이라, 과거를 다 훤히 알고 미래를 다 훤히 알고 모두를 다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무한대의 그런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공부를 제대로 잘 못해서 그런 힘을 조금도 못냅니다만 확신은 합니다.

 

우리는 결국 그런 자리에 꼭 누구나가 가셔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천상사람들은 자기 몸의 무게를 못느낄 정도로 몸이 광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극락세계 중생은 순수한 광명뿐이지 무게있는 몸이 없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분명히 느껴야 됩니다. 이런 도리는 물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짐작합니다. 그러나 물리학도 외에 일반 사람들은 그냥 귀를 막아버립니다.

 

부처님께 가는 길은 가장 행복스런 길입니다. 부처님께 가는 길은 가장 가볍고 가장 상쾌한 길입니다. 어떠한 것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우리가 어떻게 몸부림치고 반항한다 하더라도 결국 가고 마는 것입니다. ‘나와 모든 존재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는 것이 공부란 말입니다. 불경외우고 무엇을 많이 하고 그런 것도 공부지만 그건 둘째 공부인 것이고 제일의 (第一義的)인 가장 큰 공부는 우리 본래자리, 우주의 본래자리를 분명히 느끼는 것입니다.

 

『소실육문(少室六門)』이라 하는 달마스님 어록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달마스님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말해서 이입사입 (理入事入)이라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먼저 이입(理入)이라 원리 리()자 하고 들 입(), 이치로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사입(事入)이라 일 사()자 들 입()자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을 공부하신 분들은 리()와 사()를 구분해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진여불성자리 · 우주의 본자리 이것은 리()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현상계를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달마스님 법문의 대요는 먼저 이입(理入)이라, 먼저 원리 · 이치로 해서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현대적인 말로 하면 먼저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두운 밤에 길을 갈 때 등불이 있어야겠지요. 그와 똑같이 이렇게 혼돈 무궤도한 사회에서는 꼭 원리로 해서 먼저 들어가야 합니다. 이론체계가 딱 서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체계를 세울 것인가? ‘일체 존재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 · 하나의 진리로 그 진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진리를 떠나서 어느 것도 성사를 못합니다. 설사 어떠한 이나 폭력이나 그런 것으로 해서 잠시간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오래는 못갑니다. 또는 그런 것은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도움이 못됩니다. 마땅히 진리만이 참다운 자유가 있고 참다운 해탈이 있고 참다운 평등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사입(事入)이라, 원리로 먼저 안 다음에는 현상적인 몸으로 하는 행동과 입으로 하는 말과 생각을 모두 다 원리에 맞춘단 말입니다. 다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입(理入)이라, 먼저 원리로 해서 진리를 해득(解得)하고 그 다음 문제는 사입(事入)이라, 우리가 우리 몸으로 행동을 주의하고 우리 입으로 말을 주의하고 우리 뜻으로 바른 생각하는 우리 뜻으로 한 생각도 놓치지 않고서 원리를 그대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데카르트나 뉴우튼의 사상은 물질 따로 있고 정신 따로 있다고 보는 이원론(二元論)입니다. 내 마음 따로 있고 내 몸 따로 있고 이렇게 이원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데카르트나 뉴우튼이나 그런 시대 이른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현대 양자역학이나 또는 부처님 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 일원론(一元論)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부처님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미운 사람을 부처님으로 본다는 것은 좀 괴로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겉만 미운 것이지 진실로 미운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모두가 다 부처님 일원(一元) · 진리 일원(眞理一元) 이렇게 보는 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달마스님께서 말한 이입(理入), 원리로 들어가는 공부란 말입니다.

 

이것이 또한 다른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 모두가 다하나에 해당합니다. ‘하나의 상()’자리를 우리가 좀 느끼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업장이 너무 무거워서 그냥 그 자리가 숨어버립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 경전에는 원숭이가 까불까불하는 모습에 비교했습니다. 조금 옳다고 그냥 순간 경망스러운 원숭이같이하나의 상()’자리를 느끼는 마음은 금방 지워지고 자기 본래 업대로 움직인단 말입니다. 업대로 그렇게 되기가 쉬운 것이니 일상삼매(一相三昧)자리 · 이입(理入)자리를 원리로 바로 잡아야 만이 우리 업이 차근차근 녹아져서 참다운 성불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입(事入) 즉 다른 말로 일행삼매(一行三昧)가 있단 말입니다. 사입(事入)에는 사행(四行)이 있습니다.

 

첫째, 보원행(報寃行)이라, 자기가 무슨 고통 받아서 남을 원망할 때라도 원망을 말고 과거 내가 전생에 지었거니 하고 반성을 하면서 본체로 돌려서 도()에 나아감으로 보원행이라 말합니다.

 

둘째, 수연행(隨緣行)이라, 일체 존재가 일체 선악시비 금생에 잘 살고 못 살고 모두가 다 과거 전생에 지은대로 갑니다. 자비심을 내고 과거 전생에 많이 베풀면 금생에도 꼭 잘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잘 되기 위해서는 금생에 역시 자비심을 내고 남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잘 살고 못살고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되는 것입니다. 과거 자기가 잘못 살아서 금생에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앞으로 잘 살면 금생에 달라지겠지요. 잘 사는 것은 천지 우주의 진리에 따라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얻고 잃는 것에 따라 마음에 증감이 없이 진리에 따라 공부하는 것입니다.

 

셋째, 무소구행(無所救行)이라, 구함이 없는 행이라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안주하니 마음이 항상 안온하고 바랄 것도 구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넷째, 칭법행(稱法行)이라, ()에 들어맞는 행()이라는 뜻으로 자성청정한 원리 · · 진리에 따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내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천지우주가 진여불성 일원론이라, 천지우주가 오직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딱 믿어버려야 참다운 불자입니다. 이렇게 믿고 공부를 해야 염불해도 참다운 염불, 주문해도 참다운 주문, 화두를 참구해도 참다운 화두입니다. 이렇게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화두를 공부하나 뭘 공부하나 참다운 참선도 못되고, 참다운 염불도 못됩니다. 또는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적인 번뇌를 조금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이런 도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철학적인 원리로 해서 하나의 진리를 제시한다 하더라도천지우주가 부처님이다.’ 이렇게생명자체를 제시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염불(念佛)을 하고 경()도 외우고 합니다. 새삼스럽게 개별적으로 우리가 축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절에 오셔서 좋은 환경 가운데서 부처님의 장엄스런 상을 우러르면서, 오직 성불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순간도 딴 생각 말고서 부처님만 생각하고미운사람도 고운 사람도 모두가 부처님이다. 천지우주에 부처님의 훤한 광명이 빛나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우리에게 복은 저절로 오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리를 알고 천지우주가 진여불성 일원론(一元論)이라고 분명히 알고 공부를 할 때는 모두가 그대로 다 참선이 됩니다.

 

어느 것만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 참선이 됩니다. 그냥 명상해도 참선이 되고 또는 염불하면 염불선이요 주문하면 주문선이요 하나님 아버지해도 그때는 다 참선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디 밖에 한 군데에 있습니까? ‘천지우주가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배대할 때는 저 성부(聖父)는 부처님의 법신 (法身)이고 또는 성신(聖神)은 부처님의 보신(報身)이고 또는 성자(聖子)는 부처님의 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다만 그네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의 진리로 이끌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습관성이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 박혀놔서 삼개월동안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부처님까지 가려면 아직은 멀었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무척 애를 썼습니다만 부처님까지 올라가려면 아직은 길이 멀단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순간에 비약적으로 올라가 보이겠지요. 오직 얼마만큼 진실한가가 중요합니다.

 

살타왕자 는 자기 몸을 범새끼에게 바쳤습니다. 자기 몸을 범이 새끼를 낳고 굶주린 그 어미에게 바쳤습니다. 이것으로 무수겁동안 수행할 것인데 자기 몸뚱이를 몽땅 바쳐버리는 그런 공덕으로 해서 구겁 초월해서 성불했단 말입니다. 그냥 순간에 그렇게 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중생성불 찰라간(衆生成佛刹那間)’이라, 그러나 자기 몸뚱이를 자기라고 하는 생각을 꼭 떠나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진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답게 자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답게 버리는 것이 참답게 얻는 것입니다. 오늘은 돌아가셔서 잘못계신 우리 영혼들을 천도하는 날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거꾸로 달아매는 고통도 있을 것이고 또는 지옥에서 얻어맞는 고통도 있을 것이고 지옥 끓는 가마솥에서 고통받는 그런 중생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지옥갔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은 조금도 변치 않습니다. 지옥중생도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가 잘못 살아서 잘못 느껴서 지옥고를 스스로 받고 있단 말입니다. 지옥세상의 끓는 물이나 지옥에서 우리를 해치는 그런 칼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자리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티끌도 모두가 진여불성으로 되어있습니다.

 

‘일미진중 함시방(一微塵中 含十方)’이라, 조그마한 티끌 가운데 천지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한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자리, 일체생명이 다 거기에서 이루어지고 일체생명이 다 그리 가고 또는 일체생명이 이대로 천지가 파괴가 되든 말든 내 몸뚱아리가 참말로 바꿔지든 말든 조금도 생명자체는 흠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이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공부하는 것이 참다운 공부입니다. 제일하기 쉬운 것이 염불공부가 되겠지요. 왜 그런 것인가? 염불(念佛)이라, 내 본래 면목과 우주의 본래가 부처 아닙니까? ‘내 생명의 본체가 부처고 천지우주가 부처인데 그 부처를 생각하고 우리가 외운다말입니다. 그것이염불(念佛)’입니다.

 

고지식한 사람들은그것은 참선이 아니다.’, ‘참다운 수승한 중생들은 화두를 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만약 염불을 그와 같이 밖에서 부처님을 구하는 식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별로 큰 공덕은 없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에 대해서 한계를 안두고서일체만유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화두를 한다 하더라도 이뭐꼬나 무()자나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우리 마음을 빈틈이 없이 진여불성자리에다가 딱 붙여놓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서 마음은 둥둥 뜨고 부질없는 의심이나 하면 그런 것은 절대로 참다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진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진리로 다 모을 때입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의 불안의식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의 구분이 있고 또는 딴 종교와 차이가 있고 이런 식으로 해서는 인간의 불안의식을 절대로 제거 못합니다.

 

‘가장 알찬 공부가 무엇인가?’하면 진리 그 자리, 모두를 다 하나의 진리에 딱 포섭해 놓고서 이입(理入)이라, 우주의 원리에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한번 공부하는 방법을 간택한 다음에는 거기다가 마음을 붙여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붙이지 않고서아 원리로 내가 알았으니까 이만하면 내가 복을 받겠지!”하면 과거에 지은 업장, 금생에 지은 업장 때문에 복이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다운 복을 구하고자 할 때는 오로지 앞생각 뒷생각, 이 마음 저 마음 할 것 없이 부처님 자리 · 참다운 진리만 생각하는 쪽으로 우리 생활을 통일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생활이 참다운 진리만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꼭 자기 아들이나 딸도 자기를 따릅니다. 자기 소원도 정당한 소원은 꼭 이루어집니다. 정당한 소원은 천지우주의 기운인 부처님께서 지키는 것이고 무량의 신장이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께서 환희하시는 불환희일, 백중날 비록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금생에 몇 번 정도는 삼개월씩, 일년씩 공부를 오로지 해서 우리 마음에 빈틈이 없도록 해서 자기 생명의 본래 자리 · 참다운 자기가 되는 그런 성불의 자리로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부처님께서 도현(倒懸)의 고(), 영혼들을 제도하는 법문내용도 인간이 잘못 보는 그런 견해를 떠나서 참된 부처님 진리를 알아서 해탈로 인도하는,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깨달아버리면 극락이 되겠지요. 극락(極樂), 이것이 참다운 세계입니다. 극락만이 영생하고 다시 줄어지지 않고 언제나 행복이 충만한 세계입니다. 다른 세계는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인연, 행복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중생차원에서 보는 허망무상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께서 환희하시는 해제날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도현(倒懸)의 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고통을 구제해드리는 그런 날에 우리가 자신의 참다운 생명인 진여불성자리 달마스님께서도 역설하고 무수한 성자가 우리에게 역설하신 바로 그 자리,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원리를 먼저 깨달아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몸으로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우리 입으로 헛된 말 않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기를 위해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희생을 바래서는 안됩니다. 결국은 자기 생명이 훼손을 받습니다. 남에게 잘못하면 그냥 자기에게 과보가 돌아옵니다. 자타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부처님 법대로 따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와 타인, 자기 권속과 일체 중생의 행복을 도모하는 참다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오늘 법회에 참여하신 공덕으로 이제까지 가지고 계시던 부처님의 참다운 도리가 아닌 우주의 참 진리가 아닌 우주의 실상(實相)이 아닌 가상(假相)들을 모두 떠나서 실상(實相)을 느끼고 실상(實相)대로 나아가서 또 실상(實相)대로 행동하셔서 금생에 한사코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991. 8. 24 태안사 우란분절(백중) 법어

 

 

 

〔 각주 〕

 

1. 우란분재(盂蘭盆齋)

우란분(盂蘭盆)이란 ˙범어ullambana의 음()을 딴 것으로 우란분(盂蘭盆)을 뜻으로 번역하면 구도현(救倒懸), 즉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한다, 여의게 한다는 뜻이다. 「우란분경」에 의하면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의 괴로움을 구하려고 한 것이 우란분재(盂蘭盆齋)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범어(梵語) : 인도고전어, 대부분의 대승경전의 원본은 범어로 되어 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전파되었으니 지금 우리들이 쓰는 불교용어의 대부분은 범어에서 그 뜻을 찾아볼 수 있다.

 

2. 아수라

중생이 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하는 여섯 가지 세계 가운데 하나, 육도(六道)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 있다. 중생이 바로 깨달으면 천지우주가 진여불성 · 부처세계인데 중생의 업의 차원에 따라 나누어진 세계이다.

 

3. 해제(解制)

90일에 걸친 ˙안거(安居)를 끝내는 것을 말한다. 결제(結制)에 대비되는 말.

˙안거(안거) : 인도의 강우기에 일정한 기간 동안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서 외출을 금하고 함께 수행한 것에서 유래한다. 즉 안거 기간인 90일 동안은 다니는데 불편한 것과, 벌레들을 밟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장소에 머물러서 오로지 정진에 힘쓰는 것이다. 그 첫날은 안거의 제도를 맺는다는 뜻으로 결제라 하고 마지막 날 안거를 푸는 것을 해제라 한다. 안거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성도 다음해부터 입멸 때 까지 계속됐고 그 뒤에도 불교를 전승한 모든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415일에 결제하여 715일 해제하는 하안거와 음력 1015일 결제하여 다음해 115일 해제하는 동안거를 채택하여 행하고 있다. 안거를 마치고 해제하는 날은 대중공양 등을 베풀어 그 동안의 노고를 달래는 풍습이 있으며 특히 715일의 하안거 해제일은 우란분재 등을 거행한다

 

4. ()

범어 karman, karma의 한역(漢譯). 몸과 입과 뜻으로 이루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5. 대승(大乘)

범어 mahayana의 한역(漢譯). 큰 탈 것이라는 의미로 승()은 싣고 운반 한다는 뜻으로 미혹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교법을 말한다. 자신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소승(小乘)에 대비되는 말로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는 적극적인 의미를 수용하여 자리(自利), 이타(利他)의 양면을 다 갖추어 널리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6. 삼명육통(三明六通)

마음이 일념(一念)이 되어 심일경성(心一境性)의 경지에서 천안통(天眼通), 숙명통(宿明通), 누진통(漏盡通)의 삼명통(三明通)과 신족통(神足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의 능력이 생긴다. 삼매(三昧)가 발득(發得)되어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할 때 분별시비가 끊어진 후 얻게 되는 신통부사의한 공덕을 말한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밝은 것을 능히 다 갖추고 있다는 말인 명행족(明行足)이 있다.

 

7. 제일의(第一義)

범어 agra-dharman, parama-artha의 한역(漢譯)으로 최고의 법, 궁극의 진리, 진제(眞諦), 승의제(勝義諦)를 말한다.

 

8. 이입사입(理入事入)

이입(理入)과 사입(事入)은 이입사행(二入四行)의 이입(二入)을 말한다. ()는 이론, ()는 현상 혹은 행위를 뜻한다. 사입(事入)은 행입(行入)이라고도 한다. 이론적으로 정확히 바른 체계를 세우고 수행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9. 사입(事入) : 행입(行入)

 

10. 법신(法身)

범어 dharma-kāya의 한역(漢譯). 부처님의 삼신(三身:法身,˙報身,˙化身)일불(一佛) 가운데 하나다. 형태를 초월한 깨달음 그 자체,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 · 마음의 본체 · 영원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보신(報身) : 범어 sambhoga-kāya의 한역(漢譯). 보살이 원과 수행의 결과에 의해 얻어진 공덕으로 갖추어진 몸, 마음의 본체에 갖추어진 성품공덕인 지혜와 자비 등의 무량공덕을 말한다.

˙화신(化身) : 범어 nirmāna-kāya의 한역(漢譯). 중생을 이끌기 위해 상대에 맞게 나타나는 부처님의 신체, 마음의 본체에 갖추어져 있는 성품공덕이 인연따라 이루어지는 별, , 인간, 우주 등의 일체존재를 말한다.

 

11. 살타왕자

석가모니부처님의 과거 전생모습 중의 하나다. 헤매는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이 사무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는 상제(常啼) 보살이었을 적에는 해탈의 지혜인 반야(般若)를 얻기 위해 혼연히 뼈를 부수어 골수를 꺼내서 팔기까지 했다. 이러한 다겁생의 난행고행(難行苦行)의 시련 끝에 부처님의 깨달음의 가르침, 불법(佛法)이 성립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