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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22호 2007년 여름

【 광륜 22호 2007년 여름 】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보 살 계


이러한 삼복더위에 우리 불자님들이 이렇게 많이 오신 것은 모두가 다 그 나름대로 행복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가장 보람되고 바람직한 생각인가, 어떠한 것이 우리를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인가?’ 이런 것에 다소라도 도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더운 때는 서늘하고 안락스러운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선풍기도 필요하고 에어컨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이 정말로 지속적인 청량제는 못됩니다. 또한 추운 때도 누구나가 따뜻한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따뜻한 난방장치도 일시적인 것 밖에는 못됩니다.


 더운 때에 정말로 변치않는 서늘한 것을 우리에게 주고, 또는 추운 때 우리에게 정말로 변치않는 따뜻한 것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만이 참다웁게 서늘하고, 또는 진리만이 참다웁게 따뜻합니다.


 ‘진리’라고 하면 너무나 철학적인 말같이 생각이 되어서 어렵게 생각이 되실 수도 있지만 진리는 절대로 그렇게 거창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 포기의 풀이 자라는 것도 진리에 따라서 자랍니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부는 것도 역시 진리에 따라서 오고 부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진리라 하는 것은 어느 것에만 있고, 어느 특정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또한 진리는 어느 곳에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한테나 또는 우리 사람뿐 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우리 인간 중생이 미처 모를 뿐인 것이지 진리 자체는 조금도 변동도 없고,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누구나가 다 개인적으로 행복을 구하고 안녕과 질서를 구하나, 개인적으로는 고민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 고통 때문에 이런 더위에는 더욱 더 덥습니다. 남 미워하는 것도 우리 마음을 더욱 더 덥게 하는 것이고, 또는 지나친 욕심을 내는 것도 역시 우리 마음을 더욱 더 덥게 합니다. 이렇게 삼복 더위라 하더라도 정말로 보람있는 일, 자기 부모님한테 자기 정성을 다해서 효도하는 일, 또는 형제간에 우애하는 일, 또는 국가미래를 위해서 보훈하는 일, 이런 일을 정말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더위가 간 곳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리자체가 바로 참다운 청량제이고, 진리 자체가 온난한 어머님 품 같은 훈훈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혹한의 겨울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에 따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추위도 모르고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항상 불안스럽고, 국가 민족도 그때 그때 반목이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둔조역풍(鈍鳥易風)’이라, 미련한 새는 바람 따라서 순풍대로 날아가면 좋은데, 바람을 거슬러서 난단 말입니다. 이런 때는 날기도 어렵고, 자기 목적지에 가기도 어렵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도 역시 진리라 하는 우주의 도리,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주의 법칙 이런 것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활하면 참 쉬울 것인데, 추운 때 추운 줄도 모르고, 또는 더운 때 더운 줄도 모를 정도로 참 쉬운 것인데, 그걸 몰라서 미련한 새가 역풍 따라서 거슬러 날듯이 어렵게 살아 개인도 불안스럽고 사회도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의 진리입니다. 하느님법도 똑같이 우주의 진리입니다. 공자님법도 똑같이 우주의 진리입니다. ‘진리가 여기 있고, 저기 있고, 또는 불교에만 있고 다른 종교에는 없다.’ 이러면 그때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어느 때나, 어느 누구한테나 충만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 중생이 미처 깨닫지 못해서 모를 뿐입니다.


 진리에 따라서 하는 우리의 행동, 진리에 따라서 하는 우리의 언어생활, 진리에 따라서 하는 우리의 사고 활동 이런 것을 계율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입이나 또는 우리의 생각이나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진리에 따라서 살 때 계율을 따른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10계명이나, 이슬람교의 계명이나, 또는 불교의 5계나 10계는 모두가 몸으로 하는 행동도 우주의 도리에 따르고, 입으로 말하는 언어생활 역시 우주의 도리에 따른단 말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고활동 역시 우주의 법칙에 순응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진리라 하는 것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어느 누구나가 바른 행동을 하고 싶고, 바른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안된단 말입니다. 진리를 미처 체험을 못했다 하더라도, 진리가 무엇인가 조차 윤곽을 미처 모를 때는 행동이 바르게 나갈 수가 없고, 말도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윤곽을 좀 잡으셔야 합니다. 진리라 하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가 오직 하나라는 말은 진리가 여기 하나 있고, 저기 하나 있고 한다는 뜻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모두 통틀어서 진리 하나 뿐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진리라 하는 것은 어디에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고 또는 누구한테나, 또는 무엇이나간에 진리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런 법을 우선 확실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은 성자가 못돼서 진리를 제대로 체험은 못했다 하더라도, 우선 이치만으로라도 바로 진리를 느끼셔야 합니다.


 한 포기의 풀이나 또는 우리 눈에 보일 듯 말 듯 하는 티끌이나 모두가 다 진리로 충만해 있습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씀드리면 천지우주는 진리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천지우주는 진리로 충만해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 책이 따로 있고, 불교 책이 따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서로 옥신각신 싸울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인 도리를 바로 아는 석가나 예수나 그런 분들이 지금 계신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 분들 뜻은 똑같습니다. 성인들은 독스런 마음이 없어서 본래 갖추고 있는 진리를 그대로 깨닫고, 느끼고, 수용을 하는 것이지만 우리 중생들은 독스런 마음 때문에 가려서 본래 갖추어 있는 진리를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또는 수용을 못하고, 사용을 못합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른다고 할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행동을 좀 하고 싶다. 남 듣기 싫은 말도 않고, 꼭 바른 말만 하고 싶다. 또는 정당한 생각만 하고 싶다.’고 바란다 하더라도 자기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을 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우리가 선행적으로 먼저 진리가 무엇인가 윤곽만이라도 아셔야 합니다. 진리는 둘이 아닌 도리이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디에나, 언제나, 누구한테나, 무엇이나 간에 진리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도 우리의 독스런 마음 때문에 못보고 못느낀단 말입니다. 우주자체가 바로 진리인 것인데, 성인들은 확실히 깨달아서 알고 우리 중생들은 깨닫지 못해서 모른단 말입니다. 따라서 내 생명 자체도 본래가 진리인데,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자기 평생 동안 50년, 60년, 70년 산다하더라도 ‘자기 생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죽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배우기도 제법 많이 배운 그런 사람들이 ‘자기 생명이 무엇인가? 자기 고향이 무엇인가?’ 이런 것도 모르고 죽는다고 생각 할 때는 그와 같이 억울한 일이 없습니다.


 진리에 따라서 행동을 하는 것, 이것이 계율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10계명이나 불교의 5계나 10계나 근본정신은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다 똑같아서 행동도 바르게 하고, 우리의 마음도 바르게 하고, 우리의 뜻도 바르게 가져서 사고활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계율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계율은 다섯 가지 계율입니다. 그 다음에는 8가지 계율입니다. 그 다음에는 10가지 계율, 또는 출가한 여자승려가 지키는 348계가 있고, 또는 남자승려가 지키는 계율은 250가지 계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계율이 있으나, 통틀어서 말씀드리면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말 또는 바른 행동, 바른 생각 이런 것에 귀착이 됩니다. 그런 많은 계율 가운데서 오늘 받으시는 것은 10가지 계율입니다.


 오늘은 10가지 계율을 우리 인연 깊은 불자님들에게 산승이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해서 수계하기로 합니다. 48가지 계율도 있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250가지, 348가지 그런 계율이 있으나 모두가 다 10가지 계율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바른 생활을 함으로 해서 우리의 본래 면목, 우리의 본래 생명자리를 불교적으로 말하면 부처님 또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과 같은 자리로 우리가 가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꿈속에 있다고 할 때는 꿈속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남이 따로 있고, 또는 죽음과 삶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꿈을 깨달은 성자의 위치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따로 없고 동시에 죽음과 삶이 따로 없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리라 하는 것은 하나의 생명자리입니다. 간단한 도리입니다.


 둘이고, 셋이고 넷이고 복잡하면 외기가 어렵습니다만 하나이기 때문에 외기가 쉽습니다. 하나의 생명자리가 바로 진리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자리가 진리기 때문에, ‘나만 좋고, 너는 아무래도 좋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리가 못되는 것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다 행복을 추구해서, 또는 재수나 운수를 바라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더불어서 행하지 않으면 참다운 행복이나 참다운 재수는 없습니다. 진리와 더불어 않은 것은 그때 순간 찰나 일시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참다운 행복도 못되고, 참다운 재수도 못됩니다. 우리가 미개할 때는 근본적인 진리의 이해가 없어 그냥 복도 빌고, 운수도 빌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그렇게 소박하게 복을 빌고, 재수를 빌어서는 안된단 말입니다. 문화현상이 하도 복잡하고, 또는 재수도 운수도 모두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복잡하기 때문에 꼭 진리와 더불어서 구해야만 참다운 행복도 있고 참다운 재수가 있단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철학과 더불어서 우리가 복을 빌어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 그러면 절대로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중생과 우주의 근본 도리가 철학 아닙니까. 비록 학문적으로는 무식하다 하더라도 ‘인생과 우주의 근본도리인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로 참 철학을 아신 것입니다.


 현대불교인이나 현대기도교인이나, 현대유교인이나 꼭 행복을 구할 때는 철학과 더불어서 구해야 합니다. ‘유교가 안된다, 또는 불교는 안된다 또는 기독교는 안된다.’ 이렇게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또는 ‘불교만 잘되면 유교나 기독교가 못되도 무방하지 않은가.’ 이래서는 안됩니다.


 진리가 본래로 둘이 아닌데 다만, 진리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개성 따라서 또는 시대 상황 따라서 역사적인 그런 여건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지 절대로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차이가 없는 것을 ‘차이가 있다.’ 라고 보는 때는 어떻게 됩니까? 서로 미워하고, 서로 다투고, 서로 싸우고, 종교전쟁이 되고 맙니다. 이러면 차라리 그런 진리는 없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 종교는 없는 것만 못합니다.


 오늘날 종교는 꼭 그래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가 나아가는 식으로 불교를 믿어야 바로 믿는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종교 유교나 또는 도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진리는 똑같다는 말입니다. 어느 종교는 ‘아!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또는 ‘진리는 저 밖에 계신다. 밖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우리가 정성껏 믿으면 그때는 진리와 하나가 된다.’ 설사 하나님을 밖에 있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참다운 하나님은 안에나 밖에나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가 바로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소박한 그런 방편으로 ‘하나님은 저 밖에 있다.’ 이런 식으로 믿는다 하더라도 정말로 잘 믿어서 정말로 백번 믿어서 마음이 하나로 딱 통일되면 그때는 깨닫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본래로 하느님이요, 본래로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남 미워하는 마음 또는 탐욕심을 내는 마음과 같은 독스러운 마음만 없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본래 갖추고 있는 하나님이고, 부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서 우리 스스로 부처가 되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오늘 10가지 계율을 받습니다. 아까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몸으로 하는 행동, 우리말로 하는 언어생활, 우리 생각으로 하는 사고활동, 이런 것을 모두가 다 진리에 들어맞게 하는 것이 계율이란 말입니다.


 지금부터 열가지 계율을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해서 산승이 설하는 것입니다.


 제 1 불살생(不殺生)이라, 죽이지 말라.

  모든 계율 가운데 죽이지 말라 함이 가장 높고 가장 중한 계율입니다. ‘호생오사(好生惡死)’ 라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살기를 좋아 하고 죽기를 싫어합니다. 인간의 번뇌 가운데는 수 없는 번뇌가 있으나 가장 무서운 번뇌가 죽음의 공포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가장 무서운 번뇌 아니겠습니까? 자기도 죽기를 싫어하거든 다른 목숨도 다 죽기를 싫어합니다. 의식활동이 있는 우리 사람들은 다 죽기를 싫어합니다. 또한 말 못하는 개나 소나 돼지나 모두가 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합니다. 곤충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이 아닌 동물 하나라도 필요없이 죽게 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목숨을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목숨도 마땅히 아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은 존엄스러운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생명만 존중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생명은 함부로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깨달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따로 없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절대로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습니다. 파리 한 마리라도 깨달은 분상에서는 똑같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도리 그 분상까지는 못간다 하더라도 그 도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입니다. 잘못 보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나 석가나 그런 깨달은 분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나와 남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른 목숨을 해치면 반드시 상대방도 원망스럽게 생각해서 우리한테 보복을 합니다. 이번 생에 하는 경우도 있고, 이번 생에는 그렁저렁 과거전생에 좋은 일을 좀 많이 해서 충분히 극복할 수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번 나쁜 행동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도저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머리카락 끝에서 발 끝까지 ‘내가 나쁜 일을 했다.’ 하는 그런 흔적이 남는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한테 나쁜 행동을 받은 상대편에서 그것을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배격을 받습니다. 또는 살생을 많이 한, 다른 목숨을 죽인 사람들은 이번 생에 병치레를 많이 합니다. 인과(因果)라 하는 것은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섯만큼 남한테 베풀면 다섯만큼 우리도 베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하고, 또는 식물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함부로 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생명도 그만치 수명을 단축한단 말입니다.


 장수하는 사람들은 꼭 과거전생에 살생을 않고 다른 목숨을 도와주고 했단 말입니다. 단명한 사람은 다른 짐승을 많이 잡고, 또는 고기를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분명히 생명이 단축됩니다. 돼지나 소를 죽이는 것은 딴 사람이 죽이게 하고, 먹기는 자기가 먹고 말입니다. 이런 것도 살생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제 2 불투도(不偸盜)라, 훔치지 말라.     

  정당한 수입이 아닌 것을 갖는 것은 다 훔치는 것입니다. 설령 자기가 무슨 공장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큰 기업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노동자의 피땀을 착취한다거나 자기 몫 이상의 것을 자기 스스로 갖는다고 하는 것은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바늘 귀 하나 지푸라기 하나라도 갖는 것은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새 과식하는 것 말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하루에 얼마를 먹어야 하는데 그 이상으로 많이 먹는 것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쌀이 생산되고, 보리가 생산되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느 누군가가 노력과 피땀을 흘렸단 말입니다. 그런 것을 자기가 정도 이상으로 많이 소모를 시키며 먹는다고 생각할 때는 그도 착취나 똑같은 것입니다.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자기가 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노는 것도 훔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자기 정도에 맞추어서 응분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당나라 때 백장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일부작(一日不作)하면 일일불식(一日不食).’ ‘내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생활의 귀감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엄격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한 만큼 복을 받고, 우리가 베푼 만큼 혜택을 받는단 말입니다. ‘내가 한달에 봉급이 얼마니까 봉급 받은데로 다 쓰면 이런 것은 상관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잘못 쓰면 이것도 훔치는 것이나 똑같단 말입니다. 진리는 엄격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과거 전생에 그런 생활을 했다고 하면 이번 생에는 꼭 박복해집니다. 정당한 수입이 아니고, 또 많이 먹고 많이 쓰고 이런 사람들은 사업도 절대로 오래 못갑니다. 인과필연(因果必然)의 법칙입니다. 마땅히 훔치는 행위, 정당한 수입이 아닌 것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제 3 불사음(不邪淫)이라, 삿된 음란한 일을 하지 말라.

  우리 마음은 우리 중생심은 산만스럽습니다. 우리 중생심은 흐린 물같이 혼탁합니다. 어째서 혼탁한 것인가? 음욕심도 강하고, 다른 욕심도 있고, 자기 본래 면목을 바로 보지 못하고 혼동한단 말입니다. 성내고 욕심을 내고 음탕한 마음이 강하고 이런 마음들은 우리 마음을 혼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본래로 청정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질은 바로 하느님 마음, 바로 부처님 마음인데 우리가 욕심내고, 성내고 음탕한 마음을 내고 해서 마음이 혼탁해졌습니다.


 이번 생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인가?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그렁 저렁 욕심내고, 성내고 하다가 ‘내 생명이 무엇인가?, 내 고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모르고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절대로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 생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예수가 한 말, 성자가 한 말, 공자가 한 말과 같이 생활해서 내 생명의 본바탕을 알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음탕한 마음은 우리 마음을 굉장히 흐리게 만듭니다. 석가같이 또는 예수같이 또는 노자같이 평생 독신생활로는 못산다 하더라도 인연 따라서 자기 배필을 만났으면 서로 의지하고, 서로 충고해서 같이 더불어서 성불의 길로 가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것이거늘 그렇지 못하고 이 아내, 저 아내를 두고 이 남편, 저 남편을 둘 때는 이것은 천지우주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흐리게 하는 허물 가운데서 다른 욕심, 다른 성내는 마음 이런 것도 상당히 비중이 크지만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남녀 이성간의 지나친 탐욕심, 지나친 음탕한 마음 이것이 우리 마음을 가장 비중있게 혼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청정하고 맑고 맑아서 우리 마음이 한점도 흐림이 없어야 그래야 본래의 자기 마음, 부처 마음을 성취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꼭 ‘내 마음의 본 성품을 본다. 내 생명을 바로 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로 엄숙한 마음으로 금생의 한 배필한테만 충성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내 남편은 술만 먹고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내 아내는 잘난 사람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않는가.’ 인간은 본래로 부처입니다. 잘나나 못나나 얼굴이 좀 예쁘나, 덜 예쁘나 다 본래로 부처란 말입니다. 껍데기만 차이가 있습니다. 껍데기만 소나 개나 돼지나 사람이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 생명자체가 돼지나, 소가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본래로 부처기 때문에 좀 덜 예쁜 사람도 예쁜 사람과 똑같이 다 부처님 성품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외간이 할 일은 같이 더불어서 예수의 길, 석가의 길, 공자의 길을 가야 한단 말입니다. 삿된 음란한 일은 절대로 말아야 합니다.


제 4 거짓말을 하지 말라.

제 5 욕설을 하지 말라.

제 6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말라.

제 7 꾸며서 하는 말을 하지 말라.


  우리 마음을 흐리지 않고 절대로 정직하게 하고, 꾸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말도 신의가 있어야 만이 성불을 합니다. 우리는 욕설을 함부로 합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그만이 아닌가. 말이 무슨 흔적이 남을 것인가?’ 생각합니다만 말도 역시 흔적이 자기한테 남고, 남한테 남고, 우주의 진리에 남습니다. 한번 분노하면 그 마음먹을 때는 자기 가슴도 그만큼 혼탁하게 됩니다. 자기 몸과 마음의 조화를 해치는 것입니다. 동시에 듣는 사람도 역시 욕설을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또는 천지우주도 역시 그만큼 오염이 됩니다.


 에이즈 같은 그런 나쁜 병이 나오는 것도 우리 인간의 마음과 절대로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에이즈 걸린 사람 그 사람들의 음탕한 분위기의 나쁜 말들 이것은 그 나쁜 거짓말하고, 빈말하고 욕설하고 이간질하고 그런 나쁜 말들은 우주의 조화를 깨트린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그냥 저 핵무기나 그런 것만 우주 진리를 깨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말 한마디, 자기가 하는 자기 생각 하나, 이런 것도 역시 모두가 다 이것도 역시 자기 생명 자기 몸뚱아리의 조화를 깨트리고 동시에 자기 마음도 불행하게 만들고 또는 우주도 오염을 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거짓말, 욕설, 이간하는 말 등을 해서는 안됩니다.


제 8 탐욕심을 내지 말라.

 앞서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우주의 도리를 몰라서 탐욕심을 냅니다.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탐욕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정도 이상의 욕심을 내서는 안됩니다. 이웃사람이 굶으면 자기 것도 나누어 먹을 수 있어야 그래야 참다운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냥 아무렇게나 찾으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리라는 것은 엄숙한 것입니다. 진리에 배반하면 꼭 그 심판을 받습니다. 진리에 따르면 꼭 거기에 따른 응분의 보답을 받습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개벽 이후에 900번 이상이나 다른 나라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한국인은 무던히 선량한데, 이유 없이 일본이나 중국이나 그런 나라에서 침범을 해왔다고 생각하는가 모르겠지만 다 우리 스스로가 단결을 잘 못하고, 너무 게으르고 또는 그만큼 우리가 충실하게 잘 못살은 것입니다. 먼저 선행적으로 우리한테 원인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문제든지 간에 잘 못사는 것이나, 내 아들이나, 내 딸이 아픈 것이나 또는 자기가 아픈 것이나, 자기가 실패한 것이나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단 말입니다. 눈꼽만큼도 어김이 없습니다.


제 9 성내지 말라.

  우주의 진리를 알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성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남이 지금 성을 내는 것은 그 조건이 성내게 됐단 말입니다. 과거 전생까지 올라가 보면 지금 성내는 그 사람도 역시 업장으로 서로 걸려있습니다. 자기한테 해꼬지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올라가면 꼭 원인이 있어서 그와 같이 성내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단 말입니다.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다.’ 이런 도리를 모르면 불교인이 아닙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습니다. 누가 지금 저 밖에서 자기한테 돌멩이 하나를 던져서 자기가 맞고서 얼굴에 피가 나면 애매하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때는 절대로 자기가 이유 없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전생에 그만큼 업을 심었단 말입니다. 꼭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남편한테 구박받는 것이나, 아내한테 대접을 잘 못 받는 것이나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보고 고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행동을 고쳐야 한단 말입니다. 자기가 구박을 많이 했던지, 자기가 상대편을 존경을 안했던지, 자기가 인생의 도리 인생의 진리에 충실히 하지 않았던지 이런 것 저런 것이 원인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반성이 앞서야 합니다.


제 10 삿된 견해를 내지 말라.

  어리석은 마음이 삿된 견해 아닙니까? 어리석은 마음은 무슨 마음인가? 아까 제가 서두에 누누이 말씀드린 진리가 아닌 모든 것은 다 삿된 견해입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가 다 삿된 견해입니다.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나와 남이 원래 둘이 아닌 것을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 생각 자체가 삿된 견해란 말입니다. ‘나와 남을 따로 생각하고 나만 생각하고, 대상적으로 상대편을 무시한다.’ 이럴 때는 아무리 우리가 남하고 화합스럽게 지내고 싶고 전쟁도 안하고 싶고 하지만 진리를 따르지 않고서 기본적으로 나와 남을 갈라서 생각하게 하는 ‘나와 남이 둘이고 셋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에는 인간의 불화나, 또는 전쟁이나, 갈등이나 반목은 영구히 우리 역사에서 가실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공자가 나오고 예수가 나오고 석가가 나왔지만 지금도 피비린내 나게 그 처참하게 싸우는 것을 보십시오.

 ‘나는 전쟁은 싫어하는데, 우리는 백의민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좋아하는데….’ 입으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나와 남이 원래 하나라는 그런 기본적인 우주의 도리를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어차피 자기 때문에 남을 희생하고, 자기는 좋아하고 남한테는 박대한단 말입니다. 우리 어머님들이 특히 남편 생각, 아들 생각하시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 범부 처지에서 온전히는 무아(無我)라, 도인의 행은 못 취한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이나 예수님 말씀이나 공자말씀이나 진리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본래로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도리만은 아셔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현대의 종교인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뜻을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재수도 운수도 옵니다. 현대 재수와 운수와 이런 것은 진리와 더불어서 옵니다. 진리를 외면하고서 나만 생각하고, 남은 소홀히 생각하면 참다운 행복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이상 열가지 계율, 제 1 죽이지 말라. 제 2 훔치지 말라. 제 3 삿된 음란한 행위를 말라. 제 4 제 5 제 6 제 7 거짓, 욕설, 이간하는 말, 꾸며서 하는 말 이런 말들을 하지 말라. 제 8 탐욕심을 내지 말라. 제 9 성내는 마음을 내지 말라. 제 10 삿된 견해, 옹색한 마음을 내지 말라. 이러한 열 가지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오늘 인연 따라서 부처님의 청정 10계를 받는 우리 불자님들은 능히 지킬 수가 있는가? 대답해 주십시오.


(꼭 지키겠습니다. - 보살계 수계 대중)


 제 1 불살생, 죽이지 말라. 제 2 불투도, 훔치지 말라. 제 3 불사음, 자기 배필이외의 그러한 음란한 행위를 말라. 제 4 제 5 제 6 제 7 거짓말, 욕설, 이간하는 말, 꾸며서 하는 말을 하지 말라. 제 8 탐욕심을 내지말라. 제 9 성내지 말라. 제 10 삿된 견해,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말라. 이러한 부처님의 참된 계율을 금생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 능히 지킬수 있는가?


(예, 지키겠습니다. - 보살계 수계 대중)


 제 1 불살생, 죽이지 말라. 제 2 불투도, 훔치지 말라. 제 3 불사음, 자기 배필이외의 삿된 음란한 행위를 하지 말라. 제 4 제 5 제 6 제 7 거짓말, 욕설, 이간하는 말, 꾸며서 하는 말등을 하지 말라. 제 8 탐욕심을 내지말라. 제 9 성내지 말라. 제 10 삿된견해,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말라. 이러한 열가지 삼세제불이 신수봉행하고 무수한 중생들이 따른 해탈로 인도하는, 우리를 참다운 행복과 자유와 평화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청정계율을 금생뿐만이 아니라, 성불할 때까지 능히 지킬 수가 있는가?


(예, 지키겠습니다. - 보살계 수계 대중)


 오늘 산승이 수승한 부처님의 인연 따라서 부처님의 청정십계를 설해 마칩니다.


- 1992년 10월 4일 혜운사 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