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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24호 2007년 겨울

【 광륜 24호 2007년 겨울 】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동 안 거 결 제


오늘 같이 이렇게 음산한 날씨에는 저희같이 고희(古稀)를 지나 팔십이 가까운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를 깊게 느낍니다.


부처님 공부는 조금도 무리한 공부가 아닙니다. 본래대로의 공부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본래대로 있는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따르는 업을 짓고, 인생고의 여러 가지 재난을 스스로 지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들으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의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하라, 또는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하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깨닫는’ 그러한 가르침으로 육조단경의 중심 사상에 근거한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습니다만 참선(參禪)의 근본 가르침은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 왔지만 적어도 문자(文字)를 배제(背除)하고 오직 마음만 닦아야 한다는 그런 가르침은 달마스님 때부터 역설 강조되어 왔습니다.


달마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 ‘둘 이(二)’자, ‘들 입(入)’자, ‘넉 사(四)’자, ‘행할 행(行)’자, 먼저 이입(理入)이라는 것은  ‘다스릴 리(理)’자, ‘들 입(入)’자, 이치로 먼저 들어가고, 다음에 행입(行入)이라, ‘행할 행(行)’자, ‘들 입(入)’자, 우리가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해서 이른바 행동에 옮긴단 말입니다.


이치(理致)로 들어간다고 하는 말은 달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 동일진성(同一眞性)이라’ 일체 모든 중생이 다 한가지의 성품(性品)이란 말입니다.


중생 그러면 동물적인 유정중생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는 무정중생(無情衆生)이라, 동물이 아닌 식물같은 존재도 모두가 다 중생 가운데 포함됩니다. 또는 무색중생(無色衆生)이라, 모양은 없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관념이라든가, 우리의 사고, 이 모든 것도 역시 무색중생(無色衆生), ‘없을 무(無)’자, ‘빛 색(色)’자, 모양이 없는 중생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중생은 유정중생과 무정중생 또는 무색중생을 다 포함해서 중생이라 합니다.


우리 중생과 깨달은 분과의 차이는 중생은 현상적인 상만 보는 것이고, 깨달은 분은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보는 것입니다. 바다에 비유하면 바다 물결만 보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고, 깨달은 분들은 그 물 자체를 보고 그 성품을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현상계(現象界) 모두가 다 중생에 포섭됩니다.


‘중생(衆生)이 동일진성(同日眞性)이라’, 하나의 참다운 성품이란 말입니다. ‘참 진(眞)’자, ‘성품 성(性’)자, 진성(眞性)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법성(法性), 법신(法身), 불성(佛性), 불심(佛心) 또는 자성(自性), 본래면목(本來面目) 등 이러한 것이 모두가 다 참다운 성품(性品)에 해당합니다.


조사(祖師)스님들이 우리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그때그때 말씀하셨기 때문에 뜻은 똑같고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삼동결제동안 공부를 하는 것도 우리 범부중생(凡夫衆生)의 망념(妄念)을 떠나서 모든 생명의 본래 자리, 실상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근래 중국에서 1959년에 돌아가신 허운(虛雲) 대사란 분이 계셨습니다. ‘빌 허(虛)’자, ‘구름 운(雲)’자, 허운대사는 위대한 대선지식(大善知識)입니다. 허운대사는 120세까지 장수를 하셨습니다. 교학적으로도 공부를 많이 한 분인데 신심(信心)도 독실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보타산 법화암에서 오대산까지 갈 때 삼년배행(三年拜行)을 하셨습니다. ‘절 배(拜)’자, ‘행할 행(行)’자, 삼보일배(三步一拜)라, 세걸음을 걷고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한번씩 하는 것이 삼보일배(三步一拜) 행(行)입니다.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본래는 업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몸을 받아 나와서 욕계, 색계, 무색계를 윤회(輪回)하는 중생차원에서는 업장이 무거운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참회하는 분들은 삼보일배하는 배행이 참으로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중국 당나라나 수나라 때,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서 법을 구하는 스님들, 구법승(求法僧)을 알고 있습니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쓰신 우리 한국의 혜초(慧超)스님도 구법승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때 중국에서 인도까지 가려면 고비사막을 건너야 되고, 또 히말라야 산맥의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됩니다. 그 파미르고원은 고도가 평균 오천 미터입니다.


‘십진구퇴(十進九退)라’, 열 사람쯤 가면 보통 아홉 사람은 물러나거나 죽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법을 구했습니다. 어째서 그와 같이 힘들게 법을 구했는가 하면, 부처님 당시에 해놓으신 법문이라든가 그 뒤에 훌륭한 조사가 해놓은 법문들이 중국으로 한꺼번에 다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 경(經)이 먼저 들어오고, 저 경(經)이 나중에 들어 왔기 때문에 무슨 경(經)을 보면, 그 경(經)속에 여러 가지 다른 경(經)에 인용된 말씀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불경 속에 인용된 나머지 불경을 다 보기 위해서 인도에 가서 경을 다시 모셔 와야 했습니다. 가는데 꼬박 3년 걸리고, 또 인도 들어가서 말이 안 통한단 말입니다. 말을 배우고 또 애써 학문을 배우고, 물론 좌선도 하고 여러 가지 공부를 해야 되겠지요. 그것이 또 몇 년 세월 걸립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다시 오려고 해도 그냥 빈 걸음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불경(佛經)을 또 몇 십권 짊어지고 와야 됩니다. 오는데도 3,4년 걸리겠지요. 한번 갔다 오면 보통 20년 걸립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경전(經典)을 중국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옛 스님들은 이렇게 목숨을 걸고 한평생을 바쳐 소중한 부처님 말씀을 구해 왔는데 요즈음은 이미 인쇄된 부처님 경전도 게을러 잘 보지 않고 소홀히 여깁니다. 이렇게 게으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범부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안 되고 그렁저렁 살면 업(業)만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사람 몸 받은 것도 과거 전생에 사람 몸 받을 정도로 다섯 가지 계율(戒律) 정도는 닦았기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십선계(十善戒)를 닦았으면 천상에 태어났겠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천상이라 하면 천상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께서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셨겠지.’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이렇게 있듯이, 천상(天上)도 역시 허망무상한 것이지만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헤매는 영가(靈駕)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를 다른 데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참다운 법신(法身)부처가 없고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이 없습니다. 도(道)를 완벽하니 깨달으신 석가모니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달마 스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우리 불성이나 또는 개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천지우주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뿐입니다. 그러기에『화엄경(華嚴經)』에서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모두 다 차별이 없습니다. 성인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하시기 쉽습니다만 사실은 제일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처가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애쓰고 지금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왜 쉬운가 하면, 천지우주의 본래자리가,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면목을 따르는 것이 우리 건강으로 보나, 우리 마음으로 보나, 제일 편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參究)하고 염불(念佛)하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일체중생이 부처인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실 때에 꼭 주의해야 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증선(暗證禪)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울 암(暗)’자, ‘증명할 증(證)’자, 암증선(暗證禪)입니다. 우리가 우리 공부를 스스로 점검하지 못하고 어두운 가운데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데도 여러 가지 차서(次序)가 있는 것인데, 가령 『수능엄경(首楞嚴經)』을 본다 하더라도, 『수능엄경』에 보면, 참선할 때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가 하는 차서에 대한 법문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과거 전생에 많이 닦아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한마디에 깨달아 버리면 좋을텐데 보통 차원(普通次元)에서는 그렇게 안 됩니다. 역시 분분단단(分分段段) 으로 닦아서 올라가야 합니다.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것을 돈오(頓悟)한 다음에는, 암중모색할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올라가는 차서를 알아야 합니다.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되고, 또는 생활은 어떻게 해야 우리 공부가 빠를 것인가? 부처님 법대로 잘 따르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암중모색을 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어느 경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한계(限界)를 모르니까, 자기 공부가 상당히 되었다고 교만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문자선(文字禪)이라, 이것 저것 불경(佛經)을 많이 봐서, 능엄경(楞嚴經)도 보고, 법화경(法華經)도 보고, 구사론(俱舍論)도 보고 공부하는 차서에 따라서 올라가는 한계는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으로 해서 공부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닦아서 그 자리를 증명해야 참답게 아는 것인데, 그냥 이치로만 알고서 닦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불가(佛家)에서는 문자선(文字禪)이라, 또 구두선(口頭禪)이라 합니다. 입으로만 안단 말입니다. 문자선(文字禪)과 구두선(口頭禪)을 해서는 안됩니다.


또 한 가지는 야호선(野狐禪)이라, 야호는 들여우입니다. 여우란 놈이 꾀가 많고 거짓이 많지 않습니까. 여우는 다른 짐승도 속이고, 우리 사람도 속이는 간교한 꾀가 있습니다. 그처럼 어떠한 경계를 성취하지 못하고서도 성취했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이른바 야호선(野狐禪)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앞서 말씀과 같이 암중모색하는 암증선(暗證禪)을 경계해야 하고, 문자만 알고 입으로만 알고서 실지로 닦지 않는 구두선(口頭禪) · 문자선(文字禪)을 경계해야 하고,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거나 또는 수승(殊勝)한 경계를 체험하지 못하고서 체험했다고 하는 야호선(野狐禪)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꼭 이 3가지를 주의해서 공부하실 것이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존재가 본래로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확실히 안 다음에는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꼭 계율이 청정해야 됩니다.


마음 닦는 공부는 여러 가지 복합적(複合的)으로, 계행도 지켜야 되고, 지혜도 있어야 되고, 모든 선공덕(善功德)도 다 합해져야 이른바 공부가 이루어집니다. 음식만 함부로 먹어도 절대로 공부가 안됩니다. 또는 남녀 이성간(異性間)의 성적(性的)인 문제도 절대로 금해야 됩니다.

『수능엄경』에 보면, ‘부단음심(不斷淫心)이라’, 사람이 음심을 끊지 않으면, 남녀 이성간의 음탕한 마음을 끊지 않고서 선정에 들려고 한다면 ‘여증사작반(如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같다고 하였습니다.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육재일(음력 8, 14, 15, 23, 29, 30일)만이라도 출가(出家)한 셈 치고서 부처님 계율을 지켜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욕계(欲界)의 특징이 무엇인가? 욕계(欲界)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의 식욕(食慾)과 남녀 이성간의 음심(淫心)으로 인해 우리가 욕계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냥 욕망이 이끄는대로 문란하게 사는 것이 부부의 본질(本質)은 아닙니다. 금생에 부부가 된다는 것도 굉장히 소중한 인연 아니겠습니까? 과거 전생에도 부부도 되고, 형제도 되고, 그렇게 해서 금생에 부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의 본래 사명 자체가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꼭 성불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부부간도 식욕 문제나, 남녀이성 문제는 가급적이면 절제하고 도반으로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조주(趙州) 스님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조주 스님도 앞서 말씀드린 허운 대사와 똑같이 120세를 사신 분입니다.

대체로 장수하신 분들을 보면, 덕(德)이 많습니다. 물론 전생에 자기 업 따라서 금생에 수명(壽命)을 받기는 하지만, 대체로 덕이 많은 분이 오래 사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자기 혼자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덕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하루에 몇 번씩 공양을 먹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 벌어서 농사를 지어서, 길쌈을 해서 입고 먹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남의 덕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사실은 ‘남이 살려 주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절대로 분할(分割)이 안됩니다. 여기 몇 백명 불자님이 계십니다만 김씨라는 사람, 박씨라는 사람이 각각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으로 모두가 붙어 있습니다.


물이나, 공기나, 나무나 돌멩이나 모두가 우리 생명과 별도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원소 차원, 원자 차원에서는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생명은 근본 바탕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해치면 자기 자신한테 그 앙화(殃禍)가 옵니다. 그 보복이 옵니다. 다른 생명을 우리가 존중하면 그 공덕(功德)이 바로 자기한테 옵니다.


이 삼동결제(三冬結制)동안 스님네는 선방에서 오로지 좌선(坐禪)공부를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젊은 스님들도 많이 계시는데 마땅히 사회에 참여해서 사회봉사도 하고 해야 할 것인데, 젊은 사람들이 선방에서 참선만 하고, 자기 공부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선방(禪房)에 있으나, 자기 방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우리가 마음을 맑히는 공부를 하면 우리 생명 자체가 모두 다 같이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 혼자만의 공부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는 법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어느 것도 모두 본래 부처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큰 대도, 큰 가르침은 일정하게 꼭 어느 식만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화두를 참구하는 것도, 또는 염불을 하는 것도, 또는 주문을 외우는 것도, 모두가 본래의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안 여의고 한다면 다 옳은 공부입니다.


저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보십시오. 그 사람들의 분쟁은 기독교, 유태교, 이슬람교 세종교의 싸움입니다. 제가 지금 다른 종교를 비방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세종교의 근원을 본다면 셋이 똑같습니다. 똑같은 것인데 같은 것 가운데서도 꼭 자기 식으로 믿는 것만 옳고 자기 식으로 믿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철학적으로 근본주의(根本主義)라고 합니다. 또는 원리주의(原理主義)라고도 합니다. 우리 불교용어로는 법집(法執)이라 하겠습니다. 화두를 공부한 사람들은 ‘꼭 화두만 의심해야 성불 한다’  또 염불하는 사람들은 ‘꼭 염불만 해야 된다’ 이런 것도 결국 하나의 법집(法執)인 것입니다.


불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제일 쉽고 마음 편한 공부입니다. 나한테 부처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여래장(如來藏)이라, 여래(如來)라는 것은 바로 부처입니다. 여기서 ‘장(藏)’자는 ‘감출 장(藏)’자, 부처가 나한테 감춰져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란 것은 무엇인가? 부처란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만능의 자리란 말은 지혜나 행복이나 자비나 능력이나 모두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합니다. 여래장(如來藏)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확실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여래장이나 법성(法性)이나 법신(法身)이나 불성(佛性)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공부는 아무 것도 안 했어도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일체 존재가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 인연 따라서 화두를 의심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주문을 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서 재가불자님들도 꼭 철저한 계행을 지키고서 공부하시면 틀림없이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보실 것입니다.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불교 전문적인 술어로 말하면 ‘경안(輕安)이라’, ‘가벼울 경(輕)’자, ‘편안할 안(安)’자,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편안하다는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할 뿐만 아니라 가슴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한 것입니다. 자기 피가 청정해지니 다른 병이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수명도 길어집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면 만사가 형통입니다. 그렇게 바르게 사시기 바랍니다. 욕심처럼 우리한테 큰 해독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욕심을 못 떼어서 지금도 사람으로 왔고, 또 그대로 살면 내생(來生)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단을 내서 꼭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말씀은 우리를 최상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셔서 앞서 말씀과 같이 ‘법희선열’이라, 법을 따르는 기쁨이 한도 끝도 없는 그런 행복감이 우리한테 엄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 몇 십일 동안 공부를 해도 시간이 가는 줄을 모릅니다. 건강에도 좋고 집안에도 좋고 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2001년 성륜사 동안거 결제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