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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8호 2008년 여름 하안거 결제

【 광륜 8호 2008년 여름 】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하안거 결제


  오늘은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일입니다. 백화(百花)가 난만(爛漫)한 그야말로 계절의 왕이라 하는 찬란스러운 이때를 당해서 우리는 하안거(夏安居)라 하는 부처님의 법을 충실히 실천 봉행하는 안거정진(安居精進)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오늘 결제(結制)한 것은 잡다한 번뇌를 떠나서 오직 참다운 진리만 문제로 하는 공부를 하고자 해서 오늘 이와 같이 결제(結制)를 한 것입니다.


 일락서산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이라, 서산에 해가 떨어져야 달이 솟아 달빛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가 있듯이 해가 있는 채로는 달빛이 빛을 못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불성(本來佛性)자리는 과거에서 부터 지금까지 무시이래로 참다운 부처님 성품은 조금도 오염이 안된 것입니다만 잠시간 번뇌에 가리어서 참다운 불성(佛性)을 못본단 말입니다. 우리 번뇌는 사실은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 몰라서 내게 번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런 상대적인 문제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유한적인 문제를 떠나서 절대적인 우주의 본질(本質)자리 영원(永遠)의 자리를 문제로 하는 것이 참선(參禪)이란 말입니다.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만물과 더불어 한몸이 되는 그 자리. 만약 불성(佛性)이란 것이 내 불성(佛性), 네 불성(佛性)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적인 차원에서 자타 시비가 있는 것이지 불성(佛性)은 우주의 기(氣)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주의 기(氣)가 이쪽 기(氣) 저쪽 기(氣)가 따로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주의 기(氣)라는 것은 원융무애(圓融無碍)합니다. 우주에 가득찬 에너지라고 말하나 기(氣)라고 말하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말하나 같습니다. 다만 그 음율만 다를 뿐입니다. 우주의 정기(精氣) 또는 기(氣) ·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다 같은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를 문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깨달아야 비로서 생사(生死)를 초월하고 또는 인생고(人生苦)를 해탈하고 또는 사회에서 아귀다툼이 끝나는 것입니다.


 물질은 대체로 무엇인가? 인간은 어떠한 것인가? 이런 본질적인 것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평등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면 그 가운데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이른바 환희용약이라, 그냥 부처님 말씀 듣고서 머리끝이 하늘로 올라갈듯 감격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그 가운데서 상당수는 아라한도를 성취하고 또는 아라한도는 성취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이 어느 정도 법(法)의 깊이를 느낀단 말입니다. 그러나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애쓰고 사자후(獅子吼)를 토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다 범부(凡夫)라 하더라도 우리의 본 모습은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지금 자기가 눈이 하나가 없건 코 하나가 없건 상관이 없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다만 겉만 우리가 버릇을 잘못 들여서 잠시간 가려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현대를 사는 바른 불자(佛子)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설사 많은 시간을 허비해서 방편(方便)을 설한다 해도 참다운 불법의 진수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방편(方便)만으로는 인간의 참된 구제는 못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서 행복을 느껴야 인간의 참다운 구제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굶어서 그냥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불행을 느끼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불행을 안 느끼는 것인가. 그것은 조금도 자기한테 손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순교도 하고 또는 자기 몸을 범한테도 바치고, 자기 몸을 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조그마한 비둘기를 구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느껴서 환희심이 나고, 정말로 ‘내 본성(本性)이 불성(佛性)이구나. 꼭 내가 금생(今生)에는 이런 저런 인연에 걸려서 못된다 하더라도 내생(來生)에는 꼭 성불(成佛)해야겠구나. 내생(來生)에는 꼭 기왕이면 출가한 스님이 되어 이것 저것 다 털어버리고서 공부해야 하겠구나.’ 이렇게 마음먹겠지요.


 마음먹는다 하더라도 갑자기 그냥 순식간에 우리 번뇌를 녹일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今生)에 나와서 얼마나 못된 생각도 많이 하고 못된 습관을 들였는지 말입니다. 특히 물질만능이라, ‘산도 내도 사람 몸뚱아리도 다 물질이다’ 이렇게 배운 것에 젖어있단 말입니다. 이런 고정관념 때문에 우리가 참선(參禪)하려고 선방에 앉았다 하더라도 그냥 앉아있으면 머리가 뜨겁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그 자리만 가지고 석달 동안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나요 너요’ 또는 ‘좋다 궂다’, ‘오늘 낮에는 밥이, 반찬이 좋을 것인가?’하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공부를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 몸뚱아리에 대한 관념도 의식주는 최저로 하고 우리 정신생활, 남한테 봉사하고 바르게 생활하는 성불의 길을 최선으로 해야 참다운 수행자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불성(佛性)이 고향(故鄕)인데 고향(故鄕)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어차피 자기 고향(故鄕)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디 가고 빨리 가는 차이뿐입니다. 거기에 갈려면 자나깨나 고향(故鄕)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자기 의식주만 생각해서는 고향(故鄕)에 못간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이 고향(故鄕)을 생각하는 것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요 주문(呪文)인 것입니다. 이것에 가리고 저것에 가리어 있는 우리 마음을 근본(根本)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에다가 얽매어 놓는 작업 이것이 염불(念佛)이요, 이것이 주문(呪文), 이것이 화두(話頭)란 말입니다. 어떠한 화두(話頭)나 모두가 다 근본(根本) · 불성(佛性) ·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문제로 하고 있고 어떤 염불(念佛)이나 부처를 문제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문(呪文)이나 부처의 자리, 부처의 음율, 부처의 리듬을 문제로 한단 말입니다. 그 자리만 문제시 하고서 그 자리만 그냥 파고 들어가서 공부해야 마음의 후퇴가 없고 차근차근 본래자리가 나온단 말입니다. 버릇이 다 떨어지면 그때는 부처입니다. 버릇 떨어지면 우리 중생이 보는 모든 법이 다 꿈같고 허깨비 같단 말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다 꿈, 허깨비인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죽을 때야 비로서 알고 더 미련한 사람은 죽어서도 그냥 몰라서 그냥 귀신으로 남아서 자꾸만 헤맨단 말입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금생(今生)에 압니다.


 제법여몽환(諸法如夢幻)이라, 모두가 꿈같고 허깨비같단 말입니다. 제법개공지처(諸法皆空之處), 눈으로 보이는 모든 법이 다 빈자리의 공적영지(空寂靈知)라, 그 고요하고 맑고 청정하고 행복스럽고 말입니다. 또는 모든 지혜와 자비를 갖춘 그 자리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모든 법(法)은 다 꿈같고 허깨비같고 따라서 이런 법(法)의 빈자리는 다만 비어버리지 않고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 청정하고 아름답고 장엄스럽게 빛나고 그러면서도 자비와 지혜와 일체 행복을 다 갖춘 그 자리. 그 자리가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그대들의 본래면목이라, 이것이 도인들의 말씀입니다.


 그 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놓치지 않는 것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요 주문(呪文)이고 부처님 공부인 것입니다. 이 자리만을 문제로 하는 것이 방편을 떠난 진실의 공부란 말입니다. 화두(話頭)가 좋은 사람들은 화두(話頭)로 해서 이 자리를 놓치지 않고, 염불(念佛)이 좋은 사람들은 염불(念佛)로 이 자리를 놓치지 않고 또는 옴마니반메훔이나 또는 광명진언이나 천수 다라니같은 주문이 좋은 사람들은 주문(呪文)으로 이 자리를 놓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이 “자기 마음을 광명으로 하고 딴 것에 의지하지 말고 불법의 광명에 의지하고 딴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그런 마지막 『열반경』의 설법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공적영지(空寂靈知)인 동시에 일체공덕을 갖춘 그 자리 말입니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해서 허상은 없고 순수생명인 동시에 자비나 지혜가 모두 다 갖추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우리의 본마음인 것입니다. 그 자리가 우리 본심(本心)인 것입니다. 그 자리가 우리의 참 양심(良心)인 것입니다.


 ‘내가 양심적이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는 양심(良心)이 제법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 양심은 참된 양심(良心)이 못되는 것입니다. 불심(佛心)까지 되버려야 참된 양심(良心)이란 말입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는 그 자리 말입니다. 천지우주의 그런 일체공덕 장엄을 갖추어야 참다운 불심(佛心) 참다운 양심(良心)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심(佛心)만을 의지하고 자기 참 생명인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불심(佛心)만을 의지하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비록 부처님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가지나 이파리같은 방편지혜는 의지하지 말고 ‘실상지혜, 천지우주가 다 평등무차별한 진여불성이다’하는 그 본체 자리만을 의지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 자리는 천지에 주야도 없이 어느 때나 빛나고 어느 때나 행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꽃도 피고 새도 울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자리는 원만무결한 그런 행복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환희장불(歡喜莊佛)이라 또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그 자리가 하도 행복스럽기 때문에 환희롭단 말입니다. 환희는 그야말로 넘치는 그런 기쁨아닙니까.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환희에 넘치는 그런 광명의 부처란 말입니다. 또는 감로왕불(甘露王佛)이라, 그 맛이 한도 끝도 없이 좋으니까 제일 좋은 맛보고 감로수(甘露水)라 하지 않습니까. 참선하다 보면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자기 마음도 맑아지고 자기 몸도 맑아지면 그야말로 제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의 공부맛같이 좋은 맛은 없습니다.


 우리의 공부가 별로 깊이 안들어가도 그렇게 좋은 것인데 정말로 성불해서 감로왕불(甘露王佛),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거기까지 이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행복은 그야말로 넘치고 넘쳐서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까워질수록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우리 행복은 더욱 충만한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불심(佛心),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생명의 본질인 불심(佛心)만을 의지하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것이며 또는 부처님 법(法)도 방편지혜에 의지하지 말고 참다운 지혜, 영원히 존재하는 생사를 초월하는 그런 진여불성자리, 행복은 환희불 같은 그런 행복, 이런 자리를 우리가 지향해서 가는 것이 참된 불자(佛子)입니다.


 정말로 우리 마음을 방편지혜에 얽매이지 않고 또는 세간적인 탐욕심이라든가 또는 자기 몸뚱아리에 대해서 얽매이지 않고서 정말로 부처님 법만을 문제시할 때에 우리는 삼개월이 아니라 일주일만 계속되어도 꼭 깨닫고 만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하신 말씀입니다. 정말로 빈틈없이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우리 마음이 딱 그 생각으로 해서 지속된다고 생각할 때는 일주일만 되도 우리는 꼭 우리 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견성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해제때는 그렇게 공부하신 분들이 많이 나오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990. 5. 9. 태안사 하안거결제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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