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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 통권 제 10호 2008년 겨울

 

 

 

【 광륜 통권 제 10호 2008년 겨울 】



빛이 되는 큰스님 법어


생사대사와 지장기도


 

 제법 추운 날씨에 밖에 계시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세상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을 본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복잡다단한 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뭐라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문제,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대체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인가?’하는 삶의 정의 문제 또는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죽음 문제, ‘죽어서 가는 곳은 대체로 어떤 곳인가?’, ‘죽은 뒤엔 어떻게 되는 것인가?’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생사대사(生死大事)라, 석가모니가 나오신 것이나 또는 다른 도인이 나오신 것이나 모두가 다 생사대사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오셨단 말입니다. 오늘은 3년 지장기도 회향일입니다. ‘생사대사라 하는 인간의 큰 문제와 지장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사는 생활을 대체로 구분해보면 어두운 생활과 밝은 생활이 있습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사는 그 세계 역시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유명계(幽冥界)라, 그윽할 유(幽)자 어두울 명(冥)자 어두운 세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밝은 세계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계가 어떤 곳인가 하면 우리 중생이 자기 인생이나 또는 모든 존재의 참다운 본성을 모른단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모릅니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그런 원인을 모른단 말입니다. 원인을 모르고 산다고 생각할 때는 말도 바르게, 이치에 맞게, 도리에 맞게 못할 것이고 행동도 또 바른 행동이 나오기가 어렵겠죠. 그러한 자기 인생이나 또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근본 도리를 모르는 세계는 어두운 세계, 유명계입니다.

그에 반해서 밝은 세계는 한문 투로 말하면 광명세계(光明世界)가 되겠지요. 지장보살님은 어두운 세계를 구제하는 이른바 유명교주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지장보살님을 오늘 청해서 여기에 인연 깊은 영혼들뿐만이 아니라,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온 우주를 말하는 것인데 법계의 모든 유주무주(有住無住) 영혼들을 천도하는 법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그렇게 헤매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중생이 인간의 본래 생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자기를 모른단 말입니다. 참 자기라하는 본래면목을 조금 어려운 불교말로 하면 그때는 천진불(天眞佛)이라, 천진자성(天眞自性)이란 말을 씁니다. 영가 현각 스님이라, 그 분은 6조 혜능 스님한테서 법을 받은 위대한 법사입니다. 영가 현각 스님이 지은 증도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가운데서 ‘법신각료(法身覺了)하면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法身)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그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이라는 것은 없단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없다는 그 말이 굉장히 엄청난 말씀입니다.

자기 몸뚱아리가 분명히 있고 또는 산하대지에 산천초목이 있는 것인데 어째서 ‘물질이 없다.’하는 것인가. 물질은 분명히 있는데 잘 닦아서 본래면목을 훤히 아는 그런 깨달은 분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본래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법신각료 무일물이라’,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보면, 그때는 물질은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없는 그 자리가 그냥 없는 허망한 자리가 아니라, ‘본원자성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이라’, 모든 존재, 사람이나 일체 존재의 모든 그런 끄트머리의 본성품은 천진불(天眞佛)이라 조금도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란 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장보살님은 그러한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중생을 구제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자기의 본래면목을 못 깨달았으면 어두운 세계입니다. 다 대체로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갔다왔다하는 육도(六道)중에 저 밑은 지옥 아닙니까. 가장 컴컴한 세계, 가장 번뇌가 무거운 세계가 지옥 아닙니까. 좀 나아지면 그때는 아귀라, 아귀는 귀신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천도하는 그러한 존재들은 보통은 다 아귀계입니다. 어두운 세계에 있는 그런 중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어두운 세계, 아귀계라. 조금 덜 어두우면 축생계라. 그 다음에는 아수라세계, 아수라세계는 싸움을 좋아한단 말입니다. 지금같이 서로 분열하고 서로 투쟁하는 이런 때는 아수라세계가 굉장히 극성을 부린단 말입니다. 아수라세계의 그런 기운이 범람하니까 이와 같이 싸우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광명세계로 나아가면 그때는 인간세계라. 그 다음은 하늘세계, 하늘세계라는 것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에서 풀이하면 하늘이라는 뜻은 바로 광명이란 뜻입니다. 빛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중생의 번뇌가 좀 엷어져서 어둠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면 그때는 성문(聖聞)의 세계로 우주의 본성을 그때는 안단 말입니다. 알았지만 아직은 온전히 다 알지는 못했단 말입니다. 더 올라가면 연각(緣覺)세계, 더 올라가면 보살세계라. 가장 끄트머리 광명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이나 또는 부처님한테 의지하는 환경이나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는 그 자리가 부처란 말입니다.

이러한 광명 자체가 되어버리는 생명 자체의 본래면목자리,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진한 꾸밈도 없고 번뇌의 때가 조금도 안 묻은 그대로의 본래 세계가 부처님 세계란 말입니다. 부처님 세계는 바로 극락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러한 본래면목자리인, 본래 천진부처님자리인 그런 불성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는 어두운 세계가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성자가 되어서 훤히 알아버리면 사실은 지장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지장천도식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자체가 성자가 못되어 놓으면 아직은 어두운 세계에 있기 때문에 지장천도식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어두운 세계라 하더라도 우리 중생의 분상에서 중생이 잘 못보아서 어두운 것이고, 깨달은 부처님 분상에서 생각할 때는 어두운 세계도 사실은 어두움이 깔려있지가 않습니다.

지금 현재는 그렁저렁 살 때가 아닙니다. 상당히 복잡한 때라서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도 중중무애(重重無碍)라,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어두운 세계는 그냥 어둠만 깔려있어서 조금도 광명이 없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두운 세계에 주눅들어 가지고서 밝은 면목을, 밝은 지혜가 없는 것이니까 어둡게 보는 것이지, 비록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못되고 어두운 지옥이 있고 또는 아귀가 있고, 축생이 있고, 아수라가 있고 또는 그렁저렁 하는 인간이 있고 말입니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버릇되어가지고서 미처 광명세계를 몰라 그렇지 정말로 광명세계가 되어버리면 부처님 뿐입니다. 성자의 안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도 훤히 빛나고, 아귀도 훤히 빛나고, 축생세계도 훤히 빛나고,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세계도 싸우는 그대로 훤히 빛나 있고, 인간도 훤히 빛납니다. 그런 도리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사, 하나의 물이 기온이 낮아서 얼어가지고서 얼음이 된단 말입니다. 얼음이 되고, 기온이 높아져 녹아져서 물이 되고, 다시 열을 가해서 그때는 통통통 올라와서 수증기가 되고 말입니다. 다시 구름이 되어 올라가서 물방울이 되고, 이렇게 가지가지로 모양은 변한다 하더라도, 물이라 하는 산소와 수소가 합해서 되었다 하는 성분은 조금도 그때는 변질이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천지만유의 근본성품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는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만이 실상(實相)이고 실존이기 때문에 우주의 본바탕인, 실상인 천진부처님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지옥도 되고 또는 아귀도 되고, 축생도 되고 이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라는 천진부처라는 그 자리는 조금도 변질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수분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또는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수분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인생이나 우주의 본래면목인 부처자리, 부처님이라는 성품,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그때는 불성,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나쁜 버릇을 붙인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서 불성만이 있는 다시 말하자면 물질은 조금도 없이 광명만 존재하는 광명정토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다시 광명 그 자체에는 불성으로서 무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이것이 하나의 오랜 시간이 경과가 되면 그런 광명이 있는데서, 다시 그때는 우주가 형성이 됩니다. 형성이 되면 또 그 자리에서 중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생이 나오면, 그 중생들이 그냥 제한이 없이 나온다면 모르지만 제한을 받는단 말입니다. 제한을 받으면 우리는 제한을 받은지라 본래 불성자리를 그때는 제대로 못봅니다.

사람으로 생겨나버리면 그때는 사람으로 제한되어버리니까. 가장 시초야 그것이 그지없이 부처님이겠지만 이렇게 저렇게 순환과정에서 우주가 텅 빈 광명자리에서 성겁(成劫)이 되고, 형체가 이루어지고 또는 중생이 살고 그런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아서 각 중생이 여러 가지 차이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 놓으면 자기가 본래면목자리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데서 갖가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요 또는 아귀요, 축생이요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래서 그렇게 태어나서 한번 버릇되어 놓으면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또는 성자 같은 분들이 안나오시면 우리가 절대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간만치 좋은 곳에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다시 죽어지면 다시 또 인간으로 된단 말입니다. 또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우리가 본래 선근이 깊지 못해가지고서 나쁜 일을 많이 한단 말입니다. 아주 표독스럽단 말입니다. 표독스러우면 표독스러운 그런 업장에 묻혀서 그때는 지옥간단 말입니다. 딴 것에 비례해서 욕심을 많이 부린단 말입니다. 욕심이 지독하게 강해놓으면 그때는 다른 데로 못가고서 욕심이라는 그것에 구속당해서 아귀로 간단 말입니다. 또는 어리석어서 사리분별을 잘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 놓으면 또 사리분별을 못해놓은 그런 어리석은 사슬에 걸려서, 그것에 꽁꽁 묶여서 그때는 축생으로 간단 말입니다. 싸움 좋아하고 투쟁을 잘해 놓으면 그때는 거기에 구속당해서 아수라가 된단 말입니다.


사람이 된 것은 그래도 오계(五戒)라, 다섯가지 계율은 지켰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간의 늪에서, 어두운 세계에서 헤어나야 하겠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은 부처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가 못되면 그때는 천만년도 헤매는 것입니다. 천만년도 뱅뱅 쳇바퀴 돌듯이 헤맨단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런 자리에서 헤어나야 할 것인가.

헤어나기 위한, 즉 말하자면 위대한 도인 가운데서, 위대한 성령 가운데서 한 분이 지장보살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부처님이라 그러면 지장보살님도 계시지만 관세음보살 또 무슨 보살 그런 여러 가지 부처님이나 보살님들 이름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관세음보살님은 어떤 분이고 지장보살님은 어떠한 분인가?’ 우리는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들은 지장보살님을 외우면 좋은 분들은 ‘지장보살님 최고다.’ 이렇게 해서 관세음보살님을 몇 년 동안 하신 분한테도 ‘그것 말고 지장보살님 외우십시오.’ 이렇게 하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또는 인연이 관세음보살님과 깊은 분들은 관세음보살님으로 해서 가피(加被)도 입고 그런 분한테 지장보살님은 별것 아닙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외우십시오.’ 이렇게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불교가 참 하급한 종교가 되고 맙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 보살님 이름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우리 현대적인 불교인들은 마땅히 그런 면에서 회통이라, 이런 보살 저런 보살, 이런 부처님 저런 부처님 명호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통틀어서 회통하는 하나의 통일 원리로 해서 통일을 시켜버리는 그런 지혜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대상은 내내야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어째서 이렇게 저렇게 많이 부르는 것인가. ‘부처님이 따로따로 몸이 있어 가지고서 지장보살님 몸 또는 문수보살님 몸이 따로 있어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가?’ 이래저래 의심을 많이 품습니다. 상당히 불교를 공부한 분도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편견을 많이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오신 보람으로 모든 보살님, 부처님을 다 통틀어서 모아서 말입니다. 하나로 통일시키는 통일 원리만은 꼭 제대로 외우셔야 됩니다.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우주나 인생의 본래면목인 동시에 원융무애(圓融無碍)라,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러 가지로 살려고, 바른 생활을 하고 살려고 애씁니다만 바르게 못사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 실상을 모른단 말입니다. ‘잘생기고 못생기고 잘나고 못나고 남녀가 모두 있지 않은가. 마음이야 보이지도 않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는 무명(無明) 가운데 가장 못된 무명입니다. 이른바 인간관, ‘인간이 무엇인가?’ 이걸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이걸 모르니까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 우리 인생의 바른 의미를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간은 사실은 물질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이 꽁꽁 얼어서 얼음이 된다 하더라도 얼음 그 자체가 실상이 아니라 얼음의 그 실상은 역시 물이듯이 우리 인간도 우리가 번뇌 업장 따라서 이렇게 이런 몸뚱아리를 지녔다 하더라도 인간은 절대로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이것도 다 불성이란 말입니다. 머리카락에서부터서 발끝까지 모두가 불성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불성입니다.

인간의 몸뚱아리를 분석해 놓으면 내내야 미세한 하나의 원자란 말입니다. 원자 또는 가장 미세한 것은 텅텅 비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제일 미세한 원자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의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모든 존재, 산이나 냇이나 모든 존재를 다 분석한 가장 미세한 물질이 내내야 소립자나 원자 아닙니까. 그런 것은 텅텅 비어있는 물질이 아닌 무엇인가의 하나의 파동, 진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헌데 그러한 우리 중생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가. 우주의 순수한 생명 그것이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부처란 말입니다. 부처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불성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부처님의 불성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해가지고서 이렇게 저렇게 진동해서 원자가 되고 뭣도 되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뚱아리가 대체로 무엇인가. 우리 중생의 제한된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남자고 여자고 잘나고 못나고 밉다 하더라도 내내야 분석해 놓으면 그때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란 말입니다. 더 분석하면 그때는 원자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원자가 무엇인가 해서 다 분석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의 그야말로 참 광명만 되어버리고 말입니다. 가장 미세한 것은 그야말로 참 광파(光波)라 또는 광립자라 하나의 광명밖에 없단 말입니다. 광명 자체는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인들은 훤히 보는 것입니다. 성자는 번뇌를 녹여버리기 때문에, 번뇌가 없기 때문에 성자가 훤히 우주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견성(見性)이라, 볼 견(見)자 성품 성(性)자 말입니다. 불성을 봅니다. 불성을 보기 때문에 견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은 무엇인가. 불성은 물질이 아닌 시간이나 공간성이 없는 천지우주의 근본성품을 말합니다. 그런 불성을 본단 말입니다. 불성을 못보면 그때는 범부인 것이고, 불성을 보면 성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천지우주는 그와 같이 모두가 다 사실은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허두에서 몇 말씀하다 말았습니다만 ‘법신각료(法身覺了)하면 무일물(無一物)이라’, 법신은 우주의 본래모양, 본래실상이 법신인데 법신을 깨달아 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일물이라, 물질은 그때는 아무 것도 없단 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우리가 많이 씁니다. 많이 쓰나 어째서 모두가 마음뿐인가, 이렇게 깊이 생각을 잘 못한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정신뿐, 순수한 생명뿐입니다. 물질은 없단 말입니다. 다만 순수한 생명이 이렇게 저렇게 진동함으로 해서 상(相)이 보인단 말입니다. 상(相)이 보이니까 중생은 그 상(相)만 봅니다. 그 상(相)만. 법성(法性)을 못보고.

불교라는 것은 모두가 상(相)을 떠나서 본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두운 세계가 없단 말입니다. 그때는 유명세계, 어두운 세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성품은 불성이기 때문에 훤히 항시 빛나 있단 말입니다.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영원히 시공을 떠나서 시간 공간을 떠나서 빛나있는 그런 영생의 생명입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 자리는 조금도 변동 없는 또는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는 하나의 부처님 생명뿐이기 때문에 또는 그런 불성으로 부터서 일체의 것이 나오기 때문에 잘나고 못나고 무슨 그야말로 재주가 있고 없고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있는 기운입니다. 자비나 지혜나 모두가 다 불성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불성은 영원히 존재하고 또는 끝도 갓도 없고 말입니다. 또는 거기에 들어있는 성품 공덕은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한 말로, 한 개념으로 표현을 못합니다.

따라서 어두운 세계를 다스리는 그런 부처님 공덕으로 해서 표현할 때는 지장보살인 것이고 말입니다. 또는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할 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말입니다. 또는 지혜로운 면으로 말할 때는 문수보살이고 말입니다. 약이나 또는 그야말로 여러 가지 의술로 해서 중생을 다스리는 면에서는 약사여래고 말입니다. 한 번에 다 몰아서 말할 때는 이른바 총대명사라,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내내야 우주의 근본생명은 하나의 본생명인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서 통일을 딱 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가사 지장보살님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이나 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여기 촛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광명이 이렇게 있습니다만 이 촛불 빛이나 저 촛불 빛이나 서로 상충이 안됩니다. 촛불이, 이 방안에 이 법당 안에 몇 십 개가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촛불의 광명과 밝음에 대해서 다툼이 없단 말입니다. 같이 다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체가 되어서 그때는 하나의 밝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이 촛불 빛 저 촛불 빛 따로따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불꽃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와 마찬가지로 천지우주에는 천만번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외운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그때그때 따로따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부처님인데 그때그때 공덕 따라서 이름이 붙는 것이고 또는 부처님 지혜라는 것은 하늘의 별도 되고 또는 그야말로 태양도 되고 또는 달도 되고 말입니다. 또는 산천초목이 되고 인간이 되고 각 중생이 그 자리에서 나왔으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그런 신통 지혜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면 그냥 일시에 천개 만개 부처님 광명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부처님의 모양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융무애한 하나의 불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해결을 시켜놓고서 공부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는 유주무주의 영가들이여,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이시여.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수라나 인간이나 천상이나, 천상도 아직은 번뇌를 다 끊은 세계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세계만이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결국은 부처님 세계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요’ ‘일체중생 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은 다 본래생명이 부처거니 응당 마땅히 그때는 부처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게으름 부리고 나쁜 짓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종당에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고생고생하고 뱅뱅 돌다가 되겠지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우리 사회나 모두가 다 혼란스러운 것은 참다운 자기 본성품을 모르는데서 온단 말입니다. 본성품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본성품은 바로 밝은 것이고 또는 일체공덕을 갖춘 그런 것이 본성품이기 때문에 나쁜 말을 할 수 없고 나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런 어두운 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 광명세계로 갈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이 부처님의 법문인 즉 묘체가 되겠습니다.


어둡다는 것은 다른 것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의 본성품을 보는 그런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광명세계뿐인데, 다만 우리가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못본단 말입니다. 어두워서 못봅니다. 따라서 그런 어리석음은 벌써 어두운 것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그때는 내내야 ‘나’다 고집한단 말입니다. 어리석지 않고 바른 지혜로 본다고 할 때는 내가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몸뚱아리를 우리가 한계를 딱 세워서 내 몸뚱아리 내 몸이요 내 손이요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잘 못보니까 ‘나’라고 한계를 딱 세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어서 ‘나’라는 한계를 세운 다음에 나한테 좋게 하면 그때는 욕심을 낸단 말입니다. 이 몸뚱아리에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이 몸뚱아리에 보다 더 옷도 좋게 입고 싶단 말입니다. ‘나’라고 이미 딱 관념이 생겨버리면 그때는 나한테 대해서 좋게 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것이 욕심인 것이고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한테 해로운 것, 내 몸뚱아리에 대해서 욕을 한다거나 또는 그야말로 참 이렇게 저렇게 할 때에 진심(瞋心)이라, 싫증내는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벌써 이와 같이 어두운 생각입니다. 욕심을 내면 낸 만치 더욱더 어두워집니다. 또 싫다하는 성내는 마음이 깊어지면 더욱더 어두워집니다. 이런 것이 모이고 쌓이고 쌓여서 그때는 더 집착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옥이란 말입니다.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마음이 투영되어서 가장 컴컴한 세계가 지옥세계 아닙니까.

인간이란 그보다는 좀 나아서 오계(五戒)를 지켰기 때문에 인간으로 온 것입니다. 살생을 않고, 음란한 짓도 않고 말입니다. 거짓말도, 도둑질도 않고, 술 같은 것도 맑은 정신으로 덜 먹고 말입니다. 먹긴 하더라도 하여튼 조금 덜 먹습니다. 오계는 제법 지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우리가 그래도 인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인간이 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그 자리에서 참다운 밝은 등불이 없으면, 참다운 지혜가 없으면 그때는 다시 인간으로 되는 것이고 또는 잘 못살면 그때는 지옥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밝은 지혜란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너무나 그런 옹색한 생각으로 버릇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라는 관념을 버리기가 어렵지요. 무아(無我) 또는 뭐요 뭐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가 굉장히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분명히 내가 있는데 왜 내가 없는 것인가. 역시 그러한 것은 견성이라, 본래성품, 나나 너나 또는 모든 중생의 근본자리를 딱 봐버리면 그때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가 다 무아가 되겠지만 사실은 근본성품자리, 나의 근본도 불성이요, 너의 근본도 불성이요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불성뿐이다.’ 이렇게 딱 봐버린 뒤에는 분명히 무아가 되겠지요. 그러나 못본 사람들은 아무리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안보이니까 ‘무아’라 또는 ‘원래 소유가 없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해도 우리가 실감이 잘 안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안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진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저 밖에 있는 대밭에 차가 몇 대가 있다고 합시다. 그 차를 보호하는 사람은 ‘차가 있다.’고 한단 말입니다. ‘대밭 저쪽에는 차가 몇 대가 서 있습니다.’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 서가지고 차가 안보이는 사람은 없다고 하겠지요. 없다고 부인하겠지만 분명히 그 차를 자기 눈으로 보고 와서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가 안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께서나 각 도인들은 그런 인생과 우주의 본래성품을 훤히 보신 분이란 말입니다. 보신 분들의 말들을 우리가 안들을 수가 없습니다.


안들으면 어쩌는가. 사실은 그런 바른 도를 안들으면 그때는 고생이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인생고해(人生苦海)라, 생노병사의 고(苦) 또는 기타 가지가지 고생을 안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렁저렁 삼독심(三毒心)에 우리가 모여서 어리석기도 하고 또는 탐심도 부리고 또는 진심도 부려서 행복만 되면 그때는 우리가 부처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보다 더 깊은, 보다 심각한 인생의 그런 고통의 구렁으로 안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꼭 지켜야 한단 말입니다. 개인이나 사회나 가정이나 우리가 어두운 길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그 못된 지혜, 못된 어리석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불끈한 마음, 그런 마음을 우리가 떠나지 않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본생명도 부처요, 너의 본생명도 부처요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요, 본래로 부처요 또는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이요, 우리 중생이 바로 못봐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다.’ 이렇게 우리가 지혜로 해서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그야말로 참다운 화합이나 또는 참다운 행복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은혜를『화엄경』에 십종대은(十種大恩)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십종대은 가운데서 어떤 은혜가 나와 있느냐 하면 ‘은승창렬은(隱勝彰劣恩)’이라, 숨을 은(隱)자 수승할 승(勝)자 말입니다. 창렬이라, 나타날 창(彰)자 용렬할 렬(劣)자 말입니다. 좋은 점을 감추고서 나쁜 점을 보이는 은혜란 말입니다. 도둑놈이나 그런 나쁜 사람들은 겉의 상(相)은 비록 나쁘게 보인다 하더라도, 본래는 부처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에서는 김가라는 부처, 박가라는 부처, 부처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본은 똑같단 말입니다. 하나의 바닷물에서 천파만파 파도가 나온다 하더라도 똑같은 바닷물이듯이, 부처 가운데서 일체만유의 중생이 나온다 하더라도 같은 부처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눈앞에서 나쁜 짓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상(相)뿐인 것이지 본래가 나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원만한 모든 만덕을 갖춘 부처님이 잠시간 인연 따라서 상(相)으로 그와 같이 나쁘게 우리한테 보인단 말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무엇인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불교인 점은 인생과 우주의 본바탕을 안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불교란 말입니다. 불교의 참다운 신앙은 자기가 지금 안보인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천지우주의 모든 생명의 본바탕은 부처님이다. 모든 공덕을 갖춘 부처님이다.’ 이렇게 딱 믿는 것이 그것이 불교의 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에 믿음이 확실하면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 믿을 신(信)자 가득할 만(滿)자, 믿음만 확실하면 그때는 성불하는 것입니다. 참선도 않고 또는 딴 것도 않더라도 말입니다. 정말로 온전히 믿으면 그때는 성불한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거니 성불 못할 자격이 없습니다. 잘나고 못나고 지금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꿈을 깨면 그때는 다 같은 부처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버릇이 많기 때문에 금생에 길들여진 잘못 생각하고 잘못 행동하고 잘못 말한 버릇, 과거 전생에 우리가 붙인 버릇, 그런 버릇 때문에 그렇게 온전히 다 믿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통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을 훤히 보는 분이 아니고서는 항시 회의심에 가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불성이 있을 것인가. 정말로 불성이 빛날 것인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믿음을 자꾸만 더욱더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도 한번 부르고 두 번 부르고 그렇게 부르면 부르는 만치 그때는 우리 마음이 정화되어 온단 말입니다.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부처님 이름은 모두가 다 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모두가 다 우리 삼독심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두운 마음 또는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 본성만을 위해서 탐욕심을 부리는 그런 마음 또는 탐욕심을 미처 못 부릴 때는 기분이 상하면 그때는 진심을 내는 그 마음, 그런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이 자리에도 염주를 헤아리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다 한번 헤아리면 한번 헤아리는대로 업장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이 먼저 딱 믿고서는 화두를 드는 사람들은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염불하고 또는 주문을 외우는 사람들은 주문을 외우는 그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戒)도 지켰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하면 큰 공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 천진암 스님네가 3년 동안 지장보살을 모시듯이, 염불도 기도하려면 부단염불(不斷念佛)이라, 아니 불(不)자 끊을 단(斷)자 말입니다. 간단이 없이 해야 합니다.


유명교주 지장보살, 어두운 세계에서 헤매는 그런 영가들이시여, 축생 그런 돼지영가들 말입니다. 우리는 좋아서 고기를 먹습니다만 돼지고기에는 그 돼지라 하는 그 탐욕심이 그냥 거기에 들어있단 말입니다. 먹어 놓으면 그때는 우리도 역시 돼지가 우리한테 들어오니 좋을 턱이 있습니까. 소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 소고기를 적게 먹어 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말썽 많은 소를 수입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무튼 그와 같이 오늘 천도를 받는 모든 영가들, 사람이 낳을 때는 생유(生有)요, 사는 것은 본유(本有)요, 죽을 때는 사유(死有)요, 죽어서 가는 데는 중유(中有)라, 헤맨단 말입니다. 그 중유에는 헤매는,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아직 갈 곳을 못가고 헤매는 그런 영가들이여, 돼지영가들이여, 소영가들이여, 우주에 있는 모든 영가들이여, 바로 생각해서, 바로 생각한다고 할 때는 그대들의 본 모습도 역시 천진불(天眞佛)이거니, 부처님의 위없는 법문을 믿고서, 바로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온전히 믿음만 가지면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돼지영가, 소영가 그 자리에서 바로 그대들이 앉은 그 자리가 바로 훤히 빛나는 광명으로 빛나는 연꽃 연화대(蓮花臺)로 화하는 것입니다.


영가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을 돌이켜서 본래는 나와 남이 없고 천지우주가 천차만별로 삼천대천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원융무애한 부처님뿐이거니, 그 마음, 지장보살을 외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참다운 염불이라 하는 것은 그 자리를 안놓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무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그냥 저만치 부처님한테 우리가 기원 드려서 도를 찾는다. 그것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천지우주가 부처님이거니, 허나 우리 중생은 너무나 버릇이 많아놔서 그냥 잊어버린단 말입니다. 그 자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 사부대중이시여, 영가들이시여,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은 모두가 다 본래면목자리를 우리가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달마 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운문 스님의 똥 마른 막대기라. 소중한 부처님을 똥 마른 막대기라, 달마 스님께서 온 뜻은 우리한테 모두가 다 어두운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해치고서 성불하게 만들기 위해서 왔단 말입니다. 그런 성불하게 만드는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을 묻는데 똥 마른 막대기라, 이렇게 대답했단 말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나 모두가 다 바로 보면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원통스러운 것은 그와 같이 우리가 어두워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내는 마음 또는 성내는 마음 이런 마음이 컴컴하니까, 이런 것에  가리워서 못본단 말입니다. 우리 원수는 그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남한테만 탓을 합니다. 남한테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정치를 하는 분들은 제도도 바르게 하고 해야 하겠지만 기본적인 원수는 자기한테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본래면목 천지우주가 부처님인데 부처님을 바로 못보는 어리석은 마음 또는 어리석음을 더욱 깊게 하는 탐욕심, 더욱 깊게 하는 성내는 마음, 이것이 자기 원수입니다. 남을 탓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남을 탓 않고 자기한테 있는 어리석음, 탐욕심, 성내는 마음, 그 마음만을 우리가 정화시키고 나간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인간사는 그냥 즉시에 그야말로 참 광명정토, 영원히 화락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부대중 또는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시여.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지혜, 천진불(天眞佛), 내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나의 본래면목, 우주존재의 본래면목은천진불이라 했습니다. 마땅히 천진불이란 그 말을 꼭 외우셔야 합니다. 천진불이라, 우리 본래면목이 천진불입니다. 아무리 미운자라도 천진불입니다. 천진불임을 믿고서, 천진불이 못되게 하는 원수인 어리석은 마음 또는 탐욕심 또는 성내는 마음, 이 마음을 제거해서 영생의 공부에서, 염불도 그야말로 부단염불을 간단치 않고 하고 말입니다.


화두를 든다고 하더라도, 그지없이 염념불멸(念念不滅)해서 생각생각에 딴 생각이 못끼게시리, 그렇게 하염없이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이렇게 말씀하면 ‘아! 그대같은 스님들은 할 수가 있지만 우리 재가불자는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재가 불자님도 충분히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아내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들이나 또는 못된 놈이나 말입니다. 지금 먹는 음식이나 바로 보면 모두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아내를 봐도, 아들을 봐도 부처님 말입니다.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다시 인연 따라서 아내의 도리 남편의 도리 아버지의 도리들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근본 생각만은 ‘다 부처님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공부해서 꼭 금생에 성불 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지장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1989. 10. 17. 백양사 천진암 3년 지장기도 회향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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