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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광륜11호(2009년봄)

 

 

 

불교의 가치관


 절집법문은 2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상단법문(上壇法門)인데 상단법문은 격식에 맞게 법상을 차려놓고 법상에 올라가서 하는 법문입니다.

 그러한 상단법문이 있고 또 한 가지는 소참법문(小參法門)이라, 소참법문은 격식을 가리지 않고서 그때그때 하는 법문입니다.


 법문내용도 상단법문 때는 우리 일상생활적인 그런 것을 좀 떠나서 본체론적인 그런 문제를 주로 해서 하는 법문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장자를 텅텅 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그런 그야말로 참 이른바 불교말로 하면 격외선(格外禪)이라, 격 밖에의 그런 법문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소참법문 때는 그냥 우리가 자유스럽게 그때그때 일상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바른 생각인가’ 하는 이른바 ‘불교의 가치관 문제’, 이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른 행동을 하고 또는 바른 언어를 쓰고 바른 도덕적인 행위를 해야 하지만 먼저 그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바른 생각, 바른 가치관입니다. 우리 중생은 현상(現象)만 보는 것이지 실상(實相)은 못 봅니다.


 불교 내에서도 소승적인 가치관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이 허망무상해서 본질은 텅텅 비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공(空)이란 말입니다. 즉 우리 중생이 보는 모든 것이 허망무상해서 꿈 같고 그림자 같고 모두가 다 본바탕에서는 텅텅 비어있다 하는 그런 견해를 못 가지면 사실은 아직은 소승도 못 되는 셈이지요.


 대승은 소승을 초월해서 그야말로 참 우주의 실상을 바로 느끼고 깨닫는 가르침입니다. 대승적인 가르침이라야 비로소 ‘진여(眞如)ㆍ불성(佛性)’ 그런 말씀을 한단 말입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진여불성’ 같은 말을 미처 못 합니다.


 불성은 무엇인가. 일체 존재의 진리인 진여 이것은 그냥 보통 이론적인 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자체입니다.


 진리가 그냥 철학적인 원리나 논리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고 생각할 때는 불성이란 말을 못 씁니다. 진리란 바로 생명이란 말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이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가 좁게 생각할 때는 사람의 본성만 불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뿐 아니라 다른 동물도 역시 본 성품은 불성(佛性)이고 또는 식물이나 광물도 역시 불성이란 생명이란 말입니다.


 일체 존재의 근본은 불성이고 불성 그것은 바로 생명인데 그 가운데는 무한한 그런 공덕을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일체존재의 근본은 바로 불성이고 바로 진리고 그 가운데는 모든 가능성,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또는 일체 기능을 모두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이해해야 대승의 가르침을 올바로 아는 셈입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면 거기에서 거품도 생기고 여러 가지 높고 낮은 파도가 있겠지요. 그런 파도가 똑같이 차별이 없이 다 같은 물이듯이 진여불성이란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산이 되고, 하늘에 별이 되고, 달이 되고, 사람이 되고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변질이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양만 바꾸어져서 사람 같은 모양이 되고, 산 같은 모양이 되고, 해 같은 모양이 되고 했을 뿐이지, 진여불성이라는 그런 근본적인 요소는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불교의 바른 가치관이란 말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강도나 우리가 생각할 때는 강도 저런 사람들이 무슨 진여불성에서 왔을 것인가’ 또는 ‘설사 근본은 진여불성이라 하더라도 벌써 그런 나쁜 사람들은 악독한 마음 때문에 악독한 행위 때문에 진여불성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강도나 어느 누구나 모두가 다 진여불성이란 데는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잘 느끼지 못한 분들은 물리학적으로 생각을 해 보시면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몸은 산소나 수소나 그런 각 원소가 결합되어서 세포가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원자의 알맹이라도 모두가 에너지가 적당히 형상화 돼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 따지고 보면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는 에너지가 적당히 운동하고 진동하고 결합해서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체 물질은 결국 현대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에너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에너지의 본질이 무엇인지 현대물리학은 모릅니다. 일체존재의 근본이 되는 에너지의 본 성품은 바로 불성입니다.


 에너지보다 훨씬 더 순수한 근본적인 생명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 그것은 어떠한 데도 없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다 진여불성의 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으로 이루어졌단 말입니다. 성자가 돼서 번뇌가 다 소멸되면 그때는 진여불성이 훤히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의 안목에는 안 보입니다.


 바로 부처님도 우주를 통틀은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를 통틀은 하나의 생명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나 또는 부처님이라고 말하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다 바꿔서 말하면 ‘다 부처님뿐이다 또는 모두가 다 하나님뿐이다’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불교인도 ‘모두가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알아야 대승불법을 아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뿐이고 부처님뿐인데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박씨가 있고 김씨가 있고 또는 산이 있고 내(川)가 있고 우리는 그렇게 구분해서 봅니다만 본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부처님으로 해서 꽉 차있단 말입니다.


 또는 이렇게 형상화된 우리 몸도 번뇌에 가린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이렇게 보이고 저렇게 보이는 것이지 근본 진여불성, 부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다 부처로 보이고 다 하나님으로 보이는데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더 좋아할 것입니까.


 따라서 우리 불자님이나 또는 기독교인이나 지금은 그냥 소승적으로 자타시비해서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 또는 형상만 보고 따질 것이 아니라 근본 본질을 보고 믿을 때란 말입니다. 그렇게 돼야 진리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돼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른 가치관이 됩니다. 그래야 바른 철학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 수행법인 팔정도 가운데 불교의 일체 수행법이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팔정도 가운데 가장 허두가 무엇입니까. 정견(正見)이라, 바를 정(正)자 볼 견(見)자 바른 견해란 말입니다. 바른 견해는 바른 생각,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관입니다.

바른 견해는 어떤 것인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허망하다. 다 꿈같고 허망하다’ 이렇게만 보는 것이 소승적인 정견이고, 대승적인 정견은 방금 제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부처’란 말입니다.


밉게 보는 것은 우리가 번뇌에 가리어 있어서입니다. 특별히 누구만 좋게 보는 것도 역시 번뇌에 가리어 있어서입니다.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이라, 평등하게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을 줄줄 외운다 하더라도 미운사람 밉게 보이고 좋은 사람 좋게 보이면 공부는 아직 멀었습니다.


반야심경도 모르고 금강경도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구성 돼 있다.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대승적인 가치관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에 누구한테 듣기 싫은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미운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염불의 본뜻은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닌 것을 우리가 재확인한단’ 말입니다. 또 한 가지 뜻은 ‘내가 본래 부처인데 잘못 생각해서 지금 중생이 됐는데 내가 부처하고 안 떠나야 하겠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강한 의지로 부처님을 여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을 그대로 볼 수가 있겠습니까. 생명이 원래 나와 남이 둘이 없거나 자기만 집을 두 채나 세 채나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견(正見)이란 말입니다.

정견, 바른 견해를 가져야 정사유(正思惟)라, 생각도 바로 나오는 것이고 또는 정어(正語)라, 바를 정(正)자, 말씀 어(語)자 말도 바르게 나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복잡하고 각 주의사상, 여러 가지 그런 종교관이 다양하게 서로 얽혀 있는 때는 모두를 다 통틀어서 하나의 진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그런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걸 보고 불교 용어로 하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때릴 타(打)자 이룰 성(成)자 한 일(一)자 조각 편(片)자 말입니다. 모두를 갖다가 부수어서 하나로 딱 만들어 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통일원리란 말입니다. 우주를 하나의 진리로 통일을 시켜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돼야 마음의 불안이 가시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분이 불안한 마음이 있으면 그때는 바로 믿고 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바른 생활보고 우리는 정명(正命)이라, 우리 몸으로 하는 바른 행동은 정업(正業)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돼야 그때는 바른 정진(精進)이라, 정정진(正精進)이란 말입니다.

정념(正念)이라, 그런 바른 생각을 보다 더 깊이깊이 사무치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정정(正定)이라, 바른 삼매로 마음이 하나로 딱 모아진단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인연 따라서 각 원소가 잠시간 합해져서 세포를 이루어서 우리 몸이 되었습니다. 인연 따라서 각 원소가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들이 잠시간 결합되고 저렇게 운동하고 해서 세포로 해서 이 몸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 몸뚱아리가 일초 전과 일초 후에 같습니까. 어느 순간도 이 몸뚱이가 같을 때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내 몸뚱아리 내 것이고 가장 소중하다.’, 불교말로 하면 이 몸뚱아리를 보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한테 좋게 하면 탐심(貪心)이 되는 것이고 나한테 싫게 하면 그때는 진심(瞋心)이 된단 말입니다.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그런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면 마음은 더욱 더 어두워집니다.


성자의 길은 훤히 트인 광명으로 가는 것이고 우리 중생은 모두가 지금 어둠으로 가는 것입니다. 왜 어둠으로 가는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바 유병(有病)이라. 허망 무상한 것을 실지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속물근성을 떠나는 것입니다. 어렵더라도 단호하게 예수가 간 길, 공자가 간 길, 석가가 간 길을 우리가 더듬어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자기의 참다운 생명이 비춰오는 것이고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우리 본래성품이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까지 우리가 가야 비로소 참다운 안심입명이 있습니다. 내 생명의 본바탕인 불성까지 못 간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우리는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우고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무엇인가’ 이것은 ‘진여불성의 대명사’입니다.


‘하나님의 대명사, 진여불성의 대명사’, 이것이 ‘나무아미타불이고 관세음보살’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냥 이름만 불러도 명호불사의(名號不思議)라. 그 진여불성이라는 그 생명을 바로 표현한 이름이기 때문에 가령 우리가 김아무개 박아무개라고 부르면 그분들 이미지가 떠오르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만 불러도 그때는 우리가 진여불성자리의 힘이 우리한테 솟아오른단 말입니다. ‘아! 나무아미타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생명의 본바탕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 오는 기운이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의 본뜻은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닌 것을 우리가 재확인한단’말입니다. 또 한 가지 뜻은 ‘내가 본래 부처인데 잘못 생각해서 지금 중생이 됐는데 내가 부처하고 안 떠나야 하겠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강한 의지로 부처님을 여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흔히 생각할 때 ‘참선은 상근기인 사람들이 하고 염불은 하근기인 사람들이나 하는 수행이다’는 편견을 갖기 쉽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염불은 ‘부처가 10만억 국토 밖에 있다가 우리가 애쓰고 기도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준다.’ 이렇게 타력적으로 믿는 염불은 참다운 염불이 못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염불인 것이고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그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본질을 안 떠나야 참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뭣고’란 화두를 하고 또는 ‘무(無)’자란 화두를 참구해도 본바탕을 떠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못됩니다. 비록 우리가 이름은 하나님이라고 외우건, 뭐라고 외우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우리 마음이 천지 우주의 본바탕을 떠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이런 도리만은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마음자리가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생명의 근본자리에 입각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것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알으시고 또 한 가지 꼭 명심해 둘 것은 우리 스님네 가운데도 더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장보살이 따로 있고 또는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고 이와 같이 따로따로 뿔뿔이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보살이름도 하도 많고 또는 부처님 이름도 그렇게 많은 것인데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불교가 다신교가 돼서 그때는 참다운 불법이 못됩니다.


따라서 이것도 역시 오류가 없도록 잘 외워두셔야 할 것은 부처님이 따로따로 뿔뿔이 계시지 않단 말입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진리인데 어디가 부처님이 따로따로 뿔뿔이 있겠습니까.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 부처님이 이분 따로 있고 저분 따로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불법을 바로 아는 것이 못됩니다. 다만 진여불성자리는 일체공덕을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자비도 원만하고 지혜도 원만하고 또는 행복도 원만하게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거기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비도 많아지고 지혜도 밝아지고 한단 말입니다.


우주의 진리인 진여불성을 자비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관세음보살이고 또는 지혜로운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문수보살이고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을 저 극락세계나 천상으로 인도하는 그런 쪽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이고 또는 한 번에 다 몰아서 이른바 총대명사는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인연 닿은 대로 지장보살을 외우나 또는 관세음보살을 외우나 상관이 없습니다만 지장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다른 보살하고 차이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외운다고 생각할 때는 지장보살의 뜻을 참다웁게 모르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관세음보살 외운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이렇게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생명의 본바탕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있습니다.


부처님을 한번 외우면 외운만치 우리의 피는 그냥 맑아옵니다. 나와 남을 구분해서 다른 사람 미워할 때 한번 미워하면 미워한 만치 우리 피는 그냥 오염돼 옵니다. 욕심을 내면 욕심을 내는 순간 거기에 상응되게 그냥 반사적으로 우리 피도 오염돼 옵니다.


무엇보다도 바른 생각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바른 생각과 우리 건강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부처님 되는 길은 가장 행복스러운 길이고 또는 금생에 못 되면 몇 만생 뒤에라도 꼭 부처가 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안 되면 결국은 사람으로 또는 돼지로 몇 천 번 윤회하게 됩니다. 부처가 돼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은 우리 행복과 상응된 정비례의 길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견해인 ‘천지우주가 부처뿐이다. 부처는 무한한 행복이나 지혜나 자비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믿으면서 지금 하시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도는 화두를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그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충만해 있는 그런 부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