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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3. 광륜

통권 제12호 2009년 여름


통권 제12호 2009년 여름

 

 

 


영 가 천 도 법 어


부처님 말씀 중에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귀중한 금언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나 또는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나 영겁회귀라 하는 소중한 금언을 잘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어느 것도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두가 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무상해서 종단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종단에는 단 하나의 자리로 다 돌아갑니다.


그 하나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나의 자리가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자리입니다. 그럼 대총상 법문이란 것은 무엇인가? 대총상법문이란 것은 바로 우리의 자성(自性), 우리 인간의 본성이자 우주의 본성자리가 대총상법문자리입니다. 마명(馬鳴)대사의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진여(心眞如)’라 마음 심(心)자,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심진여 시대총상법문체(心眞如 是大總相法門體)’하라. 우리 마음 바탕인 진여(진여), 이것이 바로 모든 만법의 기본적인 본체라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법(法)을 말할 때 어떤 때는 그때그때 법의 줄거리를 그냥 잊어버리고서 법의 상대유한적인 상(相)을 많이 말씀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더욱 혼란스럽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꼭 본체를 안 여읜다는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법을 말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너무 적으면 장사도 잘못하고 공부도 암중모색하는 그런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현대는 아시는 바와 같이 정보의 홍수시대 아닙니까. 정보의 홍수시대에는 우리가 정보를 적당히 처리를 못 하면 우리 마음이 항시 산란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스트레스를 도저히 해소 시킬 길이 없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서구적으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200년 동안이나 산업화시대가 계속 되어서 물질생활은 상당히 편리하고 풍요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보의 홍수라 하는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이 이루어져있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도 정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정보를 적당히 소통시키고 정화시키는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부처님 법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 할 때는 이 우주에 홍수같이 밀려 내려오는 그런 정보를 정화시킬 수가 없다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간적인 가르침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대유한적인 복잡한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상(상)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본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는 이것이 아까 제가 허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총상법문입니다. 이른바 진여의 불성이 바로 본체라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亶經)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소설법 불리자성(我所說法 不離自性)’ 내가 지금 설한 법문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리자성이라. 아니 불(不)자 떠날 리(離)자, 스스로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을 떠난 것은 상대적이란 말입니다. 상대적인 말이란 것은 우리를 더욱 좁게 만듭니다.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자성’이란 것은 대체 어떤 것인가? 우리가 자성에 대해서 특히 명심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성이란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육조혜능스님께서는 『육조단경』에서 자성이라는 말씀을 백번도 더 했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자성’이라는 말씀을 더러 들으십니다. ‘자성’ 이라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란 말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물도 모두가 본래 성품자리는 자성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나 똑 같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無明) 가운데 무명의 그 중요한 근원이 무엇인가? 우리 중생이 무지하기 때문에 사물의 본래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을 자꾸 분할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일원적인 진리인데 우리 중생은 일원적인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둘로 나누어서 보고 셋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와 같이 구분하고 분할한단 말입니다. 제가 허두에 영겁회귀라는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본래로 자성이라 하는 청정미묘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데로 가지 않고서 바로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자성에서 왔다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현대 기계문명이라든가 그런 상대적인 가르침과 우리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는 그 모든 존재를 하나의 진리로 보는 그런 원만 무결한 가르침이 부처님가르침이고, 이렇게 저렇게 구분해서 보는 가르침은 과학이라든가 다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인간존재가 미처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나 자성은 본래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예지(睿智)가 발동을 합니다. 예(睿)란 슬기로울 예(睿)자, 지혜 지(智)자 예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한테나 미처 계발은 못되었다 하더라도 예지는 항시 조금도 흠결이 없이 갖추어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 같은 분도 부처님 가르침 같이 원대한 말씀을 못했다 하더라도 좋은 말씀은 많이 했습니다. 복음 성서에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뭐든 그대에게 갖추어지리라” 이런 것도 우리 불교에서 “자성을 깨달으면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가 된다”는 말씀이나 흡사한 말씀입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같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대인 관계에서 사람을 사귄다 하더라도 ‘사람과 화해하는 것이 우주에 맞고 불교에 맞는 바른 도리가 아닌가’ 생각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과 ‘우리가 본래로 저 사람이나 나나 모두가 다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하고서 이웃과 사귀는 것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주위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 한 이웃이 있다고 합시다. 이웃을 볼 때에  마음이 내키지 않으니까 그냥 보통 생각에서는 아무리 친하게 사귀려고 해도 사귀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말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논리적으로 ‘저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나와 똑 같은 진여불성을, 그 본래 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다 뿌리가 똑같단 말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똑같다’고 생각 할 때는 저 사람한테 함부로 하면 생명의 뿌리가 똑같기 때문에 나한테도 그냥 해가 온다 말입니다. 그 반대로 저 사람한테 우리가 용납을 하고 관대하다고 생각할 때는 나한테도 그냥 그대로 복덕이 돌아옵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 하면 달마스님께서 ‘문자를 배격하고서 오직 마음만 깨닫는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통 가르침을 받드신 조사님들은 절대로 하나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든 법이 원래로 다 본래로 원융무애하고 또는 한결같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 진여불성을 떠나지 않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도 여러 가지 법문이 많이 있으나 보통 『소실육문(少室六門)』에서 여섯 문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어요. 그런 가운데도 후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고증을 받아가지고서『소실육문』 가운데서 두 가지는 달마스님이 했으나 네 가지는 달마스님 법이 아니다. 이렇게도 말씀한 분이 있습니다. 근데 꼭 달마스님의 두 가지 법문 가운데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안심법문(安心法問)이라,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을 때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종교를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란 것은 우리 마음을 평온히 하고 모든 사람사람끼리 서로 화해하고 더불어서 영원한 자성청정한 진리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것이 부처님가르침인데, 부처님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마음이 편안한 안심법문이 중요한가.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흔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이 느끼고 명심해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은 많지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정말로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을 논할 수가 없고 우리 마음밖에 부처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본래 부처입니다. 나같이 별스럽지 않은 그런 마음이 어떻게 부처라고 할 것인가.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범부중생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마음이 아닙니다.『육조단경』에서도 또 말씀했습니다만, 우리 마음 바로 이것이 우리 자성인데 우리 자성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가 법신불(法身佛)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에 포함되어 있는 본래로 포함되어있는 모든 불성, 지혜, 공덕이 원만보신노사나불입니다.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모양을 나투고 또는 변화하는 그러한 차원에서는 천백억화신불입니다. 즉 우리 마음 가운데에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 삼신(三身)이 원만히 들어있습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우리가 생각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우주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우주 생명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법신이 온전히 다 갖추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그 가운데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생명과 또는 다시없는 행복스러운 극락의 행복과 또는 신통자재하는 대아(大我)라 이른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출 수가 있고 만덕을 갖춘 것이 우리 마음과 관계되어 있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의 본체는 번뇌가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래 청정이란 말입니다. ‘때가 끼었다 때가 안 끼었다’ 그런 것은 우리 중생이 봐서 그런 것이지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어놔서 사실은 때가 낄래야 낄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을 많이 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만한 그런 죄를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사실은 오염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잘못 생각해서 스스로 자승자박이라, 스스로 자기 어리석음에 묶여서 분노가 되고 내가 나쁜 놈이다 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성,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금생에 잘못 살아서 한도 끝도 없이 오랫동안 지옥 고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청정한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부처님의 청정법신이 그대로 우리 마음의 본성품이라 그 자리는 지혜, 행복, 자비, 능력이 다 들어있습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분은 대천재라 불리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 될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조금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슈바이처 같은 분은 아프리카 밀림의 성자이지 않습니까. 의사인 동시에 철학자요, 신학자요, 대음악가라고 합니다. 그런 천제는 잘나고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렇게 비교해 볼 때는 한심스럽겠지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슈바이처나 또는 성인이라고 하는 간디나 우리나 마음자리는 똑 같습니다. 조금도 흠집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마음자리나 예수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마음의 본바탕은 똑 같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할 일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영겁회귀(永劫回歸)라,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가 되어 버리면 또 어떨 것인가? 불교의 우주관에서는  중생의 공업력(功業力) 따라서 텅텅 빈 그런 공겁(空劫)으로 부터서 다시 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성겁(成劫)이라, 성겁이 되면 그때는 여러 가지 동물이나 식물이나 존재가 의지해 산다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겁(住劫)이라, 그럼 차근차근 찌꺼기가 생깁니다. 물질이란 것은 오랫동안 되다보면 불가역에너지라 이른바 다시 활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화한단 말입니다. 그 에너지 찌꺼기가 자꾸만 쌓이면 나중에는 그것이 산화 되어서 불이 난다 말입니다.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 파괴가 됩니다. 파괴가 된 뒤에 물질은 허공무물(虛空無物)이라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 하더라도 중생의 심식(心識)은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그 무색계 중생이 텅텅 빈 공겁세계에서 아직은 중생이니까 ‘좋다 싫다’하는 그런 마음이 있겠지요.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에너지가 상호작용 되어 가지고서 다시 우주를 형성합니다. 그럼 다시 텅텅 빈 공겁에서 우주가 성겁이 되고 그럼 또 중생이 살고 또 다시 파괴되고 텅텅 빈 우주가 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도 역시 영겁회귀합니다. 우주 존재가 바로 텅텅 비어버린 다음 다시 이루어지고 다시 모든 존재가 살고 또 파괴되고 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본래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어가는 하나의 나그네 길에 있습니다.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정보의 홍수 가운데서 부처님 가르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를 모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른다고 생각 할 때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것저것 알기는 많이 알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인간이 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다행히 부처님가르침을 알기에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이 모든 것이 다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다 환상이나 같단 말입니다. 있다는 것이 사실은 있지가 않은 거란 말입니다.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있지 않은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법공 도리를 몇 십 번, 몇 백번 들으셨겠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개공도 물질이라는 것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도 변하지 않고서 변화무상한 즉, 다시 어려운 말로하면 공간성, 시간성이 없다 말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공간성이 있고 시간성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인연생의 법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은 시간성, 공간성이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오늘 천도 받는 영가들이여! ‘생본무생(生本無生)’이라 우리가 태어났다 하더라도 본래는 태어남도 없습니다. 불생불멸한데, 본래로 우리 생명의 본바탕인 것이기 때문에 거품 같은 모양으로 해서 이런 사대색신(四大色身)이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이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이 육신(肉身)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다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자체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불생불멸하는 생명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조금도 영멸없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체를 인격화 시킬 때 나무아미타불이요, 약사여래불이요, 관세음보살인 것입니다. 불생불멸한 영원한 생명이니까 무생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이란 것도 여러분들께서 대체로 아시지 않습니까.

 아미타불이란 것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이라, 영원한 생명이란 그런 뜻입니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아미타불에 갖추어져 있는 모든 공덕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다는 말입니다. 또 광명무량(光明無量)이라, 진리의 광명이란 것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이거니 내 생명의 본 고향자리가 바로 법신불이요, 바로 영원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바로 우주생명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생명이니까 훨씬 크고 내 마음자리는 아주 왜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질 같으면 비교가 되겠지만 물질이 아닌 순수생명은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다 들어가고 모두가 다 연결 되어있어 다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오늘 천도를 받은 영가들은 참 그야말로 복덕이 많습니다. 해인사주지스님은 아주 덕과 지체가 높으신 스님이시고 염불도 아주 잘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시 않습니까. 아침에 와서 보니까 주지스님 염불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저도 그냥 환희심이 났습니다. 영가들도 춤을 추면서 극락세계에 가게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니까 ‘영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존재가 허망무상하지만 이와 같이 존재의 뜻이, 영혼이 우리중생의 제한된 육안(肉眼)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안(天眼)이라든가 불안(佛眼)이라든가 법안(法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인간모양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인데 그 생명이 갈 곳을 잘 모르면 이른바 중음(中陰)에서 오랫동안 헤매는 것이고 갈 곳을 안다고 생각 할 때는 그냥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흔연히 올라가는 것입니다. 극락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지는 사람들은 ‘우리 중생들한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권유하는 권선징악의 방편이지 극락이 어디 있을 것인가? 천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천상도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우리 인간도 본래에서 본다고 생각하면 다 무상이라, 꿈같은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그대로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도 천상세계도 다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란 것은 생명자체가 본래의 생명에 안주하는 자기 고향에 돌아가는 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분들은 다 광명의 몸입니다.

‘극락이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을 근원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은『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열심히 보시면 부처님께서 어떻게 극락세계를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이 생길 줄로 믿습니다.


극락은 분명히 우리생명의 본고향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의 자리에 돌아가는 그러한 성자의 영혼이 안주 하는 곳이 극락입니다. 이른바 영생의 고향이나 똑 같습니다. 우리가 극락에서 쉬다가 다시 중생세계로 돌아온다고 할 적에 중생들이 불쌍해서 그 자리에서 원력을 세워서 중생계로 태어나기도 하고 천상에 내려오기도 하고 지옥도 가고 그런 것입니다. 진여불성이 되어 온갖 인간고뇌가 없고 오직 행복으로 존재하는 그런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감회에 불과한 그런 허무의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고 우주를 몸으로 한, 그런 자리는 물질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순수생명 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오늘 인연 따라서 모이신 모든 불자들이여! 저 밖에 계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처님법이 얼마나 수승하면 아직도 서늘한 날씨인데 추운 곳에 앉아 계신다고 생각할 때 송구스럽고 한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 부처님 법은 대총상법문이라, 모든 법을 다 포섭해있습니다. 과학이나 무엇이나 부처님 법안에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과학자체가 전문 과학이 되어서 우리가 여러모로 편리를 많이 봅니다만 차곡차곡 가면 갈수록 우리 부처님 법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물질의 본바탕, 이것은 다 허무한 거란 말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상(相)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상(相)자체는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이 증명합니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이덴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라, 이것은 그 어느 존재 어느 미세한 물체에 있어서도 그 위치와 운동을 동시에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이 안 되니까 불확정성의 원리라, 물질이 가장 미세하게 되면 사실은 증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도 항시 그대로 고요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상호작용이 되어서 이것이 되었다 저것이 되었다 합니다. 금방금방 그러한 소립자는 그때그때 사라지게 됩니다.

 역시 현대과학자체가 ‘물질이란 것도 비었구나. 본래 허망하구나’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 법의 제법공(諸法空) 자리를 증명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현대 과학이 물질이란 것은 공이 아닌 생명 그 자리, 생명본래자리, 진여불성 자리라는 것을 알 턱이 없습니다. 어째서 모르는 것인가 하면 물질이 아니니까 측정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님 자체입니다. 우리 마음이 일체가 바로 청정법신이요, 모든 지혜, 자비, 공덕, 행복 이런 모든 것을 갖춘 즉 말하자면 원만보신입니다. 모든 행동과 모든 작용과 모든 모양 이런 것이 천백억화신입니다. 이 삼신(三身)이 우리한테 다 온전히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신이 되고자 하는, 삼신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안 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一體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 일체중생(一體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두가 다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꼭 반드시 단정적으로 부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여!

 그 어두운 중음세계에서 헤매지 마시고 부처님의 무생법인(無生法印)을 활연히 깨달아서 영원히 극락세계에서 안주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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