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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7호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금륜지 7호 불기 2545년 4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

 

우리 불자님들이나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이나 영겁회귀永劫回歸라 하는 소중한 금언金言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영겁회귀라는 것은, 모든 것이, 모든 만법이 다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순간 찰라찰라刹那 변화무상합니다. 그러면 종당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종당에는 하나의 자리로 다 돌아갑니다. 그가 왔던 하나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영겁을 두고 되풀이하는 것을 영겁회귀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나의 자리가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입니다. 대총상법문이라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 대총상법문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성自性, 우리의 본성本性 자리, 또는 우주의 본성 자리를 말합니다. 마명대사馬鳴大師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진여心眞如라, 마음 심心자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심진여시대총상법문지체야心眞如是大總相法門之體也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 바탕인 진여, 이것이 바로 모든 만법의 기본적인 본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설법을 설할 때 그때그때 법의 줄거리를 그냥 잊어버리고서 법의 상相을, 상대유한적인 상대적인 상을 말씀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꼭 본체本體를 여의지 않고, 본체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법을 설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너무 적으면 정보情報를 몰라 장사도 잘못하고 공부도 암중모색暗中摸索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현대같이 정보과다情報過多시대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정보의 홍수시대입니다. 정보의 홍수시대에는 정보를 적당히 처리 못하면 우리 마음이 항시 산란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이른바 스트레스(stress)를 도저히 해소시킬 길이 없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산업화시대라는 것은 서구적으로 볼 때는 200년 동안이나 산업화시대가 계속되어서 물질 생활은 상당히 편리하고 풍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서 정보의 홍수洪水라는 바라지 않는 부작용도 가져왔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정보가운데의 하나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이 모든 정보를 다 적당히 순화醇化시키고 정화淨化시키는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부처님 법 같은 법이 없다면 이 우주의 홍수같이 밀려오는 정보를 정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다른 세간적인 가르침들은 상대유한적인 복잡한 가르침입니다. 즉 하나의 상相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본체本體가 아닙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본체를 여의지 않는 것이 아까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대총상법문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의 본체란 말입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아소설법我所說法, 내가 지금 설법하는 바는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아니 불不자 떠날 리離자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내가 설하는 바 이 법문은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이런 말씀을 했단 말입니다. 자성을 떠난다는 것은 하나의 상설相設이라, 상대적相對的인 말씀이란 말입니다. 상대적인 말이라는 것은 더욱 더 우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는, 자성이란 것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자성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명심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성이라는 말씀이 얼마나 중요重要한지 육조스님께서 육조단경에서 자성이란 말씀을 100군데나 남어 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자성이란 말씀을 더러 많이 들으셨습니까? 자성, 이것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즉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를 말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동물도 본래 성품자리는 자성입니다. 자성을 또 다른 말로 하면 불성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말이나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나 똑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우주라는 것은 이것저것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무명 가운데 무명의 중요한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 중생이 무지하기 때문에 사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나 저것이나 자꾸 분할시킨단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일원적一元的인 진리인데 우리 중생은 일원적인 진리를 미처 깨닫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둘로 나누어서 보고 셋으로 나누어서 보고 이와 같이 구분하고 분할한단 말입니다. 제가 허두에 영겁회귀永劫回歸란 말씀을 했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본래로 자성이라 하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본래로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다른 데로 가지를 않고서 바로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자성에서 왔다가 자성으로 돌아갑니다. 현대기계문명이라든가 현대 상대적인 가르침과 우리 부처님 가르침과의 차이는 모든 존재를 하나의 진리로 보는 완전무결한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이고 이래저래 구분해서 보는 가르침은 과학이나 다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인간존재가 미처 깨닫지 못했다하더라도 누구나가 다 자성은 본래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서 예지가 발동發動을 합니다. 예지라는 것은 슬기로울 예叡자 지혜 지智자 예지叡智란 말입니다. 그래서 미처 개발은 못되었다하더라도 예지는 항상 조금도 품절됨이 없이 누구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減하고 조금도 더함도 덜함도 없이 예지는 어느 누구한테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그때 시대 상황따라서 어느 나라 사람이나 위대한 사람들은 다 하나의 진리를 지향한단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인도에서 7세기 경에는 굉장히 쇠미衰微하지 않았습니까? 그 밀교화密敎化되어가지고 복잡하게 갈래만 많이 생겨서 불교의 대강大綱을 잃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때 힌두교에서 ‘상카라’라는 분이 나왔습니다. 힌두교에서 나왔지마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마치 ‘예수’같이 30세에 나서가지고 34~35세에 돌아가신 분이지만 ‘상카라’가 나와가지고서 우리 불교는 인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카라’가 내세운 종지宗旨는 어떠한 것인가.

이것이 이른바 不二一元論이라.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도 불이일원론이라는 가르침이 다 들어있습니다. 다 들어있는 것인데 아까 말씀대로 불교가 너무나 민간미신民間迷信 즉 바라문교나 그런 종교에 차근차근 습합拾合되어서 타락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밀교화되었던 것인데, 따라서 ‘상카라’는 힌두교에서 나왔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불이일원론을 가지고 불교를 도리어 역공격逆攻擊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서기 8세기 이후에는 우리 불교는 인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그 무렵쯤 되어서 ‘그리스’에서 나온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보다도 조금 더 뒤에 나온 분인데 ‘파르메니데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저한테 이 말씀을 들으시고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적이라든가 그 분의 교리를 조금씩 보시면 참고가 되겠습니다마는 이 분도 분명하게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이것만 참말로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모두가 다 허상虛像이다, 환상幻像이다”고 했습니다.

 

우주라는 것은 어느 때나 본래 갖추고 있는 예지叡智가 있어놔서,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인 진여불성이 어느 누구한테나 갖추어져 있어서 비록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부처님 가르침과 흡사한 말씀을 한 분도 가끔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같은 분도 부처님 가르침같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말씀은 다 못했다하더라도 중요한 말씀은 많이 했습니다. 마태복음서를 보면󰡒먼저 하늘나라와 하늘의 뜻을 구하라. 그러면 모두는 그대에게 갖추어지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런 것도 우리 불교에서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우리 본래면목을 깨달으면, 모두가 거기에 다 부합이 된다는 말씀이나 흡사한 말씀입니다. 다만 부처님 가르침같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대인적 관계에서 사람과 사귀더라도 그냥 사람과 화해하고 사귀면 이것이 윤리에 맞고 바른 도리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갖는 것과, 우리가 원리적으로 먼저 말씀대로 본래 저 사람이나 나나 모두가 다 똑같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다 가진 부처라고 생각하고 사귀는 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우리 주변에 별로 자기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이웃이 있다고 합시다. 그 이웃과 사귀려해도 보통 생각으로 해서는 아무리 친하게 사귀려해도 잘 안됩니다. 그러나 이른바 논리적으로 해서 “저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면 나와 똑같이 진여불성을, 본래 자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결국은 나와 뿌리가 똑같단 말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똑같다고 생각할 때는 저 사람한테 함부로 하면 생명의 뿌리가 같기 때문에 나한테도 그냥 해독이 온단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저 사람한테 용납을하고 관용할 때는 나한테도 그냥 그대로 복덕이 돌아옵니다. 우리는 보통 달마스님을 얘기할 때 달마스님께서는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달마스님께서는 문자를 전혀 배제하고 오직 마음을 깨닫는 오직 그것만 말씀하셨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정통正統 가르침을 받으신 조사祖師님들은 절대로 하나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모든 법이 본래로 원융무애하고 또는 한결같이 자성自性을 떠나지 않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떠나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달마스님께서 말씀하신 법문도 여러 가지 법문이 많이 있으나 보통은 소실육문少室六門이라 해서 여섯 문으로 구분해서 말씀하신 것이 있어요. 그런 가운데도 또 후세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그야말로 고증考證을 밟아가지고서 소실육문 가운데서 “두 가지 법문은 꼭 달마스님이 하셨으나 네 가지는 달마스님의 법이 아니다” 이렇게도 말씀한 분이 있습니다.

꼭 달마스님 법문이라는 두가지 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을 때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종교를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평온히 하고 모든 사람끼리 서로 화해하고 더불어서 영원한 자성청정한 진리로 나가는 것이요,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인데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 마음이 편안한 안심법문이 중요한가?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런 말씀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깊이 느끼고 명심해서 그렇게 실천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정말로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을 논論할 수가 없고 우리 마음밖에 부처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바로 본래로 부처입니다. “나같이 별스럽지도 않는 그런 마음을 어떻게 부처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 범부 중생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육조단경에서도 또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우리 마음이 바로 우리 자성인데, 우리 자성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체,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법신불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덕성德性, 지혜공덕智慧功德이 바로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입니다.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모양을 나투고 또는 변화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이것이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입니다. 즉 우리마음 가운데에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이 원만히 갖추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리면, 우리 마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본래 마음은 이 우주와 더불어 둘이 아닌, 우리 생명과 더불어 둘이 아닌 그 법신을 온전히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가운데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생명과, 또는 다시없는 행복과 극락의 위없는 행복과, 또는 신통자재하는 신통神通과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고, 그리고 만덕을 갖춘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또는 우리 마음의 본체는 번뇌가 조금도 없습니다. 본래 청정이란 말입니다. 때가 끼었다 안끼었다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봐서 그러는 것이지 우리 마음은 모양이 없어놔서 사실은 때가 낄래야 낄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 많이 하고 그야말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만한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그 마음이 사실은 오염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스스로 자기 어리석음에 묶여서 범부凡夫가 되고 비하卑下하여 내가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기 때문에, 시간성과 공간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汚染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습니다.

 

금생에 잘못 살아서 지옥에 전락되어가지고 한도 끝도 없이 오랫동안 지옥고를 받는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조금도 오염이 안됩니다. 우리 마음 청정淸淨 그대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의 부처님 청정법신이 그대로 우리 마음의 본성품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는 지혜 자비 능력 행복이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성, 우리의 본성이 지금 이대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진여불성인 것입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분, 대천재 같은 분은 그러겠지마는 우리 같은 사람이 어째서 내 마음이 위대한 부처일 것인가 하고 조금도 의심을 갖지 말으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슈바이처 같은 이를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데, 의사인 동시에 철학자요, 신학자神學者요, 음악가인 그분은 얼마나 잘났겠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하고 비교할 때 한심스럽게 생각할 분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아인슈타인이나 슈바이처나 또 성자라 하는 인도의 간디나 지금 우리나 마음 자리는 똑같습니다. 조금도 흠결欠缺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마음이나 예수님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마음의 본바탕은 똑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은 영겁회귀永劫回歸라. 우리는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몇 겁을 되풀이하더라도 부처가 되는 일입니다. 또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교의 우주관宇宙觀에서는 중생의 공통업력共通業力에 의해 텅텅 빈 허공으로부터 다시 우주가 이루어집니다. 이른바 성겁成劫이 되면, 여러 가지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존재가 거기에 의지해 산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겁住劫입니다. 그리고 나서 차근차근 찌꺼기가 생깁니다. 물질이란 것은 오랫동안 되다 보면, 그야말로 불가역성不可逆性 에너지라. 이른바 다시 활용活用할 수 없는 에너지, 엔트로피(entropy)가 자꾸만 쌓여 나중에는 산화酸化가 되어서 불이 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괴겁壞劫이라, 우주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다 파괴가 됩니다.

 

파괴된 뒤에는 물질은 허공무일물虛空無一物이라. 텅텅 비어 버린단 말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비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물질은 없으나, 우리 중생의 심식心識은 남아 있습니다. 즉 무색계無色界 중생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무색계 중생이 텅텅 빈 공겁세계空劫世界에서, 아직은 중생이어서 좋다 싫다하는 마음이 있겠지요.

그 싫다 좋다 하는 그런 마음이, 에너지(energy)가 상호작용相互作用해서 다시 우주를 형성합니다. 그러면 다시 텅텅 빈 공겁에서 우주가 성겁이 되고 그러면 중생이 살고, 다시 파괴되고 텅텅 빈 공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주는 영겁회귀를 합니다. 우주가 이루어지고 다시 존재가 살고, 또 파괴되고 또 텅텅 비어 버리고, 또다시 이루어지고 다시 모든 존재가 살고, 또 파괴되어 버리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역시 본래 부처기 때문에 꼭 부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어가는 나그네길에 있습니다.

불자님들,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정보의 홍수 가운데서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몰랐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것저것 알기는 많이 알지만,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마땅한 인간의 할 일을 모른단 말입니다. 인간의 당위當爲를 모른단 말입니다. 다행히 부처님 가르침을 알기에, 우리는 우리가 하고 가야 할 길을 압니다. 그러면 부처님 가르침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허망무상虛妄無常합니다. 다 환상幻像이나 같단 말입니다. 있는 것이 사실로 있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 보고 잘못 느껴서 있는 것같이 보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단 말입니다. 착각해서 보고 무명 때문에 사실로 느껴진단 말입니다. 분명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어째서 있지 않는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로는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몇 십번 몇 백 번 듣고 하시겠지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개공도 물질이란 다 비었다는 것입니다. 왜 비었을 것인가. 인연따라서 잠시동안도 머물지 못하고 변화무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려운 말로 하면 공간성空間性, 시간성時間性이 없단 말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하는 것은 시간성이 있고 공간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인연생의 법은 인연따라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시간성과 공간성이 본래로 없습니다.

오늘 천도 받는 영가들이시여! 생본무상生本無常이라, 우리가 태어났더라도, 본래는 태어남도 없습니다. 불생불멸한 것이 우리 생명의 본바탕이기 때문에 거품같은 모양으로 해서 이런 사대색신四大色身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이것이 실제로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멸본무멸滅本無滅이라, 이 육신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 자체는 그대로 영원永遠히 존재한단 말입니다. 불생불멸한 생명의 존재는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조금도 이울어짐이 없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자체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자체를 인격화人格化시킬 때, 이것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요, 약사여래藥師如來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한 영원한 생명자리에다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무생물無生物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른바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이라는 것도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그 뜻입니다. 아미타불을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 합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속에 갖추어 있는 공덕功德이 끝도 갓도 없이 많다는 것을 말하는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미타불의 공덕을 나타내는 명호名號입니다.

 

이른바 광명무량光明無量이라, 진리 광명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이거니 내 생명의 본고향 자리가 바로 법신불이고, 바로 영원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대로 우주생명宇宙生命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은 우주 생명이니까 훨씬 크고, 내 마음자리는 아주 왜소矮小해서 별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물질 같으면 비교가 되겠지마는, 물질이 아닌 마음, 순수 생명은 비교가 안 됩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다 들어가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들어가고(一中一切多中一)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주는 오직 하나의 진리입니다 (法性圓融無二相).

 

오늘 천도를 받는 영가들은 그야말로 숙연이 깊고 복덕이 많아서 해인사 주지스님 되시는 세민화상은 아주 덕과 지혜가 높으신 스님이시고 염불도사이기도 하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침에 와서 보니까 주지스님 염불소리가 온 도량에 쩌렁쩌렁 울려서 저도 환희심을 냈습니다. 영가들도 춤을 추면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도록 될 것으로 저는 확신을 합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들이 우리가 생각할 때 눈에 안보이니까, 영혼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존재가 허망 무상하지만 이와 같이 존재해 있듯이, 영혼도 우리 중생의 제한된 육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천안天眼이라든가 또는 법안法眼이라든가 불안佛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인간 모양으로 존재해 있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인데 그 생명이 갈 곳을 잘 모르면, 이른바 중음中陰에서 오랫동안 헤매이는 것이고, 갈 곳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천상天上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초승超昇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극락,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지는 사람들은, 그것은 우리 중생들한테 좋은 일 많이 하고 좋은 데에 태어날 것을 이와 같이 권선징악勸善懲惡적으로 말씀하셔서 가르치려는 것이지, 극락이 어디 있을 것인가? 또 아, 천상도 마찬가지 아닌가? 천상도 어디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들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도 본래本來에서 본다면,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 같단 말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그때그때 변화무상變化無常한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 세계도 다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극락세계라는 것은 생명 자체가 본래의 생명이 안주安住하는 자리, 자기 고향에 돌아간 자리란 말입니다. 따라서 극락세계 중생들은, 극락세계에 태어난 분들은 모두가 다 몸이 광명의 몸(光明身)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극락이 있는가 없는가 그런 것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열심히 보시면, 부처님께서 어떻게 극락세계를 말씀했던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지식이 생길 줄로 믿습니다.

극락은 분명히 우리 생명의 본고향에 돌아가는, 진여불성 자리로 돌아가는 성자聖者의 영들이 안주安住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른바 극락은 영생永生의 고향故鄕이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극락에서 쉬다가 다시 중생계衆生界로 돌아온다고 생각할 때에, 중생들이 불쌍하면 그때는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다시 그 자리에서 우리가 원력願力을 세워서 중생계로 태어나기도 하고, 천상에 내려오기도 하고 또는 지옥도 가고 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는 온전한 자유, 참다운 자유,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요, 참다운 자유의 자리입니다. 진여불성이 되어가지고 모든 인간의 고뇌苦惱가 없고 오직 행복만 존재하는 그런 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가명假名에 불과한 허무의 자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고 바로 우주宇宙를 몸으로 하는 그런 자리는, 물질物質의 세계가 아니라 순수純粹생명 자리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우주宇宙를 몸으로 합니다.

 

오늘 인연 따라서 모이신 모든 불자님들이시여! 밖에 계신 분들에게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법이 얼마나 소중하건데 아직도 싸늘한 날씨인데 한데서 앉아서 계신다고 생각할 때 한편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한편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총상법문이라. 모든 법을 다 포괄하고 있습니다. 과학이나 무엇이나 부처님 법 가운데는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자체가 굉장히 정밀과학이 되어서 여러모로 편리함을 많이 봅니다마는 차근차근 가면 갈수록 우리 부처님 법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2천5백년이상 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의 세밀한 대문까지 또는 법의 한계 같은 것을 현대물리학이 차근차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물질의 본바탕은 다 허망한 것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사실 존재하지가 않습니다. 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 상相 자체는 그때그때 변화무상한 것입니다. 상일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대물리학은 증명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증명하는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는 그 어느 존재 어느 미세한 물질에 있어서도 그 위치와 운동을 동시에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측정測定은 안되니까 불확정성의 원리이고 이것은 물질의 가장 미세한 부분은 실지로는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도 항시 그대로 고유한 것이 아니며 그때그때 변화무상하단 말입니다. 상호작용相互作用을 위해서 이것이 되었다가 저것이 되었다 합니다. 또는 금방금방 그런 소립자素粒子는 그때그때 사라지고 맙니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도 현대과학 자체가 물질은 본래로 비어있다, 허망하구나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의 제법공諸法空자리를 증명한단 말입니다. 다만 현대물리학은 공이 아닌 자리, 공이 아닌 생명 본연의 자리 진여불성자리는 알 턱이 없습니다. 어째서 모르는 것인가 물질이 아니니까 측정을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미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우리 마음의 본체가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이고 모든 지혜 공덕 자비 행복 이런 공덕이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 모든 활동과 모든 모양과 작용 이런 것이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입니다. 삼신이 우리한테 온전히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삼신이 되고자하는, 삼신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꼭 부처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요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모두가 다 본래 부처기 때문에,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꼭 반드시 당위적當爲的으로 부처가 되고 만단 말입니다

영가들이시여! 중음에서, 그 어두운 중음의 세계에서 헤매지 마시고 부처님의 무생법문無生法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확연히 깨달아서, 영원히 극락세계에서 안주하시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2001년 2월 26일(불기 2545년 2월 26일), 경남 합천 해인사 천도재 초청법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