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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제6호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불이일원론 不二一元論


          

몇 개월 세월이 흘렀는데도 반가운 얼굴들이 건재해 보이시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저하고 같은 연갑인 노보살님도 빠짐없이 동참하게 되어서, 나도 죽지 않았는데 그 분도 안 돌아가시고 계셔서 더욱 더 반갑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법왕법法王法입니다. 법왕법이란 바로 진리의 왕이 법왕입니다. 따라서 세계 여러 가지 종교가 자기 나름대로 진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만, 모든 진리가 다 법왕법에 귀속이 됩니다. 그 법들이 그냥 상대 유한적인 법이 아니라, 이른바 절대적인 모든 것을 그 속에 포괄하는 그런 법입니다. 요즘 실존주의 철학이라 하는 철학이 있지 않습니까. 그 실존철학자 가운데서 야스퍼스(je-spers)라고 하는 위대한 독일 철학자가 있습니다. 현대 철학 가운데서 우주의 실상 즉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을 탐구하는 철학이 실존철학인데 그 스승 가운데 한 분이 야스퍼스라는 분인데 그 분이 말씀한 요지가 무엇인가 하면 그 포괄자抱括者입니다.

모두를 다 그 속에 담아있는 것이 바로 포괄자입니다. 모든 것을 포함시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은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어떤 철학 체계나 어떤 성자聖者의 종교나 철학적 교설敎說도 다 다 담고 있고 포괄하고 있습니다. 포괄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초월超越해 있는 법중의 법입니다. 그래서 법왕법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 곧 법왕법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른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법이란 말입니다. 무시무종이라.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법이니까 말을 더 전개展開시키면 남(生)도 없고 죽음(死)도 없단 말입니다. 이른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도 분명히 한계가 있고 세계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어째서 그런 법이 한계가 없고 시간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그야말로 무가정無假定의 원리일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사실로 봐서는, 중생이 대상을 분할해서 보고 나누어서 보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중생이 무명심으로 중생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지, 무명심을 떠나 버리면 모두가 하나요, 하나의 진리가 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괴로움을 느끼고 인생고를 느끼며 시달리는 것은 중생이 진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괴로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째서 없는가 하면, 괴로워하는 자기 주체도 본래는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괴로워하는 자기 주체도 하나의 환상인 것이지, 실존적實存的인 실재적實在的인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다른 일체 만유도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우리 선방 스님네들이 아주 그야말로 자랑스럽게 영광스럽게 한철을 공부하시고 해제解制한 날이고, 재가불자님 출가불자님 모두가 다 정말로 여법如法히 공부하시다가 해제라. 일단 결제를 푸는 날입니다. 그러나 깊은 의미를 생각할 때는, 사실은 우리 중생들이 결제하고 결제를 풀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바로 진리 아님이 없는 것이며, 우리 중생도 하나의 진리의 주인공의 한 사람이며, 우리가 아직 진리를 온전히 체험 못했을 때는, 진리를 체험하여 진리와 하나가 되는 그 자리가 해제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와 하나가 못되었을 때도 해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비단 금생뿐만 아니라 몇 생을 더 윤회한다 하더라도, 모든 진리와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서 진리를 체험하는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해제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바세계는 모양의 세계이기 때문에, 모양의 세계는 끝도 있고 시작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해제가 되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실지 의미에서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성불 때까지는, 부처가 될 때까지는 사뭇 공부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 무명이란 것이 없을 무無자 밝을 명明자, 무명인데 무명이란 것이 그야말로 집요한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이 무명인데, 인생고는 다름 아닌 무명 때문에 잘못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불경에는 제고가 무명고諸苦無明故라, 인생고가 무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인생고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명 때문에 잘못 보아서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무명의 반대가, 무명의 반대인 동시에 무명의 바로 본체本體가, 진여眞如란 말입니다.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진여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무명과 진리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가현각대사永嘉玄覺大師의 증도가證道歌에도 있는 법문입니다마는, 무명의 실상이 바로 진여불성이란 말입니다(無明實性卽佛性). 무명이 따로 있고, 즉 어리석음이라는 무명이 따로 있고 즉 어리석음이라는 무명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결국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란 말입니다. 진여 뿐인데, 우리 중생이 자업자득으로 스스로 분별시비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명도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진여 위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허상虛像에 불과합니다. 허구虛構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불할 때까지는 사뭇 놓치지 않고서 공부를 해야되겠지만,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중생은 모양 세계에 있어 놔서, 모양 세계란 것은 그때그때 구분이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하루에 세 때 먹어야 되고 갈 곳은 가야 되듯이, 모양에 따른 한계가 있어서 쉴 때도 필요하고, 푸는 제도 맺는 제도도 있고, 처음과 끝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공부에는 무간수행無間修行이라, 없을 무無자 사이 간間자, 사이가 없이 공부를 해야 번뇌의 침해를 받지 않습니다.

공부를 했다 안 했다 하면, 우리 중생의 본래의 뿌리는 진리일 망정, 우리가 무명무지 가운데 있고, 과거 전생의 숙업宿業도 많이 짓고 금생에도 학교에서 잘못 배우고 사회의 모순 상황에서 오염汚染을 많이 받습니다. 그 때문에 중생은 범부凡夫때는 하나의 속물俗物입니다. 속물이란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 속물입니다. 제법諸法이 공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은, 사실은 중생이 속물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상을 관념론觀念論과 유물론唯物論으로 구분하지 않습니까. 관념론은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관념뿐이다 마음뿐이다, 하는 논리체계가 관념론인 것이고, 유물론이란 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산이요 냇이요 달이요 해요 내 몸뚱이 등 모두가 물질뿐이지 않는가. 궁극적인 것은 물질뿐이지 않는가, 이것이 이른바 유물론이란 말입니다.

헌데 그 모두가 물질뿐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생각 밑에서 공산주의가 나오고 맑스주의가 나오고 했던 것입니다. 또는 그 유물론 체계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나온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가 바르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으로 생각할 때, 오온화합五蘊和合, 오온五蘊이 가화합假和合한 것이 내 몸이요, 내 정신이란 말입니다. 즉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인 물질적 요소와 수상행식受想行識인 정신적 요소, 그것이 오온 아닙니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개공하는 오온이란 말입니다. 우리 몸이나 모두가 물질적인 모든 현상現像은 다 오온으로 구성되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온 차원밖에 안 보입니다. 따라서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오온 세계란 말입니다. 오온 세계는 실상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오온이 사실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중생은 항상 범부 속물인 것이고, 속물주의의 속물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속물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참 저 놈은 속물이구나, 속기俗氣를 떠나지 못했다”하는 말처럼, 물질에 얽매이지 않아야 참 무위無爲의 세계, 안락스러운 세계, 훤히 트인 마음을 가질 것인데, 우리 눈에 보이는 곧이곧대로 그대로 있다, 한다면 속물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공부는 모든 존재의 근원 자리, 즉 오온개공자리, 오온이 다 비어 있는 그 자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할 때 분명히 눈으로 봤을 때 있는 것인데, 있는 그대로를 다 비었다고 하니까 성가신 일이 아닙니까? 그것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 다음에 빈 것이란 뜻이 아니라, 오온즉공五蘊卽空이라, 바로 이대로 오온이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아니 내 몸뚱이가 이렇게 꼬집어 뜯으면 아픈데, 이대로 비었다 하면 곧이 듣겠습니까? 사실 이대로 빈 것입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 여러분들의 반가운 얼굴들도 모두가 다 바로 빈 것이란 말입니다. 당체즉공이란 말은 지금 보이는 이 몸 이것이 그대로 비었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지은 업보業報 때문에 사실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금까지 내려온 업보가 그렇게 무겁기 때문에 그런 업보를 녹이는 것이 공부란 말입니다. 그래서 또 공부하는 것도 공부를 끊침이 없이 해야지 했다말았다 하면 업보가 지중해서 업이 되어집니다. 화두를 참구하고 염불을 한다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지은 업에다가 금생에 배운 것도 대체로 있다 없다하는 그런 상대적인 소식이란 말입니다. 있다 없다 유무有無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차원에서만 있고 없는 것이지 영원永遠적인 차원에서는 유무가 없습니다. 자타시비自他是非가 모두 다 허망한 법입니다. 오온이 개공皆空인데 즉 물질이나 관념을 구성한 것이 오온인데 그런 오온이 비었다고 하면 우리로서는 허무한 일이 아닙니까.

부처님 법을 깊이 단계적으로 생각하면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이 즉 속물이 보는 있다 없다하는 차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차원 높은 것은 오온개공, 모두가 다 본래로 비어있다 하는 차원입니다. 분석해서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당체즉공이라, 있는 그대로 바로 비었다는 말씀입니다.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심경般若心經 도리는 다 당체즉공이라. 그 존재 자체가 비어 있다는 그런 소식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체즉공의 공空이란 것은,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허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이론의 토대 위에서 공부해 가지고, 즉 기도도 많이 모시고 참선도 오랫동안 해서 이른바 삼매三昧에 들어가면, 그때는 그 공空의 알맹이를 우리가 체험하게 됩니다.

다만 공 같으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공부하나마나 한 것이지요. 그러나 공의 알맹이, 공의 당체當體는 공이 아니라 진공眞空이라. 묘유妙有라. 진공묘유眞空妙有란 말입니다. 진공묘유란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 자리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자리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자성이라,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서 한가하니까 무료해서 심심풀이로 종교서적을 이것저것 보고 헤아려도 봅니다마는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자성自性이라는 말이 몇 군데나 있는 것인가 하고 한 번 헤아려 보니까 백百 군데가 넘어요. 자성이란 말을 백번도 더 말했습니다. 얼마나 육조 혜능慧能스님이 자성, 아까 말한바와 같이 불성을 역설하고자 하셨으면 조그만한 한 권 책 속에 백번이상이나 말씀을 되풀이해서 하셨겠습니까. 왜 그렇게 했는가.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자성에 귀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성自性은 바로 불성인데,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우리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바로 자성이고 자성청정심입니다. 또한 우주의 본래 성품이 바로 자성입니다. 김씨 박씨 이씨나 모두가 다 자성차원에서는 하나란 말입니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존재 모두가 다 본래 성품이 자성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성은 바로 불성佛性을 의미합니다. 또한 동시에 진여불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은 즉 말하자면 참선의 교과서敎科書같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러하신 정법안장正法眼藏이 달마達摩스님을 거쳐서 육조혜능스님 때에 와서 거의 완벽하게 다 체계화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육조단경은 참선의 교과서 같은 것입니다. 그 책에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자성이란 말이 백 군데가 넘는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고 하면, 자기의 본래면목을 몰라 가지고서 함부로 망동妄動하지 말고 본래의 자리 곧 자성 자리로 귀향歸鄕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염불念佛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염불은 부처를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부처가 바로 자기 자성입니다. 화두話頭는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무엇을 의심하는 것인가?

내 자성이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내 본분소식本分消息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 자리를 의심도 하고 참구해서 그 자리와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세상에 쉽다고 하면 가장 쉬운 것이 불법이고, 불법 가운데서도 가장 쉽고 간단명료한 것이, 분명명석分明明晳한 것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보통 공부하는 법은 뱅뱅 돌아가서 점차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선법이란 것은 아주 대승법이란 말입니다. 대승법大乘法이라는 것은 그렇게 뱅뱅 돌아서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직통直通으로 바로 간단 말입니다. 검으면 검다 하고 희면 희다 하고, 천지 우주가 다 부처님 진여불성眞如佛性법인 것이고 그 외는 다른 것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과거 숙세宿世부터 많이 닦아서 업장이 가볍고 금생에도 좋은 인연 만나서 바로 공부한 분들은, 정말로 공부하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을 못 느끼고 있다가, 바로 본 사람이 그대로 말만 해 주면 그것이 직통으로 통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당하當下에 활연대오豁然大悟라,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바로 크게 깨달아 버린단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가 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분별시비하는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은 허망하고 있지도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있지도 않는 것 때문에 봉사하다가 자기 생명을 그야말로 취생몽사醉生夢死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참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인간성의 본래면목, 우주의 근본 자리, 영원히 죽지 않는 자리, 불생불멸한 그 자리, 영원한 해탈 자리,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 가운데서 가장 최상의 제일의第一義적인 법입니다. 그러기에 참선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젊은 청춘을 다 그만두고 평생동안 걸망지고 오락가락하면서 공부를 하지 않습니까? 그마만치 중요시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나 인연 따라서 부부가 되고 가족이 되고 그런 것이지 종단에 가서는 누구나 다 참다운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생에서 생을 받고 금생에 산 보람이 무엇인가 하면, 오직 본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몇 생을 헤맨다 하더라도 거기에 돌아가고야 마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왕이면 빨리 그 자기고향자리, 생명의 근원자리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의 의무란 말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길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자기 고향으로 가는 길, 자기 생명으로 가는 길은 사실은 제일 쉬운 길입니다. 우주의 도리 생긴대로 가는 길이란 말입니다. 봄이 오면 여름이 멀지 않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그렇게 오듯이, 우리 공부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안되고 버틴다고 베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세경器世經을 보면, 겁진소시 일체중생개당선정劫盡燒時 一切衆生皆當禪定이라. 이런 좀 복잡한 말이 있습니다. 제가 쉽게 풀이합니다마는 겁진소시는 이 세계를 구성한 세계, 우주가 엔트로피(entropy)같은 이른바 불협화不協和 에너지(energy)가 쌓여서 즉 사용 못할 나쁜 에너지가 차근차근 쌓이면 우주가 정말 파괴될 때가 온단 말입니다. 그때가 이른바 겁진소시입니다. 모두가 산화가 되어가지고서 산소화 되어서 나중에 우주가 불덩어리가 되어 다 타 버린단 말입니다. 겁이 다해 우주가 다 타 버리는 그때가 되면 중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독교 종말론終末論은 그냥 나쁜 사람은 다 태운 채로 다 파멸되고 한다는 그런 종말론이 있습니다만 부처님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중생들은 다 천상에 올라가서 편안하게 만들어놓고 이른바 무생물만 존재하는 우주가 다 타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때가서는 우주가 텅텅 비는 공겁空劫이 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천문설하고도 다 들어맞는 것이고 현대 물리학이 모르는 저 너머까지도 다 말씀해 있습니다. 그 영겁회귀永劫回歸 사상에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형체가 이루어지고 또 중생이 거기에 살고 또 파괴되어 다시 공空이 되고 말입니다.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 이 사겁四劫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것을 영겁회귀라 합니다. 근대의 대천재大天才인 독일의 니체라는 철학자가 있지 않습니까? 생철학生哲學인 니체는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초인超人공부를 많이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우연히 그렇게 잘 아는 천재가 아니라, 굉장히 공부를 많이 했단 말입니다. 그는 알프스 산 중턱에 가서 아주 수년을 통해서 참선을 했습니다. 그래서 알프스 중턱에서 참선하는 가운데 영겁회귀를 알아냈단 말입니다. 그보다 앞서 이천오백년 이상 되는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이미 다 밝힌 것인데, 현대의 천재적인 사람이 애쓰고 명상해서 비로소 영겁회귀를 알아냈습니다. 우주란 것은 모두가 다 형체가 이루어지고 중생이 살고, 파괴되어 또 공이 되고, 다시 공空 가운데서 또 이루어지고 하는, 영겁회귀사상을 명상을 거듭해서 알아냈으니 다시 말하면 참선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불교인 같이 대승법으로 참선을 했던가 명상을 했던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천재니까 또 동양사상도 공부를 했으니까 아마 우리 불교인들이 참선하는 본을 따라서 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이란 것이, 우리 인간 존재가 본래로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재주 있고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좋은 계기를 잘 만나서 그와 같이 아주 깊은 명상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명상하다 보면, 근원적인 진리가 바로 불법인지라, 불법에 도달하고 말겠지요. 따라서 그런 지혜로 해서 이른바 천안통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발동을 했으니까, 지금까지도 위대한 철인으로 해서 우리가 존경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은 결국 알프스 산에서 명상하다가 영겁회귀를 알아냈습니다. 그 영겁회귀 사상에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계를 벗어난 우리 겁이 다 허물어 질 때는 겁진소시 일체중생개당선정이라, 모든 중생이 다 선정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선정에 못 들고서 동요하고 분별시비하고 괴로움을 느끼지만, 우주가 파괴될 때는 모든 중생이 다 깊은 선정에 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겁空劫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 자체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 모양 없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이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교를 공부할 때 중요한 요점이 무엇인가 하면, 사실은 우주에는 다른 것이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장 확실하게 모두가 다 진여불성 뿐이다” 이 말씀을 6년 고행을 통해서 깊은 삼매를 통해서 증명을 하셨고 그 뒤에도 무수한 성자가 또 다같이 체험을 통해서 증명을 하셨습니다. 팔만사천법문도 모두가 다 그런 내용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결국은 진여불성 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바로 그 자리가 마음자리인 것이고, 그 자리가 바로 부처 자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바와 같이,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이나 다 모두가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국한局限시키고 분할分割시켜서 그때그때 나누어 보는 것이지, 참말로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眞理입니다. 중생도 부처고, 마음도 부처고 다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이라. 모두가 다 오직 마음 일원론一元論이란 말입니다.

철학사상에서도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과 그런 논쟁이 얼마나 심햇습니까. 그런 것은 중생들이 제대로 깊은 명상瞑想에 못 들어가서 그럽니다. 명상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것은 다 없고서 오직 마음만 존재합니다. 오직 진리만 존재합니다. 오직 일원一元이란 말입니다. 인도철학 하면 인도철학이 얼마나 복잡하고 ‘우파니샤드 사베다’ 등 복잡하지 않습니까마는 그렇더라도 따지고 보면 그것이 모두가 다 오직 마음 일원론一元論이란 말입니다.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뿐이란 것은 마음뿐이란 것과 똑같습니다. 그 마음에는 무량無量의 공덕이 있어놔서, 우리 마음이 무량의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 시방세계는 부처님의 공덕,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경經에서 광명변조시방법계光明遍照十方法界라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고 하면 이 시방세계, 우주에는 부처님의 광명이 충만해있다는 말입니다. 충만해 있는 것을 우리가 번뇌煩惱에 가려서 어두워서 미처 못 본단 말입니다. 보지를 못하다가 마음이 맑아지면 광명을 실지로 체험한단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이른바 광촉光觸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광촉은 빛 광光자 접촉할 촉觸자, 영원적인 우주에 언제나 광명이 간격없이 존재합니다. 이런 생명의 광명에 접촉한단 말입니다.

생명의 광명에 접촉하면 어떨 것인가. 그때는 환희용약歡喜勇躍하는 것입니다. 환희용약이라. 우리가 불경을 보면, 부처님 법문을 듣고 생전에 부처님같은 위대한 어른을 뵈었으니, 그런 분이 여실하게 법문을 하거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개발되겠습니까. 따라서 부처님 말씀 따라서 환희용약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은 부처님을 통해서 우리 생명의 영원한 광명을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접촉接觸한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참선도 열심히 하시고 염불도 열심히하시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더러는 꿈속에서라도 가끔 영원적인 광명이 훤히 빛날 것입니다.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이 우주는 사실은 광명뿐이다, 방사선 뿐이다고 증명한단 말입니다. 전자電子나 양성자陽性子나 또는 중성자中性子나 그런 것은 하나의 광명의 파동波動입니다. 그것이 파동역학波動力學이라. 이 소립자란 것은 가장 미세한 원자상태이며 소립자素粒子는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광명의 하나의 존재양상存在樣相이란 말입니다. 현대물리학이 우주란 것은 광명 뿐이다는 것을 증명해 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광명세계에 삽니다. 비단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몸뚱이가 이대로 사실은 광명덩어리란 말입니다. 물질로 보는 것은 아까 말씀 마따나 속물이니까 번뇌에 가려서 물질로만 보이는 것이지 물질은 오온개공이라, 본래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광명덩어리란 말입니다. 앞으로도 참선하실 때 다른 망상은 말으십시오. 말으시고 “아, 우주는 그야말로 부처님의 일체공덕을 갖춘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영원불멸한 생명자체구나”하는 이런 마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꿇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삼명육통을 다한 그런 신통묘지, 예수의 모든 기적자리를 우리 마음이 원래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고 그러면서도 우주와 하나된 자리, 그 자리는 바로 공덕장功德藏이라. 한도 끝도 없는 공덕이 원만히 갖추어져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이고 불심입니다.

이런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 무엇입니까. 자성미타 유심정토自性彌陀 唯心淨土라. 우리 자성, 우리 인간성의 본래 자리, 우주의 생명 근본자리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중생이 그 자리를 못 보니까 부처님은 저 밖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 사실은 염불이란 것은 본래 부처가 본래 부처의 이름을 부르면서 부처가 되어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어느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스러운 것은 어떤 것이고 가장 가치로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안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가 안되면 어떨 것인가. 부처가 안되면 고생고생 많이 하고 또 서로 아귀다툼하고 그 속물로 해서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끝내고 만단 말입니다.

불자님들께서 인연 따라서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하든 또는 염불을 하든 부처님은 바로 우리 생명의 주인공인 동시에 우주의 주인공이란 말입니다. 바로 우리 생명입니다.

우주란 것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달의 생명과 또는 해의 생명과 내 생명은 분할分割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딱 연결되었단 말입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의 생명자리를 바로 바탕을 보지 못하니까 우리가 분할해서 나누어서 보는 것입니다. 제일 쉽고 제일 행복스럽고, 우리 공동체를 구성하는데도 제일 기본이 되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광명변조, 그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우주에 두루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자리를 놓치지 말으시고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 불기 2545년 2월 7일(음 1월 15일) 동안거 해제법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