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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4호 염불과 극락세계

   염불과 극락세계



신심이 넘쳐흐르도록 사무친 우리 불자님들을 만나뵈니 반갑고 또 감격스럽습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화룡점정이란 것은 용을 그려넣고서 마지막에 용의 눈동자에 점을 찍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용을 잘 그렸다하더라도 눈동자가 없으면 참다운 용은 못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용을 그려 넣고서 용의 눈동자에 점을 딱 찍으니까 그냥 용이 생기발랄해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는 그런 전설적인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는 여러 가지 훌륭하고 좋은 교리가 많지 않습니까? 정말로 심수오묘하고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면에서 일체만사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염불이나 극락세계라는 소중한 개념이 없으면 불교는 철학으로 전락되어버리며 종교적인 역할을 못합니다. 이 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불교는 정말로 우리 인생의 보배로운 가르침이지만,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고 또 부처님의 명호를 외는 염불의 가르침과 우리의 이상향인 극락세계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참다운 종교적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만큼 염불과 극락세계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정토삼부경에 있는 하나의 경입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의 전체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대강 말씀드리면, 관무량수경의 관은 볼 관觀자, 무량수는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영생의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무량수불입니다. 영생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미타불의 이름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아미타불이란 것은 대상화시킬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아닙니다.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생명 자체, 우주 생명 자체, 또는 우리의 본래면목 자체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이름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굉장히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 자체라, 이런 때는 무량수불인 것입니다. 아미타불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나 모든 공덕이 한량없이 많다, 한량없이 지혜 공덕이 충만해 있다, 이런 차원에서 의미할 때는 무량광불입니다. 빛 광光자를 넣어서 한도 끝도 없는 그런 광명의 부처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변광불이라, 끝도 가도 없이 광대무변해서, 한도 없는 우주의 모두를 포섭해 있다는 이른바 공간성을 초월한 그러한 생명입니다. 이런 때는 무변광불입니다. 이렇게 아미타불에 대해서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청정하다고 해서 청정광불,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부사의광불, 이와 같이 굉장히 많습니다.

또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이라, 그래서 그때는 감로왕불입니다. 영생의 생명수가 감로수 아니겠습니까? 영생하는 생명 자체이기에 감로왕불입니다. 이와 같이 이름 자체에 불교의 공덕이 모조리 다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을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극락세계도 분명히 우리 불교인들의 이상세계일 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인간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극락세계로부터 와서 극락세계로 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또 방편을 떠나 사실 그대로 말하면, 이 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이런 것도 우리가 이야기하기가 곤혹스럽지 않습니까? 혼란스럽고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이런 사바세계가 어떻게 해서 극락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의심을 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것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론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내용을 한시간 동안 이야기하겠습니다. 구체적인 말씀은 다 못한다하더라도 대강 중요한 것은 얘기해 드릴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외도와 불교(정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삼법인이 있으면 정법이라 말하는 것이고 삼법인이 없으면 정법이 아닌 외도라고 합니다. 그럼 삼법인은 무엇인가? 아시다시피 먼저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결국은 무상합니다. 무상하다는 그것은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덧없다는 말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은 고유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인간 존재의 눈에 비치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바꿔 말해서 유위법입니다. 상대 유한적인 법은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상만 있는 것이지 성품이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들 금강경을 자주 보셔서 아시겠지만,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입니다. 상대 유한적인 법이나 대상화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은 여몽환포영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같이 실체가 없습니다. 그와같이 일체 만법은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은 제행무상이란 말입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에는 제행무상같은 명백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어렴풋이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단호하고 명백하게 나타낸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외도와 정도와의 차이가 그런데 있습니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현상적이고 상대 유한적인 것은 모두가 무상합니다. 고유한 것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마지 않습니다.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어느 공간에 고유하게 존재하고 어느 시간이 있어야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식의 패턴이란 것은, 내내야 그런 시간성 공간성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천재적인 아인슈타인 등이 제행무상이란 소식을 방불하게 말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연기법을 방불하게 설명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라, 이것도 일체 존재란 것은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도 역시 일체 존재의 운동량을 바르게 측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위치를 측정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대체로 어름어름하게 측정이 되겠지마는, 전자라든가 중성자 같은 미시적인 단계에 이르면 측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운동량을 바르게 측정하려면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대체로 확률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사상과 상대성의 이론은 서로 상응하는 도리입니다.

모두가 서로 어울려서 모양을 내는 것이지, 단독으로 모양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인연 따라 인과 연이 합해져서 모양을 내는 것이지, 고유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아무튼 천재적인 현대 물리학자가 우리 불교의 인연법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물론 다는 말을 못하겠지요. 왜 다 말을 못하냐 하면, 그 사람들은 인연법의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인연뿐만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인연뿐만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까지도 분명히 깨달은 분이 부처님이고 역대 조사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것을 모르면, 불교가 성립이 안됩니다.

제행무상이라, 고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모두가 상대적으로 잠시간 상을 냈을 뿐입니다. 상은 현상적이기 때문에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아까 금강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거품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법무아입니다. 모든 존재는 무아라,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으므로 내 소유가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명백합니다. 금강경에서 보면, 부처님 말씀은 여어如語라, 진리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진어眞語라, 진리만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불이어不異語라, 다른 것은 절대로 말씀하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또는 불광어不誑語라, 어느 누구도 속이는 말씀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진리 그대로 말씀하시고 바로 그것이 진리고 또 진리 아닌 것은 조금도 없고 또는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 역시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보고 결정설決定說이라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열반경 27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언급합니다. 사자후獅子吼라,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모든 짐승이 쩔쩔매고 뇌가 그냥 망가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부처님 말씀은 사자후같이,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같이, 모든 외도나 모든 삿된 것을 절복折伏시킵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은 결정설이라, 꼭 사실대로 말씀했습니다. 결정설이란 무엇을 말씀하신고 하면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불성을 다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도 유정중생이니까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일반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은 어떻습니까? 불교에서 일체 중생을 말할 때는 인간만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두두물물 산하대지, 하나의 천체라든가 그 어떠한 것도 일체 중생의 범주에 다 들어갑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심장에 가지고 있거나 다른 데 가지고 있거나 하는 부분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불성이란 것은 물질이 아니고 하나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분명히 있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불성이란 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말씀은 부처님의 사자후같은 결정설이고 확실하고 단호한 진리이기 때문에,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합니다. 여래가 부처님아닙니까? 부처님이 항시 머물면서 조금도 변동이 없단 말입니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소승불교는 더러는 상대적인 분야를 말씀했습니다만 부처님의 대승불교는 바로 우주자체를 부처님의 생명 덩어리로 봅니다.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라, 그 여래는 바로 부처님인데 부처님이 항시 계시면서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오늘 계시다가 내일 안 계시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과거나 현재나 언제나 부처님은 존재하는 생명 자체입니다.

여러분들, 아까 반야심경을 외우셨지요? 그 모든 것이 공해 버린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은 반야심경에 여실히 나와 있습니다. 물질을 구성한 지수화풍 그런 것도 다 공한 것이고, 또는 우리 관념을 구성한 수상행식受想行識 모두가 다 비어 있습니다.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란 말입니다. 오온개공은 현대 물리학보다 훨씬 철저한 우주물리학입니다. 모든 것이 공한 그 자리는 불생불멸이라, 모두가 공해 버렸거니, 그 남(生)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무엇이 있고 저것이 있고 그래야 생사가 있고 죽음(死)도 있고 남(生)도 있는 것이지, 모두가 공한 그 자리, 제법이 공한 그 자리는 생사가 없단 말입니다. 또는 더러운 것도 청결한 것도 없습니다. 물질이 되어야 더럽고 깨끗하고가 있을 것인데, 물질이 아닌 순수 생명이기 때문에, 더럽고 또는 청결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더하고 덜함도 없습니다.

우리가 염불하고 극락세계를 추구할 때는, 이것저것 다 떠나서 순수하게 감성感性으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의 교리를 따질 때는, 정말 명석하고 철학적인 사색이 필요합니다. 사유가 필요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가장 고도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칸트철학이나 니체철학도 미처 모르는 소식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공부를 많이 하셔서 칸트의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란 개념도 아시지요? 물질이 본래 무엇인가, 이것이 물자체인데, 칸트 말이, 그 물질이 본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단 말입니다.

이른바 중생 인식 주관으로는 볼 수가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물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본다는 것은, 우리 인간 존재, 인간 정도의 업장을 가진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이지,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의 실상을 보시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지금 가상을 봅니다. 허상을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한적인 존재란 것은, 결국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거품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와 같이 인연 따라 생겨난 것, 이것은 제법이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이 없고, 때문에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소유라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것도 진리에서 보면 허망한 것이구나, 내가 허망한데 하물며 나한테 붙어 있는 권속이나 재산, 지위 같은 것도 또한 허망한 것이구나, 이렇게만 분명히 알아도 우리가 집착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확실히 아는 것은 아직은 아닙니다. 깊은 수행을 통해서 체험해야 하는 것인데, 체험을 못한다 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따지고 따지다 보면 결국은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고, 또는 무상한 것이니까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내 소유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가 버리면, 제법이 공이라, 이런 도리는 알아서 공소식을 안다 하더라도, 영생불멸한 극락세계를 우리가 긍정하기는 어렵단 말입니다.

불교의 또 한가지 특징은 무엇인고 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모든 것을 다 초월해서 영생의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모든 존재는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제행이 무상하고, 그러기 때문에 제법이 무아라, 나라는 것이나 저것이나 어떤 것이나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 소유도 없는 것이고 내 권속도 잠시간 인연 따라 만나 있는 것이지 영구히 내 권속에 들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만나 있다 해서 내생에 꼭 같이 만날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금생에 잠시간 인연 따라서 모두가 만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법이 나랄 것도 없고 내 소유라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허망무상한 것은 허망무상하지만, 허망무상의 진실, 본체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영생 불멸한 불성 열반입니다. 영생불멸한 그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본체는 내가 여기 있고 저만치 떨어져서 영생불멸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있는 현상의 실체 자체가 영생불멸의 실체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라든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허망무상하지만 우리 인간 존재나 그 허망무상한 본래의 참다운 자리가, 이른바 부처님의 법신이고 바로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에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염불수행자 인중분다리화念佛修行者 人中芬陀利華라, 가장 청정하고 향기로운 연꽃이 분다리화입니다. 그래서 염불수행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참답고 향기로운 연꽃같은 그런 존재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도와 정도를 알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나 그런 철학적인 깊은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가 영생불멸한 실상 자체의 이름을 외우는 자는, 그대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과 똑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위기승우觀世音菩薩 大勢至菩薩 爲其勝友라, 그런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 등 위대한 보살들의 가장 훌륭한 친구가 됩니다.

그런 부처님의 심오한 뜻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뜻을 모르고 한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동시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보현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아미타불 또는 아미타불이 이 세상의 모든 개념 가운데 가장 고귀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적인 전문 술어로 말하면,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생사를 초월한 보배 같은 그런 명호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위대한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서 우주의 실상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런 최상의 이름을 갖는 부처님이니까 그 이름 가운데 부사의한 공덕이 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하면, 삼세제불이 옹호할 것이고 또는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기도 하고 가장 무섭기도 하고 가장 자비스럽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기 때문에 어떤 신장이나 나쁜 귀신이나 좋은 귀신이나 하늘의 천상에 있는 천신들이나 모든 존재가 다 나무아미타불을 숭앙하고 받들고 지킨단 말입니다. 따라서 뜻도 모르고 나무아미타불 한번 왼다고 생각할 때도, 그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으로 해서 모든 신장이 우리를 다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가장 권위가 있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얼씬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의 부사의한 명호를 간직할 수 있는 인연을 가졌습니다. 불교를 믿는다 해도, 염불은 방편 가르침이고 화두를 들고 선방에서 애쓰고 의단疑團을 품고 해야 참다운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염불 공부와 비교할 때는 사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설사 우리가 선방에서 몇 십 년 동안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단을 품는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마음이 화두하는 마음 밑바닥에 깔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공부가 이어지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한다 해서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하는 마음이 왜 깔려야 하는 것인가, 참선이란 것은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육조혜능대사六祖慧能大師의 가르침도, 선이라는 것은 본체를 안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본체를 떠나 버리면 그건 선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뭐꼬󰡑 화두를 드나, 똥막대기(乾屎橛) 화두를 드나, 어떻게 들든 간에 똥막대기나 이뭐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산란스런 마음을 통일시켜, 본래 우리 생명이 부처이고 아미타불인데 부처를 찾고자 해서 우리가 임시로 의심을 품은 것이지, 의심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화두를 드는 것도 좋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의심이 없는 그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말本末이 전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의심 그것에 무엇이 붙은 것도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의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의심이 있으면 신앙이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백퍼센트 그대로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증거로 달마스님도 의심하란 말 한 마디도 안 하셨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더라도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마조스님이나 백장스님이나 또는 임제스님이나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중국 남송때 대혜스님이 비로소 그 방편으로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우리 주인공을 찾는 그런 하나의 방편으로 해서 의심하란 것이지, 절대로 목적은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에서 육조 혜능스님때 그 뒤에 마조스님 백장스님 황벽스님 임제스님 그 분들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켜서 바로 깨달은 그런 쪽의 선법은 그때부터 차근차근 이울어지고, 남송때 대혜종고스님이 낸 화두법이 당시에 융성했단 말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 때입니다. 고려 때 그런 법이 한국으로 수입되었습니다. 그때 중국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아닙니까? 그 명나라 때 불교가 상당히 융성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때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명나라 4대 고승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하면 운서주굉, 자백진가, 감산덕청, 우익지욱하는 분들인데, 그분들이 모두가 다 화두를 염불로 했습니다. 아미타불을 화두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을 화두로 하는 염불선이 그 때 한국에 들어왔으면 오직 좋으련만, 그 때가 이조 오백년 때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중국과 교류를 했습니까? 이조 오백년 때는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가 교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은 전체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의 교화를 위해서나 우리 참선을 위해서나, 굉장히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 오백년 동안 중국과 교류를 못했습니다. 명나라 때 4대 고승들이 염불하는 그런 풍조가 한국에 쑥 들어왔으면 지금 한국 선방에서 그 화두한다고 끙끙 앓고 의심만 하는 그런 풍조는 있을 리 만무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저는 화두를 비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백프로 의심 없는 그 자리, 마조같이 백장같이 임제같이 그렇게해서 믿으라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 염불하는데 기왕이면 염불선을 하고 싶다,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그러시겠지요. 저같은 사람도 일반염불과 염불선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문제가지고 고민도 하고 그랬습니다마는 여러분들께서도 염불하는 분들은 기왕이면 그냥 염불 뿐 아니라 염불선도 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염불선의 체계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이 많이 있습니다. 염불을 꼭 자기식으로 해야 한다는 그런 분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염불은 꼭 고유하니 어떤 음정에 따라서 그렇게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 내도 좋고 안내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계행 지키면서 염불하면 더욱 좋고,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못한 대로 염불해도 좋습니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소리를 내고 안내고 상관없이 염불하는 것은 어느 때나 좋습니다. 장사할 때나 밥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소리 내는 것은 어렵겠지요. 염불이라 하는 것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므로 소리를 안내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따라서 염불이란 것은 소리를 내고 안내고 상관없이 언제나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빨리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극락세계에 가서 보면, 극락세계에서 꼭 어떤 식으로 하란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그야말로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우리 사람 같은 존재가 극락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두가 광명세계입니다. 몸도 광명 몸입니다.

그 물질이 아닌 광명으로 만들어진 무량의 몸입니다. 물질 아닌 몸이니까, 극락세계 중생은 개체個體인 동시에 바로 전체全體입니다. 자기 몸과 우주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몸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사실 극락세계 중생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우리 존재도 우리가 똑바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제법의 공자리를 느끼고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제법공입니다. 따라서 제법의 공자리를 느끼고 불생불멸한 그런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이 몸도 역시 개체인 동시에 전체입니다. 개체와 전체는 절대로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과법을 알면 그냥 짐작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이른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중중무진이란 것은 모두가 다 한 고리로 얽혀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몸인 것을, 우리 중생은 전체를 못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인연법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다 본래로, 우리가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하나의 몸인 것을 우리 중생은 그 바탕을 보지 못하니까 성품을 보지 못하고 중생의 상만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로 볼 수만 있다고 그러면 저절로 참다운 자비가 나옵니다. 참다운 무주상행無住相行을 하지 말라 해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남한테 베풀면서 나라는 상을 내겠습니까? 따라서 그 근원적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불한다 할 때 일반 보통염불과 염불선의 차이가 무엇인고 하면, 염불선이란 것은 근원적인 문제, 본체를 여의지 않고 염불하면 그것이 염불선이 됩니다.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그와 같이 정말로 깨닫지를 못해서, 내가 증명證明을 못해서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다는 소식은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는 본래로 불생불멸이고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가 바로 내 자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자리를 안 여의고 염불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염불참선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내 밖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서 할 때는 염불참선이 못됩니다. 보통 염불은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염불참선이 못된다 하더라도, 또 염불을 열심히 하다 보면 마음으로 모아진단 말입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본래가 둘이 아닌지라, 결국 그때는 우주의 본체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로 혼란의 시대 아닙니까? 그 산업사회란 것은 무서운 사회아닙니까?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고 그 물질이란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인데, 사람 욕심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무시무시한 경쟁사회가 안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은 사람끼리 화해할 수도 없고, 갖가지 폐단도 나오고 또 환경 파괴가 나오고 그러겠지요. 모두가 다 바른 진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무명심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폐해입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모든 존재의 근원에다 우리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생명의 본체에다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생명의 본체 이것이 불성이고 법신이고 또 진여불성이라, 부처님께서 마르고 닳도록 말씀하신 법신, 진여, 불성 또는 실상 실재, 또는 주인공, 이런 말씀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참다운 대승불교가 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열반이고 바로 극락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한 진리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 사바세계가 극락세계입니다. 또는 우리 몸 이대로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전체 우주의 생명과 내 생명이 뿔뿔이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생명인 것을 우리가 본바탕을 보지 못하고 상만 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인식능력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업장 때문에 우리 마음이 통일되어서 깊은 삼매에 들어서 정작 진여불성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근본바탕을 본단 말입니다. 그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고,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다 통일되어 버립니다. 여기까지 꼭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사윤회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선이 염불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삼매는 참선과 거의 같은 뜻입니다. 개념상 억지로 따지고 보면 차이가 있는가 모르지만 삼매란 말이나 선이란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우주의 본생명 진여불성과 하나되는 것이, 이른바 참선의 목적입니다. 삼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산란스런 마음을 쉬어서 우주의 본바탕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삼매 또는 참선 가운데서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가? 기왕이면 우리 불자님들 쉬운 방법으로 하시고 싶어 하시겠지요?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삼매입니다. 해 본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별별 생각이 다 나오지 않습니까? 그 생각을 하나로 모아 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게 어려우니까 화두란 법도 나왔단 말입니다. 천재적인 분들이나 과거전생에 업장이 가벼운 분들은, 마조나 임제나 백장같이 그냥 바로 직지인심이라. 그냥 바로 내가 부처란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범상凡常한 사람들은 그 여러 가지 잡다한 정보과다 시대에서는 좀처럼 우리 마음을 통일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이른바 삼매참선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때 가장 쉬운 방법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참선할 때도 병에 많이 걸립니다. 참선통이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화두에 따르는 병은 있는데, 병을 다스리는 법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참선할 때 상기上氣가 되고 여러 가지 병이 많지 않습니까? 병 다스리는 것을 부처님 법으로 하면 참 쉽습니다. 이것저것 다 놔 두고서 염불하면 다 고쳐집니다. 머리가 상기되어서 곧 깨질 듯해도, 의심하는 마음을 놓고서 그 천지 우주가 무량의 공덕을 갖춘 부처님으로 충만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할 때면 다 풀립니다.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는 행복감이라든가 몸도 마음도 가볍고 그런 것을 느껴야 되겠지요. 이른바 법희라, 법에 대한 기쁨도 없이 공부하기는 곤란스럽습니다. 법희라는 기쁨도 극락세계의 우리 이상향, 그 장엄한 세계 모든 것이 다 원만히 갖춰진 우리 고향에다 마음을 두고 항시 생각할 때 우리 갈등은 바로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미타불은 영원한 무생청정보주명호라, 이름자체에 일체 공덕이 갖춰져 있어서, 마음만 모아지면 참선병이라든가 세간의 병을 다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같은 사람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때그때 곤란스러울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또 더러는 무던히 많이 살았으니까 생명이 혼수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도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지속시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다 풀려갑니다. 이 우주란 것이 그 부처님의 공덕으로 충만해 있어서, 정말로 마음이 부처님한테 모아지면, 차를 타면 차 엔진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있고, 바람 불면 바람소리도 나무아미타불하고 있고 말입니다. 시냇가에 가면 시냇물도 나무아미타불, 신묘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지 마십시오. 소리 낼 때는 내도 좋고 소리 내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그 나무아미타불 소리를 나쁜 귀신들은 제일 두려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우리한테 침범을 못합니다. 동시에 선신들은 법을 지키려고 해서,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고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나 가장 소중한 공부방법이, 또는 우리 마음을 가장 쉽게 통일시키는 방법이, 바로 염불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법희라, 법에서 느끼는 행복, 또는 선열이라, 마음이 통일되면 통일된 데서 느끼는 행복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꼭 소리를 내야만 하고 안내야 하고 그런 한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소리내면 낸대로 좋고 또는 안내면 안낸대로 좋고 또는 기왕이면 고기도 안먹고 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고기먹고 싶으면 먹으면서 해도 괜찮습니다. 기왕이면 고기 안먹고 계행지키면서 하면 훨씬 효험이 있습니다. 남하고 싸울 때도 염불하면 좋고 말입니다. 어느 때나 하다보면 자기 본래 마음자리로 차근차근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그 순간 찰나도 놓치지 마시고 우리가 필경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 바로 극락세계에 마음을 두셔야 합니다. 어느 때나 극락세계는 꼭 가야하는 것이고 우리가 깨달아버리면 바로 이대로 이 자리에서 극락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다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극락세계의 이미지를 놓치지 마시고,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염불해서 다시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2000년 11월 4일, 서울 동산반야회 초청법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