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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2. 금륜

금륜 5호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로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저 뒤에 모신 부처님(법좌 뒤 괘불을 가리키시며)은 아미타부처님이십니다. 관세음보살님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이마에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께서 이렇게 손을 드시는 것을 가리켜서 인계印契라고 합니다.

인계는 하나의 표징表徵인데 이렇게 드시는 것은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하는데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로 곧 중생들한테 “그대는 관세음보살인 나를 의지하면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느니라.”하시는 뜻입니다. 오로지 중생을 온전히 감싸고 보호하는 표징으로 이렇게 위로 드는 것입니다. 또 한쪽 손을 이렇게 아래로 내려서 밖으로 향하게 드시는 것은 여원인輿願印이라 합니다. 줄 여輿자 원할 원願자로 “중생 그대들이 나한테 바라는 것은 모두를 다 주겠노라.”하는 인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불상을 보실 때는 이렇게 의미를 알고 보시면 의의가 더 깊어지시겠습니다. 즉 이렇게 드는 것은 무외시인, 두려움과 공포심을 다 제거해서 아늑한 부처님의 품안에 안는 표징인 것이고 이렇게 아래로 손을 내려서 밖으로 내미는 것은 중생한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어느 때고 조금도 주저없이 생명까지도 주겠다는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법화경 품수品數가 28품입니다. 그 가운데서 제 25품이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입니다. 여러불자님들, 관세음보살보문품 다 아시지요? 관음경이 관세음보살보문품입니다. 관음경을 보면, 모두를 다 중생이 원한대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바라면 아들을 태어나게 해주고 딸을 바라면 딸을 태어나게 해주고 재산을 바라면 재산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너무나 속俗스럽고 또 중생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달라는대로 주시면 부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모두를 다 우리 중생이 바라는 대로 주신다는 보장을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속스러운 것 같지만 부처님의 대자대비, 하나에서부터 백까지도 중생을 위하시는 부처님 자비를 생각할 때는 부처님의 깊은 자비에 우리가 감격할 따름입니다.

제 말씀을 들으시고 나중에 관음경을 한번 더 보십시오. 이것저것 우리 뜻을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원만히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본뜻은 인생고를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중생계가 고통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생고를 떠나는 데서 불교의 대강령大綱領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인간 세상은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더러는 재미도 상당히 있고, 무엇이 성취가 되거나 또 가족을 구성하여 부부가 함께 살며 자식을 낳고 사는 것이 다 재미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도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모두가 또 고생입니다. 잠시간 안락하고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고생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유固有하거나 고정적인 안락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생로병사 아닙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라, 우리가 태어날 때도 사실은 부모님께서 얼마나 고생고생해서 태어납니까? 생명을 걸고서 자식을 분만分娩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고생스럽고 또는 낳기 전에 어머니 배속에서 태아가 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합니까?

인간으로 어머니 태胎에 안 생겼으면 그런 고생이 없을 텐데 태안에서 그 갑갑한데서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 않겠습니까? 또 날 때 고생이라, 낳아놓으면 또 낳자마자 죽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목숨이란 것은 그야말로 소수어少水魚라, 적은 물에 담겨사는 고기, 나날이 줄어가는 물에서 사는 물고기나 똑같은 것이 우리 목숨입니다.

하루 살면 하루 산만큼 죽어가는 것 아닙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결코 노소부정老小不定이라. 정해있지 않는 것 아닙니까? 늙었다고 빨리 죽는 것도 아니고 젊다고 해서 늦게 죽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결국은 죽어가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소수어라. 적은 물에 담긴 물고기나 똑같습니다. 도소양이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걸음걸음 죽음길입니다. 아무리 잘 산다해도 결국은 죽어간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우리 중생들은 허망虛妄한 것에 팔려서 그런 것을 깊이 못 느끼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생은 무상한 길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는 고생뿐이라, 사실 참다운 안락安樂은 없습니다. 우리가 속아서 안락스럽다, 행복스럽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사바세계는 인생고 뿐이지 안락은 없습니다. 재미스러운 것도 모두가 고苦가 근원이 되어서 순간 찰라 우리의 착각으로 안락스럽게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도 이런 인생고를 떠나는 데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제법문四諦法門 같은 것도 온전히 인생고를 떠나는 법문입니다.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되겠지요.

오늘은 결제일結制日입니다. 결제라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한테는 정말로 피가 약동하고 보람있고 자기신명自己身命을 내걸고 공부할 수 있는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님네 뿐만 아니라 우리 재가불자在家佛子님들도 결제하고 그럴 때는 자기 생활을 재검토하고 매서운 참회를 해야 합니다. 내가 과연 내 인생을 최선으로 살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인생을 최선으로 산다는 것은 성자의 길을 따라서 산다는 것입니다. 성자는 인생을 바르게 산 가장 표본적인 분들 아니겠습니까? 석가나 예수나 성자의 길이란 조금도 허투루 살지 않습니다. 그런 성자의 생활을 표준으로 삼아서 자기 생활을 재검토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부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허방(함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즉 엉뚱하게 허방에 빠져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 허방의 한 가지는 암중선暗中禪입니다. 암중공부라, 암중모색暗中摸索한다는 말입니다.

참선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참선은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본래 자기 면목자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참나가 무엇인가? 참나를 깨치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것도 방법이 있는 것인데 방법없이, 또는 방법을 모르고 덮어놓고 공부합니다.

참선의 방법에는 대체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선지식들이 문제의식을, 화두話頭를 주면 화두에다가 온전히 혼신의 힘을 다해서 화두를 의심합니다. 그러한 방법외에 또 한가지는 묵조선黙照禪이라 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본래가 부처인데 새삼스럽게 의심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본래 부처니까 그대로 믿고 가면 되지, 의심이란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 의심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해서 잠자코 마음을 비추어보는 방법입니다.

또 한가지는 자성선自性禪이라. 우리 본성을 그대로 믿고 차고 나가는 것이 자성선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 세가지 방법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반복 말씀하면 선지식들이나 선배들이 우리한테 아는 문제를 주면 문제에다 의심을 품고 그야말로 자기의 온 정력을 다해서 의심을 풀어가는 것이 화두공안선話頭公案禪입니다. 또 한가지는 의심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부처님 말씀이나 도인 말씀을 들어보면 본래 부처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백퍼센트 믿고 나가서 정진精進하면 그만이지 의심을 품을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이것을 잠자코 자기의 본래 마음을 비추어본다해서 묵조선이라 합니다.

또 한가지는 자성선입니다. 자성이란 말을 여러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자성이란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인데, 자성은 우리 본래 마음인 본성本性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성을 잘 모릅니다. 내 본성을 내 마음이지 않는가, 이렇게 어렴풋이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성이 내 마음이면 내 마음은 어떤 것인가. 내 마음의 깊이는 얼마나 깊고 또 내 마음은 얼마나 넓은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의 모양이 만들어지는 듯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음이라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면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또 마음깊이도 부박浮薄합니다. 옹졸한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좁습니까? 또 마음이 깊은 사람은 한도 끝도 없이 묵직하여 그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도록 깊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사람이 성인입니다. 이 세상의 신비롭고 부사의한 것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부사의한 것은 역시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헤아릴 수 없단 말입니다. 자기 마음도 금방 남 좋아했다가 또 조건이 바꿔지면 금방 싫어합니다. 내외간도 같이 만날 때는 서로 좋아하니까 당연히 만났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또 다른 여건이 생겨서 싫어지면 그때는 헤어지고 죽이기도 한단 말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사람 마음이 참 요물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불여의不如意하고 복잡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마는 그런 것도 모두 다 요망스러운 마음의 짓입니다. 마음의 탓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이 얇아서 그렇습니다. 마음 깊이를 알면 모르겠지만 모르니까 얇은 그대로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느끼고 또 마음이 앏은 탓으로 자기 몸뚱이를 꼭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시야視野가 짧으니까 우선 가까운 자기 몸뚱이만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러나 과거전생에 이와같은 몸이 있었을 것인가 생각할 때는 이와 같은 몸이 있지가 않습니다. 소박한 사람들은 과거에 이와 같은 몸이 있고 죽어서 내생에도 이와 같은 몸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금생에 받은 이 몸은 과거 전생의 업業 따라서 금생에만 받은 것입니다. 어디에도 똑같은 그런 몸이 없습니다. 내생에 가더라도 금생에 지은 업이 과거 전생에 지은 업과 똑같아서 똑같은 몸을 받겠습니까? 내생가면 또 다른 몸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결제結制할 때는 그런 것 저런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라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가,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을 것인가? 마음 잘못쓰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별스럽고 요망스러운, 여러 가지 혼란스러움을 다 야기시킵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범부凡夫입니다. 범부가 사실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전생에 자기가 좀 지은 바가 있어서 군수도 되고 도지사도 되고 대통령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자기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참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 사람은 성인聖人입니다. 참사람 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을 마십시오. 참사람 되는 것이 인간의 가장 바른 길입니다. 정도입니다. 참사람이 안되면 그대로 말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몇 생을 다시 태어나고 해도 역시 꼭 참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마음의 근원 자리는 바로 참사람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근원 자리는 바로 성자의 마음자리입니다.

우리가 잘못 배우고 잘못 버릇 붙여놔서 금생에 이상한 짓을 해서 마음을 좁고 옹졸하고 얕게 쓰는 것이지 우리가 마음의 깊이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마음의 깊이가 한도 끝도 없어요. 마음이 물질같으면 다 깊다 얕다 하겠지만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어서 깊이도 한도 끝도 없습니다. 무한의 깊이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얼마나 넓을 것인가. 아까 입정入定시간에 여러분들이 하신 바와 같이 마음은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바로 허공虛空입니다. 한도 끝도 없단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휑하니 크기만 크고 내용이 부실하면 별것도 아니겠지요. 그러나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생명, 이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이요, 하느님이요, 그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것이 어디 별도로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도 끝도 없는 생명 자리가 바로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를 보나, 또 다른 복음서를 보나, 그렇게 하느님 말씀이 되어 있어요. 우리 중생들이 잘못 알아먹기 때문입니다. 중생들더러 󰡒그대 마음이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하면 중생들이 알아먹겠습니까? 못 알아먹을 테니까 이래저래 방편을 써서󰡒이뭐꼬󰡓“무무󰡓그러는 것이지, 그분들의 본뜻은 한도 끝도 없는 마음 자리가 바로 부처님이요 참다운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하고 경을 보고 한다하더라도 암중모색으로 덮어놓고 󰡒이뭐꼬” “무무󰡓할 것이 아니라, 도인들이나 부처님의 본뜻은, 마음 자리 그대로 바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도 그러시고 육조 혜능스님도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달마스님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신 것은 문자를 배우지 말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문자의 뜻에, 글의 뜻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근본 마음 자리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이 리입행입理入行入이라 하셨습니다. 리입행입이라는 말씀이 달마스님 법문의 요체要諦입니다.

그래서 후대에는 여러 가지로 고증考證을 밟아서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고증을 해서 그전에 달마스님이 무슨 저술을 냈다고 했던 것들은 모두 달마스님한테 가탁假託해서 붙인 것이고 달마스님의 참다운 법문은 리입행입이라고 했습니다. 이입理入은 무엇인고 하면 다스릴 리理자 들 입入자, 이치로 해서 먼저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덮어놓고서 우리들에게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즉, 문자는 다 덮어놓고, 참선하고 벽만 바라보고 믿으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치로,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사조도신四祖道信 스님도 말씀하시기를, 공부를 하려면 먼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여실하게 반야바라밀을 공부하고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서구의 기독교 역사를 본다하더라도 기독교의 신학자들 가운데도 이론과 실천 중에서 어디에다 중점을 둘 것인가 해서 종교에다 더 역점을 둔 신학자도 있고 또는 철학에다 역점을 둔 분도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라는 문제를 여러분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철학이란 것은 인생과 우주의 근본 도리를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 철학이지 않겠습니까? 또 종교는 그 자리를 바로 생명으로, 그 자리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천, 철학과 종교가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론적인 면은 철학, 실천적인 면은 종교,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그러면 이론적으로는 아까 말한 것과 같이  불성, 자성自性 또는 도道다 뭐다 여러 가지로 말씀이 되겠지요. 그러나 자성이다, 불성이다, 진여다, 그런 것은 이론인데, 거기에 그쳐 버리면 생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 그것은 생명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方便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생생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아닙니까? 아무리 우리가 교학을 많이 배워서 불교 학자가 되고 무엇이 된다하더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불교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참다운 공부가 되고 성인聖人이 됩니다. 가령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왼다 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됩니다. 그냥 이론으로 나무아미타불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내 마음의 본성이다고 이렇게 말은 쉽겠지요.

 그러나 이론적으로만 해서는 그것이 참 맛이 없단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자성미타自性彌陀라, 내 생명의 본체가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간절히 믿고, 아미타불에 의지해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보통 내 마음이라 할 때의 그 마음은 좁지만, 마음의 본 바탕은, 근원은 부처님과 더불어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의 넓이도 천지 우주를 다 그 마음속에 담아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잘 생각하십시오. 모양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모양이 있으면 한계가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모양이 있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모양이 없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제약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도 끝도 없습니다. 깊이도 한도 끝도 없고, 넓이도 한도 끝도 없고, 허공과 더불어서 같고 허공과 더불어서 우리 마음이 하나입니다.

내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마음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 마음은 지금 좁지만 본래 내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사람은 욕도 잘하고 나쁜 짓도 하고 해서 저 사람마음은 본래 좁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 마음이나 누구마음이나 똑같습니다. 석가모니 마음이나 달마스님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마음은 똑같습니다. 모양이 없어서 비교할 수가 없어요. 모양이 있으면 비교가 되겠지만 모양없는 것이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물질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교할 수도 없으나 내가 내 마음이 있어서 살아 있듯이, 마음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끝도 가도 없이 깊고 넓고 한도 끝도 없는…. 그러면서도 만덕萬德을 갖춘 그 자리가 바로 마음 자리입니다.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이 고구정녕苦口叮嚀으로 말씀하셨지만 모두가 다 마음자리를 풀이한 말씀입니다. 마음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공덕이 많은 것인가? 그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한 법문이 팔만사천법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문 가운데서도 직통으로, 방편가설方便假說은 쉬어 놓고서 그냥 마음만 오로지 공부해서 깨닫는 공부가 이른바 참선 공부입니다.

그리고 우리 불자님들 생각하실 때는 “스님네들은 복이 많아서 한 철이고 두 철이고 공부하겠지만 우리같은 재가불자들은 그렇게 안되지 않는가” 이러한 생각을 절대로 마십시오. 또 스님네들 가운데서도 “내가 사회에 진 빚도 많고 일반사람들한테 진 빚도 많은데 내가 선방에만 앉아 있으면 봉사나 그런 것을 전혀 못하니까 더욱 더 빚만 지고 있지 않는가” 이런 생각도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가령 우리가 선방에서 공부한다고 합시다. 선방에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방밖에 있는 저 사람이나 선방 안에 있는 나나 마음자리는 똑같습니다. 한 마음입니다. 더 확실히 말씀드리면 우주전체가 순수한 하나의 마음입니다. 화엄경 도리나 법화경 도리나 다 그런 걸 말씀했습니다.

우주 전체 모두가 다 한 마음이라, 그것이 이른바 불교말로 해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그 우주 모두가 다 한 마음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마음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유심론唯心論입니다. 물질이 명명백백히 있는데, 어째서 모두가 다 마음뿐인가?

영가현각永嘉玄覺대사가 한 말씀이 있어요. “몽리명명유육취夢裡明明有六趣”라, 꿈속에서 보니까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다 있지만,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깨달은 뒤에 볼 때는 천지 우주가 다 비어 있단 말입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물질이라는 찌꺼기가 본래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심심미묘甚深微妙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왜 그런가하면 불교란 것은 소박한 상식으로는 다 알 수가 없어요. 눈에 안 보이는 생명 자체,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그런 존재를 다 포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긍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눈에 보이는 존재는 사실로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지 없단 말입니다. 왜 없는 것인가, 인연따라서 잠시간 우리가 착각할 뿐입니다. 존재라는 것은 이른바 제법諸法이 공空입니다. 공부할 때 몸이 찌뿌둥하고 무리가 생기고 할 때는 “이 몸뚱이, 이 몸뚱이가 본래로 비어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본래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50킬로, 60킬로 나가는 몸뚱이가 왜 비었다고 하는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품으시겠지요? 이 업장많은 중생이 생각할 때는 60킬로, 70킬로하는 중력을 느끼지마는 도道를 통한, 신통할 수 있는 분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착각으로 해서 무게를 느끼는 것이지 성자들은 삼명육통三明六通, 즉 자기 몸도 마음대로 하는 신통이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정말로 몸이 꽝꽝한 물질이어서 어떻게 다른 것으로 변동할 수 없고 또는 무게가 50, 60킬로가 되면 하늘로 떠서 올라가겠습니까? 실제로는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통을 하면, 본래 비어있는 본래없는 자리를 체험體驗하기 때문에 신통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욕심만 떠나버리면 발이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깊이도 한도 끝도 없고 신통도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나쁜 버릇 때문에, 욕심을 부리는 버릇, 또 진심嗔心, 성내는 버릇 때문에 무게를 느끼고, 꼭 한계 내에서 스스로 구속당해서 산단 말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더라도 암중모색으로 덮어놓고 화두로써만 애쓰고 의심하면, 얼마 못 가서 상기上氣가 됩니다. 기가 올라서면 그때는 잘 못고칩니다. 화두를 놔 버려야지, 안 놓으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두를 드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에, 화두를 통해서 의심이 없는 자리를 빨리 느껴야 됩니다.

화두를 빨리 타파打破해야 됩니다. 화두라는 것은 백날 의심하고 있으란 것이 아닙니다. 빨리 타파해서 우리 자성 자리, 불성佛性 자리를 빨리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달마스님이나 육조혜능스님이나 마조도일스님이나 임제스님이나, 쟁쟁한 조사에게는 화두란 것이 없어요. 저 뒤에 중국 송宋나라 때 사람들 근기가 약하니까, 임시로 사람들에게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화두가 생긴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그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본래 진여불성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그 진여불성이 무엇인가, 그 근원을 의심해야지 상대적인 상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 의심하면, 한도 끝도 없이 마음만 괴롭고 상기가 됩니다. 이와같이 그런저런 도리를 모르고서 닦는 것이 이른바 암중선暗中禪입니다. 암중모색하는 것란 말입니다. 또 한가지는 문자선文字禪이라, 경을 좀 배워서 알기는 제법 안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을 백날 따져 봐도, 우리 자성, 우리 불성이 밝아지지 않습니다. 갈등만 생깁니다. 니체의 철학, 스피노자의 철학, 칸트의 철학, 헤겔의 철학 등, 철학도 얼마나 많습니까? 위대한 한 철학자의 이론 체계만 터득하려 해도 몇 십 년 걸립니다. 알아본다 해도 그걸로 해서 인생 문제가 해결이 안돼요.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은 무엇인가? 인생과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도저히 그런 것 가운데서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팔만사천경을 그야말로 통달해 버린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 공부가, 참선이 깊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문자만 배우고 문자만 따지는 것을 문자선이라 합니다.

또 한가지는 야호선野狐禪입니다. 들여우란 뜻입니다. 여우란 놈은 꾀가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안 보고도 봤다 하고, 어디만치 공부가 안되었어도 공부를 했다 하고, 자기 스스로 어느 경계에 이르지 못하고도 경계에 이르렀다 하고, 즉 말하자면 미증未證을 증證으로, 증명하지 못한 것(未證)을 증명(證)했다 하고, 깨닫지 못한 것(未悟)을 깨달았다(悟)고 하는 그런 식의 거짓선이 말하자면 야호선입니다. 들 야野 여우 호狐자, 여우란 놈이 꾀가 많아서 거짓부리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 암중모색하는 그것과 문자로만 따지는 문자선과, 또는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는 야호선, 이 세 가지가 참선 공부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병폐입니다.

따라서 여러 불자님들께서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선방에서 공부하는 분들도 사회봉사를 못하고 내가 빚만 지고 있지 않는가, 부모님이나 일반사회인들한테도 공연히 빚만 지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으로 자책自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한계가 없이 하나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마음입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마음이 모양이 있고 이것이 물질 같으면 한계가 있겠지요. 네 마음, 내 마음 다르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물질이 아닌 것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모양이 없는 것은 비교가 안됩니다. 모양이 있어야 비교가 되는 것이지, 따라서 네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우리 스스로 업을 덜 짓고 더 짓고 해서 우리가 구분하는 것이지 마음 자체는 구분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또는 우주만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이나 내나 해나 달이나 그런 것도 모양이 산이고 모양이 물이지 그것들의 순수에너지, 순수한 생명은 똑같이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불교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아닙니까? 불교는 유심론唯心論입니다. 모두가 마음뿐이라는 생각을 항시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뿐이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마음, 개는 개마음, 산은 산마음, 해는 해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산이 있으면 산마음은 산신山神이고 물이 있으면 물마음은 용왕龍王이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주가 오직 끝도 가도 없이 광대한 마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과 내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석가모니 마음과 내 마음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석가모니는 깨달아서 한도 끝도 없는 우주 마음을 그대로 깨달아서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고 우리 중생들은 깨닫지 못해서 꼭 내 마음도 좁은 내 몸뚱이, 뇌腦나 심장이나 어딘가에 내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착각錯覺하고 있는 것이지 마음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우주 마음이나 내 마음이 다 하나의 마음입니다. 우주가 오직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에 선방에 앉아서 마음을 닦아도 바로 우주를 닦는 것입니다. 우주를 정화淨化시킨단 말입니다. 또는 우리 재가불자님들이 “나는 선방에 앉을 복도 못되고 나는 여러 가지로 내 스스로 일상생활에서 직업도 가지고 해야하니 나는 참선을 못하겠구나”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마음공부란 것은 어느 때 어디서나 다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선방에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아까 말씀드린대로 마음의 본바탕을 떠나 덮어놓고 의심을 한다든가 암중모색한다든가 또는 문자로만 따져서 배운 것을 풀이하고 앉았다든가 그러면 사실은 선방에 앉은 가치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상기병에 걸려서 평생 머리가 뜨거워서 고생한단 말입니다. 그 대신 속가의 불자님들이 우리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옆사람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닌가하고 닦으시면 선방에서 공부를 안 하시고 언제 어디서 공부하셔도 우리 마음의 본래자리를 안 놓치면 참선이 됩니다. 사실은 다 부처인 것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변질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겉에 허상虛像이 못나게 보이는 것이지 그 사람의 구성요소는 다 마음입니다. 우리 몸뚱아리란 것이 산소나 수소나 질소나 그런 요소로 안돼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산소나 수소나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전자 양성자 그런 원자로 돼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원자는 무엇인가. 전자나 양성자 그런 것은 현대과학이 측정을 못해요. 어떻게 진동하는가, 진동상황에 따라서 마이너스 플러스 그렇게 또 전자 양성자도 정하는 것이지 정밀한 것은 측정을 못합니다. 현대과학을 배운 분들은 아시는 바와 같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 미세微細한 데 가서는 현대과학도 정밀하게 측정을 못합니다. 정확한 위치도 측정을 못하고 정확한 운동상황도 측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전자고 양성자고 그런 것은 통계적으로 확률적으로 어떻게 진동하는가, 마이너스 플러스, 마이너스 전기가 흐르면 전자고 플러스 전기를 내면 양자고 그러는 것이지 그것이 고유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에서는 미세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단지 우주에너지의 하나의 진동일 뿐이다. 이렇게만 안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주에너지는 무엇인가, 현대과학으로써는 알 턱이 없습니다. 왜 알 턱이 없는가 하면 그 에너지의 실상은, 본래 생명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현대과학이 어떻게 측정하겠습니까? 시간성, 공간성이 있는 물질만 현대과학은 측정을 합니다. 아무리 애써봐야 더 이상은 못 들어갑니다. 물질의 정체는 부처님 가르침같이 모두가 다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생명뿐입니다.

우주는 바로 생명뿐입니다. 우주가 바로 생명뿐이라는 말은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왼다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이 저쪽 하늘 높은 데 계신다, 애써 내가 부르면 타협적으로 나한테 와서 부른 만큼 공덕이 되겠지”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공덕이 되지요. 그 공덕이 되나 그 공덕은 작은 공덕입니다. 큰 공덕은 못 됩니다. 어떤 공덕이 큰 공덕인가. 아미타불과 나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실 둘이 아닌 것입니다. 둘이 아닌 것인데 우리가 그 관계를 잘 모르니까 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인데 하나의 마음자리인데 우리 스스로가 국한局限을 세우고 한계를 세우는 것이지 본래의 자리에서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이른바 실상관實相觀입니다.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입니다. 우주의 본래 모습 생긴대로 염불해야 실상염불입니다. 실상염불은 바로 그때는 염불선念佛禪이 되어 버립니다.

기왕이면 염불하더라도 염불 참선이 하나가 되는 염불선을 하시고 싶겠지요. 염불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 우주의 생긴 그대로 인정하시고 공부하면 그것이 실상염불이 됩니다. 그러면 동시에 염불참선이 됩니다. 우리가 가령 기독교를 믿어서, 기독교를 믿어도 불교와 같은 선이 유행하고 있는데 “참선을 좀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마음먹은 사람은 그렇게 또 할 수가 있습니다. “오, 주여, 하느님” 역시 참선을 합니다. 우주의 실상을 그대로 관조하니까 말입니다.

사실은 옛날 그리스의 위대한 성자들은 하나의 도리道理에다가 우리 마음 초점을 맞추었어요. 플라톤Platon의 이데아Idea라든지 플로콜로스Plokoros의 일자一者라든가 말입니다. 일자라는 것은 바로 하나의 생명자리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다 그랬습니다. 또는 칸트Kant의 물자체物自體라든가 말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무엇이다, 저것이 무엇이다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현상적으로 헤아리는 것이지 참다운 존재자체가 아닙니다. 존재 자체라는 것은 우리 중생은 보지를 못합니다. 시각이 짧아서 말입니다. 성자가 돼야만 비로소 존재의 실상을 훤히 느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 선방에서 공부를 안한다 하더라도, 어디서 언제 공부를 하신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래의 마음자리 즉 생명자리를 안 놓치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참선공부입니다. 선방에 있다 하더라도 본래本來의 자리를 놓쳐버리면 그것은 참다운 참선공부가 못된단 말입니다.

어느 때 어느 처소處所나 어느 모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주인이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선방에 있다하더라도 내 공부, 내가 하니까 나만 좋은 것이지 사회에는 봉사도 안하고 빚만 진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주宇宙가 하나의 마음자리라서 토굴 속에서 혼자 공부한다하더라도 마음 닦고 있으면 그때는 우주를 정화시킨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조금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우주를 정화시키는데 어떻게 우리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재가불자님들이 집안에 계신다하더라도 그 마음자리, 보는 것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생각하시면 벌써 훌륭한 참선이 됩니다. 아까 외우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에서 “내외생멸상內外生滅相인 무수중생無數衆生의 무상제행無常諸行을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인 달하여 미타彌陀의 일대행상一大行相으로 사유관찰思惟觀察할지니라.” 이것이나 저것이나 바람부는 것이나, 물이 흘러가는 것이나 다, 아미타불의 행동범위란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느 것도 부처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벌써 훌륭한 참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다 있는 것이지 어느 처소 어느 상황에서 해야만 공부가 잘 된다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깊은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불자님들이 비록 집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역시 고요한 처소에서 이틀이나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또는 할 수 있으면 3개월 동안 그렇게 그렇게 한 번씩 해보셔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야 마음 공덕을, 득력得力을 제대로 얻어서, 깨달아서 체험할  수 있단 말입니다.

세속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장애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공부가 안되는 것은 아니나 삼매에는 못 듭니다. 삼매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삼매에 든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이 하나의 장소에, 하나의 처소에 딱 모아져서 흔들리지 않아야 삼매입니다. 그렇게 들어가야 참다운 진여불성을 스스로 깨달아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들어 있는 무량공덕, 상주부동常住不動하고 영생불멸永生不滅하고 또는 만덕萬德을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을 스스로 수용해 쓴단 말입니다. 삼명육통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신통묘지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도인이 잘 안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깊은 삼매에 잘못 든단 말입니다. 세상이 하도 소란스럽고 근기가 약해서, 오랫동안 잘 참아야 할 것인데 말입니다.

150년 전에 간 인도의 라마크슈나, 그 분은 아깝게 52세에 가셨습니다. 여기 50넘으신 분들도 계시지요. 아깝게 52세에 가셨어요. 그 양반은 12년 동안 세상을 떠나서 산에 가서 오로지 그야말로 삼매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우주의 참다운 성품, 불성, 자성과 하나가 딱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그분은 학문은 전혀 안 배운 분입니다. 그러나 ‘비베카난다’라는 자기 제자가 학문적인 체계를 세웠어요. 그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통묘지를 부릴 수 있는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의 참다운 법성하고 불성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군데서 오로지 정진해야 됩니다.

3개월동안 참선공부 한다 하더라도 일주일 동안은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 밤낮으로 안자고 안눕고 하는 기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 재가 불자님들도 가끔은 그런 기회를 만드셔야 돼요. 부처님 가르침 믿고 마음 편하게 모두가 부처니까 좋지 않는가 생각하는 분도 좋아요. 그러나 그걸로 해서는 힘을 얻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부처가 안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부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기왕 될 바에야 최선을 다해서 금생에 그런 기회를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너무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마는 부처님 공부하실 때 꼭 일상삼매一相三昧라는 것을 기억해 두십시오. 일상삼매는 모두가 다 하나의 실상입니다. 둘이 있고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생명의 실상實相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일상삼매라고 어느 도인들이나 철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주의 실상을 안 놓치고서, 우주가 우리 중생이 보듯이 천차만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상이기 때문에, 실상에다가 마음을 두고서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것이 일상삼매고, 그 다음에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일행삼매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그 자리를 생각생각에 간단間斷이 없이 그대로 지속시킨단 말입니다. 참선의 교과서같은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라는 말씀이 여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리고 육조단경의 부촉품付囑品, 부촉품이라는 것은 결론같은 경이 아니겠습니까마는, 부촉품에 가서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부처님의 종종무량種種無量의 법을 통달하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證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도, 제가 여태까지 말씀한 것도 모두가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역설하고자 한 것임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 뿐만 아니라 사조도신四祖道信스님 달마스님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시고 강조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일일이 제가 예를 들어서 말씀드릴 수가 없으나 어느 도인들이나, 대승불교의 할아버지라는 마명馬鳴스님이나 또는 용수龍樹보살이나 또는 달마達摩대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다 법문과 글의 요지가 일상삼매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는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거기다가 마음을 두고 거기다가 잠시간 마음을 둬도 다른 것 생각하면 흩어져 버리겠지요.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이른바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상속시킨단 말입니다. 그것이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꼭 명심하셔서, 참선 선방에서 공부하시든지 또는 세속에 계시든지, 될수록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많이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고 주무시면 주무시는 그 동안에도 공부가 되어갑니다. 주무시는 그 동안에도 공부가 안되면 또 막 일어나자마자 눈뜨자마자 또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아차’하고 다시 챙기셔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생명자체가 금생에 있는 동안, 빨리는 못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임종臨終 때는 틀림없이 훤하게 확철대오廓徹大悟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불기 2544년(2000년) 11월 11일 (음력 10월 15일) 동안거 결재법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