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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3.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3.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우리 인간은 누구나가 다 고뇌와 빈곤이 없는 안락하고 풍요한 행복을 간구하고, 생로병사가 없는 영생(永生)의 이상향을 그리는 사무친 향수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화 현상은, 비록 깊고 옅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 한결같이 인생고(人生苦)의 구제와 진정한 자유를 그 구경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다만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의 고액(苦厄)을 구제함에는, 먼저 인간의 본질, 곧 참다운 자아(自我)가 무엇인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종교 철학 가운데서, 인간의 근본 바탕을 가장 철두 철미하게 밝히고, 영원한 안락의 경계에 인도하는 가르침이 불교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교의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일체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님의 거룩한 서원(誓願)과 부사의한 공덕으로 장엄된 이상향(理想鄕), 곧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너무도 생생하고 인상적으로 밝히신 경전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인데, 이는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극락세계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등 중생이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삼계의 차원을 넘어 선, 영원히 안락한 복지(福地)로서, 시간 공간과 인과율을 초월한 경계이며, 우리 중생이 필경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허명무실(虛名無實)한 방편 가설(方便假說)이 아니라, 엄연한 영생 불멸의 실존이며, 우리들의 올바른 수행으로 업장이 소멸할 때, 우리 스스로 보고 느끼고(感見) 누리는(受用) 상주 불변(常住不變)한 법락의 경계입니다.

정녕, 우리 중생은 본래의 자성이 아미타불이요, 우리가 본래 살고 있는 고향은 극락세계인데, 짓궂은 번뇌 업장에 가리워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지없이 생사고해에 방황하다가, 다행히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만나서, 비로소 참다운 자아와 진정한 고향인 극락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영원 불멸한 우주 자체의 대생명이 바로 부처님이요, 그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이며, 부처님의 자비 화신이 관세음보살이요, 부처님의 지혜 화신이 대세지보살입니다. 그것은 마치 무궁한 태허(太虛)에 음과 양의 이원(二元)이 원융하게 작용하여 만유가 생성하는 것과 비슷한 도리입니다.

우주 스스로가 그대로 신비부사의한 부처님이요, 우주에는 언제나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서원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외우며 부르는 것은,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상통하고 부처님의 가호를 입게 되는 깊은 인연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는 성불의 계기가 되고, 또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결정적인 선근이 되는 것이며, 여기에 부처님으로부터 베풀어지는 타력과 자기 수행의 자력이 아울러 감응하는 깊은 의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참다운 실상세계(實相世界)인 극락세계의 장엄 찬란한 경계를 흠모하고 동경하며, 우주 자신의 이름이요, 우리의 본래면목의 이름이기도 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생각하며 그 이름을 외우고 부르는 것은, 우리 범부 중생이 찰나찰나에 끊임없이 스스로 부처님을 자각하면서 부처가 되어 가는, 절실하고 안온한 성불의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에 아미타불과 극락세계의 실상을 여의지 않는 염불은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이요 보왕삼매(寶王三昧)로서, 바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여의지 않는 염불선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관(觀)과 염(念), 정(定)과 혜(慧)를 함께 쌍수(雙修)하는 심심미묘한 염불 공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선(念佛禪)은 불성에 들어맞는(契合) 천연자연한 수행법이기 때문에, 모든 수법(修法)을 종합 포섭하였으며, 종파(宗派를 초월한 가장 보편적인 행법(行法)일 뿐 아니라, 바야흐로 분열 투쟁의 역사적 위기에 직면한 불안한 현세대에 가장 알맞는 시기상응(時機相應)한 안락법문(安樂法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미타불과 극락세계를 말씀하신 경전은, 화엄경․법화경․열반경 능엄경 등 실로 이백 수십 부에 달하는데, 특히 화엄경의 입법계품에는 보현보살이 선재동자를 깨우치는 법문 가운데, “원하옵건대, 목숨이 마치려할 때 온갖 장애가 소멸되어 극락세계에 태어나 아미타불을 뵈올지이다”라고 찬탄하였고, 보적경(寶積經)에는 석존께서 아버지이신 정반왕에게 염불하여 극락에 왕생하기를 간절히 권하셨습니다.

마명(馬鳴)보살(불멸佛滅 후 600년경)의 기신론(起信論), 용수(龍樹)보살(B.C. 2-3세기)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娑論과 지도론(智度論, 또한 세친(世親보살(4-5세기)의 정토론(淨土論) 등에서도, 염불은 부처님의 무량 공덕과 근본 서원(本願)을 확신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불보살과 감응하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마치 순풍에 돛단 배와도 같이 수행하기 쉽고 성불하기 쉬운, 이른바 이왕이수(易往易修)의 행법(行法)임을 찬양하였습니다.

중국에서도 혜원(慧遠:332-414) 천태(天台:583-597) 선도(善導:613-681)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중봉(中峰:1263-1323) 연지(蓮池:1536-1615)대사 등, 염불을 창도하여 자행화타(自行化他)한 선지식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원효(元曉:617-686)대사와 같이 염불을 주종으로 한 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장(慈藏:600년경) 의상(義湘:625-702)대사 등과, 고려의 대각(大覺:1055-1101)  보조(普照:1158-1210) 태고(太古:1301-1382) 나옹(懶翁:1320-1376)대사 등과, 이조에서는 함허(涵虛:1376-1433) 서산(西山:1520-1604) 사명(四溟:1544-1610)대사 등이, 선(禪)과 염불을 융합한 선정일치(禪定一致의 견지에서 염불을 역설하였습니다.

서산대사는 그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마명(馬鳴)과 용수(龍樹)가 다 높은 조사이면서 염불 왕생을 권장하였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염불을 안할까 보냐”라고 간절히 염불을 권면하였습니다.

아미타불은 다만 극락세계의 교주이실 뿐 아니라, 법신․보신․화신의 삼신을 겸전한 삼세(三世) 일체불(一切佛)의 본체로서, 그 영원한 생명과 자비를 위주로 할 때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요, 무한한 지혜 공덕을 위주로 할 때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며,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위주로 할 경우에는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래서 여러 경전에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의 명호(名號이름)가 나오나, 필경 아미타불인 동일한 부처님의 화도(化導)의 인연에 따른 공덕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용돌이치는 현대 문명의 폭류 속에서, 비록 우리들의 착잡한 인연이 성불의 대도를 직행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 중생이 필경 돌아가야 할 고향인 극락세계와 본래 자성(自性)인 아미타불을 염원하는 보편적인 인생관과 그에 따른 성실한 수행은 한사코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고해 중생은 일체 현상이 모두 몽환포영(夢幻泡影)과 같은 허망 무상한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신인(信認)하고, 매양 최상 행복한 극락세계의 영상을 지니며, 최상의 개념인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생활은, 우리 자신을 정화하여 그만큼 성불의 경계에 다가서게 하며, 아예 영생(永生)의 대도에서 물러서지 않는 불퇴전의 결정 신심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염불 생활은 현대인의 불안 의식과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 데도 다시 없는 청량제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잃어 버린 진아(眞我)의 회복과 분열된 조국의 광복(光復)과 인류의 영원한 평화 복지(福祉)를 위한 가장 근원적인 최상의 길이기도 합니다.  

큰 선근과 거룩한 복덕은 무엇인가?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것은, 바른 깨달음을 얻어 위없는 진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성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갖 번뇌를 소멸하고 정각을 얻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듯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도 또한 경전의 말씀과 같이,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한 큰 선근(善根)과 거룩한 복덕(福德)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염불인 것입니다. 우리 본래 자성이 부처님이요, 아미타불이란 부처님의 명호(이름)이기 때문에, 염불이란 곧 자성불(自性佛)을 생각하고 자성불로 돌아가는 법이자연(法爾自然)의 수행법인 것입니다.

또한 염불은 부처님의 본원에 들어맞는 수행법일 뿐 아니라, 삼세 모든 부처님들께서 한결같이 권장하고 기억하여 호념(護念)하시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다른 수행법에 비하여 불보살의 가피가 수승함은, 여러 경전이나 수많은 영험록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서도 석존께서 “나는 일찍이 수행할 때에 염불로써 무생법인에 들었느니라(我本因地, 以念佛心, 入無生忍)” 하셨고,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염불하는 이는 모든 사람 가운데 향기로운 연꽃이니라(若念佛者, 當知此人, 是人中芬陀利華)”하셨습니다.

그래서 염불은 진여 자성(眞如自性을 여의지 않는 자성선(自性禪)이라고도 하고, 또한 모든 삼매의 왕이라 하여 보왕삼매(寶王三昧)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염불삼매는 모든 법을 다 포섭하니

염불 공부를 망념(妄念)이 섞이지 않도록 염념상속(念念相續)하여, 일심으로 수행함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이 성취되어 마음이 선정에 들고, 혹은 부처님이 앞에 나타나시며, 또는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에 들어맞음(契合)을 과성의 염불삼매라 한다.

염불삼매경에 이르기를 “염불삼매는 일체 모든 법을 다 포섭하였으니, 이는 성문(聲聞)․연각(緣覺)의 이승(二乘) 경계가 아니니라(念佛三昧, 則爲總攝一切諸法, 是故非聲聞緣覺二乘境界.)고 하셨습니다.  



염불과 선


선(禪)은 바로 부처님의 마음(佛心)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佛語)이니, 경전의 말과 문자에 걸리지 않고 마음을 밝힐 때, 선과 교는 본래 둘이 아닌 진여 자성(眞如自性)의 체용(體用)인 것입니다.

일체 만유의 근본 자성이 아미타불이요, 극락세계 역시 같은 자성인 청정심(淸淨心)으로 이루어진 경계이니, 마음이 오염되면 그에 상응한 삼계(三界:욕계․색계․무색계) 육도(六道: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에 윤회하는 고뇌를 벗어날 수 없으며,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오면 금생과 내세를 가리지 않고 상락아정(常樂我淨)한 극락세계의 청정한 행복을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염원(念願)하고 아미타불을 생각하며 그 명호(이름)를 부르는 염불 공부는, 진여 자성을 여의지 않는 참선 공부와 본래 우열이 없으니, 염불과 선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염불과 참선이 둘이 아닌 선정일치(禪定一致)의 뜻이 담긴 대표적인 법문은, 관무량수경의 다음 구절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하는 것이니, 일체 중생의 마음 가운데 들어 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에 부처님을 생각할 때, 이 마음이 바로 삼십이상과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를 갖춘 원만 덕상(德相)이니라. 그래서 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이루고, 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니라.” (諸佛如來是法界身, 入一切衆生心想中. 是故汝等想佛時, 是心卽是三十二相八十隨形好, 是心作佛, 是心是佛.)


저명한 선사들로서 선정일치(禪定一致를 주장한 분들의 법문을 몇 가지 소개할까 합니다.


염불의 공덕이 성취되면, 언제 어느 곳에나 아미타불의 참 몸이 앞에 나타나며, 임종시에는 구품(九品) 연화대에 영접되어 그 상품(上品)으로 왕생한다.

(念佛功極, 於日日時時一切處, 阿彌陀佛眞體冥現其前. 臨命終時, 迎入九品蓮臺上品往生.) 보조지눌普照知訥 스님(1158-1210), 고려 스님, <念佛要門>


아미타불의 청정 미묘한 법신이 두루 모든 중생의 마음에 계시므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다.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곧 마음이다. 아미타불의 명호(이름)를 끊임없이 분명히 생각하고 외울지니, 힘써 정진하여 그 공덕이 성취되면, 홀연히 분별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참 몸이 뚜렷이 나투신다.

(阿彌陀佛淨妙法身, 遍在一切衆生心地. 故云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亦云心卽佛, 佛卽心...阿彌陀佛名, 心心相續, 念念不昧...久久成功, 則忽爾之間, 心念斷絶, 阿彌陀佛眞體貞爾現前) 태고보우太古普愚스님(1310-1382), :고려스님, <太古庵歌>


마음은 바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끊임이 없고, 입은 부처님의 명호(이름)를 분명히 불러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이렇듯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면, 그 한 생각 한 소리에 능히 팔십억 겁 동안 생사윤회의 죄업을 소멸함과 동시에, 팔십억 겁의 수승한 공덕을 성취한다.


(心則緣佛境界憶持不忘, 口則稱名佛號分明不亂. 如是心口相應一念一聲, 則能滅八十億劫生死之罪, 成就八十億劫殊勝功德.) ③청허휴정淸虛休靜 스님(1520-1604):별호는 서산西山, 조선 스님, 『淸虛堂集』


오직 아미타불 지니고 다른 생각 없으면,

손 튀길 수고도 없이 서방 극락 가리라.

(一句彌陀無別念, 不勞彈指到西方.) 육조혜능六祖慧能 스님 (638-713) , <禪淨雙修集要>


선정과 정토가 같이 있으면,

마치 뿔 난 호랑이 같이

이승에는 남의 스승이 되고

다음 생엔 부처와 조사가 되리.

선정이 없고 정토만 있어도

만萬 사람 닦아서 만 사람 가니

다만 아미타불만 뵈옵게 되면

깨닫지 못할 걱정 어찌 있을까?

선정만 있고 정토 없으면

열 사람에 아홉이 미끄러지고

중음中陰 경계가 나투게 되면

별안간 그를 따라가고 말으리.

선정과 정토가 모두 없으면

무쇠 평상과 구리 기둥의 지옥

일만 겁과 일천 생에

믿고 의지할 데 하나도 없네.

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

現世爲人師 來生作佛祖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無禪無淨土 鐵床竝銅柱

萬劫與千生  沒箇人依怙


영명연수(永明延壽)스님 (904-975)


 염불과 참선이 같지 않다고 의심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참선이란 다만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보려 함이요, 염불은 자기 성품이 미타(彌陀)요 마음이 곧 정토(淨土)임을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니, 어찌 그 이치에 둘이 있으랴?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을 생각하고 염불을 하면, 현세나 다음 생에 반드시 부처님을 뵈오리라” 하셨으니, 이미 현세에서 부처님을 뵈옴이, 어찌 참선을 하여 도를 깨닫는 것과 다름이 있을 것인가?

아미타불 넉자를 화두 삼아, 자나 깨나 분명히 들어 쉬지 않고 한 생각의 분별도 나지 않는 데 이르면, 차서를 밟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뛰어오르리라.

(有自疑念佛與參禪不同. 不知參禪, 只圖識心見性, 念佛者, 悟自性彌陀唯心淨土, 豈有二理? 經云: ‘憶佛念佛, 現前當來, 必定見佛.’ 旣曰 ‘現前見佛’ 則與參禪悟道, 有何異哉? 但將阿彌陀佛四字, 做箇話頭, 二六時中, 直下提撕, 至於一念不生, 不沙階梯, 徑超佛地.) 천여유칙天如惟則스님(1300년경),  <天如則禪師普說>